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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이의 시차

우리 사이의 시차

By:  두번째생은내맘대로Kumpleto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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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약혼자 유승진에게는 이상하리만치 철저한 원칙이 하나 있었다. 밤 9시가 넘으면, 누구의 전화도 받지 않는다. 우리 사이가 가장 뜨거웠던 때조차 예외는 없었다. 시계가 9시를 가리키는 순간, 유승진은 언제나 미련 없이 전화를 끊었다. 한번 귀가가 늦어진 날이 있었다. 누군가 계속 뒤따라오는 기척에 겁이 난 나는 다급히 유승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돌아온 건 걱정이 아니라 짜증 섞인 목소리였다. [나이가 몇인데 그래? 다른 사람 생활 패턴도 좀 존중해 줘. 끊는다.] 결국 그날 나는 혼자 지구대에서 진술을 마치고,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유승진은 나에게 괜찮냐고 묻지도 않았다. 그래도 나는 믿었다. 그저 원칙이 철저한 사람일 뿐이라고. 오늘, 우연히 그의 노트북을 쓰게 되기 전까지는. 핸드폰과 연동된 통화 내역 속에서 이상한 기록 하나를 발견했다. 밤 9시부터 다음 날 아침 9시까지. 꼬박 12시간. 하루도 빠짐없이. 그것도 무려 5년 동안 이어진 통화였다. 상대는 낯선 사람도 아니었다. 유승진 어머니의 제자이자, 그의 연구조교. 화면을 바라보는 동안 온몸을 버티고 있던 힘이 천천히 빠져나갔다. 다리가 저릴 때까지 한참을 앉아 생각에 잠겼던 나는 말없이 노트북을 닫았다. 그리고 유승진과 함께 구청에 가서 하기로 했던 혼인신고 일정도 취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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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banata 1

제1화

화면에 떠 있던 구청에 가서 혼인신고 하기로 했던 일정을 지웠을 때쯤, 유승진이 욕실에서 나왔다.

내가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있는 모습을 본 유승진은 시간을 확인하더니 미간을 좁혔다.

“할 말 있어? 곧 9시야. 나 쉬어야 해.”

나는 멍하니 눈을 깜박이다가 고개를 저었다.

“없어.”

유승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잘 자.”

내 감정이 달라졌다는 사실은 눈치채지 못한 채 미련 없이 방으로 돌아갔다.

나는 넋을 놓고 잠시 앉아 있었다.

막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꺼졌던 노트북 화면이 환해지며, 핸드폰과 연동된 한설아의 전화가 떴다.

유승진은 달랐다.

9시가 넘으면 전화도, 대화도, 메시지도 거부하던 유승진이 한 번의 울림도 다 지나기 전에 전화받았다.

한설아를 조금이라도 기다리게 할까 봐 조급한 사람처럼.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참 다정하기도 하지. 곧 아내가 될 나만 예외가 아니었을 뿐.’

안방으로 돌아오니, 유승진은 이미 눈을 감은 채 잠든 척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야 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액정이 아래로 향하도록 항상 엎어 두는 핸드폰.

오른쪽 귀에 꽂힌, 눈에 잘 띄지 않는 검은 이어폰.

나는 불을 끈 뒤 어둠 속에서 지난주 국장님이 보내온 해외 파견 제안에 답했다.

결혼하자마자 유승진과 떨어져 살고 싶지 않아 처음에는 거절했던 제안이었다.

이제는 모든 게 끝났다.

국장님에게서 곧 답장이 왔다.

[결심한 거야? 주프랑스 대사관은 최소 5년 근무야. 확실하다면 공무 비자부터 진행해. 이틀 뒤 출국이야.]

[네, 알겠습니다.]

나는 바로 답했다.

옆에서는 고른 숨소리가 들렸다.

‘한설아도 지금쯤 마음 편히 잠들었겠지.’

침대에 누운 뒤에야 우리 사이에 보이지 않는 경계선이 그어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멍해졌다가 눈을 감고 잠에 빠졌다.

...

다음 날 눈을 뜨니 유승진이 드레스룸에 서 있었다.

몸을 일으킨 나는 유승진의 핸드폰에 손을 대 보았다.

배터리가 엄청나게 뜨거웠다.

공무 비자 신청에 필요한 서류를 챙긴 뒤 유승진을 한 번 바라보고 집을 나섰다.

서로 어깨를 스쳐 지나가려던 때, 유승진이 당황한 목소리로 나를 불러 세웠다.

