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을 나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아무도 하연을 못 찾고 있을 때, 오직 상혁만은 하연을 꼭 찾아냈다. 하연은 속상한 표정으로 말했다. “당신, 날 너무 잘 아는 거 아니에요?” “널 잘 아는 게 나쁜 일이야?” “나도 내 사생활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오빠한테 그런 말을 다 하네.” 상혁은 장난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하연은 과거를 떠올렸다. 이제 와서 보니, 자신은 진짜 상혁의 앞에서는 정말로 숨길 수 있는 게 없었다. “부 대표님, 자료입니다. 확인 부탁드립니다.” 주슬기가 다가오며 공손하게 말하며 일하는 중에는 철저히 선을 지키고 있었다. 하연은 눈치껏 한발 물러섰다. 그런 하연의 옆으로 손이현이 다가왔다. “여기에 오니까 옛날 추억들이 많이 떠오르죠?” “당연하죠 여기서 자랐으니, 잊을 수가 없죠.” 하연은 담담히 말했다. “예전에 제가 이곳을 하연 씨에게 넘기려 했는데, 하연 씨가 거절했었죠.” “지금도 거절할 거예요. 그땐 그때였고, 지금은 또 지금이니까요.” 하연은 두 손을 난간에 얹으며 말했다. “원 비서가 지적한 건 심각한 문제는 아니에요. 수정하면 해결될 거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말아요.” 두 사람은 차분하게 이야기를 나누며 마치 예전에 소울 칵테일에서 함께 시간을 보냈던 때로 돌아간 듯했다. 이현은 눈썹을 살짝 들며 물었다. “왜요? 제가 걱정돼서 그래요?” “손 선생님, 정말 모든 걸 포기하고, 다시 한명준으로 돌아가려고 한다면, 많은 걸 잃게 될 거예요.” 하연은 진지했다. “그렇게 안 할 테니까 걱정 마요.” 이현 역시 진지하게 답하면서 속으로 덧붙였다. ‘이게 하연 씨에게 가장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길이야.’ “윗선에서는 정태산 어르신께서 뒤를 봐주실 테니까, 당신이 돌아가는 건 간단할 수도 있겠네요.” 하연의 말에 이현은 한낮의 강렬한 햇볕 아래 눈을 가늘게 뜨며 대답 없이 침묵했다. 방풍재킷을 걸친 그의 모습은 여전
레스토랑은 조용하고 아늑한 분위기를 자랑하며,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었다. 이곳에서 아는 사람을 만날 확률은 낮았지만, 운명처럼 하연은 문을 열자마자 익숙한 인물과 마주쳤다. “최하연 씨, 또 만나네요.” 정다영은 하연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말했다. 상혁은 그 시점에서 업무 전화를 받고 아직 레스토랑에 들어오지 않았다. 하연은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가볍게 웃었다. “다영 씨, 식사하러 오셨나요?” “네, 남준 씨도 곧 올 거예요.” 다영의 말투에는 은근한 자랑과 함께 도발적인 뉘앙스가 담겨 있었다. 지난번 하연이 한 말을 의식한 듯, 남준과 다영의 관계가 진지하다는 걸 강조하려는 듯했다. 하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영을 지나쳤다. 레스토랑의 뒤뜰에는 크리스마스가 다가옴을 알리듯 커다란 크리스마스트리가 세워져 있었다. 트리에는 종과 소원 카드가 가득 걸려 있었다. 하연은 트리 쪽으로 걸어가, 발끝으로 살짝 들며 카드를 구경했다. 상혁은 트리 그림자 속에서 여전히 전화를 받고 있었고, 그의 모습은 가을과 겨울의 기운이 묻어났다. 그가 하연을 알아보고 손짓하며 곧 끝난다는 신호를 보냈다. 하연도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녀는 작은 돌멩이가 깔린 길을 걸으며 몰래 다가가 깜짝 놀래키려 했다. 나무가 시야를 가려 완벽한 타이밍이었다. 하연이가 갑자기 뛰쳐나왔을 때, 상혁은 막 전화를 끊었다. “부...” 그녀의 목소리와 동시에 들려온 또 다른 목소리. “형님.” 그곳에 있던 사람은 바로 부남준이었다. 그가 언제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연이 나오는 모습을 똑똑히 보고 있었는데, 그녀는 균형을 잃고 넘어질 뻔했다. 남준은 즉시 손을 내밀며 말했다. “조심해.” 하연은 순간 멍해졌다. “너...” 상혁도 하연을 붙잡으며 물었다. “왜 나 왔어?” 하연은 가까스로 중심을 잡고 대답했다. “배가 고파서요. 당신을 빨리 데리고 가려고 나왔죠.” 남준은 장난기 어린 시선으로 말했다.
