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지유는 클렌징폼을 듬뿍 짜서 얼굴을 씻고, 핸드워시, 바디 클렌저까지 총동원했다.공기 속에는 향긋한 꽃향기가 가득했다.온통 온지유가 좋아하는 냄새였다.이렇게까지 하는 목적은 몸에 묻은 여이현의 담배 냄새, 술 냄새, 그리고 피비린내를 없애기 위해서였다.온지유는 그러다 멈칫하고 말았다.“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이혼해야만 하는 이유를 알고 있잖아.”시간이 다 된 지금, 여이현이 잡지도 않는데 남아있을 이유가 없었다.그렇다고 노승아와 잘되는 모습을 지켜볼 수도 없었다.여이현은 온지유가 석이라고 불리는 나민우의 곁으로 돌아갈 거라는 생각에 피식 웃고 말았다.온지유는 유난히 조용했다.집에 돌아와서부터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여이현은 결국 참지 못하고 그녀의 목덜미를 잡으면서 말했다.“온지유, 나 지금 후회하는 중이야. 너랑 이혼하기 싫어.”“이현 씨!”온지유는 그가 약속했던 일을 후회할지 몰랐다.그러다 왜 이혼 숙려기간이 있는지 그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온지유는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이혼하든 말든 괜찮아요. 어차피 가는 정 오는 정이라고 했는데 오늘 저녁... 웁!”온지유는 여이현과 이 일을 따지고 싶지 않았다.그런데 말을 끝내기도 전에 여이현이 키스를 퍼부었다.여이현은 온지유의 허리를 감싸 쥔 채 서서히 침대 앞으로 끌고 갔다.여이현이 원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그는 온지유를 침대에 눕혀 두 손을 꼭 잡았다.온지유는 그런 그가 두렵기 시작했다.“이현 씨! 정신 차려요! 제발 이러지 마요!”의사 선생님은 엽산과 칼슘을 먹는 처음 3개월 동안은 잠자리를 가지면 안 된다고 했다.‘이러다 아이가 잘못되면 어떡하지?’여이현은 동작을 멈추는 대신 깊숙하게 온지유의 몸속으로 들어갔다. 이 순간 온지유는 꼼짝하지도 못했다.여이현은 우연히 쓰디쓴 그녀의 눈물을 맛보고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온지유를 놔주었다.온지유는 옆에서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여이현은 그러다 어지러운 느낌에 침대에 고꾸라지고 말았다.술을 많이 마셔서
나도현의 명확한 말투에 온지유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두 달 뒤면 배가 선명히 나와 있을 수 있었기 때문에 여이현이 절대 놔주지 않을 수 있었다.그러다 온지유가 이상한 점을 확인하고 입가에 미소를 짓더니 물었다.“이현 씨 친구라고 불러야 하나요?”나도현은 잠깐 당황하더니 웃으면서 말했다.“형수님 눈치도 빠르시네요.”비록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내심 온지유가 대단하다고 느꼈다.단번에 알아차리다니.“제 이혼소송 건을 맡아주시지 않을 거면 이만 가볼게요.”온지유가 떠나고, 나도현은 바로 여이현에게 전화했다.아직 자고 있던 여이현은 전화 소리에 깨어났다가 삭신이 쑤신 느낌을 받았다.나도현은 여이현의 피곤한 듯한 목소리를 듣고 피식 웃었다.“아직도 자고 있어? 형수님이 아침부터 찾아왔어. 내가 누군지 알고 있더라고. 조심하는 것이 좋겠어.”여이현은 바로 정신을 차리더니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그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전화를 끊고 다시 온지유에게 전화했다.온지유는 아직 변호사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찾는 변호사마다 손사래를 쳐서 여이현의 연락을 받는 순간 소름이 끼쳤다.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안 받을 수는 없었다.전화기 너머에서 여이현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온지유. 어디 있어.”“밖에서 물건 사고 있어요. 왜요? 무슨 일 있어요? 오늘은 월차 내고 싶은데.”온지유는 핸드폰을 꽉 쥐고 말했다.집에서 나올 때 여이현은 아직 깨어나지도 않았다.변호사 만나러 간 사실을 들켰어도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어제 시킨 일은 다 했어?”여이현이 차갑게 묻자 온지유는 입술을 깨물었다.“지금 바로 회사로 갈게요.”“그래.”온지유는 고개를 끄덕일 뿐 바로 출근하지 않았다.아직 집에 있는 여이현이 그렇게 일찍 출근할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여이현은 전화를 끊자마자 피팅룸으로 들어갔다.바로 이때, 핸드폰이 또 울렸다.온지유인 줄 알고 차갑게 말했다.“했던 말 또 하게 하지 마. 인내심의 한계에 도달했으니까.”노승아는 멈칫하고 말았다
