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1일, 월요일.B시 전체를 떠들썩하게 만든 한씨 가문 사건이 재판에 회부되었다. 왕진과 이수애는 각각 법정 양쪽에 앉아 재판받았다. 한서준은 과거의 원한에 연루되지 않아 이번 재판에 출석하지 않았다. 왕아영은 주요 관련자로서 법정 앞줄에 앉아 모든 과정을 지켜보고 있었다. 원래 그녀는 B시의 모든 언론사를 불러 이 사건을 증언하게 할 계획이었으나, 이현이 이를 거부했다. “언론사들이 없으면, 누가 네가 왕씨 가문의 사람인 걸 알겠어?” “이미 말했잖아요. 전 그런 더러운 방식은 원하지 않아요.” 이현의 얼굴은 어두웠다. “공개 여부는 제가 결정할 일입니다.” 재판은 이미 중반에 접어들었고, 상황을 봤을 때 이수애는 무기징역이 확실해 보였다. 하지만 왕씨 가문의 압력으로 인해 그녀에게 다른 형까지 선고하라는 요구도 있었다. 왕아영은 시계를 한 번 확인하고 비서에게 물었다. “이현이는 왜 아직이지?” “아마 길이 막혀서 그런 것 같습니다.” 재판이 진행될수록 증거와 증언들이 속속들이 나왔다. 그 가운데, 이수애는 재판장에서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소리쳤다. “판사님! 저 사람들은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건 저 사람들이 계획한 것입니다. 저는 사람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왕명주를 죽인 건 제가 아닙니다!” 이수애의 정신 상태는 이미 매우 불안정해 보였다. 왕진은 옆에서 차분히 덧붙였다. “분명히 네가 한 짓이야. 네가 나를 매수해 왕명주 사모님에게 약을 먹였고, 사모님에게 남편의 외도를 알려 충격받아 조산하게 했잖아. 게다가 약물까지 사용하는 바람에 사모님은 아이를 낳자마자 이 세상을 떠났어! 너야말로 진짜 죄인이야!”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하고 있군! 그냥 조산한 거야! 나와는 상관없어. 네가 날 모함하고 있어!” “내가 죄인이면, 너도 공범이야. 이렇게 해서 네가 얻는 게 뭔데? 너도 유죄를 피할 수 없을 거야!” “내 딸은 이미 죽었어. 내가 살아서 뭘 더 바라겠어. 이제
판사는 얼굴을 굳히며 변호사의 질문을 단호하게 중단시켰다.“사건과 무관한 사람에 대해서는 더 이상 발언하지 마십시오.”변호사는 잠시 머뭇거리다 고개를 끄덕이며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려 했다.그 순간, 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저는 고인인 왕명주의 친아들입니다. 발언하게 해주십시오.”한창명은 고개를 돌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을 바라보았다.그 사람은 손이현이었다.이현은 깔끔한 하얀 셔츠에 검은 바지를 입고 있었다. 외모는 특별히 두드러지지 않았지만, 그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은 단단하고 강직했다. 그것은 그가 오랜 시간 경찰로 일하며 몸에 익힌 기품이었다.순간, 한창명은 이현에게서 느꼈던 익숙함이 어디서 왔는지 깨달았다. 왕아영은 이현이 도착하자 긴장이 풀린 듯 훨씬 편안한 표정을 지었다.이현은 자신의 신분과 관련된 서류를 제출했다. 판사는 서류를 확인하고 깜짝 놀라며 입을 열었다.“당신이 한명준 씨 본인입니까? 나중에 손이현으로 개명했습니까?”이현은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했다.이수애는 자리에 주저앉으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이현을 쳐다보았다. “그럴 리 없어! 난 한명준을 본 적이 있어! 너처럼 생기지 않았다고!” “마지막 임무 중에 차량 폭발 사고로 강에 추락해 얼굴 전체가 망가졌습니다. 이 대답이면 만족하시겠습니까?” 이현은 차가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의 섬뜩한 미소에 이수애는 온몸이 떨렸다. “한서준도 이 사실을 알았을 텐데, 왜 말하지 않았을까요?” 이수애는 겁에 질린 채 소리쳤다. “네가 내 목숨을 빼앗으러 온 거야... 너는 저승사자야...” 그녀는 비명을 질렀고, 교도관들이 그녀를 제지했다. “이 사건이 사실인지 조사하려면 상부에 문서를 제출하고 검토를 받아야 하니, 절차가 복잡할 겁니다. 저도 이해합니다. 그래서 모든 자료를 여기 준비해 두었습니다. 지금의 손이현이 바로 그때의 한명준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이현은 이미 모든 것을 철저히 정리해 두고 있었다.“한명준 씨