‘부상혁...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건가?’남준은 눈앞에서 차분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남자를 깊게 응시하다가 씁쓸하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그 의사 분... 잘 지내고 있습니다. 형, 고마워요.”“별말을. 우리 어머니가 고의는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네 어머니께 상처를 줬으니,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이야기해.”뜨거운 태양빛이 내리쬐고 있었지만, 그 말에는 전혀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이때 정다영이 두 사람이 대화를 하는 모습을 보고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다가왔다.“남준 씨, 부 대표님과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하는 거예요?”남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상혁이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이분은 누구? 남준아, 인사를 시켜줘야지?”다영은 옆의 남준을 조심스레 살피며 섣불리 나서지 못했다.남준은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못한 채 입을 열었다.“정다영 씨예요. 다영 씨의 아버지는 정지철 대표님이라고, DL그룹의 이사 중 한 분이신데, 형도 알고 계실 겁니다.”다영은 바로 그 말을 이어받으며 인사했다.“부 대표님, 안녕하세요.”상혁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안녕하세요. 정다영 씨, 정말 소문대로 단아하고 예의 바르시네요. 남준아, 정다영 씨에게 잘해줘. 두 사람이 잘되서 결혼식에서 술 한잔하는 날을 기대하고 있을게.”상혁과 하연이 떠나자, 남준의 얼굴에서 미소가 완전히 사라졌다.“정다영 씨, 왜 갑자기 끼어들어서 말을 거신 거죠? 설마 일부러 남들이 우리 사이를 오해하게 만들려는 건 아니겠죠?”다영은 순간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당황한 나머지 변명하기 시작했다.“아니에요, 정말 그런 의도가 있었던 건 아니었어요. 저는 그저...”...따뜻한 실내, 하연은 바닥에 깔린 방석 위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송혜선이 애인을 곁에 두면, 두 사람에게 더 유리하지 않을까요?”상혁은 고기를 굽기 위해 셔츠 소매를 천천히 걷어 올리며 대답했다.“예전엔 그랬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이제 모든 패가 다 드러난 상태라, 그 둘이 사람들 눈앞에서
다영은 약간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남준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에는 조심스러움이 서려 있었지만, 그 안에서 다영은 예상치 못한 감정을 발견했다.그것은 다름 아닌... 부러움이었다.‘부러워하고 있는 거야?’“남준 씨, 어머니께서 그러셨어요. 약혼 일정만 확정되면 아버지께서도 남준 씨를 전폭적으로 도울 거라고요.”다영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 속에는, 만약 남준이 상혁과 하연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보며 부러워하고 있는 거라면 자신들도 언제든지 그런 장면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정씨 가문은 그동안 부남준을 그저 지켜보고 있었다. 비록 남준이 부씨 가문의 후계자로 인정받았지만, 그는 언제나 차남이라는 이유로 상혁의 그늘에 가려져 있었기 때문이다.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지고 있었다. 송혜선의 임신으로 남준의 입지가 더욱 확고해질 가능성이 커졌고, 이는 부씨 가문뿐 아니라 DL그룹 내에서도 그의 위상을 높이는 계기가 될 터였다.정씨 가문 역시 이 결혼이 손해 볼 일이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다.남준은 시야에서 상혁과 하연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다영을 흘끗 바라보았다.눈앞의 다영은 여전히 깔끔하고 단아했다. 좋은 가정에서 자라 예의와 교양을 갖춘 그녀는, 결혼 상대로서 이상적인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남준과 어머니 송혜선이 오랫동안 찾아 헤맨 완벽한 상대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막상 결혼이 성사 직전까지 이르렀을 때 남준은 문득 이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고 느껴졌다.“우리 결혼하면, 다영 씨도 이제 정씨 가문의 귀한 아가씨가 아니라 우리 집안에 들어와 나와 함께 모든 책임을 짊어져야 해요. 정말 감당할 수 있겠어요?”남준이 무심하게 물었다.“괜찮아요. 정다영으로 사는 것보다, 부씨 가문의 며느리가 되고 싶어요.”다영은 얼굴을 살짝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남준은 얇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마음 한구석에서 답답하게 짓누르는 감정이 느껴졌지만, 그 원인이 무엇인지 자신도 명확히 알 수 없었다...
