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월요일 아침, 센터의 유리문이 열렸다.그 문을 밀고 들어온 나리는 잠시 멈춰 섰다.익숙한 공간이었다.그런데 이상하게도, 어딘가 조금씩 달라져 있었다.책상 배치가 바뀌었고, 하연의 자리 옆엔 새 화분이 있었다.벽에는 새 문구가 붙어 있었다.“이별은 관계의 끝이 아니라, 나의 회복의 시작이다.”그 문장은 나리의 말이었다.그녀가 한 인터뷰에서 했던 말.그 말이 인용되어, 이제는 팀의 좌우명처럼 벽에 걸려 있었다.그녀는 그 문장을 한참 바라보다가 작게 웃었다.‘내 말인데, 이젠 내 말 같지가 않네.’“선배!”뒤에서 들려온 목소리. 수경이었다.활기찬 얼굴, 단정히 묶은 머리, 단정한 셔츠. 그녀의 손에는 스케줄표가 들려 있었다.“돌아왔어요?”“응.”“정말요?”“그렇게 놀랄 일이야?”“아니요. 그냥… 조금 더 쉬실 줄 알았어요.”“쉬는 게 체질에 안 맞더라.”둘은 짧게 웃었다.그 웃음은 따뜻했지만, 묘하게 낯설었다.오전 회의가 열렸다.회의 테이블엔 수경, 하연, 그리고 제하가 앉아 있었다.나리가 오랜만에 그 자리에 앉자, 공기 속에 살짝 긴장감이 감돌았다.“그동안 내가 없을 때 많이 바빴지?”나리가 조용히 물었다.수경이 고개를 끄덕였다.“방송 나가고 나서 문의가 폭주했어요. 상담은 예약제로 돌렸고, 의뢰인 선정 기준도 새로 세웠어요.”“어떤 기준?”“긴급성, 지속 기간, 감정 회복 가능성 세 가지를요.”“그건 나한테도 말해줬어야지.”“보고는 드리려 했는데, 선배가 휴식 중이었으니까요.”나리는 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말보다 묘한 정적이 먼저 흘렀다.그 정적 속에서, 제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좋은 시스템이네. 효율도 생겼고, 팀의 밸런스도 맞아가고.”“고마워요.”수경이 미소 지었다.그 미소가 나리의 눈에 스쳤다.낯설 만큼 자신감이 있었다.나리는 자료를 넘기며 말했다.“효율이 나쁜 건 아니지만, 우린 효율을 위해 일하는 팀은 아니야.”“알아요. 그래서 상담 시간을 줄이지 않았어요. 대
하루 종일 흐린 날이었다.햇빛 대신 바람이 창문을 두드리고, 잔잔한 먼지가 공기 중을 떠다녔다.나리는 카페 창가 자리에서 커피를 식혀가며 앉아 있었다.한 모금 마실 때마다, 시간이 천천히 흘러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그녀는 며칠째 휴식 중이었다.일정표엔 아무 일정도 없었다.대신 마음속에는 여전히 수많은 사람들의 목소리가 남아 있었다.“이제는 정말… 아무 생각도 안 하고 싶은데.”그녀는 커피잔을 내려놓았다.그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익숙한 발소리, 하지만 얼굴을 보기 전까지는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혹시… 신나리 씨 맞으시죠?”낯선 여자의 목소리였다.그녀는 고개를 들었다.마주 선 얼굴은 너무 익숙했다.“저… 기억하시겠어요?”“혹시…”“3년 전, 남편과의 이별을 의뢰했던… 정윤서예요.”시간이 멈춘 듯했다.그 이름은 오래된 상자 안에 묻어둔 기억 같았다.“윤서 씨…”“이렇게 만나 뵙게 될 줄은 몰랐어요.”그녀의 미소는 어딘가 밝고, 또 어딘가 슬퍼 보였다.둘은 카페 구석자리에 앉았다.창밖엔 흐린 빛이 퍼져 있었다.“그날 이후, 저 많이 달라졌어요.”“그래요?”“처음엔… 아무것도 못 했어요. 숨 쉬는 것도 버거웠고,당신이 해준 말들이 자꾸 머릿속을 맴돌았어요.”“제가 무슨 말을 했죠?”“사랑은 끝나도, 사람은 남아요. 그 말이요.”나리는 그 문장을 듣는 순간, 심장이 미세하게 움찔했다.그 말은, 그녀가 너무도 자주 꺼내던 문장이었다.하지만 지금은 이상하게 낯설었다.“그 말 덕분에… 제가 살아 있었던 것 같아요.”“그건 제 말이 아니라, 당신이 스스로 선택한 생이에요.”“아니에요. 그 말이 없었으면 저는… 그때 진짜로 끝났을지도 몰라요.”윤서의 목소리가 떨렸다.그녀의 눈가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그래서… 감사했어요. 근데 요즘엔 또 무서워요.”“무서워요?”“그 말이 저를 너무 오래 붙잡고 있어서요.이제는 그때의 이별조차 제 삶의 일부가 돼버린 것 같아요. 그래서 새로 시작이 안
