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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작가: 운축
병실로 돌아온 정채윤은 부모님에게 전원 수속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정태환은 딸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은 마음에 조금 망설였다.

정태환은 지난 몇 년 동안 딸이 시댁에서 그리 행복하게 지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채윤아...”

서은영도 말했다.

“전원까지 할 필요는 없어. 네 아빠는 여기서 치료받아도 괜찮아...”

정채윤이 부모님의 속마음을 모를 리 없었다.

정채윤은 죄책감 어린 표정으로 다가가 말했다.

“이미 의사 선생님까지 다 알아봤어요. 이 일은 그냥 제가 하자는 대로 해요. 제 걱정은 하지 마세요.”

“너도 참...”

입으로는 못마땅한 듯 타박했지만, 딸이 기특하고 고마울 따름이었다.

...

다음 날.

오전 열 시가 조금 넘은 시각.

정채윤은 짐을 챙겨 퇴원 수속을 마친 뒤 부모님과 함께 공항으로 향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공항 밖에서 권예준과 권나율, 그리고 안하린 일행을 마주쳤다.

그들은 리무진에서 내렸다. 권예준은 안하린과 권나율의 곁을 지키며 차량이 다가올 때마다 두 사람을 감싸는 등 세심하게 배려했다.

워낙 보기 좋은 모습이라 주변 사람들은 연신 고개를 돌려 바라보며 감탄했다.

“와, 저 가족 진짜 부티 난다. 너무 부러워.”

“그러게. 저 남자 진짜 다정하다. 분명 좋은 남편일 거야!”

“나도 그렇게 생각해. 딸이랑 아내도 분위기가 남다르다니까. 사랑받는 게 딱 보여.”

“...”

정채윤은 숨이 턱 막혔다. 그들이 전용기 라운지로 향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들도 동제시로 돌아가려는 모양이었다.

정채윤은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안하린을 무척 사랑하는 권예준이 안하린의 외할머니가 병으로 고통받도록 내버려둘 리 없었다.

분명 가장 좋은 의료진과 치료 환경을 마련해 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정채윤은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그토록 오랫동안 사랑했던 남자가 자신과 자신의 가족에게 이토록 매정할 수 있다는 사실이 씁쓸할 뿐이었다.

권예준이 간단히 지시만 내려도 정채윤의 아버지는 훨씬 좋은 환경에서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많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권예준은 여전히 그들을 외면했다.

그런 남자가 사실 결혼하기 전, 정채윤이 아팠을 때는 해외 연수 중에도 제일 먼저 달려와 정채윤을 돌봤었다는 걸 누가 믿을까?

정채윤은 자조하듯 서글픔이 드리워진 표정으로 입꼬리를 올렸다.

‘상관없어. 어차피 곧 모두 끝날 테니까.’

정채윤은 시선을 거둔 뒤 부모님을 데리고 공항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정채윤이 막 안으로 들어갔을 때, 멀지 않은 곳에 있던 권나율이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권나율의 예쁜 두 눈에 의아한 기색이 가득했다.

권예준이 그 점을 알아차리고 물었다.

“왜 그래?”

권나율은 옆에 있는 안하린이 듣고 기분 나빠할까 봐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 엄마를 본 것 같아요.”

권예준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지만 별로 개의치 않았다.

“그래?”

권나율은 잠시 망설이다가 다시 그쪽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정채윤은 보이지 않았다.

자신이 잘못 본 모양이었다.

권나율은 그제야 마음이 놓여서 말했다.

“제가 잘못 봤나 봐요!”

어젯밤 권나율은 안하린과 함께 신나게 놀았고, 맛있는 것도 실컷 먹었다. 그래서 정채윤에게 답장을 받지 못해 울적했던 마음도 금세 잊어버렸다.

오히려 정채윤에게서 연락이 오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하기까지 했다. 만약 연락이 왔다면 분명 지금 뭐 하고 있느냐고 물어본 뒤, 안하린과 함께 있지 말라며 한참 동안 잔소리를 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오늘 아침 눈을 떴을 때 정채윤의 보살핌이 없는 게 조금 낯설었다.

하지만 안하린과 함께 있을 수 있다면 그런 허전함은 충분히 참을 수 있었다.

엄마의 보살핌은 언제든 받을 수 있지만, 안하린과 함께하는 시간은 흔치 않았으니 말이다.

그런 생각이 들자 권나율은 다시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빠, 우리 얼른 가요!”

“그래.”

