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스텔라 시티 메인 타워 140층, 회장 집무실.
평화로운 오후의 정적을 깨고, 당장이라도 건물을 무너뜨릴 듯한 맹수의 포효가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김 비서! 아니, 김 실장!"
"네, 넷! 회장님!"
태성그룹 비서실장, 김민준이 사색이 된 얼굴로 결재판을 품에 안은 채 뛰어 들어왔다.
"방금 내 아내가, 스텔라 재단의 아동 병원 증축 예산이 조금 빠듯하다고 지나가듯 말하는 걸 내 두 귀로 똑똑히 들었다!"
차태경이 최고급 마호가니 책상을 주먹으로 쾅 내리치며 서늘하게 으르렁거렸다.
"당장 내 개인 자산에서 1조 원을 빼서 스텔라 재단 계좌로 송금해! 우리 여왕님께서 예산 문제로 단 1초라도 신경을 쓰시게 만들다니, 재단 예산팀 놈들 목을 모조리 뽑아버릴까!"
"회, 회장님! 진정하십시오!"
김 실장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태블릿을 치켜들며
도윤이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아버지의 입에서 나올 '절대적인 연애 비법'을 경청하기 위해 꼿꼿하게 자세를 고쳐 앉았다."제가 그녀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하겠습니까. 식사부터 대접해야 할지, 아니면 도서관에서 우연을 가장해…….""스케일이 왜 이렇게 작아, 차도윤!"태경이 갑자기 호통을 치며 도윤의 말을 싹둑 잘랐다."식사? 우연한 만남? 그딴 찌질하고 좀스러운 짓거리로 네 여자의 마음을 얻으려 하다니, 태성의 황태자로서 부끄럽지도 않으냐!""네? 하, 하지만 평범하게 다가가는 것이…….""잘 들어라, 도윤아."태경이 아주 진지하고도 결연한 얼굴로, 자신의 20년 가까운 연애 노하우가 집약된 궁극의 비법을 전수하기 시작했다."여자가 재벌의 권력을 혐오하고 부당한 갑질을 싫어한다면, 해결책은 아주 간단하다. 그녀가 감히 그 누구에게도 고개 숙이지 않아도 될 만큼, 압도적이고 완벽한 절대 권력을 그녀의 손에 직접 쥐여주는 거다!""……절대 권력을요?""그래! 당장 내일 아침, 스텔라 인베스트먼트의 자금을 동원해 그녀가 다니는 한국대학교 재단을 통째로 인수해 버려라!""……예?"도윤의 투명한 눈동자가 기괴하게 흔들렸다.그가 잘못 들었나 싶어 귀를 의심하는 사이, 태경의 광기 어린 브리핑은 멈추지 않았다."사학 재단을 삼킨 다음, 기존의 썩어빠진 이사진을 모조리 날려버리고 그 여자를 이사장 자리에 앉혀라! 그러면 재벌 3세 버러지들이 도서관에서 행패를 부려도, 그녀가 이사장의 권한으로 그놈들을 당장 퇴학시켜버릴 수 있지 않겠느냐!""아, 아버지. 잠시만요…….""여자는 자신에게 완벽한 세상을 통
스텔라 시티 메인 타워, 차도윤의 개인 서재.수십 개의 모니터가 전 세계의 증시 현황을 실시간으로 뿜어내고 있는 가운데, 태성그룹의 황태자 차도윤은 아주 심각한 얼굴로 태블릿의 빈 화면을 응시하고 있었다."하아."도윤의 입에서 오늘만 벌써 열 번째 한숨이 새어 나왔다.그의 머릿속은 수조 원대 규모의 글로벌 M&A 건이나 낡은 재벌들의 해체 시나리오가 아니라, 단 하나의 완벽하고도 치명적인 '변수'로 가득 차 있었다.[유지안.]도윤이 태블릿 위에 하얀 펜슬로 그 이름 석 자를 적어 내렸다.한국대학교 경제학부 대학원생.명품이나 자본의 권력 따위는 벌레 보듯 혐오하며, 제힘으로 당당하게 살아가는 고학생.자신을 향해 이빨을 드러내던 재벌 3세를 향해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서늘한 팩트 폭격을 내리꽂던 그 강단 있는 눈동자."도무지 데이터가 부족해."도윤이 신경질적으로 펜슬을 탁 내려놓으며 마른세수를 했다.스무 살 평생, 오직 승리와 자본의 논리만을 호흡하며 살아온 그였다.하지만 '사랑'이라는 영역, 특히나 재벌을 극도로 혐오하는 여자의 마음을 얻는 방법론에 대해서는 그의 천재적인 두뇌조차 완벽하게 백지상태나 다름없었다.정체를 밝힌다? 당장 쓰레기 취급을 받으며 축객령을 당할 것이다.돈으로 환심을 산다? 최민욱 같은 버러지들과 똑같은 취급을 받으며 경멸당할 것이 뻔했다."……전문가의 조언이 필요하다."도윤이 결연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그의 머릿속에 떠오른 단 한 사람.세상에서 가장 차갑고 고결한 얼음 여왕인 어머니, 서연우의 마음을 기어이 함락시키고 자신의 곁에 주저앉힌 지독한 순애보의 달인.도윤은 자신의 아버지인 차태경에게 연애 상담을 받기로 결