늦은 새벽, 창문을 두드리던 빗소리가 잦아들 무렵이었다.나리는 여전히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모니터엔 수십 통의 메일이 켜져 있었고,각기 다른 이름의 사연들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남편이 떠난 지 6개월이 지났어요.”“이별을 예쁘게 마무리하고 싶어요.”“다시는 사랑하지 않게 도와주세요.”문장마다, 낯선 얼굴들이 그녀의 가슴에 파문을 일으켰다.마치 그 모든 문장들이 자신을 부르는 것 같았다.“이젠… 이걸 다 감당할 자신이 없는데.”그녀는 속삭이듯 말했다.커피잔을 손에 쥐었지만, 잔 안의 액체는 이미 식어 있었다.그녀의 손끝도 마찬가지였다.아침이 되자, 센터는 평소보다 일찍 소란스러워졌다.전화벨 소리, 프린터 돌아가는 소리,그리고 하연의 빠른 발걸음이 얽혀 있었다.“수경 선배! 오늘 오전에 새 의뢰 두 건 더 들어왔어요.”“두 건?”“하나는 3년 연애 후 결혼 직전 파혼, 하나는 불륜 관계 정리 요청이래요.”“둘 다 오늘 안에 미팅 잡히겠네.”수경은 서류를 들고 정신없이 움직였다.“하연, 일정 다시 재조정해. 기존 예약자 중 긴급 아닌 사람은 내일로 미뤄.”“네!”그녀는 일의 흐름을 따라 움직이면서도, 어딘가에서 ‘불안한 정적’을 느꼈다.나리의 자리가 비어 있었다. 그 빈 의자가 유난히 눈에 들어왔다.“선배는 오늘도 안 오시는 거죠?”“응. 이틀째.”그녀는 대답했지만, 스스로에게 하는 말 같았다.“이럴 때일수록 내가 중심 잡아야 해.”그녀는 그렇게 되뇌었다.그 시각, 나리는 집 근처 공원 벤치에 앉아 있었다. 아무 약속도 없었고, 오랜만에 일정표가 비어 있었다.하지만 그 ‘비어 있음’이 낯설었다.그녀는 핸드폰을 꺼내다, 이내 화면을 껐다.“오늘은 아무것도 하지 말자.”햇빛이 가볍게 떨어지고, 나무 사이로 새들이 오갔다.그녀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이런 평범함이, 이렇게 어렵게 느껴질 줄은 몰랐네.”머릿속엔 수경과 제하의 얼굴이 번갈아 떠올랐다.‘둘 다 잘하고 있겠지.’그 생각에 미소가
방송이 나간 지 일주일째 되는 날이었다.센터 전화는 끊이지 않았다.메일함은 ‘상담 요청’ 제목으로 가득 찼고,SNS에는 ‘이별을 도와주는 사람들’이라는 해시태그가 실시간 검색어에 올랐다.“선배, 오늘만 스무 통이에요.”수경이 노트북을 열어보이며 말했다.“다 신규 문의예요. 근데 진짜로 다 받아도 될까요?”나리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그녀의 시선은 멍하니 창가 쪽에 머물러 있었다.“선배?”“응.”“괜찮아요?”“괜찮다는 말, 요즘은 쉽게 못 하겠네.”그녀는 커피잔을 들었지만,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다.잔 위로 미세한 김이 맴돌았다.그 김조차 무겁게 느껴졌다.“이건…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숫자가 아니야.”“그럼 어떻게 해요?”“줄여야지. 선택을 해야 해.”“누굴요?”“우릴 믿고 연락한 사람들 중, 지금 당장 가장 절실한 사람만.”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그 대신, 나머지 사람들에겐 답장을 꼭 보내줘. 당신의 마음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문장으로.”그 말이 끝나자 수경은 화면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답장 하나에도 온도를 담을 줄 아는 사람, 그게 나리다.’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점심 무렵, 제하가 센터에 들어왔다.카메라 가방을 내려놓고, 손에 들린 서류를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방송사 쪽에서 후속편 제안이 왔어.”