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회사에 여이현을 대표할 다른 사람이 있다면 온지유는 무조건 알렸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임원들이 모두 자리를 비워서 그녀가 직접 갈 수밖에 없었다.“그럼 어쩔 수 없이 제가 가야겠네요. 서연 씨도 같이 가요.”“네.”송서연이 대답했다.온지유는 몇몇 사람과 함께 출발했다. 송서연은 신입사원으로서 회사 업무를 익혀야 했고, 온지유는 가는 길 내내 주의할 점을 당부했다. 어떤 실수도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항구에 도착했다. 배는 이미 항구에 와 있었고, 금강의 사람들이 그곳에서 화물을 내리고 있었다.온지유가 차에서 내리기 바쁘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왜 대표님이 아닌 온 비서가 온 거죠? 온 비서가 언제부터 대표님 대행까지 했어요?”온지유는 머리를 돌렸다. 강하임은 팔짱을 낀 채 그녀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대표님이 오늘 좀 바빠서요. 제가 대표님 대신 금강과 협상하는 게 이번이 처음도 아니에요.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해 주세요.”강하임은 온지유가 점점 눈에 거슬렸다. 따지고 보면 그녀가 여이현의 비서로 등장한 첫 순간부터 눈엣가시 같았다. 왜 꼭 여자 비서를 써야 하는지 의아하기도 했다. 남자 비서가 체력적으로 훨씬 낫지 않는가?온지유가 여이현의 아내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 순간, 그 의문은 완전히 풀렸다. 온지유는 그녀가 경계해야 하는 상대가 틀림없었다.“이해 못 할 건 없지만, 온 비서가 월권한 것 같은데요. 온 비서의 권력이 언제 이렇게 커진 건가요?”강하임은 냉정한 말투로 물었다. 눈빛에는 온지유에 대한 적의로 가득했다.“이미 말씀드렸잖아요. 대표님이 오늘 바쁘다고요.”“저는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고 봐요.”강하임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그 시선에 그녀는 몸이 뚫릴 것만 같았다. 그래도 강하임의 말에는 대꾸하지 않았다.그녀는 강하임과 아무런 사이도 아니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적대적인 시선을 보내는지 이해할 수 없을 따
여이현과 노승아가 특별한 사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강하임에 관한 일은 전혀 들어본 적 없었다.강하임은 추억에 잠겼다. 인생에서 가장 로맨틱하고 격정적인 순간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온 비서는 몰라요. 대표님이 구해준 순간 나는 사랑에 빠졌어요. 내가 성인이 된 다음 꼭 결혼하기로 약속까지 했다고요! 이건 가장 신성한 약속이에요!”온지유는 강하임의 말이 하도 어이없어서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의 이해에 따르면 두 사람은 어린 시절에 만난 것 같다. 어린애가 한 말을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다는 게 말이나 되는가?더군다나 여이현은 강하임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아무리 거창한 약속이라고 잊었을 게 뻔했다. 마치 그녀를 잊은 것처럼...여이현은 많은 사람을 구했다. 그건 그의 일이었으니까. 일로 만난 상대에게 감정이 생길 일은 절대 없었다. 그래서인지 강하임의 말도 터무니없는 것으로 느껴졌다.“그렇다면 대표님께 직접 여쭤보시죠. 저한테 말해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저는 할 일이 있어서 이만...”그녀는 남의 사랑 이야기에 관심 없었다. 하지만 돌아서려는 그녀를 강하임이 꽉 붙들었다.“두 사람이 부부라는 걸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면서요? 진짜 좋아서 한 결혼이면 숨길 리가 없어요. 전 세상에 알리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죠. 대표님은 온 비서를 좋아하지 않아요. 온 비서가 더러운 수작으로 결혼까지 한 거 맞죠?”강하임은 잔뜩 흥분한 모양새였다. 온지유는 미간을 찌푸리며 팔을 뿌리쳤다.“이거 노세요. 저한테 말해서 되는 일이 아니라고 했잖아요!”“회피는 묵인이에요. 난 내 말이 맞는 거로 알고 있을게요.”강하임은 금방이라도 온지유를 삼켜버릴 것 같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역시 온 비서는 처음부터 나한테 악감정 있었죠? 나랑 윤희 사이에서 이간질 하더니, 이제는 내 남자까지 가로채요? 정말 확 죽려버리고 싶게 만드네요.”온지유는 그녀에게 밀려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임신한 몸으로 다치면 안 되기에 최대한 그녀를 자극하지 않으려고 했