"재수 없는 년……!"결국 최민욱은 욕설을 내뱉으며, 바닥에 쏟아진 커피는 닦지도 않은 채 황급히 열람실 밖으로 도망치듯 빠져나갔다.상황이 종료되자, 열람실 안에는 다시 쥐죽은 듯한 정적이 내려앉았다."하아."지안이 그제야 짧은 한숨을 내쉬며, 바닥에 주저앉아 쏟아진 커피와 책들을 줍기 시작했다.누구 하나 선뜻 다가와 도와주지 못하고 눈치만 보는 가운데.스르륵.지안의 눈앞으로, 하얀 손수건을 쥔 길고 단단한 남자의 손이 불쑥 내밀어졌다."……?"지안이 고개를 들었을 때, 그녀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흰 셔츠에 뿔테 안경을 쓴 단정한 얼굴의 차도윤이었다."내가 닦겠습니다."도윤이 아주 건조하고도 정중한 목소리로 말하며, 한쪽 무릎을 바닥에 꿇고 커피가 묻은 전공 서적을 닦아내기 시작했다."아, 고맙습니다. 제가 할게요."지안이 당황하며 책을 받아 들려 했지만, 도윤은 책을 넘겨주지 않은 채 고개를 들어 지안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했다.순간, 쿵.도윤의 왼쪽 가슴 깊은 곳에서, 평생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기괴하고도 묵직한 파열음이 울려 퍼졌다.가까이서 마주한 유지안의 눈동자.낡은 청재킷을 입고 바닥에 주저앉아 있으면서도, 그 투명한 눈빛만큼은 세상 그 어떤 권력 앞에서도 굴복하지 않을 듯 고결하고 맹렬하게 빛나고 있었다.그것은 어린 시절, 태성그룹의 임원들을 얼어붙게 만들던 자신의 어머니, 서연우의 그 압도적이고 눈부신 눈동자와 소름 돋도록 닮아 있었다.'……아.'도윤은 호흡이 멎는 듯한 아찔한 감각에 사로잡혔다.[ 네 어머니를 성인이 되어 다시 찾아낸 날. 오래전부터 내 것이 아
한국대학교 경제학부 대학원, 제1 열람실.수백만 권의 장서가 뿜어내는 오래된 종이 냄새와, 서늘한 에어컨 바람만이 맴도는 고요한 공간.창가 쪽 가장 구석진 자리에, 흰 셔츠에 뿔테 안경을 쓴 차도윤이 무심한 얼굴로 원서 전공 서적을 넘기고 있었다.'조용해서 좋군.'도윤이 속으로 중얼거리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태성그룹과 스텔라 인베스트먼트를 오가며 수조 원의 자금을 굴리던 황태자는, 현재 자신의 신분을 완벽하게 숨긴 채 평범한 대학원생으로 위장 중이었다.어머니 서연우의 서릿발 같은 지시 때문이었다.[ 현장의 바닥을 구르지 않은 자본은 결국 썩기 마련이야. 아무도 네가 태성의 핏줄인 걸 모르는 곳에서, 가장 평범한 사람들의 경제 관념을 직접 부딪치며 배워 오렴. ]어머니의 명에 따라 발렛파킹 대신 지하철을 타고, 최고급 수트 대신 평범한 기성복을 입은 지 어언 6개월.자신을 향해 굽실거리는 임원들도, 아부하는 벌레들도 없는 이 정적의 상아탑은 도윤에게 꽤 만족스러운 은신처였다.적어도,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는 멍청한 소란만 아니었다면 말이다."아, 짜증 나게 진짜! 내가 누군지 알아?!"고요하던 열람실 한가운데서, 날카로운 고성이 정적을 찢어발겼다.머리부터 발끝까지 명품으로 휘감은 한 남학생이, 자신의 명품 클러치에 커피가 튀었다며 맞은편에 앉아 있던 학부생을 윽박지르고 있었다."너희 아버지 뭐 하시는 분이야? 어? 이 한정판 클러치 물어낼 돈은 있고?"중견 건설사 회장의 막내아들이라고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던 졸부 3세, 최민욱이었다.최민욱은 잔뜩 주눅이 든 학부생의 어깨를 거칠게 밀치며,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도서관의 공용 전공 서적들을 바닥으로 신경질적으로 쳐버렸다.퍼억-!수십 권의 두꺼운 책들이 쏟아
