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제3화

Author: 운축
지금은 이토록 매정하게 이혼을 요구하는 남자가, 과거 자신에게 프러포즈해 성공했을 때 너무 기쁜 나머지 눈물까지 훔쳤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정채윤은 한참이 지나서야 굳어 버린 손가락을 움직여 짧게 답장을 보냈다.

[알겠어.]

이미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던 탓인지, 생각보다 크게 슬프지는 않았다. 정채윤은 잠시 감정을 추스른 뒤 병실로 향했다.

문을 열자 정태환이 서은영의 부축을 받아 침대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정채윤은 허리가 굽고 반쯤 하얗게 센 엄마의 머리카락과 눈에 띄게 야윈 초췌한 아빠의 모습을 본 순간, 가슴이 먹먹해지며 눈시울이 붉어졌다.

“아빠, 엄마...”

목이 메어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서은영과 정태환은 인기척을 듣고 동시에 반가운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채윤아, 도착하기 전에 미리 연락하지. 그러면 내가 아래까지 마중 나갔을 텐데.”

서은영은 반가운 마음에 빠르게 다가가 정채윤의 손을 잡고 뒤를 살펴보며 물었다.

“나율이랑 예준이는?”

정태환 역시 손녀가 보고 싶었던 건지 똑같은 질문을 했다.

“그러게. 나율이랑 예준이는?”

정채윤은 시선을 내렸다. 권나율과 권예준이 안하린을 얼마나 아끼는지 부모님이 알게 되면 화를 내실 것 같아 사실대로 말하지 않고 둘러댔다.

“권예준은 갑자기 일이 좀 생겼대요. 조금 있다가 나율이 데리고 올 거예요.”

“그렇구나. 그럼 언제 온대? 여기 올 때쯤이면 배가 고프겠지? 내가 먹을 것 좀 사 올게. 나율이가 여기 호떡을 엄청 좋아하잖아.”

정채윤은 더 이상 억지로 웃지 못하고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율이랑 권예준은 신경 쓰지 마세요. 엄마, 아빠, 왜 이렇게 살이 많이 빠진 거예요? 평소에 밥 제대로 안 챙겨 드시는 거죠?”

“그럴 리가.”

서은영은 웃으며 얼버무렸다. 그러고는 애틋한 눈빛으로 딸의 뺨을 쓰다듬다가 자기도 모르게 눈시울을 붉혔다.

정채윤은 서은영에게 살이 빠졌다고 했지만, 사실 서은영 역시 딸이 전보다 훨씬 초췌해졌다는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권예준에게 냉대를 받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결국 결혼 생활이 처음의 뜨거웠던 사랑을 조금씩 닳게 만든 모양이었다.

서은영은 문득 그때 자신이 딸의 결혼을 허락하지 않고 그 남자를 기다리게 했다면 결과가 달라졌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휴.’

가족끼리 한참 이야기를 나눈 뒤, 정채윤은 핑계를 대고 병실을 나와 정태환의 상태를 알아보기 위해 의사를 찾아갔다.

사무실 안.

의사는 정채윤에게 검사 결과를 보여 주며 무거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버님 상태가 꽤 심각합니다. 이미 급성 악화 단계에 접어들었어요. 백혈병에서는 가장 위험한 단계입니다. 지금은 표적치료제와 항암치료로 생명을 유지하거나, 적합한 기증자를 찾아 조혈모세포 이식을 받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회복 가능성이 그리 높지는 않습니다.”

정채윤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다른 방법은 없는 건가요? 지난달까지만 해도 이렇게 심각하지는 않았는데...”

“안타깝지만 백혈병 환자가 갑자기 위중한 상태로 악화하는 경우는 흔합니다. 다른 방법이라면, 동제시에 있는 좀 더 권위 있는 병원을 찾아가 진료를 받아 보시는 걸 권합니다.”

“다만 그만큼 치료비도 더 많이 들 겁니다. 잘 고민해 보세요...”

의사는 정채윤의 옷차림을 살폈다. 딱히 형편이 넉넉해 보이지 않았다.

정채윤은 의사가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알아차리고 감사 인사를 전한 뒤 사무실을 나왔다. 두 다리에 힘이 풀려 제대로 걷기도 힘들었다.

의사의 걱정은 괜한 것이 아니었다. 실제로 정채윤의 형편은 빠듯했다.

비록 권예준의 아내이긴 했지만, 권예준은 자신이 번 돈을 정채윤에게 전부 맡긴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권예준은 매달 생활비로 천만 원을 주었고, 천만 원이 넘는 돈을 써야 할 때면 권예준의 비서에게서 수표를 받아야 했다.

