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이현은 주변을 빙 둘러봤다. 그의 침실보다도 작은 집안에는 온지유의 물건만 놓여 있었다.깔끔한 것을 좋아하는 그녀는 늘 집 안을 깨끗하게 정리해 놓았다. 그래도 현관에 놓여 있는 복슬복슬한 토끼 슬리퍼는 약간 놀라웠다.온지유는 어색한 표정으로 슬리퍼를 거두며 물었다.“다 봤어요?”여이현은 두 사람만 앉을 수 있는 소파를 바라보며 되물었다.“여기서 지내는 거 괜찮아?”“네.”“가구도 모자란 집인데 괜찮긴. 도우미랑 같이 살다가 이런 데서 산다는 게 말이 돼? 어차피 당분간 이혼하지 못할 것 같으니까, 그냥 내 집에 돌아가자.”“아직도 이혼하겠다는 말이 장난 같아요? 저는 싸우고 가출한 게 아니에요!”온지유는 그가 이런 식으로 달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게 없다는 것을 알았으면 했다. 이혼 얘기는 가벼운 마음으로 꺼낸 것이 아니었다.“다 봤으면 나가요. 저 내일 출근해야 하니까요.”“남편이 아내 집에 있는 게 뭐가 문제야? 자꾸 그러면 동네방네 소문 내 버릴 거야.”“도대체 뭘 원하는 건데요?”온지유는 인내심이 바닥났다. 이제 와서 여이현이 고집을 부릴까 봐 걱정되기도 했다.반대로 여이현은 다리를 꼬고 앉으며 덤덤하게 눈썹을 튕겼다.“뭐 딱히 원하는 게 있는 건 아니고, 분가가 말이 안 되는 것 같아서. 내가 여기에서 지내면 분가 안 해도 되는 건가? 편안한 생활도 지겹던 참인데, 가끔 평범하게 지내보는 것도 나쁘지 않지.”“여이현 씨!”온지유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이현 씨는 이런 곳에서 지내지 못할 거예요. 그리고 침대도 일인용이에요. 당장 내 집에서 나가요!”“내가 못 지낸다고 어떻게 확신해? 그 말을 들으니 더 증명해 보이고 싶네.”말을 마친 그는 곧장 온지유의 침실로 향했다. 소녀다운 분위기로 꾸며진 침실에는 핑크색으로 가득했다. 참대에는 토끼 인형도 놓여 있었다.그와 함께 있을 때와는 전혀 다른 스타일이었다.그가 거리낌 없이 들어가는 것을 보고, 온지유는 어쩐지 나체를 보이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어떻게 해야
“...”온지유는 직접적으로 대답하기를 포기하고 말을 돌렸다.“여기엔 이현 씨 물건을 놓을 자리가 없어요.”여이현은 주변을 빙 둘러보더니 찬장을 열어봤다. 그 속에는 자그마한 공간이 남아 있었다.“여기 두면 되겠네. 난 아무래도 괜찮아. 배 비서!”“네!”배진호는 눈치 빠르게 여이현의 옷을 걸기 시작했다. 0.1초라도 고민하면 일자리를 잃는 것처럼 말이다.온지유는 자신들의 관계가 변한 것 같으면서도 안 변한 것 같았다. 그들은 이혼하지도, 선을 긋지도 않았다. 반대로 여이현은 자꾸만 더 가까이 다가오려고 했다.정리를 끝낸 배진호는 뒤로 물러났다. 온지유가 말없이 가만히 있는 것을 보고 여이현이 먼저 말했다.“아까 아무것도 안 먹어서 배고프지? 우리 뭐라도 좀 먹을까?”울분이 치밀어 올랐던 온지유는 밥 먹고 싶은 기분이 전혀 없었다.“배 안 고파요.”“그래도 먹어야지. 애는 배가 고프대.”여이현은 그녀가 심술부리며 하는 말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저는 주로 직접 해 먹어요. 이현 씨의 입맛에는 맞지 않을 거예요.”“내가 해줄게.”여이현이 말했다. 그리고 온지유의 깜짝 놀란 표정을 무시한 채 옷소매를 위로 올리며 주방으로 걸어갔다.장은 배진호가 이미 봐왔다. 배진호가 남겨둔 봉투 안에는 야채와 통닭이 있었다. 아직은 무슨 요리를 하려는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이현 씨가... 요리를? 손질까지 필요한 거라면 못할 것 같은데.’그녀는 딱히 말리지 않았다. 여이현이 스스로 포기하기를 기다리는 편이 나을 것 같았던 것이다.그녀가 꿀물이라도 타 마시려고 꿀을 들어 올리자 배진호가 쏜살같이 다가왔다.“제가 할게요, 사모님.”“사모님이라고 부르지 않기로 했잖아요.”“그건 회사에 있을 때의 얘기죠. 사석에서는 당연히 사모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맞습니다.”배진호는 진지하게 말하며 꿀물을 타기 시작했다. 태도는 여이현을 대할 때와 똑같이 공손했다.온지유는 배진호가 타 준 꿀물을 받아서 들고 소파에 앉았다. 시간