허징인의 그 말은 진윤에게 보내는 경고였다. 만약 진윤이 더 심하게 나선다면, 허징인도 이제 모든 것을 털어놓겠다는 결심으로 전면전을 선언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의미였다.하연은 긴장한 표정으로 상혁의 소매를 살짝 잡았다.진윤은 자신이 함정에 빠졌음을 깨달았지만, 애써 평정을 유지하며 말했다.“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네요. 내가 아는 건, 우리 딸은 생전에 당신 같은 친구를 좋아하지 않았다는 사실뿐이에요. 그러니 지금 당장 나가주세요.”허징인은 차분하게 대응하며 소란을 피우지 않았다.“향 한 번 올리고 바로 떠나겠습니다.”진윤은 의심스러운 눈빛을 보냈지만, 어떤 두려움에 사로잡힌 듯 보안팀에게 물러서라고 지시하며 허징인이 향을 올리게 했다.허징인은 향을 올리며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너무 일찍 떠나버렸네요. 정말 안타깝습니다.”그 말을 들은 하연은 무의식적으로 진윤을 쳐다보았다.진윤의 손은 분노로 인해 꽉 쥐어져 있었고, 눈에는 강렬한 증오가 서려 있었다.하연은 조용히 속삭였다.“혹시 사모님이 허징인이 딸을 죽인 범인으로 의심하고 있는 걸까요?”사실 그전까지 하연도 같은 생각이었다.하지만 오늘 장례식에서 허징인이 직접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그녀의 혐의를 상당 부분 씻어내는 듯 보였다.진짜 범인이라면 이렇게 당당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죄책감이 없다면 가능한 일이었다.상혁은 하연의 손을 가볍게 쥐며 안심시키듯 말했다.“인간이라면 누구나 그런 의심을 품는 게 당연해.”허징인은 향을 올리고 나서 더 이상 자리를 오래 지키지 않고 조용히 떠났다.상혁과 하연 역시 음식을 먹지 않고 조용히 낮은 자세로 장례식을 빠져나갔다.그러나 부상혁 대표와 최하연 사장이 함께 있는 모습은 결국 매체의 눈을 피하지 못했다. 뒷모습만 담긴 사진이었지만, 두 사람이 다시 재결합하는 것이 아니냐는 추측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부 대표님.”차 앞에서 누군가 상혁을 불렀다.원신민이 즉각 앞으로 나와 막아섰다.“허징인 씨, 지금 부 대표님께서는 바쁘
“정 사장님은 DL그룹의 핵심 인재입니다. 사모님께서 가족이라는 이유로 저와 정 사장님의 관계를 추측하며 선을 넘으시는 건 지나칩니다. 이제 돌아가십시오.”상혁은 단 한 번도 허징인의 말에 흔들린 적이 없었다. 차 문을 열고 뒷좌석에 앉은 그는 차가운 목소리로 명령했다.“출발해.”차량이 빠르게 움직였고, 하연은 백미러 너머로 점점 멀어지는 허징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그 모습은 이내 아주 작은 점으로 사라졌다.하연은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허징인이 나중에 당신한테 증거를 보내겠죠? 아니면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성의’를 보일까요?”상혁은 미소 없이 담담하게 답했다.“나한테만 보내지 않을 거야. 아주 많은 사람들이 허징인의 ‘성의’를 확인하게 될 가능성이 크지.”...이틀 후, 서여은의 잡지에 실린 한 기사가 모든 이목을 사로잡았다.[자산 10억의 DL그룹 지사장, 불륜 의혹 제기!]기사에는 흐릿한 사진이 첨부되어 있었고, 호텔 복도에서 한 여성을 껴안고 있는 정규인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여성의 얼굴은 모자이크 처리되었지만, 가까운 사람들은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이 기사는 순식간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상혁은 사무실에서 분노를 터뜨리며 소리쳤다.“정 사장을 본사로 불러와. 반드시 해명을 들어야겠어.”...동남아에서 급히 귀국한 정규인은 사무실에서 굳은 얼굴로 서 있었다.“이 사진은 AI로 합성된 겁니다! 절대 제 사진이 아닙니다. 누군가 저를 모함하려고 이런 짓을 한 거예요!”상혁은 천천히 눈을 들어 정규인을 응시했다.“정 사장님, 아직도 그런 연기가 통할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상혁은 서랍에서 사진 한 묶음을 꺼내어 테이블 위에 던졌다.그 사진들은 모자이크 없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다.“이 소문이 퍼지기 전에 제가 미리 알아내 막았습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지금 언론의 반응이 이 정도로 끝났을까요? 정 사장님 우리 아버지께는 뭐라고 설명할 실 건데요?”상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정규인에게 다가가며 차가