정채윤은 인적 드문 구석으로 가 휴대폰을 한참 들여다보다가 권예준의 비서인 임효민에게 전화를 걸었다.

“임 비서님, 제가 지금 4억 원이 필요해요. 수표 좀 부탁드릴게요.”

임효민은 퇴근 후에 업무 관련 전화를 받게 되자 짜증이 났다.

게다가 임효민도 권예준이 정채윤을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말투가 쌀쌀맞았다.

“4억이요? 매달 생활비 천만 원을 훨씬 넘는 금액이라 제가 독단적으로 처리하기는 어려워요.”

정채윤은 창백한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4억이 정말 그렇게 많은 돈일까?

권예준에게는 아무것도 아닐 텐데 말이다.

조금 전 정채윤은 권예준이 안하린에게 사준 가방의 가격이 4억 원이 넘는 것을 보았다.

정채윤은 임효민의 말이 사실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독단적으로 처리하기 어려워서가 아니라, 정채윤을 대하는 권예준의 태도를 보고 일부러 정채윤을 난처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정채윤은 그대로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시선을 내려 오른손 약지에 끼워져 있는 반지를 바라봤다.

조명 아래에서 핑크 다이아몬드 반지가 눈부신 빛을 내며 반짝이고 있었다. 아주 아름다웠다.

정채윤은 그 반지를 손가락에 낀 순간부터 단 한 번도 빼지 않았다.

권예준이 사준 반지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권예준은 결혼한 뒤에는 선물을 거의 하지 않았다.

그래서 정채윤은 권예준이 더 이상 반지를 끼지 않는 것을 보고도 그 반지만큼은 절대 빼지 않고 힘겹게 버텼다.

대체 뭘 위해 그렇게 버텼던 걸까?

정채윤은 자조하듯 웃으며 반지를 뺐다. 이어 목에 걸고 있던 목걸이와 손목의 팔찌까지 차례로 풀어냈다.

그런 다음 빈티지 명품 샵 주인에게 전화를 걸어 급하게 물건을 처분했다. 결국 4억 원이 넘는 돈을 손에 넣고 나서야 정채윤은 마음 한구석이 조금 든든해졌다.

정채윤은 휴대폰을 챙겨 병실로 돌아가 부모님과 병원을 옮기는 일에 관해 이야기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문을 열고 들어가자 뜻밖에도 권예준과 권나율이 그곳에 있었다.

권예준은 정채윤의 부모님 앞에서 이혼 이야기를 꺼내려는 걸까?

어떻게 이렇게까지 무심하고 매정할 수 있단 말인가?

정채윤은 순간 머릿속이 하얘져 넋이 나간 채로 문 앞에 서 있었다.

“채윤아, 왔어?”

“엄마!”

권나율은 정채윤을 보자 곧장 달려와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불렀다. 안하린의 기분이 많이 좋아진 것 같아 권나율도 덩달아 기뻤다.

정신을 차린 정채윤은 몸을 숙여 딸을 한 번 안아 주었다. 그 순간 은은한 향수 냄새가 코끝을 스쳐 입술을 깨물었다.

권나율은 애교를 부리며 말했다.

“엄마, 저 사과 먹고 싶어요. 사과 좀 깎아 줘요.”

정채윤은 잠시 멈칫하다가 알겠다고 대답했다.

권나율은 신이 나서 정채윤의 손을 잡아 안쪽으로 이끌었고, 권예준의 옆에 섰다.

순간 그 향수 냄새가 더욱 짙게 느껴졌다.

정채윤의 머릿속에 권예준과 안하린이 함께 있는 모습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결국 정채윤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딸의 손을 살며시 뿌리친 뒤 그들과 멀찍이 떨어져 사과를 깎기 시작했다.

권나율은 깊이 생각하지 않고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권예준에게 몸을 기대었다.

권예준은 정채윤을 한 번 바라본 뒤, 다시 서은영과 정태환에게 말했다.

“앞으로 필요한 게 있으면 저한테 말씀하세요.”

말뿐인 약속이었다.

정채윤은 사과를 깎다가 잠시 멈췄다.

자기도 모르게 안하린의 가족을 대하는 권예준의 모습이 떠올랐다. 권예준은 직접 찾아가서 곁을 지켜 주고, 의사까지 알아봐 주고, 또...

