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연이 답장을 보냈다. [이제 안전해요. 걱정 마세요.] 하연은 볼 수 없었지만 핸드폰을 손에 꽉 잡고 있던 상혁은 그녀의 문자를 보고 나서야 긴장되었던 마음이 진정되었다. 이때 연지가 급히 사무실로 들어오며 말했다. “대표님, 방금 비서실의 연락을 받았는데 귀국하는 비행기 티켓을 끊으라고 하셨다고요?” 상혁은 핸드폰을 놓으며 대답했다. “아니야, 취소시켜.” 연지는 잠시 어리둥절했는데 예리한 눈썰미로 상혁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과 불끈 솟아올랐던 핏줄들이 서서히 가라앉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이때 연지의 머릿속에는 순간 하연의 모습이 스쳤는데 바로 고개를 끄덕이고 새로운 화제로 말문을 열었다. “부 사장님 쪽에 사고가 났다고 합니다.” 상혁은 바로 눈살을 찌푸리고 물었다. “무슨 일인데?” “밤에 임주시 공사 현장을 탐사하던 중에 폭발 사고가 발생했는데 부 사장님께서 그 여파로 부상을 당했고 긴급으로 병원에 실려갔다고 합니다.” 순간 상혁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창가로 가더니 말했다. “폭발 원인은?” “인부가 건축자재 보존을 잘못하여 발생한 사고라도 합니다. 다행히 폭발 범위는 크지 않고 후속적인 공사 진행에도 문제는 없을 듯합니다.” 연지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계속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병원에서 전해온 소식에 의하면 부 사장님은 부상이 엄중하여 아마 우리 쪽으로 호송하여 치료를 해야 할 것 같다고 합니다.” “생명이 위험한 거야?” “아직까지 그런 것 같진 않습니다.” 이 말에 상혁은 콧방귀를 꼈다. “야심 덩어리 같은 자식.” “부 사장님께서 참 독하신 것 같습니다. DL그룹 본사로 돌아오기 위해 이렇게까지 하시는 걸 보면 말입니다.” “남준이 독하지 않았다면 내가 떠난 2년 동안 모든 실권을 손에 쥐고 독재하지도 못했겠지.” 연지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부 회장님의 일정을 알아보니 오늘 사모님의 전시회 현장에 도우러 갔다고 하던데 이 사실을 알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가보자.” 상혁이 의미심장하게
“그럼 부상은?” “제가 병원 최고의 외과 의사들을 그쪽으로 지원 보내 반드시 별 탈 없도록 하겠습니다.” 상혁이 계속 말했다. “남준이 일단 돌아오게 되면 공사 현장에서 폭발 사고가 일어났다는 소식은 외부에 소문 날 게 뻔한데 저희 DL그룹에 그런 오점을 남길 수 없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아버지?” 이 말을 들은 부동건은 상혁을 훑어보더니 말했다.“그래, 네 계획이 아주 꼼꼼한 것 같구나.” 상혁은 싱긋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단지 송혜선 아주머니가 이 사실을 알고 걱정할까 봐 근심됩니다.” “만약 그 여자가 걱정된다고 하면 남준을 옆에서 돌볼 수 있도록 함께 임주시로 보내 주거라. 네가 알아서 처리하거라.” 상혁이 공손하게 대답했다. “네.” 연지는 이미 사건의 내막을 다 알고 있었기에 자신도 모르게 내심 통쾌한 기분이 들었다. 상혁은 또 몇 가지 공적인 이야기를 보고했고 돌아가기 전 부동건이 그를 다시 불러 세웠다. “DL그룹을 떠나 있는 2년 동안 많이 성장했구나. 잘하고 있으니 앞으로도 쭉 유지하거라.” 이에 상혁은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다 아버지께서 잘 인도해주신 덕분이죠.” 차에 오른 뒤 연지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 “왜 회장님께 국내 시장에도 진입하고 있다는 말씀은 드리지 않은 겁니까?” 차는 빠르게 달리고 있었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상혁은 자신의 옷소매를 매만지며 말했다. “아직 때가 아니야.” DL그룹으로 돌아온 후 비서실의 직원이 자료 한 부를 가져왔다. “최하연 씨가 사고를 당한 곳을 찾았습니다. 바로 B시 중심구역에 새로 개업한 칵테일바인데 현재 화재는 전부 진압되었고 피해자도 없다고 합니다.” 자료를 건네어 받은 상혁은 두 페이지 넘겨보았고 저도 모르게 칵테일바의 이름을 읽었다. “소울 칵테일?” 옆에 있던 연지가 한 마디 했다. “꽤 세련되었네요.” B시.태훈도 똑같이 하연에게 보고했고 이미 그 화재는 B시의 핫뉴스로 떠올랐다. “꽤 아깝게 됐어요. 알아보니 그 사장은 반
