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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에 도착했을 때 유승진은 여전히 두 눈을 감은 채 병상에 누워 있었다.안색은 몹시 창백했다.5년을 함께하면서도 저런 유승진의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나는 무심히 한 번 쳐다보았을 뿐이다. ‘죽지만 않았으면 좋겠네. 죽기라도 하면 괜히 재수 없을 테니까.’막 병실을 나서려는데, 뒤에서 유승진이 흐릿하게 눈을 떴다. 입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심하게 쉬어 있었다.“지유야.”나는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나는 평온했고, 유승진의 눈에는 깊은 고통이 담겨 있었다.“내가 그렇게 미워?”유승진의 눈시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유승진은 예전을 떠올렸다. 위염으로 앓거나 열이 날 때마다 임지유가 곁에서 간호했다.지난 세월 내내 나는 직접 밥을 지어 유승진을 챙겼다.덕분에 유승진이 위의 통증을 겪는 횟수도 차츰 줄었다.잠에서 깰 때면 침대 곁에 엎드려 잠든 임지유가 보였고, 내 손은 유승진의 손을 꼭 쥐고 있었다.그 모습을 볼 때마다 유승진의 마음은 조금씩 부드러워졌다.하지만 감정을 드러내면 안 된다고 여겼다. 내가 깨어날 때쯤이면 다시 기쁨도 화도 드러내지 않는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갔다.이제는 달랐다. 자신이 아픈데도 내가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자 유승진은 정말로 겁이 났다.나를 붙잡을 방법이 더는 떠오르지 않았다.그 생각만으로도 심장이 다시 찌르듯 아팠다.한편, 나는 서서히 붉어지는 유승진의 눈가를 고요히 바라보았다. 마음에는 어떤 파문도 일지 않았다.예전에는 수없이 많은 밤을 혼자 뜬눈으로 지새웠다.유승진의 잠을 방해할까 봐 서러움을 털어놓지도 못한 채, 나 역시 그렇게 울었던 밤이 셀 수 없이 많았다.‘하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이 있나?’유승진은 다른 여자와 밤새 통화를 이어 가면서도 내 기분은 한 번도 묻지 않았다.그제야 선명히 깨달았다. 용서할 수 없다는 마음보다 더 큰 건 증오였다.나를 마치 없는 사람처럼 대한 유승진이 미웠다. 가장 무력했던 밤, 나를 지구대에 홀로 남겨 두고 스토킹한 남
봄이 가고 가을이 왔다. 또 한 번의 사계절이 내 곁을 지나갔다.내게 시간은 해와 달이 뜨고 지는 일, 바닷물이 차올랐다가 빠지는 일에 지나지 않았다.어느새 일 년이 흘렀다.프랑스에서의 일과 생활은 오래전에 자리를 잡았다.내가 떠나온 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는 전혀 알지 못했다.유승진의 집안과 관련된 사람은 모두 연락처에서 지웠다.유승진을 다시 만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적어도 내 마음은 그 사람을 다시 보길 원하지 않았다.하지만 운명은 잔인할 만큼 얄궂었다.그날 퇴근해 집으로 돌아오는데, 멀리 누런 가로등 아래 쓸쓸한 사람 하나가 서 있었다.내 걸음이 멈췄다. 나를 발견한 유승진의 눈에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격한 감정이 소용돌이쳤다.자리를 피하려 했으나, 유승진이 거칠게 달려와 나를 끌어안았다. 따뜻한 품이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미안해...”사과의 말을 듣고도 잠시 믿기지 않았다.따지러 왔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사과부터 했다.나는 유승진을 가볍게 밀어냈다.“사과는 받을게.”그대로 돌아서 걸었다.옆을 스쳐 지나가려 하자 유승진이 내 팔을 붙잡았다. 나를 바라보는 눈동자가 흔들렸다.“지유야, 1년 내내 너를 찾아다녔어.”유승진은 씁쓸하게 웃었다.“네 직장에 찾아가도 담당자들은 보안 사항이라며 알려 주지 않았어. 장인어른과 장모님 댁에 갔더니 두 분이 빗자루를 들고 나를 내쫓으셨고.”“그래도 달리 방법이 없어서 복도에서 계속 기다렸어. 네가 어디 있는지 아는 사람은 너희 부모님뿐이었으니까.”유승진은 내 눈을 오래 들여다보았다.“네가 떠났을 때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어. 네가 왜 갑자기 파혼한 건지 몰랐어.”그 말을 듣자 내 몸이 미세하게 굳었다.유승진은 계속 말했다.“이제는 알아. 내가 지켜야 할 선을 몰랐고, 한설아를 챙긴다는 명목으로 오빠와 동생 사이에서 허용될 수 있는 범위를 훨씬 넘어섰기 때문이야.”“그래도 지유야, 이것만은 믿어 줘. 나는 한설아에게 다른 마음을 품은 적도, 선을 넘는 행
