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방에서 나온 연미혜는 거실 소파에 앉아 신문을 읽고 있는 경민준을 발견했다.경민준은 그녀를 흘긋 쳐다보더니 다시 신문으로 시선을 돌렸다.연미혜의 발걸음이 우뚝 멈추었다.예전 같았으면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조금이라도 더 같이 있으려고 다가가서 옆에 앉았을 것이다.하지만 지금은 더 이상 할 얘기가 없었다.이내 뒤돌아서 계단을 올라갔고 경민준도 침묵으로 일관했다.연미혜는 의혹을 감추지 못했다.김태훈과 한 편이 되어 임지유에게 굴욕을 안겨준 일 때문에 잘못을 추궁할 거로 생각했지만 정작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2층에 도착하
경다솜은 욕실을 바라보는 경민준을 향해 말했다.“안에 엄마 있어요.”“그래?”경민준이 되물었다.“네가 엄마한테 방에서 샤워하라고 했어?”“아니요. 엄마가 잠옷을 들고 왔던데요?”경민준은 더는 묻지 않고 딸아이와 몇 마디 주고받은 다음 일찍 쉬라고 당부하고 뒤돌아서 자리를 떠났다.욕실에 있던 연미혜는 인기척을 느끼고 경민준이 왔다는 것을 눈치챘지만 둘이 무슨 말을 했는지 제대로 듣지 못했다.아직 감기 기운이 남은 경다솜은 약을 먹자 졸음이 몰려왔다. 시간도 늦었는지라 연미혜는 샤워를 마치고 침대에 같이 누웠다.경다솜이
연미혜는 아무 말 없이 방아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이모가 데려다줬다고 솜이한테 얘기하면 안 돼, 알겠지?”방아연은 고개를 끄덕였다.“물론이죠.”지난번에 연미혜를 끌어안았다는 이유로 경다솜이 노발대발한 적이 있었기에 지레 겁을 먹고 평소 대화도 잘 나누지 않았다.게다가 아직도 화가 덜 풀렸는지 매번 뾰로통해서 그녀를 째려보았다.경민준과 임지유, 경다솜은 행복한 세 식구의 모습이 따로 없었다.연미혜는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문득 셋이야말로 이상적인 가족이라는 생각이 스쳤다.이내 시선을 돌렸다.잠시 후 경민준과 임지유가 떠
연미혜를 본 사람들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누군가 잔뜩 흥분한 모습으로 벌떡 일어나 물었다.“대표님, 이 분이 새로 입사한 직원인가요?”“소문이 빠르네요.”김태훈이 웃으면서 소개를 이어갔다.“이름은 연미혜, 우리 회사의...”하지만 말을 마치기도 전에 신정혁이 불쑥 끼어들었다.“대표님, 제 후배를 내친 이유가 이 여자 때문인가요?”김태훈은 멈칫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맞아요. 왜 그런지는 나중에 설명을...”신정혁은 그의 말은 안중에도 없는 채 연미혜를 바라보며 말했다.“제 후배는 올해 25살에 불과하지만 세계 랭
“괜찮아요. 넥스 그룹에 다시 지원하는 일은 없을 테니까.”신정혁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연미혜도 능력자를 높이 평가했다.이내 김태훈을 바라보자 개의치 말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물론 유능한 사람이라 인재 한 명을 잃었다는 생각에 사뭇 아쉬웠다.하지만 임지유를 처음 만난 날 신정혁이 그녀에게 우정 이상의 감정을 품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었다.어디까지나 사적인 문제라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다.그러나 임지유 때문에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제멋대로 연미혜의 합류에 대해 부정적인 결론을 내리는 지경까지 이르렀으니 선을 넘고도