한창명은 이미 철저히 준비된 계획을 세우고 시간까지 정확히 맞춘 듯 보였다. 이현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함정에 빠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한 검사장님이 이런 비도덕적인 짓을 할 줄은 몰랐군요. 소문과는 아주 다르네요.” “한 팀장님이 그 친구를 만난다면, 어쩌면 저에게 감사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한창명은 장난기 어린 미소를 띠었고, 더는 머물지 않고 등을 돌려 떠났다. 그의 행동은 의미심장했고, 의도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이현은 잠시 그 자리에 멈춰 서 있다가 결국 앞으로 걸어갔다. 그가 다가간 한창명의 차는 아주 오래된 것이었다. 한창명은 검소한 성격으로, 이 차를 오랫동안 몰았기에 차량에는 사용감이 여실히 남아 있었다. 이현은 창문을 두드렸지만, 차 안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돌아오지 않았다. 약간 짜증이 난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다시 한번 창문을 두드렸다. 이번에는 창문이 서서히 내려갔다. “안녕하세요.” 이현은 차 안을 들여다보았다. 순간, 그의 몸이 굳어졌다. 차 안에 앉아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하연이었다. 하연은 특별히 꾸미지 않은 채, 단정하고 소박한 옷차림에 긴 머리를 앞으로 늘어뜨리고 있었다. 표정은 무표정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긴장된 침묵 속에서 대치했다. 이현의 가슴은 마치 거대한 파도에 휩쓸린 듯 흔들렸고,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조차 힘들었다. “하연 씨가 여기... B시에 있을 리가 없는데... 분명...” “지금쯤이면 제가 F국에 있어야 하고, 깨져버린 부상혁과의 관계에 대한 감정적 상처를 치유하며 쉬고 있어야 하는데... 그렇죠?” 하연은 담담하게 대답하며 차 문을 열었고, 이현에게 안으로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둘의 숨결이 가까워지자, 이현은 그 가까운 거리만큼 더 긴장되었다. “가십 기사에 그렇게 쓰여 있었으니, 손 사장님이 그렇게 생각한 게 이상한 건 아니죠. 만약 한 팀장님이 제가 오늘 B시에 있는 걸 알았더라면, 아마
두 사람의 피부가 맞닿았다.이현의 몸은 뜨거웠고, 하연의 몸은 차가웠다.“한 팀장님이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어서 저에게 말하지 않았다면, 그건 이해할 수 있어요. 하지만 그 이후에도, 제가 가게에서 한 팀장님을 만났을 때도, 한 번도 진실을 말해주지 않았잖아요.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만나면서, 단 한 번도 그 기회를 잡을 수 없었나요?”하연은 이현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고, 구석으로 몸을 웅크리며 적대적인 자세를 취했다.그녀는 매 순간 진실에 다가갈 뻔했지만, 이현은 늘 입을 다물고 있었다.“제가 한 팀장님과 만나려 했을 때마다 당신은 오지 않았어요. 그리고 그 이후로도 당신은 제가 고통 속에서 헤매는 걸 지켜보기만 했죠. 당신 눈에는 제가 정말 바보처럼 보였을 거예요, 그렇죠?” 하연은 그동안 수없이 마음을 다잡으며 감정을 억눌러 왔지만, 핸드폰 너머로 이현이 스스로 한명준이라고 인정한 순간, 억눌렀던 분노가 터져 나왔다.“저는 하연 씨를 단 한 번도 바보라고 생각한 적이 없어요.” 이현은 한 단어, 한 단어 또렷하게 말했다.“하연 씨를 바보라고 생각했으면, 이렇게 오랫동안 하연 씨 곁에 있지 않았을 거예요. 저는 단지 하연 씨를 마주할 용기가 없었어요. 하연 씨는 귀한 명문가의 아가씨이지만, 저는 뭐였죠? 고아에, 경찰에서 퇴출당한 사람, 얼굴이 망가진 불쌍한 사람이었어요. 하연 씨가 말해봐요, 제가 어떻게 최씨 가문의 귀한 아가씨와 어울릴 자격이 있었겠어요.”하연의 가슴이 아프게 찔렸다.눈앞의 이현은 과거의 한명준과 완전히 달랐다. 한명준은 밝고 자신감 넘쳤지만, 지금의 이현은 자신감 없이 침울했다.차 안은 서로 억눌린 숨소리만이 가득했다.오랜 침묵 끝에, 하연은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여 반쯤 무릎을 꿇고 그의 손을 잡았다.“저는 그때 아무도 상관하지 않았어요. 제가 조금이라도 그 사람들을 신경 썼다면, 한서준과 결혼하지도 않았겠죠.”이현의 눈이 눈물로 가득 찼다. 그는 괴로운 듯 물었다. “그럼 지금은요?” 하연은 대답
