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파이어헌트의 음모나 노레드의 배신도 은희의 안전보다 중요하지 않았다.은희를 이런 위험한 곳에 더 둘 수는 없었다. 온 세상을 적으로 돌리더라도 데리고 나가야 했다....은희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의자에 묶여 있었다. 굵은 밧줄이 팔다리를 단단히 휘감아 꼼짝도 할 수 없었다.있는 힘껏 몸을 뒤틀었다. 손목과 발목이 밧줄에 쓸려 금세 쓰라렸다. 살갗에는 붉은 자국이 겹겹이 패였다.“하남우, 이 개자식아!”분노에 찬 외침이 텅 빈 방 안을 울렸다.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쏟아졌다. 배신감에 가슴이 미어졌다. 남우가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다. 그 지경이 되어서도 자신을 가둬 둘 생각을 하다니.‘다시는 믿으면 안 돼!’얼마 지나지 않아 발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거칠게 열렸다.묶인 채 몸부림치는 은희를 본 남우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허겁지겁 다가가 밧줄을 풀었다. “미안해. 나도 어쩔 수 없었어. 여긴 너무 위험해. 널 데리고 나가야겠어!”몸이 풀리자마자 은희가 손을 휘둘렀다. 날카로운 뺨 소리가 방 안에 터졌다.붉게 충혈된 눈으로 남우를 쏘아봤다. 목소리에 울음이 배어 나왔다. “무슨 권리로 날 묶어? 네가 뭔데 내 일을 마음대로 결정해?”남우는 피하지 않고 그대로 맞았다. 뺨이 화끈거렸지만 속은 그보다 더 아팠다.“노레드가 달아났어. 파이어헌트 관련 서류도 전부 폐기됐고. 여기 남아 있으면 더 위험해져. 네가 다치게 둘 수는 없어!”남우가 잠깐 말을 멈췄다가 이었다. “내 세력을 다시 만들 거야. 파이어헌트가 저지른 짓에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할게. 네 억울함도 풀어줄 거고!”그 약속을 듣던 은희의 입가에 쓰디쓴 웃음이 번졌다. “날 위하는 척 좀 그만해! 네가 데려가겠다고 하면 난 무조건 따라가야 해? 내 복수는 네가 대신할 수 있다고 누가 그래? 그런 동정 필요 없어. 내 원수는 내가 내 힘으로 갚아!”분노로 붉게 달아오른 은희의 뺨을 보던 남우가 느닷없이 낮게 웃었다.웃음에는 집착과 광기가 어려 있었다. 은희
은희를 편안히 눕힌 남우는 방문을 소리 없이 닫았다.옷깃을 여미는 남우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노레드는 오늘 밤 남우의 기억을 되찾게 해 주겠다고 분명히 약속했다. 이제 남우는 잃어버린 과거를 온전히 되찾고, 그동안 알지 못했던 진실까지 마주하게 될 것이다.남우는 곧장 노레드의 실험실로 향했다.하지만 묵직한 금속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남우를 맞이한 것은 짙은 어둠뿐이었다. 실험실 안은 온통 캄캄했고, 장비에 달린 표시등만이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깜박이고 있었다.“노레드 박사님?”남우가 벽에 달린 스위치를 누르자 눈부신 흰 조명이 일제히 켜졌다.그러나 실험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남우는 미간을 좁혔다. 책상 위에 어지럽게 흩어진 서류들을 훑던 그의 시선이 문득 펼쳐진 기록철 위에서 멈췄다.기록철에는 ‘강은유’의 사진이 선명하게 붙어 있었다.“하남우?”그때 등 뒤에서 부드러운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남우가 홱 몸을 돌렸다.문가에는 미셸이 서 있었다. 미셸은 흰 실험복을 입고 있었고, 평소보다 안색이 조금 창백해 보였다.“노레드 박사님은 어디 있어?”남우가 곧바로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미셸은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보스는 그 ‘가짜 강은유’랑 나갔어. 한 시간쯤 전에. 중요한 자료를 가져와야 한다고 하던데.”그 자료가 무엇인지는 미셸도 알지 못했다.솔직히 미셸은 정체조차 알 수 없는 자료를 가지러 노레드가 직접 나섰다는 사실부터 마음에 걸렸다. 처음부터 어쩐지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그 말을 들은 남우의 눈동자가 바짝 좁아졌다.순간 등골을 타고 서늘한 한기가 치밀어 올랐다.남우는 성큼성큼 미셸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목을 거칠게 붙잡았다.“뭐라고?”“나, 나도 자세히는 몰라.”겁에 질린 미셸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기억 복원은 미뤄야 한다고 전해 달랬어. 보스가 한 말은 그게 다야.”“미룬다고?”남우의 입가에서 차가운 웃음이 새어 나왔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미셸의 손목을 움켜쥔 손
