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제3화

Author: 보루비
“또 쇼하네.”

진태호는 콧방귀를 뀌고는 땅에 쓰러진 진윤슬을 내려다보았다.

“진윤슬, 켕기는 게 있으니까 기절하는 척하는 거지? 여기 병원인 거 잊었어? 의사가 보면 바로 알아.”

문강찬이 진윤슬을 안아 올렸다. 정말 깃털처럼 가벼웠다.

순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최근 진윤슬을 거의 보지 못해 이렇게나 살이 빠진 줄도 몰랐다.

“의사 불러올게.”

진태호는 진윤슬의 거짓말을 폭로하려는 듯 밖으로 나갔다.

바로 그때 병실 문이 열리더니 간호사가 들어왔다.

진윤슬이 유산했는데도 옆에 보호자가 없어 약을 갈아야 하는 시간을 간호사가 직접 기억했다. 마침 진윤슬도 수액 한 병을 다 맞았다.

그런데 진윤슬의 상태와 손등의 피를 보자마자 간호사의 안색이 급변하더니 즉시 비상벨을 눌렀다.

“선생님, 29번 환자 의식이 없어요. 응급 처치가 필요합니다.”

곧이어 복도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울려 퍼졌고 의사와 간호사 몇몇이 달려와 진윤슬을 둘러쌌다.

의사는 진찰 후 진윤슬을 응급실로 옮겼다.

문밖에 있던 문강찬은 저도 모르게 가슴이 쿵 내려앉는 것 같았고 심장도 빨리 뛰었다.

그때 진태호의 무심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간호사님, 쟤 지금 연기하는 거니까 이렇게 호들갑 떨 필요 없어요.”

그 말에 간호사가 짜증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환자분이 아픈 척하는 건지 아닌지, 그쪽이 우리보다 더 잘 알아요?”

진윤슬의 창백한 얼굴이 떠오른 문강찬이 물었다.

“대체 어디가 아픈 겁니까?”

“환자분 유산했어요.”

간호사는 짧게 대답한 후 급히 응급실로 들어갔다.

복도에 침묵이 감도는 가운데 진세린이 중얼거렸다.

“언니 어쩌다가 유산했지?”

문강찬이 넋을 잃은 얼굴로 서 있었다. 조금 전 진태호의 말을 들은 후 진윤슬이 흥분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휴대폰을 꺼내 비서에게 오늘 밤 있었던 일들을 자세히 알아보라고 문자를 보냈다.

진태호가 중얼거렸다.

“유산했다고? 설마 일부러 그런 거 아니야?”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문강찬이 고개를 들어 진태호를 싸늘하게 노려보았다.

순간 움찔한 진태호가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냥 좀 이상해서 그러지...”

진세린이 진태호의 팔을 잡아당기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빠, 제발 좀 그만해.”

문강찬이 싸늘한 표정을 짓자 상대를 짓누르는 듯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윤슬이는 내 와이프야. 또 함부로 말했다간 가만두지 않아.”

진태호는 입술만 삐죽거릴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약 한 시간 후 진윤슬이 응급실에서 나왔다. 의사의 치료 덕에 그녀의 상태가 안정되었다.

간호사가 물었다.

“환자 보호자분 계십니까?”

문강찬이 대답했다.

“제가 남편입니다.”

간호사는 문강찬을 경멸 섞인 눈빛으로 훑어보면서 당부했다.

“환자분 유산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안정을 취하셔야 합니다. 되도록 병실에 사람을 많이 들이지 마세요...”

...

진윤슬이 다시 눈을 떴을 땐 문산 그룹 산하 개인 병원의 고급 병실이었다.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문강찬이 옮긴 게 틀림없었다.

“아직 아파?”

나지막하게 묻는 문강찬의 얼굴에 어제 보였던 냉정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진윤슬이 고개를 들었다. 이젠 문강찬을 마주해도 마음이 여전히 텅 빈 것 같았다. 다시금 흔들리는 감정을 억누르려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문강찬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

“윤슬아, 어젯밤에는 정말 미안해. 그런 일이 있은 줄 알았다면...”

무조건 사람을 보냈을 텐데.

