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다음 날 아침, 바리는 평소보다 일찍 눈이 떠졌다.
정확히는 잠을 설쳤다는 표현이 맞았다. 어젯밤 어둠 속에서 들었던 그 말이 밤새 머릿속을 맴돌았다. "당신까지 잃고 싶지 않소." 그 한마디가 계속 귓가에서 재생됐다. 잃고 싶지 않다니. 잃는다는 건 원래 있던 걸 뺏긴다는 뜻인데, 오늘 처음 만난 사이에서 대체 뭘 잃는다는 걸까.
몇 번이나 뒤척이다가, 결국 뜬눈으로 창밖이 밝아오는 걸 지켜봤다. 저승에도 아침이 있다는 게 새삼 신기했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하늘은 여전히 뿌연 회색빛이었지만, 조금씩 밝기가 달라지는 게 느껴졌다. 이승의 해와는 다른, 뭔가 흐릿하고 은은한 빛이었다.
바리는 몸을 뒤척이다 슬쩍 소파 쪽을 바라봤다. 무장승은 이미 일어나 있었다. 정확히는, 잠을 잔 흔적이 아예 없었다. 이불은 개켜진 그대로였고, 접힌 각도까지 딱 맞춰져 있어서 오히려 더 부자연스러웠다. 그는 책상 앞에 앉아 뭔가를 뚫어지게 들여다보고 있었다. 등을 곧게 편 채로, 미동도 없이.
바리는 이불 속에서 눈만 빼꼼 내밀고 그 뒷모습을 한참 관찰했다. 저 남자, 정말 잠도 안 자나 싶었다. 500년을 살았다는 사람이니 밤새는 것쯤은 아무렇지 않은 걸까. 아니면 어제 그 서류 때문에 정말 한숨도 못 잔 걸까.
바리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쪽을 살폈다. 어제 창고에서 챙겨온 그 낡은 서류철이었다. 무장승은 그 종이를 손에 쥔 채, 표정 하나 없는 얼굴로 오래도록 응시하고 있었다. 아니, 표정이 없다기보다는, 표정을 짓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처럼 보였다.
"팀장님."
"...일어났소?"
무장승은 화들짝 놀란 듯 서류를 서랍에 밀어 넣었다. 그 동작이 너무 급해서 오히려 더 수상해 보였다.
"팀장님, 얼굴이 왜 그러세요? 밤새 안 주무신 거예요?"
"...괜찮소."
"안 괜찮아 보이는데요. 눈 밑에 그거, 다크서클 아니에요? 저승 관리도 다크서클 생겨요?"
무장승은 대답 대신 헛기침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넥타이를 고쳐 매는 손짓이 평소보다 어수선했다. 바리는 그 모습을 보며 어쩐지 마음이 짠해졌다. 저 완벽주의자가 밤새 저러고 있었다니, 뭔가 단단히 마음에 걸리는 게 있는 게 분명했다.
"팀장님, 저 어제 그 얘기 진짜 안 잊어버렸어요."
"...아오."
"그러니까 나중에라도 꼭 말해주셔야 돼요. 저를 잃고 싶지 않다는 게 무슨 뜻인지."
무장승은 잠깐 멈칫하더니, 결국 시선을 피하며 짧게 답했다.
"...때가 되면 말하겠소."
"때가 언제인데요?"
"...나도 모르오."
바리는 입술을 삐죽였다. 이 남자, 정말이지 대답을 피하는 데는 선수였다. 하지만 더 캐물어봤자 오늘은 소득이 없을 것 같아서, 바리는 일단 물러서기로 했다.
"알겠어요. 대신 진짜 나중에 꼭 말해주셔야 돼요. 약속."
"...약속이오."
두 사람은 서둘러 출근 준비를 마치고 사무실로 향했다. 엘리베이터 안, 바리는 무장승의 옆얼굴을 슬쩍 훔쳐봤다. 평소의 그 무표정 속에 뭔가 다른 게 섞여 있었다. 피곤함인지, 걱정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덕순이 쪼르르 달려왔다. 손에는 믹스커피 두 잔을 들고 있었다.
"바리 씨! 어제 2관문 통과하셨다면서요? 축하해요! 자, 이거 드세요, 제가 타드린 거예요."
"고마워요. 근데 완전 죽는 줄 알았어요, 그 창고 정리. 먼지가 어찌나 많던지, 저 지금도 코 간지러워요."
