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CCTV에도 얼굴이 안 찍히는 정체불명의 방문자, 바리의 책상 위에 놓고 간 건 눈동자 문양이 새겨진 명함 한 장. 관측자 조직이 보내는 노골적인 경고 신호였다. 국장도 똑같은 명함을 받았고, 지하 3층 노인과는 연락조차 닿지 않는다. 저승의 규정 체계마저 손댈 수 있다는 상대 앞에서 위기감은 최고조로 치닫는데,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겠소"라며 손을 잡는 무장승의 다짐, 그 와중에도 덕순은 "남주 포스"라며 혼자 텐션이 오른다.
퇴근 후, 바리와 무장승은 다시 지하 3층으로 향했다. 국장은 급한 회의가 있다며 먼저 가 있으라 했지만, 바리는 영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팀장님, 저 진짜 불안해요. 그 영감님한테 무슨 일 생긴 거면 어떡해요.""...가서 확인해보면 알 거요."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지하 3층 복도는 어제보다 더 어두웠다. 형광등 몇 개가 아예 꺼져 있었고, 공기마저 서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팀장님, 분위기가 어제랑 완전 다른데요.""...조심히 걸으시오."두 사람은 복도를 따라 천천히 나아갔다. 발소리를 죽이려 애썼지만, 조용한 복도에서는 숨소리마저 크게 울리는 것 같았다. 바리는 무장승의 소매 끝을 저도 모르게 살짝 붙잡았다."팀장님, 저 좀 무서운데 손 좀 잡아주시면 안 돼요?""...그러시오."무장승이 손을 내밀자 바리는 그 손을 꽉 붙잡았다. 차가운 손끝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단단함이 묘하게 안심이 됐다. 창고 철문 앞에 도착했을 때, 바리는 숨을 멈췄다. 어제는 분명 잠겨 있었다던 문이, 지금은 살짝 열려 있었다."저거... 국장님이 열어둔 걸까요?""아니오. 국장님은 아직 여기 오지 않았소."무장승이 먼저 문을 조심스럽게 밀고 들어갔다. 바리도 긴장한 채 그 뒤를 따랐다. 창고 안은 어제와 달리 난장판이었다. 서류함 몇 개가 쓰러져 있었고, 바닥에는 서류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영감님!"바리가 소리쳐 불렀지만 대답은 없었다. 무장승이 바닥에 떨어진 서류 하나를 집어 들었다. 손끝이 살짝 떨렸다."...이거 보시오."서류에는 알아볼 수 없는 긁힌 자국이 나 있었다. 마치 누군가 급하게 무언가를 지우려 한 흔적 같았다. 바리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노인이 항상 앉아 있던 낡은 의자가 옆으로 쓰러져 있는 걸 발견했다. 다리 하나가 부러진 채였다."저거 보세요, 의자도 저렇게 쓰러져 있고... 진짜 무슨 일 있었던 거 맞죠?""...그런 것 같소."무장승은 쓰러진 의자를 조심스럽게 세워 살펴봤다. 다리가 부러진 단면이 날카로
"언니, 제가 가만히 생각해봤는데요."점심시간, 덕순이 식판을 들고 오더니 바리 옆자리에 비장한 얼굴로 앉았다."뭘요? 갑자기 왜 그렇게 심각해요?""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딱 하나 있어요.""방법이요? 관측자 조직 상대할 방법 말하는 거예요?""아니요, 그거 말고요. 언니랑 팀장님 사이요."바리는 순간 사레가 들려 콜록거렸다."갑자기 그게 왜 나와요?""아니 지금 세상이 흉흉한데, 이럴 때일수록 확실하게 사귀어야죠! 서류상 부부 말고 진짜로요!""덕순 씨, 지금 그럴 상황이 아니라니까요.""아니 그럴 상황이니까 그런 거예요! 위기 상황일수록 관계가 확실해야 서로 더 잘 지킬 수 있는 거 아니에요? 언니, 제가 이래 봬도 연애 컨설팅 자격증 있어요.""그런 자격증이 세상에 어디 있어요?""제가 만들었어요! 셀프 발급! 워드로 예쁘게 만들어서 코팅까지 했다니까요. 보실래요?"