강하임은 얼굴에 미소를 지으면서 온지유에게 다가갔다.전보다 태도가 많이 좋아진 것 같았다.온지유도 따라서 웃으면서 인사했다.“괜찮습니다. 송서연 씨, 여기 와서 인사하세요.”아무리 강하임의 태도가 좋아졌다고 해도 여이현이 시킨 대로 이번 건은 송서연에게 맡길 수밖에 없었다.강하임은 내심 불쾌했지만 그래도 애써 괜찮은 척했다.“온 비서님께서는 요즘 후임을 양성하시나 봐요?”이채현도 모자라 송서연까지, 그런데 여이현은 끝내 나타나지 않을 줄 몰랐다.강하임은 이 상황에 대해 불만이 많았지만 뭐라고 할 수 없었다.그저 온지유와 시답잖은 대화를 이어갈 뿐이다.“혹시 비즈니스에 영향이 갈까 봐 그러세요? 걱정하지 마세요. 모든 프로젝트는 대표님께서 직접 관리하고 계십니다.”강하임이 입술을 깨물더니 말했다.“그러면 여진 그룹에 가서 얘기하는 건 어떤가요? 이번 프로젝트에 대해서 온 비서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뒤늦게야 온지유가 여이현을 7년이나 모신 비서인 것을 알게 된 것이다.온지유를 통해 직접 여이현을 만나고 싶었는데 또 온지유가 올 줄 몰랐다.온지유가 웃으면서 말했다.“아직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계약서 체결 15일 이후 매일 20% 기준으로 돌려준다는 건 무슨 뜻이죠?”이채현은 그날 금강 그룹 책임자 데리러만 왔지 계약서를 만져보지도 못했다.그런데 오늘은 미리 계약서를 미리 확인하고 찾아왔다.물어본 김에 자세히 이야기해 보려고 했다.강하임이 웃으면서 말했다.“저희 첫 계약서잖아요. 온 비서님께서는 아직 계약서를 잘 확인하지 않으셨나요? 마지막 세 번째 조항에 한 달 내에 모두 갚는다고 되어있어요.”온지유는 시종 미소를 잃지 않고 부드럽게 말했다.“강하임 씨, 이런 계약서는 본 적도 없습니다. 계약 첫날 일정한 계약금을 내고 나머지 계약금을 갚는 날짜를 정하는 것입니다. 이 계약서에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강하임은 표정이 확 변하더니 냉랭하게 말했다.“여 대표님도 문제없다고 하는데 온 비서님이 여기
강하임이 커피잔을 놓친다는 건 온지유가 미처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저는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 오해하지 말아 주세요. 하임 씨가 놓칠 줄 몰랐어요.”온지유가 빠르게 차가워지는 강하임의 눈을 올려다보며 말했다.“내가 놓쳐요? 내가 커피잔 하나도 제대로 못 든단 말이에요? 여 대표님, 계약 좀 잘 마무리해보려고 왔는데 비서가 일을 너무 못하네요.”강하임은 연속 되물으며 온지유에게 핀잔을 주었다.그리고 마지막에는 여이현을 향해 언짢은 티를 내자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던 여이현은 냉소를 흘리고는 말했다.“CCTV 한번 돌려드릴까요?”온지유가 어떤 사람인지 누구보다 잘 아는 여이현이 강하임의 말을 받아쳤다.강하임이 일부러 시비를 거는 걸 알았지만 그래도 아직 퇴사 전이니 자신의 일을 잘 마무리하고 싶어 온지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려 했는데 이 상황에서 여이현이 자신의 편을 들어줄 거라고는 생각 못 했었다.한편 강하임은 한낱 비서를 대신해 나서는 여이현에 표정을 굳혔다.“여 대표님이 직원 챙기는 건 이해하는데 커피가 내 손에 떨어졌잖아요. 우리 쪽 직원이 이런 실수를 했다면 대표님은 기분이 어떠셨을까요?”이때 온지유가 담담히 말했다.“만약 제 실수라면 저는 바로 인정했을 겁니다. 비서로서 실수까지 했는데 그걸 떠넘길 수 있을 만큼 양심이 없는 사람은 아니거든요 제가. 강하임 씨가 계속 제 실수라고 생각하시면 사람 불러서 확인해 보셔도 좋아요.”자신의 잘못이 아닌 건 절대 사과하지 않는 게 바로 온지유였다.하지만 이런 사소한 일로 사람까지 불러서 확인하는 건 너무 자존심이 상했기에 강하임은 화를 누르며 이쯤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그럴 필요까진 없고요. 내가 손까지 뎄는데 화가 안 나겠어요? 그리고 이 일 전에도 트러블이 좀 있었잖아요 우리.”강하임은 여전히 삐딱한 태도로 말했지만 온지유는 더는 그녀를 상대하고 싶지 않아 단호하게 말했다.“강하임 씨 마음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지금은 두 회사가 파트너 계약을 맺는 자