하지만 정채윤의 부모님은 기쁜 얼굴로 알겠다고 했다.

혹시라도 권예준의 심기를 건드렸다가 딸이 앞으로 더 힘들게 지내지는 않을지 걱정됐기 때문이다.

“이렇게 신경을 많이 써줘서 고마워.”

권예준은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때 갑자기 휴대폰이 울렸고 권예준은 전화를 받았다.

상대방이 무슨 말을 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권예준은 눈에 띄게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금방 갈게.”

옆에 있던 권나율은 누구에게서 온 전화인지 눈치채고 눈을 반짝였다. 하마터면 ‘하린 이모’라고 외칠 뻔했지만, 지금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들어 간신히 참았다.

정채윤은 그 모습을 전부 지켜보았다. 사실 이미 알고 있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무던하게 사과를 끝까지 깎았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었다. 권예준은 이혼 이야기를 꺼내지 않을 생각인 걸까?

정채윤의 부모님은 눈치껏 적당히 배려해 주었다.

“예준아, 볼일이 있는 거지? 괜찮으니까 어서 가봐.”

“나율이는 여기 있어. 외할머니가 나율이를 위해서 선물을 많이 준비해 뒀으니까 이따가 같이 보자.”

두 사람은 권나율을 곁에 두고 싶어 했다.

권나율은 잠시 망설이며 입술을 깨물었다. 외할머니가 준비한 선물이 무엇인지 궁금하기도 했다.

하지만 여기 남아 있으면 안하린을 만날 수 없었기에 권나율은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저는 아빠 따라갈래요.”

권나율은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가 자신을 무척 예뻐해 주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중에 엄마가 선물을 챙겨서 집에 가져다줄 거라고 생각했다.

딸의 속마음을 단번에 알아차린 정채윤은 매우 실망했다.

정채윤은 사과를 내려놓고, 서은영이 다시 한번 권나율을 붙잡으려고 할 때 덤덤하게 말했다.

“그냥 따라가게 내버려둬요. 저는 여기서 엄마, 아빠랑 같이 있을게요.”

그 말에 서은영도 더 이상 붙잡지 못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권나율은 그 말을 듣자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정채윤이 마음을 바꿀까 봐 걱정됐는지 곧바로 권예준의 손을 잡고 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권예준이 갑자기 우뚝 멈춰 서서 정채윤을 바라보며 말했다.

“잠깐 나와 봐.”

정채윤은 잠시 멈칫했다. 이혼하자는 얘기를 꺼내려는 것임을 짐작하고는 손을 닦은 뒤 권예준을 따라 밖으로 나갔다.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atest chapter

  • 이혼 후 꽃길   제100화

    그때 박여정의 시선이 문 쪽으로 향했다.다이닝룸 입구에 서 있는 정채윤을 발견한 박여정은 그제야 치켜들었던 손을 내렸다. 끓어오르는 화를 가까스로 억누르고 애써 표정을 누그러뜨렸다.“채윤아, 일어났니?”정채윤도 옅게 미소 지었다.“네, 할머니.”권예준은 정채윤을 힐끗 바라보더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커피잔을 들었다.그러다 정채윤이 어제와 똑같은 옷을 입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잠시 시선을 멈췄다. 하지만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정채윤 역시 무심코 권예준에게 눈길을 주었다.어젯밤과는 옷차림이 달라져 있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정장을 입고 있었다.아마 안하린의 집에서 갈아입고 온 모양이었다.하지만 이제 와서 그런 일은 놀랍지도 않았다.오히려 정채윤의 눈길을 끈 건 정장의 색깔이었다.‘남색 정장을 입었네?’권예준은 평소 검은색 계열의 정장만 고집했다. 정채윤도 그의 취향에 맞춰 옷을 골라 주곤 했다.예전에 몇 번 다른 색상의 정장을 사 준 적도 있었지만, 권예준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단 한 번도 입지 않았다.그런데 지금은 남색 정장을 입고 있었다.정채윤은 잠시 그 모습을 바라봤다.‘정장 색깔이 마음에 안 들었던 게 아니었구나. 내가 골라 준 게 싫었던 거였어.’정채윤은 씁쓸한 생각을 떨쳐 내고 시선을 거두려 했다.그런데 권예준은 그 짧은 순간의 눈길을 달리 받아들인 듯했다.그는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정채윤은 아무 말 없이 눈을 돌렸다. 그러고는 권예준과 가장 멀리 떨어진 자리에 가서 앉았다.마침 그때 위층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옷을 갈아입은 권나율이 내려오고 있었다.다이닝룸에 들어선 권나율은 권예준을 발견하자마자 반가운 얼굴로 달려갔다.“아빠, 오셨어요!”아이가 품에 와락 안기자, 권예준의 굳어 있던 표정도 한결 부드러워졌다.“응.”권예준은 딸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권나율은 기분 좋게 웃다가 슬그머니 정채윤 쪽을 살폈다. 그러고는 권예준의