강하임을 문 것은 마지못해서 한 선택이었다. 그녀는 너무 위험한 곳에 서 있었고, 조금이라도 휘청거리면 바다에 빠질 수 있었다.그녀는 이대로 죽고 싶지 않았다. 죽더라도 강하임은 꼭 데려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강하임이 손을 뿌리친 순간 다른 손으로 그녀를 붙잡았다.두 사람은 동시에 바다에 빠졌다. 풍덩 소리와 함께 커다란 물보라가 쳤다.수영할 줄 몰랐던 강하임은 세차게 버둥대며 외쳤다.“살려주세요!”오늘은 강풍이 부는 날이었다. 그만큼 파도의 힘도 강했다. 집채만 한 파도가 덮이자, 살려달라는 소리는 아예 들리지 않았다.온지유는 수영할 줄 아는데도 벗어나기 힘들었다. 아무리 팔을 뻗어도 점점 멀리 밀려나기만 했다.그녀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곳에서 죽고 싶지 않았다. 배 속의 아이도 다쳐서는 안 된다. 어떻게든 살아 남기 위해 수영했는데도 몸은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다.무기력감이 몰려오는 동시에 힘이 빠져버렸다. 바닷물은 끝없이 입속으로 들어왔고, 정말 죽는 것인지 주마등도 스쳐 지나갔다.아이... 부모... 그리고 여이현.‘엄마랑 아빠한테 효도해야 하는데. 이현 씨랑 이혼하고 아이도 낳아야 하는데...’이대로 죽기에는 마음에 걸리는 일이 너무 많았다. 만약 다음 생이 있다면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이 아닌, 자신을 좋아해 주는 사람과 만나겠다고 다짐했다.‘힘들어... 잠깐만 쉴래.’의식은 점점 모호해지고 몸도 바닷속으로 빨려 들어갔다.“저기 사람이 있어요!”“빨리! 빨리 건져내!”“아가씨, 잠들면 안 돼요! 정신 차리고 밧줄을 잡아요!”온지유는 시끄러운 말소리에 다시 눈을 떴다. 마침 지나가던 어선에서 사람들이 그녀를 향해 밧줄을 던지고 있었다.그녀는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밧줄을 잡았다. 어디에서 온 힘인지는 모르겠지만 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어부들이 도와준 덕분에 그녀는 무사히 배에 탈 수 있었다. 그들은 그녀의 곁에 빙 둘러서서 우왕좌왕했다.“아가씨, 괜찮아요?”한 여자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의식이 점점
기자는 두 사람을 인터뷰하는 중이었다.“노승아 씨는 여이현 대표님이 직접 배양한 배우라고 할 수 있는데요. 오늘 신인상을 받으신 노승아 씨한테 한 마디 해주세요.”여이현은 카메라를 바라보며 덤덤하게 말했다.“그동안의 노력이 헛되지 않은 걸 축하한다고 말하고 싶네요.”노승아는 트로피를 든 채로 싱긋 웃었다. 약간 부끄러운 듯한 미소였다.이번에 기자는 노승아에게 말했다.“오늘 아주 역사적인 날이에요. 데뷔작으로 신인상까지 받은 걸 정말 축하드려요. 그동안 도움 주신 여이현 대표님께 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어떤 대답이 돌아와도 기사 10편을 쓸 정도의 가십거리였다. 노승아는 마이크에 대고 부드럽게 말했다.“이런 영광을 받게 되어서 너무 기쁘고, 앞으로 계속 노력할게요. 제 배우 인생은 이제야 시작이니까요. 그리고 이 영광은 여이현 대표님께 돌리겠어요. 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에요.”말을 마친 그녀는 세상 다정한 눈빛으로 여이현을 바라봤다. TV 밖에서 그 사랑이 느껴질 정도였다.현장은 금세 시끌벅적해졌다. 여이현은 그녀가 이런 말을 할 줄 모른 듯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그조차도 온지유의 눈에는 애정 행각으로 보였다. TV 속에서 두 사람은 여느 커플과 다름없이 행동하고 있었다.‘하긴, 요즘 시대에 스폰서가 있는 게 무슨 대수라고. 더군다나 노승아는 신인상을 받았으니,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는 말만 듣겠지.’카메라 앞에 서 있는 노승아는 자신감이 넘쳐 보였다. 사석에서 만났을 때와 느낌이 전혀 달랐다. 저 정도 위치에 있으면 누구나 눈 부셔지는 법이었다.두 사람은 모두가 보는 앞에서 사랑놀이를 하고 있었다. 같은 시각, 그녀는 자칫 바다에 빠져 죽을 뻔했는데도 말이다.한쪽은 물귀신이고, 다른 한쪽은 천사였다. 노승아와 그녀 사이의 차이점이 오늘따라 유독 선명하게 보였다.온지유는 무의식적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얼굴은 백지장처럼 창백했다. 저체온증이라도 온 듯 벌벌 떨리는 몸보다 마음이 더욱 차가웠다.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아랫배를