“공항으로 데려다주세요.” 하연은 눈을 감고 차창에 기대어 감정을 가라앉혔다. 한창명은 다소 놀란 듯 물었다. “최하연 씨, 비행기에서 내린 지 두 시간도 안 됐는데, B시에서 F국까지는 비행시간만 6시간이에요. 몸이 괜찮겠어요?” 그의 말 속에서 걱정이 묻어나는 것을 느낀 하연은 애써 차분하게 대답했다. “우리 업계는 출장에 자주 나가잖아요. 10시간 넘게 비행하는 일도 흔한 일이에요. 한 검사장님,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하지만 지금은 최하연 씨의 얼굴이 너무 창백해요. 일단 쉬고 가는 게 어떻겠어요?” 한창명은 그녀의 의견을 묻지 않고 곧바로 기사에게 경로를 변경하라고 지시했다. 하연은 반박할 기운이 없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손이현의 정체가 드러난 이상, 각지에 속속들이 소식이 전해질 것이 분명했다. 그때쯤이면 언론들이 기사를 쏟아내기 시작할 터였다. 한창명은 하연을 자기 집으로 데려갔다. 그곳은 공직에서 받은 집으로, 2층짜리 복층 구조에 독립된 정원이 딸린 집이었다. 출입구에는 경비가 상주하고 있었다. 그는 직접 하연을 부축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가사 도우미에게 하연을 부축하게 했다. “여긴 손님방이에요. 여기서 잠시 쉬도록 해요. 필요한 게 있으면 제 비서에게 말하면 돼요.” 이 집은 사각형 구조에 붉은 나무 가구들로 가득했으며, 생활의 흔적은 거의 없었다. 하연은 문가에 기대어 있다가 그 모습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한창명은 그녀의 웃음을 오해한 듯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최하연 씨의 집에 비하면 여긴 확실히 초라하죠. 호텔로 옮겨 드릴까요?”하연의 마음이 한결 나아졌다.“그렇다면 최고층 스위트룸에서 묵고 싶어요. 가장 좋은 걸로, 하룻밤에 몇천만 원짜리로요.”“그건 제 몇 달 치 월급이에요.”한창명은 솔직하게 답했다.“최하연 씨, 저는 감당할 수 없어요.”하연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농담이었어요. 그리고 한 검사장님, 이젠 저한테 말을 편하게 하셔도 돼요. 그냥 ‘하연’
F국, DL그룹 임원회의. “B시는 이미 발칵 뒤집혔습니다. 한명준 씨가 아직 살아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경찰서장님이신 나호중 씨께서는 그 사실을 알고도 보고하지 않은 것 때문에 윗선에게 크게 혼이 나셨습니다.” 넓고 밝은 사무실에서, 부상혁은 원신민에게 등을 돌린 채 테이블에서 책 한 권을 꺼냈다. 상혁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 “왕씨 집안이 한명준을 그렇게 오랫동안 몰래 키워왔으니, 이번 생엔 다시 경찰로 돌아갈 일 없을 겁니다. 아마 앞으로는 상업계로 전향할 겁니다.” 원신민이 분석했다. 상혁은 이에 대해 아무런 의견을 표하지 않고, 원신민이 이어서 보고하는 이야기에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아, 맞다... 최 사장님이 B시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이 일에 대해 최 사장님은...” 말끝을 흐리는 것이 때로는 가장 강력한 암시가 되기도 한다.상혁이 책장을 넘기던 손을 잠시 멈췄지만, 역시나 전혀 놀라지 않은 듯했다. “요 며칠 언론 앞에서 상심한 척하며, 최씨 가문 본가에 갇혀 집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않는 연극을 벌였지. 다 그날을 위해서였어.” 원신민은 잠시 멍해졌다가 응답하지 못하고 물었다. “왜요?” “그래야만 최 사장님의 한명준 씨가 방심하고 법정에 모습을 드러낼 테니까.” 상혁은 책을 덮고, 책상을 가볍게 두드리며 입가에 냉소와 자기 비웃음을 띠었다. “그 사람은 이미 다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 한 가닥 남은 감정을 이용한 거야.” 그 한 가닥 남은 감정, 과연 누구의 감정일까? 분위기가 묘하게 흐르자 원신민도 더는 묻지 않았다. “회의하자고 빨리 공지해.” 책을 쓰레기통에 던져 넣은 상혁의 눈빛에 서슬 퍼런 기운이 감돌았다. 원신민은 오늘 회의가 절대 쉽지 않을 것이라는 예감을 느꼈다. 그리고 그의 예감은 적중했다....하연은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오래 잠들었고, 눈을 떴을 때는 이미 해가 떠 있었다. 몽롱한 상태로 문을 열자, 가사도우미가 음식을 다 준
하지만 하연이 발목을 삔 횟수가 참 많았다. 그날 간담회에서 하연은 단지 상혁의 동정을 끌어내기 위해 작은 쇼를 하려고 했을 뿐인데, 진짜로 발목을 삐고 말았고, 정말 눈물까지 흘렸다. 최동신은 그 소식을 듣고 무척이나 걱정하며 소중한 손녀를 위해 유명한 의사들을 많이 알아봤다. 심지어 최동신은 지금도 하연이가 B시로 돌아왔다는 사실은 모르고, 최씨 가문 본가에서 손녀를 찾아 헤매고 있을 것이다. 그 사이 정예나는 하연의 방에서 겉치레로 행동하다가 최동신에게 간파당했고, 그 순간 최동신은 분노로 가득 찼다. “예나야, 솔직하게 말해라. 우리 하연이는 도대체 어디로 간 거냐?” 예나는 눈물을 참지 못하고 간신히 말했다. “하... 하연이는 외출해서 일을 보고 있어요.” “발목을 삐었는데, 운전기사도 경호원도 아주머니도 하나 없이 어떻게 나갔다는 거냐?” 예나는 최동신의 추궁을 이기지 못하고 온 동네에 울음소리를 퍼뜨렸다. 