그에 강하임은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여 대표님, 제가 아까 말씀드렸듯이 온 비서와 저 사이에 트러블이 좀 있었어요. 그러니까 아까는 제가 충분히 온 비서의 고의라고 오해할만한 상황 아닌가요?”“그리고 내가 누군지 정말 잊은 거예요?”말을 하면 할수록 점점 막 나가는 강하임에 여이현은 표정이 굳은 정도가 아니라 서늘하기까지 했다.“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는 내가 제일 잘 알아요. 그리고 만약 고의라 해도 나는 상관없어요. 안될 건 없잖아요?”여이현의 말에 강하임은 말문이 막혀버렸다.그리고 마지막 질문만 의도적으로 빼놓고 대답을 한 거 보면 여이현은 정말 저를 기억 못 하는 것 같아 강하임은 그게 더 분하고 부끄러웠다.“강하임 씨, 얼음 가져왔어요.”그때 얼음을 들고 온 온지유가 부드럽게 말했다.온지유의 차분한 표정은 아까의 일을 전부 잊기라도 한 듯 여느 때와 다름없었다.하지만 그 뒤로 보이는 여이현은 서늘한 표정을 유지한 채 강하임에게 무언의 압박을 주고 있었다. 마치 지금 당장 사과를 하지 않으면 이 계약은 체결하지 않겠다는 듯이.게다가 이 계약 건은 강하임이 아빠와 오빠를 한 달 넘게 졸라 따낸 일이었기에 이렇게 망쳐버릴 수도 없었다.그래서 강하임은 할 수 없이 입을 열었다.“온 비서님, 아까는 죄송했어요, 내가 놓친 건데 집에서 이러던 게 습관이 돼서 괜히 온 비서한테 화풀이했네요. 용서해 주세요.”갑자기 태도가 바뀐 강하임에 처음에는 어리둥절해 하던 온지유가 여이현을 바라보았다.역시나 굳은 표정에 누구 하나 잡아먹어 버릴듯한 눈빛, 여이현이 강하임에게 사과를 시킨 게 틀림없었다.그래서 온지유도 억지로 웃으며 그 사과를 받아주었다.“이 얘기는 아까 다 끝났잖아요, 마음 쓰지 않으셔도 돼요.”이런 어색한 분위기가 빨리 끝나길 바랐던 온지유가 한마디 더 덧붙였다.“얼음팩부터 일단 대고 계세요. 그럼 두 분 말씀 천천히 나누세요, 전 먼저 나가 있을게요. 필요하면 부르세요.”온지유가 나가고 여이현이 강하임을 보며 입을 열었
지금 2할이나 양보하는 건 당연히 큰 손해였고 계약을 따낸다 해도 별로 이득이 없었다. 하지만 강하임이 이 계약을 포기할 수 없다는 걸 알기에 여이현도 단도직입적으로 물을 수 있었던 것이다.역시나 여이현의 예상대로 강하임은 웃으며 말했다.“협업이라는 게 원래 장기적으로 봐야 하는 거잖아요, 지금이야 조금 손해를 보겠지만 이런 방법을 써서라도 여진그룹 같은 큰 회사랑 계약한다면 그 정도는 감당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대표님, 2할이 최대에요. 저도 더는 물러날 곳이 없습니다.”“그래요.”그제야 여이현이 강하임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이번 일을 계기로 강하임은 여이현에게 앙심을 품게 되었다.“그럼 계약 건도 마무리되었으니 내일 제가 단풍 별장에서 여는 파티엔 와 주실 거죠?”“네, 가야죠.”금방 계약을 체결하고 파티 참석을 거절하는 것도 예의는 아니었기에 여이현은 마지못해 알겠다고 대답했다.“그럼 전 먼저 일어나보겠습니다.”강하임이 인사를 하며 말하자 여이현은 온지유를 불렀다.“온 비서, 손님 배웅해드려요.”강하임은 그 배웅이 내키진 않았지만 아무 말도 안 하고 있다가 여이현이 보이지 않는 곳에 도착해서야 온지유에게 삐딱한 투로 말했다.“내가 오늘 온 비서한테 사과한 건 여 대표님을 봐서예요.”강하임은 오늘의 치욕을 꼭 갚아주겠다는 투로 말했지만 온지유는 오히려 웃으며 그 말을 받아쳤다.“그 얘기는 아까 이미 끝난 걸로 아는데요. 그리고 강하임 씨가 굳이 강조하지 않으셔도 알고 있었어요. 이제 지나간 일은 그만 언급하죠, 전 앞으로도 여 대표님 옆에 계속 있을 건데 서로 얼굴 붉히면 불편하잖아요.”온지유는 저를 난처하게 만들려는 강하임의 속내를 알고 일부러 더 뾰족하게 쏘아붙였다.이 계약에서 더 절실한 쪽은 강하임이었고 계약의 갑이 바로 제 상사인 여이현이니 더 이상 여이현 앞에서 저를 곤란하게 만들지 말라는 경고였다. 어차피 그래봤자 소용이 없을 테니까. 온지유는 여이현이 늘 자신의 편을 들어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그래
“F 국 가는 거 앞당겨도 돼요?”온지유의 질문에 여이현은 대답하지 않고 표정을 굳혔다. 살짝 찌푸려지는 미간이 그의 어이없음을 대변해주고 있었다.나민우와 그렇게 사이가 좋으면서 F 국 일정을 앞당겨달라 하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대답이 없는 여이현에 온지유는 포기하고 말을 돌렸다.“취소하시고 싶으시면 취소하셔도 돼요, 뭐 다른 거 시키실 일 있으세요?”여이현은 생각을 멈추고 담담히 말했다.“차 한잔 부탁해.”“네.”몇 분 뒤, 온지유는 따뜻한 차를 들고 들어왔다.녹차를 유독 좋아하는 여이현이기에 일부러 손님용 차와 다른 걸로 내왔다.“강하임 씨는 네가 계속 맡아, 내일 나랑 단풍 별장에 같이 가자.”여이현의 말에 이의가 없었던 온지유는 그렇게 방을 나섰다. 그사이 동기들 단톡방에 문자가 하나 와 있었다.[내일 반장 개인 사정 때문에 만월 파티 좀 앞당길게, 저녁 9시로 하자.]그 문자를 본 온지유는 따로 도세원에게 연락하여 100만 원을 보내주었다.