회의실에서는 열렬한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이때 누군가 문을 쾅 닫았는데 바로 호현욱이 자리를 박차고 나온 것이다. “잘난 체하긴!” 뒤따라 나온 부하가 입을 열었다. “어디 저들 말처럼 쉽게 성공하겠습니까? 요즘 전자상 거래는 전부 몇몇 쇼핑 플랫폼에만 먹히는 추세인데 JJ그룹이 어찌 그리 쉽게 치고 올라올 수 있겠습니까!” 호현욱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하연의 너무도 자신만만한 모습에 저도 모르게 걱정되었던 것이다. “혹시라도 저 여자의 뜻대로 된다면?” “호 이사님, 저번 식사자리에서 TB 쇼핑몰 대표는 절대 JJ그룹에 특혜 같은 건 주지 않을 거라고 했잖습니까?” “두 회사는 경쟁 관계이고 소비자들도 멍청하지 않으니 어디가 더 혜택이 많으면 어디로 몰리겠죠!” 이 말을 꺼낸 사람은 바로 호현욱 곁에서 십 몇 년 간을 함께 한 비서였는데 두 사람은 비슷한 연령대였기에 모두 젊은 세대가 추진하는 사업에 대해 썩 내키지 않아 하고 있었다. 비서의 말을 듣고 난 호현욱은 그제야 조금 안심되었고 고개를 들어보니 마침 하성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리고 있었다. 호현욱은 실눈을 뜨며 말했다. “저 자식 요즘 회사를 자주 드나드네?” “자기 여동생이 여기 있으니 당연히 기웃거리고 싶나 보죠.” 호현욱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저번 모임 때도 저 자식을 봤잖아.” “그 날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날 저녁 레스토랑에서 하성의 뒤에는 한 여인이 일정한 거리를 두고 따라가고 있었는데 한 눈에 봐도 심상치 않은 관계임을 알 수 있었다. 게다가 더욱 놀랄 만한 일은 호현욱이 화장실을 가는 길에 마침 구석진 곳에서 두 사람이 입을 맞추는 장면을 목격했다는 것이었다.호현욱은 눈동자를 한바퀴 돌리더니 말했다. “연회 때 하성도 참석하나?” “물론이죠. 이제 하성도 DS그룹의 일원이고 하연의 프로젝트이니 참석하는 건 당연한 거고 아마 마지막에 등장한다는 것 같던데요.” “흥, 만약 하성이 무대에 오르지 못한다면 연회의 효과는 크게 줄어들
가흔은 부끄러운 듯 얼굴이 새빨개졌고 조심스레 주변을 살피더니 말했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다른 사람이 듣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확실히 연예인과 만나는 건 이런 불편한 점이 있었다. 전에 하성과 하연이 함께 있는 사진이 유출되어 엄청난 여론이 몰린 적 있었는데 그 후 두 사람이 남매 사이라는 것이 밝혀지고 나서야 그 스캔들은 어영부영 넘어간 적 있었다. 외부 사람들의 눈에 하성은 최정상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스타였기에 절대 여자친구와 관련된 스캔들이 나서는 안 되었다. 게다가 가흔은 외부의 주목을 받은 걸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었고 하성의 일에 영향을 주고 싶지도 않았기에 유독 더 조심하려 했다. 하연도 그걸 잘 알았기에 다시 핸드폰을 돌려주었다.“너 그렇게 대놓고 티 내다가 언젠가 들킬 수도 있어.” 그러자 가흔이 담담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괜찮아, 오랜 팬이라고 하면 돼.” 이 말을 들은 하연과 친구들은 다 같이 끌어안으며 투덜거렸다. “완전 오글거려!” 그렇게 한바탕 수다를 떨고 있을 때 여은이 갑자기 한 마디 던졌다. “가흔이를 뭐라고 하긴? 너도 요즘 기분이 꽤 좋아 보이던데?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펴서는 말이야.” 순간 하연은 멈칫했고 하마터면 다 털어놓을 뻔했다. “그래?” “응, 얼굴에 다 티나.” 하연은 계속 회피하며 말했다. “그 정도 아니야.” 이 모습을 본 가흔은 하연과 함께 쥬얼리를 가지러 가야 한다는 핑계로 자리를 떴다. 그리고 계단에서 가흔이 물었다. “이번 연회에 상혁 오빠도 와?” “응, 약속했어.” 이에 가흔은 실눈을 뜨며 말했다. “아주 달달하네.” 하연은 가방에서 담배 한 대를 꺼내 불을 붙이며 말했다. “비밀 지켜줘서 고마워.” 가흔은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듯 화제를 돌렸다.“들리는 바로 한서준이 주현빈의 아들을 구했고 그 계기로 이번 연회의 협찬권을 얻었다고 하던데?” 이때 멀지 않은 곳에서 현수막을 펼치고 있었고 거기에는 HT그룹의 로고가 선명히 박혀 있었
