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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 대신 이별

이혼 대신 이별

Von:  은소이Abgeschlossen
Sprach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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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usammenfassung

가슴 아픈 사랑

막장

이성적인

죽고난 후 후회

후회남

후회

“하윤 씨, 결과 나왔습니다. 췌장암 말기예요. 상황이 많이 안 좋아요. 치료 포기하면 길어야 한 달...정말 포기하시겠어요?  남편분하고 상의는 끝내신 건가요?” “네... 그 사람도 동의할 거예요.” 의사와의 통화를 마치고 텅 빈 집안을 둘러보자, 억눌러왔던 슬픔이 가슴 끝까지 차올랐다. 그저 고질병이었던 위염인 줄로만 알았는데, 암이라니. 나는 한숨을 내뱉으며 탁자 위에 놓인 액자로 시선을 옮겼다. 그곳에는 오직 나만을 바라보던 열여덟 살의 신강우가 있었다. 세월이 이토록 흘렀음에도 그날의 기억이 생생했다. 머리카락 위로 내려앉던 하얀 눈송이와 아이처럼 해맑게 웃으며 내게 묻던 목소리. “하윤아, 이렇게 눈을 맞고 걸으면 우리도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함께하는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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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Kapitel
제1화
지난날의 행복이 마치 꿈결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신강우와 나는 소꿉친구로 자라 열여덟 살에 연인이 되었다.대학 졸업 후, 지하 단칸방에서 함께 보낸 수없는 나날들.그 고단한 세월을 버티며 그가 회사를 일궈가는 과정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켜보았다.성공의 대가는 달콤했다. 화려한 집과 잘 빠진 스포츠카.패션에 관심이 많은 나를 위해 매 시즌 명품 신상들이 현관 앞에 쌓였고, 여행을 좋아하는 걸 알고 바쁜 와중에도 짬을 내어 함께 놀러 갔다.기념일마다 준비한 서프라이즈는 단 한 번도 나를 실망하게 한 적이 없었다.심지어 불임 사실을 알았을 때도 그는 모든 책임을 본인에게 돌리며 토닥여 주었다.주변 사람들은 신강우가 나를 지독하게도 사랑한다고 입을 모았다.하지만 그랬던 남자가 결혼 7년 차에 여비서와 밖에서 또 다른 살림을 차렸다.그는 임혜리에게 별장을 선물하며 그들만의 ‘보금자리’를 만들었다.매일같이 집으로 곧장 퇴근하던 남자는 이제 점점 외박이 잦아지고 있었다.임혜리에게 쏟는 정성이 지극해질수록 나를 향한 그의 온도는 시리게 식어갔다.이제는 내 존재 자체가 불쾌하다는 듯 보기만 해도 미간에 깊은 골이 파였다.더는 비참해지고 싶지 않아 숨을 크게 몰아쉬며 바닥에 흩어진 유리 파편들을 치우기 시작했다.며칠 전, 신강우와 다투다 깨뜨린 잔해들이었다.그날은 우리의 결혼기념일이었다.나는 음식을 차려놓고 집에서 그를 기다렸다.분명 퇴근하자마자 오겠다고 약속했으면서, 결국 새벽 두 시가 되어서야 모습을 드러냈다.또 임혜리 곁에 있다 온 것이다.결국 싸움까지 번졌고, 그는 내 심장에 비수를 꽂는 말을 기어이 내뱉고야 말았다.“구하윤, 나도 이제는 아이가 필요해.”그 뒷말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 나는 도망치듯 집을 뛰쳐나왔다.하지만 예상대로 나를 붙잡는 발소리는 들리지 않았다.일주일 동안 옛날 집에 틀어박혀 신음하다 위경련으로 병원을 전전한 뒤에야 돌아온 별장.거실 바닥에 뽀얗게 내려앉은 먼지를 보며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신강우 또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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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며칠간 몸을 추스른 뒤, 나는 평소 안면이 있던 명품 매입 업자를 불러 드레스룸의 옷과 가방, 보석들을 전부 처분했다.“대표님이 정말 사모님을 끔찍이 아끼시네요. 어제 막 이번 시즌 신상들을 주문하셨다더니, 오늘 바로 드레스룸을 비우게 하네요.”