여이현은 여진그룹의 파티에서 한 번 밝힌 적 있었다. 그러나 일반인은 아직 모르는 상태였다. 오늘 갑자기 계획 없이 밝힌 건 그와 노승아의 스캔들을 보기 싫었기 때문이다.“장난 아니시죠? 대표님의 결혼 소식이 어떻게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을 수가 있죠? 오늘이 만우절도 아닌데...”“저 결혼했어요. 이런 일로 장난칠 일도 없고요. 저는 아내와 만난 지 7년 됐고, 결혼은 3년 전에 했어요. 이상한 기사 때문에 제 아내가 오해하는 일은 없었으면 해요.”노승아의 표정은 아주 부자연스러웠다. 여이현이 갑자기 결혼 사실을 밝힐 줄은 몰랐던 것이다.‘일이 왜 이렇게 된 거야? 예정에 없었던 일이잖아.’그녀는 속으로 아무리 화가 나도 아무렇지 않은 척 미소를 지어야 했다. 손은 불안감을 애써 참아보려는 듯 꽉 움켜쥐었다.그녀가 원하는 것이라면, 여이현은 모든 것을 들어줬다. 연예계에서도 모자람 없이 띄워줬다. 하지만 딱 감정 문제에서만 번마다 회피했다.오늘 그녀가 계획한 대로 기사가 나가면 여진그룹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싫다면 후에 기사를 막으면 그만인 일이었다. 그러나 대놓고 사실을 밝히는 건 그녀를 우습게 만드는 것이었다.여이현은 오늘 직접 시상식에 참석했다. 물론 회사 대표로서 참석한 것이다. 다른 건 말할 필요 없었다. 이미 충분히 많은 것을 말하기도 했다.인터뷰를 그만해야겠다는 것을 눈치껏 느낀 배진호는 앞으로 나가서 말했다.“죄송합니다. 대표님께 중요한 일정이 있으셔서 이만 가보셔야 합니다.”노승아는 묵묵히 두 사람을 뒤따라 함께 떠났다.“아내분과 만난 지 7년 되었다고 하셨죠? 이에 관해 조금만 더 말해주실 수 없을까요?”기자들은 포기하지 않고 달려들었다. 7년이라는 단서만으로도 조사는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더 많은 단서를 원했다.여이현이 멀어져가는데도 그들은 포기하지 않고 달려들었다. 다행히 경호원이 막아선 덕분에 참사는 일어나지 않았다.여이현 등은 밖에서 미리 기다리고 있던 차에 올라타서 카메라를 막았다. 멀
“언니...”“내가 이 자리에 오기까지 겪은 풍파가 어디 한둘이야? 내가 찍은 드라마가 망했다고 해도, 내 인기가 떨어졌다고 해도, 그건 다 내 문제야. 이 큰 연예계에서 나보다 잘난 모든 사람을 시기 질투할 수는 없잖아?”“그게 아니라, 노승아는 스폰서 덕분에...”“그런 말 함부로 하면 안 돼. 다시는 내 귀에 들어오게 하지 마. 내가 어떤 사람인지 네가 더 잘 알잖아. 잘못된 길에 들어서서는 안 돼. 자신을 소중히 여겨야지.”장다희는 자신의 미래를 아주 소중히 여겼다. 그녀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 바로 다른 사람의 성과를 시기해서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 것이다.그녀는 노승아와 달랐다. 그녀는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온 사람으로서 많은 것을 경험했다. 그러나 노승아는 부잣집에서 태어났다. 태초부터 특권층이었다는 말이다.그래도 그녀는 상관없었다. 자신의 노력으로도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언젠가 꼭 정상에 오를 것이라고 믿었다....차 안의 분위기는 가는 길 내내 아주 무거웠다.여이현은 냉랭한 얼굴로 창밖을 바라보며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노승아는 그의 눈치를 살피며 섣불리 말을 걸지 못하고 마음을 졸이고 있었다.회사에 도착하자, 여이현은 바로 차 문을 열고 내렸다. 그리고 빠른 걸음으로 회사 안으로 들어갔다. 얇고 뾰족한 하이힐을 신은 노승아는 아무리 빨리 걸어도 그를 쫓아갈 수 없었다.“오빠, 아...!”노승아는 황급히 쫓아가다 결국 발을 삐끗하고 말았다. 여이현은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서러운 표정으로 다리를 움켜잡고 눈물을 글썽였다.“나 발목이 삐었어요.”여이현은 가만히 서서 그녀를 바라보며 차갑게 말했다.“기자들 앞에서 그런 말을 하기 전에, 어떤 의미로 들릴지 생각 안 해봤어?”“나는 그냥 기자들의 질문에 대답했을 뿐이에요. 오빠는 원래도 나한테 중요한 사람이니까요.”“넌 아직도 연예계를 몰라? 아니면 내가 모를 줄 알았던 건가?”여이현은 눈을 가늘게 뜨며 진지하게 말했다.“네가 한 말
바닷속에서 온지유는 숨을 쉴 수 없었다. 어떻게든 올라가려고 발버둥 쳤지만, 커다란 돌이 누르고 있어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녀를 기다리는 건 죽음뿐이었다.아니, 그녀는 죽었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시체조차 찾을 수 없는 곳에서, 홀로 죽음을 맞이했다.“난 죽고 싶지 않아!”온지유는 큰 소리로 외치면서 벌떡 일어났다.“어, 일어나셨네요.”그녀의 얼굴은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꿈이라는 것을 깨닫고 머리를 돌려보니 베개까지 흠뻑 젖었다.‘아... 나 병원에 있구나.’뒤늦게 정신 차린 그녀는 아랫배를 만지며 물었다.“선생님, 애는... 제 애는...”“아이는 괜찮아요, 환자분.”간호사가 부드럽게 말했다.“구급차에서 내렸을 때 온몸이 흠뻑 젖어 있어서 걱정했는데, 다행히 아이는 무사해요.”