이 아주머니는 의아한 듯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이때 하연은 마침 테라스에서 그 칵테일바 사장의 모습을 발견했다.“안녕하세요. 저번에 구해주신 거에 대해 감사의 인사를 드리러 왔어요.” 그러자 이 남자는 미간을 찌푸렸는데 피하려다 어쩔 수 없이 모습을 들켜버린 듯 마지 못해 말했다. “아주머니, 들여보내세요.” 별장의 마당에는 많은 화초들이 심어져 있었고 실내의 인테리어 또한 매우 고급스러웠다. 그리고 계단을 내려오고 있는 이 남자는 키가 180cm는 훌쩍 넘어 보였고 얼굴은 마스크와 모자로 가리고 있는 것이 마치 연예인 같은 느낌이었다. 하연은 태훈에게 눈짓하며 가져온 선물을 건네게 했다. “전부 몸에 좋은 것들입니다. 값진 건 아니나 저의 작은 성의이니 받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남자는 그 물건들을 힐끗 보았는데 매 한 가지마다 몇 백만 원은 넘었으나 하연은 값지지 않다고 말하고 있었다. “과분한 선물입니다. 전 이런 거 필요 없습니다.” 남자는 전혀 손님으로 온 사람을 들여와 앉힐 생각이 없어 보였고 이에 하연은 약간 뻘쭘했다. “제 목숨을 구해 주셨으니 일단 이것들로 간단히 고마움을 전하려던 바입니다. 앞으로 다른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 연락하셔도 됩니다. 저는...” 말이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남자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DS그룹의 사장님인 최하연 씨 맞죠?” 이에 하연은 깜짝 놀라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절 아시는 겁니까?” 남자는 마지못해 자리에 앉으라고 표하며 말했다. “나이가 저와 비슷해 보이시는데 그렇게 공손하게 굴 필요 없습니다.” “아직 뭐라고 불러야 할 지 이름을 몰라서요.” “전 손이현이라 합니다.” ‘손이현?’ 하연은 속으로 그 이름을 곱씹었다. “성함도 칵테일바의 이름처럼 세련되셨네요.” 이때 이현은 하연을 빤히 쳐다보더니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고 홍연옥에게 마실 것을 준비해 오라고 분부했다. “아주 유명하신 분이더라고요. 경제 뉴스에서 본 적 있어요.” ‘그렇구나.’ “제가 누
하연은 바로 가방에서 메모장을 꺼내 숫자들을 적기 시작했다. “이건 제 번호인데 그때 도착하시면 연락 주세요. 제가 직원들을 안배하여 마중 가도록 할게요.” 하연은 그 메모지를 곧바로 이현의 손에 건네어 주었다. 그런데 이현이 마침 말을 하려는 찰나 태훈이 밖에서 급하게 뛰어와 하연의 귓가에 뭐라고 속삭였고 그 말을 듣고 난 하연은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정말이야?” 태훈이 힘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 DS그룹으로 돌아가야 해.” 하연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죄송합니다. 급한 일이 생겨 먼저 일어나 보겠습니다.” “네.” 차량은 곧바로 별장을 벗어났고 홍연옥이 문을 닫고 돌아오며 물었다. “집에 손님이 찾아오는 건 아주 드문 일인데 저 아가씨께서는 참 밝은 사람 같네요.” “저 여자가 여기로 찾아왔단 건 그 누구에게도 말하면 안 돼.” 이현은 손에 하연이 건넨 메모지를 꽉 움켜쥐었고 차마 휴지통에 버리지 못했다.하연이 DS그룹으로 돌아왔을 때 B시는 이미 어둑어둑했지만 회의실의 불빛만은 환하게 켜져 있었다. 그녀가 회의실의 문을 열자마자 스크린 화면에는 이미 여러 가지 가사 제목들이 캡쳐되어 채 올라와 있었고 그 수위와 타격감은 상당히 강했다. [최하성의 연인!] [최하성의 키스 장면.] [최하성과 의문의 여인.] 이런 기사들 밑에는 전부 하성과 가흔이 입을 맞추고 있는 사진이 게재되었는데 두 사람은 몸을 가깝게 붙이고 있었고 하성이 가흔을 보는 눈에서는 꿀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디스패치는 이런 기사를 게재했다. [인기 배우의 뜨거운 사랑, 그녀는 과연 누구일까!] 그리고 그 밑의 댓글들은 모두 충격적이라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하성이라고! 세상에, 역시 이런 스캔들 터지는 건 한순간이네.] 하성은 리허설을 하던 도중 DS그룹으로 끌려와 회의실에 앉아 있었는데 아주 피로하고 착잡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진미화는 바로 하성의 핸드폰을 압수했고 삿대질을 하며 소리 쳤다.“하성,