  • 이혼 후 꽃길   제99화

    모든 사실을 알게 된 정채윤은 오히려 차분해졌다.욕실에서 들려오던 물소리가 멎자, 휴대전화에서 시선을 떼고 흐트러진 이불을 가지런히 정리해 베개 위에 올려놓았다.잠시 후 권나율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욕실에서 나왔다.“엄마, 저 다 씻었어요.”권나율은 씻고 나왔다는 말이 무섭게 침대 위에 놓인 휴대전화부터 집어 들었다. 화면을 확인하더니 어린 얼굴에 금세 웃음이 번졌다.정채윤은 누구와 메시지를 주고받는지 굳이 묻지 않았다. 그저 옷장 문을 열며 평소처럼 물었다.“오늘은 뭐 입고 싶어?”그런데 권나율은 대답은커녕 휴대전화를 내려놓더니 정채윤에게 다가왔다. 그러고는 두 손으로 엄마의 등을 떠밀어 방 밖으로 내보냈다.“엄마, 옷은 제가 알아서 고를게요. 엄마는 얼른 내려가서 아침 드세요. 저 신경 안 쓰셔도 돼요!”권나율은 조금 있다가 안하린이 어젯밤 선물해 준 원피스를 입을 생각이었다.안하린이 자신을 위해 특별히 맞췄다는 원피스였다. 어젯밤 선물을 받은 순간부터 얼른 입어 보고 싶어 좀이 쑤실 지경이었다.하지만 정채윤에게만큼은 들키고 싶지 않았다.‘엄마가 알면 또 하린 이모한테 뭐라고 할지도 몰라.’“나율아, 오늘 비 온다고 했으니까 옷은...”정채윤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권나율은 그녀를 문밖으로 밀어냈다.곧이어 방문이 닫혔다.그것도 모자라 안쪽에서 잠금장치를 한 번 더 거는 소리까지 들렸다.정채윤은 굳게 닫힌 방문을 물끄러미 바라봤다.굳이 문을 두 번씩이나 잠그는 이유가 무엇인지는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잠시 그 자리에 서 있던 정채윤은 문득 생각난 것이 있어 문을 두드렸다.“나율아.”“왜요?”“이번 주 금요일이 외할아버지 생신이잖아. 선물은 준비했어?”그 시각 권나율은 옷장을 열어 어젯밤 몰래 숨겨 둔 원피스를 꺼내 든 참이었다.예쁜 원피스를 펼쳐 보며 싱글벙글 웃고 있던 아이는 정채윤의 목소리가 들리자 금세 입술을 삐죽였다.“준비했어요. 엄마, 이제 그만 물어보세요. 저 옷 갈아입고 있단 말이에요.”선물은 이미

  • 이혼 후 꽃길   제98화

    식사 생각이 나자, 정채윤은 잠시 고민하다가 협탁 위에 놓인 휴대전화를 집었다.그리고 엄준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오늘 점심에 시간 있어? 밥 살게.]며칠 전 백화점에서 문방사우를 둘러봤지만 마음에 드는 물건을 찾지 못했다.그래서 오늘은 미술품 경매장에 가서 다시 한번 살펴볼 생각이었다.정채윤은 윤세형에게 미리 하루 휴가를 낸 상태였다.마침 외출하는 김에 엄준후에게 진 빚까지 정리하면 될 것 같았다.메시지를 보낸 정채윤은 답장이 바로 올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휴대전화를 내려놓고 씻으러 가려던 순간, 알림음이 울렸다.엄준후였다.[그래. 어디로 가면 돼?]생각보다 빠른 답장에 정채윤은 잠시 멈칫했다가 점심을 먹을 레스토랑의 주소를 보내 주었다.그걸로 대화가 끝난 줄 알았는데 곧이어 메시지가 하나 더 도착했다.[너 출근해야 하는 거 아니야? 어떻게 시간이 나서 밥을 먹자고 해?]정채윤은 잠시 생각했다.딱히 숨길 일도 아니었다. 정태환의 생일이 다가온다는 건 엄씨 가문에서도 알고 있었다.[미술품 경매장에 가서 아빠 선물 좀 고르려고.]이번에도 답장은 금방 돌아왔다.[알았어.]정채윤은 메시지를 확인한 뒤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씻고 나온 뒤 옷을 갈아입던 정채윤은 탁자 위에 놓인 블록을 발견했다.어젯밤 늦게까지 조립해 완성한 작은 캐슬이었다.정채윤은 블록이 망가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들어 올려 권나율의 방으로 향했다.마침 아침이니 권나율도 깨울 생각이었다.문을 두드린 뒤 안으로 들어가자 권나율은 이불 속에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정채윤이 막 입을 열려는데 권나율이 고개를 내밀며 불만스러운 얼굴로 말했다.“엄마, 저 깼다고 했잖아요. 안 들어오셔도 된다고 했는데 왜 또 들어오셨어요?”정채윤이 걸음을 멈췄다.“엄마는 못 들었어. 이불 뒤집어쓰고 말해서 그런가 봐.”그러면서 완성한 블록을 수납장 위에 올려놓았다.권나율은 입술을 삐죽였다.아침부터 기분이 좋지 않았다. 조금 전 권예준에게 연락이 왔기 때문이었다.어젯밤 갑자

