登入경다혜가 이런 일로 온세아를 불러냈을 줄은 상상조차 못 했다.“그게... 저도 남자를 꼬셔본 본 경험이 없어서요. 아무래도 도움을 못 드릴 것 같네요.”온세아가 난처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거창하게 도와달라는 게 아니에요. 그냥 태혁 씨 스케줄을 살짝 귀띔만 해줘요. 내가 우연을 가장해서 태혁 씨와 마주칠 수 있게 말이에요.”“그런 거라면 백 실장님을 찾아가셔야죠. 백 실장님이 대표님의 스케줄을 전담하시거든요.”온세아가 어떻게든 발을 빼려 하자 경다혜의 표정이 우울해졌다.“저라고 안 찾아가 봤겠어요? 그런데 실장님은 태혁 씨의 최측근이고 강 비서님처럼 외국에 있을 때부터 함께 일한 분이에요. 알아보니까 태혁 씨 곁에 있는 사람 중에 막 승진해서 올라온 사람이 세아 씨밖에 없더라고요.”온세아의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내가 대표님을 가장 배신할 것 같은 사람처럼 보여서 날 택한 거였구나.’“제가 부서를 이동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대표님의 일에 대해 모르는 게 많아요.”“그럼 세아 씨가 아는 것만 전부 말해줘요. 공짜로 도와달라는 게 아니에요.”그러고는 수표 한 장을 온세아에게 들이밀었다. 온세아가 다급하게 손사래를 쳤다.“이러실 필요 없어요...”경다혜가 기어이 그녀의 손에 수표를 쥐여주려 하자 결국 온세아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다혜 씨가 절 친구로 생각한다고 하셨으니 공짜로 도와드릴게요. 수표는 제발 거둬주세요.”만약 경다혜가 정말로 권태혁과 잘 된다면 온세아에게도 그리 나쁜 일이 아니었다.적어도 권태혁에게 약혼녀가 생기면 더 이상 그녀를 농락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전에 병이 도졌을 때와 약에 취해 그의 앞에서 온갖 진상을 부렸던 부끄러운 흑역사들도 자연스럽게 묻힐 수 있었다.경다혜의 두 눈이 반짝였다.“정말요? 너무 고마워요. 그럼 내일 바로 태혁 씨랑 약속 좀 잡아줄 수 있어요?”온세아가 억지웃음을 지었다.“노력해 볼게요.”...어머니 홍지영이 아프다는 소식에 권태혁이 권씨 가문 본가로 갔
“태혁 씨.”경다혜가 들어오면서 권태혁에게 방긋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그러다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온세아를 발견하고는 무척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세아 씨가 왜 여기에 있어요?”온세아가 짐짓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대표님께서 업무 지시가 있으셔서요.”경다혜가 의심하기는커녕 되레 미안해하는 눈치였다.“두 사람 일하는 데 방해한 건 아니죠?”“아닙니다.”온세아가 다급히 고개를 내저었다.“대표님께서 다 지시하셨으니 전 이만 나가보겠습니다.”안 그래도 도망칠 핑계가 필요했던 참이었다.사무실 문이 닫힌 순간 권태혁의 잘생긴 얼굴도 차갑게 가라앉았다.‘빨리도 도망치네.’“여긴 어쩐 일이에요?”권태혁의 말투에 반갑지 않은 기색이 역력했다.“저녁이나 같이 먹을까 하고요. 어머님께서 태혁 씨 오늘 저녁에 시간 비었다고 하시더라고요.”경다혜가 눈웃음을 지었다.권태혁이 거절할까 봐 일부러 그의 어머니까지 들먹였다.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권태혁의 반감을 더 크게 살 줄은 꿈에도 몰랐다.“어머니가 착각하셨나 봐요. 저녁에 시간이 없어요.”권태혁이 싸늘하게 답했다.“하지만...”경다혜가 아쉬운 마음에 계속 설득하려는데 권태혁이 짜증을 내며 내쫓았다.“저 아직 할 일이 남아서요. 안녕히 가세요.”말문이 막힌 경다혜는 결국 잔뜩 풀이 죽은 채로 돌아섰다....사무실로 돌아온 온세아가 방금 권태혁이 건네준 BC 프로젝트 기획서를 펼쳤다.회사가 처음으로 유럽과 합작하는 반도체 프로젝트였는데 회사에서도 무척 중시하고 있었다.아까 권태혁이 다음 주에 함께 D국으로 계약하러 가자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아무래도 그녀를 이 프로젝트에 참여시키려는 생각인 듯했다.온세아는 이번 기회를 제대로 잡아 능력을 향상해야겠다고 다짐했다.그때 사무실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들어오세요.”