메시지를 읽은 유승진은 머릿속이 새하얘졌다.‘파혼?’‘지유가?’‘말도 안 돼.’두 사람은 어젯밤에도 웨딩드레스를 함께 골랐다.그런데 손끝은 이미 가늘게 떨렸다. 유승진은 불안과 당혹감에 휩싸인 채 임지유의 SNS 계정을 열었다.계정은 텅 비어 있었다. 맨 위에 고정된 파혼 공지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저와 유승진의 청첩장을 받으신 가족, 친지, 지인 여러분께 사과드립니다.][저희는 파혼했으며 예정된 결혼식도 취소했습니다.][모두 앞날에 좋은 일만 가득하시길 바랍니다.]그게 전부였다.유승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짧은 세 문장을 화면에 구멍이라도 낼 듯 오랫동안 노려봤다.유승진의 모습을 지켜보던 학생들이 서로 눈치를 살폈다.“유승진 교수님 왜 저래? 귀신이라도 본 것 같아. 엄청 충격받은 표정인데?”“누가 알아. 학점만 아니었으면 저런 위선자 수업은 안 들었어. 웃기지도 않아.”학생들이 수군거리던 중, 인문대 최연소 교수인 유승진이 모두가 보는 앞에서 갑자기 강의실 밖으로 뛰쳐나갔다.학생들만 영문도 모른 채 강의실에 덩그러니 남았다.교수가 수업을 내팽개치고 달아났다는 소식은 교내 커뮤니티를 다시 뒤집어 놓았다.온갖 추측이 쏟아지다가 한 학생이 글을 올렸다.[추측할 필요 없어. 우리 언니가 유 교수 약혼자의 친구인데, 오늘 아침 SNS에 파혼 공지가 올라왔대.][...]교내 게시판이 일제히 들끓었다....같은 시각, 유승진은 달리면서 약혼녀인 나에게 계속 전화를 걸었다.세 번의 연결음 뒤에는 차가운 안내 음성만 반복됐다.아무리 눈치가 둔한 유승진도 뭔가 크게 잘못됐다는 걸 알아차렸다.유승진은 나에게 쉴 새 없이 메시지를 보냈다.[SNS에 올린 글이 무슨 뜻이야? 지유야, 나한테 설명해야 하는 것 아니야?][도대체 왜 그래? 내가 뭘 잘못했는지 적어도 말은 해 줘야 하잖아!][지금 집으로 갈게. 우리 만나서 제대로 이야기하자.]마이바흐가 도로 위로 사납게 질주했다.집으로 향하는 내내 유승진의 손바닥에서 흐른
같은 시각, 경휘대 교직원 사택에서 한설아의 곁을 지키던 유승진은 심장을 바늘로 찌르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한설아가 놀라 고개를 들었다.“왜 그래요? 어디 아파요? 안색이 창백해요.”유승진은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잠시 뒤 통증이 조금 가라앉자 약을 물에 타서 한설아에게 건넸다.“괜찮아.”이유를 짚어 보려 해도 답이 나오지 않자 더 생각하지 않았다.“네가 위험하다는 말에 너무 놀랐나 봐. 이제야 긴장이 풀려서 심장이 좀 두근거리는 것뿐이야.”한설아의 귓불이 저도 모르게 붉어졌다.밤에 벌어진 일을 떠올리니 여전히 등골이 서늘했다.“고마워요.”“교수님 아니었으면 오늘 밤 저는 아마...”한설아는 떠오른 듯 덧붙였다. “서 교수님께는 말하지 마세요. 아시면 걱정돼서 밤새 못 주무실 거예요.”유승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침대에 누운 한설아가 여전히 겁에 질려 눈을 감지 못하자 유승진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자. 오늘 밤은 내가 여기 있을게. 어디에도 안 가.”한설아의 눈에 만족스러운 기색이 어렸다.“네.”눈을 감은 한설아는 무의식중에 유승진의 손가락을 찾아 단단히 움켜쥐었다.유승진은 미간을 좁혔다. 반사적으로 손을 빼려 했으나 잠든 뒤에도 불안해하는 한설아를 보고는 그만두었다. ‘됐어. 어린 동생 같은 애일 뿐이니까.’그제야 그는 ‘임지유’가 떠올랐다. 급히 나오느라 집에 남겨 둔 ‘임지유’가 어떻게 하고 있을지 신경 쓰였다.유승진은 핸드폰을 들어 메시지를 보냈다.[설아는 이제 괜찮아. 걱정하지 말고 먼저 자.]답장을 기다렸지만, 평소처럼 곧바로 답이 오지 않았다. 대화창은 조용했다.유승진의 숨이 조금 무거워졌다.‘이 시간이면 잠들었을 테니 답이 없는 게 당연해.’유승진은 핸드폰을 치워 두었다. 한설아가 움켜쥔 손에서 제 손을 조심스레 빼내고 맞은편 일인용 소파로 옮겨 앉았다....다음 날 아침, 교직원 사택을 나온 유승진은 어딘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마주치는 사람마다 유승진과 한설아를 묘한 눈으로 바라보았다.