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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Author: 운축
지금은 이토록 매정하게 이혼을 요구하는 남자가, 과거 자신에게 프러포즈해 성공했을 때 너무 기쁜 나머지 눈물까지 훔쳤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정채윤은 한참이 지나서야 굳어 버린 손가락을 움직여 짧게 답장을 보냈다.

[알겠어.]

이미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던 탓인지, 생각보다 크게 슬프지는 않았다. 정채윤은 잠시 감정을 추스른 뒤 병실로 향했다.

문을 열자 정태환이 서은영의 부축을 받아 침대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정채윤은 허리가 굽고 반쯤 하얗게 센 엄마의 머리카락과 눈에 띄게 야윈 초췌한 아빠의 모습을 본 순간, 가슴이 먹먹해지며 눈시울이 붉어졌다.

“아빠, 엄마...”

목이 메어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서은영과 정태환은 인기척을 듣고 동시에 반가운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채윤아, 도착하기 전에 미리 연락하지. 그러면 내가 아래까지 마중 나갔을 텐데.”

서은영은 반가운 마음에 빠르게 다가가 정채윤의 손을 잡고 뒤를 살펴보며 물었다.

“나율이랑 예준이는?”

정태환 역시 손녀가 보고 싶었던 건지 똑같은 질문을 했다.

“그러게. 나율이랑 예준이는?”

정채윤은 시선을 내렸다. 권나율과 권예준이 안하린을 얼마나 아끼는지 부모님이 알게 되면 화를 내실 것 같아 사실대로 말하지 않고 둘러댔다.

“권예준은 갑자기 일이 좀 생겼대요. 조금 있다가 나율이 데리고 올 거예요.”

“그렇구나. 그럼 언제 온대? 여기 올 때쯤이면 배가 고프겠지? 내가 먹을 것 좀 사 올게. 나율이가 여기 호떡을 엄청 좋아하잖아.”

정채윤은 더 이상 억지로 웃지 못하고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율이랑 권예준은 신경 쓰지 마세요. 엄마, 아빠, 왜 이렇게 살이 많이 빠진 거예요? 평소에 밥 제대로 안 챙겨 드시는 거죠?”

“그럴 리가.”

서은영은 웃으며 얼버무렸다. 그러고는 애틋한 눈빛으로 딸의 뺨을 쓰다듬다가 자기도 모르게 눈시울을 붉혔다.

정채윤은 서은영에게 살이 빠졌다고 했지만, 사실 서은영 역시 딸이 전보다 훨씬 초췌해졌다는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권예준에게 냉대를 받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결국 결혼 생활이 처음의 뜨거웠던 사랑을 조금씩 닳게 만든 모양이었다.

서은영은 문득 그때 자신이 딸의 결혼을 허락하지 않고 그 남자를 기다리게 했다면 결과가 달라졌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휴.’

가족끼리 한참 이야기를 나눈 뒤, 정채윤은 핑계를 대고 병실을 나와 정태환의 상태를 알아보기 위해 의사를 찾아갔다.

사무실 안.

의사는 정채윤에게 검사 결과를 보여 주며 무거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버님 상태가 꽤 심각합니다. 이미 급성 악화 단계에 접어들었어요. 백혈병에서는 가장 위험한 단계입니다. 지금은 표적치료제와 항암치료로 생명을 유지하거나, 적합한 기증자를 찾아 조혈모세포 이식을 받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회복 가능성이 그리 높지는 않습니다.”

정채윤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다른 방법은 없는 건가요? 지난달까지만 해도 이렇게 심각하지는 않았는데...”

“안타깝지만 백혈병 환자가 갑자기 위중한 상태로 악화하는 경우는 흔합니다. 다른 방법이라면, 동제시에 있는 좀 더 권위 있는 병원을 찾아가 진료를 받아 보시는 걸 권합니다.”

“다만 그만큼 치료비도 더 많이 들 겁니다. 잘 고민해 보세요...”

의사는 정채윤의 옷차림을 살폈다. 딱히 형편이 넉넉해 보이지 않았다.

정채윤은 의사가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알아차리고 감사 인사를 전한 뒤 사무실을 나왔다. 두 다리에 힘이 풀려 제대로 걷기도 힘들었다.

의사의 걱정은 괜한 것이 아니었다. 실제로 정채윤의 형편은 빠듯했다.

비록 권예준의 아내이긴 했지만, 권예준은 자신이 번 돈을 정채윤에게 전부 맡긴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권예준은 매달 생활비로 천만 원을 주었고, 천만 원이 넘는 돈을 써야 할 때면 권예준의 비서에게서 수표를 받아야 했다.

정채윤은 인적 드문 구석으로 가 휴대폰을 한참 들여다보다가 권예준의 비서인 임효민에게 전화를 걸었다.

“임 비서님, 제가 지금 4억 원이 필요해요. 수표 좀 부탁드릴게요.”

임효민은 퇴근 후에 업무 관련 전화를 받게 되자 짜증이 났다.

게다가 임효민도 권예준이 정채윤을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말투가 쌀쌀맞았다.

“4억이요? 매달 생활비 천만 원을 훨씬 넘는 금액이라 제가 독단적으로 처리하기는 어려워요.”

정채윤은 창백한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4억이 정말 그렇게 많은 돈일까?

권예준에게는 아무것도 아닐 텐데 말이다.

조금 전 정채윤은 권예준이 안하린에게 사준 가방의 가격이 4억 원이 넘는 것을 보았다.

정채윤은 임효민의 말이 사실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독단적으로 처리하기 어려워서가 아니라, 정채윤을 대하는 권예준의 태도를 보고 일부러 정채윤을 난처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정채윤은 그대로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시선을 내려 오른손 약지에 끼워져 있는 반지를 바라봤다.