하연은 깜짝 놀란 듯 말했다. “전혀 몰랐어요.” 하성은 씁쓸하게 미소를 지었다.“당연히 몰랐겠지. 나 자신도 꾸역꾸역 참아왔으니까.” 하성은 당시 최씨 가문에 살 때 비록 겉으로는 항상 밝은 척했고 사람들의 예쁨도 받아왔지만 사실 입양된 신분때문에 늘 조심스럽게 남들의 눈치를 보곤 했다. 한 번은 하성의 생일날, 최동신이 그에게 지난해에 줬던 선물을 또 준 적 있는데 비록 매우 슬펐지만 그 감정을 꾹꾹 눌러가며 기쁜 척했고 고맙다며 최동신에게 와락 안기기까지 했다. 당시 가흔도 손님으로 현장에 있었는데 집으로 돌아갈 때 그녀는 자신이 준비한 선물을 하성에게 건네며 말했다.“사실 오빠가 그 선물 안 좋아한다는 거 알아요. 왜 아무 말 하지 않았는지도 알고 있고요. 생일 축하해요. 앞으로는 자기 기분도 잘 표현할 수 있길 바라요.” 그 순간 하성은 넋이 나간 듯 제자리에 멍하니 선 채 왜소하지만 강인한 가흔이 떠나가는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음날, 최동신의 비서가 하성을 찾아와 공사가 다망하여 실수로 선물이 잘못 전달되었다고 사과했다. 하지만 하성은 괜찮다며 말했다. “전 이미 최고의 선물을 받았어요.” 그건 바로 가흔이 준 선물이었는데 그녀가 직접 만든 목걸이였고 반달 모양의 큐빅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선물은 바로 하성의 아픔을 이해해준 가흔의 마음이었다. 하지만 그 후 두 사람은 거의 만나지 못했는데 가장 큰 이유는 하연 때문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더 흐르고 난 뒤에, 하성은 연예인이 되었고 여러 부류의 여자들을 많이 만나보았지만 단 한번도 가흔처럼 특별한 느낌의 여자는 없었고 종종 그녀가 나오는 꿈을 꾸기도 했다. 게다가 어쩌다 한 번 만나게 되면 가흔은 하성을 피하기만 했다. 그러나 얼마 후 하성은 가흔도 자신을 좋아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지만 자신의 특별한 신분이 그녀에게 상처를 줄까 두려워 다가가지 못했었다. “하연, 오랜 시간이 동안 망설였으니 이제 다시는 가흔을 놓치고 싶지 않아.”
상혁은 이때 거래처와 식사 자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잠깐 담배 피러 나온 김에 하연에게 전화를 건 것이다. 상혁은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마치 영화 속 주마등처럼 희미하고도 신속했다. [아직, 늦을 수도 있지만 꼭 갈게.]국내와는 달리 F국의 토요일은 출근일이었고 마침 그날 경매 일정이 있었는데 매우 중요한 자리라 반드시 직접 출석해야 했고 정확히 언제 끝날지도 확정 지을 수 없었다. 하연은 담담히 알겠다고 대답했다. [내가 보고싶은 거야?]달달한 목소리가 전화기를 통해 전해졌고 하연은 약간 부끄러운 듯 말했다. “누가 보고싶대요? 안 본지 고작 보름 밖에 안 됐는데 전 막 애타게 기다려지고 절대 그런 거 않거든요?” [내가 너무 자신만만했나?]하연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다고 안 보고싶다는 건 아니고요.” 하연은 볼 수 없었지만 이때 상혁은 이미 입이 귀에 걸린 채 그 말을 하는 하연의 표정을 상상하고 있었다. ‘아마 엄청 귀엽고 사랑스럽겠지?’ [갈 때 선물 사서 갈게.]“선물도 있어요?” [우리 어린이 몇 달 간 엄청 고생했는데 당연히 선물 받아야지.]우리 어린이란 말에 하연은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고 아무런 혈연관계도 없는 남자에게 사랑받은 이 느낌은 가족에게 받은 사랑의 느낌과는 전혀 달랐고 아주 미묘한 감정이었다. 그리고 이건 하연이 서준에게서 느껴본 적 없는 것이었다. “누가 들으면 날 엄청 놀리겠는데?” 이때 상혁은 뒤에서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에 급하게 몸을 돌리고 한손으로 난간을 짚으며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누가 감히 놀리겠어요.]황연지가 담배 연기 너머 입모양으로 말했다. [토요일에 봐.]상혁은 급히 전화를 끊었다. “WA그룹의 회장은 9시 비행기로 떠납니다. 저희에겐 이제 한 시간밖에 남지 않았고 만약 그를 설득해 프로젝트를 따내지 못한다면 앞으로 저희 사업도 힘들어질 겁니다.” 상혁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가자.” 그렇게 이틀 동안 하연은
최하성은 한 사람의 어깨에 손을 턱 얹으며 말했다. “하연아, 아직도 망설여? 이런 기회 다시 없어!” 마치 하연이 엄청난 대박을 터뜨린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다. 하지만 하연은 살짝 고개를 들어 옆에 있는 상혁을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 진짜 내가 득 본 거네.’ 하연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입꼬리가 예쁘게 올라가며, 단호하게 말했다. “좋아요.” 짧고 확실한 대답이었다. 하연의 태도에 최하성이 환호성을 질렀다. “좋아! 이왕 이렇게 된 거, 오늘 바로 하자!” “오늘?” 하연은 깜짝 놀랐다. ‘너무 급한 거 아니야?’ “좋다! 오늘이 딱이지.” 최동신도 흐뭇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성아, 하연이 신분증 얼른 가져와라.” “네, 할아버지!” 