나리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거절해.”“이유는?”“지금은, 보여줄 게 아니라 버텨야 할 때야.”“그래도 이 반응이면”“제하.”그녀는 그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만으로 대화를 끊었다.그건 말보다 더 명확한 거절이었다.그는 더 말하지 않았다.그 대신 카메라를 꺼내 창가 쪽으로 렌즈를 돌렸다.나리의 옆모습이 프레임 안에 들어왔다.조용한 피로, 그리고 그 속에 묘하게 살아 있는 단단함. 그는 셔터를 누르려다가, 결국 멈췄다.“오늘은 찍지 않을래.”“왜?”“지금의 넌, 기록이 아니라… 사람이야.”“그게 무슨 뜻이야.”“렌즈가 닿으면 깨질 것 같아서.”그 말에 그녀는 짧게 웃었다
서울의 밤은 유난히 밝았다.불빛이 번지고, 자동차 경적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유리 건물 외벽에 새로 걸린 문구가 눈에 띄었다.KBC 스페셜 다큐: [사람의 거리]-관계의 온도를 기록하다나리는 그 간판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거리 한복판, 수많은 네온사인 사이에서도 그 문장이 이상하게 크게 보였다.“이제… 진짜 세상에 나가는구나.”그녀는 작게 중얼거렸다.바람이 불었다. 머리카락이 흩날렸지만 그녀는 손으로 정리하지 않았다.그저 그대로 두었다.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것들이 세상에는 너무 많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다음 날 오전, 센터 안은 평소보다 조용했다.제하는 모니터 앞에서 편집본을 검토하고 있었다.“오늘 밤 9시 정규 편성.”수경이 종이 한 장을 들고 들어왔다.“축하해야 하는 거죠?”“아니.”“왜요?”“아직 안 끝났어.”“뭐가요?”“이게 사람들의 눈에 어떻게 보일지는 방송이 끝나고 나서야 알 수 있잖아.”그의 말투는 담담했지만, 그 안엔 무거운 피로가 깔려 있었다.그는 밤새 한 프레임, 한 자막까지 다시 손봤다.그 안에서 단 하나의 거짓도 없게 만들기 위해.“제하 씨.”“응.”“이건 그냥 방송 아니에요.”“알아.”“이건 우리예요.”그 말에 그는 잠시 모니터를 멈췄다.그리고 수경을 바라봤다. 그녀의 눈빛은 단단했다.“그래서 더 조심해야 돼.”그가 조용히 웃었다.“넌 이제 나리 닮아가네.”“그건 칭찬인가요, 경고인가요?”“둘 다.”“그럼 감사하게 받아들일게요.”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나갔다.문이 닫히는 소리가 작게 울렸다.제하는 혼자 남은 공간에서다시 모니터를 바라봤다.화면 속, 나리의 목소리가 흘렀다.“우린 사람의 끝을 본다.하지만 그 끝은 언제나 새로운 시작의 모양을 하고 있다.”그는 잠시 눈을 감았다.그 문장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게 이상하게 위로가 됐다.그날 오후, 나리는 인터뷰 자리로 향했다.한 언론사에서 요청한 공식 인터뷰였다.‘이별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에게 묻는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점점이 떨어지는 빗방울이 유리창을 두드리며 불규칙한 리듬을 만들었다.센터 안엔 아무도 없었고, 나리는 홀로 사무실 불빛 아래 서 있었다.탁자 위엔 방송국 제안서가 펼쳐져 있었다.그 위로 커피 한 방울이 떨어졌다.“이걸 받아들여야 할까.”그녀는 스스로에게 물었다.제하가 남기고 간 서류, 그리고 거기에 적힌 문장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이 이야기를 세상에 나누는 게, 또 다른 치유가 될 수 있다.”그 문장을 읽는 순간, 마음 한구석이 미묘하게 흔들렸다.“치유라… 누굴 위한 거지?”그녀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그때, 문이 열렸다. 