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제4화

Author: 운축
권예준은 딸을 의자에 앉혀 기다리게 한 뒤, 사람들이 없는 조용한 곳을 향해 걸어갔다.

워낙 키도 크고 다리도 길어서 한 걸음이 정채윤의 두 걸음과 맞먹어서 걷는 속도가 굉장히 빨랐다.

정채윤은 권예준이 다른 사람들이 그들의 얘기를 듣고 몰래 안하린의 험담을 할까 봐 걱정돼서 조심하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정말 신중하네.’

정채윤은 시선을 내린 채 빠른 걸음으로 권예준을 뒤따라갔다.

인적이 드문 곳에 도착하자 권예준이 걸음을 멈추고 바지 주머니에서 카드 한 장을 꺼내 정채윤에게 내밀며 무심하게 말했다.

“일단 이거 써. 부족하면 나한테 얘기해.”

정채윤은 잠시 멈칫했다. 카드를 바라보는데 눈시울이 조금 뜨거워졌다.

그건 정채윤이 한때 권예준에게 바라던 배려였다.

하지만 당시 권예준은 정채윤을 홀로 내버려둔 채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았다.

이제 정채윤에게는 그런 배려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다.

권예준이 말했다.

“어떤 일들은 다른 사람과 아무 상관 없어.”

그 말을 들은 순간, 정채윤은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권예준을 바라봤다.

그러니까 그 카드는 정채윤의 가족을 도와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정채윤의 입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권예준은 일이 완전히 해결되기 전에 정채윤이 두 사람이 바람을 피웠다는 사실을 퍼뜨려 안하린의 명예를 더럽힐까 봐 두려워하고 있었다.

‘책임감 있네. 하...’

정채윤은 서글프게 웃었다.

가슴 깊은 곳에서 치밀어 오르는 아픔을 애써 억누르며 카드를 밀어내고 이혼 얘기를 꺼내려는데 갑자기 벨 소리가 울렸다.

권예준은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받더니 그동안 정채윤이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다정한 말투로 말했다.

“응, 금방 갈게.”

전화를 끊은 권예준은 정채윤을 무심하게 한 번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정채윤의 오른손 약지에 끼워져 있던 반지가 사라진 것을 발견하고는 잠시 멈칫했다.

권예준은 입꼬리를 살짝 당기더니 정채윤의 옆 창턱에 카드를 올려놓았다. 그러고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정채윤을 한 번 바라본 후 그대로 자리를 떴다.

정채윤은 마법에라도 걸린 사람처럼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그녀는 권예준이 두고 간 카드를 바라보다가 멀어지는 권예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태어나 처음 느껴 보는 굴욕감이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두 주먹을 꽉 움켜쥔 정채윤은 끝내 참지 못하고 힘겹게 입을 열었다.

“권예준, 언제 동제시로 돌아갈 거야?”

동제시로 돌아가야 이혼 관련 절차를 밟을 수 있었다.

권예준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대답했다.

“내일 갈 거야.”

말을 마친 뒤에는 정채윤이 귀찮게 할까 봐 걱정되는 것처럼 설명을 덧붙였다.

“오늘 저녁에는 따로 볼일이 있으니까 너희 부모님한테는 네가 알아서 잘 얘기해.”

‘너희 부모님...’

정채윤은 당황했다. 그때 창밖에서 불어온 차가운 바람이 얼굴을 세차게 때렸고 너무 아파 잠깐 정신이 아득해졌다. 결혼하기 전, 정채윤의 부모님이 둘의 결혼을 허락했을 때 권예준은 너무 기쁜 나머지 눈시울까지 붉히며 꼭 정채윤에게 잘해 주겠다고 약속했었다. 그때는 진심이었던 걸까? 아니면 그것마저도 거짓이었던 걸까?

지금 생각해 보면 진심이 아주 조금은 섞여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리 많지는 않았을 터였다. 결혼 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정채윤에게 싫증 난 걸 보면 말이다.