최하성은 신이 나서 뛰다시피 나갔다. 마치 자기 결혼인 양 들떠 있었다. 조진숙은 잠시 당황했지만, 이내 바로 정신을 차렸다. “원 비서, 상혁이 신분증도 준비해 주세요.” 모든 것이 순식간에 진행됐다. 두 사람은 양가 가족들의 따뜻한 시선을 받으며 함께 문을 나섰다. ...구청. 서류를 작성하고, 필요한 절차를 하나하나 밟아 나갔다. 그리고 드디어, 두 사람의 손에 각각 가족관계증명서와 혼인관계증명서가 쥐어졌다. 하연은 혼인관계증명서를 내려다봤다. ‘진짜구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어제까지의 불안과 걱정은 다 지나갔어.’‘이젠... 내 행복을 움켜쥔 거야.’ 그 순간, 상혁이 환한 웃음으로 하연을 껴안았다. “안녕, 우리 와이프!” 마치 세상을 다 가진 듯한 표정이었다. 하연도 활짝 웃었다. 눈이 실룩 실룩, 초승달처럼 예쁘게 휘어졌다. “안녕, 우리 남편!” 행복에 흠뻑 젖어 있던 상혁과 하연은 눈치채지 못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한 줄기 음습한 시선이 두 사람을 집요하게 쫓고 있다는 걸. 송혜선은 옷 속에 숨겨둔 단칼을 손아귀에 꼭 쥐었다. 구청 계단을 내려
송혜선은 조봉규를 거칠게 밀쳐냈다. 조봉규는 중심을 잃고 바닥에 거칠게 쓰러졌다. “안 돼... 혜선아...” 쿵!무거운 소리와 함께 조봉규는 힘없이 바닥에 쓰러진 채, 천천히 눈꺼풀이 내려앉았다. 결국 그는 의식을 잃었다. 송혜선은 조심스레 무릎을 꿇었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조봉규의 얼굴을 스쳤다. 잠시 머뭇거리던 손끝은 이내 떼어졌다. ‘이젠, 끝이야.’ 송혜선은 망설임 하나 없이 돌아서며, 서늘한 공기 속으로 사라졌다. ...그동안, 상혁은 대부분의 일정을 취소하고 하연의 곁에 머물렀다. 둘만의 달콤한 시간은 보는 이들까지 부러움에 빠지게 했다. 이런 두 사람의 모습에 양가 부모님들은 대만족이었다. 어느 날, 오랜만에 양가 어른들이 한자리에 모였으니, 자연스레 상혁과 하연의 결혼 이야기가 오갔다. “약혼은 했지만, 전통대로라면 결혼식도 치러야지.” 최동신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조진숙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하연은 이미 조진숙에게 친딸과 다름없는 존재였기 때문에, 인생에 단 한 번뿐인 결혼식을 대충 넘길 순 없었다. “걱정 마세요. 결혼식 준비는 제가 맡아서 잘 준비할게요. 두 아이는 그날 예쁘게 하고 참석만 하면 됩니다.” “하하, 고맙소, 고맙소.” 최동신은 기쁜 마음을 숨기지 못했다. 요즘 들어 최동신의 건강도 한층 좋아진 데다가 경사까지 겹치니 덩달아 기운이 나는 모양이었다. “아이들만 행복하면, 우리야 바랄 게 없지.” 옆에 있던 최하민이 자연스럽게 거들었다. “결혼식은 서둘러야겠지만, 아직 혼인신고를 안 했으니 그게 먼저 아닐까요?” 조진숙은 그제야 무릎을 탁 치며 소리쳤다. “맞다, 그걸 깜빡했네.” 그녀는 바로 말을 이었다. “그래도 혼인신고는 아이들 의견을 먼저 들어봐야지. 중요한 일이니까.” 하연과 상혁은 나란히 계단을 내려오다, 자연스럽게 들려온 혼인신고 이야기. 둘 다 순간 멈칫했다. 본능처럼 서로를 바라봤다. ‘
상혁은 말없이 부동건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지나간 모든 일들이 마치 한 편의 영화처럼 머릿속으로 한 파래임 한 파래임 스쳐 지나갔다. 한참을 그렇게 서 있다가, 마음을 다잡은 상혁은 겨우 한 마디를 내뱉었다. “네, 알겠습니다.” 부남준 사건은 예정대로 재판이 열렸다. 부씨 가문은 변호사를 통해 대응했지만, 형사 사건인 만큼 얽히고설킨 진실을 밝히는 데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DL 그룹, 최상층 대표실.상혁은 혼자 창밖을 내려다보고 있었고 거대한 도시가 한눈에 들어왔다. ‘결국 이 순간이 오는구나.’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고, 곧 원신민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대표님, 재판 끝났습니다.” 상혁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걸 느끼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판결 나왔어?” “예상대로입니다. 다시는 못 일어날 겁니다.” 원신민의 말은 고요했던 상혁의 마음에 작은 돌을 던진 것처럼 퍼져나갔다. 두 사람의 목숨과 확실한 증거. 이미 알고 있던 결말이었지만, 막상 그 순간이 다가오니 상혁도 묘한 허탈함이 밀려왔다. “부 회장님도 알고 계시나?” “예,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아 기절하셨지만, 다행히 지금은 안정을 되찾으셨고요.” 원신민은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송 여사는 재판하는 그 자리에 있었는데, 판결 듣자마자 바로 떠났어요.”부동건에게 쫓겨난 후, 송혜선은 과거의 화려함을 모두 잃었다. 부동건은 그녀에게 줬던 모든 부동산을 회수했고, 카드 계좌까지 정지시켰다. 이제 송혜선에게는 남은 보석을 팔아 생계를 이어가고 있을 뿐. 상혁은 가늘게 눈을 좁혔다. ‘재판에 온 건 놀랍지 않지만... 반응이 이 정도로 끝났다는 게 아무래도 수상해.’ 경계를 늦추지 않고 바로 상혁은 차갑게 말했다. “송혜선 감시 붙여. 또 무슨 일 일으키기 전에.” 원신민은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대표님.” ...어둡고 습