“강찬 씨, 3년의 계약이 거의 끝나가고 있어.”

진윤슬이 가볍게 말했다. 얼굴은 계속 창밖을 향하고 있었고 표정은 무덤덤했다.

문강찬의 시선이 진윤슬에게 닿았는데 검은색 셔츠를 입어 더욱 음울해 보였다.

그때 진윤슬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문강찬을 보면서 차분하게 말했다.

“계약 기간은 아직 석 달 남았고 이혼 숙려 기간은 한 달이야.”

두 사람이 결혼할 때 서로 원하지 않아 3년의 계약을 맺었다. 3년이 지나도 서로에게 마음이 생기지 않으면 이혼하기로 했다.

진윤슬이 지금 3년을 언급한 건 이혼하겠다는 뜻이었다.

“아이는 또 가질 수 있으니까 힘내.”

문강찬이 입술을 깨물면서 고개를 숙였다. 아이를 잃어 그도 고통스러운 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건 사고였다.

“내가 앞으로 아이를 또 가질 수도 있겠지만 아이의 아빠는 절대 강찬 씨가 아닐 거야.”

진윤슬이 마음속에 담아뒀던 말을 아무렇지 않게 했다.

“강찬 씨, 세린이 귀국했잖아. 세린이랑 결혼하고 싶다면... 내가 자리를 내줄게.”

“나랑 세린이는 아무 사이 아니야.”

문강찬의 입가에 맴돌던 부드러움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진윤슬은 그와 이런 일로 언쟁하고 싶지 않았다. 어쨌거나 문강찬과 진세린 사이에 특별한 일이 없는 건 사실이니까. 다만 남편이 다른 여자의 주변을 맴도는 걸 참을 수 없었을 뿐이었다.

심지어 아이를 잃었는데도 문강찬은 아무렇지 않은 듯했다.

어쩌면 아이를 품지 않아서 혈육의 끈으로 맺어진 기묘한 감정을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따라서 아이를 잃은 후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고 또 가질 수 있다는 잔인한 말을 가볍게 내뱉을 수 있었던 것이었다.

“두 사람이 무슨 사이라고 한 적 없어. 그런데 강찬 씨가 세린이를 마음에 두고 있는 건 사실이잖아. 이젠 세린이가 귀국했으니까 다시 만나도 되지.”

진윤슬은 모든 걸 내려놓았다. 남편이 다른 여자 옆에 있고 싶다면 아내로서 기꺼이 허락할 수 있었다.

“말했잖아. 우린 깨끗하다고.”

문강찬의 두 눈에 냉기가 흘렀다. 잠깐 멈칫하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아이를 잃어서 마음이 아픈 건 알겠지만 세린이랑은 아무 상관 없어.”

진윤슬이 낮게 기침하더니 눈가가 점점 붉어졌고 숨이 잘 쉬어지지 않을 정도로 가슴이 답답했다.

“윤슬아...”

“강찬 씨도 알잖아. 내가 임산부였었다는 거.”

진윤슬은 문강찬의 말을 가로채고 차가운 눈으로 비웃었다.

“강찬 씨는 내가 방해할까 봐 내 전화를 받지 않았어. 휴대폰을 무음으로 설정해놓았지?”

그녀는 문강찬이 한 일들을 하나하나 짚어냈다. 추측이었지만 거의 다 사실이었다.

원래는 까발리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진세린은 아무 잘못 없다고 문강찬이 여러 번이나 말하는 걸 듣고 나니 진저리가 났다.

문강찬이 입을 굳게 다물고 침묵했다. 왜냐하면 진윤슬의 추측이 거의 맞았으니까. 진윤슬이 전화 온 걸 봤을 때 그녀가 또 무슨 일을 벌이려는 줄 알고 휴대폰을 무음으로 설정해놓았다.

이제 와서야 후회가 밀려왔다.

“이미 이렇게 됐는데 얘기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어.”

더는 언쟁하고 싶지 않았던 문강찬은 곧장 밖으로 향했다.