“오늘은 넥타이 안 매 줘?”

나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이제 안 매 줄 거야. 직접 매는 법을 배워.”

잠깐 말을 고른 뒤 덧붙였다.

“아니면 조교한테 부탁하든가.”

유승진은 손에 든 물건을 내려놓고 의아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한설아 말이야?”

그 이름이 나오자마자 늘 서늘하고 엄격하던 유승진의 인상이 부드러워졌다.

눈가에도 엷은 웃음이 스쳤다.

“설아가 넥타이는 잘 매지. 꼼꼼한 애니까. 그런데 그게 네가 내 넥타이를 매 주는 것과 무슨 상관이야?”

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아예 설명을 포기했다.

“아무 상관 없어. 그냥 하고 싶지 않아.”

유승진은 못마땅한 듯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마음대로 해. 참, 오늘 점심은 가져오지 마. 설아가 방금 내 것까지 챙겨 오겠다고 연락했어.”

문손잡이를 쥔 손이 잠시 멈췄다.

“그래.”

유승진은 일 때문에 위염이 심했다. 예전의 나는 아무리 바빠도 직접 밥을 지어 유승진의 도시락을 챙겼다.

‘잘됐네. 이제 그 수고에서 벗어나니 오히려 홀가분해.’

더는 유승진의 기분까지 살필 이유가 없었다.

나는 대화를 끝내고 문을 닫았다.

프랑스 대사관 영사부에 들러 5년짜리 장기 파견 비자를 접수했다.

뒤이어 외교부 청사로 가서 파견 명령서도 받아 왔다.

서류를 가방 안에 넣고, 청사 앞에서 막 피어나기 시작한 벚꽃을 바라보았다.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가벼움과 해방감이 밀려왔다.

문득 떠오른 일이 있어 예식 준비 앱을 열고 파트너 정보에 저장돼 있던 유승진의 주민등록번호를 완전히 지웠다. 앞으로는 쓸 일이 없을 테니까.