한참이 지나서야 정채윤은 겨우 정신을 차리고 마지막으로 권예준이 떠난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단호하게 그곳을 떠나 병실로 돌아갔다.

정채윤은 애써 미소를 지으며 부모님에게 설명했다.

“권예준은 회사에 일이 생겼대요. 그래서 먼저 나율이를 데리고 동제시로 돌아갔어요. 저녁에는 못 오니까 그렇게 알고 계세요.”

정채윤은 여전히 진실을 말하지 않았다.

부모님도 이제 연세가 많았기에 정말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아니라면 두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다. 최소한 부모님이 천천히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 주고 싶었다.

서은영은 몹시 아쉬워했다. 권나율을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터라 무척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서은영은 서랍에서 미리 준비해 둔 선물을 꺼냈다.

“그러면 이 선물들은 네가 가져가서 나율이한테 전해줘.”

정채윤의 미소가 잠시 굳었다. 정채윤은 다시 선물을 원래 자리에 넣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나율이는 집에 장난감이 많아요. 이것들은 다 환불하고 그 돈은 엄마가 필요한 데 쓰세요.”

서은영이 무언가 말하려던 순간, 정채윤의 휴대폰이 울렸다. 확인해 보니 권나율에게서 문자가 와 있었다.

[엄마, 외할머니가 무슨 선물을 준비한 거예요? 엄마는 봤어요?]

정채윤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서서히 사라졌다. 정채윤은 휴대폰을 옆에 내려놓고 답장하지 않았다.

...

한편, 권예준은 딸을 데리러 돌아왔다. 권나율이 의자에 앉아 휴대폰을 바라보며 시무룩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본 권예준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물었다.

“왜 그래? 왜 기분이 안 좋아?”

권나율은 풀이 죽은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아빠, 엄마가 제 메시지에 답장을 안 해요. 혹시 화난 걸까요?”

권나율은 아직 어려서인지 잘못을 저지르고 나면 괜히 찔렸다.

권예준은 잠시 멈칫했다. 하지만 정채윤이 화났다는 말은 별로 개의치 않았다.

결혼한 5년 동안 정채윤은 한 번도 화를 낸 적이 없었다.

그런 정채윤이 정말 화를 냈다면 오히려 신기한 일이었다.

권예준은 딸의 자그마한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니야. 조금 있으면 답장할 거야.”

“정말요?”

“그럼. 엄마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데. 걱정하지 마.”

권나율은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 생각해 보니 정말 그랬다. 정채윤은 자신을 무척이나 사랑했으니 절대 자신을 속상하게 하지 않을 것이다.

권나율은 금세 원래의 밝은 표정을 되찾았다.

잠시 후 안하린의 가족과 함께 밥을 먹는다는 사실이 떠오른 권나율은 자리에서 일어나 권예준의 손을 잡고 기대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 우리 얼른 가요.”

“그래.”

두 사람은 함께 그곳을 떠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안하린과 안하린의 엄마 진명화, 외할머니 박금옥도 내려왔다.

권나율은 기쁜 얼굴로 안하린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권예준은 세 사람을 위해 다정하게 차 문까지 열어 주었다.

정채윤은 화기애애한 그들의 모습을 위층에서 모두 지켜보고 있었다. 정채윤은 천천히 커튼 한쪽을 움켜쥐었다.

“채윤아, 뭐 보고 있어? 얼른 밥 먹자.”

서은영이 다가와 정채윤을 불렀다.

정신을 차린 정채윤은 혹시나 엄마가 그 광경을 보고 속상해할까 봐 서둘러 몸을 돌리며 대충 둘러대려 했다.

하지만 엄마의 반쯤 하얗게 센 머리카락을 바라보는 순간, 진명화와 안하린 모녀의 화려하고 기품 있는 모습이 떠올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진명화는 서은영을 짓밟고 올라선 사람이었다. 양심도 없이 서은영의 건축 설계도를 훔쳐 공모전에서 1위를 차지했고, 그 덕분에 태우 그룹의 건축설계사가 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태우 그룹의 대표가 되었다.