[나는 일 때문에 파티 참석 못 할 것 같아, 이건 네가 반장한테 잘 전해줘.][그래.]도세원은 빠르게 돈을 받고 이내 답장을 보내왔다.[몸조심해.]온지유는 그 문자를 별로 신경 쓰지 않았지만 사실 저 문자의 의미는 그녀가 임산부 상태니까 저녁에 진행하는 술자리에 못 오는 건 당연한 일이니 마음 쓰지 말라는 뜻이었다.한 시간 뒤쯤 여이현이 사무실에서 나와 온지유의 책상을 지나쳐갔다.그때는 아무 말도 없다가 다 지나고 나니 여이현이 문자를 보내왔다.“저녁 준비해놔.”“알겠어요.”그 문자에 여이현은 5시 반에 퇴근을 하고 마트에 들러 장을 보고 있었다.그런데 마침 마트에 있는 티비 속에서 여이현이 나오고 있었다. 물론 혼자는 아니었지만.여이현은 검은 정장을 입고 신사답게 노승아를 보호하며 카메라 앞으로 걸어가고 있었다.그리고는 멀찍이 떨어져서 마이크 앞에선 노승아를 지켜보고 있었다.마이크를 잡은 노승아는 화장을 마친 예쁜 얼굴로 미소를 지으며 입을 뗐다.“기자님들
노승아가 진심으로 사죄한다는 듯 고개를 숙이자 여이현이 나서며 카메라에 대고 말했다.“오늘 기자회견은 독 같은 건 애초에 없었고 누가 누구를 시해하려는 행동도 없었음을 밝히기 위해서입니다. 제목 어그로는 자제 부탁드립니다.”표정을 굳힌 채 검은 아우라를 뿜어내며 180㎝가 넘는 큰 키로 기자들을 압도하는 그 포스에 온지유는 어딘가 씁쓸했다.이렇게 노승아 일이라면 발 벗고 나서서 그녀의 편을 들어주는 남자가 저한테만 매정한 것이 서운했다.아마도 여이현을 저렇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은 노승아뿐인 것 같았다.온지유가 그만 돌아서려 할 때 화면에 또 다른 자막이 달렷다.이번에는 카메라가 노승아가 아닌 여이현의 얼굴을 잡으며 물었다.“여 대표님이 오늘 노승아 씨를 대변하는 건 공적인 마음입니까 아니면 사적인 마음입니까?”“둘 다라고 해두죠.”여이현의 말이 흘러나옴에 따라 자막도 바뀌는 것을 본 온지유는 갑자기 무언가가 심장을 짓누르는 것만 같이 답답해졌다.“그럼 노승아 씨와 앞으로에 대해 생각하고 있으시단 말씀인가요?”그 질문에 노승아는 여이현이 입을 열기도 전에 말을 가로챘다.“이건 저희 둘만의 사적인 얘기인 것 같네요, 만약 좋은 소식이 있다면 꼭 여러분께 전해드리겠습니다.”말을 마친 노승아가 여이현의 팔짱을 끼며 다정하게 올려다보는 모습에 온지유는 더 보고 있을 수가 없어 몸을 돌렸다.하필 오늘따라 검은색과 흰색으로 맞춰 입어 더욱 선남선녀같이 잘 어울렸다.“저기요, 계산 안 해요? 안 살 거면 빨리 비켜요! 다들 여기서 줄 서고 있잖아요!”그때 뒤에서 갑자기 들려오는 호통에 온지유는 생각을 접고 말했다.“봉투 주세요, 큰 걸로요.”노승아와 여이현 사이는 어차피 뻔한 결말이었다. 여이현이 해외에서 돌아온 노승아를 위해 매니지먼트를 차려주고 그녀만을 케어해 줄 때부터 둘이 잘 될 거란 걸 예견해왔었기에 온지유는 점점 이런 상황에 익숙해지고 있었다.기자회견이 아니라 결혼 발표를 한다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는 사이였다.그래서 온지유는
하지만 감동보다는 오히려 속이 울렁거렸다. 속이 울렁거리는 느낌에 문지원은 당장 얼굴이 일그러지며 화장실로 달려갔다. 지석훈도 뒤따라 들어오며 물었다.“속이 안 좋아?”“그렇진 않은 것 같아요. 요즘 세 끼 식사도 꽤 규칙적으로 하고 날것 이거나 차갑거나 매운 음식도 먹지 않았는데...”문지원은 배를 움켜쥐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지석훈도 그녀와 같은 생각을 한 듯 방으로 가서 임신 테스트기를 가져왔다.문지원은 놀라며 물었다.“언제 산 거예요?”지석훈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문지원은 아무 말이 없었다.5분 후, 그녀는 복잡한 얼굴로 다시 나왔다. 한 손은 여전히 배 위에 올려져 있었고 눈에는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했다.정말 임신한 것이다!그녀와 지석훈이 결혼한 지 겨우 3개월밖에 안 되었는데 이렇게 빨리 임신하다니.지석훈은 오히려 태연해 보였다. 하지만 입가에 감출 수 없는 미소를 보면 그 역시 겉모습처럼 평온하지 않고 흥분을 억누르고 있는 게 분명했다.“정말 임신한 거예요?”문지원은 아직 믿기지 않는 듯 물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이번 달 초에 생리가 끝났기 때문이다.“아마 생리가 끝난 후 며칠 사이일 거야.”지석훈의 목소리는 문지원에게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니 그녀의 귀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결국, 그녀는 병원에 가보기로 했다. 임신 테스트기는 가끔 틀릴 수도 있으니 이런 일은 직접 검사를 받아보고 확인해야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이다.그리고 그녀는 손에 든 검사지를 보고 완전히 할 말을 잃었다.의사는 마침 지석훈과 알고 지내던 사람이었다.“축하합니다, 지 원장님. 부인께서 임신 2주 차입니다.”“감사합니다.”지석훈은 침착하게 그녀를 부축하며 밖으로 나갔다.병원 진료실을 막 나오자마자 지석훈은 문지원을 품에 안았다.“너무 좋아. 우리 아이가 생겼어.”문지원은 남자가 미세하게 떨리는 모습을 보며 멍하