허징인은 미소를 지었다. “부부는 원래 한 나무에 깃드는 새와 같다고들 하죠. 하지만 부 대표님도 아실 겁니다.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결혼은 사랑보다는 이익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요.” “게다가, 이런 일이 이번이 처음도 아니니까요.” ...과거에도, 정규인은 다른 여자와의 사진이 언론에 보도된 적이 있었다. 허징인은 그 뉴스를 보고 충격으로 멍해졌다. 남편은 술에 취한 채 집에 돌아왔고, 지친 얼굴로 무릎을 꿇었다. “정말로 술에 취해 작업 당한 거야. 그 여자에게 아무런 감정도 없어. 제발 날 용서해줘, 여보.” 허징인은 한때 분노로 집 안의 모든 것을 부수며 울부짖었다. “처음 만났을 때 약속했잖아. 평생 나만 사랑해준다고!” 정규인은 말끝을 흐리며 대답했다. “너한테 잘해주려고 노력한 건 사실이야. 하지만 남자와 여자의 문제는, 특히 비즈니스 세계에서는 피하기 어렵다는 걸 이해해줘.” 그의 목소리에는 죄책감과 함께 야망이 스며들어 있었다. 결국 정규인은 다시 허징인에게 애원했다. “미안해, 여보. 정말 미안해.” 허징인은 울고불고 난리를 쳤지만, 뒤에는 가족과 양가 부모님들이 있었다. 그녀는 이혼이라는 선택지를 쉽게 꺼낼 수 없었다. 며칠 뒤, 정규인은 어렵게 말을 꺼냈다. “하나만 부탁하자. 내일 기자회견에 나와서 이 일을 해명해줬으면 해. DL그룹 본사에서도 이 사안을 설명해야 해.” 그는 체면이 필요했고, 허징인은 처음으로 남편의 불륜 문제를 공개적으로 처리했다. 그러나 그 일이 시작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 이후로도 정규인의 불륜 사건은 계속 이어졌고, 다만 언론이 아닌 그녀의 핸드폰 알림으로 조용히 찾아왔다. ...허징인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부대표님께 솔직히 말씀드리죠. 저는 정규인과 젊은 시절부터 알고 지냈습니다. 우리 둘 다 가정 형편이 좋지 않았지만, 함께 DL그룹에 들어가 미래를 꿈꾸며 나아갔죠. 결혼 후 저는 가정을 위해 한 발 물러섰고, 남편은 앞에서 능숙
“부 대표님, 부 대표님이 방금 말씀하신 대로라면, 유혹과 남자가 바람을 피는 것과는 상관이 없다고 하셨죠. 그럼 대표님은요? 혹시 그런 적 있으신가요?” 뜻밖의 질문이었다. 허징인은 나이가 더 많았지만, 상혁 앞에서는 무의식적으로 존댓말을 썼다. 상혁은 미동도 없이 대답했다. “제 마음은 이미 ‘주인’이 있습니다.” 즉, 자신은 절대 바람을 피우지 않을 거라는 뜻이었다. “정규인도 저와 결혼할 때 사랑한다고 말했었죠.” ‘하지만 그 후 10여 년의 결혼 생활은 완전히 엉망이었어.’ ...지금 차 문은 열려 있었고, 바깥에서 들리는 똑딱거리는 하이힐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하연이 일을 마치고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상혁은 그녀를 힐끔 바라보았다. 문서를 들고 걸어오는 하연은 여전히 소녀와 여인의 매력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다. 참으로 매혹적인 모습이었다. 그는 문득 말을 꺼냈다. “만약 최악의 상황에서 제가 다른 여자와 결혼하게 됐다고 하면, 그때 제가 누군가와 바람을 피운다면, 그 상대는 반드시 최하연일 거예요.” 허징인은 입을 떼려다 멈췄다. 상혁의 말투는 단호하고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요즘 들어 모든 사람이 알고 있었다. 부상혁과 최하연은 다시 화해했고, 곧 다시 함께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그리고 이제 상혁도 이 사실을 전혀 숨기려 하지 않았다. ...하연이 차에 다가왔을 때, 허징인은 이미 떠난 뒤였다. 하연은 문서를 덮으며 물었다. “무슨 얘기 했어요?” 상혁은 직접적인 대답 대신 그녀를 반쯤 안으며 말했다. “문서를 보면서 걸으면 어떻게 해. 잘 못해서 넘어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우리 회사 쪽에서 급하게 처리 일이 들어와서 어쩔 수 없었어요.” 하연은 그의 무릎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드레스는 살짝 가슴선을 드러냈고, 상혁은 장난스레 물었다. “색깔은?” 하연은 얼굴이 빨개지며 그의 손을 쳐냈다. “안 입었어요!” 상혁은 웃음을 터뜨렸다
상혁은 말없이 부동건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지나간 모든 일들이 마치 한 편의 영화처럼 머릿속으로 한 파래임 한 파래임 스쳐 지나갔다. 한참을 그렇게 서 있다가, 마음을 다잡은 상혁은 겨우 한 마디를 내뱉었다. “네, 알겠습니다.” 부남준 사건은 예정대로 재판이 열렸다. 부씨 가문은 변호사를 통해 대응했지만, 형사 사건인 만큼 얽히고설킨 진실을 밝히는 데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DL 그룹, 최상층 대표실.상혁은 혼자 창밖을 내려다보고 있었고 거대한 도시가 한눈에 들어왔다. ‘결국 이 순간이 오는구나.’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고, 곧 원신민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대표님, 재판 끝났습니다.” 