조명 아래에서 핑크 다이아몬드 반지가 눈부신 빛을 내며 반짝이고 있었다. 아주 아름다웠다.

정채윤은 그 반지를 손가락에 낀 순간부터 단 한 번도 빼지 않았다.

권예준이 사준 반지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권예준은 결혼한 뒤에는 선물을 거의 하지 않았다.

그래서 정채윤은 권예준이 더 이상 반지를 끼지 않는 것을 보고도 그 반지만큼은 절대 빼지 않고 힘겹게 버텼다.

대체 뭘 위해 그렇게 버텼던 걸까?

정채윤은 자조하듯 웃으며 반지를 뺐다. 이어 목에 걸고 있던 목걸이와 손목의 팔찌까지 차례로 풀어냈다.

그런 다음 빈티지 명품 샵 주인에게 전화를 걸어 급하게 물건을 처분했다. 결국 4억 원이 넘는 돈을 손에 넣고 나서야 정채윤은 마음 한구석이 조금 든든해졌다.

정채윤은 휴대폰을 챙겨 병실로 돌아가 부모님과 병원을 옮기는 일에 관해 이야기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문을 열고 들어가자 뜻밖에도 권예준과 권나율이 그곳에 있었다.

권예준은 정채윤의 부모님 앞에서 이혼 이야기를 꺼내려는 걸까?

어떻게 이렇게까지 무심하고 매정할 수 있단 말인가?

정채윤은 순간 머릿속이 하얘져 넋이 나간 채로 문 앞에 서 있었다.

“채윤아, 왔어?”

“엄마!”

권나율은 정채윤을 보자 곧장 달려와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불렀다. 안하린의 기분이 많이 좋아진 것 같아 권나율도 덩달아 기뻤다.

정신을 차린 정채윤은 몸을 숙여 딸을 한 번 안아 주었다. 그 순간 은은한 향수 냄새가 코끝을 스쳐 입술을 깨물었다.

권나율은 애교를 부리며 말했다.

“엄마, 저 사과 먹고 싶어요. 사과 좀 깎아 줘요.”

정채윤은 잠시 멈칫하다가 알겠다고 대답했다.

권나율은 신이 나서 정채윤의 손을 잡아 안쪽으로 이끌었고, 권예준의 옆에 섰다.

순간 그 향수 냄새가 더욱 짙게 느껴졌다.

정채윤의 머릿속에 권예준과 안하린이 함께 있는 모습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결국 정채윤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딸의 손을 살며시 뿌리친 뒤 그들과 멀찍이 떨어져 사과를 깎기 시작했다.

권나율은 깊이 생각하지 않고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권예준에게 몸을 기대었다.

권예준은 정채윤을 한 번 바라본 뒤, 다시 서은영과 정태환에게 말했다.

“앞으로 필요한 게 있으면 저한테 말씀하세요.”

말뿐인 약속이었다.

정채윤은 사과를 깎다가 잠시 멈췄다.

자기도 모르게 안하린의 가족을 대하는 권예준의 모습이 떠올랐다. 권예준은 직접 찾아가서 곁을 지켜 주고, 의사까지 알아봐 주고, 또...

하지만 정채윤의 부모님은 기쁜 얼굴로 알겠다고 했다.

혹시라도 권예준의 심기를 건드렸다가 딸이 앞으로 더 힘들게 지내지는 않을지 걱정됐기 때문이다.

“이렇게 신경을 많이 써줘서 고마워.”

권예준은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때 갑자기 휴대폰이 울렸고 권예준은 전화를 받았다.

상대방이 무슨 말을 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권예준은 눈에 띄게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금방 갈게.”

옆에 있던 권나율은 누구에게서 온 전화인지 눈치채고 눈을 반짝였다. 하마터면 ‘하린 이모’라고 외칠 뻔했지만, 지금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들어 간신히 참았다.

정채윤은 그 모습을 전부 지켜보았다. 사실 이미 알고 있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무던하게 사과를 끝까지 깎았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었다. 권예준은 이혼 이야기를 꺼내지 않을 생각인 걸까?

정채윤의 부모님은 눈치껏 적당히 배려해 주었다.

“예준아, 볼일이 있는 거지? 괜찮으니까 어서 가봐.”

“나율이는 여기 있어. 외할머니가 나율이를 위해서 선물을 많이 준비해 뒀으니까 이따가 같이 보자.”

두 사람은 권나율을 곁에 두고 싶어 했다.

권나율은 잠시 망설이며 입술을 깨물었다. 외할머니가 준비한 선물이 무엇인지 궁금하기도 했다.

하지만 여기 남아 있으면 안하린을 만날 수 없었기에 권나율은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저는 아빠 따라갈래요.”

권나율은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가 자신을 무척 예뻐해 주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중에 엄마가 선물을 챙겨서 집에 가져다줄 거라고 생각했다.

딸의 속마음을 단번에 알아차린 정채윤은 매우 실망했다.

정채윤은 사과를 내려놓고, 서은영이 다시 한번 권나율을 붙잡으려고 할 때 덤덤하게 말했다.

“그냥 따라가게 내버려둬요. 저는 여기서 엄마, 아빠랑 같이 있을게요.”

그 말에 서은영도 더 이상 붙잡지 못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권나율은 그 말을 듣자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정채윤이 마음을 바꿀까 봐 걱정됐는지 곧바로 권예준의 손을 잡고 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권예준이 갑자기 우뚝 멈춰 서서 정채윤을 바라보며 말했다.

“잠깐 나와 봐.”

정채윤은 잠시 멈칫했다. 이혼하자는 얘기를 꺼내려는 것임을 짐작하고는 손을 닦은 뒤 권예준을 따라 밖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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