“하아... 다행이에요.”온지유는 시름을 놓은 듯 한숨을 쉬었다.“핸드폰이 없으셔서 저희가 보호자께 연락하지 못했어요. 번호를 알려주시면 제가 대신 해줄게요.”온지유는 먼저 주변을 빙 둘러봤다. 다행히 지난번의 그 병원은 아닌 것 같았다. 그곳에는 여이현의 친구가 있어서 무슨 일이 일어나면 숨기기 어려웠다.“네, 그럼 부탁드릴게요.”30분도 채 되지 않아서 백지희가 병원에 도착했다. 그녀는 잔뜩 긴장한 기색으로 물었다.“이게 무슨 일이야? 유산 징조가 있었다는 건 또 무슨 말이고?!”“오늘 회사 일로 항구에 갔다가 강하임 대표랑 만났어. 강하임 기억하지? 지난번 이현 씨를 보는 눈빛이 이상하다고 했던... 아무튼 오늘에는 날 죽이려고 하더라.”그녀는 자초지종을 천천히 설명했다. 전부 듣고 난 백지희는 화가 치밀어 올라서 도무지 견딜 수가 없었다.“신고해! 당장 신고해! 이게 살인 미수가 아니고 뭐야! 내가 그 여자 감옥에 보내고 말 거야!”“강 대표도 나랑 같이 바다에 빠졌어. 지금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네. 혹시 죽으면 내 책임이 되는 건 아니겠지?”온지유는 살짝 걱정되는 마음이 있었다. 괜히 그녀가 감옥에 가는 일이 생길까 봐서 말
온지유의 말을 들은 백지희는 눈시울을 붉혔다. 그녀가 다 속상해서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다.무심한 남편이 도와주지 않으니, 온지유는 스스로 모든 것을 이겨내야 했다. 도대체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런 일이 있는지 모르겠다.백지희는 그녀를 꼭 끌어안으며 등을 토닥였다.“내가 같이 있어 줄게. 다 괜찮아질 거야.”온지유는 백지희의 어깨에 기댔다. 함께 해주는 친구가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었다.그녀의 편에는 아직 많은 것이 있었다. 그저 여이현이 없달 뿐이다.링거를 맞고 난 온지유는 바로 퇴원했다. 과로와 운동을 조심해야 하는 것 외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백지희는 그녀와 함께 걸어 나가면서 물었다.“이젠... 거기로 돌아갈 거야?”온지유는 잠깐 고민하다가 준비할 것이 있다는 생각에 머리를 끄덕였다.“응, 돌아가야지.”백지희는 온지유를 차에 태우면서 말했다.“알았어. 가서도 계속 연락해.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면 무조건 도울게.”“나 F국으로 가는 항공권 두 장 구해줘.”‘F국?’백지희는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설마 여이현이랑 해외여행이라도 가게?”“후에 다시 알려줄게.”...여이현은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아직 퇴근할 시간은 아니었다. 그는 회사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엘리베이터에 올랐다.엘리베이터 입구는 아주 소란스러웠다. 여이현도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끼고 빠른 걸음으로 다가갔다.송서연은 얼마나 울었는지 눈이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여이현을 본 순간 그녀는 구세주라도 본 것처럼 달려왔다.“대표님! 왜 이제야 돌아오셨어요!”“무슨 일인데요?”여이현은 무덤덤하게 물었다. 송서연은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절규하다시피 말했다.“온 비서님이 실종했대요! 온 비서님이... 온 비서님이... 금강의 대표랑 같이 바다에 빠졌어요!”이윤정은 병원에 있었다. 그녀도 온지유의 상황을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이 말을 듣고 여이현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 손도 덜덜 떨면서 다시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그걸 왜 이제야
하지만 감동보다는 오히려 속이 울렁거렸다. 속이 울렁거리는 느낌에 문지원은 당장 얼굴이 일그러지며 화장실로 달려갔다. 지석훈도 뒤따라 들어오며 물었다.“속이 안 좋아?”“그렇진 않은 것 같아요. 요즘 세 끼 식사도 꽤 규칙적으로 하고 날것 이거나 차갑거나 매운 음식도 먹지 않았는데...”문지원은 배를 움켜쥐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지석훈도 그녀와 같은 생각을 한 듯 방으로 가서 임신 테스트기를 가져왔다.문지원은 놀라며 물었다.“언제 산 거예요?”지석훈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문지원은 아무 말이 없었다.5분 후, 그녀는 복잡한 얼굴로 다시 나왔다. 한 손은 여전히 배 위에 올려져 있었고 눈에는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했다.정말 임신한 것이다!