문득 생각난 게 있어 미리 작성해 둔 혼인신고서 파일을 열었다. 그 안에 적어 둔 유승진의 정보를 망설임 없이 전부 지웠다. 이제는 다시 쓸 일이 없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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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Kabanata
제1화
화면에 떠 있던 구청에 가서 혼인신고 하기로 했던 일정을 지웠을 때쯤, 유승진이 욕실에서 나왔다.내가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있는 모습을 본 유승진은 시간을 확인하더니 미간을 좁혔다.“할 말 있어? 곧 9시야. 나 쉬어야 해.”나는 멍하니 눈을 깜박이다가 고개를 저었다.“없어.”유승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잘 자.”내 감정이 달라졌다는 사실은 눈치채지 못한 채 미련 없이 방으로 돌아갔다.나는 넋을 놓고 잠시 앉아 있었다.막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꺼졌던 노트북 화면이 환해지며, 핸드폰과 연동된 한설아의 전화가 떴다.유승진은 달랐다.9시가 넘으면 전화도, 대화도, 메시지도 거부하던 유승진이 한 번의 울림도 다 지나기 전에 전화받았다.한설아를 조금이라도 기다리게 할까 봐 조급한 사람처럼.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참 다정하기도 하지. 곧 아내가 될 나만 예외가 아니었을 뿐.’안방으로 돌아오니, 유승진은 이미 눈을 감은 채 잠든 척하고 있었다.하지만 이제야 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액정이 아래로 향하도록 항상 엎어 두는 핸드폰.오른쪽 귀에 꽂힌, 눈에 잘 띄지 않는 검은 이어폰.나는 불을 끈 뒤 어둠 속에서 지난주 국장님이 보내온 해외 파견 제안에 답했다.결혼하자마자 유승진과 떨어져 살고 싶지 않아 처음에는 거절했던 제안이었다.이제는 모든 게 끝났다.국장님에게서 곧 답장이 왔다.[결심한 거야? 주프랑스 대사관은 최소 5년 근무야. 확실하다면 공무 비자부터 진행해. 이틀 뒤 출국이야.][네, 알겠습니다.]나는 바로 답했다.옆에서는 고른 숨소리가 들렸다. ‘한설아도 지금쯤 마음 편히 잠들었겠지.’침대에 누운 뒤에야 우리 사이에 보이지 않는 경계선이 그어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멍해졌다가 눈을 감고 잠에 빠졌다....다음 날 눈을 뜨니 유승진이 드레스룸에 서 있었다.몸을 일으킨 나는 유승진의 핸드폰에 손을 대 보았다.배터리가 엄청나게 뜨거웠다.공무 비자 신청에 필요한 서류를 챙긴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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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국장님의 전화를 받았다. 경휘대학교 인문대학에 들러 자료 한 부를 대신 수령해 달라는 부탁이었다.전화를 끊자, 나는 한숨이 절로 나왔다. 선을 긋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유승진이 바로 경휘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였기 때문이다.인문대 건물에 도착했을 때는 학생들이 수업을 들으러 몰리는 시간대였다.듣고 싶지 않아도 귀에 들어오는 말들이 있었다.“유승진 교수님 수업, 나 진짜 겨우 신청했어! 수강 신청 경쟁률이 장난 아니잖아.”“맞아. 여학생들은 유승진 교수님 보러 가고, 남학생 절반은 한설아 조교 선생님 보러 가잖아. 둘이 서 있으면 정말 잘 어울리긴 해.”내 걸음이 서서히 느려졌다. 쓰디쓴 감정이 가슴안으로 번졌다.유승진과 5년을 만나는 동안 나는 단 한 번도 유승진의 인간관계 안에 떳떳하게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한창 사랑에 빠져 있던 때에는 나를 주변 사람들에게 소개해 달라고 애교를 부리기도 했다.카톡 프로필 배경을 내 사진으로 바꿔 달라고도 했다.하지만 유승진은 매사 빈틈없는 국문과 교수답게 철없는 아이를 타이르듯 미간을 좁히곤 했다.“임지유, 좀 어른스럽게 굴어.”“18살도 아니잖아. 그런 겉치레는 유치해. 내 위치에도 맞지 않고.”그날 나는 유승진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뒤로는 다시 그런 말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곁을 지나던 여학생들은 여전히 유승진과 한설아 사이의 묘한 분위기를 떠들어 댔다.“솔직히 학교 인물 소개에 유승진 교수님이 약혼 중이라고 나오잖아. 난 상대가 한설아 조교 선생님인 줄 알았어. 약혼자를 봤다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까.”“분명 그럴걸. 그렇게 무뚝뚝한 분이 한설아 조교 선생님을 향해서만 웃잖아.”두 학생의 목소리는 점점 멀어졌다.내 걸음은 더뎌지다 못해 복도 한쪽에서 완전히 멈췄다.