신정혁은 회사를 떠나자마자 임지유에게 전화를 걸었다.“연미혜가 넥스 그룹에 입사했다고요?”“응.”그는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설마 몰랐어?”임지유를 대신해 회사에 들어간 게 아니란 말인가?“네.”김태훈이 단지 화풀이하려고 그녀를 채용하지 않는 줄 알았다.연미혜가 넥스 그룹에 입사했다는 건 경문 그룹을 떠났다는 뜻과 마찬가지였다.신정혁은 흠칫 놀랐다.“그럼 전에 얘기했던 사적인 이유는 뭔데?”임지유는 굳이 언급하고 싶지 않았다.“개인적인 원한 같은 거죠, 뭐.”“하지만...”“왜요?”결국 혼자만의 착각에
정시원이 물었다.“그럼 커피는...”“치워요. 따뜻한 물 한잔 부탁해요.”“네.”...점심이 되자 김태훈은 손님을 만나러 나갔다.연미혜는 회사 구내식당에서 혼자 밥을 먹었다.같은 부서 동료들이 그녀를 보고 친절하게 인사를 건넸지만 어느 정도 거리를 두었다.연미혜도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점심을 먹고 나서는 다시 업무에 집중했다.그리고 오후 5시쯤 소준형을 찾아가서 말했다.“거의 다 완성했는데 한번 확인해볼래요?”“네?”소준형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연미혜가 보낸 파일을 클릭했다. 처음에는 어리둥절하다가 스크롤
룸에 도착했을 때 임지유와 경다솜이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임지유가 물었다.“재미있는 일이라도 생겼어?”정범규는 웃으면서 말했다.“아니, 생각지도 못한 사람을 만났거든.”식사를 마치고 나서 경민준은 경다솜과 함께 집으로 돌아갔다.차에서 내리자 경다솜은 신이 나서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엄마!”유순자가 인기척을 듣고 주방에서 걸어 나왔다.“사모님은 아직 안 돌아오셨어요.”“네?”경다솜은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요즘 왜 이렇게 바쁘대요?”이내 투덜거리며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유순자는 가만히 서 있는 경민준을 보
연미혜도 같은 생각이었다.그녀는 짧고 단호하게 메시지를 보냈다.[바빠. 그리고 약속 지켜. 다솜이 외할머니댁엔 절대 못 가게 해.]잠시 뒤, 경민준에게서 짧은 답장이 도착했다.[알겠어.]이후로 그는 더 이상 아무 연락도 해 오지 않았다.어린이날 연휴 다음 주말은 마침 주말이었다.그날 오후, 연미혜는 가족들과 함께 관광지에서 래프팅을 준비하고 있었다.그때 차예련에게서 사진 한 장이 도착했는데, 사진 속 인물은 임지유였다.차예련은 지금 쿠바나에 머무르며 패션쇼 준비로 한창이었다.사진을 본 연미혜는 메시지를 보냈다.[
‘넥스 그룹이랑 세인티가 해지한 건 알고 계신가요? 교수님의 제자인 김태훈 대표가 요즘 하는 짓을 보면 재능을 믿고 우쭐대는 것도 모자라, 사사건건 여자한테 휘둘려서 점점 판단력도 흐려지고 있던데요. 혹시 그 사실도 알고 계십니까?’염성민은 막 입을 열려다 말았다.곁눈질로 경민준이 있는 걸 본 순간, 목구멍까지 올라왔던 말이 쑥 들어가 버렸다.사실 이 얘기는 전부 임지유와 관련된 일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 자리에, 임지유의 옆에 경민준이 있었다.염성민의 입장에서 굳이 나서서 이런 말을 할 명분이 없었다.괜히 앞장서서 이런
임지유는 곧바로 해약서에 서명했다.배상금은 계약서에 명시된 기한 내에 전액 납부하겠다고 약속했다.이 소식을 들은 김태훈은 비웃듯 코웃음을 쳤다.“생각보다 행동이 빠릿빠릿해서 좋은걸?”해약 이후의 처리 절차는 변호사가 맡았고, 임지유가 서명한 뒤로는 김태훈과 연미혜 모두 더 이상 그 일에 신경 쓰지 않았다.이삼일 뒤, 유명욱이 휴가를 맞아 오랜만에 두 사람을 불러 모았다. 한동안 얼굴을 못 본 터라, 사제지간에 오붓하게 점심을 함께 하기로 했던 것이었다.연미혜와 김태훈은 회사를 나와 약속 장소인 식당에 도착했는데, 식당 입