물론 손에 있는 일을 무턱대고 모두 남에게 맡기는 것은 너무 과한 부담을 주는 일이다.문지원은 비서를 사무실로 불렀다.“올해 25살이죠?”비서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그녀의 나이는 모두가 다 아는데 문지원 회장이 갑자기 이 얘기를 꺼낸다는 것은 혹시 소개팅을 시켜주려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비서는 고마웠지만 거절하며 말했다.“문 사장님, 저는 아직 젊어서 당장은 결혼할 생각이 없습니다.”“전 당신더러 결혼하라고 하는게 아니에요.”문지원은 펜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말했다.“그냥 평소에 잡다한 일들을 맡기고 싶어서요. 확인이 필요한 문서들은 평소에 굳이 내게 제출하지 않아도 돼요.”비서는 그 뜻을 이해했다.이건 곧 그녀에게 승진과 급여 인상을 주려는 것이다. 문지원이 그녀의 의견을 확인한 후 급여를 조금 올려줬고 비서에게 몇 명의 적합한 인재를 추가로 모집해서 예비 인력으로 두라고 지시했다.“평소에 내가 처리하지 못한 일들을 대신 처리해주고 만약 문제가 생기면 그때마다 보고하면 돼요.”비서는 한숨을 쉬며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그녀 혼자서 이렇게 많은 일을 하지 않아도 되어 다행이었다.일정이 정리되자 문지원은 업무에서 상당 부분 해방되었다.예전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바쁘게 일하다 보면 퇴근 시간이 되어도 일이 끝나지 않고 긴급 통지가 오면 또 회의를 위해 야근을 해야 했다.이제는 오후 4시 반쯤이면 일을 마치고 퇴근할 수 있게 된 것이다.비서가 몇 명을 더 찾아서 양성해 두었기에 업무가 적절히 분배되어 모두 바빠 죽을 정도가 아니라 적당히 딱 맞는 분량을 처리할 수 있었다.그 덕에 문지원은 지석훈과 함께 결혼 후의 삶을 더욱 즐길 수 있게 되었다.지석훈도 이에 매우 만족해했다.“널 주려고 선물을 챙겨왔어. 들어가서 한번 봐.”그가 집 문 앞에 다가서더니 걸음을 멈췄다.문지원은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안은 어두컴컴했다.“뭐 숨겨놨어요? 아직 불도 켜지 않았네요, 수상하게.”탁! 하며 불이 켜지자 거실의 모든
문지원은 이 주제가 다소 위험하다고 느꼈다. 비록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에게 물어본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자신과 배석훈이 결혼한 후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에 대해 말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돼지고기를 먹어보지 않았다고 해도 돼지가 뛰어다니 것을 본 적은 있을 것이다. 문지원은 그러면서도 반쯤 빚어놓은 만두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저,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이에 지석훈의 어머니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너희들도 이제 나이가 들었으니 아이를 가져야지. 평소에 좀 더 노력해야 한단다.”문지원은 잔소리를 듣고 나서 나오니 기운이 다 빠져있었다.시어머니는 문지원에게 정말 잘해주었다. 거의 마음을 쏟아붓는 수준이었다. 비록 문지원의 집안 사정이 좋은 것을 알면서도 혼수 때 오랜 세월 모은 돈으로 집 한 채를 사서 선물해 주었다. 사실 지석훈도 자기 집이 있었지만, 시어머니는 선물하고 싶다고 하셨다. “너희 집도 너희의 것이지만, 이건 내가 어른으로서 선물하는 거란다.”게다가 그 집에는 문지원의 이름도 함께 올려져 있었다.그래서 시어머니의 출산 독촉에도 문지원은 어쩔 수 없이 버텨야만 했다. 다행히도 시어머니는 어린 이들에게 엄격하게 구는 편은 아니었다. 만두를 빚을 때 한 번 그런 말을 했고 또 떠나면서도 지석훈을 불러 몇 마디 잔소리했다. 문지원은 그 모자간의 대화를 듣지 못했다.돌아가는 길에 문지원은 약간 궁금해져 지석훈에게 물었다.“나갈 때 어머니께서 뭐라고 하셨어요?”“정말 알고 싶어?”“네.”그러자 지석훈은 문지원의 머리를 숙이게 한 후 그녀의 흩어진 머리칼을 살며시 넘겨주며 귀 옆에서 낮게 속삭였다.“우리 아이를 빨리 낳으라고 하셨어.”남자의 낮고 진한 목소리는 얼굴을 붉히고 심장을 뛰게 만드는 약보다도 중독성이 강해 문지원의 귀가 금세 붉어지고 말았다.저녁이 되자 지석훈은 몸소 행동으로 보여주기 시작했다. 한 손으로 문지원의 머리를 받치고 이마를 맞대며 낮은 숨소리를 내쉬었다. 문지원은 마치 파도 속에 잠긴 것