심지어 진명화는 자리를 잡은 뒤에도 끊임없이 서은영에게 온갖 누명을 씌웠고, 그 탓에 서은영은 평생 남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려야 했다.

결국 서은영은 서른도 되기 전에 머리가 반이나 하얗게 셌으며, 몇 차례나 극단적인 선택까지 시도했다.

그런데 이제는 진명화의 딸마저 정채윤의 기회를 빼앗았다.

단순히 남자 문제였다면 그러려니 했을 것이다.

정채윤은 이제 권예준이 대체 무슨 생각으로 모든 사실을 알고도 바람을 피우면서 안하린을 사랑하고, 아끼고, 안하린을 위해 정채윤을 괴롭히는 건지 궁금하지 않았다.

하지만 일과 아이 문제만큼은 그냥 넘길 수 없었다.

안하린은 왜 정채윤을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고 정채윤의 기회마저 가로챈 걸까?

그것은 마치 정채윤이 겨우 붙잡은 희망의 끈을 잘라버리는 것과 다름없는 일인데 말이다.

그 순간, 더는 참을 수 없었던 정채윤의 머릿속에 한 가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채윤아, 왜 그래?”

서은영은 딸의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 걱정스럽게 물었다.

정채윤은 부모님이 속상해할까 봐 일부러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엄마, 아빠랑 같이 먼저 식사하고 계세요. 저는 잠깐 나가서 전화 좀 하고 올게요.”

“알겠어. 얼른 와.”

“네.”

정채윤은 병실을 나섰다. 그리고 무언가 결심한 사람처럼 휴대폰을 꺼내 누군가에게 문자를 보냈다.

[할아버지, 저 최근에 남진 그룹에서 산업단지 설계도를 맡아달라는 제안을 받았어요. 그런데 제게 악감정을 품은 사람이 제 기회를 빼앗아 갔어요. 그래서 말인데, 혹시 그 기회를 다시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정채윤의 할아버지와 엄석현은 전우였고 사이가 굉장히 돈독했다. 정채윤의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당시 엄석현은 직접 집까지 찾아와 위로를 건넸고, 정채윤에게 앞으로 도움이 필요하다면 자신을 만나러 동제시로 오라고 했었다.

정채윤은 그 은혜가 얼마나 무거운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정말 절실한 상황이 아니라면 연세도 많은 엄석현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정채윤이 먼저 도움을 청한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정채윤은 이번 기회에 안하린과의 악연을 한 번에 끝내고 싶었다.

잠시 후 엄석현에게서 답장이 왔다.

[이 녀석아, 그렇게 큰일이 생겼는데 왜 이제야 말한 거냐? 많이 억울했지? 걱정하지 마라. 내가 사람을 시켜서 해결해 주마. 다음 주에 바로 남진 그룹으로 사람을 보낼게.]

오늘은 목요일이었고 다음 주면 3일 뒤였다.

정채윤은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을 담아 인사했다.

[할아버지, 정말 감사드려요.]

엄석현이 문자를 보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기면 꼭 나한테 얘기해. 너는 용구 손녀니까 내 손녀나 다름없어.]

[마침 준후가 이틀 뒤에 공무 때문에 부대에서 잠시 돌아올 거야. 너희 둘도 몇 년 동안 못 만났잖니. 이번 기회에 같이 밥이라도 한 끼 먹자.]

정채윤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잔잔하던 마음에 작은 돌멩이 하나가 떨어진 듯, 가느다란 물결이 일었다.

하지만 정채윤은 이내 그 미묘한 감정을 애써 눌러 버렸다.

과거 엄준후가 정채윤을 버리고 말도 없이 입대해서 다른 사람을 만나기 시작한 순간부터, 둘의 관계는 완전히 끝났다.