권예준은 하얗고 큰 손으로 딸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

민항기는 속도가 다소 느린 탓에 오후 네 시가 조금 넘어서야 동제시에 도착했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정채윤은 부모님을 데리고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에 도착해 접수를 하고 진료를 받고 입원 수속까지 마치고 나니 어느새 저녁 여섯 시였다.

검사 결과를 확인한 의사는 정태환의 상태가 꽤 심각하다고 말했다.

“가능하다면 홍유건 선생님에게 한 번 더 진료를 받아 보시면 좋겠어요.”

홍유건은 백혈병 치료 분야에서 상당히 권위 있는 의사였다.

하지만 그만큼 그에게 진료를 받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고, 어느 정도 인맥이나 자원이 있어야 했다.

정채윤은 마음이 무거워졌다.

“알겠습니다.”

정채윤은 홍유건 의사에 대한 이야기를 기억해 둔 뒤 부모님을 병실에 모셔다드렸다. 그리고 지인에게 홍유건의 연락처를 물어볼 생각으로 휴대폰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

복도로 나온 정채윤은 휴대폰을 손에 쥔 채 고개를 숙이고 한참을 고민했다.

엄석현에게 부탁하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지만 그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는 않았다.

게다가 이미 한 번 신세를 졌는데 또다시 부탁하기도 미안했다.

정채윤이 지인에게 전화를 걸려던 순간이었다.

시선을 들자 권예준과 안하린이 병실에서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안하린은 울었던 건지 눈가가 빨갰고 얼굴도 조금 초췌해 보였다.

권예준은 다정하게 어깨를 토닥이더니 안하린을 품에 안고 그녀가 자신의 어깨에 기대게 했다. 그리고 길쭉한 손가락으로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안하린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그러면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위로했다.

“걱정하지 마. 내가 다른 의사한테 연락해서 너희 외할머니 진료하게 할게.”

정채윤은 그 광경을 보고 안색이 창백해졌다. 완전히 넋이 나간 정채윤은 휴대폰 화면을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그때 인기척을 느낀 안하린과 권예준이 뒤를 돌아보았다.

안하린은 정채윤을 발견하자 황급히 권예준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그러나 권예준은 오히려 안하린의 손목을 붙잡으며 잔뜩 굳은 얼굴로 정채윤을 차갑게 노려보았다.

“언제까지 보고 있을 거야?”

말문이 턱 막힌 정채윤은 휴대폰을 쥔 채 힘겹게 입을 열었다.

“난 아무것도...”

권예준의 시선이 정채윤이 들고 있는 휴대폰으로 향했다.

“사진 전부 지워. 다음에 또 이러면...”

권예준은 싸늘한 목소리로 말하다가 거기서 멈췄다.

정채윤은 등줄기가 서늘해져서 무언가 더 말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때 권예준의 비서 임효민이 어디선가 나타나 정채윤의 앞을 가로막으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정채윤 씨, 변명은 그만두세요. 대표님은 이미 충분히 언짢으시거든요. 그러니까 얼른 돌아가세요!”

‘변명?’

정채윤은 창백한 얼굴로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확신하는 듯한 임효민의 표정을 보자 소름이 돋았다.

그렇다.

임효민의 눈에는, 아니 어쩌면 권예준 주변의 모든 사람에게는 정채윤이 어떤 행동을 하든 뻔뻔하게 권예준과 다시 잘해 보려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그리고 방금 권예준 역시 그렇게 생각했을 가능성이 컸다. 아마 정채윤이 그와 안하린의 사진을 찍어 두고 나중에 협박하려는 줄 알았을 것이다.

예전이라면 정말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때는 권예준을 사랑해서 그와의 관계를 개선해 세 식구가 다시 행복하게 함께 살고 싶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이미 이혼 합의서에 사인도 한 마당에 권예준과 다시 잘해 볼 생각을 할 리가 없지 않은가?

“눈치 챙기세요. 그런 비열한 짓은 하지 말고요.”

임효민이 짜증 난다는 듯이 말했다.

“이러실수록 대표님은 정채윤 씨에게 더 질릴 뿐이에요.”

정채윤은 눈시울이 붉어지면서 가느다란 어깨가 잘게 떨렸다. 마지막으로 권예준을 한 번 바라본 뒤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몸을 돌려 자리를 떴다.

무슨 말을 하든 소용이 없다는 걸 정채윤은 알고 있었다.

오늘 밤 권예준이 집으로 돌아가 서재에 놓인 이혼 합의서를 보게 된다면, 그제야 모든 걸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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