그 눈빛 속에서 조용히 터져 나오는 그 소유욕. 마치 옛 시대의 군벌과 그의 부인 같았다. 그리고 사진작가는 우연히 그 장면을 목격한 운 없는 사람이 되어 몰래 촬영을 하고 있었다. 사진작가는 자신의 상상에 자극받아 목소리가 떨렸다.“지석훈 씨, 고개를 들어 카메라를 봐주세요.”지석훈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사진작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사진작가는 재빨리 셔터를 눌렀다. 그 후에도 그들은 여러 세트의 사진을 찍었고 찍은 사진들은 모두 문지원에게 하나하나 보여주었다. 문지원은 모든 사진에 다 만족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든 것은 민국 시대 주제의 사진이었다.“대략 며칠 안에 나오나요?” 그녀가 물었다.사진작가는 답했다.“빠르면 이삼 일정도 걸릴 겁니다. 그때 완성된 사진들을 택배로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개인적인 부탁이 하나 있는데 혹시 두 분께서 응해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바로 아까 찍은 사진 중 몇 장이 제가 개인적으로 아주 마음에 들어서 사진관 벽에 걸어두고 싶습니다.”문지원은 사진관에 들어올 때 봤던 사진 벽이 생각났다.“그 벽에 걸어두시겠다는 건가요?”“네.”사진작가는 그 벽은 사진관의 특별한 기념 및 홍보 방법의 하나라고 설명했다. 잘 나온 사진들은 사진 주인에게 동의를 구한 뒤 동의하면 벽에 전시한다고 한다..문지원은 옆에 있던 지석훈을 바라봤다. “저는 괜찮은데, 당신은요?” 지석훈도 아무 문제 없다고 했다.“마음대로 하도록 해.”며칠 후 문지원은 사진작가가 보내온 사진을 받아 소중히 간직했다. 하지만 그녀는 몰랐다. 그 사진관 벽에 전시된 사진들이 곧 사람들의 눈에 띄어 사진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간 것이다.잘생긴 남성과 아름다운 여인의 조합과 최상의 촬영 기술 덕분에 순식간에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었다.네티즌들은 저마다 아아 소리를 냈고 많은 사람이 댓글을 달았다. “마치 옛 시대의 군벌 부인 같다.”“완전 대박이다.”“3분 안에 그들의 모든 정보를 알고 싶다.” 하지만 이 모
문지원은 약간 마음이 움직였다.하지만 웨딩 촬영은 이미 여러 번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섬에서 몇 세트 찍었고 그 후 결혼식 현장에서 또 몇 세트 찍어 셀 수 없을 정도였다.게다가 이번 촬영은 개인 예약으로 진행되었는데 이 사진관이 꽤 유명하다고 들었다.물론 사진관 이름에 걸맞게 예약은 거의 하늘의 별 따기라고 한다..이 정도면 지석훈이 얼마나 큰 노력을 들여 예약을 잡았는지 알 수 있었다. 단순히 웨딩사진만 찍는 데 사용하기에는 너무 아까웠다.하지만 문지원 역시 이런 곳에 한 번도 와본 적이 없었기에 무엇을 찍어야 할지 몰랐다.“한번 보세요. 이건 저희가 예전부터 선보였던 스타일들이에요.”사진작가는 친절하게 앨범 한 권을 꺼내 보였다.앨범에는 이전 고객들이 이곳에서 찍은 사진들이 담겨 있었는데 정말 다양한 스타일이 있었고 모두 아름다웠다.이 사진관이 만들어낸 결과물은 정말 최고였다.문지원은 그중에서도 민국 시대 주제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이렇게 찍을 수 있을까요?”사진작가는 그녀가 가리키는 사진을 한 번 살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됩니다. 먼저 메이크업하고 옷을 갈아입으세요. 직원들이 촬영 스튜디오를 설치할게요.”옷은 사진관에서 준비한 것으로 하고 지석훈의 요구에 따라 전부 새 옷이었다.사실 문지원은 소품용 옷을 입는 것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어쨌든 한 번 입었다가 나중에 벗으면 되는 거고 몸에 달라붙지 않아서 안에 옷을 받쳐 입을 수도 있었다.하지만 지석훈은 직업병이 발동했고 그런 건 용납할 수 없었다.결국, 문지원은 어쩔 수 없이 그의 의견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급히 새 옷을 가져와야 했기 때문에 원래 걸리던 시간에서 15분이 더 추가되었고 메이크업 등 기타 과정도 진행해야 했다.문지원이 모든 준비를 마치고 나왔을 때는 이미 2시간이 지난 후였다.그러나 결과는 확실했다.곧은 치파오가 그녀의 아름다운 몸매를 감쌌고 문지원은 옷자락을 살짝 들어 올렸다. 마치 지난 옛 시대의 그림 속에서 걸어 나온 듯한