임지유는 계약 해지를 결정한 뒤, 곧바로 경민준에게 전화를 걸었다.“경매 날에 김태훈 어머님이랑 얘기하다가, 내가 말을 좀 잘못했어. 그걸 사모님이 딱 집어냈고... 게다가 김태훈 쪽은 아예 세인티랑 엮일 생각이 없어 보여. 만약 소송으로 가서 이긴다고 해도 나중에 또 딴지를 걸어 협력 관계가 틀어지게 만들 가능성이 높아.”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고, 담담히 결론을 내렸다.“그쪽이 처음부터 협력 의지가 없었다면, 괜히 시간 끌기보다 지금 깨고 다른 파트너 찾는 게 낫다고 봐.”경민준은 그녀가 무슨 말을 실수했는지 구체적으로 묻
‘김태훈 어머니가 연미혜를 좋아한다고? 그게 말이 돼? 진짜라면... 어제 김태훈 어머니한테 했던 말들은 대체...’임지유는 갑자기 이미연이 대화 도중 갑자기 통화하러 다녀온 일이 떠올랐다.머릿속에 전화를 받는다며 자리를 비운 장면이 스치자, 묘한 불안감이 다시 가슴을 짓눌렀다.그녀의 낯빛이 안 좋아진 것을 본 경민준이 곁에서 물었다.“왜 그래? 어디 아파?”그 말에 임지유는 정신을 가다듬고 애써 미소를 지었다.“아니야. 나 괜찮아.”그날 저녁, 임지유는 이 사실을 가족들에게 알렸다.이미연이 연미혜를 마음에 들어 하고
다음 날 아침, 경민준은 임지유, 경다솜과 함께 일찍부터 경기장에 도착해 있었다.잠시 후, 하승태와 수연도 도착했다.경다솜이 그들을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승태 삼촌, 안녕하세요!”“수연아, 와줘서 고마워!”수연이 경다솜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이제 곧 경기 시작되잖아. 다솜아, 많이 긴장돼?”경다솜은 고개를 저으며 또렷하게 말했다.“긴장되긴, 당연히 긴장 안 되지!”하승태는 다른 일정이 있어 경기엔 오래 머무를 수 없었다. 그는 수연이를 데려다주러 잠깐 들른 것이었다.경민준이 그의 사정을 알고 먼저 말했다.
김태훈의 부모님이 자리를 뜬 뒤, 경민준이 물었다.“사모님이랑 얘긴 잘했어?”임지유는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응. 그런 것 같아. 고마워.”임지유는 속으론 생각했다.‘방금 사모님 얼굴 보니까 연미혜에 대한 불만이 점점 커지는 것 같던데....’사실 세인티와 넥스 그룹 사이에서 벌어진 일은 이미연도 이미 알고 있었다. 김태훈이 미리 설명을 해뒀기 때문이었다.조금 전 임지유와 이야기를 나눌 때 울린 전화는 사실 존재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대화를 미리 녹음해 두고, 자리를 비켜선 후 멀리서 경민준과 임지유 쪽을 슬쩍
임지유는 며칠은 기다려야 소식이 올 줄 알았다. 그런데 그날 오후, 경민준에게서 먼저 전화가 걸려 왔다.“김 회장님이랑 사모님께서 내일 경매 행사에 참석하신대. 우리도 같이 가보자.”그 말에 임지유는 미소 지으며 답했다.“좋아.”다음 날 저녁, 경매장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경민준은 임지유를 데리고 곧장 김태훈의 부모님이 있는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직접 임지유를 두 사람에게 소개했다.김태훈의 부모는 이미 경민준과 연미혜의 관계를 알고 있었고, 연미혜와 임지유 사이에 있었던 일들도 모두 알고 있었다.하지만 그들은
지현승이 뭔가 생각에 잠긴 듯한 얼굴을 하고 있을 때, 염성민이 다시 물었다.“성민아, 철호 아저씨나 아버지 말고, 네가 아는 사람 중에 유명욱 교수님 연락처 아는 사람 또 없어?”“없는 것 같아.”지현승이 대답했다.그렇게 말한 뒤, 무언가 떠오른 듯 다시 말을 이었다.“근데, 너 전에 임지유 씨가 유명욱 교수님을 만난 적 있다고 하지 않았어? 아마 지유 씨는 교수님이 연락처를 갖고 있을 것 같은데? 교수님한테 직접 연락해서 해결될 일이라면, 임지유 씨가 알아서 연락하지 않았을까?”염성민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