그동안 참아 온 서러움이 한꺼번에 쏟아졌다.나는 길게 숨을 들이마셨다.‘그래도 내게는 떠날 길이 있어. 이틀 뒤면 모든 게 끝나.’국장님이 부탁한 서류를 받아 나오다가 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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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시댁에 도착하자 시어머니인 서미경 교수가 집 앞에서 목을 빼고 기다리고 있었다.차에서 내린 한설아는 서미경 교수에게 달려가 팔짱을 끼며 살갑게 말했다. “교수님! 바람도 찬데 왜 직접 나오셨어요? 얼른 들어가요.”서미경 교수는 자애롭게 웃었다.“설아 너를 기다렸지. 내가 승진이 밑에서 일하게 해 괜히 널 고생시키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승진이 성격이 워낙 별나야지.”한설아는 곁에 서서 부드럽게 웃는 유승진을 흘깃 보더니 귓불을 붉혔다.“유승진 교수님도 저한테 잘해주세요. 힘든 것도 전혀 없고요.”두 사람은 이야기를 나누며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몇 걸음을 앞서가던 서미경 교수는 뒤늦게 나를 떠올린 듯 돌아보았다. 나를 향한 눈에는 선명한 거리감이 담겨 있었다.“지유도 왔구나. 어서 들어와라. 감기 들겠다.”그 말이 전부였다.유승진이 내 곁으로 다가와 내려다보며 미간을 좁혔다. “기분 안 좋아?”“아니.”나는 그저 후련해졌다.유승진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말했다.“일이 마음대로 안 풀렸더라도 집에까지 티 내지는 않았으면 좋겠어. 하루 종일 울상인 사람을 보고 싶지는 않으니까.”옆으로 늘어뜨린 내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그리고 손바닥이 아릴수록 어처구니가 없었다.나는 아주 잠깐이나마 기대했다.‘유승진이 내 감정을 알아챈 건 아닐까?’나는 걸음을 멈췄다. 유승진을 바라보던 눈에서 애정이 걷히고 차분한 냉기만 남았다.“내 기분이 나쁘든 내키는 대로 행동하든 내 마음이야. 보기 싫으면 보지 마.”“나는 당신 집에서 일하는 가정부도 아니고, 당신이 원할 때마다 당신에게 맞춰야 하는 사람도 아니야.”유승진의 입매가 반듯하게 굳었다. 불쾌함을 숨길 생각도 없어 보였다.“임지유, 너도 어른이야. 곧 결혼할 텐데 내 아내가 감정에 휘둘리는 사람이면 곤란해.”나는 비웃듯 짧게 웃었다.“그럼 당신 기준에 맞는 사람은 누군데?”유승진은 진지하게 생각하는 척했지만, 이미 마음속에 답이 있다는 걸 나는 알았다.“누가 됐든 내 아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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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한설아가 조수석에 앉았다. 유승진은 먼저 한설아의 집으로 향했다.뒷좌석에 앉은 나는 프랑스의 집주인과 임대 조건을 조율하고 있었다.“앞으로 와서 앉아.”유승진이 불쑥 말했지만 나는 고개조차 들지 않았다. “됐어.”유승진은 입을 다문 채 잠시 기다렸다.“마음대로 해.”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햇살이 환하게 드는 집이 무척 마음에 들어 곧바로 계약금을 보냈다.집에 도착한 뒤유승진은 서류 가방에서 두꺼운 화보집을 꺼내 내 곁으로 왔다.“한번 볼래?”의아한 채 받아 보니 웨딩드레스 화보였다.“되도록 빨리 하나 골라. 결혼식까지 한 달밖에 안 남았으니 제작실에도 여유를 줘야지.”유승진은 눈꽃을 닮은 입체 장식이 가득 달린 드레스를 가리켰다.“나는 이게 괜찮아 보여.”나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눈꽃, 설아.’‘정말 어디에서나 한설아를 떠올리는구나.’예전의 나라면 분명 화를 냈을 것이다.하지만 지금은 그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괜찮네. 이걸로 하자.”‘어차피 나는 내일이면 이곳을 떠나.’‘한 달 뒤의 결혼식이 나와 무슨 상관일까?’유승진은 순순히 따르는 내 태도가 만족스러운 듯 상이라도 주듯 이마에 입을 맞췄다.“착하네.”“이렇게 하면 돼. 낮처럼 인상 쓰고 있는 건 싫어. 앞으로는 그러지 마. 알겠지?”할 말을 마친 유승진은 혼자 욕실로 들어갔다.나는 소독용 물티슈로 유승진이 입을 맞춘 자리를 벌겋게 달아오를 때까지 몇 번이고 닦고 나서야 손을 멈췄다.시계가 9시를 가리켰다.유승진은 평소처럼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 핸드폰은 뒤집어 놓았고 오른쪽 귀에는 무선 이어폰을 꽂았다.텅 빈 화장대와 욕실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 모양이었다.내 협탁 옆에 놓인 여행 가방도 보지 않았다.‘그럴 만도 하지.’한설아가 아니라면 유승진은 누구에게도 관심이 없었다.깊은 밤이 되었을 무렵, 날카로운 비명에 잠이 깼다.옆에 누워 있던 유승진도 벌떡 일어났다. 