부씨 가문의 본가도 최씨 가문의 본가 근처에 있었고, 상혁은 마침 본가로 가는 길목에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귀를 찢는 듯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조진숙도 차 안에 타고 있었지만,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고 한마디 했다. “하연이 아니야? 대체 무슨 일이야? 성인이 다 된 아이한테 체벌이라도 하는 거야? 내려가서 한번 봐야겠다.” 차에서 내리려는 조진숙의 손을 상혁이 막았다. “어렸을 때부터 하연이를 그렇게 함부로 대하셨죠.” 조진숙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이내 상황을 이해했다. 바로 그때, 뒤에서 경적이 울렸고, 차창이 내려가며 초조해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앞에 있는 차, 도대체 갈 생각 있어요, 없어요?” 하연의 목소리였다. 예나의 연락을 받은 하연은 서둘러 F국으로 돌아왔고, 이제 몇 걸음만 더 가면 집에 도착할 상황이었다. 그런데 앞차가 막고 있어 화가 난 하연은 발목만 삐지 않았다면 차에서 내려 걸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연이네!” 조진숙은 반가워하며 말했다. 상
하연이가 한참을 달래고 나서야 최동신의 화가 조금 가라앉았다. “다음번엔 절대 이렇게 하지 마라.” 하연은 그제야 마치 사면받은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예나에게 휴지를 건넸다. “하지만, 할아버지도 사람을 때리면 안 돼요...” “때리긴 누굴 때렸다고 그래? 몇 마디 한 게 그렇게 서러웠던 모양이구나.” 예나는 울먹이며 말했다. “할아버지의 강한 카리스마가 너무 무서워서 운 거예요...” 하연은 웃음이 터질 것 같았다. 바로 그때, 최동신이 갑자기 지팡이로 바닥을 두드리며 말했다. “며칠 후에 부씨 가문의 사당 백주년 기념식이 있는데, 많은 명문가가 초대받았어. 우리도 그중 하나다. 네 큰오빠는 중요한 일이 있어서 못 오고, 집에는 나랑 너밖에 없구나. 내가 갈까, 아니면 네가 갈래?” ‘부씨 가문의 사당 백주년 기념식이라... 그래서 부상혁이 돌아왔던 거였군...’ ‘그 사람은 원래 본가에 자주 오는 사람이 아닌데...’ 하연은 할아버지의 의도를 알았다. 명문가들 사이의 중요한 행사에는 꼭 가족 중 한 명이 나서야 했고, 집사를 대신 보낼 수 없는 일이었다. “할아버지는 건강도 안 좋으셔서 몇 년째 외출도 안 하셨잖아요. 이런 일은 제가 처리할게요.” 하연은 잠시 생각한 후 대답했다. “내가 세상일에 더 이상 신경 쓰진 않지만, 너와 관련된 일이라면 나는 언제든지 움직일 용의가 있다.” 최동신의 말에는 묘한 의미가 담겨 있었다. “제가 가서 잘 처리할 수 있어요.” 하연은 미소 지으며 답했다. 최씨 가문 본가의 테라스에는 꽃과 나무가 가득 심겨져 있었다. 예나는 그곳의 그네에 앉아 있었다. “진짜 가는 거야? 옛 연인을 다시 만나면, 더 불편할 텐데...” 하연은 아까 입구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한동안 말이 없었다. 자신이 과연 상혁과 다시 만날 수 있을지, 아직 확실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그 사람은... 분명 나를 안 만나고 싶을 텐데...’ 그래서 하연은 백주년 기념식
상혁은 말없이 부동건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지나간 모든 일들이 마치 한 편의 영화처럼 머릿속으로 한 파래임 한 파래임 스쳐 지나갔다. 한참을 그렇게 서 있다가, 마음을 다잡은 상혁은 겨우 한 마디를 내뱉었다. “네, 알겠습니다.” 부남준 사건은 예정대로 재판이 열렸다. 부씨 가문은 변호사를 통해 대응했지만, 형사 사건인 만큼 얽히고설킨 진실을 밝히는 데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DL 그룹, 최상층 대표실.상혁은 혼자 창밖을 내려다보고 있었고 거대한 도시가 한눈에 들어왔다. ‘결국 이 순간이 오는구나.’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고, 곧 원신민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대표님, 재판 끝났습니다.” 상혁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걸 느끼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판결 나왔어?” “예상대로입니다. 다시는 못 일어날 겁니다.” 원신민의 말은 고요했던 상혁의 마음에 작은 돌을 던진 것처럼 퍼져나갔다. 두 사람의 목숨과 확실한 증거. 이미 알고 있던 결말이었지만, 막상 그 순간이 다가오니 상혁도 묘한 허탈함이 밀려왔다. “부 회장님도 알고 계시나?” “예,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아 기절하셨지만, 다행히 지금은 안정을 되찾으셨고요.” 