업자의 너스레에 나는 그저 옅은 미소로 대답했다.손가락으로는 무심하게 임혜리의 SNS를 훑었다.시선이 멈춘 곳은 오늘 아침에 올라온 게시물이었다.사진 속에는 따끈따끈한 신상 가방이 선명하게 담겨 있었다.아무래도 이번 신상들은 이미 제 주인을 찾아간 모양이었다.업자를 보내고 난 뒤, 친한 친구 한서진을 불러 집 보러 갔다.우리는 차를 타고 교외로 향했고, 다름 아닌 공동묘지의 입구에 멈춰섰다.한서진은 의아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나는 별다른 설명 없이 그녀의 손을 이끌고 안으로 들어갔다.산 좋고 물 맑은 곳에 자리 잡은 이곳은 부유층들이 선호하는 공동묘지였다.직원의 열띤 설명을 들으며 한 바퀴를 둘러본 뒤, 마음에 드는 자리를 골라 곧장 계약금을 치렀다.부모님도 일찍 여의고 형제자매도 없는 처지니, 죽어서 아무도 찾아오지 않을 것을 대비해 차라리 눈이라도 즐거운 곳에 미리 터를 잡는 게 나을 것 같았다.지난 세월 동안 신강우는 막대한 부를 쌓았다.하지만 나는 그가 고생해서 번 돈이 아까워 선뜻 쓰지도 못하고 악착같이 모으기만 했다.그랬던 내가 드디어 돈 쓰는 법을 깨달았는데, 쓰임처가 고작 내가 누울 자리라니.역시 남자를 가엽게 여기면 인생이 고달파진다는 말은 틀린 게 하나 없다.직원이 묘지의 주인이 누구인지 물었다.“저예요. 제가 쓸 자리를 미리 보러 온 거예요.”나는 신청서 위에 내 이름을 정갈하게 적어 내려갔다.경악과 동정이 뒤섞인 직원들의 시선을 뒤로한 채 한서진의 손을 끌고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차에 올라타자마자 한서진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다그쳤다.“구하윤!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이야? 네가 왜 무덤을 보러 오냐고!”한서진의 눈동자에는 걱정과 공포가 가득했다.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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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신강우는 보란 듯이 임혜리를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나는 입을 달싹였지만, 끝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시야를 가득 메운 눈물 너머로 내게 영원을 약속하던 열여덟 살의 그 소년은 이제 어디에도 없었다.신강우는 나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임혜리의 어깨를 감싸 안고 현관을 나섰다.“내가... 정말 곧 죽는다고 해도 나한테 이럴 거야?”그의 뒷모습이 점점 멀어졌다.“죽어서라도 그 지긋지긋한 소란을 끝낼 수만 있다면, 어디 마음대로 해봐.”순간 온몸의 기운이 빠져나갔고, 나는 바닥에 힘없이 주저앉았다.‘아, 내가 죽기를 바라고 있었구나.’그날 이후, 신강우는 단 한 번도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나 역시 관심이 없었다.대신 혼자 남겨질 내 사후를 차근차근 준비하기 시작했다.영정 사진을 찍고, 인생의 마지막이 될 옷을 샀다.며칠 뒤, 사진을 찾아가라는 사장님의 연락을 받고 사진관을 향했다.액자 속 내 모습을 바라보는 기분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복잡했다.집으로 돌아가려던 찰나, 길모퉁이에서 신강우와 임혜리를 마주쳤다.“네가 여기 왜 있어? 설마 나 미행한 거야?”그와 말다툼할 기운조차 없었다.칼로 베는 듯한 복부의 통증에 그저 이 지옥 같은 순간을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대표님, 사모님 사진 찍으러 오셨나 봐요.”임혜리가 손을 뻗어 내 품의 액자를 빼앗으려 들자 나는 본능적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사모님이 저희한테 보여주기 싫으신가 봐요.”가련한 척 연기하는 표정 뒤로 비열한 조소가 서려 있었다.“이렇게까지 숨기시는 걸 보니, 남모를 비밀이라도...”그 말에 신강우의 안색이 돌변하며 내 품에 들린 액자를 싸늘한 시선으로 훑었다.“도대체 뭘 감추고 있는 거야?”통증은 점점 선명해졌고, 나는 더 이상 이들과 엮이고 싶지 않았다.자리를 피하려던 찰나, 신강우가 내 손목을 거칠게 낚아챘다.나를 바라보는 눈빛엔 여전히 혐오와 의심이 가득했다.