정채윤의 표정이 차가워졌다. 정채윤은 엄준후를 언급하지 않고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잠시 이야기를 나눈 뒤 정채윤은 휴대폰을 내려놨다.

3일 후면 모든 게 끝날 것이다.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atest chapter

  • 이혼 후 꽃길   제100화

    그때 박여정의 시선이 문 쪽으로 향했다.다이닝룸 입구에 서 있는 정채윤을 발견한 박여정은 그제야 치켜들었던 손을 내렸다. 끓어오르는 화를 가까스로 억누르고 애써 표정을 누그러뜨렸다.“채윤아, 일어났니?”정채윤도 옅게 미소 지었다.“네, 할머니.”권예준은 정채윤을 힐끗 바라보더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커피잔을 들었다.그러다 정채윤이 어제와 똑같은 옷을 입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잠시 시선을 멈췄다. 하지만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정채윤 역시 무심코 권예준에게 눈길을 주었다.어젯밤과는 옷차림이 달라져 있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정장을 입고 있었다.아마 안하린의 집에서 갈아입고 온 모양이었다.하지만 이제 와서 그런 일은 놀랍지도 않았다.오히려 정채윤의 눈길을 끈 건 정장의 색깔이었다.‘남색 정장을 입었네?’권예준은 평소 검은색 계열의 정장만 고집했다. 정채윤도 그의 취향에 맞춰 옷을 골라 주곤 했다.예전에 몇 번 다른 색상의 정장을 사 준 적도 있었지만, 권예준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단 한 번도 입지 않았다.그런데 지금은 남색 정장을 입고 있었다.정채윤은 잠시 그 모습을 바라봤다.‘정장 색깔이 마음에 안 들었던 게 아니었구나. 내가 골라 준 게 싫었던 거였어.’정채윤은 씁쓸한 생각을 떨쳐 내고 시선을 거두려 했다.그런데 권예준은 그 짧은 순간의 눈길을 달리 받아들인 듯했다.그는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정채윤은 아무 말 없이 눈을 돌렸다. 그러고는 권예준과 가장 멀리 떨어진 자리에 가서 앉았다.마침 그때 위층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옷을 갈아입은 권나율이 내려오고 있었다.다이닝룸에 들어선 권나율은 권예준을 발견하자마자 반가운 얼굴로 달려갔다.“아빠, 오셨어요!”아이가 품에 와락 안기자, 권예준의 굳어 있던 표정도 한결 부드러워졌다.“응.”권예준은 딸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권나율은 기분 좋게 웃다가 슬그머니 정채윤 쪽을 살폈다. 그러고는 권예준의

