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이 비서님은 지금 디자인 시안조차 없잖아요. 저는 회사 생각해서 이러는 거예요!”소예린의 목소리에는 다급함이 묻어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한 행동이 전부 회사를 위한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방현준은 눈을 가늘게 뜨며 매섭게 그녀를 노려보았다.그제야 소예린은 방현준이 더 이상 이 대화를 이어 나가고 싶지 않아 한다는 걸 깨달았다.소예린은 얼른 주미애의 팔을 잡고 사무실 밖으로 나왔다.주미애는 얼굴 가득 분노를 담고 불만을 터뜨렸다.“소예린, 이게 도대체 무슨 짓이야?”사실 주미애는 이전에 이연우가 찾아왔을 때 계약을 진행하려 했었다.하지만 소예린이 굳이 이연우에게 본때를 보여주자며 만류했다.그런데 이제 와서 방현준은 모든 일은 이연우에게 논의하라고 했다.‘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격인가?’“미애 언니, 걱정하지 마세요. 약속한 건 반드시 지킬 거예요.”소예린은 서둘러 그녀의 화를 달랬다.‘어차피 이연우는 아직 디자인 시안도 못 냈을 테니 분명 안절부절못하고 있겠지. 만약 이연우가 일을 그르친다면 내가 그 자리를 차지할 수도 있어. 그때야말로 대표님의 눈길을 사로잡을 기회야.’“저랑 계약하면 절대 손해 보지 않게 할게요.”소예린은 그렇게 다짐하며 주미애를 데리고 자신의 사무실로 향했다.‘대회에는 두 작품을 내놓을 수 있어. 내가 이렇게 나서는 건 전부 회사를 위해서고 대표님을 위해서야.’소예린은 조금의 우여곡절이 있어도 결과적으로 회사에 이익을 안겨주고 자신의 능력을 증명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두 사람의 모습이 복도 끝으로 사라진 직후 이연우가 정성껏 준비한 디자인 시안을 들고 대표실로 들어섰다.문을 열고 들어서자 강한 향수 냄새가 코를 찔렀다.“언제부터 이런 향수를 좋아하셨어요?”이연우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익숙한 냄새 같긴 한데 어디서 맡았는지 기억나지 않았다.그녀는 시선을 두리번거리며 향기의 출처를 찾으려 했다.“제거 아니에요.”방현준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더니 창가로 가서 창문을 활짝 열었다.
대회를 앞두고 소예린은 주미애를 데리고 진양그룹 본사로 향했다.대표실 안에서 소예린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주미애를 소개했다.“대표님, 이분은 스텔라엔터테인먼트의 주미애 씨예요. 이번 쇼의 모델로 계약을 고려 중이라 직접 모시고 왔습니다.”방현준은 고개조차 들지 않고 손에 들린 일에만 집중한 채 무심하게 말했다.“그건 이 비서 소관이니 그쪽과 상의하도록 해요.”주미애는 은근한 미소를 지으며 우아하게 다가갔다.“대표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저 역시 늘 진양그룹과 협업하고 싶었어요. 제 이미지와 귀사의 이미지는 천생연분 아닐까요?”방현준은 눈살을 찌푸린 채 주미애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겉치레 뒤에 숨겨진 진짜 속내가 무엇인지 곰곰이 헤아렸다.주미애는 일부러 요염한 자세를 취하며 말을 이었다.“대표님, 전에 이연우 씨가 저를 찾아오긴 했지만 정작 성의는 보이지 않더군요. 소 부장님이랑 각별한 사이라서 귀사에 다시 한번 기회를 드리고 싶었습니다.”그 말에 방현준의 뇌리에 얼마 전 종생천에서 돌아왔을 때 이연우가 지었던 미소가 떠올랐다.이미 계약이 성사된 줄 알았는데 주미애가 거절한 모양이었다.지금 이렇게 소예린과 함께 나타났다는 건 소예린이 중간에서 이간질한 것이 분명했다.“그런데 이연우 비서님은 너무 속이 좁더군요. 대표님, 새로운 인재로 교체하실 생각은 없으신가요?”눈부신 미소를 지은 주미애는 마치 자신이 방현준의 마음을 사로잡으리라고 확신하는 듯했다.하지만 방현준은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이 비서조차 인정하지 않은 사람을 우리 진양그룹에서 계속 필요로 할거라고 생각하시는 건가요?”주미애의 얼굴이 굳어졌다.예상치 못한 직설적인 반응에 눈이 휘둥그레진 주미애는 말문이 막힌 듯 아무 말도 잇지 못했다.자신의 매력 하나로 손쉽게 계약을 따낼 거라 믿었던 그녀의 오만은 단숨에 산산조각이 났다.순간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소예린 역시 지금 상황에 당황함을 감추지 못했다.‘설마 방현준이 이연우를 위해 회사의 이익까지 저버릴 줄이야.