결혼 후 문지원은 휴가를 내서 신혼여행을 갈까 고민해 본 적이 있었다.하지만 요즘 지석훈이 거의 계속 병원에 머무르며 집에 돌아오지 않는 것을 떠올리며 본의 아니게 한숨이 나왔다. 비록 이미 익숙해졌긴 했지만 실망을 감추기는 어려웠다.비서도 그녀에게 물었다.“문 사장님, 신혼여행 가고 싶지 않으세요? 제 동창 중 한 명이 며칠 전에 결혼했는데 요즘 여기저기서 신혼여행 정보를 알아보며 준비 중이에요. 신혼여행이 없는 결혼은 반은 실패한 거랑 마찬가지라고 하더라고요.”그 말을 들은 문지원은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제대로 볼 생각조차 들지 않았고 비서는 무언가를 눈치챈 듯했다.“그렇지 않으면... 문 사장님, 지 의사님이 일하시는 곳에 한 번 가보시는 건 어떠세요?”그녀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어쨌든 문지원은 요즘 정신이 산만하여 업무에 집중할 기색도 없었다.문지원은 비서의 시선 속에서 정신을 차렸다. 요 며칠 동안 집에 돌아와도 지석훈을 보지 못해 한참 혼란스러워했던 자신을 깨달으며 약간 부끄러워졌다.“그건 나중에 얘기하고 기획서 한 부 복사해 가져다주세요.”점심 무렵, 문지원은 막 일을 끝내고 밥 먹으러 가려던 찰나, 핸드폰에 지석훈의 메시지가 떴다. 같이 밥을 먹자는 메시지에 문지원은 미소를 지었다. 멀리서 이 장면을 본 직원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웃음을 터뜨렸다.문지원은 재빨리 열쇠를 챙기고 회사를 떠났다. 지석훈은 그녀를 새로 오픈한 가게로 데려갔다.식사를 마친 후 문지원은 지석훈을 바라보며 머뭇거리다가 물었다.“병원에 다시 돌아갈 거예요?”“응?”지석훈은 눈썹을 치켜들며 고의적으로 물었다. “내가 돌아가길 바라는 거야?”그 말을 들은 문지원은 순간 당황했다. 사실 그녀는 지석훈이 자신과 좀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주길 바랐는데 이제 막 결혼한 신혼부부임에도 불구하고 각자 업무에만 매달려 밤에야 겨우 함께 잠자리에 들 수 있는 상황이었다.하지만 수줍음이 많은 그녀는 그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지 못했다.지석훈은
예전에는 이런 일이 있을 때면 지석훈은 항상 선을 지켰지만 오늘 밤엔 조금 달랐다. 그는 그녀를 침실에서 욕실로 다시 침대로 옮겨가며 몸 곳곳에 뜨거운 입맞춤을 했다.다음 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도 문지원은 여전히 몸속 깊이 스며든 감각이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그리고 그녀는 예상대로 휴가를 냈고 이틀이 지나서야 회사에 다시 나왔다.회사 사람들은 이미 예상이라도 한 듯 문지원이 출근하자 하나같이 말했다.“문 사장님, 결혼 축하드려요.’문지원은 무려 사흘이나 결근했지만 다들 그 사흘 동안 무얼 했는지는 굳이 말 안 해도 짐작이 갔다.분명 부부 생활이 아주 좋았겠지, 아니었으면 일까지 내팽개치고 안 나왔을 리가 없다.문지원은 직원들의 부담스러운 시선에 얼굴을 들 수도 없어 그저 아무렇지 않은 척할 수밖에 없었다.그래도 지난번에 당한 적이 있었던 터라 문지원은 이제 출근 전에 거울 앞에서 꼼꼼히 점검했다.몸에 키스 자국이 드러나지 않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하고 회사를 향했다.그렇지 않았다면 그 흔적들을 들켰을 경우 정말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문지원이 예상치 못했던 건 며칠 지나지 않아 결혼을 축하하는 선물이 회사로 배달됐다는 것이다.문지원은 처음에 여울이 보낸 거라고 생각했지만, 물어보니 아니었다.택배 상자의 외관을 살펴봐도 발신자가 적혀 있지 않아 더욱 수상했다.“이거 가져온 사람이 누가 보낸 건지 말했어요?”문지원이 로비 직원에게 물었다.로비 직원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냥 두고 바로 가버렸어요.”문지원은 뭔가 직감적으로 찜찜한 마음이 들어 그 택배를 챙겼고 사무실에 들어와서야 상자를 열었다.그 안에는 브로치 하나와 축하 카드 한 장이 들어 있었다.문지원은 축하 카드를 집어 들어보니 카드 위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결혼 축하해요.”글씨체는 아주 정갈하고 예뻐 여성의 필체 같았다.그녀는 곧바로 짐작이 갔다.문지원은 그 브로치를 지석훈에게 보여주자 그는 눈빛이 살짝 흔들렸지만 아무 말 없이 브로치