크게 당황한 나머지 이어폰을 향해 소리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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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같은 시각, 경휘대 교직원 사택에서 한설아의 곁을 지키던 유승진은 심장을 바늘로 찌르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한설아가 놀라 고개를 들었다.“왜 그래요? 어디 아파요? 안색이 창백해요.”유승진은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잠시 뒤 통증이 조금 가라앉자 약을 물에 타서 한설아에게 건넸다.“괜찮아.”이유를 짚어 보려 해도 답이 나오지 않자 더 생각하지 않았다.“네가 위험하다는 말에 너무 놀랐나 봐. 이제야 긴장이 풀려서 심장이 좀 두근거리는 것뿐이야.”한설아의 귓불이 저도 모르게 붉어졌다.밤에 벌어진 일을 떠올리니 여전히 등골이 서늘했다.“고마워요.”“교수님 아니었으면 오늘 밤 저는 아마...”한설아는 떠오른 듯 덧붙였다. “서 교수님께는 말하지 마세요. 아시면 걱정돼서 밤새 못 주무실 거예요.”유승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침대에 누운 한설아가 여전히 겁에 질려 눈을 감지 못하자 유승진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자. 오늘 밤은 내가 여기 있을게. 어디에도 안 가.”한설아의 눈에 만족스러운 기색이 어렸다.“네.”눈을 감은 한설아는 무의식중에 유승진의 손가락을 찾아 단단히 움켜쥐었다.유승진은 미간을 좁혔다. 반사적으로 손을 빼려 했으나 잠든 뒤에도 불안해하는 한설아를 보고는 그만두었다. ‘됐어. 어린 동생 같은 애일 뿐이니까.’그제야 그는 ‘임지유’가 떠올랐다. 급히 나오느라 집에 남겨 둔 ‘임지유’가 어떻게 하고 있을지 신경 쓰였다.유승진은 핸드폰을 들어 메시지를 보냈다.[설아는 이제 괜찮아. 걱정하지 말고 먼저 자.]답장을 기다렸지만, 평소처럼 곧바로 답이 오지 않았다. 대화창은 조용했다.유승진의 숨이 조금 무거워졌다.‘이 시간이면 잠들었을 테니 답이 없는 게 당연해.’유승진은 핸드폰을 치워 두었다. 한설아가 움켜쥔 손에서 제 손을 조심스레 빼내고 맞은편 일인용 소파로 옮겨 앉았다....다음 날 아침, 교직원 사택을 나온 유승진은 어딘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마주치는 사람마다 유승진과 한설아를 묘한 눈으로 바라보았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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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메시지를 읽은 유승진은 머릿속이 새하얘졌다.‘파혼?’‘지유가?’‘말도 안 돼.’두 사람은 어젯밤에도 웨딩드레스를 함께 골랐다.그런데 손끝은 이미 가늘게 떨렸다. 유승진은 불안과 당혹감에 휩싸인 채 임지유의 SNS 계정을 열었다.계정은 텅 비어 있었다. 맨 위에 고정된 파혼 공지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저와 유승진의 청첩장을 받으신 가족, 친지, 지인 여러분께 사과드립니다.][저희는 파혼했으며 예정된 결혼식도 취소했습니다.][모두 앞날에 좋은 일만 가득하시길 바랍니다.]그게 전부였다.유승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짧은 세 문장을 화면에 구멍이라도 낼 듯 오랫동안 노려봤다.유승진의 모습을 지켜보던 학생들이 서로 눈치를 살폈다.“유승진 교수님 왜 저래? 귀신이라도 본 것 같아. 엄청 충격받은 표정인데?”“누가 알아. 학점만 아니었으면 저런 위선자 수업은 안 들었어. 웃기지도 않아.”학생들이 수군거리던 중, 인문대 최연소 교수인 유승진이 모두가 보는 앞에서 갑자기 강의실 밖으로 뛰쳐나갔다.학생들만 영문도 모른 채 강의실에 덩그러니 남았다.교수가 수업을 내팽개치고 달아났다는 소식은 교내 커뮤니티를 다시 뒤집어 놓았다.온갖 추측이 쏟아지다가 한 학생이 글을 올렸다.[추측할 필요 없어. 우리 언니가 유 교수 약혼자의 친구인데, 오늘 아침 SNS에 파혼 공지가 올라왔대.][...]교내 게시판이 일제히 들끓었다....같은 시각, 유승진은 달리면서 약혼녀인 나에게 계속 전화를 걸었다.세 번의 연결음 뒤에는 차가운 안내 음성만 반복됐다.아무리 눈치가 둔한 유승진도 뭔가 크게 잘못됐다는 걸 알아차렸다.유승진은 나에게 쉴 새 없이 메시지를 보냈다.[SNS에 올린 글이 무슨 뜻이야? 지유야, 나한테 설명해야 하는 것 아니야?][도대체 왜 그래? 내가 뭘 잘못했는지 적어도 말은 해 줘야 하잖아!][지금 집으로 갈게. 우리 만나서 제대로 이야기하자.]마이바흐가 도로 위로 사납게 질주했다.집으로 향하는 내내 유승진의 손바닥에서 흐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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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봄이 가고 가을이 왔다. 