온지유는 여이현에게서 신경을 끄고 몸을 돌리려고 했다. 이 순간 여이현이 몸을 돌리다가 그녀를 발견하고 말했다.“거의 다 되어가고 있어. 배고파?”온지유는 발걸음을 멈추고 여이현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제가 원하는 건 이현 씨가 빨리 나가는 것밖에 없어요.”“10분이면 돼.”여이현은 당당하게 동문서답했다. 그리고 온지유의 말에 대답하고 싶지 않은 듯 다시 몸을 돌려 요리에 집중했다.10분 후, 그는 뜨끈뜨끈한 삼계탕을 들고나왔다. 냄비를 식탁에 내려놓고 손을 닦은 그는 온지유를 바라보며 말했다.“다 됐어. 이제 와서 먹어.”온지유는 말없이 그가 두 시간 동안 준비한 삼계탕을 바라봤다.‘임산부에게 좋은 음식이라니... 누가 보면 아이의 존재를 받아들인 줄 알겠어.’온지유는 조용히 걸어가서 그의 앞에 앉았다. 그가 뚜껑을 열자 모락모락 김과 함께 고기와 약재의 향기가 퍼졌다.“꽤 훌륭해 보이지?”여이현은 자신의 작품이 아주 만족스러운 모습이었다.두 사람은 식탁에 마주 앉았다. 좁은 집안에 마주 앉아 있자니 다정한 신혼부부가 된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온지유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숟가락을 들었다.“아까 임산부한테 좋은 음식이라는 글을 봤어요.”여이현은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요리는 누구나 할 줄 알았다. 간장계란밥도 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가? 하지만 삼계탕처럼 제대로 된 음식은 그도 처음이었다.“내가 떠줄게.”그는 닭다리와 국물을 그릇에 덜어줬다. 얼마 전 아이를 지우라고 요구하던 때와는 전혀 다른 다정한 모습이었다.온지유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그건 아이를 받아들이기로 한 건가요?”여이현은 잠깐 멈칫하며 그녀의 배를 바라봤다. 그러고는 어두운 표정으로 그릇을 건네줬다. 그러나 온지유는 전혀 먹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저는 이걸 먹을 수 없어요. 아이를 원하지 않는 이현 씨가 무슨 짓을 할 줄 알고요.”여이현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온지유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
여이현은 미간을 찌푸리며 차갑게 말했다.“우리 사이의 일에 왜 자꾸 다른 사람을 언급하는 거야?”“노승아 씨가 다른 사람이었어요? 하도 진하게 엮이길래 저는 아닌 줄 알았죠. 이현 씨가 좋아하는 사람이랑 만나게 이혼도 해주겠다는데, 뭘 더 바라는 거예요?”“네 항공권을 말하는 거야?”여이현은 온지유가 남겨놓은 항공권을 꺼내 들었다. 그녀는 그와 함께 F국에 갈 것처럼 해놓고, 결국에는 그와 노승아의 이름으로 항공권을 끊었다.세상에 외도를 부추기는 아내는 온지유 밖에 없을 것이다.온지유는 힐끗 보면서 물었다.“안 갔어요?”여이현은 그녀가 보는 앞에서 항공권을 갈기갈기 찢었다. 그러고는 싸늘하게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넌 애 데리고 도망갈 생각밖에 없지? 나를 위하는 것처럼 말해놓고 결국에는 네가 원하는 대로만 하겠다는 거잖아.”그는 주변을 빙 둘러봤다. 온지유가 이런 곳에서 살았다고 생각하자 웃음만 피식 나왔다.“그렇게 해서 뭘 얻는 건데? 코딱지만 한 오피스텔? 아니면 널 보러 오지도 않는 애 아빠? 그 남자 한 번도 여기 온 적 없지?”여이현은 핏줄이 튀어나올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 이렇게라도 분노를 억누르려고 말이다.온지유는 말없이 머리를 돌렸다.“말 안 해도 알아. 그 남자는 온 적 없어.”여이현은 이를 악물었다.“그게 이현 씨랑 무슨 상관인데요?”온지유는 이 화제에서 벗어나고 싶기만 했다.“너는 내 아내야! 어떻게 상관이 없어! 평소에는 그렇게 똑똑하게 굴더니 왜 그런 쓰레기한테 마음을 줬어? 설마 내가 다른 새끼 자식을 키워줄 거로 생각한 건 아니지?”“저는 지금 혼자 살고 있어요. 제 결정은 이미 명백하게 보여준 것 같은데요.”“내 허락 없이는 절대 안 돼!”여이현은 단칼에 거절해 버렸다.“그렇다면 더 말할 것 없겠네요. 이현 씨가 뭘 원하는지 알겠어요. 위자료 한 푼 받지 않고 이혼해 줄게요. 그러면 가문에도 영향이 없겠죠?”“당장 가서 애 지워!”여이현이 또다시 말했다. 그의 눈빛으로 추측하건대,
말을 마친 온지유는 방으로 뛰어 들어가 문을 쾅 닫아버렸다. 거실에는 정적이 맴돌았고, 여이현은 의자에 앉은 채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그는 온지유가 왜 이 아이를 낳으려고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얼굴도 모르는 남자의 어떤 점이 좋은지 의아했다.그 남자는 그녀가 임신한 것도 모르고, 이 작은 아파트에 사는 것도 모르고, 그녀에게 관심을 가진 적도 없지 않은가.동시에 그는 일종의 패배감을 느꼈다. 그가 무엇을 하든 온지유는 만족하지 않았다. 그가 직접 만들어준 삼계탕도 독이 들었다고 생각하면서 한 입도 맛보지 않았다.그는 덴 손을 바라보며 스스로가 너무 멍청하게 느껴졌다. 마음이 떠난 여자를 기쁘게 하려고 하는 자신이 바보 같았다.여이현의 얼굴은 점점 차가워졌고, 결국 일어나 집 밖으로 나갔다.