“아파.” 은희가 미간을 찌푸렸다.남우는 곧장 손을 놓았다. 방금 자신이 이성을 잃었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미안해.” 낮게 뱉은 짧은 사과에 짙은 슬픔이 묻어났다.은희는 붉어진 손목을 문지른 뒤 다시 상처를 손보기 시작했다.“이유라도 말해 주면 안 돼?”손이 심하게 떨려 더는 움직일 수 없었다. 은희는 손을 멈추고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말하지 마. 꿰매는 것에 집중하는데 방해돼.”남우가 대뜸 은희의 손을 잡아 뜨거운 가슴 위에 올려놓았다. “느껴져? 널 볼 때마다 내 심장이 이렇게 뛰어.”은희는 손을 떼려 했지만 남우가 단단히 눌러 붙들었다.힘찬 심장 박동이 또렷이 전해졌다. 한 번, 또 한 번. 손바닥을 두드리는 울림이 선명했다.“하남우...” 은희의 목소리가 떨렸다.“‘당신’이라고 불러.” 말을 가로막은 남우가 덧붙였다. “예전처럼.”“다 지난 일이야.” 남우의 이름을 그렇게 부르기 시작한 게 언제였더라. 까마득히 오래전 일 같았다.딸을 잃은 뒤로는 한 번도 그렇게 부르지 않았던 것 같다. 그전에는 혼자만의 마음으로 다정하게 이름을 불렀다. 자신만 그러고 있다는 걸 깨달은 뒤로는 그마저 그만두었다.남우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상처가 벌어질 수도 있다는 건 개의치 않고 천천히 몸을 일으켜 은희에게 다가왔다. “나한테는 아직 안 지났어.”입술이 귓불에 스칠 듯 가까워졌다. 뜨거운 숨이 귀를 감쌌다. “하루도 빠짐없이, 밤마다 네 생각을 했어.”은희는 고개를 홱 돌려 뜨거운 숨결을 피했다. 이번에는 말을 피하지 않았다. “정말 모르겠어? 내 가족을 해친 건 파이어헌트야. 넌 그 조직의 수장이고. 우리는 처음부터 잘될 수 없는 사이였다고!”남우의 입가에 걸려 있던 웃음이 굳었다. 핏기가 가신 얼굴은 생기마저 모조리 빠져나간 듯했다.은희의 손을 놓은 남우가 한 걸음 물러나 침대 가장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자조 섞인 웃음이 흘러나왔다.“결국 네 마음속에서 나는... 아직도 네 가족을 죽인 사람이구나
‘내가 언제 유혹했다고!’ 남우가 억지를 부리는 게 분명했다.은희는 포비돈 용액을 묻힌 면봉으로 남우의 손등에 난 상처를 건드렸다. 상처 가장자리는 벌써 하얗게 불어 있었다.“아파?” 나직이 묻는 목소리에 저도 모르는 다정함이 배어 나왔다. 전에 남우도 자신에게 똑같이 물었던 기억이 났다.이제는 은희가 아프냐고 물을 차례였다. 이 지경인데 아프지 않을 리가 없었다.남우는 대답 대신 고개를 가로저으며 은희를 바라보기만 했다. 남우의 뜨거운 숨결이 은희의 목덜미에 닿았다.통증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남우에게 중요한 건 은희뿐이었다. 곁에만 있어 준다면 아무리 아파도 견딜 수 있었다.“고 선생.” 낮게 잠긴 목소리에 장난기가 섞였다. “손을 그렇게 떨어서야 진료는 어떻게 보겠어?”은희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손을 빼려 했다. 남우가 오히려 더 세게 붙들었다. 보통 사람보다 높은 체온이 손끝을 저릿하게 달궜다.‘갑자기 ‘고 선생’이라니.’ 은희는 그 호칭이 영 어색했다.“하 대표님, 치료에 협조 좀 해 줄래?” 평소처럼 침착하게 말하려 애썼지만 남우가 불쑥 다가오자 애써 가다듬은 목소리가 흐트러졌다.코끝이 맞닿을 만큼 가까웠다. 뒤섞이는 숨결 사이로 옅은 담배 냄새와 피 냄새가 풍겼다. “협조를 안 하는 게 아니야. 고 선생이 너무 매력적이라 그렇지.”‘뭐라는 거야?’은희는 흠칫 몸을 뒤로 뺐다.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있다는 걸 잊은 탓에 균형을 잃고 뒤로 넘어갔다.남우가 재빨리 은희의 허리를 감쌌다. 그러고는 몸을 틀어 은희 위로 올라왔다.“놔!” 은희가 단단한 가슴을 두 손으로 밀며 버둥거렸다.셔츠 아래로 남우의 팽팽한 근육이 느껴졌다. 그러다 은희는 숨을 들이켰다. 다른 곳에도 상처가 있었다.“가슴도 다쳤어?” 버둥거리던 몸이 멈췄다. 남우를 향한 걱정이 다른 감정을 단숨에 밀어냈다.남우의 입가에 씁쓸한 웃음이 걸렸다. “이제 알았어? 고 선생 눈에는 내 손만 보이는 줄 알았는데?”은희는 빈정거림을 무시