"에이, 그래도 두 관문이나 통과하셨잖아요. 이 속도면 49관문 금방이겠는데요? 저희 팀에서 이렇게 빨리 통과한 임시직 진짜 오랜만이에요."
"진짜요? 원래 다들 이렇게 오래 걸려요?"
"그럼요. 보통 관문 하나 통과하는 데 며칠씩 걸려요. 서류 준비하는 데만 해도 시간이 꽤 드니까요. 근데 바리 씨는 이틀 만에 두 개나 통과하셨으니, 완전 우수 사원이시죠."
덕순이 밝게 웃으며 말했지만, 바리는 문득 계산을 해봤다. 지금까지 이틀 만에 두 개 관문. 이 속도라면 마흔아홉 개를 다 통과하는 데 대체 얼마나 걸릴까. 단순 계산으로도 남은 마흔일곱 개를 통과하려면 최소 몇십 일은 걸릴 것 같았다. 아빠의 시간이 얼마나 남았을지 모르는데.
그 생각이 미치자 갑자기 마음이 조급해졌다. 커피잔을 쥔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덕순 씨, 근데 다음 관문은 언제 시작해요?"
"그건 저도 몰라요, 심사 배정은 랜덤이라. 근데 보통은 하루 이틀 텀을 두고 진행돼요. 오늘내일은 좀 쉬시지 않을까요?"
"쉬는 시간이 어딨어요. 빨리빨리 진행해야죠. 저희 아빠가 얼마나 버틸지 모르는데."
바리의 목소리에 걱정이 묻어나자, 근처에서 서류를 정리하던 무장승이 슬쩍 고개를 들었다.
"...부친 상태가 걱정되오?"
"당연히 걱정되죠. 지금 며칠째 병원에 계신 건데. 팀장님은 부친 상태 확인할 방법 없어요? 저승에서도 이승 상황 볼 수 있는 거 아니에요?"
무장승은 잠깐 생각하는 듯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확인해보겠소. 잠깐 기다리시오."
그는 사무실 한쪽에 있는 별도의 단말기 쪽으로 걸어갔다. 오래된 컴퓨터처럼 생겼는데, 화면에는 낯선 기호들이 잔뜩 떠 있었다. 바리도 슬쩍 옆으로 다가가 화면을 들여다봤다. 알아볼 수 없는 문자들이 스크롤되듯 지나가더니, 무장승이 익숙한 손놀림으로 몇 개의 키를 눌렀다.
"이게 뭐예요? 이승 상황을 실시간으로 보여주는 거예요?"
"...정확히는, 생사부와 연동된 상태 조회 시스템이오. 실시간은 아니고, 몇 시간 단위로 갱신되오."
화면이 잠깐 깜빡이더니, 익숙한 이름이 떠올랐다.
오구 — 현재 상태: 위중, 안정적 유지 중
바리는 그 화면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위중하지만 아직은 버티고 있다는 뜻이었다. 안도와 불안이 동시에 밀려왔다. 화면 속 짧은 문장 몇 개가, 지금 자신이 알 수 있는 아빠에 대한 전부였다. 병원 침대에 누워 있을 아빠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상태가 더 자세히는 안 나와요? 뭐 수치라든가, 그런 거."
"...관리국에서 제공하는 정보는 여기까지요. 더 자세한 건 이승 병원 기록에만 남소."
"그럼 진짜 안정적인 건지, 아니면 그냥 버티고 계신 건지도 모르는 거네요."
"...그렇소."
바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답답함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이렇게 짧은 문장 하나로만 아빠의 생사를 가늠해야 한다는 게, 새삼 서러웠다.
"...아직은 괜찮소. 하지만 오래 지속되진 않을 거요."
"그럼 저 진짜 서둘러야겠네요. 팀장님, 관문 통과 속도 좀 더 빠르게 할 수 있는 방법 없어요?"
"...규정상 관문 배정은 랜덤이오. 인위적으로 조정할 수 없소."
"에이, 팀장님이 심사 총책임자잖아요. 뭔가 방법이 있지 않아요?"
무장승은 잠깐 말이 없다가, 낮게 한숨을 쉬었다.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오."
바리의 눈이 반짝였다.
"진짜요? 뭔데요?"
"...관문을 동시에 여러 개 진행하는 거요. 원래는 하나씩 순차적으로 진행하는 게 원칙이지만, 특례 신청을 하면 두세 개를 동시에 배정받을 수 있소."
"그거 하면 되잖아요! 왜 안 하고 계셨어요?"
"...위험 부담이 있소. 관문 여러 개를 동시에 진행하면 심사 난이도가 올라가고, 통과 실패 시 페널티도 더 크오."