원신민은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송 여사는 재판하는 그 자리에 있었는데, 판결 듣자마자 바로 떠났어요.”부동건에게 쫓겨난 후, 송혜선은 과거의 화려함을 모두 잃었다. 부동건은 그녀에게 줬던 모든 부동산을 회수했고, 카드 계좌까지 정지시켰다. 이제 송혜선에게는 남은 보석을 팔아 생계를 이어가고 있을 뿐. 상혁은 가늘게 눈을 좁혔다. ‘재판에 온 건 놀랍지 않지만... 반응이 이 정도로 끝났다는 게 아무래도 수상해.’ 경계를 늦추지 않고 바로 상혁은 차갑게 말했다. “송혜선 감시 붙여. 또 무슨 일 일으키기 전에.” 원신민은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대표님.” ...어둡고 습
비틀거리던 부동건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정신 차려... 이 순간만은 피하지 말자.’ 그는 느릿한 걸음으로 상혁 쪽으로 다가갔다. 서서히 가까워지는 거리. 마침내 눈앞에 다다라 멈춰 섰을 때, 두 사람의 시선이 정확히 맞닿았다. 부동건은 말하고 싶은 게 많았지만, 막상 눈을 마주하니, 무슨 말을 먼저 꺼내야 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고, 부동건은 깊은숨을 들이쉬며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상혁아. 그동안, 너랑 너희 어머니한테 내가 너무 못했다.” ‘처음부터 길을 잘못 들었다. 그날, 그 선택이 결국 우리 가족을 무너뜨린 거야.’ 사실, 부동건은 이혼하던 날부터 이미 후회하고 있었다. 그 후로의 모든 시간은, 그저 체면과 자존심을 위한 연기였을 뿐이다. 지금 이 꼴이 된 건... 결국 하늘이 내린 벌이었다. ‘자업자득이야. 이 모든 건 내가 자초한 거니까.’ 상혁은 조용히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그 눈동자엔 적당한 거리감과 냉정함이 깃들어 있었다. “그게 이제 와서 중요하진 않아요. 저도, 어머니도... 이미 오래전에 마음 정리했어요.” 그 말에 부동건은 눈을 감았다. 눈가에 뜨거운 기운이 차오르는 걸 애써 참았다. “그래. 마음 내려놨다니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잠시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던 부동건은 책상 위에 놓여 있던 한 서류봉투를 꺼냈다. 그리고 곧장 상혁에게 건넸다. “이제 나도... 나이가 들었고, 더는 회사를 끌고 나갈 힘이 없다. DL그룹은 내가 처음부터 세운 회사다.”“내 모든 시간과 인생이 들어간 곳이지. 하지만 이제는 놓아야 할 때가 왔다.” 상혁은 망설이듯 손을 내밀지 않았다. 그런 상혁의 손에 부동건은 서류를 억지로 쥐여주며 아들의 손등을 두드렸다. “앞으로는... 네가 이끌어가야 한다.” 그 손길엔 조용한 무게와 책임, 그리고 사죄가 담겨 있었다. “그동안... 많이 힘들었지?” 입꼬리를 살짝 움직이던 부동
상혁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살짝 웃음을 지었다.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검진을 마친 뒤, 하연은 선명한 초음파 사진을 손에 들고 있었다. 사진을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에는 저절로 미소가 번졌다. 그녀는 손끝으로 사진 속 동그란 그림을 가리켰다. “여기 봐봐요. 이게 우리 아기래요.” 목소리엔 설렘과 떨림이 그대로 묻어났다. 상혁도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하연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눈엔 이미 감동이 차올라 있었다. 상혁은 조심스레 하연의 아랫배에 손을 얹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이 순간... 난 정말 너무 행복해.” ‘네가 내 옆에 있고, 우리 아이가 이렇게 자라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야.’ 하연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남자아기일까요, 여자아기일까요?” 그녀의 눈빛에는 이미 사랑스러운 미래가 그려지고 있었다. 상혁은 웃으며 대답했다. “아무래도 상관없어.” 하연은 고개를 살짝 돌려 상혁을 바라봤다. 그 눈동자엔 별빛이 머물러 있는 듯 반짝였다. “그래요... 건강하게만 태어나면... 그걸로 충분해요.”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손을 맞잡았고, 서로의 손바닥에서 전해지는 따뜻함을 느꼈다. 그 순간, 상혁의 주머니 속 핸드폰이 진동했다. 그는 핸드폰을 꺼내 화면을 확인하곤 순간 눈빛이 깊어졌다. 화면엔 낯익은 이름이 선명히 떠 있었다. [부동건.]‘이 타이밍에...?’ ‘설마 무슨 일 생긴 건가?’ 지난 연회 이후, 부동건과는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의 파장이 얼마나 컸는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송혜선과 조봉규. 그 두 사람 때문에 무너진 자존심. 그리고 결국, 부동건은 송혜선을 아이와 함께 본가에서 내쫓았다는 소문까지 들려왔다. 하연이 조용히 말했다. “받아봐요. 무슨 일일 수도 있으니까.” 상혁은 하연의 손등을 가볍게 토닥이고, 그녀를 옆에 있는 의자에 앉힌 후