은희는 하루를 조용히 보내며 밤이 오기를 기다렸다.돌아온 남우는 몹시 지쳐 있었다. 은희가 오늘은 소파에 앉아 있을 뿐, 어제처럼 달려들지는 않았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어제처럼 거짓으로 다정하게 굴지는 않았으니까.하지만 남우가 다가가자 은희가 갑자기 과도를 꺼냈다.“은희야, 위험한 짓 하지 마.” 드물게 당황한 목소리였다. 칼을 빼앗으려 손을 뻗었지만, 은희가 반 발짝 물러나자 그 자리에 멈췄다.은희가 칼날을 목 옆에 댔다. 제 이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날 내보내 줘.”남우가 마른침을 삼켰다. 이런 상황에서 침착할 수가 없었다.“알았어. 보내 줄게.” 양손을 들고 천천히 다가갔다. “그러니까 먼저 칼 내려놔. 다치지 말고.”“오지 마!” 은희가 소리치며 물러났다. 허리 뒤로 차가운 창틀이 닿았다. “내가 널 믿을 것 같아? 어제는 절대로 못 보내 준다며!”남우의 걸음이 멎었다. 어젯밤 자제력을 잃고 퍼부었던 키스가 떠올랐다. 품 안에서 떨던 은희의 모습도.은희를 다치게 할 생각은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남우의 사랑은 감옥처럼 은희를 숨 막히게 했다.“약속할게.” 남우가 주머니에서 안전 가옥 출입 카드를 꺼내 침대 옆 탁자에 올렸다. “언제든 나가도 돼.”은희가 카드를 응시했다. 마른 입술을 혀로 적시다가 실수로 칼날이 살을 그었다. 작은 핏방울이 배어 나왔다.남우가 곧장 달려들었다. 은희는 눈을 질끈 감고 비명을 질렀다. 쿵!소리가 들렸다.남우가 손바닥으로 칼날을 눌렀다. 손가락 사이로 피가 흘러내렸다.“미쳤어!” 은희가 손을 빼려 했지만 남우가 단단히 붙잡고 있었다. “손 놔!”“못 놔.” 목소리에 울음이 묻었다. “가겠다면 같이 갈게. 그러니까 먼저 네 상처부터 보자.”은희가 눈을 떴다. 손바닥에서 흐른 피가 남우의 셔츠 소맷단을 적시고 있었다. 그런데도 남우는 아프지도 않은 사람처럼 은희의 목에 맺힌 피를 닦는 데만 집중했다.문득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넘어져 다쳤을 때 아
남우가 은희의 손목을 잡아 머리 위로 눌렀다.귓불에 닿는 숨이 뜨거웠다. 억누른 목소리가 흘렀다. “내가 너무 봐줬나 보네.”은희는 남우의 눈에서 일렁이는 어두운 기색을 올려다보다 불쑥 웃었다. 다 놓아 버린 처절함이기도, 마지막 승부를 걸겠다는 결심이기도 했다.“그래. 네 안면 인식 정보를 훔치려고 했어. 어차피 처음부터 알았잖아. 안 그래?”남우의 동공이 좁아졌다. 은희가 거리낌없이 인정하자 오히려 가슴이 답답해졌다.“몰랐어. 네 행동이 진심인 줄 알았어.”은희가 멈칫했다. ‘아까 행동을 진심이라고 믿었다니.’‘이렇게 뻔한 연기인데도 진짜라고 생각했다니.’제대로 반응하기도 전에 남우가 몸을 틀어 은희를 다시 매트리스 깊숙이 눌렀다.잠옷 단추가 튕기는 소리에 거친 숨이 뒤섞였다. 남우의 손가락이 허리 옆에서 떨리는 게 느껴졌다. 그러나 맨살에 닿기 직전 주먹으로 말려 들어갔다.“여기가 아파.” 남우가 고개를 숙여 은희의 입술 끝을 물었다. 이 사이로 쇠 맛이 배었다. “가슴이 너무 아파.”가슴이 아팠다. 은희가 남긴 상처였다. 눈에 보이지 않는 상처가 숨조차 쉬기 어렵게 했다.“아프면 놔.” 은희가 고개를 돌렸다. 남우는 턱을 잡아 억지로 되돌렸다.놓으라고... 남우에게는 없는 말이었다. 특히 은희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놓을 수 없었다.“못 놔. 아파 죽어도 내 곁에 둘 거야.”벌을 주듯 거친 키스이었다. 이가 부딪혀 은희의 입술이 터졌다. 그러나 피 맛이 번지자 남우의 키스가 갑자기 부드럽고 길게 이어졌다.은희의 끊기는 울음이 들렸다. 남우가 눌러 삼킨 신음도 그사이에 섞였다.“왜 속였어?” 남우가 젖은 눈가를 쓸었다. “왜 날 믿어 주지 않아?”묻고 있었지만 대답을 기대하지는 않았다.“내가... 널 어떻게 해야 할까?”남우가 은희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몸이 저절로 떨렸다. “왜 나가고 싶은 거야?”‘왜 나가고 싶냐고?’은희가 속으로 너무나 어이가 없었다. 그녀는 새장에 갇힌 새가 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