예전 같았으면 심장을 도려내는 듯 아팠을 테지만, 이제는 아무런 감흥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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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날짜는 속절없이 흘러갔고, 내 몸 상태는 눈에 띄게 나빠졌다.잠에 취해 있는 시간이 길어졌고 날카로운 통증이 발작처럼 찾아왔다.한서진이 자기 집으로 오라고 했지만 나는 끝내 거절했다.그저 혼자 남겨진 공간에서 조용히 마지막 시간을 보내고 싶을 뿐이었다.다만 임혜리는 나를 내버려 둘 생각이 없는 듯했다.하루에도 메시지가 수십 통은 날아왔다.때로는 둘이 함께 떠난 여행 사진을, 어떤 날은 고급 호텔 거울 앞에서 찍은 커플 셀카를, 그리고 곤히 잠든 신강우의 얼굴까지 찍어 보냈다.그녀의 도발에도 내 마음은 호수처럼 고요했다.그러던 어느 날, 임혜리가 아주 특별한 사진 한 장을 보내왔다.사진 속 장소는 신강우와 내가 예전에 살던 집이었다.이게 무슨 뜻인가 싶어 묻기도 전에 문자 한 통이 뒤이어 도착했다.[선물이에요.]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다급하게 신강우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역시나 받지 않았다.불안감에 휩싸인 나는 간신히 정신을 붙들고 택시를 잡아 옛날 집으로 향했다.그곳은 우리가 지독했던 반지하 생활을 청산하고 처음으로 일궈낸 소중한 터전이었다.신강우와 함께 밑바닥에서부터 회사를 일궈낸 고단한 청춘의 목격자이자, 가난했지만 더없이 달콤했던 나날들이 쌓인 안식처였다.그래서 나중에 훨씬 더 크고 좋은 집으로 이사 간 뒤에도 차마 처분할 수가 없었다.그곳에는 우리의 유일한 추억이 깃들었으니까.이제는 나 혼자만 붙들고 있는 잔상일 뿐이지만, 그 집은 내가 마지막까지 지켜내고 싶었던 기억의 조각이었다.허겁지겁 달려갔을 때, 활짝 열린 대문과 그 사이를 분주히 오가는 인부들이 눈에 들어왔다.집 안은 이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다.순간 눈앞이 캄캄해졌다.나는 미친 사람처럼 인부들을 붙잡고 당장 멈추라고 울부짖었지만, 누구 하나 내 절규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속수무책인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하나, 바로 신강우의 번호를 누르는 것뿐이었다.열 번이 넘는 시도 끝에 마침내 통화가 연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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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신강우는 임혜리를 데리고 떠나버렸다.홀로 남겨진 나는 문밖 벽에 기댄 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가슴이 답답해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그때 휴대폰이 진동했다. 임혜리가 보낸 문자였다.[내가 이겼네. 두고 봐요. 당신이 가진 거, 하나씩 전부 뺏어줄 테니까.]화면을 한 번 쓱 훑어보고는 휴대폰을 끄고 다시 집 안으로 발을 들였다.정들었던 가구들이 빠져나간 자리는 여기저기 패여 엉망진창이 따로 없었다.베란다 구석에는 뜯지도 않은 페인트 통 몇 개가 놓여 있었다.임혜리가 좋아한다는 분홍색이다.텅 빈 방 안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내가 가장 아꼈던 침실의 베란다 창가 자리는 무참히 부서졌고, 애착이 담긴 잔꽃 무늬 식탁보는 오물 섞인 쓰레기 더미 속에 처박혀 있었다.신강우와 함께 고심해서 골랐던 커튼 역시 건물 아래 쓰레기통에 넝마처럼 버려졌다.누구의 눈길도 받지 못한 채.나는 빈방을 몇 번이고 돌았다. 그러고 나서야 마침내 현실을 직시했다.한때 ‘집’이라고 불렀던 곳을 마지막으로 눈에 담은 뒤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현재 사는 별장으로 돌아와 사방에 널린 가구들을 바라보자 임혜리가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나는 곧바로 중고 수거 업체에 연락해 그녀가 탐냈던 가구들을 싹 다 치워버렸다.인생의 마지막 시간만큼은 그 무엇에게도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수거 업체 사람들까지 떠나고 나니 어느덧 깊은 밤이었다.