그녀와 지석훈이 결혼한 지 겨우 3개월밖에 안 되었는데 이렇게 빨리 임신하다니.지석훈은 오히려 태연해 보였다. 하지만 입가에 감출 수 없는 미소를 보면 그 역시 겉모습처럼 평온하지 않고 흥분을 억누르고 있는 게 분명했다.“정말 임신한 거예요?”문지원은 아직 믿기지 않는 듯 물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이번 달 초에 생리가 끝났기 때문이다.“아마 생리가 끝난 후 며칠 사이일 거야.”지석훈의 목소리는 문지원에게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니 그녀의 귀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결국, 그녀는 병원에 가보기로 했다. 임신 테스트기는 가끔 틀릴 수도 있으니 이런 일은 직접 검사를 받아보고 확인해야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이다.그리고 그녀는 손에 든 검사지를 보고 완전히 할 말을 잃었다.의사는 마침 지석훈과 알고 지내던 사람이었다.“축하합니다, 지 원장님. 부인께서 임신 2주 차입니다.”“감사합니다.”지석훈은 침착하게 그녀를 부축하며 밖으로 나갔다.병원 진료실을 막 나오자마자 지석훈은 문지원을 품에 안았다.“너무 좋아. 우리 아이가 생겼어.”문지원은 남자가 미세하게 떨리는 모습을 보며 멍하
물론 손에 있는 일을 무턱대고 모두 남에게 맡기는 것은 너무 과한 부담을 주는 일이다.문지원은 비서를 사무실로 불렀다.“올해 25살이죠?”비서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그녀의 나이는 모두가 다 아는데 문지원 회장이 갑자기 이 얘기를 꺼낸다는 것은 혹시 소개팅을 시켜주려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비서는 고마웠지만 거절하며 말했다.“문 사장님, 저는 아직 젊어서 당장은 결혼할 생각이 없습니다.”“전 당신더러 결혼하라고 하는게 아니에요.”문지원은 펜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말했다.“그냥 평소에 잡다한 일들을 맡기고 싶어서요. 확인이 필요한 문서들은 평소에 굳이 내게 제출하지 않아도 돼요.”비서는 그 뜻을 이해했다.이건 곧 그녀에게 승진과 급여 인상을 주려는 것이다. 문지원이 그녀의 의견을 확인한 후 급여를 조금 올려줬고 비서에게 몇 명의 적합한 인재를 추가로 모집해서 예비 인력으로 두라고 지시했다.“평소에 내가 처리하지 못한 일들을 대신 처리해주고 만약 문제가 생기면 그때마다 보고하면 돼요.”비서는 한숨을 쉬며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그녀 혼자서 이렇게 많은 일을 하지 않아도 되어 다행이었다.일정이 정리되자 문지원은 업무에서 상당 부분 해방되었다.예전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바쁘게 일하다 보면 퇴근 시간이 되어도 일이 끝나지 않고 긴급 통지가 오면 또 회의를 위해 야근을 해야 했다.이제는 오후 4시 반쯤이면 일을 마치고 퇴근할 수 있게 된 것이다.비서가 몇 명을 더 찾아서 양성해 두었기에 업무가 적절히 분배되어 모두 바빠 죽을 정도가 아니라 적당히 딱 맞는 분량을 처리할 수 있었다.그 덕에 문지원은 지석훈과 함께 결혼 후의 삶을 더욱 즐길 수 있게 되었다.지석훈도 이에 매우 만족해했다.“널 주려고 선물을 챙겨왔어. 들어가서 한번 봐.”그가 집 문 앞에 다가서더니 걸음을 멈췄다.문지원은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안은 어두컴컴했다.“뭐 숨겨놨어요? 아직 불도 켜지 않았네요, 수상하게.”탁! 하며 불이 켜지자 거실의 모든
문지원은 이 주제가 다소 위험하다고 느꼈다. 비록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에게 물어본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자신과 배석훈이 결혼한 후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에 대해 말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돼지고기를 먹어보지 않았다고 해도 돼지가 뛰어다니 것을 본 적은 있을 것이다. 문지원은 그러면서도 반쯤 빚어놓은 만두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저,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이에 지석훈의 어머니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너희들도 이제 나이가 들었으니 아이를 가져야지. 평소에 좀 더 노력해야 한단다.”문지원은 잔소리를 듣고 나서 나오니 기운이 다 빠져있었다.시어머니는 문지원에게 정말 잘해주었다. 거의 마음을 쏟아붓는 수준이었다. 비록 문지원의 집안 사정이 좋은 것을 알면서도 혼수 때 오랜 세월 모은 돈으로 집 한 채를 사서 선물해 주었다. 사실 지석훈도 자기 집이 있었지만, 시어머니는 선물하고 싶다고 하셨다. “너희 집도 너희의 것이지만, 이건 내가 어른으로서 선물하는 거란다.”