  • 이혼 후 꽃길   제99화

    모든 사실을 알게 된 정채윤은 오히려 차분해졌다.욕실에서 들려오던 물소리가 멎자, 휴대전화에서 시선을 떼고 흐트러진 이불을 가지런히 정리해 베개 위에 올려놓았다.잠시 후 권나율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욕실에서 나왔다.“엄마, 저 다 씻었어요.”권나율은 씻고 나왔다는 말이 무섭게 침대 위에 놓인 휴대전화부터 집어 들었다. 화면을 확인하더니 어린 얼굴에 금세 웃음이 번졌다.정채윤은 누구와 메시지를 주고받는지 굳이 묻지 않았다. 그저 옷장 문을 열며 평소처럼 물었다.“오늘은 뭐 입고 싶어?”그런데 권나율은 대답은커녕 휴대전화를 내려놓더니 정채윤에게 다가왔다. 그러고는 두 손으로 엄마의 등을 떠밀어 방 밖으로 내보냈다.“엄마, 옷은 제가 알아서 고를게요. 엄마는 얼른 내려가서 아침 드세요. 저 신경 안 쓰셔도 돼요!”권나율은 조금 있다가 안하린이 어젯밤 선물해 준 원피스를 입을 생각이었다.안하린이 자신을 위해 특별히 맞췄다는 원피스였다. 어젯밤 선물을 받은 순간부터 얼른 입어 보고 싶어 좀이 쑤실 지경이었다.하지만 정채윤에게만큼은 들키고 싶지 않았다.‘엄마가 알면 또 하린 이모한테 뭐라고 할지도 몰라.’“나율아, 오늘 비 온다고 했으니까 옷은...”정채윤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권나율은 그녀를 문밖으로 밀어냈다.곧이어 방문이 닫혔다.그것도 모자라 안쪽에서 잠금장치를 한 번 더 거는 소리까지 들렸다.정채윤은 굳게 닫힌 방문을 물끄러미 바라봤다.굳이 문을 두 번씩이나 잠그는 이유가 무엇인지는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잠시 그 자리에 서 있던 정채윤은 문득 생각난 것이 있어 문을 두드렸다.“나율아.”“왜요?”“이번 주 금요일이 외할아버지 생신이잖아. 선물은 준비했어?”그 시각 권나율은 옷장을 열어 어젯밤 몰래 숨겨 둔 원피스를 꺼내 든 참이었다.예쁜 원피스를 펼쳐 보며 싱글벙글 웃고 있던 아이는 정채윤의 목소리가 들리자 금세 입술을 삐죽였다.“준비했어요. 엄마, 이제 그만 물어보세요. 저 옷 갈아입고 있단 말이에요.”선물은 이미

  • 이혼 후 꽃길   제98화

    식사 생각이 나자, 정채윤은 잠시 고민하다가 협탁 위에 놓인 휴대전화를 집었다.그리고 엄준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오늘 점심에 시간 있어? 밥 살게.]며칠 전 백화점에서 문방사우를 둘러봤지만 마음에 드는 물건을 찾지 못했다.그래서 오늘은 미술품 경매장에 가서 다시 한번 살펴볼 생각이었다.정채윤은 윤세형에게 미리 하루 휴가를 낸 상태였다.마침 외출하는 김에 엄준후에게 진 빚까지 정리하면 될 것 같았다.메시지를 보낸 정채윤은 답장이 바로 올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휴대전화를 내려놓고 씻으러 가려던 순간, 알림음이 울렸다.엄준후였다.[그래. 어디로 가면 돼?]생각보다 빠른 답장에 정채윤은 잠시 멈칫했다가 점심을 먹을 레스토랑의 주소를 보내 주었다.그걸로 대화가 끝난 줄 알았는데 곧이어 메시지가 하나 더 도착했다.[너 출근해야 하는 거 아니야? 어떻게 시간이 나서 밥을 먹자고 해?]정채윤은 잠시 생각했다.딱히 숨길 일도 아니었다. 정태환의 생일이 다가온다는 건 엄씨 가문에서도 알고 있었다.[미술품 경매장에 가서 아빠 선물 좀 고르려고.]이번에도 답장은 금방 돌아왔다.[알았어.]정채윤은 메시지를 확인한 뒤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씻고 나온 뒤 옷을 갈아입던 정채윤은 탁자 위에 놓인 블록을 발견했다.어젯밤 늦게까지 조립해 완성한 작은 캐슬이었다.정채윤은 블록이 망가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들어 올려 권나율의 방으로 향했다.마침 아침이니 권나율도 깨울 생각이었다.문을 두드린 뒤 안으로 들어가자 권나율은 이불 속에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정채윤이 막 입을 열려는데 권나율이 고개를 내밀며 불만스러운 얼굴로 말했다.“엄마, 저 깼다고 했잖아요. 안 들어오셔도 된다고 했는데 왜 또 들어오셨어요?”정채윤이 걸음을 멈췄다.“엄마는 못 들었어. 이불 뒤집어쓰고 말해서 그런가 봐.”그러면서 완성한 블록을 수납장 위에 올려놓았다.권나율은 입술을 삐죽였다.아침부터 기분이 좋지 않았다. 조금 전 권예준에게 연락이 왔기 때문이었다.어젯밤 갑자