  • 이혼 후 꽃길   제97화

    이제는 권예준이 무슨 짓을 하든 더 이상 상처받을 일은 없을 줄 알았다.하지만 안하린의 말을 듣는 순간, 정채윤은 가슴 한구석이 견디기 힘들 만큼 아려 왔다.‘대체 권예준에게 난 뭐였던 거야? 밖에서 안하린이랑 바람피우는 동안 남들 눈이나 속여 주는 허울뿐인 아내였나?’정채윤은 허탈한 마음에 눈을 질끈 감았다. 치욕스러운 감정이 밀려들자, 저도 모르게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문득 결혼 전, 자신에게 한없이 다정했던 권예준의 모습이 떠올랐다.그가 건넸던 달콤한 말들과 굳게 약속했던 미래까지...돌이켜 보니 그 모든 것이 우스울 따름이었다.정채윤은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내쉬었다. 눈가에 맺힌 눈물을 손등으로 훔친 뒤, 잔뜩 잠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안하린 씨, 그런 말로 절 자극하려던 거라면 성공하셨네요. 그런데 안하린 씨라고 저보다 나을 게 뭐가 있죠?”이내 정채윤의 목소리가 차갑게 가라앉았다.“안하린 씨는 어디까지나 불륜 상대일 뿐이에요. 권예준이 두 사람의 관계를 공개하는 순간, 세상 사람들의 비난을 피할 수 없을 거예요. 권씨 집안에서도 가만있을 것 같아요? 정말 안하린 씨를 받아 줄 거라고 생각하세요?”그러자 안하린이 코웃음을 쳤다.“정채윤 씨, 아직도 모르시겠어요? 진짜 불쌍한 건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이에요. 당장 나율이만 봐도 그렇잖아요. 나율이가 정채윤 씨를 더 좋아할까요, 아니면 저를 더 좋아할까요?”안하린은 조금도 기죽지 않고 여유롭게 말을 이었다.“남들이 뭐라고 떠들든, 권씨 집안에서 반대하든 예준 오빠가 알아서 해결해 줄 거예요. 그러니까 쓸데없이 제 걱정하지 마시고 본인 앞날이나 걱정하세요.”그녀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더욱 노골적으로 비아냥거렸다.“지금이야 아직 이혼 전이니까 오빠가 생활비라도 주는 거죠. 이혼하고 나면 정채윤 씨한테 돌아갈 돈은 한 푼도 없을 거예요. 남진 그룹도 마찬가지고요. 이번 평가만 끝나면 짐 싸서 나가야 할 테니까 미리 마음의 준비나 해 두세요.”그 말을 끝으로 안하린은 일