상혁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걸 느끼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판결 나왔어?” “예상대로입니다. 다시는 못 일어날 겁니다.” 원신민의 말은 고요했던 상혁의 마음에 작은 돌을 던진 것처럼 퍼져나갔다. 두 사람의 목숨과 확실한 증거. 이미 알고 있던 결말이었지만, 막상 그 순간이 다가오니 상혁도 묘한 허탈함이 밀려왔다. “부 회장님도 알고 계시나?” “예,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아 기절하셨지만, 다행히 지금은 안정을 되찾으셨고요.” 원신민은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송 여사는 재판하는 그 자리에 있었는데, 판결 듣자마자 바로 떠났어요.”부동건에게 쫓겨난 후, 송혜선은 과거의 화려함을 모두 잃었다. 부동건은 그녀에게 줬던 모든 부동산을 회수했고, 카드 계좌까지 정지시켰다. 이제 송혜선에게는 남은 보석을 팔아 생계를 이어가고 있을 뿐. 상혁은 가늘게 눈을 좁혔다. ‘재판에 온 건 놀랍지 않지만... 반응이 이 정도로 끝났다는 게 아무래도 수상해.’ 경계를 늦추지 않고 바로 상혁은 차갑게 말했다. “송혜선 감시 붙여. 또 무슨 일 일으키기 전에.” 원신민은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대표님.” ...어둡고 습
비틀거리던 부동건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정신 차려... 이 순간만은 피하지 말자.’ 그는 느릿한 걸음으로 상혁 쪽으로 다가갔다. 서서히 가까워지는 거리. 마침내 눈앞에 다다라 멈춰 섰을 때, 두 사람의 시선이 정확히 맞닿았다. 부동건은 말하고 싶은 게 많았지만, 막상 눈을 마주하니, 무슨 말을 먼저 꺼내야 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고, 부동건은 깊은숨을 들이쉬며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상혁아. 그동안, 너랑 너희 어머니한테 내가 너무 못했다.” ‘처음부터 길을 잘못 들었다. 그날, 그 선택이 결국 우리 가족을 무너뜨린 거야.’ 사실, 부동건은 이혼하던 날부터 이미 후회하고 있었다. 그 후로의 모든 시간은, 그저 체면과 자존심을 위한 연기였을 뿐이다. 지금 이 꼴이 된 건... 결국 하늘이 내린 벌이었다. ‘자업자득이야. 이 모든 건 내가 자초한 거니까.’ 상혁은 조용히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그 눈동자엔 적당한 거리감과 냉정함이 깃들어 있었다. “그게 이제 와서 중요하진 않아요. 저도, 어머니도... 이미 오래전에 마음 정리했어요.” 그 말에 부동건은 눈을 감았다. 눈가에 뜨거운 기운이 차오르는 걸 애써 참았다. “그래. 마음 내려놨다니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잠시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던 부동건은 책상 위에 놓여 있던 한 서류봉투를 꺼냈다. 그리고 곧장 상혁에게 건넸다. “이제 나도... 나이가 들었고, 더는 회사를 끌고 나갈 힘이 없다. DL그룹은 내가 처음부터 세운 회사다.”“내 모든 시간과 인생이 들어간 곳이지. 하지만 이제는 놓아야 할 때가 왔다.” 상혁은 망설이듯 손을 내밀지 않았다. 그런 상혁의 손에 부동건은 서류를 억지로 쥐여주며 아들의 손등을 두드렸다. “앞으로는... 네가 이끌어가야 한다.” 그 손길엔 조용한 무게와 책임, 그리고 사죄가 담겨 있었다. “그동안... 많이 힘들었지?” 입꼬리를 살짝 움직이던 부동
상혁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살짝 웃음을 지었다.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검진을 마친 뒤, 하연은 선명한 초음파 사진을 손에 들고 있었다. 사진을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에는 저절로 미소가 번졌다. 그녀는 손끝으로 사진 속 동그란 그림을 가리켰다. “여기 봐봐요. 이게 우리 아기래요.” 목소리엔 설렘과 떨림이 그대로 묻어났다. 상혁도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하연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눈엔 이미 감동이 차올라 있었다. 상혁은 조심스레 하연의 아랫배에 손을 얹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이 순간... 난 정말 너무 행복해.” ‘네가 내 옆에 있고, 우리 아이가 이렇게 자라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야.’ 하연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남자아기일까요, 여자아기일까요?” 그녀의 눈빛에는 이미 사랑스러운 미래가 그려지고 있었다. 상혁은 웃으며 대답했다. “아무래도 상관없어.” 하연은 고개를 살짝 돌려 상혁을 바라봤다. 그 눈동자엔 별빛이 머물러 있는 듯 반짝였다. “그래요... 건강하게만 태어나면... 그걸로 충분해요.”