  • 이혼 후 꽃길   제97화

    이제는 권예준이 무슨 짓을 하든 더 이상 상처받을 일은 없을 줄 알았다.하지만 안하린의 말을 듣는 순간, 정채윤은 가슴 한구석이 견디기 힘들 만큼 아려 왔다.‘대체 권예준에게 난 뭐였던 거야? 밖에서 안하린이랑 바람피우는 동안 남들 눈이나 속여 주는 허울뿐인 아내였나?’정채윤은 허탈한 마음에 눈을 질끈 감았다. 치욕스러운 감정이 밀려들자, 저도 모르게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문득 결혼 전, 자신에게 한없이 다정했던 권예준의 모습이 떠올랐다.그가 건넸던 달콤한 말들과 굳게 약속했던 미래까지...돌이켜 보니 그 모든 것이 우스울 따름이었다.정채윤은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내쉬었다. 눈가에 맺힌 눈물을 손등으로 훔친 뒤, 잔뜩 잠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안하린 씨, 그런 말로 절 자극하려던 거라면 성공하셨네요. 그런데 안하린 씨라고 저보다 나을 게 뭐가 있죠?”이내 정채윤의 목소리가 차갑게 가라앉았다.“안하린 씨는 어디까지나 불륜 상대일 뿐이에요. 권예준이 두 사람의 관계를 공개하는 순간, 세상 사람들의 비난을 피할 수 없을 거예요. 권씨 집안에서도 가만있을 것 같아요? 정말 안하린 씨를 받아 줄 거라고 생각하세요?”그러자 안하린이 코웃음을 쳤다.“정채윤 씨, 아직도 모르시겠어요? 진짜 불쌍한 건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이에요. 당장 나율이만 봐도 그렇잖아요. 나율이가 정채윤 씨를 더 좋아할까요, 아니면 저를 더 좋아할까요?”안하린은 조금도 기죽지 않고 여유롭게 말을 이었다.“남들이 뭐라고 떠들든, 권씨 집안에서 반대하든 예준 오빠가 알아서 해결해 줄 거예요. 그러니까 쓸데없이 제 걱정하지 마시고 본인 앞날이나 걱정하세요.”그녀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더욱 노골적으로 비아냥거렸다.“지금이야 아직 이혼 전이니까 오빠가 생활비라도 주는 거죠. 이혼하고 나면 정채윤 씨한테 돌아갈 돈은 한 푼도 없을 거예요. 남진 그룹도 마찬가지고요. 이번 평가만 끝나면 짐 싸서 나가야 할 테니까 미리 마음의 준비나 해 두세요.”그 말을 끝으로 안하린은 일