“쉬어. 난 처리해야 하는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

병실 문이 닫혔고 주변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진윤슬이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었지만 눈빛은 슬프기 그지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 새 휴대폰을 가져다줬다. 전에 쓰던 휴대폰이 폭우 때문에 고장 난 바람에 새로 하나 장만했다.

휴대폰을 켜자 문자가 쏟아져 들어왔다. 걱정하는 문자도 있었고 따지는 문자도 있었다.

진윤슬은 휴대폰을 던져두고 전부 무시해버렸다.

반나절 정도 자고 나니 정신이 한결 맑아졌다.

오후 6시쯤 휴대폰이 울렸는데 절친 임청아의 전화였다. 그녀는 망설임없이 전화를 받았다.

“청아야.”

임청아가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윤슬아, 향수 대회에 왜 안 왔어?”

진윤슬이 침대에서 벌떡 일어난 순간 다시 통증이 느껴졌다. 잠깐 진정한 후 자신의 상태를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일이 생겨서 못 갔어.”

휴대폰 너머로 몇 초간 침묵이 흐르고 나서야 임청아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네 남편이 왔는데 진세린이랑 같이 왔더라고. 두 사람 팔짱도 끼고 아주 다정해 보였어. 게다가 진세린이 입은 옷이... 아니다. 그냥 사진 보내줄게.”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atest chapter

  • 유산은 모른 척, 이혼에 왜 눈물?   제100화

    문강찬은 출장 중에도 진윤슬에게 전화를 걸어 약을 꼭 제때 챙겨 먹으라고 당부했다.진윤슬은 아랫배를 쓰다듬었다. 그녀 역시 아이를 간절히 원했기에 약을 거르지 않을 것이다.기분이 한결 좋아졌고 문강찬의 당부도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알았어.”한 가족이 되는 장면을 상상하던 문강찬은 갑자기 가슴이 따뜻해졌다.“윤슬아, 나 곧 돌아갈 테니까 기다려.”당장이라도 그녀를 품에 안고 따스하게 보듬고 싶었지만 이번 프로젝트가 너무 중요해서 자리를 비울 수 없었다.진윤슬은 휴대폰을 쥔 채 잠시 멍하니 있었다. 문강찬에 대한 감정이 한층 더 복잡해졌다.그의 변화가 느껴졌고 과거의 상처를 보듬으려 애쓰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이미 입힌 상처는 쏟아진 물과 같았다.문강찬을 다시 믿을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다. 게다가 진세린이라는 죽마고우도 여전히 걸림돌이었다.진세린 생각에 진태호도 함께 떠올랐다.이미 변호사를 통해 진태호를 고소했고 곧 재판이 시작될 것이다. 이제 그녀와 진씨 가문의 관계는 완전히 끝장나는 길로 접어들었다.진윤슬은 고개를 돌려 잠든 할머니를 보았다.할머니가 그녀에게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신경 쓰지 말라고 거듭 말했지만 진윤슬은 알고 있었다. 할머니의 마음이 얼마나 아픈지.하룻밤이 지났다.도우미가 약을 가져왔고 박순옥의 몫도 있었다.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며 환하게 웃었다. 서로의 평온한 눈빛을 바라보니 마음도 편안해졌다.약을 먹고 진윤슬이 잔을 씻던 그때 병실 문이 갑자기 벌컥 열렸다.진성국이 몇몇 사람들을 데리고 쳐들어왔다.진윤슬의 얼굴이 순식간에 확 굳어졌다.“여긴 어떻게 들어왔어요?”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진성국이 데려온 사람들이 그녀의 어깨를 붙잡더니 침대 옆으로 끌고 갔다.화가 난 박순옥이 이불을 치며 소리쳤다.“진성국, 지금 뭐 하는 거야?”진성국은 잠시 망설였지만 진태호를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았다.“어머니, 저도 이러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제게 아들이라곤 태호 하나뿐이에요. 제발 윤슬이를 설