제하가 들어왔다.어깨에 묻은 빗물 자국이 아직 마르지 않았다.“아직도 안 갔네.”“오늘은 그냥… 조용히 있고 싶어서.”그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의자에 앉았다.탁자 사이로 제안서가 보였다.“그거 읽었어?”“응.”“어떻게 생각해?”“생각보다 조용하네.”“조용하다는 게?”“네가 이렇게 말린 적이 없어서.”“나는 말린 적 없어.”“그래도 늘 신중했잖아.”“지금도 그래. 신중하게 ‘하지 말자’고 생각 중이야.”그의 시선이 흔들렸다.“이건 단순히 영상이 아니야, 제하. 우리의 진심이 들어간 기록이잖아.근데 진심은 사람마다 다르게 읽혀. 누군가에겐 위로지만, 다른 누군가에겐 다시 상처가 될 수도 있어.”“그건 모든 기록이 가진 숙명이야.”“그래서 무섭다고.”“근데 무섭다고 멈추면 아무것도 못 해.”그의 말은 단단했지만, 그 안엔 간절함이 있었다.나리는 조용히 물었다.“넌 그 영상이 세상에 나가면 뭐가 달라질 거라고 생각해?”“적어도, 사람들이 ‘이별’이란 단어를 다르게 보게 되겠지.”“그럼 그걸로 충분해?”“너는?”“나는… 사람을 바꾸는 게 아니라 그 사람 곁에 남는 게 내 일이었어.”“그건 네 방식이지. 난 내 방식으로 남고 싶어.”순간, 공기가 식었다.둘 사이엔 오랜 시간 쌓인 믿음이 있었지만,지금은 그 믿음 위로 미세한 균열이 생겼다.나리는
밤이 지독하게 길었다. 아무리 불을 환히 켜두어도, 집 안 구석구석에 웅크린 그림자는 마치 살아 있는 듯 꿈틀거렸다. 나는 거실 바닥에 앉아 무릎을 끌어안은 채 창문을 응시했다. 유리창에 비친 내 얼굴은 창백했고, 눈동자 속엔 피로와 두려움이 엉켜 있었다. 잠깐만 눈을 감으면 온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리.” 낮고 서늘한 울림이 귀와 가슴을 동시에 찔렀다.제하는 현관문 옆에 앉아 있었다. 그는 새벽 내내 잠시도 눈을 붙이지 못한 듯, 그러나 의식은 또렷해 보였다. 손에 들린 주머니칼을 무심히 굴리며 창밖을 주시했
새벽이 그렇게 흘러갔다. 한숨도 자지 못한 채 아침을 맞이한 나는 커피잔을 손에 쥔 채 창가에 서 있었다. 검은 액체에서 피어오르는 김이 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지만, 아무런 온기도 전해지지 않았다. 밤새 들렸던 그 목소리“곧, 만나게 될 거야.” 는 여전히 귓가를 맴돌았다. 단순한 위협이라기보단, 예고에 가까운 울림이었다. 언제, 어디서, 누구와 만나게 될지 알 수 없는.제하는 거실 소파에 앉아 눈을 감고 있었고, 수경은 작은 담요를 둘러쓴 채 테이블 위에 엎드려 있었다. 그들의 숨소리가 고르게 이어지는 동안에도
그날 새벽, 나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올린 채 숨을 죽이고 있었다. 창밖에서 들려온 그 한마디. “…나리.” 아직도 귓가에서 울리고 있었다. 바람 소리에 섞여 흘러나온 것 같기도 했고, 내 이름을 선명히 또렷하게 부르는 듯도 했다. 귀를 틀어막아도 잦아들지 않았고, 오히려 가슴 속에서 메아리처럼 퍼졌다. 분명 착각일 거야. 그렇게 되뇌면서도 손끝은 식어 있었고, 심장은 멈추지 않고 쿵쾅거렸다.침대에서 몸을 일으키자 두 다리가 휘청거렸다. 부엌으로 가 물을 마시며 한참이나 싱크대에 매달려 있었다. 찬물이 목을 타고
밤새도록 뒤척이며 이불을 부여잡았다. 눈을 감으면 들려오는 건, 그 남자의 낮고 낯선 목소리였다. “드디어… 나타났군.” 그리고 바로 이어지는 웃음. 처음 듣는 소리인데, 귓가에 너무 선명하게 남아 마치 오래전부터 익숙했던 것처럼 가슴을 파고들었다. 나는 한참을 천장을 바라보다가 결국 새벽녘에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부엌에서 물을 마시려 컵을 드는 순간, 손끝이 떨려 유리가 잔잔히 울렸다. 온유의 목소리와 닮아 있었다. 그 생각은 머리로는 부정했지만, 심장은 이미 알아챈 듯 요동쳤다.아침에 카페로 나가니 수경이 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