게다가 그 집에는 문지원의 이름도 함께 올려져 있었다.그래서 시어머니의 출산 독촉에도 문지원은 어쩔 수 없이 버텨야만 했다. 다행히도 시어머니는 어린 이들에게 엄격하게 구는 편은 아니었다. 만두를 빚을 때 한 번 그런 말을 했고 또 떠나면서도 지석훈을 불러 몇 마디 잔소리했다. 문지원은 그 모자간의 대화를 듣지 못했다.돌아가는 길에 문지원은 약간 궁금해져 지석훈에게 물었다.“나갈 때 어머니께서 뭐라고 하셨어요?”“정말 알고 싶어?”“네.”그러자 지석훈은 문지원의 머리를 숙이게 한 후 그녀의 흩어진 머리칼을 살며시 넘겨주며 귀 옆에서 낮게 속삭였다.“우리 아이를 빨리 낳으라고 하셨어.”남자의 낮고 진한 목소리는 얼굴을 붉히고 심장을 뛰게 만드는 약보다도 중독성이 강해 문지원의 귀가 금세 붉어지고 말았다.저녁이 되자 지석훈은 몸소 행동으로 보여주기 시작했다. 한 손으로 문지원의 머리를 받치고 이마를 맞대며 낮은 숨소리를 내쉬었다. 문지원은 마치 파도 속에 잠긴 것
그 눈빛 속에서 조용히 터져 나오는 그 소유욕. 마치 옛 시대의 군벌과 그의 부인 같았다. 그리고 사진작가는 우연히 그 장면을 목격한 운 없는 사람이 되어 몰래 촬영을 하고 있었다. 사진작가는 자신의 상상에 자극받아 목소리가 떨렸다.“지석훈 씨, 고개를 들어 카메라를 봐주세요.”지석훈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사진작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사진작가는 재빨리 셔터를 눌렀다. 그 후에도 그들은 여러 세트의 사진을 찍었고 찍은 사진들은 모두 문지원에게 하나하나 보여주었다. 문지원은 모든 사진에 다 만족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든 것은 민국 시대 주제의 사진이었다.“대략 며칠 안에 나오나요?” 그녀가 물었다.사진작가는 답했다.“빠르면 이삼 일정도 걸릴 겁니다. 그때 완성된 사진들을 택배로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개인적인 부탁이 하나 있는데 혹시 두 분께서 응해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바로 아까 찍은 사진 중 몇 장이 제가 개인적으로 아주 마음에 들어서 사진관 벽에 걸어두고 싶습니다.”문지원은 사진관에 들어올 때 봤던 사진 벽이 생각났다.“그 벽에 걸어두시겠다는 건가요?”“네.”사진작가는 그 벽은 사진관의 특별한 기념 및 홍보 방법의 하나라고 설명했다. 잘 나온 사진들은 사진 주인에게 동의를 구한 뒤 동의하면 벽에 전시한다고 한다..문지원은 옆에 있던 지석훈을 바라봤다. “저는 괜찮은데, 당신은요?” 지석훈도 아무 문제 없다고 했다.“마음대로 하도록 해.”며칠 후 문지원은 사진작가가 보내온 사진을 받아 소중히 간직했다. 하지만 그녀는 몰랐다. 그 사진관 벽에 전시된 사진들이 곧 사람들의 눈에 띄어 사진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간 것이다.잘생긴 남성과 아름다운 여인의 조합과 최상의 촬영 기술 덕분에 순식간에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었다.네티즌들은 저마다 아아 소리를 냈고 많은 사람이 댓글을 달았다. “마치 옛 시대의 군벌 부인 같다.”“완전 대박이다.”“3분 안에 그들의 모든 정보를 알고 싶다.” 하지만 이 모
문지원은 약간 마음이 움직였다.하지만 웨딩 촬영은 이미 여러 번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섬에서 몇 세트 찍었고 그 후 결혼식 현장에서 또 몇 세트 찍어 셀 수 없을 정도였다.게다가 이번 촬영은 개인 예약으로 진행되었는데 이 사진관이 꽤 유명하다고 들었다.물론 사진관 이름에 걸맞게 예약은 거의 하늘의 별 따기라고 한다..이 정도면 지석훈이 얼마나 큰 노력을 들여 예약을 잡았는지 알 수 있었다. 단순히 웨딩사진만 찍는 데 사용하기에는 너무 아까웠다.하지만 문지원 역시 이런 곳에 한 번도 와본 적이 없었기에 무엇을 찍어야 할지 몰랐다.“한번 보세요. 이건 저희가 예전부터 선보였던 스타일들이에요.”사진작가는 친절하게 앨범 한 권을 꺼내 보였다.앨범에는 이전 고객들이 이곳에서 찍은 사진들이 담겨 있었는데 정말 다양한 스타일이 있었고 모두 아름다웠다.이 사진관이 만들어낸 결과물은 정말 최고였다.문지원은 그중에서도 민국 시대 주제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이렇게 찍을 수 있을까요?”사진작가는 그녀가 가리키는 사진을 한 번 살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됩니다. 먼저 메이크업하고 옷을 갈아입으세요. 직원들이 촬영 스튜디오를 설치할게요.”옷은 사진관에서 준비한 것으로 하고 지석훈의 요구에 따라 전부 새 옷이었다.사실 문지원은 소품용 옷을 입는 것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어쨌든 한 번 입었다가 나중에 벗으면 되는 거고 몸에 달라붙지 않아서 안에 옷을 받쳐 입을 수도 있었다.하지만 지석훈은 직업병이 발동했고 그런 건 용납할 수 없었다.결국, 문지원은 어쩔 수 없이 그의 의견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급히 새 옷을 가져와야 했기 때문에 원래 걸리던 시간에서 15분이 더 추가되었고 메이크업 등 기타 과정도 진행해야 했다.문지원이 모든 준비를 마치고 나왔을 때는 이미 2시간이 지난 후였다.그러나 결과는 확실했다.곧은 치파오가 그녀의 아름다운 몸매를 감쌌고 문지원은 옷자락을 살짝 들어 올렸다. 마치 지난 옛 시대의 그림 속에서 걸어 나온 듯한