  • 유산은 모른 척, 이혼에 왜 눈물?   제99화

    “아이를 낳기 어렵다고 했지, 불가능하다고는 하지 않았어.”진윤슬이 입술을 깨물었다. 김해인도 비슷한 말을 했었다. 몸을 잘 요양하면 엄마가 될 기회가 있을 거라고.하지만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저 위로의 말일 뿐이라는 걸.흠칫 놀란 문강찬이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이분 명의셔. 다시 한번 진찰받아봐.”진윤슬은 흰 수염이 덥수룩한 한의사를 보면서 순순히 자리에 앉았다.마음 깊은 곳에서 사실 그녀도 아이를 간절히 원했다. 양의가 안 된다고 해서 한의도 안 될 거란 법은 없었다.이번 진맥은 유난히 길었다.진윤슬은 처음에는 설렘과 기대에 차 있었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절망으로 가라앉았다. 저도 모르게 얼굴이 창백해졌다.‘역시 안 되는구나.’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진윤슬은 이젠 완전히 포기했다.문강찬도 초조하긴 마찬가지였지만 애써 태연한 척하며 물었다.“아저씨, 어때요?”여현식은 한참 동안 생각한 후에야 입을 열었다.“일시적으로 한기가 막혔을 뿐이야. 약 몇 첩 먹으면 뚫릴 거야.”진윤슬이 주먹을 꽉 쥐고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정말입니까?”‘정말로 희망이 있는 거야? 나 다시 엄마가 될 수 있어?’문강찬의 눈에도 눈물이 어렸다. 그는 아내의 어깨를 힘껏 끌어안았다.“윤슬아, 정말이야.”진윤슬은 손으로 입을 막고 참았던 눈물을 터뜨렸다. 문강찬은 그녀를 꽉 끌어안았고 뜨거운 감정이 가슴을 채웠다.그들은 다시 아이를 가질 수 있게 되었고 진윤슬의 마음을 돌릴 기회가 생겼다.처방전을 써준 후 여현식은 문중엽을 진찰하러 갔다.문강찬은 따라가지 않고 직접 약을 지으러 갔다.병실로 돌아온 진윤슬은 여현식이 했던 말을 할머니에게 일일이 전했다.박순옥이 눈물을 글썽거리며 손녀의 손을 꼭 잡았다.너무 다행이었다. 만약 진윤슬이 엄마가 된다면 이젠 눈을 감아도 여한이 없을 것 같았다.진윤슬은 여전히 불안했다.“약을 먹어도 안 되면 어쩌죠?”또다시 실망할까 봐 두려웠다.“난 그 선생님을 믿어.”박순옥이 확신에 찬

  • 유산은 모른 척, 이혼에 왜 눈물?   제98화

    성예빈의 말은 마침 문강찬의 마지노선을 건드렸다.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성예빈의 창백한 얼굴을 쳐다보았다.“지금 나한테 이래라저래라하는 거야?”성예빈이 억울해하며 이를 악물었다.“진윤슬 씨, 여기 CCTV 있어요. 어디서 헛소리예요?”문강찬이 확인만 하면 그녀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는 게 밝혀질 것이다.진윤슬은 고개를 들어 문강찬을 쳐다봤고 목소리는 평소처럼 담담했다.“예빈 씨를 믿어, 아니면 날 믿어?”“당연히 너지.”문강찬이 망설임 없이 대답하자 성예빈이 당황해했다. 자신이 진윤슬보다 못할 줄은 몰랐다.“윤슬 씨가 거짓말했어.”진윤슬은 그녀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그래요. 거짓말했어요. 그래서 어쩔 건데요?”그녀가 당당하게 인정하자 오히려 성예빈이 흠칫 놀라 할 말을 잃었다.진윤슬은 문강찬의 손을 뿌리치고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사실 문강찬의 앞에서 그런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성예빈이 그녀의 아이가 복이 없다고 말한 순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성예빈은 문강찬에게로 다가가 눈시울이 붉어진 채로 말했다.“오빠, 정말로 저 여자가 거짓말했어.”“내 아이가 복이 없다고 한 것도 거짓말이야?”문강찬의 준수한 얼굴에 서늘한 그림자가 드리웠다.“그건...”“성예빈, 내 와이프는 오직 진윤슬뿐이야. 넌 윤슬이의 출신과 내 아이를 모욕했어. 네 아버지한테 직접 찾아가서 대체 딸 교육을 어떻게 했는지 물어볼까?”문강찬은 몸을 돌려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성예빈이 그의 뒷모습을 향해 소리쳤다.“난 오빠 때문에 돌아온 거란 말이야.”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문이 닫히는 소리뿐이었다.성예빈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를 만나려고 일부러 돌아왔건만 그의 마음에는 오직 이혼한 전처뿐이었다.병실 안.문강찬이 데려온 한의사 여현식이 박순옥의 맥을 짚고 있었다. 진윤슬은 곁에 조용히 서서 숨을 죽인 채 결과를 기다렸다.박순옥은 덤덤하기만 했다. 생로병사는 이미 받아들인 지 오래였다. 그녀가 유일하게 마음을 놓지 못하는 건