수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한설아가 조수석에 앉았다. 유승진은 먼저 한설아의 집으로 향했다.뒷좌석에 앉은 나는 프랑스의 집주인과 임대 조건을 조율하고 있었다.“앞으로 와서 앉아.”유승진이 불쑥 말했지만 나는 고개조차 들지 않았다. “됐어.”유승진은 입을 다문 채 잠시 기다렸다.“마음대로 해.”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햇살이 환하게 드는 집이 무척 마음에 들어 곧바로 계약금을 보냈다.집에 도착한 뒤유승진은 서류 가방에서 두꺼운 화보집을 꺼내 내 곁으로 왔다.“한번 볼래?”의아한 채 받아 보니 웨딩드레스 화보였다.“되도록 빨리 하나 골라. 결혼식까지 한 달밖에 안 남았으니 제작실에도 여유를 줘야지.”유승진은 눈꽃을 닮은 입체 장식이 가득 달린 드레스를 가리켰다.“나는 이게 괜찮아 보여.”나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눈꽃, 설아.’‘정말 어디에서나 한설아를 떠올리는구나.’예전의 나라면 분명 화를 냈을 것이다.하지만 지금은 그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괜찮네. 이걸로 하자.”‘어차피 나는 내일이면 이곳을 떠나.’‘한 달 뒤의 결혼식이 나와 무슨 상관일까?’유승진은 순순히 따르는 내 태도가 만족스러운 듯 상이라도 주듯 이마에 입을 맞췄다.“착하네.”“이렇게 하면 돼. 낮처럼 인상 쓰고 있는 건 싫어. 앞으로는 그러지 마. 알겠지?”할 말을 마친 유승진은 혼자 욕실로 들어갔다.나는 소독용 물티슈로 유승진이 입을 맞춘 자리를 벌겋게 달아오를 때까지 몇 번이고 닦고 나서야 손을 멈췄다.시계가 9시를 가리켰다.유승진은 평소처럼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 핸드폰은 뒤집어 놓았고 오른쪽 귀에는 무선 이어폰을 꽂았다.텅 빈 화장대와 욕실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 모양이었다.내 협탁 옆에 놓인 여행 가방도 보지 않았다.‘그럴 만도 하지.’한설아가 아니라면 유승진은 누구에게도 관심이 없었다.깊은 밤이 되었을 무렵, 날카로운 비명에 잠이 깼다.옆에 누워 있던 유승진도 벌떡 일어났다. 크게 당황한 나머지 이어폰을 향해 소리치
시댁에 도착하자 시어머니인 서미경 교수가 집 앞에서 목을 빼고 기다리고 있었다.차에서 내린 한설아는 서미경 교수에게 달려가 팔짱을 끼며 살갑게 말했다. “교수님! 바람도 찬데 왜 직접 나오셨어요? 얼른 들어가요.”서미경 교수는 자애롭게 웃었다.“설아 너를 기다렸지. 내가 승진이 밑에서 일하게 해 괜히 널 고생시키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승진이 성격이 워낙 별나야지.”한설아는 곁에 서서 부드럽게 웃는 유승진을 흘깃 보더니 귓불을 붉혔다.“유승진 교수님도 저한테 잘해주세요. 힘든 것도 전혀 없고요.”두 사람은 이야기를 나누며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몇 걸음을 앞서가던 서미경 교수는 뒤늦게 나를 떠올린 듯 돌아보았다. 나를 향한 눈에는 선명한 거리감이 담겨 있었다.“지유도 왔구나. 어서 들어와라. 감기 들겠다.”그 말이 전부였다.유승진이 내 곁으로 다가와 내려다보며 미간을 좁혔다. “기분 안 좋아?”“아니.”나는 그저 후련해졌다.유승진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말했다.“일이 마음대로 안 풀렸더라도 집에까지 티 내지는 않았으면 좋겠어. 하루 종일 울상인 사람을 보고 싶지는 않으니까.”옆으로 늘어뜨린 내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그리고 손바닥이 아릴수록 어처구니가 없었다.나는 아주 잠깐이나마 기대했다.‘유승진이 내 감정을 알아챈 건 아닐까?’나는 걸음을 멈췄다. 유승진을 바라보던 눈에서 애정이 걷히고 차분한 냉기만 남았다.“내 기분이 나쁘든 내키는 대로 행동하든 내 마음이야. 보기 싫으면 보지 마.”“나는 당신 집에서 일하는 가정부도 아니고, 당신이 원할 때마다 당신에게 맞춰야 하는 사람도 아니야.”유승진의 입매가 반듯하게 굳었다. 불쾌함을 숨길 생각도 없어 보였다.“임지유, 너도 어른이야. 곧 결혼할 텐데 내 아내가 감정에 휘둘리는 사람이면 곤란해.”나는 비웃듯 짧게 웃었다.“그럼 당신 기준에 맞는 사람은 누군데?”유승진은 진지하게 생각하는 척했지만, 이미 마음속에 답이 있다는 걸 나는 알았다.“누가 됐든 내 아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