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손을 맞잡았고, 서로의 손바닥에서 전해지는 따뜻함을 느꼈다. 그 순간, 상혁의 주머니 속 핸드폰이 진동했다. 그는 핸드폰을 꺼내 화면을 확인하곤 순간 눈빛이 깊어졌다. 화면엔 낯익은 이름이 선명히 떠 있었다. [부동건.]‘이 타이밍에...?’ ‘설마 무슨 일 생긴 건가?’ 지난 연회 이후, 부동건과는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의 파장이 얼마나 컸는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송혜선과 조봉규. 그 두 사람 때문에 무너진 자존심. 그리고 결국, 부동건은 송혜선을 아이와 함께 본가에서 내쫓았다는 소문까지 들려왔다. 하연이 조용히 말했다. “받아봐요. 무슨 일일 수도 있으니까.” 상혁은 하연의 손등을 가볍게 토닥이고, 그녀를 옆에 있는 의자에 앉힌 후
부동건은 갑작스레 거칠게 기침을 터뜨렸다. “컥”‘피 맛...?’ 목 안에서 치밀어 오르는 피비린내를 억지로 삼켰다. 손등에 핏줄이 선명히 드러나고, 이성의 끈은 이미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부동건의 시선이 천천히 송혜선과 조봉규를 향했다. ‘죽여버리고 싶다.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너희들... 너희들...” 부동건의 입술은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송혜선은 극도의 공포에 휩싸였다. ‘이건 아니야... 이렇게 끝나면 안 돼...’ 그녀는 급히 앞으로 다가가 부동건의 팔을 붙잡았다. “회장님... 우리, 조 선생님이랑 그냥 산후 회복 얘기하던 중이었어요. 진짜예요, 저희는...” 그 말이 끝나기도 전, 부동건의 손이 송혜선의 뺨을 후려쳤다. 짝! 순간 정적. 강하게 내리친 손바닥 소리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일제히 숨을 멈춘 듯 조용해졌다. 송혜선의 얼굴 한쪽이 순식간에 붉게 부어올랐다. 눈가가 덜덜 떨리며, 눈물도 같이 맺혔다. “이 천하의... 배은망덕 같은 것. 내가 너를 어떻게 믿었는데... 감히 날 기만해?” 뒤에 서 있던 하객들 사이에서도 탄식이 흘러나왔다. “저 정도였어?” “저게 진짜였네... 소문이 아니고...” “...”송혜선은 뺨의 통증을 애써 무시한 채, 다시 붙잡았다. “회장님, 제발... 오해예요. 저희 그런 사이 아니에요. 저는... 당신뿐이었어요.” 그러나 부동건은 그 손마저 거칠게 뿌리쳤다. 그리고는 힘껏 송혜선의 복부를 발로 찼다. 퍽! 무너지는 소리와 함께, 송혜선은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 그녀의 입에서 신음이 터졌다. 조봉규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아니야... 지금 나섰다간 나도 끝장이야.’ 한 걸음 다가가려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회... 회장님... 저희... 아무 일도 없었어요... 정말이에요...” 하지만 그 한마디가 기름을 붓는 꼴이 됐다. 부동건은 그대로 조
일 순간 충격의 정점이었다.부동건은 들고 있던 와인잔을 그대로 바닥에 내던졌다. 쨍그랑! 깨지는 소리와 동시에 모든 시선이 그에게 꽂혔다. “저... 저런 미친...!” 그는 화면을 가리키며, 얼굴을 붉힌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숨이 거칠게 턱 끝까지 차올랐다. ‘송혜선... 네가 감히!’ 주변 하객들도 이미 술렁이기 시작했다. “저게 진짜야?” “부 회장님 딸이... 아니라고?” “와... 이건 완전히 생각지도 못한 미친 패륜이야, 상상도 못 했어.” 오늘의 연회는 더없이 화기애애한 분위기였지만, 이제 와선 최악의 스캔들 파티가 되어버렸다. ‘이 연회가... 전부 거짓된 일 때문에 생긴 일이란 말이야?’ ‘우리, 사기당한 거네. 다 같이.’ 그때 스크린이 멈췄고, 연회장 전체의 조명이 다시 환히 켜졌다. 하객들은 본능적으로 두리번거리며 부동건을 찾았다. “회장님, 괜찮으십니까?” 하지만 부동건은 아무런 대답 없이 어금니를 꽉 물고, 몸을 떨며 계단 쪽으로 향했다. 하객들은 그 뒤를 따라붙었다. ‘뭔가 일어나겠군...’ ‘이번엔 진짜 끝장이다.’ ...같은 시각, 2층 방 안. 송혜선은 조봉규의 손등을 다독이며 조용히 말했다. “조금만 참아. 며칠만 지나면 내가 다시 올게.” 조봉규는 싱긋 웃으며, 그녀의 허벅지를 장난스럽게 움켜쥐었다. “응. 기다릴게, 자기.” 하지만 그 말이 끝나기도 전, 문이 거칠게 흔들렸고, 익숙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쾅!! “송혜선! 당장 안 나와?!” 송혜선의 온몸이 순간 얼어붙었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조봉규의 팔을 꽉 잡았다. ‘망했다.’ “어떡해, 부동건이 올라왔어.” 두 사람은 당황하며 방 안을 둘러봤지만, 창문 하나 없는 좁은 방엔 도망칠 곳조차 없었다. ‘안 돼... 이렇게 들키면, 끝장이야. 정말 끝이야.’ 송혜선은 급하게 숨을 고르며 애써 이성을 붙잡으려 했다. ‘진정해. 침착해야 돼.