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그를 발견한 배진호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동거하기로 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나왔으니 말이다.배진호는 의아한 말투로 물었다.“대표님, 식사 중이 아니었나요?”여이현은 냉랭한 얼굴로 차갑게 말했다.“됐어요. 자기가 안 먹겠다는데 내가 뭘 어떡하겠어요.”그는 성난 발걸음으로 걸어갔다. 배진호는 이게 무슨 영문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조금 전까지 잘 지내지 않았던가? 변화는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찾아왔다.그는 급히 여이현의 발걸음을 따라갔다.여이현은 차에 올라타서 힘껏 문을 닫았다. 그리고 넥타이를 잡아당기고 단추까지 두어 개 풀었다. 그런데도 답답함은 가시지 않았다.그는 담배에 불을 붙이며 짜증을 해소하려 했다. 곁에 있는 사람은 감히 말도 못 걸 무서운 모습이었다.이때 전화가 울렸다.여이현은 전화를 힐끗 보고 담배를 깊게 한 모금 빨아들인 후 수락 버튼을 눌렀다.“여보세요.”“여이현, 너 또 어디 갔어? 내가 한참 찾았잖아.”전화 건너편에서 최주하는 웃으면서 말했다.여이현은 잠시 침묵하며 담배를 더 피우다가 담담하게 대답했다.“나 지금 집에 없어.”“그건 당연히 알고 있지.”스포츠카를 몰고 있
자고로 남자는 반항심이 있기 마련이다. 다른 사람이 대신 선택한 여자가 눈에 차기는 어려웠다.그러나 여이현은 달라졌다. 그는 점점 더 온지유를 좋아하고 있었다.“두 번째는 불가능해. 온지유는 다른 남자를 좋아하거든. 벌써 애까지 있어.”이 말을 들은 최주하는 잠깐 멈칫했다. 일단은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확실해?”“확실하지 않으면 너한테 말하겠어?”여이현의 대답을 들은 최주하는 잠시 멈췄다가 다시 물었다.“네 아이가 아니라는 것도 확신하고?”그는 온지유에게 다른 남자가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었다.“나는 온지유랑 관계를 가진 적이 없어!”여이현은 단호하게 말했다.“그래. 내가 졌다. 내가 졌어. 지유 씨 같은 여자를 곁에 두고 아무 일도 없었던 거면, 넌 타고난 스님 감이야. 아주 훌륭한 인재 납셨어.”“...꺼져.”안색이 어두워진 여이현은 전화를 바로 끊어버렸다. 괜히 더 말했다가 열만 받을 바에는 그냥 끊는 게 나았다.화는 담배 한 대 전부 타들어 간 다음에도 가라앉지 않았다. 그는 차창을 통해 위층을 바라봤다. 온지유가 있는 층의 전등은 아직 꺼지지 않았다.‘설마 지금도 울고 있나?’여이현은 갑자기 초조해졌다. 마치 수많은 개미가 가슴을 갉아 먹는 것처럼, 전혀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그는 입술을 꾹 다물며 다시 차 문을 열었다. 배진호는 그가 다시 올라가려는 줄 알고 자연스럽게 말했다.“대표님, 이제 화가 좀 가라앉으셨나요.”여이현이 차가운 눈빛을 보내자, 배진호는 흠칫 놀라며 입을 막았다. 그런데도 말은 멈추지 않았다.“사모님 많이 힘드실 텐데 대표님이 가서 위로해 주세요. 잘 달래주시면 모든 일이 다 해결될지도 몰라요.”급하게 덧붙인 듣기 좋은 말이었다.여이현의 머릿속에는 온지유의 붉은 눈시울로 가득했다. 더 이상 다른 생각을 할 여력은 없었다. 물론 배진호가 한 말도 들리지 않았다.그는 출입문을 닫지 않고 나갔었다. 온지유는 줄곧 방에서 나오지 않았는지 출입문이 그대로 열려 있었다.식탁 위에서 싸늘
온지유가 일어났을 때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눈가는 여전히 촉촉했다.어젯밤 싸웠던 일이 떠오른 온지유는 곁으로 손을 뻗었다. 누군가 누웠던 흔적은 없었다. 아무래도 여이현은 어제 나간 대로 돌아오지 않은 모양이었다.그녀는 몸을 일으켜 옷장을 확인했다. 여이현의 옷이 그대로 있는 걸 봐서 완전히 포기한 건 아닌 모양이었다. 기분은 더욱 암울해졌다.욕실에서 샤워하고 나온 그녀는 바로 출근했다. 방송국에서 채미소는 큰 소리로 외쳐댔다.“내 앞길 막지 마요! 여기 나보다 더 중요한 일을 하는 사람이 있어요?”오늘의 그녀는 폭탄을 집어삼킨 것처럼 불을 뿜어냈다.“미소 씨, 왜 그래요? 안 좋은 일이 있다고 해서 남한테 화풀이 아는 건 아니죠.”동료가 기분 나쁜 듯 말했다.그러나 채미소는 언제나 이랬다. 특히 기분 나쁠 때는 눈에 뵈는 것이 없었다.“안 좋은 일? 하, 내 앞길을 막아놓고 무슨 말이 이렇게 길어요. 난 중요한 인터뷰를 하러 가는 길이에요. 당신 따위가 방해할 스케일이 아니라고요.”“미소 씨가 여이현 대표님 인터뷰 못 따낸 거, 우리가 모를 줄 알아요? 따냈으면 여기서 화풀이하지도 않았겠죠. 동네방네 소문내고 다니기 바빴을 테니까.”채미소는 미간을 팍 찌푸리더니 언성을 더욱 높이며 말했다.“확정 안 됐을 뿐이지 못 따낸 거 아니에요! 