부동건은 갑작스레 거칠게 기침을 터뜨렸다. “컥”‘피 맛...?’ 목 안에서 치밀어 오르는 피비린내를 억지로 삼켰다. 손등에 핏줄이 선명히 드러나고, 이성의 끈은 이미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부동건의 시선이 천천히 송혜선과 조봉규를 향했다. ‘죽여버리고 싶다.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너희들... 너희들...” 부동건의 입술은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송혜선은 극도의 공포에 휩싸였다. ‘이건 아니야... 이렇게 끝나면 안 돼...’ 그녀는 급히 앞으로 다가가 부동건의 팔을 붙잡았다. “회장님... 우리, 조 선생님이랑 그냥 산후 회복 얘기하던 중이었어요. 진짜예요, 저희는...” 그 말이 끝나기도 전, 부동건의 손이 송혜선의 뺨을 후려쳤다. 짝! 순간 정적. 강하게 내리친 손바닥 소리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일제히 숨을 멈춘 듯 조용해졌다. 송혜선의 얼굴 한쪽이 순식간에 붉게 부어올랐다. 눈가가 덜덜 떨리며, 눈물도 같이 맺혔다. “이 천하의... 배은망덕 같은 것. 내가 너를 어떻게 믿었는데... 감히 날 기만해?” 뒤에 서 있던 하객들 사이에서도 탄식이 흘러나왔다. “저 정도였어?” “저게 진짜였네... 소문이 아니고...” “...”송혜선은 뺨의 통증을 애써 무시한 채, 다시 붙잡았다. “회장님, 제발... 오해예요. 저희 그런 사이 아니에요. 저는... 당신뿐이었어요.” 그러나 부동건은 그 손마저 거칠게 뿌리쳤다. 그리고는 힘껏 송혜선의 복부를 발로 찼다. 퍽! 무너지는 소리와 함께, 송혜선은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 그녀의 입에서 신음이 터졌다. 조봉규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아니야... 지금 나섰다간 나도 끝장이야.’ 한 걸음 다가가려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회... 회장님... 저희... 아무 일도 없었어요... 정말이에요...” 하지만 그 한마디가 기름을 붓는 꼴이 됐다. 부동건은 그대로 조
일 순간 충격의 정점이었다.부동건은 들고 있던 와인잔을 그대로 바닥에 내던졌다. 쨍그랑! 깨지는 소리와 동시에 모든 시선이 그에게 꽂혔다. “저... 저런 미친...!” 그는 화면을 가리키며, 얼굴을 붉힌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숨이 거칠게 턱 끝까지 차올랐다. ‘송혜선... 네가 감히!’ 주변 하객들도 이미 술렁이기 시작했다. “저게 진짜야?” “부 회장님 딸이... 아니라고?” “와... 이건 완전히 생각지도 못한 미친 패륜이야, 상상도 못 했어.” 오늘의 연회는 더없이 화기애애한 분위기였지만, 이제 와선 최악의 스캔들 파티가 되어버렸다. ‘이 연회가... 전부 거짓된 일 때문에 생긴 일이란 말이야?’ ‘우리, 사기당한 거네. 다 같이.’ 그때 스크린이 멈췄고, 연회장 전체의 조명이 다시 환히 켜졌다. 하객들은 본능적으로 두리번거리며 부동건을 찾았다. “회장님, 괜찮으십니까?” 하지만 부동건은 아무런 대답 없이 어금니를 꽉 물고, 몸을 떨며 계단 쪽으로 향했다. 하객들은 그 뒤를 따라붙었다. ‘뭔가 일어나겠군...’ ‘이번엔 진짜 끝장이다.’ ...같은 시각, 2층 방 안. 송혜선은 조봉규의 손등을 다독이며 조용히 말했다. “조금만 참아. 며칠만 지나면 내가 다시 올게.” 조봉규는 싱긋 웃으며, 그녀의 허벅지를 장난스럽게 움켜쥐었다. “응. 기다릴게, 자기.” 하지만 그 말이 끝나기도 전, 문이 거칠게 흔들렸고, 익숙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쾅!! “송혜선! 당장 안 나와?!” 송혜선의 온몸이 순간 얼어붙었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조봉규의 팔을 꽉 잡았다. ‘망했다.’ “어떡해, 부동건이 올라왔어.” 두 사람은 당황하며 방 안을 둘러봤지만, 창문 하나 없는 좁은 방엔 도망칠 곳조차 없었다. ‘안 돼... 이렇게 들키면, 끝장이야. 정말 끝이야.’ 송혜선은 급하게 숨을 고르며 애써 이성을 붙잡으려 했다. ‘진정해. 침착해야 돼.