비틀거리던 부동건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정신 차려... 이 순간만은 피하지 말자.’ 그는 느릿한 걸음으로 상혁 쪽으로 다가갔다. 서서히 가까워지는 거리. 마침내 눈앞에 다다라 멈춰 섰을 때, 두 사람의 시선이 정확히 맞닿았다. 부동건은 말하고 싶은 게 많았지만, 막상 눈을 마주하니, 무슨 말을 먼저 꺼내야 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고, 부동건은 깊은숨을 들이쉬며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상혁아. 그동안, 너랑 너희 어머니한테 내가 너무 못했다.” ‘처음부터 길을 잘못 들었다. 그날, 그 선택이 결국 우리 가족을 무너뜨린 거야.’ 사실, 부동건은 이혼하던 날부터 이미 후회하고 있었다. 그 후로의 모든 시간은, 그저 체면과 자존심을 위한 연기였을 뿐이다. 지금 이 꼴이 된 건... 결국 하늘이 내린 벌이었다. ‘자업자득이야. 이 모든 건 내가 자초한 거니까.’ 상혁은 조용히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그 눈동자엔 적당한 거리감과 냉정함이 깃들어 있었다. “그게 이제 와서 중요하진 않아요. 저도, 어머니도... 이미 오래전에 마음 정리했어요.” 그 말에 부동건은 눈을 감았다. 눈가에 뜨거운 기운이 차오르는 걸 애써 참았다. “그래. 마음 내려놨다니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잠시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던 부동건은 책상 위에 놓여 있던 한 서류봉투를 꺼냈다. 그리고 곧장 상혁에게 건넸다. “이제 나도... 나이가 들었고, 더는 회사를 끌고 나갈 힘이 없다. DL그룹은 내가 처음부터 세운 회사다.”“내 모든 시간과 인생이 들어간 곳이지. 하지만 이제는 놓아야 할 때가 왔다.” 상혁은 망설이듯 손을 내밀지 않았다. 그런 상혁의 손에 부동건은 서류를 억지로 쥐여주며 아들의 손등을 두드렸다. “앞으로는... 네가 이끌어가야 한다.” 그 손길엔 조용한 무게와 책임, 그리고 사죄가 담겨 있었다. “그동안... 많이 힘들었지?” 입꼬리를 살짝 움직이던 부동
상혁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살짝 웃음을 지었다.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검진을 마친 뒤, 하연은 선명한 초음파 사진을 손에 들고 있었다. 사진을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에는 저절로 미소가 번졌다. 그녀는 손끝으로 사진 속 동그란 그림을 가리켰다. “여기 봐봐요. 이게 우리 아기래요.” 목소리엔 설렘과 떨림이 그대로 묻어났다. 상혁도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하연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눈엔 이미 감동이 차올라 있었다. 상혁은 조심스레 하연의 아랫배에 손을 얹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이 순간... 난 정말 너무 행복해.” ‘네가 내 옆에 있고, 우리 아이가 이렇게 자라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야.’ 하연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남자아기일까요, 여자아기일까요?” 그녀의 눈빛에는 이미 사랑스러운 미래가 그려지고 있었다. 상혁은 웃으며 대답했다. “아무래도 상관없어.” 하연은 고개를 살짝 돌려 상혁을 바라봤다. 그 눈동자엔 별빛이 머물러 있는 듯 반짝였다. “그래요... 건강하게만 태어나면... 그걸로 충분해요.”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손을 맞잡았고, 서로의 손바닥에서 전해지는 따뜻함을 느꼈다. 그 순간, 상혁의 주머니 속 핸드폰이 진동했다. 그는 핸드폰을 꺼내 화면을 확인하곤 순간 눈빛이 깊어졌다. 화면엔 낯익은 이름이 선명히 떠 있었다. [부동건.]‘이 타이밍에...?’ ‘설마 무슨 일 생긴 건가?’ 지난 연회 이후, 부동건과는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의 파장이 얼마나 컸는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송혜선과 조봉규. 그 두 사람 때문에 무너진 자존심. 그리고 결국, 부동건은 송혜선을 아이와 함께 본가에서 내쫓았다는 소문까지 들려왔다. 하연이 조용히 말했다. “받아봐요. 무슨 일일 수도 있으니까.” 상혁은 하연의 손등을 가볍게 토닥이고, 그녀를 옆에 있는 의자에 앉힌 후
