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MELDEN“하윤 씨, 결과 나왔습니다. 췌장암 말기예요. 상황이 많이 안 좋아요. 치료 포기하면 길어야 한 달...정말 포기하시겠어요? 남편분하고 상의는 끝내신 건가요?” “네... 그 사람도 동의할 거예요.” 의사와의 통화를 마치고 텅 빈 집안을 둘러보자, 억눌러왔던 슬픔이 가슴 끝까지 차올랐다. 그저 고질병이었던 위염인 줄로만 알았는데, 암이라니. 나는 한숨을 내뱉으며 탁자 위에 놓인 액자로 시선을 옮겼다. 그곳에는 오직 나만을 바라보던 열여덟 살의 신강우가 있었다. 세월이 이토록 흘렀음에도 그날의 기억이 생생했다. 머리카락 위로 내려앉던 하얀 눈송이와 아이처럼 해맑게 웃으며 내게 묻던 목소리. “하윤아, 이렇게 눈을 맞고 걸으면 우리도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함께하는 거겠지?”
Mehr anzeigen어느덧 또다시 결혼기념일이 찾아왔다.신강우는 미리 주문해 둔 케이크를 들고 설레는 마음으로 귀가했지만, 집 안은 텅 비어 있었다.구석구석 뒤져봐도 구하윤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사랑하는 이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다시 한번 그를 집어삼켰다.신강우가 당황하며 경찰에 신고하려던 찰나, 주방에서 그릇이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급히 달려간 곳에는 두 눈이 붉게 충혈된 구하윤이 서 있었다.“나 암이래.”신강우가 미처 입을 떼기도 전에 주변은 순식간에 암전되었다. 그리고 어둠 너머에서 구하윤의 형체가 다시 나타났다.그러나 그녀는 뼈만 남은 채 앙상하게 말라 있었다.곧이어 싸늘한 시선이 그를 향했다.“신강우, 이렇게 현실을 부정하며 숨어 있으니까 재밌어?”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 띵했다.이윽고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미안하지만 이번만큼은 용서 못 해. 나 이제 정말 너 사랑 안 하거든.”발밑의 지면이 빠르게 꺼져 내려갔다.신강우는 필사적으로 손을 뻗어 그녀를 붙잡으려 했지만, 점점 멀어지는 가녀린 모습을 무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숨이 막히는 공포 속에서 발버둥 치던 그는 마침내 눈을 떴다.하지만 곁에 남은 것은 하늘과 묘비, 그리고 숲뿐이었다.결국, 조금 전의 그 모든 행복은 한낱 꿈에 불과했다.신강우는 무의식적으로 뺨을 만져보았다. 그곳은 이미 눈물로 흥건히 젖어 있었다.조금 전 꿈속에서 구하윤이 남긴 차가운 말들이 떠오르자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쳤다.다시 돌아가야만 했다. 어떻게든 그녀를 만나야 했다.구하윤의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여 잘못을 빌어야만 했다.그는 다시 자리에 누워 억지로 눈을 감았지만,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터진 댐처럼 쏟아지는 눈물만이 멈출 줄을 몰랐다.신강우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왠지 모를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이제 다시는 꿈속에서조차 그녀를 만날 수 없을 것 같았다.이루 형언하기 힘든 허탈감에 신강우는 참아왔던 통곡을 터뜨렸다.그때, 정적을 깨고
신강우는 해 질 녘까지 그 자리에 머물렀다.구하윤이 없는 텅 빈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던 지라 관리인의 눈을 피해 숨어 있다가, 밤이 깊어서야 다시 묘비 앞으로 돌아왔다.심야의 공동묘지에는 밤바람이 스산하게 불어왔고, 사방에는 음산한 기운이 감돌았다.하지만 신강우는 전혀 무섭지 않았다.이곳은 꿈에도 그리워하던 사람이 잠든 유일한 안식처였으니까.그는 묘비 곁에 누워 차가운 석판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생전 느껴본 적 없는 기묘한 평온함이 밀려왔고, 불어오는 밤바람에 몸을 맡긴 채 깊은 꿈 속으로 빠져들었다.다시 눈을 떴을 때, 신강우는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방 안으로 따스한 햇볕이 쏟아져 들어왔고, 눈에 익은 가구들은 이곳이 집임을 말해주고 있었다.‘언제 돌아온 거지?’분명 공동묘지에 잠든 기억이 생생한데...그때, 밖에서 발소리가 들려오더니 방문이 열렸다.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다름 아닌 구하윤이었다.“하윤아...”그녀는 분명 죽지 않았나?신강우가 어리둥절한 채 눈앞의 여자를 바라보자, 구하윤이 미소를 지으며 곁으로 다가왔다.“왜 그래, 나 몰라보겠어? 표정이 꼭 귀신이라도 본 사람 같네.”신강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가 이내 세차게 끄덕였다.그녀와 대화를 나누며 몇 가지 깨달은 사실이 있었다.구하윤은 ‘임혜리’라는 여자를 전혀 알지 못했고, 회사에도 그런 이름을 가진 직원은 존재하지 않았다.게다가 지금의 구하윤은 안색이 무척 좋았으며 아픈 기색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설마 이게 꿈인 걸까?신강우는 자기 팔을 세게 꼬집어 보았다.분명 통증이 느껴졌다.‘꿈이 아니야!’설마 그 끔찍한 기억들이 꿈이었단 말인가?사실은 전부 일어나지 않은 일이라고?순간, 신강우는 벅차오르는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구하윤을 와락 끌어안았다.품 안에서 전해지는 따스한 온기는 실재했다.비록 지난 일들이 악몽이었음을 확인했지만, 여전히 가슴 한구석에는 서늘한 잔상이 남아 있었다.그는 곧장 구하윤을 데리고 병원으로 달려가