여울은 아직 최주하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최주하도 쉽게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문지원이 알기로 여울은 마음이 여린 사람이었고 결국 받아들이게 되는 건 시간문제일지도 몰랐다.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친구 일에 깊이 관여하는 것도 괜히 어색하고 조심스러웠다.게다가 얼마 전 지석훈이 슬쩍 귀띔하듯 말했다.“며칠 전에 여울 씨가 병원에 재검진받으러 왔는데 주하가 데리고 왔었어.”그 말을 듣고 문지원은 혀를 끌끌 찼다.평소에 말도 없고 조용하던 여울이 은근히 비밀 많은 타입이었던 모양이었다.그렇게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 어느덧 다음 달 중순이 되었다.지석훈은 아예 와인 농장을 통째로 빌려 며칠에 걸쳐 그곳을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꾸며놓았다.결혼식을 올릴 장소는 바로 거기였다.그 와인 농장은 웬만한 호텔 못지않게 컸고 내부에는 수년간 숙성된 고급 와인들이 그대로 보관되어 있었고 결혼식 날 손님들이 오면 바로 꺼내어 대접할 수 있을 정도였다.그들은 결혼 소식을 널리 알리진 않았다.이건 문지원이 원한 방식이었다.그녀는 온 세상에 떠들썩하게 알리는 그런 결혼식보다는 가까운 가족과 친구들만 초대해서 조용히 축하받는 걸 선호했다.행복은 굳이 남들에게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니까.그런데 결혼식이 한창일 때 지석훈이 무대 위에서 다시 한번 프러포즈했다.해변에서 했던 프러포즈보다 훨씬 더 진지하고 진중한 분위기였다.“하고 싶은 말이 정말 많지만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어서... 예전엔 내가 사랑인 줄도 모르고 놓쳐버렸던 순간이 많아. 이제는 더 이상 놓치고 싶지 않아. 이렇게 내 곁에 있어 줘서 고마워. 앞으로 남은 인생... 너랑 함께할 수 있어서 정말 행복해.”그의 말이 끝나자 하객들 사이에서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문지원은 무대 위에서 입을 손으로 가리고 눈물을 흘렸다.식이 끝날 무렵, 문지원은 멀리서 검은색 카이엔 SUV가 그녀의 친구 여울을 데리러 오는 걸 보았다.차창이 천천히 내려가자 예상대로 그 안에 앉아 있는 사람은 최주하였다
문지원은 문득 자신이 계획에 철저히 걸려들었다는 생각에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처음부터 계획한 거죠?”“응.”지석훈은 미소 지으며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사실, 그는 그녀를 향한 마음을 오래전부터 숨겨온 것이었다....해변에서의 프러포즈 이후 문지원에게 찾아온 가장 큰 변화는 손가락에 반짝이는 반지가 생겼다는 점이었다.이 반지는 지석훈이 특별히 맞춤 제작한 것이었다. 그녀는 우연히 그의 휴대폰을 보다가 두 달 전에 이미 주문이 들어가 있었다는 구매 기록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그렇게 오래전부터 준비해 왔다니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두 사람의 결혼 소식을 접한 지석훈의 부모님은 곧바로 혼인신고부터 하라고 재촉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문지원은 우연히 지석훈의 어머니가 그를 붙잡고 타이르는 말을 듣게 되었다.“네 아빠랑 난 애초에 너한테 기대도 안 했어. 하루가 멀다고 병원에서 살다시피 하니 너 같은 애한테 누가 시집오겠나 싶었거든. 그런데 다행히 네가 능력 있어서 지원이 같은 좋은 아이를 데려왔으니 얼른 확실히 붙잡아야지. 빨리 혼인신고부터 해. 나중에 그 아이가 너 버리고 떠나버리면 그땐 어디 가서 울어도 소용없어!”문지원은 그 대화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그런데 신기한 건 지석훈이 워낙 점잖고 진지한 사람이어서 집안 분위기도 매우 조용할 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점이었다. 아버지는 이미 퇴직해 한가로운 성격으로 매일 독서나 산책을 즐기는 조용한 스타일이었다. 어머니는 젊었을 때는 커리어 우먼이었고 호탕한 성격으로 남편에게 엄격하면서도 친화력이 강한 사람이었다.두 분 모두 차분한 듯하면서도 내면에 장난기를 숨기고 있는 아들을 낳을 것 같진 않았는데 이게 바로 유전자의 신비인가 싶었다.하지만 어머니가 그렇게 그녀를 좋아해 주는 모습에 문지원도 안심했다. 확실히 시부모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증거였다.한편 문지원의 아버지는 지석훈과 따로 대화를 나눈 이후부터 정확히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몰라도 그에 대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