앞으로 기회가 있다고요! 당신은 뭐 할 수 있을 줄 알아요? 다들 못하는 일이니까 내가 하는 거예요! 실력도 없으면서 입만 살았네요!”동료도 화가 나 보였지만 아무 말도 못 했다. 채미소의 말마따나 그녀는 방송국의 기둥이었기 때문이다.이때 온지유가 들어왔다. 채미소와 싸우고 있는 동료 빼고는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다들 채미소가 무서운 눈치였다.“왜 이렇게 시끄러워요? 다들 일 안 해요?”안정희가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채미소는 곧바로 달려가서 고자질하기 시작했다.“편집장님, 저 하루 종일 고생해서 여이현 대표님을 만나고 돌아온 거 아시죠. 근데 인터뷰를 하루 만에 못 따냈다고 비웃는 사람이 있
채미소는 여전히 화가 나 있었다. 하지만 이번 인터뷰에서 온지유의 도움이 꼭 필요했다. 그녀는 또 여이현을 잘 설득해서 지난번 잃어버린 체면을 되찾아야 했다.안정희가 떠난 다음 그녀는 온지유에게 다가가 한결 부드러운 어조로 말을 건넸다.“지유 씨, 어제 말했던 일 다시 생각해 봤어요?”“답은 어제 이미 드렸잖아요.”온지유는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채미소는 속으로만 화를 삭였다.온지유는 만만한 동료들과 달랐다. 그러나 이번 일이 끝나고 나면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할 생각이었다.“이렇게 하는 건 어때요? 이번 일은 우리가 같이 한 걸로 해요. 언제까지 블로그에 글만 쓰고 있을 거예요. 지유 씨도 높은 자리에 가고 싶죠? 나 채미소예요. 나만 잘 따라오면 1년 안에 내 위치에 오를 수 있게 해줄게요.”이 말을 듣고 온지유는 가볍게 웃었다. 직장은 냉혹하다. 누군가 무책임하개 한 말까지 믿으면 안 되는 법이다.그녀는 채미소를 올려다보며 말했다.“미소 씨가 원하는 대로 양보해 줬으면 되는 거 아니에요? 제가 왜 또 따라가야 하죠?”채미소는 인내심이 바닥난 듯 당당하게 말했다.“그러는 온지유 씨는 뭐가 그렇게 잘났어요? 잊었나 본데, 이번 일은 내가 따온 거예요!”그녀는 ‘양보’라는 말을 용납할 수 없었다. 뭐든 직접 손에 넣어야만 실력을 입증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온지유는 서류를 정리하며 말했다.“채미소 씨가 뭐라고 하든 상관없어요. 아무튼 저는 이 인터뷰 하지 않을 거예요. 저는 당신 뒤만 졸졸 따라다닐 정도로 유치하지 않거든요. 적당히 얼렁뚱땅 넘어갈 생각은 말아요. 그리고 채미소 씨 뭐든 혼자 잘 해내는 능력자라고 하지 않았나요? 그러면 이번에도 스스로 실력을 입증해 봐요.”온지유는 다시 한번 채미소의 요청을 거절했다. 이쯤 되니 채미소도 그녀가 자신과 대립하려고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도와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아영 씨, 잠깐 저 좀 봐요.”온지유는 옆에서 타자하던 공아영을 향해 말했다.“네.”공아영은 하던
하지만 감동보다는 오히려 속이 울렁거렸다. 속이 울렁거리는 느낌에 문지원은 당장 얼굴이 일그러지며 화장실로 달려갔다. 지석훈도 뒤따라 들어오며 물었다.“속이 안 좋아?”“그렇진 않은 것 같아요. 요즘 세 끼 식사도 꽤 규칙적으로 하고 날것 이거나 차갑거나 매운 음식도 먹지 않았는데...”문지원은 배를 움켜쥐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지석훈도 그녀와 같은 생각을 한 듯 방으로 가서 임신 테스트기를 가져왔다.문지원은 놀라며 물었다.“언제 산 거예요?”지석훈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문지원은 아무 말이 없었다.5분 후, 그녀는 복잡한 얼굴로 다시 나왔다. 한 손은 여전히 배 위에 올려져 있었고 눈에는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했다.정말 임신한 것이다!그녀와 지석훈이 결혼한 지 겨우 3개월밖에 안 되었는데 이렇게 빨리 임신하다니.지석훈은 오히려 태연해 보였다. 하지만 입가에 감출 수 없는 미소를 보면 그 역시 겉모습처럼 평온하지 않고 흥분을 억누르고 있는 게 분명했다.“정말 임신한 거예요?”문지원은 아직 믿기지 않는 듯 물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이번 달 초에 생리가 끝났기 때문이다.“아마 생리가 끝난 후 며칠 사이일 거야.”지석훈의 목소리는 문지원에게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니 그녀의 귀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결국, 그녀는 병원에 가보기로 했다. 임신 테스트기는 가끔 틀릴 수도 있으니 이런 일은 직접 검사를 받아보고 확인해야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이다.그리고 그녀는 손에 든 검사지를 보고 완전히 할 말을 잃었다.의사는 마침 지석훈과 알고 지내던 사람이었다.“축하합니다, 지 원장님. 부인께서 임신 2주 차입니다.”“감사합니다.”지석훈은 침착하게 그녀를 부축하며 밖으로 나갔다.병원 진료실을 막 나오자마자 지석훈은 문지원을 품에 안았다.“너무 좋아. 우리 아이가 생겼어.”문지원은 남자가 미세하게 떨리는 모습을 보며 멍하