흔들리는 그녀의 눈빛에서 자신감이 없다는 게 뻔히 드러났다.이연우가 차갑게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그럼 예전에 당신이 상 받았던 그 원고랑 한번 비교해 볼까요?”이연우의 날카로운 시선에 여자의 마음속에 두려움이 스며들었다.그 원고는 전에 윌리엄을 찾아갔을 때 바닥에서 주운 것이었다.‘이연우가 어떻게 눈치챈 거지? 정말 비교라도 한다면 난 끝장인데...’여자는 이를 악물고 식은땀을 흘리며 겨우 입을 열었다.“이 비서님, 저는...”“이 비서님, 참 대단하시네요. 제 직원에게 협박까지 다 하고.”또각또각 울리는 하이힐 소리와 함께 소예린이 모습을 드러냈다.고요한 복도에 울려 퍼지는 그 맑은 구두 소리가 유난히 날카롭게 들렸다.소예린이 나타나자 두 여자는 마치 구세주라도 만난 듯 잽싸게 소예린 뒤에 숨어들었다. 눈빛에는 의지와 구원을 바라는 기색이 가득했다.“소 부장님은 남의 디자인을 훔친 도둑을 감싸겠다는 건가요?”이연우의 시선이 곧장 소예린을 겨눴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단호함이 배어 있었다.“도둑이요? 어디에 도둑이 있다는 거죠? 이 원고들은 전부 우리가 피땀 흘려 만든 결과물이에요. 이 비서님은 왜 도둑이라고 몰아가는 거죠?”소예린은 반문하며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그녀의 말투는 마치 이연우의 근거 없는 비난을 조롱이라도 하듯 노골적이었다.‘2년이나 지나도 윌리엄은 아무런 문제도 제기하지 않았는데 이연우는 왜 여기서 떠드는 거야? 게다가 거장인 윌리엄이 왜 일개 디자이너와 시시비비를 가리려 하겠어? 그냥 겁을 주려는 의도겠지.’“진양그룹 디자인팀이 그동안 두각을 드러내지 못한 이유가 있었네요. 이 비서님 같은 사람이 있으니 말입니다.”소예린은 연이어 비아냥댔다.그녀의 눈에 이연우라는 존재는 그저 디자인팀의 발목을 잡고 직원들의 노고를 인정해 주지 않는 걸림돌일 뿐이었다.사람들의 창작은 매번 자기 피와 땀을 쏟아낸 결과였다.그런데 소예린은 직원들에게 편법으로 남의 것을 주워 오게 했다.이것은 명백히 디자인에 대한 모욕이
“이 비서님, 저희도 이번 대회가 걱정돼서 그랬어요. 아무래도 이 프로젝트에 처음 참여하시잖아요.”여자 한 명이 조심스럽게 떠보듯 말했다. 말투엔 아부하는 기색이 묻어 있었다.“맞아요, 맞아요. 저희도 한별 씨가 가져온 시안이 괜찮은지 보려던 것뿐이에요. 정말 오해하신 거예요!”다른 여자도 서둘러 맞장구를 치며 웃는 얼굴로 속내를 가리려 했다.이연우는 그 말을 듣고 옅게 웃었으나 그 미소엔 서늘함이 배어 있었다.“그래요?”이연우가 훑어보자 그들은 괜스레 찔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이연우는 자리로 돌아와 책상 위 시안들을 보며 실망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녀는 그 시안들을 모조리 휙 던지며 냉랭하게 선언했다.“유감이지만 이 시안들은 전부 폐기하세요.”장한별은 깜짝 놀랐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이 비서님은 자신을 격려해 주었는데, 지금의 태도는 분명 자신이 조금 전 한 말이 화를 돋운 탓이라 여겼다.후회가 밀려왔지만, 실습생 신분으로는 반항할 여지가 없었다. 이 일조차 못 하면 정규직 전환은 꿈도 못 꿀 터였다.“이 비서님, 이 시안들 전부 야근하면서 만든 거예요. 어떻게 우리의 피땀을 이렇게 쉽게 버리실 수 있어요!”문 앞에 있던 여자 한 명이 불만을 터뜨렸다.“이 비서님이 이 프로젝트를 제대로 못 하시겠다면 차라리 소 부장님께 넘기세요.”다른 여자도 비웃음을 띤 채 이연우를 만만히 보는 듯이 말했다.문 앞에 선 두 여자 얼굴에는 노골적인 경멸이 드러났다.결국 이연우도 아래 사람을 괴롭히는 타입이라고 생각하는 눈치였다.“전에 말했죠. 못 하겠으면 당장 꺼지라고요.”이연우의 차가운 시선에는 위압감이 서려 있었다.“이 비서님, 당신은 고작 대리 비서실장일 뿐이잖아요. 무슨 권한으로 우리를 해고한다고 하는 거예요?”여자 하나가 발끈해 소리쳤다.“그래요. 대표님을 그 더러운 수단으로 유혹했다고 해서 제멋대로 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여긴 이 비서님 집이 아니에요. 우릴 해고할 권리는 없어요.”다른 여자도 질투와 원망을 숨