온세아가 고개도 들지 않고 대답했다.사무실 안으로 들어온 사람이 놀랍게도 경다혜였다.“온세아 씨.”경다혜가 들고 있던 에르메스 백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온세아가 권태혁에게 특별한 존재인 것도 아닌지라 자격이 없긴 했다.하지만 챙겨주고 싶어서 챙겨주는 게 아니라 강준우가 하도 등 떠밀어서 억지로 한 것이었다.“사람 호의도 몰라주고.”온세아가 붉은 입술을 삐죽거리며 작게 중얼거렸다.“뭐?”권태혁의 눈매가 날카로워지더니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이왕 이렇게 된 거 온세아도 에라 모르겠다는 식이었다.“어젯밤 일 때문에 화나신 거면 차라리 저 한 대 때리세요. 사람의 호의를 이렇게 개차반으로 무시할 필요까지는 없잖아요.”권태혁이 깊고 서늘한 눈동자로 그녀를 뚫어지라 응시했다. 이 순간 온세아를 옭아매는 남자의 눈빛이 예리한 칼날처럼 무섭게 느껴졌다.방금 그에게 대든 게 슬슬 후회되기 시작했다. 어찌 됐든 권태혁이 온세아의 상사이고 대표의 심기를 거슬러서 좋을 게 하나도 없었으니까.온세아가 적당한 핑계를 대고 줄행랑을 치려는데 권태혁이 불쑥 손을 뻗어 그녀의 가녀린 허리를 감싸 안았다.미처 반항할 틈도 없이 권태혁의 단단한 품에 안기고 말았다.“그 한 대는 일단 내버려 둬. 그 전에 어젯밤 내가 샤워하는 걸 몰래 본 건 어떡할 거야?”권태혁이 바짝 다가오며 어두운 목소리로 물었다. 온세아가 속눈썹을 파르르 떨며 다급히 변명했다.“훔쳐봤다고 할 수 없죠. 그냥 우연히...”그곳이 권태혁의 전용 욕실일 줄 누가 알았겠는가? 게다가 그 타이밍에 샤워하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권태혁이 온세아의 턱을 들어 올렸다.“어찌 됐든 내 알몸을 본 건 사실이잖아.”권태혁의 눈동자가 이글이글 타오르는 걸 본 온세아가 저도 모르게 당돌한 질문을 내뱉었다.“대표님, 설마 제 몸을 갖고 싶으신 건 아니시죠?”권태혁이 너무 꽉 끌어안고 있어 온세아는 꿈쩍도 하지 못했다.그가 그녀의 붉은 입술을 살짝 깨물며 속삭였다.“맞아. 갖고 싶어.”그의 눈빛이 한층 어두워졌고 숨소리도 거칠어지더니 품에 빈틈없이 꽉 끌어안았다.온세아의 얼굴이 눈에 띄게 일그러졌다.‘대표님 몸 좀 봤다고 내 몸을 탐내? 아무리 생각해
권태혁이 먼저 몸을 돌려 대표실로 향했다.온세아가 참지 못하고 기침을 두어 번 했다.“온 비서님, 안색이 안 좋아요. 감기라도 걸렸어요?”강준우가 다가와 걱정스럽게 물었다.“네, 다행히 심하지는 않아요.”환하게 웃는 온세아를 보며 강준우가 안타까워했다.“비서님이나 대표님이나 너무 무리해서 문제예요.”그러고는 그녀에게 약을 건넸다.“대표님 아직 몸도 채 낫지 않으셨는데 벌써 출근하신 거 있죠? 번거로우시겠지만 대표님한테 약을 제때 챙겨주세요.”“제가요? 전 아무래도 안 될 것...”온세아의 얼굴에 곤란한 기색이 역력해졌다.그녀가 어젯밤 권태혁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강준우는 모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대표실에 가는 건 벌을 받으러 가는 것이나 다름없었다.그런데 약까지 챙겨주라니, 이 임무를 어떻게 완수할 수 있단 말인가?“부탁할게요, 비서님.”강준우가 간절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그녀 외에 권태혁에게 약을 성공적으로 먹인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그러니 이 일은 온세아 외에는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강준우는 온세아가 거절할 틈도 주지 않고 약들을 그녀의 품에 안겨준 뒤 몸을 돌려 떠났다.달리 방법이 없었던 온세아는 약들을 사무실로 가져갔다. 설명서대로 몇 알씩 꺼낸 뒤 대표실로 향했다.문을 두드리고 들어섰을 때 권태혁이 책상 앞에 앉아 서류를 검토하고 있었다. 인기척을 느낀 그가 고개를 들어 온세아를 쳐다봤다.회사라 온세아의 옷차림이 아주 단정했다.하얀색 정장에 안에는 옅은 노란색 실크 슬립을 입었다. 살짝 벌어진 옷깃 사이로 쇄골이 드러났다.단정해 보이면서도 묘하게 섹시한 분위기를 풍겼다.온세아를 보던 권태혁이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침만 꿀꺽 삼켰다. 그의 시선에 온세아는 온몸이 다 불편했다.“대표님, 무슨 일로 부르셨나요?”온세아의 질문에 권태혁이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이리 와.”그녀가 잠시 망설이다가 그에게 다가가 책상 앞에 멈춰 섰다. 권태혁이 서류 하나를 툭 던졌다.“다음 주에