"축사라는 걸 평생 해본 적이 없어서, 거짓말은 못 하겠습니다."태경이 마이크를 가볍게 톡톡 치며, 아주 낮고 건조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단상 아래에 선 김 실장은 벌써부터 다리가 후들거리는 것을 느끼며 침을 꿀꺽 삼켰다."여기 서 있는 신랑, 김민준 실장. 이 녀석은 내 밑에서 무려 20년 넘게 굴렀습니다."태경의 칠흑 같은 동공이 김 실장을 향해 서늘하게 꽂혔다."내가 서류가 마음에 안 든다고 결재판을 던지면 제 머리로 받아냈고, 내가 아내에게 미쳐서 회사 일을 내팽개치려 할 때면 내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처절하게 매달렸던 놈입니다.""푸흡……!"태경의 그 노골적이고 뻔뻔한 셀프 디스에, 잔뜩 얼어붙어 있던 하객석 곳곳에서 참지 못한 실소가 터져 나왔다."세상 사람들은 결혼이 인생의 무덤이자 가장 큰 시련이라고들 떠듭니다."태경이 마이크를 쥔 채, 짐승처럼 짙고도 오만한 눈웃음을 지었다."하지만 김 실장에게 진정한 시련은, 그의 20대와 30대를 통째로 갈아 넣었던 '차태경'이라는 지옥의 폭군 그 자체였을 겁니다.""……!""이 자식은 내 아내 다음으로 나를 견뎌낸, 아주 위대한 남자입니다."그 유쾌하고도 살벌한 팩트 폭격.태경의 묵직한 선고가 떨어지는 순간, 홀 전체가 걷잡을 수 없는 웃음바다로 변해버렸다.항상 로봇처럼 감정을 숨기던 신부 윤 팀장마저 기어이 빵 터져버려 부케로 입을 가린 채 어깨를 들썩였고.김 실장은 감동과 PTSD가 뒤섞인 기묘한 표정으로 눈물을 찔끔거리며 허리를 90도로 꺾었다."그러니 스텔라의 윤지수 팀장."태경이 이번에는 신부를 향해 턱을 까딱이며 낮게 으르렁거렸다."이 위대하고 질긴 남자를 당
스텔라 시티 한가운데 우뚝 솟은 7성급 스텔라 호텔, 그랜드 볼룸.수만 송이의 새하얀 은방울꽃과 크리스털 샹들리에가 눈부시게 빛나는 대연회장 로비는, 전 세계에서 몰려든 VVIP 하객들로 발 디딜 틈 없이 붐비고 있었다."어후, 넥타이가 왜 이렇게 조이지."신랑 측 축의금 접수대 옆에 선 김민준 실장이, 바짝 마른입술을 축이며 턱시도 옷깃을 만지작거렸다.수조 원대 M&A 계약서에 도장을 찍을 때도 손 한 번 떨지 않던 베테랑 비서실장이었지만, 오늘만큼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식은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김 실장. 오늘 아주 봐줄 만하군."그때, 로비의 웅성거림을 단숨에 갈라버리며 아주 서늘하고도 오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회, 회장님! 대표님!"김 실장이 화들짝 놀라며 허리를 90도로 꺾었다.완벽하게 재단된 칠흑 같은 턱시도를 입은 차태경과, 우아한 샴페인 골드 실크 드레스를 걸친 서연우가 눈부신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다가오고 있었다."축하해요, 김 실장님. 아니, 이제 신랑이라고 불러야 하나요?"연우가 나른하고도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감사합니다, 대표님! 두 분께서 직접 와주시다니, 정말 영광입니다!""내 비서실장이 장가를 간다는데, 내가 빠지면 섭섭하지 않겠나."태경이 짐승처럼 짙은 눈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안주머니에서 얇고 빳빳한 서류 봉투 하나를 툭 꺼내어 김 실장의 가슴팍에 안겨주었다."축의금이다. 열어 봐.""아, 회장님. 뭘 이런 걸 다……."김 실장이 멋쩍게 웃으며 봉투를 열어 속지를 꺼냈다.그리고 다음 순간, 그의 두 눈이 튀어나올 듯 기괴하게 확장되었다.봉투 안에 들어 있는 것은 흔한 수표나 현금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