연회장 안은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가득했다. 부동건은 손에 잔을 들고, 연신 들어오는 축하 인사에 밝은 표정으로 답하고 있었다. “회장님, 따님이 너무 예뻐요. 축하드립니다!” “아이고, 이런 경사는 자주 있어야죠!” ‘그래, 이 정도면 완벽하지. 오늘은 그 누구도 나를 흔들 수 없어.’ 그렇게 술이 한 잔, 두 잔 더해지며 연회장의 분위기도 점점 무르익고 있었다. 그때, 갑작스레 모든 조명이 꺼졌다. 탁! “어, 뭐야?” “불 꺼졌어! 왜 이래?” “아야, 누가 내 발 밟았어!” “...”순식간에 어둠이 덮친 연회장. 사람들의 놀란 목소리와 웅성거림이 퍼졌다. 잔을 들고 있던 부동건은 순간 정지된 듯 멈췄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변을 살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당장 가서 확인해봐!” “네, 회장님!” 직원들이 급히 움직였고, 부동건은 진정시키려는 듯 손을 들고 말했다. “여러분, 당황하지 마시고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전기 쪽 문제인 것 같습니다. 금방 복구됩니다.” 사람들은 잠시 멈춰 서서 어둠 속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고- 그 순간, 연회장 한쪽 벽면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이 조용히 켜졌다. “위이잉...” 어둠 속에서 갑작스레 터진 화면의 빛에 모두가 눈을 찌푸리며 반사적으로 손으로 눈을 가렸다. 그 빛이 익숙해질 무렵, 누군가가 터트린 외마디 감탄에, 시선이 일제히 스크린으로 향했다. “어... 저거 뭐야? 헉, 저게... 말이 돼?” 그리고, 그 스크린 안에 있는 건... 분명 두 남녀의 은밀한 장면이었다. 화면 속, 분명히 누군가를 알아본 듯한 목소리가 터졌다. “저 여자... 그분 아니야?” “옆에 있는 남자는...?” “헐, 이건 진짜 레전드다.” “아, 눈 버렸어. 이게 뭐야, 이게...” “...”사람들의 목소리는 점점 커졌고, 순식간에 연회장은 도저히 되돌릴 수 없는 혼돈의 도가니로 빠져들고 있었다.사람들 사이에 웅성거림이
송혜선이 복도 입구에 막 다다랐을 때였다. 갑작스레 어디선가 튀어나온 그림자가 그녀를 뒤에서 껴안았다. “꺄악!” 놀란 송혜선은 반사적으로 비명을 질렀고, 누군가 재빨리 그녀의 입을 막았다. “나야! 나야, 혜선아.” 익숙한 목소리에 송혜선은 순간 멈칫했다. 그리고 조심스레 남자의 손을 떼어내며 차갑게 말했다.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이 사람, 지금 제정신인 거야?’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이어서 급히 주위를 살폈다. 다행히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송혜선은 그제야 숨을 돌리며, 낮은 목소리로 흘기듯 말했다.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미쳤어, 사람들 눈에 띄면 어쩌려고!!” 그 말엔 명백한 불만과 경계심이 섞여 있었다. 조봉규는 잠시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런 식으로 나오면 안 되는데...’ 그 순간의 긴장, 그리고 복잡한 감정이 두 사람 사이에 감돌았다.조봉규의 시선이 송혜선의 얼굴에서 천천히 내려앉았다. 송혜선은 산후라 그런가, 몸매는 훨씬 더 부드럽고 풍성해져 있었다. ‘이러니까, 잊으려고 해도... 더 생각이 나잖아.’ 그는 순간 충동적으로 송혜선의 팔을 붙잡았다. “잠깐만.” 당황한 송혜선이 눈을 부릅떴다. “뭐 하는 거야!! 지금...” 그러나 조봉규는 말없이 송혜선을 옆방으로 이끌었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작게 ‘탁’ 하고 울렸다. 좁은 공간, 차오르는 침묵. 송혜선은 남자를 노려보며 벽에 등을 댔다. “정신 차려!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조봉규는 그녀를 바라보며 낮게 숨을 내쉬었다. “다들 홀에 있잖아. 아무도 몰라.” 남자의 말투엔 간절함과 조급함이 섞여 있었다. 이건 단순한 욕망이 아니었다. 그리움, 억눌림, 그리고 못다 한 말들. 그는 조심스럽게 송혜선의 턱선을 손끝으로 만지며 말했다. “혜선아... 나, 정말 많이 참았어.” ‘이 사람 또 이러네...’ 송혜선의 심장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분