연회장 안은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가득했다. 부동건은 손에 잔을 들고, 연신 들어오는 축하 인사에 밝은 표정으로 답하고 있었다. “회장님, 따님이 너무 예뻐요. 축하드립니다!” “아이고, 이런 경사는 자주 있어야죠!” ‘그래, 이 정도면 완벽하지. 오늘은 그 누구도 나를 흔들 수 없어.’ 그렇게 술이 한 잔, 두 잔 더해지며 연회장의 분위기도 점점 무르익고 있었다. 그때, 갑작스레 모든 조명이 꺼졌다. 탁! “어, 뭐야?” “불 꺼졌어! 왜 이래?” “아야, 누가 내 발 밟았어!” “...”순식간에 어둠이 덮친 연회장. 사람들의 놀란 목소리와 웅성거림이 퍼졌다. 잔을 들고 있던 부동건은 순간 정지된 듯 멈췄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변을 살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당장 가서 확인해봐!” “네, 회장님!” 직원들이 급히 움직였고, 부동건은 진정시키려는 듯 손을 들고 말했다. “여러분, 당황하지 마시고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전기 쪽 문제인 것 같습니다. 금방 복구됩니다.” 사람들은 잠시 멈춰 서서 어둠 속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고- 그 순간, 연회장 한쪽 벽면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이 조용히 켜졌다. “위이잉...” 어둠 속에서 갑작스레 터진 화면의 빛에 모두가 눈을 찌푸리며 반사적으로 손으로 눈을 가렸다. 그 빛이 익숙해질 무렵, 누군가가 터트린 외마디 감탄에, 시선이 일제히 스크린으로 향했다. “어... 저거 뭐야? 헉, 저게... 말이 돼?” 그리고, 그 스크린 안에 있는 건... 분명 두 남녀의 은밀한 장면이었다. 화면 속, 분명히 누군가를 알아본 듯한 목소리가 터졌다. “저 여자... 그분 아니야?” “옆에 있는 남자는...?” “헐, 이건 진짜 레전드다.” “아, 눈 버렸어. 이게 뭐야, 이게...” “...”사람들의 목소리는 점점 커졌고, 순식간에 연회장은 도저히 되돌릴 수 없는 혼돈의 도가니로 빠져들고 있었다.사람들 사이에 웅성거림이
송혜선이 복도 입구에 막 다다랐을 때였다. 갑작스레 어디선가 튀어나온 그림자가 그녀를 뒤에서 껴안았다. “꺄악!” 놀란 송혜선은 반사적으로 비명을 질렀고, 누군가 재빨리 그녀의 입을 막았다. “나야! 나야, 혜선아.” 익숙한 목소리에 송혜선은 순간 멈칫했다. 그리고 조심스레 남자의 손을 떼어내며 차갑게 말했다.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이 사람, 지금 제정신인 거야?’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이어서 급히 주위를 살폈다. 다행히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송혜선은 그제야 숨을 돌리며, 낮은 목소리로 흘기듯 말했다.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미쳤어, 사람들 눈에 띄면 어쩌려고!!” 그 말엔 명백한 불만과 경계심이 섞여 있었다. 조봉규는 잠시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런 식으로 나오면 안 되는데...’ 그 순간의 긴장, 그리고 복잡한 감정이 두 사람 사이에 감돌았다.조봉규의 시선이 송혜선의 얼굴에서 천천히 내려앉았다. 송혜선은 산후라 그런가, 몸매는 훨씬 더 부드럽고 풍성해져 있었다. ‘이러니까, 잊으려고 해도... 더 생각이 나잖아.’ 그는 순간 충동적으로 송혜선의 팔을 붙잡았다. “잠깐만.” 당황한 송혜선이 눈을 부릅떴다. “뭐 하는 거야!! 지금...” 그러나 조봉규는 말없이 송혜선을 옆방으로 이끌었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작게 ‘탁’ 하고 울렸다. 좁은 공간, 차오르는 침묵. 송혜선은 남자를 노려보며 벽에 등을 댔다. “정신 차려!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조봉규는 그녀를 바라보며 낮게 숨을 내쉬었다. “다들 홀에 있잖아. 아무도 몰라.” 남자의 말투엔 간절함과 조급함이 섞여 있었다. 이건 단순한 욕망이 아니었다. 그리움, 억눌림, 그리고 못다 한 말들. 그는 조심스럽게 송혜선의 턱선을 손끝으로 만지며 말했다. “혜선아... 나, 정말 많이 참았어.” ‘이 사람 또 이러네...’ 송혜선의 심장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분