"그래도 해요. 저 이 정도는 감당할 수 있어요."
바리가 단호하게 말하자, 무장승은 잠깐 그 얼굴을 바라봤다. 그 눈빛에 걱정과 대견함이 동시에 섞여 있었다.
"...알겠소. 신청해보겠소."
그렇게 말하고 그는 서류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바리는 그 옆에서 서류가 채워지는 걸 지켜보며,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아빠를 살리기 위해서라면, 관문이 아무리 많아도, 아무리 힘들어도 다 통과해내겠다고.
그때, 사무실 문이 열리며 낯선 남자 직원이 들어왔다. 손에는 두툼한 서류 봉투를 들고 있었다.
"관문통과심사팀 맞으시죠? 국장님실에서 보낸 긴급 서류입니다."
"국장님실이요?"
바리와 무장승은 동시에 서로를 쳐다봤다. 국장이라면, 며칠 전 덕순이 말했던 그 '염라 대감'이라는 사람이었다. 코믹한 적대자라고만 들었는데, 갑자기 긴급 서류라니 뭔가 심상치 않았다.
직원이 서류 봉투를 책상 위에 내려놓고 서둘러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무장승이 봉투를 열어 서류를 꺼냈다. 훑어보던 그의 눈썹이 순간 확 구겨졌다.
"...이게 무슨."
"팀장님, 왜요? 뭐라고 적혀 있는데요?"
무장승은 서류를 든 채 한참 말이 없었다.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평소의 무표정이 완전히 무너져 있었다. 바리는 조바심이 나서 서류를 낚아채듯 넘겨다봤다.
긴급 공문 — 임시직 바리 관련 특별 감사 실시 통보
사유: 관문 통과 시 비정형 문양 발현 확인, 국장 직접 지시
바리는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종이를 쥔 손이 파르르 떨렸다.
"저요? 저 왜 감사받는데요? 저 뭐 잘못한 거 있어요? 저 진짜 아무것도 안 했는데."
"...아니오. 잘못한 게 아니라."
무장승은 서류를 다시 읽으며 낮게 중얼거렸다.
"...당신 손등의 문양. 그것 때문인 것 같소."
"그 문양이 뭔데 국장님까지 나서요? 그냥 관문 통과할 때 나오는 거 아니었어요?"
"...원래는 그런 절차가 없소. 아까도 말했지만, 이런 문양은 통상적인 관문 통과 과정에서 발현되는 게 아니오."
무장승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바리는 그 표정에서 뭔가 불길한 예감을 읽었다.
"팀장님, 저 지금 무서워지려고 하는데요. 이거 저한테 안 좋은 일이에요?"
"...아직은 모르오. 하지만."
"하지만요?"
무장승은 서류를 조심스레 접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국장이 직접 지시했다는 건, 이게 단순한 절차 확인이 아니라는 뜻이오. 조심해야 하오, 당분간."
사무실 안에는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바리는 손등을 내려다봤다. 아무것도 없는 평범한 손등인데, 그 안에 대체 뭐가 숨겨져 있길래 이렇게까지 큰 소동이 벌어지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거기 누구요?"노인의 목소리가 복도에 쩌렁쩌렁 울렸다. 바리는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뭐라도 말해야 하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저, 저희요? 청소하러 왔는데요!"바리가 먼지떨이를 흔들며 어색하게 웃었다. 노인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세 사람을 훑어봤다. 국장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사탕 봉지를 만지작거리고 있었고, 무장승은 헬멧 챙을 더 눌러 내렸다."청소? 이 구역은 청소 일정이 화요일인데. 오늘 목요일 아니오?"바리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때 국장이 나섰다."아이고, 영감님. 저희 신입이라 일정을 잘못 알고 왔지 뭡니까. 죄송합니다, 그럼 저희는 이만."