생각에 잠겨 있던 찰나, 정문 쪽에서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부동건이 고개를 돌리자, 최하연이 부상혁의 팔을 자연스럽게 끼고 등장하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 순간, 많은 이들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쏠렸다. 잘생긴 남자와 우아한 여자의 조합. 누가 봐도 완벽한 한 쌍이었다. ‘딱 봐도 좋은 그림이야. 저 둘은 그냥 서 있기만 해도 눈길을 끌어...’ “회장님, 부상혁 대표님은 정말 복도 많으십니다. 최씨 가문의 따님과 이렇게 잘 어울리는 커플이 어디 또 있겠습니까?” 누군가의 말에 부동건의 표정이 확 풀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미묘하던 분위기가 사라지고, 부동건의 얼굴에는 흐뭇한 미소가 피어났다. 부동건은 고개를 끄덕이며 두 사람을 향해 시선을 보냈다. “젊은 사람들이 서로 마음이 맞아 좋아하는 걸, 우리 어른들은 그저 기쁜 마음으로 축하해줘야 하는 일일 뿐이지요.” “게다가 상대가 최씨 가문의 따님이라니, 정말 금상첨화가 아닙니까.” 부동건은 더없이 만족스러웠다. ‘역시 상혁이다. 내 아들이라면 이 정도는 돼야지.’ 상혁은 오늘 이 자리에서 당당히 아버지의 체면을 세워주고 있었다. 한편, 송혜선도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방금 전까지 얼굴에 띄웠던 미소는 점점 사라져 갔고, 그녀의 시선은 어느새 하연에게 향했다. 오늘의 하연은, 나무나 예쁘고... 아니, 그냥 눈이 부실 만큼 찬란했다. 그리고 또렷한 이목구비에 윤기 흐르는 머릿결, 화사하게 피어난 얼굴빛까지. 하연의 행복함이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듯했다. 송혜선의 눈빛이 서서히 차가워졌다. ‘정다영... 그년, 나를 속였어.’ 그동안 하연 쪽에서 뭔가 반응이 있을 줄 알고 기다려 왔다. 하지만 소식은커녕, 정다영조차 자취를 감췄다. ‘다영이 걔가 하연이에게 약 먹이는 계획이 분명 실패한 거야. 그렇지 않고 선 지금 저렇게 멀쩡한 얼굴로 서 있을 수는 없어.’ 이대로 배가 불러오면, 섣불리 손도 쓸 수 없게 된다. ‘
이 질문에 송혜선은 눈을 반짝이며 부동건을 바라봤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젠 나를 당당히 소개해 줄 때가 됐겠지.’ 오늘 이 자리에서, 그녀는 부동건의 정식 아내로서 인정받기를 바라고 있었다. “회장님, 말씀 좀 해보세요?” 조금은 성급한 목소리로 말을 꺼내자, 주변의 시선도 하나둘 송혜선과 부동건을 향했다. 모두 속으로는 뻔히 알고 있었다. 부동건이 과연 예전 애인을 진짜로 정실로 앉혔는지,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 했다. 부동건은 미소를 지었다. 그는 숨기거나 피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담백하게 말했다. “오 회장님, 이 사람은 제 딸의 어머니입니다.” 순간, 송혜선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딸의... 어머니?’ 손에 들고 있던 와인 잔이 살짝 흔들렸다. 금세 넘칠 듯한 와인, 애써 잡고 있는 감정. ‘지금... 이게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그리고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억울함이 툭 하고 솟구쳤다. 심지어 손에 힘이 들어가며 하얗게 질린 손등이 떨렸다. 오병지는 단번에 눈치챘고, 싱긋 웃으며 더는 묻지 않았고, 대신 가볍게 말을 건넸다. “축하드립니다. 부 회장님, 여전히 복이 많으시네요.” 부동건은 공손하게 웃으며 송혜선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 손길엔 무언의 위로가 담겨 있었다. “아닙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나중에 저와 이 사람의 결혼식엔 꼭 오셔서 축배 들어주세요.” 그 말에 송혜선의 눈이 번쩍 뜨였다. ‘결혼식...?’ 순간, 가슴이 쿵 하고 울렸다. 이어서 고개를 들며 수줍게 웃었다. “회장님...” 부동건은 말없이 그녀를 더 가까이 끌어안았다. 더 이상의 말은 없었지만, 그 행동으로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주변의 사람들 시선이 바뀌었다. 예전에는 송혜선을 무시하거나 조롱하던 눈빛이, 지금은 선망과 부러움으로 가득했다. 결국, ‘부동건의 아내’라는 타이틀은 그 자체로 막대한 부와 권력을 상징하는 이름이었다.송혜선은 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