생각에 잠겨 있던 찰나, 정문 쪽에서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부동건이 고개를 돌리자, 최하연이 부상혁의 팔을 자연스럽게 끼고 등장하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 순간, 많은 이들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쏠렸다. 잘생긴 남자와 우아한 여자의 조합. 누가 봐도 완벽한 한 쌍이었다. ‘딱 봐도 좋은 그림이야. 저 둘은 그냥 서 있기만 해도 눈길을 끌어...’ “회장님, 부상혁 대표님은 정말 복도 많으십니다. 최씨 가문의 따님과 이렇게 잘 어울리는 커플이 어디 또 있겠습니까?” 누군가의 말에 부동건의 표정이 확 풀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미묘하던 분위기가 사라지고, 부동건의 얼굴에는 흐뭇한 미소가 피어났다. 부동건은 고개를 끄덕이며 두 사람을 향해 시선을 보냈다. “젊은 사람들이 서로 마음이 맞아 좋아하는 걸, 우리 어른들은 그저 기쁜 마음으로 축하해줘야 하는 일일 뿐이지요.” “게다가 상대가 최씨 가문의 따님이라니, 정말 금상첨화가 아닙니까.” 부동건은 더없이 만족스러웠다. ‘역시 상혁이다. 내 아들이라면 이 정도는 돼야지.’ 상혁은 오늘 이 자리에서 당당히 아버지의 체면을 세워주고 있었다. 한편, 송혜선도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방금 전까지 얼굴에 띄웠던 미소는 점점 사라져 갔고, 그녀의 시선은 어느새 하연에게 향했다. 오늘의 하연은, 나무나 예쁘고... 아니, 그냥 눈이 부실 만큼 찬란했다. 그리고 또렷한 이목구비에 윤기 흐르는 머릿결, 화사하게 피어난 얼굴빛까지. 하연의 행복함이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듯했다. 송혜선의 눈빛이 서서히 차가워졌다. ‘정다영... 그년, 나를 속였어.’ 그동안 하연 쪽에서 뭔가 반응이 있을 줄 알고 기다려 왔다. 하지만 소식은커녕, 정다영조차 자취를 감췄다. ‘다영이 걔가 하연이에게 약 먹이는 계획이 분명 실패한 거야. 그렇지 않고 선 지금 저렇게 멀쩡한 얼굴로 서 있을 수는 없어.’ 이대로 배가 불러오면, 섣불리 손도 쓸 수 없게 된다. ‘
이 질문에 송혜선은 눈을 반짝이며 부동건을 바라봤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젠 나를 당당히 소개해 줄 때가 됐겠지.’ 오늘 이 자리에서, 그녀는 부동건의 정식 아내로서 인정받기를 바라고 있었다. “회장님, 말씀 좀 해보세요?” 조금은 성급한 목소리로 말을 꺼내자, 주변의 시선도 하나둘 송혜선과 부동건을 향했다. 모두 속으로는 뻔히 알고 있었다. 부동건이 과연 예전 애인을 진짜로 정실로 앉혔는지,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 했다. 부동건은 미소를 지었다. 그는 숨기거나 피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담백하게 말했다. “오 회장님, 이 사람은 제 딸의 어머니입니다.” 순간, 송혜선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딸의... 어머니?’ 손에 들고 있던 와인 잔이 살짝 흔들렸다. 금세 넘칠 듯한 와인, 애써 잡고 있는 감정. ‘지금... 이게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그리고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억울함이 툭 하고 솟구쳤다. 심지어 손에 힘이 들어가며 하얗게 질린 손등이 떨렸다. 오병지는 단번에 눈치챘고, 싱긋 웃으며 더는 묻지 않았고, 대신 가볍게 말을 건넸다. “축하드립니다. 부 회장님, 여전히 복이 많으시네요.” 부동건은 공손하게 웃으며 송혜선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 손길엔 무언의 위로가 담겨 있었다. “아닙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나중에 저와 이 사람의 결혼식엔 꼭 오셔서 축배 들어주세요.” 그 말에 송혜선의 눈이 번쩍 뜨였다. ‘결혼식...?’ 순간, 가슴이 쿵 하고 울렸다. 이어서 고개를 들며 수줍게 웃었다. “회장님...” 부동건은 말없이 그녀를 더 가까이 끌어안았다. 더 이상의 말은 없었지만, 그 행동으로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주변의 사람들 시선이 바뀌었다. 예전에는 송혜선을 무시하거나 조롱하던 눈빛이, 지금은 선망과 부러움으로 가득했다. 결국, ‘부동건의 아내’라는 타이틀은 그 자체로 막대한 부와 권력을 상징하는 이름이었다.송혜선은 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