온몸이 땀에 젖은 채 카펫 위에 대자로 누웠다.모든 것을 비워낸 뒤에야 찾아온 생경하고도 기묘한 해방감이었다.벽에 걸린 달력은 하루하루 얇아져 갔고,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평온해졌다.복용하는 진통제의 양이 늘어갈수록 의식이 맑은 날은 점점 줄어들었다.그러던 어느 날, 기적처럼 정신이 또렷해졌다.나는 서둘러 두 개의 서류 봉투를 준비해 우체국으로 향했다.하나는 한서진에게 가는 것이었다. 그 안에는 나의 마지막 부탁과 개인 명의의 자산 목록이 담겨 있었다.나머지 하나는 신강우에게 보내는 이혼 합의서였다. 내 이름 석 자는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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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신강우는 다음 날이 되어서야 택배를 뜯어보았다.사실 전날 오후에 이미 물건을 받았지만, 보낸 사람의 이름을 확인하고는 구석에 방치해두었을 뿐이다.그러다 다음 날 임혜리가 귀띔을 해주고서야 택배의 존재를 떠올렸다.상자 안에서 이혼 합의서를 발견한 순간, 구하윤이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린다고 생각했다.“이혼이라니... 사모님께서 정말 화가 많이 나셨나 봐요. 분명 그 옛날 집 때문이겠죠. 대표님께서 업무상 제가 들어가는 거라고 그렇게 설명하셨는데도 끝내 이해를 못 해주시네요. 아무래도 제가 이사를 포기하는 게 낫겠어요.”임혜리의 말 한마디가 그의 마음속에 불을 지폈다.“왜 포기해? 이번 기회에 아주 그 버릇을 고쳐놓고 말겠어! 당장 업체에 전화해서 공사 서두르라고 해.”불같이 화를 내는 그의 목소리를 뒤로하며, 임혜리는 눈빛 속에 번지는 쾌재를 감추고 조용히 방을 나섰다.‘어디 한번 마음껏 날뛰어 봐.'구하윤이 소란을 피울수록 임혜리의 입가에는 승리의 미소가 번졌다.신강우는 이혼 합의서를 책상 위에 내팽개치고 구하윤에게 전화를 걸었다.그러나 연결되지 않았다.몇 차례 더 전화를 걸어보더니, 결국 직접 집에 가보기로 했다.대체 어디까지 막 나가는지 제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만약 정말로 이혼하겠다고 고집을 피운다면, 그 소원대로 해줄 작정이었다.차를 타고 집으로 급히 돌아왔지만 적막만이 감돌았다.심지어 가구들마저 상당수 사라져 집안이 휑한 상태였다.그는 별일 아니라는 듯 큰 소리로 구하윤의 이름을 불렀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2층 침실로 올라가 옷방 문을 열자, 평소 옷들로 가득 차 있던 공간이 텅텅 비었다.예전에 그가 선물했을 때 기뻐하며 영원히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두겠다고 했던 물건들조차 전부 사라졌다.왠지 모를 허전함이 가슴 한구석을 스치고 지나갔다.침실 안에는 책상 위에 놓인 노트북 한 권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꽤 연식이 되었는지, 모서리가 누렇게 변하고 돌돌 말려 있었다.일기장이었다.신강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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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이번엔 죽는시늉이라도 하시겠다?”신강우는 피식 웃으며 경박한 말투로 비아냥거렸다.구하윤이 감히 한서진과 짜고 자신을 속일 줄은 몰랐다.고작 그 낡아빠진 집 때문이라니.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내비게이션에 한서진의 집 주소를 입력했다.“적당히 해. 그 사람 너랑 같이 있지? 이혼하고 싶어서 그러는 거 아냐? 알았으니까 당장 전화 바꿔.”최근 들어 부쩍 심해진 구하윤의 억지를 떠올리며 신강우는 만나자마자 이혼 합의서에 도장을 찍어주겠다고 결심했다.자신이 없으면 그녀가 대체 어떻게 살지 똑똑히 지켜볼 작정이었다.“이 나쁜 자식아!”수화기 너머로 한서진의 고함이 들려오자 신강우의 눈빛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하윤이 죽었어. 진짜 죽었다고! 지금 당장 튀어와. 화장하려면 직계 가족 서명이 필요한데, 너밖에 안 된다잖아...!”한서진은 주소를 하나 불러주고는 그대로 전화를 끊어버렸다.