온씨 가문이 알면 온아정에게 불리할 것이고 구씨 가문이 알면 구형민에게 영향을 미칠 것이다.구형민 자신을 지키면서도 온아정을 잊지 않고 지키려는 마음이라니 정말 지독한 순정이었다.온세아가 속으로 비웃긴 했지만 거절하진 않았다.“알았어.”굳이 일을 더 만들고 싶지 않아 뭐라 하지 않은 것이었다.게다가 이미 온씨 가문과 등을 진 상태였다. 구형민이 이혼 합의서에 서명하고 나면 구씨 가문과도 더는 아무 관계가 아니게 된다.구형민이 온세아를 빤히 응시했다.“화났어?”온세아의 표정이 무덤덤하기만 했다.“아니.”그녀의 얼굴에 다른 기색이 없는 걸 보고서야 구형민이 안도했다.“가자. 집까지 데려다줄게.”“괜찮아. 차 가져왔어.”온세아가 싸늘하게 거절한 동시에 차 키를 꺼내 잠금을 해제했다. 그러고는 차 앞으로 가 운전석 문을 열고 올라탔다.구형민에게 타라고 말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 그 모습에 구형민은 저도 모르게 마음에 실망감이 스쳐 지나갔다.온세아가 차에 시동을 걸어 구형민 앞으로 다가갔다. 그 순간 그의 두 눈에 기쁨이 어렸다.‘역시 날 혼자 두고 가지 않을 줄 알았어.’그런데 온세아가 그저 이 말만 했다.“이혼 합의서에 사인하는 거 잊지 마. 사인하면 시간 잡아서 가정 법원에 가.”그러고는 구형민이 뭐라 하기도 전에 가속 페달을 밟고 휙 가버렸다.구형민의 잘생긴 얼굴에 놀라움이 스쳤고 심지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한때 그만 따르며 그를 동경했던 여자가 언제 이렇게 차갑고 매정하게 변해버린 걸까?빗줄기가 점점 더 거세졌다.구형민이 홀로 경찰서 앞에 서서 비를 홀딱 맞으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다음 날 온세아가 눈을 떴을 때 왠지 목이 칼칼했다.어젯밤 권태혁의 집에서 온몸이 젖은 채로 나왔고 또 구형민을 데리러 경찰서에 갔다가 비까지 맞은 바람에 감기에 걸린 것 같았다.하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고 감기약 몇 알을 챙겨 먹고 출근했다. 예상치 못하게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권태혁과 마주치고 말았다.검은색 한
온세아가 경찰서로 달려갔다.구형민과 진하성 모두 얼굴 여기저기에 상처가 난 상태였다.“대체 어떻게 된 거야?”온세아가 구형민에게 다가가 부축하려 하자 구형민이 혐오 가득한 얼굴로 그녀를 밀어냈다.“신경 꺼!”그녀가 애써 감정을 억눌렀다.‘내가 신경 쓰고 싶어서 이러는 줄 알아? 아직은 서류상 와이프라서 어쩔 수 없이 이러는 거라고.’온세아가 하루빨리 이 지긋지긋한 혼인 관계를 끝내려면 구형민의 협조가 절실했다. 괜히 지금 대립각을 세워 이혼 진행에 차질이 생길까 봐 이 늦은 밤에 경찰서까지 달려온 것인데 구형민은 고마워하기는커녕 되레 짜증을 냈다.구형민이 온세아를 본체만체하자 옆에서 진술서 작성을 마친 진하성이 참다못해 끼어들었다.“구형민, 지금 이게 무슨 태도야? 와이프가 보석해주러 왔으면 고마워할 줄 알아야지, 어디서 짜증이야?”구형민이 주먹을 움켜쥐고 살기를 내뿜었다.“세아는 내 와이프야. 네가 뭔데 끼어들어?”그러고는 또다시 진하성에게 달려들어 멱살을 잡았다.“쓸데없는 일에 참견할 거면 집에 가서 아정이나 좀 잘 챙겨.”진하성이 코웃음을 쳤다.“내가 집에 들어가든 말든, 온아정을 챙기든 말든 생판 남인 네놈이 왜 신경 써?”“이게 진짜!”구형민이 핏발이 선 두 눈으로 쳐다보면서 또다시 진하성에게 주먹을 날리려 했다. 그 모습을 본 온세아가 재빨리 다가가 말렸다.“구형민, 미쳤어? 여기 경찰서야!”‘진하성을 폭행해서 경찰서까지 왔는데 여기서도 소란을 피운다면 오늘 밤 안에 풀려나기는 글렀다는 걸 모르나?’“비켜.”구형민이 온세아를 밀어냈다. 그 바람에 온세아가 중심을 잃고 그대로 바닥에 넘어지고 말았다.순간 움찔한 구형민이 그녀를 부축하려던 그때 진하성이 구형민보다 빠르게 움직여 온세아를 부축했다.“괜찮아요?”그의 걱정 어린 질문에 온세아가 고개를 저은 뒤 구형민을 쳐다봤다. 가슴 깊은 곳에서 다시금 치밀어 오르는 분노에 구형민이 어떻게 되든 신경 쓰지 않고 당장이라도 경찰서를 뛰쳐나가고 싶었다.그때 경찰이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