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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Author: 보루비
문강찬은 진윤슬이 고통스럽게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지 못하고 고개를 숙여 이불을 덮어주었다.

“푹 쉬어. 이따가 또 올게.”

그는 쓸데없는 생각만 하는 아내와 더는 언쟁하고 싶지 않았다.

“진윤슬, 너 또 세린이 괴롭혔지?”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벽에 부딪혔고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훤칠한 남자가 성큼성큼 들어왔는데 진윤슬과 닮은 얼굴에 분노가 가득했다. 시선이 진윤슬의 창백한 얼굴에 닿은 순간 잠깐 놀라는가 싶더니 이내 거센 질책이 이어졌다.

“오늘 세린이 생일인 거 뻔히 알면서 이 밤에 난리를 피워? 우리 기분 잡치게 하려고 작정했어?”

진태호는 침대에 누워있는 진윤슬을 죽일 듯이 노려보면서 불같이 화를 냈다.

“온 집안이 시끄러워야 속이 시원해?”

그는 진윤슬이 진세린의 생일 파티를 망치려고 일부러 아픈 척한다고 확신했다.

진윤슬이 주먹을 꽉 쥐었다. 병상에 누워있는 그녀를 보면서도 친오빠라는 사람은 왜 아프냐는 둥 병원에 왜 왔냐는 둥 쏘아붙였다.

마음속에 씁쓸함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아픈 것도 날을 골라가면서 아플 수 있어?”

진윤슬이 싸늘하게 받아쳤고 갈라진 목소리에 조롱이 가득했다.

진태호가 경멸과 짜증이 가득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됐어. 아픈 건 아픈 거고 세린이 좋은 마음으로 보러 왔는데 왜 울렸어?”

조금 전 밖에서 진세린이 눈물을 훔치는 모습을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 굳이 묻지 않아도 진윤슬이 울린 게 틀림없었다.

‘넌 늘 이런 식이지. 말마다 가시가 돋쳐 있어. 세상 사람들이 모두 너한테 잘못이라도 한 것처럼.’

진윤슬의 시선이 진태호의 뒤에 있는 진세린에게로 향했다. 두 눈이 붉어진 채 가여운 모습으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오빠, 언니 때문이 아니야. 내... 내 눈에 모래가 들어갔나 봐.”

이런 설명은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격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진태호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진윤슬, 파렴치한 생각 따위 집어치워. 우리 진씨 가문은 너한테 빚진 거 없고 세린이도 너한테 빚진 거 없다는 걸 명심해.”

“오빠, 그만해. 언니 임신한 몸이야.”

진세린이 진태호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리고 내 잘못이야. 언니가 임신한 걸 알면서도 강찬 오빠를 불러 생일을 같이 보내자고 졸랐어. 그것 때문에 언니가 결국 입원까지 하게 됐고.”

그러고는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

진윤슬은 치밀어 오르는 분통함을 억누르려고 손바닥을 꼬집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싸우고 싶지 않았다. 싸워봤자 마지막에 힘든 건 그녀일 테니까.

하지만 진태호는 멈추지 않았다.

“임신한 사람이 뭐 얘 혼자야? 얘만 귀한 몸이야?”

“그만해.”

문강찬이 얼굴을 찌푸렸다. 속으로는 진윤슬이 억지를 부린다고 생각했지만 진태호의 말이 지나친 건 사실이었다.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던 진태호가 코웃음을 쳤다.

“지금은 아픈 척하는 정도에 그치지만 나중엔 아이 가지고 무슨 짓을 할지 몰라. 얘처럼 제멋대로 굴고 억지만 부리는 엄마를 둔 아이도 참 불쌍해.”

문강찬의 말이 진윤슬의 심장을 찌르는 칼날이었다면 진태호의 말은 온몸을 꿰뚫는 화살이었다.

진윤슬은 분노에 휩싸인 나머지 온몸을 떨었다. 베개를 집어 던지며 진태호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내 눈앞에서 꺼져!”

절망과 상처로 얼룩진 눈에서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진태호가 좋은 오빠가 되리라고는 기대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런 말을 해서는 안 되었다.

베개를 쳐낸 진태호가 붉으락푸르락해진 얼굴로 거친 말을 쏟아냈다.

“내가 틀린 말 했어?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를 이용해서 아픈 척하고 있잖아. 아이가 뱃속에서 죽어버릴까 걱정도 안 돼?”

입을 열 때마다 독설이었다.

“그만하라고.”