또 한 번의 사계절이 내 곁을 지나갔다.내게 시간은 해와 달이 뜨고 지는 일, 바닷물이 차올랐다가 빠지는 일에 지나지 않았다.어느새 일 년이 흘렀다.프랑스에서의 일과 생활은 오래전에 자리를 잡았다.내가 떠나온 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는 전혀 알지 못했다.유승진의 집안과 관련된 사람은 모두 연락처에서 지웠다.유승진을 다시 만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적어도 내 마음은 그 사람을 다시 보길 원하지 않았다.하지만 운명은 잔인할 만큼 얄궂었다.그날 퇴근해 집으로 돌아오는데, 멀리 누런 가로등 아래 쓸쓸한 사람 하나가 서 있었다.내 걸음이 멈췄다. 나를 발견한 유승진의 눈에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격한 감정이 소용돌이쳤다.자리를 피하려 했으나, 유승진이 거칠게 달려와 나를 끌어안았다. 따뜻한 품이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미안해...”사과의 말을 듣고도 잠시 믿기지 않았다.따지러 왔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사과부터 했다.나는 유승진을 가볍게 밀어냈다.“사과는 받을게.”그대로 돌아서 걸었다.옆을 스쳐 지나가려 하자 유승진이 내 팔을 붙잡았다. 나를 바라보는 눈동자가 흔들렸다.“지유야, 1년 내내 너를 찾아다녔어.”유승진은 씁쓸하게 웃었다.“네 직장에 찾아가도 담당자들은 보안 사항이라며 알려 주지 않았어. 장인어른과 장모님 댁에 갔더니 두 분이 빗자루를 들고 나를 내쫓으셨고.”“그래도 달리 방법이 없어서 복도에서 계속 기다렸어. 네가 어디 있는지 아는 사람은 너희 부모님뿐이었으니까.”유승진은 내 눈을 오래 들여다보았다.“네가 떠났을 때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어. 네가 왜 갑자기 파혼한 건지 몰랐어.”그 말을 듣자 내 몸이 미세하게 굳었다.유승진은 계속 말했다.“이제는 알아. 내가 지켜야 할 선을 몰랐고, 한설아를 챙긴다는 명목으로 오빠와 동생 사이에서 허용될 수 있는 범위를 훨씬 넘어섰기 때문이야.”“그래도 지유야, 이것만은 믿어 줘. 나는 한설아에게 다른 마음을 품은 적도, 선을 넘는 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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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병원에 도착했을 때 유승진은 여전히 두 눈을 감은 채 병상에 누워 있었다.안색은 몹시 창백했다.5년을 함께하면서도 저런 유승진의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나는 무심히 한 번 쳐다보았을 뿐이다. ‘죽지만 않았으면 좋겠네. 죽기라도 하면 괜히 재수 없을 테니까.’막 병실을 나서려는데, 뒤에서 유승진이 흐릿하게 눈을 떴다. 입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심하게 쉬어 있었다.“지유야.”나는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나는 평온했고, 유승진의 눈에는 깊은 고통이 담겨 있었다.“내가 그렇게 미워?”유승진의 눈시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유승진은 예전을 떠올렸다. 위염으로 앓거나 열이 날 때마다 임지유가 곁에서 간호했다.지난 세월 내내 나는 직접 밥을 지어 유승진을 챙겼다.덕분에 유승진이 위의 통증을 겪는 횟수도 차츰 줄었다.잠에서 깰 때면 침대 곁에 엎드려 잠든 임지유가 보였고, 내 손은 유승진의 손을 꼭 쥐고 있었다.그 모습을 볼 때마다 유승진의 마음은 조금씩 부드러워졌다.하지만 감정을 드러내면 안 된다고 여겼다. 내가 깨어날 때쯤이면 다시 기쁨도 화도 드러내지 않는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갔다.이제는 달랐다. 자신이 아픈데도 내가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자 유승진은 정말로 겁이 났다.나를 붙잡을 방법이 더는 떠오르지 않았다.그 생각만으로도 심장이 다시 찌르듯 아팠다.한편, 나는 서서히 붉어지는 유승진의 눈가를 고요히 바라보았다. 마음에는 어떤 파문도 일지 않았다.예전에는 수없이 많은 밤을 혼자 뜬눈으로 지새웠다.유승진의 잠을 방해할까 봐 서러움을 털어놓지도 못한 채, 나 역시 그렇게 울었던 밤이 셀 수 없이 많았다.‘하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이 있나?’유승진은 다른 여자와 밤새 통화를 이어 가면서도 내 기분은 한 번도 묻지 않았다.그제야 선명히 깨달았다. 용서할 수 없다는 마음보다 더 큰 건 증오였다.나를 마치 없는 사람처럼 대한 유승진이 미웠다. 가장 무력했던 밤, 나를 지구대에 홀로 남겨 두고 스토킹한 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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