  • 이혼 후 꽃길   제96화

    권나율은 수납장에서 삼 분의 일쯤 조립된 블록과 남은 부품, 조립 설명서를 꺼냈다.“엄마, 이거예요. 꼭 끝까지 다 만들어 주셔야 해요.”정채윤이 블록을 받아 들고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권나율은 등을 떠밀어 방 밖으로 내보냈다.“엄마, 안녕히 주무세요!”정채윤은 무언가 말하려다 그만두고 방을 나왔다.그때, 곧바로 등 뒤에서 방문이 닫혔다.정채윤은 굳게 닫힌 문을 잠시 바라봤다.아무래도 권나율은 조금 전에 했던 말을 벌써 잊은 모양이었다.약도 발라 주고 며칠 동안 곁에 있어 주겠다더니, 두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정채윤을 방 밖으로 내보냈다.하지만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애초에 오래갈 말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정채윤은 시선을 거두고 블록을 든 채 안방으로 향했다.그러다 난간 옆을 지나며 무심코 아래층을 내려다봤다.조금 전까지 소파에 앉아 있던 권예준이 보이지 않았다.정채윤의 걸음이 멈췄다.‘설마 벌써 나간 건가?’오늘은 반드시 이혼 이야기를 끝낼 생각이었다. 이대로 권예준이 집을 나가 버리면 또 다음으로 미뤄질 수밖에 없었다.마침 권나율을 씻겨 주러 위층으로 올라오는 장미정이 보이자, 정채윤은 대뜸 물었다.“아주머니, 대표님 어디 가셨어요?”장미정은 순간 누구를 말하는지 몰라 멈칫했다.정채윤이 평소 권예준을 ‘나율이 아빠’라고 불렀기 때문이었다.잠시 뒤에야 권예준을 묻는다는 걸 알아차리고 대답했다.“아, 권 대표님이요? 전화 받으러 가셨어요.”“그래요?”아직 집을 나간 건 아니란 소리였다.“알겠어요. 나율이 좀 씻겨 주세요.”정채윤은 더 묻지 않았다.“네, 사모님.”정채윤은 블록을 들고 그대로 안방으로 향했다.장미정이 자리를 떠나자, 정채윤도 안방으로 돌아왔다.권예준이 올라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권나율이 맡긴 블록을 조립하기 시작했다.그렇게 한 시간이 흘렀다. 블록은 어느덧 3분의 2가량 완성됐지만, 권예준은 여전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정채윤은 시계를 확인하고 의아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결국 손에 들고

  • 이혼 후 꽃길   제95화

    ‘안 그러면 엄마도 같이 가겠다고 할지 모르니까.’“그래.”권예준은 짧게 대답했다.정채윤은 두 사람을 힐끗 바라봤다.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정확히 들리지는 않았지만, 십중팔구 안하린과 관련된 이야기일 터였다.딱히 신경 쓰이지는 않았다.정채윤은 책장에서 전공 서적 한 권을 꺼내 소파에 앉았다.잠자리에 들 시간이 되면 권예준과 단둘이 이야기를 나눌 생각이었다. 미뤄 두었던 이혼 문제를 꺼내기 위해서였다.잠시 후 화장실에 다녀온 박여정은 세 식구가 어느새 다시 서로에게 무관심한 모습으로 돌아가 있는 것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너희도 참...”하지만 시간도 늦었고, 이제는 슬슬 잠자리에 들 때였다. 박여정도 더는 잔소리하고 싶지 않았는지 손을 내저었다.“됐다. 다들 올라가서 씻고 쉬어.”정채윤은 읽던 책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할머니도 일찍 주무세요.”“그래.”권나율도 얌전히 인사를 건넸다.“증조할머니, 안녕히 주무세요.”그러고는 기다렸다는 듯 가방을 품에 꼭 끌어안고 소파에서 내려왔다. 얼른 방으로 올라가 안하린이 준 선물을 풀어 보고 싶었다.‘하린 이모랑 영상 통화는 오늘 안 해도 되겠지. 시간도 늦었고, 이모는 매일 바쁘니까 푹 쉬어야 해.’계단을 오르려던 권나율은 문득 무언가 떠올랐는지 정채윤을 돌아봤다.“엄마, 팔 다치셨으니까, 오늘은 아주머니한테 씻겨 달라고 할게요. 엄마는 푹 쉬세요.”걱정하는 듯 말했지만, 속으로는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엄마가 다쳐서 나 씻겨 줄 수 없으니까 내 방에도 안 들어오겠지? 그러면 하린 이모가 준 선물도 안 들킬 거야!’정채윤은 아이가 품에서 내려놓을 줄 모르는 가방을 힐끗 바라봤다. 무언가 숨기고 있다는 건 뻔히 보였지만, 굳이 캐묻거나 아는 척하지 않았다.“그래. 씻고 일찍 자.”“네! 엄마도요!”권나율은 신이 나서 대답했다.그러다 몇 걸음 떼기도 전에 다시 입을 열었다.“아, 맞다. 엄마!”“왜?”“지난번에 만들던 블록 있잖아요. 그거 조립하는 게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