  • 유산은 모른 척, 이혼에 왜 눈물?   제97화

    모든 일에 용서가 따르는 건 아니다.문강찬이 입을 꾹 다물었다.그때 그녀가 억지를 부린다고 생각한 탓에 평생 후회할 일을 만들었다....진윤슬은 성예빈이 찾아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성예빈이 카네이션 꽃다발을 들고 와 침대 옆에 내려놓으며 말했다.“할머니, 인사드리러 왔습니다.”박순옥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진윤슬을 쳐다보았다.“이분은?”진윤슬의 안색이 굳어지더니 성예빈을 내보내려 했다.“성예빈 씨, 여긴 예빈 씨를 반기는 사람이 없어요.”진윤슬은 이미 그녀에게서 수상한 기운을 감지했다.성예빈은 나가지 않고 가방에서 수표를 꺼냈다. 상냥한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말속에는 협박이 섞여 있었다.“이 수표는 나의 작은 성의입니다.”진윤슬은 수표를 싸늘하게 내려다보았다. 성예빈이 벌써 돈으로 그녀를 쫓아내려 할 줄은 몰랐다.그녀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성예빈은 미소를 지으며 수표를 옆 테이블에 올려놓았다.“윤슬 씨가 조향에 관심이 많다고 들었어요. 캐서린 마스터한테서 배울 수 있도록 추천해줄 수 있는데 어때요?”조건을 더하면 진윤슬의 마음이 무조건 움직일 거라고 생각했다. 성예빈이 박순옥을 보며 말했다.“그리고 태호 오빠 일 말이에요. 할머니, 태호 오빠는 할머니 손자잖아요. 윤슬 씨한테 너무 심하게 하진 말라고 하세요.”“성예빈 씨.”진윤슬은 쉴 새 없이 재잘거리는 성예빈의 말을 가로챘다.“이만 나가세요.”성예빈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병실을 나섰다. 복도에 서서 오만한 태도를 보이며 말했다.“태호 오빠는 윤슬 씨 오빠인데 신고하면 어떡해요?”지시하는 듯한 말투는 듣는 이의 불쾌감을 자아냈다.“다른 사람은 생각 안 해도 할머니 생각은 해야죠. 할머니 연세도 많으신데 이젠 자식들 곁에서 노년을 누리면서 사셔야 하지 않겠어요?”그녀의 말에 노골적인 협박이 담겨 있었다.진윤슬은 그녀에 대한 혐오감이 마구 밀려왔다.“예빈 씨, 시간만 되면 바로 이혼 도장을 찍으러 갈 테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예빈 씨랑 강찬 씨의 결혼에 방해되는 일