결혼 후 문지원은 휴가를 내서 신혼여행을 갈까 고민해 본 적이 있었다.하지만 요즘 지석훈이 거의 계속 병원에 머무르며 집에 돌아오지 않는 것을 떠올리며 본의 아니게 한숨이 나왔다. 비록 이미 익숙해졌긴 했지만 실망을 감추기는 어려웠다.비서도 그녀에게 물었다.“문 사장님, 신혼여행 가고 싶지 않으세요? 제 동창 중 한 명이 며칠 전에 결혼했는데 요즘 여기저기서 신혼여행 정보를 알아보며 준비 중이에요. 신혼여행이 없는 결혼은 반은 실패한 거랑 마찬가지라고 하더라고요.”그 말을 들은 문지원은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제대로 볼 생각조차 들지 않았고 비서는 무언가를 눈치챈 듯했다.“그렇지 않으면... 문 사장님, 지 의사님이 일하시는 곳에 한 번 가보시는 건 어떠세요?”그녀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어쨌든 문지원은 요즘 정신이 산만하여 업무에 집중할 기색도 없었다.문지원은 비서의 시선 속에서 정신을 차렸다. 요 며칠 동안 집에 돌아와도 지석훈을 보지 못해 한참 혼란스러워했던 자신을 깨달으며 약간 부끄러워졌다.“그건 나중에 얘기하고 기획서 한 부 복사해 가져다주세요.”점심 무렵, 문지원은 막 일을 끝내고 밥 먹으러 가려던 찰나, 핸드폰에 지석훈의 메시지가 떴다. 같이 밥을 먹자는 메시지에 문지원은 미소를 지었다. 멀리서 이 장면을 본 직원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웃음을 터뜨렸다.문지원은 재빨리 열쇠를 챙기고 회사를 떠났다. 지석훈은 그녀를 새로 오픈한 가게로 데려갔다.식사를 마친 후 문지원은 지석훈을 바라보며 머뭇거리다가 물었다.“병원에 다시 돌아갈 거예요?”“응?”지석훈은 눈썹을 치켜들며 고의적으로 물었다. “내가 돌아가길 바라는 거야?”그 말을 들은 문지원은 순간 당황했다. 사실 그녀는 지석훈이 자신과 좀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주길 바랐는데 이제 막 결혼한 신혼부부임에도 불구하고 각자 업무에만 매달려 밤에야 겨우 함께 잠자리에 들 수 있는 상황이었다.하지만 수줍음이 많은 그녀는 그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지 못했다.지석훈은
예전에는 이런 일이 있을 때면 지석훈은 항상 선을 지켰지만 오늘 밤엔 조금 달랐다. 그는 그녀를 침실에서 욕실로 다시 침대로 옮겨가며 몸 곳곳에 뜨거운 입맞춤을 했다.다음 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도 문지원은 여전히 몸속 깊이 스며든 감각이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그리고 그녀는 예상대로 휴가를 냈고 이틀이 지나서야 회사에 다시 나왔다.회사 사람들은 이미 예상이라도 한 듯 문지원이 출근하자 하나같이 말했다.“문 사장님, 결혼 축하드려요.’문지원은 무려 사흘이나 결근했지만 다들 그 사흘 동안 무얼 했는지는 굳이 말 안 해도 짐작이 갔다.분명 부부 생활이 아주 좋았겠지, 아니었으면 일까지 내팽개치고 안 나왔을 리가 없다.문지원은 직원들의 부담스러운 시선에 얼굴을 들 수도 없어 그저 아무렇지 않은 척할 수밖에 없었다.그래도 지난번에 당한 적이 있었던 터라 문지원은 이제 출근 전에 거울 앞에서 꼼꼼히 점검했다.몸에 키스 자국이 드러나지 않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하고 회사를 향했다.그렇지 않았다면 그 흔적들을 들켰을 경우 정말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문지원이 예상치 못했던 건 며칠 지나지 않아 결혼을 축하하는 선물이 회사로 배달됐다는 것이다.문지원은 처음에 여울이 보낸 거라고 생각했지만, 물어보니 아니었다.택배 상자의 외관을 살펴봐도 발신자가 적혀 있지 않아 더욱 수상했다.“이거 가져온 사람이 누가 보낸 건지 말했어요?”문지원이 로비 직원에게 물었다.로비 직원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냥 두고 바로 가버렸어요.”문지원은 뭔가 직감적으로 찜찜한 마음이 들어 그 택배를 챙겼고 사무실에 들어와서야 상자를 열었다.그 안에는 브로치 하나와 축하 카드 한 장이 들어 있었다.문지원은 축하 카드를 집어 들어보니 카드 위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결혼 축하해요.”글씨체는 아주 정갈하고 예뻐 여성의 필체 같았다.그녀는 곧바로 짐작이 갔다.문지원은 그 브로치를 지석훈에게 보여주자 그는 눈빛이 살짝 흔들렸지만 아무 말 없이 브로치