부동건은 갑작스레 거칠게 기침을 터뜨렸다. “컥”‘피 맛...?’ 목 안에서 치밀어 오르는 피비린내를 억지로 삼켰다. 손등에 핏줄이 선명히 드러나고, 이성의 끈은 이미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부동건의 시선이 천천히 송혜선과 조봉규를 향했다. ‘죽여버리고 싶다.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너희들... 너희들...” 부동건의 입술은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송혜선은 극도의 공포에 휩싸였다. ‘이건 아니야... 이렇게 끝나면 안 돼...’ 그녀는 급히 앞으로 다가가 부동건의 팔을 붙잡았다. “회장님... 우리, 조 선생님이랑 그냥 산후 회복 얘기하던 중이었어요. 진짜예요, 저희는...” 그 말이 끝나기도 전, 부동건의 손이 송혜선의 뺨을 후려쳤다. 짝! 순간 정적. 강하게 내리친 손바닥 소리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일제히 숨을 멈춘 듯 조용해졌다. 송혜선의 얼굴 한쪽이 순식간에 붉게 부어올랐다. 눈가가 덜덜 떨리며, 눈물도 같이 맺혔다. “이 천하의... 배은망덕 같은 것. 내가 너를 어떻게 믿었는데... 감히 날 기만해?” 뒤에 서 있던 하객들 사이에서도 탄식이 흘러나왔다. “저 정도였어?” “저게 진짜였네... 소문이 아니고...” “...”송혜선은 뺨의 통증을 애써 무시한 채, 다시 붙잡았다. “회장님, 제발... 오해예요. 저희 그런 사이 아니에요. 저는... 당신뿐이었어요.” 그러나 부동건은 그 손마저 거칠게 뿌리쳤다. 그리고는 힘껏 송혜선의 복부를 발로 찼다. 퍽! 무너지는 소리와 함께, 송혜선은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 그녀의 입에서 신음이 터졌다. 조봉규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아니야... 지금 나섰다간 나도 끝장이야.’ 한 걸음 다가가려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회... 회장님... 저희... 아무 일도 없었어요... 정말이에요...” 하지만 그 한마디가 기름을 붓는 꼴이 됐다. 부동건은 그대로 조
일 순간 충격의 정점이었다.부동건은 들고 있던 와인잔을 그대로 바닥에 내던졌다. 쨍그랑! 깨지는 소리와 동시에 모든 시선이 그에게 꽂혔다. “저... 저런 미친...!” 그는 화면을 가리키며, 얼굴을 붉힌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숨이 거칠게 턱 끝까지 차올랐다. ‘송혜선... 네가 감히!’ 주변 하객들도 이미 술렁이기 시작했다. “저게 진짜야?” “부 회장님 딸이... 아니라고?” “와... 이건 완전히 생각지도 못한 미친 패륜이야, 상상도 못 했어.” 오늘의 연회는 더없이 화기애애한 분위기였지만, 이제 와선 최악의 스캔들 파티가 되어버렸다. ‘이 연회가... 전부 거짓된 일 때문에 생긴 일이란 말이야?’ ‘우리, 사기당한 거네. 다 같이.’ 그때 스크린이 멈췄고, 연회장 전체의 조명이 다시 환히 켜졌다. 하객들은 본능적으로 두리번거리며 부동건을 찾았다. “회장님, 괜찮으십니까?” 하지만 부동건은 아무런 대답 없이 어금니를 꽉 물고, 몸을 떨며 계단 쪽으로 향했다. 하객들은 그 뒤를 따라붙었다. ‘뭔가 일어나겠군...’ ‘이번엔 진짜 끝장이다.’ ...같은 시각, 2층 방 안. 송혜선은 조봉규의 손등을 다독이며 조용히 말했다. “조금만 참아. 며칠만 지나면 내가 다시 올게.” 조봉규는 싱긋 웃으며, 그녀의 허벅지를 장난스럽게 움켜쥐었다. “응. 기다릴게, 자기.” 하지만 그 말이 끝나기도 전, 문이 거칠게 흔들렸고, 익숙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쾅!! “송혜선! 당장 안 나와?!” 송혜선의 온몸이 순간 얼어붙었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조봉규의 팔을 꽉 잡았다. ‘망했다.’ “어떡해, 부동건이 올라왔어.” 두 사람은 당황하며 방 안을 둘러봤지만, 창문 하나 없는 좁은 방엔 도망칠 곳조차 없었다. ‘안 돼... 이렇게 들키면, 끝장이야. 정말 끝이야.’ 송혜선은 급하게 숨을 고르며 애써 이성을 붙잡으려 했다. ‘진정해. 침착해야 돼.