국장이 능청스럽게 돌아서려는데, 노인의 눈이 가늘어졌다."잠깐만."세 사람의 발이 동시에 멈췄다. 노인이 천천히 다가오더니, 국장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봤다."당신, 국장 아니오?""...아, 아니요, 저는 그냥 평범한 시설관리 직원인데.""국장 맞구먼. 내가 500년 전에 신입 시절 결재판 들고 다니던 얼굴을 어떻게 잊어. 그 사탕 냄새도 똑같고."국장은 결국 한숨을 푹 내쉬며 변장을 포기했다."...들켰네요. 안녕하십니까, 오랜만입니다."노인의 표정이 의외로 부드러워졌다."오랜만이오. 그동안 승진도 못 하고 여전히 국장이구먼.""승진할 마음이 없어서 그런 겁니다.""핑계는. 예전에도 승진 시험 앞두고 도망 다니더니, 그 버릇 아직도 못 고쳤나 보오.""영감님도 여전하시네요. 잔소리도 500년 전 그대로시고."노인이 픽 웃었다. 그 웃음에 바리는 조금 안도가 됐다. 적어도 적대적인 상대는 아닌 듯했다."근데 이 시간에 여기까지 웬일이오? 그것도 이렇게 어설픈 변장까지 하고."국장이 바리와 무장승을 흘끗 쳐다봤다. 더 이상 숨길 이유가 없다고 판단한 듯, 그는 목소리를 낮췄다."영감님,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여기 이 아가씨가 찾는 사람이 있어서요."노인의 시선이 바리에게로 향했다. 바리는 침을 꼴깍 삼키며 앞으로 나섰다."저, 제 엄마를 찾고 있어요. 이름
"그러니까, 변장을 해야 한다는 거죠?"바리는 국장이 던져준 종이봉투를 열어보다가 그대로 얼어붙었다. 안에는 낡아빠진 청소부 조끼와 먼지떨이, 그리고 이름표가 삐뚤빼뚤하게 붙은 명찰이 들어 있었다."지하 3층은 아무나 못 들어가. 근데 청소 용역은 예외거든. 아무도 신경 안 써.""저기요, 이 명찰 이름이 '순자'인데요? 저 순자 아니거든요?""그럼 오늘부터 순자야. 순자 씨, 잘 부탁해."국장이 능글맞게 웃으며 사탕을 또 하나 까 물었다. 바리는 헛웃음을 흘리며 조끼를 걸쳐 입었다. 사이즈가 안 맞아 소매가 손등을 다 덮었다."근데 이 조끼 왜 이렇게 냄새나요? 이거 몇 년 된 거예요?""글쎄, 한 이백 년쯤? 폐기물 창고에서 찾은 거라 좀 그럴 거야.""이백 년이요? 세탁은 하고 보관하신 거 맞아요?""세탁이라는 개념이 저승엔 좀 느슨하게 적용되거든."바리는 코를 틀어막으며 조끼 지퍼를 겨우 채웠다. 먼지떨이를 흔들어보니 케케묵은 먼지가 풀풀 날렸다. 이 상태로 잠입은커녕 재채기부터 터질 것 같았다."팀장님은요? 팀장님도 변장하세요?"무장승 쪽을 돌아본 바리는 순간 말을 잃었다. 그는 이미 시설관리팀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서 있었는데, 문제는 그 표정이었다. 평소와 똑같이 무표정한 얼굴로 헬멧까지 쓰고 있으니, 변장이 아니라 그냥 코스프레 화보처럼 보였다."...뭘 그렇게 보시오.""아니, 팀장님 그 얼굴로 시설관리팀이라고 하면 누가 믿어요? 딱 봐도 대기업 임원 코스프레하는 건데.""업무에 지장 없소.""지장 있다니까요? 팀장님, 조금이라도 웃어보세요. 아니면 좀 구부정하게 걸으시든가."무장승은 진지하게 자세를 낮추려 시도했다. 결과는 처참했다. 구부정한 자세로 뻣뻣하게 걷는 모습이, 오히려 더 수상해 보였다. 바리는 결국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아니 그거 완전 로봇이 고장 난 줄 알겠어요! 팀장님, 그냥 평소대로 걸으세요, 제발.""...평소대로 걸으면 티가 난다 하지 않았소.""그건 그런데, 지금은 더 티가 나거든요
"해온."무장승이 그 이름을 다시 한번 되뇌었다. 목소리가 평소보다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팀장님, 아까부터 그 이름 되게 심각하게 말씀하시는데, 저 진짜 불안한데요."바리는 국장실 문 앞에 선 채로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봤다. 국장은 이미 낡은 서류함 앞에 쪼그려 앉아 뭔가를 뒤지고 있었다. 평소 사탕이나 물고 빙글빙글 웃던 얼굴이 지금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찾았다."