그동안 신강우는 집요할 정도로 연락을 취해왔다.한서진은 그가 구하윤을 보고 싶어 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매번 차갑게 거절했다.하지만 공권력까지 빌려 자신을 불러낼 줄은 꿈에도 몰랐다.수년간 쌓아온 우정 탓에 차마 매정하게 외면할 수는 없었다.그가 정말로 무슨 큰 사고라도 칠까 봐 내심 두려웠기 때문이다.사태가 대충 수습된 것을 확인한 한서진이 미련 없이 몸을 돌려 나가려고 했다.이때, 쿵 소리와 함께 신강우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고개를 처박은 그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한서진, 제발 부탁이야... 하윤이 있는 곳에 데려다줘...”신강우가 이토록 비굴하게 매달리는 모습은 생전 처음이었다.한서진의 굳건했던 마음도 결국 처절한 간청 앞에 무너져 내렸다.구하윤을 만나러 가기로 한 날, 신강우는 정장을 차려입었다.두 사람이 사회에 첫발을 내딛던 시절, 그녀가 준 졸업 선물이었다.그는 커다란 데이지 꽃다발을 샀고, 미용실에 들러 머리도 단정하게 다듬었다.차 안에는 숨 막히는 침묵만이 감돌았다.그렇게 두 시간을 달려 도착한 곳은 산세가 깊고 물줄기가 맑게 흐르는 장소였다.하지만 공동묘지 정문을 마주한 순간, 신강우는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이 장소, 낯설지 않았다.언젠가 집에 들렀을 때, 식탁 위에 덩그러니 놓여있던 안내 책자를 무심코 훑었던 기억이 났다.당시는 구하윤이 자신을 집으로 불러들이기 위해 꾸며낸 얄팍한 수단이라고만 생각했다.이제 와서 보니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그는 스스로 눈을 가리고 귀를 막았던 것이다.보지 않고, 듣지 않고, 생각하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외면했을 뿐.그때 단 한 마디만 더 물어봤더라면 적어도 이런 결말은 아니었을 텐데.신강우는 구하윤이 홀로 이곳을 찾아왔을 때의 심정을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심장이 예리한 칼날에 난도질당하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신강우.”한서진이 그를 불러 세웠다.“들어가기 전에 너한테 할 말이 있어.”이내 성큼성큼 다가가 그의 뺨을 세차게 내리쳤
“거봐, 내가 뭐라 그랬어. 결국엔 저렇게 넘어올 거면서!”“그동안 지고지순한 게 아니라 주변에 제대로 된 여자가 없어서 입맛만 버렸던 거라니까?”“근데 신 대표, 자네도 이제 취향 좀 바꿔봐. 맨날 제수씨 같은 스타일만 고집하면 안 질려? 뭐, 그래도 정 좋다면야 우리가 얼마든지 구해다 줄 수는 있어.”방 안을 가득 채운 남자들의 너털웃음에 신강우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이내 품에 안겨 있던 여자를 거칠게 밀쳐내더니, 그대로 목덜미를 낚아채 테이블 위로 찍어 눌렀다.커다란 손바닥이 서서히 힘을 가하며 죄어오자, 여자의 얼굴이 순식간에 시뻘겋게 달아올랐다.그녀는 속박에서 벗어나려고 필사적으로 몸부림쳤다.“신 대표! 당장 그 손 놔. 이러다 사람 잡겠어!”사장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아수라장이 된 끝에 간신히 그를 떼어놓았다.여자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무릎으로 기어가다시피 방을 빠져나갔다.신강우가 살기 어린 눈빛으로 좌중을 훑었다.“내 아내에 대해 한 번만 더 그따위로 입 놀려 봐, 그땐 진짜 가만 안 둬.”“그리고 이딴 저질스러운 수작 부리는 놈들, 내 눈에 다시 띄면 그날로 끝인 줄 알아.”남자들은 서로 눈치만 살피며 입을 다물었다.“쳇, 다 늙은 여자 하나 가지고 되게 유세 떠네.”그때, 누군가 작게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렸다.신강우의 시선이 소리 나는 곳을 향했다. 아까 그 술 취한 사내였다.남자는 신강우의 살기 어린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지껄여댔다.“여자 하나 죽은 게 무슨 대수인가? 그 지위에 못 만날 여자가 어딨어? 죽었으면 끝이지, 순교라도 할 기세네. 난 오히려 신 대표가 부러워 죽겠구먼. 마누라 잔소리도 없겠다, 밖에서 마음대로 놀아도 누가 뭐라 하겠냐고. 정 아쉬우면 제수씨랑 닮은 애들 몇 명 불러서 똑같이 가르쳐서 데리고 살면 될 거 아니야.”...남자는 실실거리며 지껄였다.그에게 여자란 그저 심심풀이용 ‘장난감’에 불과했다.구하윤을 모욕하는 저질스러운 언사에 신강우는 이성의 끈을 완전히 놓아버렸다.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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