신강우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시선은 자신도 모르게 문 쪽을 향했다.마치 다음 순간 구하윤이 눈앞에 나타나기라도 할 것처럼.“하윤아...?”신강우는 나지막이 읊조렸다. 마음속의 혼란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만 갔다.말도 안 된다는 생각이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구하윤이 정말 죽었다고?그럴 리가?즉시 비서의 번호를 찾아 연락처를 뒤졌지만, 화면을 터치하는 손가락이 덜덜 떨렸다.이때, 임혜리의 전화가 걸려 왔다.신강우는 눈살을 찌푸리고 종료를 눌렀다.잠시 후, 다시 걸려 오자 짜증 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대표님, 저 도착했는데 언제쯤 오세요?”“지금 급한 일이 생겨서 못 가.”신강우는 인내심을 발휘해 그녀를 달랬다.그러나 머릿속에는 온통 구하윤의 모습으로 가득했다.“저 여기 예약하느라 얼마나 오래전부터 공들였는지 아시잖아요. 이번에 취소하면 언제로 밀릴지 몰라요...”임혜리는 울먹이며 말을 이었다. 간간이 훌쩍이는 소리가 휴대폰을 타고 들려왔다.신강우가 자신의 이런 청순가련한 모습을 제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평소처럼 모든 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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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말도 안 돼, 그럴 리가 없어...”신강우는 중얼거리며 뒷걸음질 치더니, 이내 결심한 듯 달려들어 미친 사람처럼 흰 천을 걷어치웠다.주변 사람들이 경악하며 비명을 질렀다.“아니야... 하윤이가 아니라고! 대체 어디 있는 거지...?”신강우는 거의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다.고개를 들어 사방을 두리번거리다 시신 안치실 표지판을 발견하고는 그곳을 향해 직진했다.“어느 분 유가족이죠? 들어가시려면 등록하셔야 합니다.”직원이 신강우를 가로막았다.그는 무의식적으로 바짝 마른 입술을 축였다.목소리는 거칠게 갈라져 있었다.“구하윤.”직원이 이름을 검색하는 동안 신강우의 심장은 목구멍까지 차올랐다.‘없어야 해. 제발 없다고 해줘...’이 모든 게 그저 구하윤의 짓궂은 장난이라고 말해달라고 마음속으로 간절히 기도했다.하지만 직원은 그의 마지막 환상을 처참히 깨뜨렸다.신강우는 안내를 받아 안치실 구석으로 향했다.철제 침대 위에 누워 있는 구하윤의 얼굴은 푸르스름하게 질려 있었다.그녀는 두 눈을 감은 채 아무런 고통도 없어 보였다.도드라진 광대뼈와 움푹 패어 들어간 볼살.흰 천이 가슴께까지 덮여 있었지만, 그 아래로 확연히 드러난 갈비뼈의 윤곽이 눈에 들어왔다.언제 이렇게 말랐던가? 왜 그는 알아차리지 못했을까?신강우는 괴로움에 주먹을 꽉 쥐고는 고개를 숙여 옆에 놓인 이름을 확인했다.[구하윤.]그녀가 맞았다.극한의 절망이 파도처럼 몰아쳤다.구하윤이 없던 황량한 시절로 내던져진 기분이었다.그녀는 생애 유일한 사랑이자, 심장에 돋아난 살점과도 같은 존재였다.생살이 찢겨 나가는 듯한 고통이 그를 처참히 무너뜨렸다.“하윤아, 장난치지 마. 얼른 일어나 봐. 내가 다 잘못했어.”신강우는 다정하게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졌지만, 두 눈은 이미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이내 넋을 잃은 사람처럼 바닥에 무릎을 털썩 꿇었다.“유가족분, 기운 내세요.”직원이 그의 앞에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사망진단서입니다. 확인하시고 이상 없으면 여기 사인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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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구하윤이 화장로 안으로 들어갔다.문밖에 멍하니 서 있는 신강우는 아이러니하게 눈물 한 방울조차 나오지 않았다.“하윤이... 대체 어떻게 죽은 거야?”“췌장암 말기였어. 한 달 전에 발견했대.”신강우의 가슴에 날카로운 통증이 밀려왔다.그는 무의식적으로 입술을 세게 깨물며 목이 멘 소리로 물었다.“왜 나한테 말 안 했어? 내가 조금만 더 일찍 알았더라면...”“말하기 싫었대. 