  • 유산은 모른 척, 이혼에 왜 눈물?   제96화

    병원으로 돌아가는 길, 문강찬이 무슨 말을 해도 진윤슬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문강찬은 미간을 주물렀다. 맞선 얘기는 더 이상 꺼내지 않고 유명한 한의사를 모셔 와 박순옥의 맥을 짚게 하겠다고 했다.“여현식 한의사 선생님을 모셔왔어. 할머니 몸을 잘 보살펴주실 거야.”진윤슬이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할머니라는 걸 알기에 이번에 특히 신경을 썼다. 하지만 진윤슬은 고마워하지 않았다.고개를 들어 문강찬을 보면서 코웃음을 쳤다.할머니가 창백한 얼굴로 누워 있는 모습만 생각하면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문강찬에게 왜 시원하게 이 결혼에 마침표를 찍지 못하고 그녀와 그녀 주변 사람들을 자꾸만 괴롭히는지 따져 묻고 싶었다.하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고 이젠 아무 의미도 없었다.진윤슬이 나지막하게 말했다.“성예빈 씨가 강찬 씨랑 정말 잘 어울리는 것 같아.”성예빈은 집안이 훌륭하고 품위도 있었다. 문씨 가문 사모님에게 어울리는 배경과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두 사람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함께 걸어가는 모습은 정말 선남선녀가 따로 없었다.만약 그들이 순조롭게 이혼한다면 성예빈이 미래의 안주인이 될 것이다.“축하해.”진윤슬이 진심으로 말했다.문강찬의 마음속에서 들끓던 감정이 식어버렸다. 칠흑 같은 눈동자로 진윤슬의 수수하고 깨끗한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우리가 아직 완전히 이혼한 것도 아닌데 벌써 날 다른 여자한테 떠넘기려고 안달이 난 거야?”차가운 목소리에 옅은 분노가 섞여 있었다.문강찬은 이미 그의 진심을 그녀에게 보여줬지만 그녀는 헌신짝처럼 버렸다.두 사람의 거리가 가까워지자 그들의 숨결이 억지로 뒤섞였다.진윤슬의 맑은 눈은 차분하기만 했다.“우린 이제 이혼 도장만 찍으면 돼.”진윤슬이 덤덤하게 말했다. 문강찬만 원한다면 이혼은 아주 순조로울 것이다.“난 그 여자를 좋아하지 않아.”문강찬이 가슴속의 분노를 한숨으로 토해내더니 아내를 힘껏 끌어안고 고개를 숙여 입술에 입을 맞췄다.“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너야.”어두운

  • 유산은 모른 척, 이혼에 왜 눈물?   제95화

    “쟤가 계속 강찬 오빠를 좋아했거든. 이번에 귀국한 것도 강찬 오빠랑 선보려고 귀국했대. 집안 형편도 비슷해서 양쪽 집안이 다 만족스러워한다고 들었어.”진세린은 진윤슬이 속상해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런데 진윤슬의 표정은 전혀 흔들림이 없었고 너무나 평온했다.진세린이 실망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집안도 빵빵해서 정말 잘 어울려.”진윤슬은 진세린의 속셈을 훤히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녀는 그저 가소롭기만 했다. 진태호 핑계를 대고 있지만 속으로는 여전히 시시콜콜한 연애 감정이나 따지고 있었다.“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진윤슬이 코웃음을 치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문강찬과 성예빈은 자리에 앉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진윤슬을 발견했다.문강찬의 안색이 살짝 변하더니 바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진윤슬.”진윤슬은 차가운 태도로 고개를 돌렸다.“나한테 볼일 있어?”문강찬은 그녀의 손목을 잡고 옆으로 잡아당겼다.성예빈이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품위를 유지하며 물었다.“오빠, 이분은 누구셔?”문강찬이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내 와이프.”네 글자에 그의 태도가 분명하게 드러났다.성예빈의 얼굴에 나타났던 미소가 옅어졌다. 문강찬과 아내 사이가 좋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문강찬이 자기 마음을 깨달았을 줄은 몰랐다.“진윤슬 씨, 반가워요.”그녀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진윤슬은 그들 사이에 끼고 싶지 않아 힘껏 손을 빼내며 예의 바르게 웃었다.“이혼 숙려 기간이니 신경 쓰지 마세요, 성예빈 씨. 그럼 계속 얘기 나누세요.”그녀는 발걸음을 재촉해 자리를 떠났다.문강찬이 그녀를 뒤쫓아 나왔다.“윤슬아, 내 말 좀 들어봐.”그는 문 앞에서 진윤슬의 손목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할아버지께서 마련한 자리라 어쩔 수 없이 나온 거야. 난 저 여자한테 아무 감정 없어.”진윤슬은 이런 변명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어쨌거나 곧 이혼 도장을 찍을 사이니까.두 사람은 이제 아무 관계도 아니기에 문강찬이 누구와 선을 보든 아무렇지도 않았다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