연회장 안은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가득했다. 부동건은 손에 잔을 들고, 연신 들어오는 축하 인사에 밝은 표정으로 답하고 있었다. “회장님, 따님이 너무 예뻐요. 축하드립니다!” “아이고, 이런 경사는 자주 있어야죠!” ‘그래, 이 정도면 완벽하지. 오늘은 그 누구도 나를 흔들 수 없어.’ 그렇게 술이 한 잔, 두 잔 더해지며 연회장의 분위기도 점점 무르익고 있었다. 그때, 갑작스레 모든 조명이 꺼졌다. 탁! “어, 뭐야?” “불 꺼졌어! 왜 이래?” “아야, 누가 내 발 밟았어!” “...”순식간에 어둠이 덮친 연회장. 사람들의 놀란 목소리와 웅성거림이 퍼졌다. 잔을 들고 있던 부동건은 순간 정지된 듯 멈췄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변을 살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당장 가서 확인해봐!” “네, 회장님!” 직원들이 급히 움직였고, 부동건은 진정시키려는 듯 손을 들고 말했다. “여러분, 당황하지 마시고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전기 쪽 문제인 것 같습니다. 금방 복구됩니다.” 사람들은 잠시 멈춰 서서 어둠 속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고- 그 순간, 연회장 한쪽 벽면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이 조용히 켜졌다. “위이잉...” 어둠 속에서 갑작스레 터진 화면의 빛에 모두가 눈을 찌푸리며 반사적으로 손으로 눈을 가렸다. 그 빛이 익숙해질 무렵, 누군가가 터트린 외마디 감탄에, 시선이 일제히 스크린으로 향했다. “어... 저거 뭐야? 헉, 저게... 말이 돼?” 그리고, 그 스크린 안에 있는 건... 분명 두 남녀의 은밀한 장면이었다. 화면 속, 분명히 누군가를 알아본 듯한 목소리가 터졌다. “저 여자... 그분 아니야?” “옆에 있는 남자는...?” “헐, 이건 진짜 레전드다.” “아, 눈 버렸어. 이게 뭐야, 이게...” “...”사람들의 목소리는 점점 커졌고, 순식간에 연회장은 도저히 되돌릴 수 없는 혼돈의 도가니로 빠져들고 있었다.사람들 사이에 웅성거림이
송혜선이 복도 입구에 막 다다랐을 때였다. 갑작스레 어디선가 튀어나온 그림자가 그녀를 뒤에서 껴안았다. “꺄악!” 놀란 송혜선은 반사적으로 비명을 질렀고, 누군가 재빨리 그녀의 입을 막았다. “나야! 나야, 혜선아.” 익숙한 목소리에 송혜선은 순간 멈칫했다. 그리고 조심스레 남자의 손을 떼어내며 차갑게 말했다.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이 사람, 지금 제정신인 거야?’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이어서 급히 주위를 살폈다. 다행히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송혜선은 그제야 숨을 돌리며, 낮은 목소리로 흘기듯 말했다.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미쳤어, 사람들 눈에 띄면 어쩌려고!!” 그 말엔 명백한 불만과 경계심이 섞여 있었다. 조봉규는 잠시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런 식으로 나오면 안 되는데...’ 그 순간의 긴장, 그리고 복잡한 감정이 두 사람 사이에 감돌았다.조봉규의 시선이 송혜선의 얼굴에서 천천히 내려앉았다. 송혜선은 산후라 그런가, 몸매는 훨씬 더 부드럽고 풍성해져 있었다. ‘이러니까, 잊으려고 해도... 더 생각이 나잖아.’ 그는 순간 충동적으로 송혜선의 팔을 붙잡았다. “잠깐만.” 당황한 송혜선이 눈을 부릅떴다. “뭐 하는 거야!! 지금...” 그러나 조봉규는 말없이 송혜선을 옆방으로 이끌었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작게 ‘탁’ 하고 울렸다. 좁은 공간, 차오르는 침묵. 송혜선은 남자를 노려보며 벽에 등을 댔다. “정신 차려!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조봉규는 그녀를 바라보며 낮게 숨을 내쉬었다. “다들 홀에 있잖아. 아무도 몰라.” 남자의 말투엔 간절함과 조급함이 섞여 있었다. 이건 단순한 욕망이 아니었다. 그리움, 억눌림, 그리고 못다 한 말들. 그는 조심스럽게 송혜선의 턱선을 손끝으로 만지며 말했다. “혜선아... 나, 정말 많이 참았어.” ‘이 사람 또 이러네...’ 송혜선의 심장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