아니, 어쩌면 하윤은 이미 너한테 완전히 마음을 돌린 거겠지.”신강우는 날벼락이라도 맞은 듯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그녀는 이미 오래전부터 자신에게 실망하고 있었던 것이다.오만하게도 구하윤이 자신을 이해해 줄 거라 믿었다.그저 대를 이을 아이가 갖고 싶었을 뿐, 임혜리와의 관계는 스쳐 지나가는 인연이라고 치부했다.그녀를 대신할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으니 이혼할 생각은 가당치도 않았다.하지만 구하윤은 끝내 단념했다.죽음을 앞둔 순간조차 소식을 알리기 싫을 만큼 그녀의 마음은 이미 비정할 정도로 차갑게 식어 있었다.시야가 서서히 젖어 들더니, 뜨거운 눈물이 눈앞을 흐릿하게 가렸다.그 찰나, 신강우는 청혼하며 그녀에게 뱉었던 맹세를 떠올렸다.“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너 하나만 사랑할게. 내 평생, 널 배신하는 일은 절대로 없을 거야.”그때의 신강우는 확신했었다. 그녀에게 잔인한 상처를 주는 일 따위는 하지 않을 거라고.누구보다 사랑한 여자였다. 심장을 통째로 꺼내서라도 펼쳐 보이고 싶을 만큼.하지만 대체 어디서부터 어긋나기 시작한 걸까.반복되는 시험관 시술의 실패, 주변의 끊임없는 부추김, 그리고 틈을 타 밀물처럼 밀려드는 여자들의 유혹까지.그렇게 그는 서서히 진심을 잃어갔다.결국 비겁하게도 세속의 흐름에 몸을 맡겼다.아이를 갖겠다는 핑계를 방패 삼아 임혜리의 저급한 유혹을 받아들였다.그 안락함 속에 허우적대며 ‘너 하나면 충분하다’던 예전의 맹세는 까맣게 잊어버렸다.구하윤의 눈동자가 점점 빛을 잃어가는 것을 보면서도 자신을 절대 떠나지 못할 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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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한서진이 떠난 뒤, 신강우는 장례식장에서 홀로 얼마나 서 있었는지조차 알지 못했다.이내 기계적으로 휴대폰을 주머니에 쑤셔 넣고는 길거리를 정처 없이 배회했다.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발걸음은 어느덧 옛날 집 건물 아래에 멈춰 있었다.고개를 들어 위를 올려다보자 익숙한 창문과 문에 먼지가 얼룩덜룩했다.예전의 구하윤은 늘 창가에서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곤 했었다.하지만 이제 자신을 반겨줄 이는 영영 사라졌다.신강우는 홀린 듯 낡은 집 안으로 발을 들이밀었다.내부는 인부들의 철거 작업으로 어수선했다.한때 두 사람이 함께 숨 쉬며 살았던 흔적은 형체도 없이 짓밟혀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추억이 깃든 물건들은 구석에 아무렇게나 나뒹굴었다.구하윤이 유독 아끼던 조명, 함께 고른 가구들, 그리고 손때 묻은 그릇까지.신강우의 눈에 슬픔이 차올랐다.그러다 문득, 진흙에 더러워진 수채화 한 점이 시선을 붙들었다.그가 열여덟 살 되던 해, 구하윤이 직접 그려준 생일 선물이었다.그림 속에는 만발한 눈꽃이 흩날렸고, 앳된 모습의 두 남녀가 서로를 꼭 껴안고 있었다.신강우의 눈시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떨리는 손으로 그림 뒷면을 들춰보자, 오른쪽 구석에 빛바랜 작은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이대로 너랑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신강우는 떨리는 손끝으로 그녀의 글씨를 몇 번이고 덧그렸다.가슴 깊이 사무치는 후회와 한탄이 터져 나왔다.“하윤아, 미안해... 내가 약속을 어겼어. 정말 미안해...”곧이어 소맷자락으로 그림에 묻은 진흙을 조심스레 닦아내고는 소중히 품에 안았다.“누가 이 물건들을 함부로 버리라고 했지?”신강우의 목소리에 서슬 퍼런 분노가 실렸다.인부들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당황하며 대답했다.“저, 그게... 임혜리 씨가 다 필요 없는 물건이니 전부 처분하라고 하셨어요. 대표님께서도 집수리는 임혜리 씨한테 전적으로 맡기라고 하셔서, 저희는 시키는 대로 했을 뿐...”서로의 눈치만 살피는 인부들의 얼굴에 불안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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