물론 손에 있는 일을 무턱대고 모두 남에게 맡기는 것은 너무 과한 부담을 주는 일이다.문지원은 비서를 사무실로 불렀다.“올해 25살이죠?”비서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그녀의 나이는 모두가 다 아는데 문지원 회장이 갑자기 이 얘기를 꺼낸다는 것은 혹시 소개팅을 시켜주려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비서는 고마웠지만 거절하며 말했다.“문 사장님, 저는 아직 젊어서 당장은 결혼할 생각이 없습니다.”“전 당신더러 결혼하라고 하는게 아니에요.”문지원은 펜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말했다.“그냥 평소에 잡다한 일들을 맡기고 싶어서요. 확인이 필요한 문서들은 평소에 굳이 내게 제출하지 않아도 돼요.”비서는 그 뜻을 이해했다.이건 곧 그녀에게 승진과 급여 인상을 주려는 것이다. 문지원이 그녀의 의견을 확인한 후 급여를 조금 올려줬고 비서에게 몇 명의 적합한 인재를 추가로 모집해서 예비 인력으로 두라고 지시했다.“평소에 내가 처리하지 못한 일들을 대신 처리해주고 만약 문제가 생기면 그때마다 보고하면 돼요.”비서는 한숨을 쉬며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그녀 혼자서 이렇게 많은 일을 하지 않아도 되어 다행이었다.일정이 정리되자 문지원은 업무에서 상당 부분 해방되었다.예전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바쁘게 일하다 보면 퇴근 시간이 되어도 일이 끝나지 않고 긴급 통지가 오면 또 회의를 위해 야근을 해야 했다.이제는 오후 4시 반쯤이면 일을 마치고 퇴근할 수 있게 된 것이다.비서가 몇 명을 더 찾아서 양성해 두었기에 업무가 적절히 분배되어 모두 바빠 죽을 정도가 아니라 적당히 딱 맞는 분량을 처리할 수 있었다.그 덕에 문지원은 지석훈과 함께 결혼 후의 삶을 더욱 즐길 수 있게 되었다.지석훈도 이에 매우 만족해했다.“널 주려고 선물을 챙겨왔어. 들어가서 한번 봐.”그가 집 문 앞에 다가서더니 걸음을 멈췄다.문지원은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안은 어두컴컴했다.“뭐 숨겨놨어요? 아직 불도 켜지 않았네요, 수상하게.”탁! 하며 불이 켜지자 거실의 모든
문지원은 이 주제가 다소 위험하다고 느꼈다. 비록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에게 물어본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자신과 배석훈이 결혼한 후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에 대해 말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돼지고기를 먹어보지 않았다고 해도 돼지가 뛰어다니 것을 본 적은 있을 것이다. 문지원은 그러면서도 반쯤 빚어놓은 만두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저,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이에 지석훈의 어머니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너희들도 이제 나이가 들었으니 아이를 가져야지. 평소에 좀 더 노력해야 한단다.”문지원은 잔소리를 듣고 나서 나오니 기운이 다 빠져있었다.시어머니는 문지원에게 정말 잘해주었다. 거의 마음을 쏟아붓는 수준이었다. 비록 문지원의 집안 사정이 좋은 것을 알면서도 혼수 때 오랜 세월 모은 돈으로 집 한 채를 사서 선물해 주었다. 사실 지석훈도 자기 집이 있었지만, 시어머니는 선물하고 싶다고 하셨다. “너희 집도 너희의 것이지만, 이건 내가 어른으로서 선물하는 거란다.”게다가 그 집에는 문지원의 이름도 함께 올려져 있었다.그래서 시어머니의 출산 독촉에도 문지원은 어쩔 수 없이 버텨야만 했다. 다행히도 시어머니는 어린 이들에게 엄격하게 구는 편은 아니었다. 만두를 빚을 때 한 번 그런 말을 했고 또 떠나면서도 지석훈을 불러 몇 마디 잔소리했다. 문지원은 그 모자간의 대화를 듣지 못했다.돌아가는 길에 문지원은 약간 궁금해져 지석훈에게 물었다.“나갈 때 어머니께서 뭐라고 하셨어요?”“정말 알고 싶어?”“네.”그러자 지석훈은 문지원의 머리를 숙이게 한 후 그녀의 흩어진 머리칼을 살며시 넘겨주며 귀 옆에서 낮게 속삭였다.“우리 아이를 빨리 낳으라고 하셨어.”남자의 낮고 진한 목소리는 얼굴을 붉히고 심장을 뛰게 만드는 약보다도 중독성이 강해 문지원의 귀가 금세 붉어지고 말았다.저녁이 되자 지석훈은 몸소 행동으로 보여주기 시작했다. 한 손으로 문지원의 머리를 받치고 이마를 맞대며 낮은 숨소리를 내쉬었다. 문지원은 마치 파도 속에 잠긴 것