국장이 먼지 쌓인 서류철 하나를 꺼내 들었다. 표지에는 붉은 도장이 여러 개 찍혀 있었는데, 하나같이 오래되어 색이 바래 있었다."이거 열람 등급이 원래 이급 이상만 가능한 건데... 에잉, 지금 그런 거 따질 때가 아니지."국장이 서류철을 펼치자 바리는 저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첫 장에 적힌 이름 석 자가 눈에 들어왔다.해온 — 이급 관측자, 파견 임무 중 실종 처리"이급... 관측자요?"바리의 목소리가 떨렸다. 무장승이 그 옆에서 서류를 낚아채듯 가져가 읽어 내려갔다. 눈빛이 점점 어두워지는 게 바리 눈에도 보였다."파견 임무 중 실종. 이게 무슨 뜻이에요? 설마 우리 엄마가...""죽었다는 뜻은 아니오."무장승이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실종 처리는 소멸이나 강제 소환과는 다른 절차요. 규정상 명확히 구분되어 있소.""그럼 뭔데요, 그 실종이라는 게."국장이 한숨을 푹 내쉬며 소파에 털썩 앉았다. 평소 같으면 낚시 트로피 자랑이라도 늘어놓을 법한데, 오늘은 그럴 기색이 전혀 없었다."실종 처리라는 건 말이지, 본인이 스스로 규정 밖으로 사라졌다는 뜻이야. 강제로 끌려가거나 소멸당한 게 아니라, 자기 발로 관리국 체계에서 벗어난 거지.""자기 발로요? 왜요? 왜 그런 짓을 해요?""그야 나도 정확힌 몰라. 근데."국장이 바리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눈빛이 평소의 능글맞음은 온데간데없이 진지했다."관측자와 인간 사이에서 아이가 생기는 거, 그거 원래 있어선 안 되는 일이야. 규정으로 철저히 금지돼 있거든. 발각되면 관측자는 즉시 소환되고,
"저 이승 다녀와야겠어요."바리의 폭탄선언에, 무장승은 서류를 내려놓고 그녀를 바라봤다. 어젯밤 한숨도 못 잔 얼굴로, 바리는 이미 마음을 굳힌 듯했다."...이승에 말이오?""네. 아빠한테 직접 물어봐야겠어요. 엄마에 대해서. 지금까지 한 번도 제대로 여쭤본 적이 없었어요. 항상 아빠가 힘들어하실까 봐 피했는데, 이제는 더 이상 미룰 수 없을 것 같아요.""...가능한 일이오?""덕순 씨가 그러는데, 관문 통과자에 한해서 짧은 시간 이승 방문이 허가되는 특례가 있대요. 위독한 가족 면회 같은 경우요."무장승은 잠깐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국장님께 여쭤보겠소."국장은 그 요청을 듣고 흔쾌히 승인해줬다."...마침 잘됐어. 아버님 의식도 돌아오셨으니, 직접 만나서 여쭤보는 게 나을 거야. 다만 두 시간 안에 돌아와야 해. 규정상 그 이상은 위험하니까."바리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두 시간이면 충분했다. 아니, 충분해야만 했다.이승으로 돌아가는 절차는 생각보다 간단했다. 특수한 문을 통과하자, 익숙한 병원 복도가 눈앞에 펼쳐졌다. 형광등 불빛, 소독약 냄새, 모든 게 그대로였다. 오랜만에 맡는 이승의 공기가 낯설면서도 반가웠다.병실 문을 열자, 침대에 앉아 있던 아빠가 놀란 얼굴로 바리를 바라봤다. 며칠 전보다 훨씬 혈색이 좋아진 얼굴이었다."...바리야?""아빠!"바리는 눈물을 쏟으며 아빠에게 달려갔다. 손을 맞잡는 순간, 따뜻한 온기가 전해졌다. 진짜였다. 꿈이 아니었다. 죽은 이후 처음으로, 아빠를 직접 만지고 있다는 사실이 벅차게 다가왔다."아빠, 저 진짜 보고 싶었어요.""나도, 나도 우리 딸 정말 보고 싶었다. 근데 어떻게 이렇게...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겠구나.""설명하려면 길어요. 근데 아빠, 저 시간이 별로 없어서 급하게 여쭤볼 게 있어요."아빠는 딸의 다급한 표정을 보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얼굴에는 여전히 어리둥절함이 남아 있었지만, 딸이 진지하다는 걸 느낀 듯 표정을 가다듬었다."뭔데,