지한겸은 방현준의 시선을 느끼고는 못마땅하다는 듯 그를 흘겨보았다.방현준은 그의 눈빛을 마주하며 미소를 지었다.“연우 씨가 결정하면 되는 일이에요.”방현준에게 이번 일은 그저 작은 대회에 불과했다. 회사 차원에서는 전혀 타격이 될 일이 아니었다.하지만 이연우에게 이번 대회는 소예린과 정면으로 맞붙는 무대였다.반드시 이겨야만 자신의 실력을 증명할 수 있었다.방현준은 그런 그녀를 막을 이유가 없었다.이연우는 지한겸을 회사에 출근시키지 않았다.그는 ‘비장의 카드’였기에 마지막 순간에 깜짝 등장해야 효과가 있었다.회사로 돌아온 뒤, 이연우는 일부러 마주쳐 오는 소예린을 무시했고 디자인팀에서 올라온 어설픈 초안들에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그녀는 그런 건 다 미완성에 불과해 대회에 출품할 가치가 전혀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가 사무실 문을 조심스럽게 두드렸다.“들어와요.”이연우의 응답과 함께 문이 천천히 열렸다.“이 비서님, 디자인 시안을 가져왔습니다.”들어온 이는 지난번에도 보였던 실습생 장한별이었다.그녀는 두툼한 서류철을 품에 안고 긴장되고 불안한 마음으로 조심스레 다가왔다.“네.”이연우는 짧게 대꾸하고는 시선은 여전히 서류에 머물러 있었다.장한별은 책상 위에 디자인 시안을 내려놓고 한쪽에 서서 머뭇거렸다.이연우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흘깃 보더니 재빨리 눈치챘다.“왜 그래요? 할 말 있어요?”장한별은 입술을 깨물며 망설이더니 결국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이 비서님, 사실 전에 디자인팀에서 시안을 못 드린 건...”그녀의 목소리는 떨렸고 금기를 건드리는 사람처럼 조심스러웠다.이연우는 미간을 좁히며 날카로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알아요. 그래서 지금 변명하러 온 거예요?”그녀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위엄이 느껴졌다.장한별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아, 아니에요, 이 비서님. 저는 그저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제발 소 부장님과 맞서지 마세요. 그러다가는 크게 손해 보실 거예요.”그녀의 말투에는 진심
“맛은 여전히 예전 그대로네요.”이연우는 감탄을 참지 못했다.그렇게 많은 세월이 흘러가면서 그녀는 수없이 호박죽을 끓여보았지만, 오늘처럼 익숙한 맛을 재현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그건 네가 모르는 걸 넣었기 때문이지.”지한겸은 이연우를 바라보며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이연우는 순간 호기심이 일었다. ‘도대체 어떤 비밀스러운 재료가 이 죽을 이렇게 특별하게 만드는 걸까?’지한겸은 늘 그렇듯, 작은 깜짝 선물을 주는 걸 좋아했다.그녀는 달콤한 죽을 음미하면서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물었다.“한겸 오빠, 오빠는 마음에 드는 사람 없어요? 언제 나한테 여자친구 소개해줄 거예요?”그 말속에는 기대가 담겨 있었다. 그녀 역시 지한겸이 자기만의 행복을 찾기를 바랐다.“있어. 근데 아직 그 여자한테 말은 안 했어.”지한겸은 살짝 머뭇거리며 대답했다.이연우는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번쩍 들었다.“정말이에요? 어떤 사람이에요? 사진이라도 보여줄 수 없어요?”“밥이나 먹어. 기회가 되면 나중에 소개해줄게.”지한겸은 그렇게 말했지만, 시선은 단 한 순간도 이연우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그 눈빛 속에는 깊은 감정이 숨겨져 있었다.하지만 이연우는 자기 생각에 잠겨 있어 그 미묘한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다.잠시 후, 지한겸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네 대표님은? 뭐라도 드셔야 하지 않아?”이연우는 무심코 대답했다.“신경 안 써도 돼요. 그 사람은 이 시간에 절대 못 일어나요.”그러나 지한겸은 예민하게 그 말속에 담긴 의미를 알아챘다.방현준은 아마도 이 집에 처음 오는 게 아닌 듯했고 그가 이연우를 좋아한다는 게 분명하게 보였다.이연우는 정말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존재였다.바로 그때, 방현준이 기지개를 켜며 이연우의 방에서 나왔다.그는 이연우와 같은 디자인의 잠옷을 입고 있었는데 심지어 딸기 무늬가 같은 위치에 놓여 있었다.이 은근한 장면은 지한겸의 가슴속에서 불쑥 화를 지폈다.두 사람은 도저히 단순한 상사와 직원 관계처럼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