그 눈빛 속에서 조용히 터져 나오는 그 소유욕. 마치 옛 시대의 군벌과 그의 부인 같았다. 그리고 사진작가는 우연히 그 장면을 목격한 운 없는 사람이 되어 몰래 촬영을 하고 있었다. 사진작가는 자신의 상상에 자극받아 목소리가 떨렸다.“지석훈 씨, 고개를 들어 카메라를 봐주세요.”지석훈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사진작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사진작가는 재빨리 셔터를 눌렀다. 그 후에도 그들은 여러 세트의 사진을 찍었고 찍은 사진들은 모두 문지원에게 하나하나 보여주었다. 문지원은 모든 사진에 다 만족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든 것은 민국 시대 주제의 사진이었다.“대략 며칠 안에 나오나요?” 그녀가 물었다.사진작가는 답했다.“빠르면 이삼 일정도 걸릴 겁니다. 그때 완성된 사진들을 택배로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개인적인 부탁이 하나 있는데 혹시 두 분께서 응해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바로 아까 찍은 사진 중 몇 장이 제가 개인적으로 아주 마음에 들어서 사진관 벽에 걸어두고 싶습니다.”문지원은 사진관에 들어올 때 봤던 사진 벽이 생각났다.“그 벽에 걸어두시겠다는 건가요?”“네.”사진작가는 그 벽은 사진관의 특별한 기념 및 홍보 방법의 하나라고 설명했다. 잘 나온 사진들은 사진 주인에게 동의를 구한 뒤 동의하면 벽에 전시한다고 한다..문지원은 옆에 있던 지석훈을 바라봤다. “저는 괜찮은데, 당신은요?” 지석훈도 아무 문제 없다고 했다.“마음대로 하도록 해.”며칠 후 문지원은 사진작가가 보내온 사진을 받아 소중히 간직했다. 하지만 그녀는 몰랐다. 그 사진관 벽에 전시된 사진들이 곧 사람들의 눈에 띄어 사진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간 것이다.잘생긴 남성과 아름다운 여인의 조합과 최상의 촬영 기술 덕분에 순식간에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었다.네티즌들은 저마다 아아 소리를 냈고 많은 사람이 댓글을 달았다. “마치 옛 시대의 군벌 부인 같다.”“완전 대박이다.”“3분 안에 그들의 모든 정보를 알고 싶다.” 하지만 이 모
문지원은 약간 마음이 움직였다.하지만 웨딩 촬영은 이미 여러 번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섬에서 몇 세트 찍었고 그 후 결혼식 현장에서 또 몇 세트 찍어 셀 수 없을 정도였다.게다가 이번 촬영은 개인 예약으로 진행되었는데 이 사진관이 꽤 유명하다고 들었다.물론 사진관 이름에 걸맞게 예약은 거의 하늘의 별 따기라고 한다..이 정도면 지석훈이 얼마나 큰 노력을 들여 예약을 잡았는지 알 수 있었다. 단순히 웨딩사진만 찍는 데 사용하기에는 너무 아까웠다.하지만 문지원 역시 이런 곳에 한 번도 와본 적이 없었기에 무엇을 찍어야 할지 몰랐다.“한번 보세요. 이건 저희가 예전부터 선보였던 스타일들이에요.”사진작가는 친절하게 앨범 한 권을 꺼내 보였다.앨범에는 이전 고객들이 이곳에서 찍은 사진들이 담겨 있었는데 정말 다양한 스타일이 있었고 모두 아름다웠다.이 사진관이 만들어낸 결과물은 정말 최고였다.문지원은 그중에서도 민국 시대 주제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이렇게 찍을 수 있을까요?”사진작가는 그녀가 가리키는 사진을 한 번 살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됩니다. 먼저 메이크업하고 옷을 갈아입으세요. 직원들이 촬영 스튜디오를 설치할게요.”옷은 사진관에서 준비한 것으로 하고 지석훈의 요구에 따라 전부 새 옷이었다.사실 문지원은 소품용 옷을 입는 것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어쨌든 한 번 입었다가 나중에 벗으면 되는 거고 몸에 달라붙지 않아서 안에 옷을 받쳐 입을 수도 있었다.하지만 지석훈은 직업병이 발동했고 그런 건 용납할 수 없었다.결국, 문지원은 어쩔 수 없이 그의 의견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급히 새 옷을 가져와야 했기 때문에 원래 걸리던 시간에서 15분이 더 추가되었고 메이크업 등 기타 과정도 진행해야 했다.문지원이 모든 준비를 마치고 나왔을 때는 이미 2시간이 지난 후였다.그러나 결과는 확실했다.곧은 치파오가 그녀의 아름다운 몸매를 감쌌고 문지원은 옷자락을 살짝 들어 올렸다. 마치 지난 옛 시대의 그림 속에서 걸어 나온 듯한