"...이 문양을, 어디서 봤다고 했나?"국장의 손이 손수건을 쥔 채 파르르 떨렸다. 방금까지의 여유로운 표정은 완전히 사라지고,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사탕 봉지를 만지작거리던 손도, 어느새 멈춰 있었다."국장님, 아시는 거예요?"국장은 한참을 말이 없었다. 손수건의 자수를 몇 번이고 다시 확인하더니, 결국 무겁게 입을 열었다. 돋보기까지 꺼내 들고 문양 하나하나를 세심하게 들여다보는 모습이, 평소의 그와는 완전히 달랐다."...이건, 관측자 중에서도 최상위 존재만이 사용하는 봉인 문양이야.""최상위요? 그럼 그냥 관측자가 아니라, 더 높은 존재가 관련돼 있다는 거예요?""...그래. 그리고 더 중요한 건."국장은 잠깐 망설이다가, 낮은 목소리로 이어갔다."...이 문양을 사용할 수 있는 존재는, 내가 알기로 딱 한 명뿐이야."바리는 마른침을 삼켰다."누군데요?""...명부 관리국 창설 당시부터 존재해온, '최초의 관측자'라 불리는 이야. 아주 오래전부터 전설처럼 내려오는 존재지. 나도 실제로 본 적은 없어. 그냥 문헌 속에서만 이름을 접했을 뿐이야.""전설이요? 그럼 진짜 존재하는지도 확실치 않은 거예요?""...존재는 확실해. 다만 그 존재가 표면에 드러난 적이 거의 없다는 거지. 명부 관리국 시스템 자체를 설계한 존재라는 얘기도 있고, 모든 관측자들의 시초라는 얘기도 있어."바리는 그 말에 혼란스러워졌다. 엄마의 손수건 하나가, 이렇게 거대한 존재와 연결되어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근데 그런 존재가 왜 제 엄마 유품에 이런 문양을 새겼을까요?"국장은 손수건을 다시 바리에게 건네며, 조심스레 물었다."...바리 씨, 어머니에 대해 아는 게 있나?""거의 없어요. 어릴 때 돌아가셨다고만 들었어요. 아빠도 엄마 얘기는 잘 안 하셨고요. 제가 물어보면 항상 화제를 돌리셨어요.""...혹시 어머니 사망 기록, 명부에서 확인해본 적은?"바리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확인해볼 수 있어
"이 손수건, 좀 이상한데요."덕순이 손수건을 이리저리 살피며 고개를 갸웃했다. 바리는 그 옆에서 커피를 마시다 사레들릴 뻔했다. 어제 손수건을 목에 두르고 다니는 걸 보고, 덕순이 신기하다며 자세히 들여다보다가 나온 반응이었다."이상하다니요? 그냥 평범한 손수건이잖아요.""아니요, 자수 무늬 자세히 보세요. 이거 그냥 장식이 아니에요."바리는 손수건을 다시 살펴봤다. 자수는 꽃무늬처럼 보였는데, 덕순의 말을 듣고 나니 확실히 뭔가 규칙적인 패턴이 있는 것 같았다. 꽃잎의 개수, 줄기의 방향, 심지어 실의 색깔까지 어떤 순서를 따르는 듯했다."이거... 글자예요?""맞아요! 저 총무팀에서 옛날 문서 정리하다가 이런 암호 문양 몇 번 본 적 있어요. 이거 고대 명부 관리국 표기법이에요."바리는 그 말에 순간 소름이 돋았다. 어제 그렇게 소중하게 받아 들었던 손수건이, 단순한 유품 이상의 무언가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스쳤다. 지금까지 손목에 뜬 문양, 인연 지수, 세 번의 생까지 겪으며 이미 놀랄 만큼 놀랐다고 생각했는데, 여기서 또 새로운 비밀이 드러나고 있었다."덕순 씨, 확실해요? 그냥 자수 무늬일 수도 있잖아요.""저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는데, 이 패턴 봐요. 완전히 규칙적이잖아요. 손으로 대충 놓은 자수라면 이렇게 정확할 수가 없어요."바리는 놀라서 손수건을 더 자세히 들여다봤다. 자수 하나하나가, 정말 낯선 문자처럼 보이기 시작했다."이게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어요?""저도 완벽하게는 못 읽어요. 근데 총무팀에 이런 거 전문으로 해석하는 선배가 있거든요. 한번 물어볼까요?"바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무장승도 그 대화를 듣고 다가왔다."...손수건에 문양이 있었소?""네! 덕순 씨가 발견했어요. 이거 무슨 암호래요."무장승은 손수건을 조심스레 받아 들고 자수를 살펴봤다. 그의 표정이 점점 진지해졌다. 눈빛이 자수의 한 부분에 오래 머물렀다."...이거, 낯익은 문양이오.""팀장님도 아세요?""...확신은 없소.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