  • 이혼 후 꽃길   제96화

    권나율은 수납장에서 삼 분의 일쯤 조립된 블록과 남은 부품, 조립 설명서를 꺼냈다.“엄마, 이거예요. 꼭 끝까지 다 만들어 주셔야 해요.”정채윤이 블록을 받아 들고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권나율은 등을 떠밀어 방 밖으로 내보냈다.“엄마, 안녕히 주무세요!”정채윤은 무언가 말하려다 그만두고 방을 나왔다.그때, 곧바로 등 뒤에서 방문이 닫혔다.정채윤은 굳게 닫힌 문을 잠시 바라봤다.아무래도 권나율은 조금 전에 했던 말을 벌써 잊은 모양이었다.약도 발라 주고 며칠 동안 곁에 있어 주겠다더니, 두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정채윤을 방 밖으로 내보냈다.하지만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애초에 오래갈 말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정채윤은 시선을 거두고 블록을 든 채 안방으로 향했다.그러다 난간 옆을 지나며 무심코 아래층을 내려다봤다.조금 전까지 소파에 앉아 있던 권예준이 보이지 않았다.정채윤의 걸음이 멈췄다.‘설마 벌써 나간 건가?’오늘은 반드시 이혼 이야기를 끝낼 생각이었다. 이대로 권예준이 집을 나가 버리면 또 다음으로 미뤄질 수밖에 없었다.마침 권나율을 씻겨 주러 위층으로 올라오는 장미정이 보이자, 정채윤은 대뜸 물었다.“아주머니, 대표님 어디 가셨어요?”장미정은 순간 누구를 말하는지 몰라 멈칫했다.정채윤이 평소 권예준을 ‘나율이 아빠’라고 불렀기 때문이었다.잠시 뒤에야 권예준을 묻는다는 걸 알아차리고 대답했다.“아, 권 대표님이요? 전화 받으러 가셨어요.”“그래요?”아직 집을 나간 건 아니란 소리였다.“알겠어요. 나율이 좀 씻겨 주세요.”정채윤은 더 묻지 않았다.“네, 사모님.”정채윤은 블록을 들고 그대로 안방으로 향했다.장미정이 자리를 떠나자, 정채윤도 안방으로 돌아왔다.권예준이 올라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권나율이 맡긴 블록을 조립하기 시작했다.그렇게 한 시간이 흘렀다. 블록은 어느덧 3분의 2가량 완성됐지만, 권예준은 여전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정채윤은 시계를 확인하고 의아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결국 손에 들고

  • 이혼 후 꽃길   제95화

    ‘안 그러면 엄마도 같이 가겠다고 할지 모르니까.’“그래.”권예준은 짧게 대답했다.정채윤은 두 사람을 힐끗 바라봤다.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정확히 들리지는 않았지만, 십중팔구 안하린과 관련된 이야기일 터였다.딱히 신경 쓰이지는 않았다.정채윤은 책장에서 전공 서적 한 권을 꺼내 소파에 앉았다.잠자리에 들 시간이 되면 권예준과 단둘이 이야기를 나눌 생각이었다. 미뤄 두었던 이혼 문제를 꺼내기 위해서였다.잠시 후 화장실에 다녀온 박여정은 세 식구가 어느새 다시 서로에게 무관심한 모습으로 돌아가 있는 것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너희도 참...”하지만 시간도 늦었고, 이제는 슬슬 잠자리에 들 때였다. 박여정도 더는 잔소리하고 싶지 않았는지 손을 내저었다.“됐다. 다들 올라가서 씻고 쉬어.”정채윤은 읽던 책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할머니도 일찍 주무세요.”“그래.”권나율도 얌전히 인사를 건넸다.“증조할머니, 안녕히 주무세요.”그러고는 기다렸다는 듯 가방을 품에 꼭 끌어안고 소파에서 내려왔다. 얼른 방으로 올라가 안하린이 준 선물을 풀어 보고 싶었다.‘하린 이모랑 영상 통화는 오늘 안 해도 되겠지. 시간도 늦었고, 이모는 매일 바쁘니까 푹 쉬어야 해.’계단을 오르려던 권나율은 문득 무언가 떠올랐는지 정채윤을 돌아봤다.“엄마, 팔 다치셨으니까, 오늘은 아주머니한테 씻겨 달라고 할게요. 엄마는 푹 쉬세요.”걱정하는 듯 말했지만, 속으로는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엄마가 다쳐서 나 씻겨 줄 수 없으니까 내 방에도 안 들어오겠지? 그러면 하린 이모가 준 선물도 안 들킬 거야!’정채윤은 아이가 품에서 내려놓을 줄 모르는 가방을 힐끗 바라봤다. 무언가 숨기고 있다는 건 뻔히 보였지만, 굳이 캐묻거나 아는 척하지 않았다.“그래. 씻고 일찍 자.”“네! 엄마도요!”권나율은 신이 나서 대답했다.그러다 몇 걸음 떼기도 전에 다시 입을 열었다.“아, 맞다. 엄마!”“왜?”“지난번에 만들던 블록 있잖아요. 그거 조립하는 게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