결혼 후 문지원은 휴가를 내서 신혼여행을 갈까 고민해 본 적이 있었다.하지만 요즘 지석훈이 거의 계속 병원에 머무르며 집에 돌아오지 않는 것을 떠올리며 본의 아니게 한숨이 나왔다. 비록 이미 익숙해졌긴 했지만 실망을 감추기는 어려웠다.비서도 그녀에게 물었다.“문 사장님, 신혼여행 가고 싶지 않으세요? 제 동창 중 한 명이 며칠 전에 결혼했는데 요즘 여기저기서 신혼여행 정보를 알아보며 준비 중이에요. 신혼여행이 없는 결혼은 반은 실패한 거랑 마찬가지라고 하더라고요.”그 말을 들은 문지원은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제대로 볼 생각조차 들지 않았고 비서는 무언가를 눈치챈 듯했다.“그렇지 않으면... 문 사장님, 지 의사님이 일하시는 곳에 한 번 가보시는 건 어떠세요?”그녀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어쨌든 문지원은 요즘 정신이 산만하여 업무에 집중할 기색도 없었다.문지원은 비서의 시선 속에서 정신을 차렸다. 요 며칠 동안 집에 돌아와도 지석훈을 보지 못해 한참 혼란스러워했던 자신을 깨달으며 약간 부끄러워졌다.“그건 나중에 얘기하고 기획서 한 부 복사해 가져다주세요.”점심 무렵, 문지원은 막 일을 끝내고 밥 먹으러 가려던 찰나, 핸드폰에 지석훈의 메시지가 떴다. 같이 밥을 먹자는 메시지에 문지원은 미소를 지었다. 멀리서 이 장면을 본 직원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웃음을 터뜨렸다.문지원은 재빨리 열쇠를 챙기고 회사를 떠났다. 지석훈은 그녀를 새로 오픈한 가게로 데려갔다.식사를 마친 후 문지원은 지석훈을 바라보며 머뭇거리다가 물었다.“병원에 다시 돌아갈 거예요?”“응?”지석훈은 눈썹을 치켜들며 고의적으로 물었다. “내가 돌아가길 바라는 거야?”그 말을 들은 문지원은 순간 당황했다. 사실 그녀는 지석훈이 자신과 좀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주길 바랐는데 이제 막 결혼한 신혼부부임에도 불구하고 각자 업무에만 매달려 밤에야 겨우 함께 잠자리에 들 수 있는 상황이었다.하지만 수줍음이 많은 그녀는 그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지 못했다.지석훈은
예전에는 이런 일이 있을 때면 지석훈은 항상 선을 지켰지만 오늘 밤엔 조금 달랐다. 그는 그녀를 침실에서 욕실로 다시 침대로 옮겨가며 몸 곳곳에 뜨거운 입맞춤을 했다.다음 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도 문지원은 여전히 몸속 깊이 스며든 감각이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그리고 그녀는 예상대로 휴가를 냈고 이틀이 지나서야 회사에 다시 나왔다.회사 사람들은 이미 예상이라도 한 듯 문지원이 출근하자 하나같이 말했다.“문 사장님, 결혼 축하드려요.’문지원은 무려 사흘이나 결근했지만 다들 그 사흘 동안 무얼 했는지는 굳이 말 안 해도 짐작이 갔다.분명 부부 생활이 아주 좋았겠지, 아니었으면 일까지 내팽개치고 안 나왔을 리가 없다.문지원은 직원들의 부담스러운 시선에 얼굴을 들 수도 없어 그저 아무렇지 않은 척할 수밖에 없었다.그래도 지난번에 당한 적이 있었던 터라 문지원은 이제 출근 전에 거울 앞에서 꼼꼼히 점검했다.몸에 키스 자국이 드러나지 않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하고 회사를 향했다.그렇지 않았다면 그 흔적들을 들켰을 경우 정말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문지원이 예상치 못했던 건 며칠 지나지 않아 결혼을 축하하는 선물이 회사로 배달됐다는 것이다.문지원은 처음에 여울이 보낸 거라고 생각했지만, 물어보니 아니었다.택배 상자의 외관을 살펴봐도 발신자가 적혀 있지 않아 더욱 수상했다.“이거 가져온 사람이 누가 보낸 건지 말했어요?”문지원이 로비 직원에게 물었다.로비 직원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냥 두고 바로 가버렸어요.”문지원은 뭔가 직감적으로 찜찜한 마음이 들어 그 택배를 챙겼고 사무실에 들어와서야 상자를 열었다.그 안에는 브로치 하나와 축하 카드 한 장이 들어 있었다.문지원은 축하 카드를 집어 들어보니 카드 위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결혼 축하해요.”글씨체는 아주 정갈하고 예뻐 여성의 필체 같았다.그녀는 곧바로 짐작이 갔다.문지원은 그 브로치를 지석훈에게 보여주자 그는 눈빛이 살짝 흔들렸지만 아무 말 없이 브로치