여울은 아직 최주하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최주하도 쉽게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문지원이 알기로 여울은 마음이 여린 사람이었고 결국 받아들이게 되는 건 시간문제일지도 몰랐다.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친구 일에 깊이 관여하는 것도 괜히 어색하고 조심스러웠다.게다가 얼마 전 지석훈이 슬쩍 귀띔하듯 말했다.“며칠 전에 여울 씨가 병원에 재검진받으러 왔는데 주하가 데리고 왔었어.”그 말을 듣고 문지원은 혀를 끌끌 찼다.평소에 말도 없고 조용하던 여울이 은근히 비밀 많은 타입이었던 모양이었다.그렇게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 어느덧 다음 달 중순이 되었다.지석훈은 아예 와인 농장을 통째로 빌려 며칠에 걸쳐 그곳을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꾸며놓았다.결혼식을 올릴 장소는 바로 거기였다.그 와인 농장은 웬만한 호텔 못지않게 컸고 내부에는 수년간 숙성된 고급 와인들이 그대로 보관되어 있었고 결혼식 날 손님들이 오면 바로 꺼내어 대접할 수 있을 정도였다.그들은 결혼 소식을 널리 알리진 않았다.이건 문지원이 원한 방식이었다.그녀는 온 세상에 떠들썩하게 알리는 그런 결혼식보다는 가까운 가족과 친구들만 초대해서 조용히 축하받는 걸 선호했다.행복은 굳이 남들에게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니까.그런데 결혼식이 한창일 때 지석훈이 무대 위에서 다시 한번 프러포즈했다.해변에서 했던 프러포즈보다 훨씬 더 진지하고 진중한 분위기였다.“하고 싶은 말이 정말 많지만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어서... 예전엔 내가 사랑인 줄도 모르고 놓쳐버렸던 순간이 많아. 이제는 더 이상 놓치고 싶지 않아. 이렇게 내 곁에 있어 줘서 고마워. 앞으로 남은 인생... 너랑 함께할 수 있어서 정말 행복해.”그의 말이 끝나자 하객들 사이에서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문지원은 무대 위에서 입을 손으로 가리고 눈물을 흘렸다.식이 끝날 무렵, 문지원은 멀리서 검은색 카이엔 SUV가 그녀의 친구 여울을 데리러 오는 걸 보았다.차창이 천천히 내려가자 예상대로 그 안에 앉아 있는 사람은 최주하였다
문지원은 문득 자신이 계획에 철저히 걸려들었다는 생각에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처음부터 계획한 거죠?”“응.”지석훈은 미소 지으며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사실, 그는 그녀를 향한 마음을 오래전부터 숨겨온 것이었다....해변에서의 프러포즈 이후 문지원에게 찾아온 가장 큰 변화는 손가락에 반짝이는 반지가 생겼다는 점이었다.이 반지는 지석훈이 특별히 맞춤 제작한 것이었다. 그녀는 우연히 그의 휴대폰을 보다가 두 달 전에 이미 주문이 들어가 있었다는 구매 기록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그렇게 오래전부터 준비해 왔다니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두 사람의 결혼 소식을 접한 지석훈의 부모님은 곧바로 혼인신고부터 하라고 재촉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문지원은 우연히 지석훈의 어머니가 그를 붙잡고 타이르는 말을 듣게 되었다.“네 아빠랑 난 애초에 너한테 기대도 안 했어. 하루가 멀다고 병원에서 살다시피 하니 너 같은 애한테 누가 시집오겠나 싶었거든. 그런데 다행히 네가 능력 있어서 지원이 같은 좋은 아이를 데려왔으니 얼른 확실히 붙잡아야지. 빨리 혼인신고부터 해. 나중에 그 아이가 너 버리고 떠나버리면 그땐 어디 가서 울어도 소용없어!”문지원은 그 대화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그런데 신기한 건 지석훈이 워낙 점잖고 진지한 사람이어서 집안 분위기도 매우 조용할 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점이었다. 아버지는 이미 퇴직해 한가로운 성격으로 매일 독서나 산책을 즐기는 조용한 스타일이었다. 어머니는 젊었을 때는 커리어 우먼이었고 호탕한 성격으로 남편에게 엄격하면서도 친화력이 강한 사람이었다.두 분 모두 차분한 듯하면서도 내면에 장난기를 숨기고 있는 아들을 낳을 것 같진 않았는데 이게 바로 유전자의 신비인가 싶었다.하지만 어머니가 그렇게 그녀를 좋아해 주는 모습에 문지원도 안심했다. 확실히 시부모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증거였다.한편 문지원의 아버지는 지석훈과 따로 대화를 나눈 이후부터 정확히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몰라도 그에 대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