문강찬이 미간을 찌푸리며 진태호를 노려봤다.

진윤슬이 억지를 부려서 화가 난 건 사실이었지만 진태호가 그의 아내와 아이에게 이런 독설을 내뱉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꺼지라고 했지?”

진윤슬의 두 눈에 핏발이 섰다. 침대에서 일어나 손에 잡히는 대로 진태호에게 집어 던졌다. 마치 원수라도 되는 듯이.

그 모습에 문강찬이 재빨리 그녀의 손목을 잡고 확 잡아당겼다. 잔뜩 찌푸린 미간에 불만이 가득했다.

“진윤슬, 이제 좀 그만하지?”

진윤슬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눈물이 창백한 볼을 타고 흘러내렸고 붉게 충혈된 두 눈에 섬뜩한 증오심이 가득했다.

“강찬 씨도 나가.”

입술도 창백하기 그지없었고 말투도 조롱 섞인 말투였다.

“진윤슬.”

문강찬이 화가 난 듯 더욱 무거운 말투로 말했다.

“언니, 진정해. 아기 생각도 해야지.”

진세린이 걱정 가득한 얼굴로 다가와 진윤슬을 부축하려 했다.

“꺼져.”

진윤슬은 문강찬이 잡고 있던 손목을 빼내고는 다가오는 진세린을 막았다. 그런데 움직임이 컸던 탓에 손바닥으로 진세린의 손등을 치고 말았다.

“으악.”

진세린이 손등을 잡고 소리를 질렀다.

“진윤슬.”

진태호는 진윤슬을 당장이라도 잡아먹을 듯한 얼굴로 날카롭게 소리쳤다.

“세린이는 널 걱정해서 그러는데 때리기까지 해? 당장 세린이한테 사과해.”

몸 깊숙한 곳에서부터 찢어지는 듯한 통증이 밀려와 몸을 파르르 떨었다.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고 아픔을 참으려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언니 탓이 아니야. 내가 실수로 그런 거야.”

진세린이 눈물을 머금고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모습으로 설명했다.

“강찬아, 그냥 보고만 있을 거야?”

진윤슬이 꼼짝도 하지 않자 진태호의 시선이 문강찬에게로 향했다.

진윤슬도 문강찬을 쳐다보았다. 남편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지만 지금은 참기 힘든 통증에 정신이 혼미해져 조금의 희망을 걸었다.

문강찬이 조금만 관심 있게 본다면 그녀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걸 알아차릴 수 있을 텐데.

“윤슬아, 세린이는 좋은 뜻으로 그런 건데 네가 지나쳤어.”

문강찬이 시선을 늘어뜨린 채 차갑게 말했다.

진윤슬이 힘들게 몸을 일으켰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어깨 위로 흩날렸고 가뜩이나 수척하던 얼굴이 비정상적으로 창백했다.

그녀는 어두운 눈빛으로 문강찬을 빤히 보면서 냉랭하게 말했다.

“강찬 씨, 못 들었어? 오빠가 방금 강찬 씨 아이가 죽길 바라는 식으로 저주했잖아.”

아내가 핏기없는 얼굴로 병실 침대에 누워있는데도 문강찬은 그녀가 아픈 척하는 거라고 생각했고 진태호가 그의 아이를 저주해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진윤슬이 다가오는 진세린을 밀어내려다 실수로 손등을 쳤을 뿐인데 그녀가 지나치다고 했다.

이건 명백한 편애였다.

진윤슬은 이 순간 자신이 너무나 가엽게 느껴졌다.

남편의 사랑도, 가족의 관심도 얻지 못했다. 그녀가 얻은 거라곤 오직 끝없는 의심과 상처뿐이었다.

문강찬의 마음속에서 진윤슬은 대체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 걸까?

“오빠가 일부러 그런 거 아니야.”

진세린이 진태호 대신 사과했다.

“오빠도 날 걱정해서 그런 소리를 한 거야. 내가 오빠 대신 사과할게.”

진태호는 그녀에게 고마움의 눈빛을 보냈다. 진세린을 아끼는 마음이 더해진 대신 진윤슬에 대한 혐오감이 더욱 커졌다.

“다들 나가.”

문강찬은 미간을 찌푸린 채 진윤슬을 쳐다보았다.

“계속 이런 식으로 억지를 부리면 아이한테도 좋지 않아.”

진윤슬이 이를 악물었다. 아랫배의 통증이 점점 심해져 눈앞이 캄캄해졌다.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던 그녀는 쿵 하고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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