여울은 아직 최주하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최주하도 쉽게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문지원이 알기로 여울은 마음이 여린 사람이었고 결국 받아들이게 되는 건 시간문제일지도 몰랐다.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친구 일에 깊이 관여하는 것도 괜히 어색하고 조심스러웠다.게다가 얼마 전 지석훈이 슬쩍 귀띔하듯 말했다.“며칠 전에 여울 씨가 병원에 재검진받으러 왔는데 주하가 데리고 왔었어.”그 말을 듣고 문지원은 혀를 끌끌 찼다.평소에 말도 없고 조용하던 여울이 은근히 비밀 많은 타입이었던 모양이었다.그렇게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 어느덧 다음 달 중순이 되었다.지석훈은 아예 와인 농장을 통째로 빌려 며칠에 걸쳐 그곳을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꾸며놓았다.결혼식을 올릴 장소는 바로 거기였다.그 와인 농장은 웬만한 호텔 못지않게 컸고 내부에는 수년간 숙성된 고급 와인들이 그대로 보관되어 있었고 결혼식 날 손님들이 오면 바로 꺼내어 대접할 수 있을 정도였다.그들은 결혼 소식을 널리 알리진 않았다.이건 문지원이 원한 방식이었다.그녀는 온 세상에 떠들썩하게 알리는 그런 결혼식보다는 가까운 가족과 친구들만 초대해서 조용히 축하받는 걸 선호했다.행복은 굳이 남들에게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니까.그런데 결혼식이 한창일 때 지석훈이 무대 위에서 다시 한번 프러포즈했다.해변에서 했던 프러포즈보다 훨씬 더 진지하고 진중한 분위기였다.“하고 싶은 말이 정말 많지만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어서... 예전엔 내가 사랑인 줄도 모르고 놓쳐버렸던 순간이 많아. 이제는 더 이상 놓치고 싶지 않아. 이렇게 내 곁에 있어 줘서 고마워. 앞으로 남은 인생... 너랑 함께할 수 있어서 정말 행복해.”그의 말이 끝나자 하객들 사이에서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문지원은 무대 위에서 입을 손으로 가리고 눈물을 흘렸다.식이 끝날 무렵, 문지원은 멀리서 검은색 카이엔 SUV가 그녀의 친구 여울을 데리러 오는 걸 보았다.차창이 천천히 내려가자 예상대로 그 안에 앉아 있는 사람은 최주하였다
문지원은 문득 자신이 계획에 철저히 걸려들었다는 생각에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처음부터 계획한 거죠?”“응.”지석훈은 미소 지으며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사실, 그는 그녀를 향한 마음을 오래전부터 숨겨온 것이었다....해변에서의 프러포즈 이후 문지원에게 찾아온 가장 큰 변화는 손가락에 반짝이는 반지가 생겼다는 점이었다.이 반지는 지석훈이 특별히 맞춤 제작한 것이었다. 그녀는 우연히 그의 휴대폰을 보다가 두 달 전에 이미 주문이 들어가 있었다는 구매 기록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그렇게 오래전부터 준비해 왔다니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두 사람의 결혼 소식을 접한 지석훈의 부모님은 곧바로 혼인신고부터 하라고 재촉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문지원은 우연히 지석훈의 어머니가 그를 붙잡고 타이르는 말을 듣게 되었다.“네 아빠랑 난 애초에 너한테 기대도 안 했어. 하루가 멀다고 병원에서 살다시피 하니 너 같은 애한테 누가 시집오겠나 싶었거든. 그런데 다행히 네가 능력 있어서 지원이 같은 좋은 아이를 데려왔으니 얼른 확실히 붙잡아야지. 빨리 혼인신고부터 해. 나중에 그 아이가 너 버리고 떠나버리면 그땐 어디 가서 울어도 소용없어!”문지원은 그 대화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그런데 신기한 건 지석훈이 워낙 점잖고 진지한 사람이어서 집안 분위기도 매우 조용할 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점이었다. 아버지는 이미 퇴직해 한가로운 성격으로 매일 독서나 산책을 즐기는 조용한 스타일이었다. 어머니는 젊었을 때는 커리어 우먼이었고 호탕한 성격으로 남편에게 엄격하면서도 친화력이 강한 사람이었다.두 분 모두 차분한 듯하면서도 내면에 장난기를 숨기고 있는 아들을 낳을 것 같진 않았는데 이게 바로 유전자의 신비인가 싶었다.하지만 어머니가 그렇게 그녀를 좋아해 주는 모습에 문지원도 안심했다. 확실히 시부모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증거였다.한편 문지원의 아버지는 지석훈과 따로 대화를 나눈 이후부터 정확히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몰라도 그에 대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