덕순이 정말로 지갑에서 코팅된 카드를 꺼내 흔들었다. '연애 컨설턴트 1급 - 발급기관: 나 자신'이라는 문구가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이걸 진짜로 만드셨어요? 이 정성을 딴 데 좀 쓰지 그래요.""이게 딴 데죠! 언니 연애가 얼마나 중요한 일인데요! 아무튼 중요한 건 그게 아니고요."덕순이 식판을 옆으로 밀어놓고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손글씨로 빼곡하게 뭔가가 적혀 있었는데, 제목이 '팀장님 마음 흔들기 작전 - 1단계'였다."이게 뭐예요?""작전서요! 제가 지난주부터 몰래 팀장님 관찰했는데요, 팀장님이 언니한테 유독 약해지는 포인트가 몇 개 있더라고요.""팀장님을 관찰했다고요? 그거 무슨 스토킹 아니에요?""애정 어린 관찰이죠! 자, 1번, 언니가 아무렇지 않게 웃을 때. 2번, 언니가 위험한 상황에 처했을 때. 3번, 언니가 자기 앞에서 다치거나 아플 때."바리는 그 목록을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이거 완전 신파 드라마 클리셰 모음집인데요? 4번은 뭔데요, 이 뒤에 더 있는 거 같은데.""4번은 비밀이에요. 아직 실행 단계가 아니라서.""그게
다음 날 아침, 바리가 출근하자마자 사무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덕순이 잔뜩 긴장한 얼굴로 바리 책상 앞을 서성이고 있었다."언니, 큰일 났어요.""뭔데요, 아침부터 왜 이렇게 심각해요?""어제저녁에 언니 책상에 이상한 사람이 다녀갔대요. 경비팀 CCTV에 찍혔는데."바리는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책상 위를 내려다보니, 평소와 다르게 낯선 명함 한 장이 놓여 있었다. 새하얀 명함에는 아무 글자도 없이 단순한 눈동자 문양 하나만 새겨져 있었다."이게... 뭐예요?""저도 몰라요. 근데 경비팀에서 그 사람 얼굴을 확인하려고 CCTV를 돌려봤는데, 이상하게 화면에 아무것도 안 잡혔대요. 사람 형체는 분명히 지나갔는데 얼굴만 뿌옇게 흐려져서."바리는 명함을 조심스럽게 집어 들었다. 손끝에 닿는 순간, 서늘한 냉기가 훅 끼쳤다. 뒤집어봐도 앞면과 마찬가지로 아무 글자도 없었고, 그저 눈동자 문양만이 마치 이쪽을 노려보는 것처럼 또렷하게 새겨져 있었다."덕순 씨, 이거 진짜 확실해요? 다른 직원이 실수로 놓고 간 건 아니고요?""에이, 언니. 저희 팀에 이런 명함 쓰는 사람 아무도 없어요. 게다가 경비팀 반장님 말로는, 그 사람 걸음걸이가 진짜 이상했대요. 바닥에 발이 안 닿는 것처럼 스르륵 지나갔다고."바리는 그 말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팀장님한테 바로 보여드려야겠어요."무장승은 명함을 보자마자 표정이 굳었다. 그는 명함을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관측자 조직의 신호요.""신호요? 그냥 경고 같은 게 아니라요?""관측자들은 직접적인 접촉을 극도로 꺼리오. 이렇게 명함을 놓고 가는 건, 이미 우리 움직임을 알고 있다는 걸 알리는 행위요."바리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그럼... 어제 지하 3층에 간 거, 그것도 다 알고 있다는 거예요?""...그럴 가능성이 높소."그때 국장이 다급하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평소의 능글맞은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큰일 났다. 나도 방금 같은
관사로 돌아온 바리는 소파에 그대로 널브러졌다. 눈은 퉁퉁 부어 있었고, 목소리는 잔뜩 잠겨 있었다."팀장님, 저 지금 완전 방전됐어요. 오늘 하루 감정 소모가 인생 통틀어 제일 심한 것 같아요.""...쉬시오. 오늘은 아무것도 안 해도 되오."무장승이 조심스럽게 담요를 가져다 바리 어깨에 덮어주었다. 평소라면 어색해했을 손길인데, 오늘은 이상하게 자연스러웠다. 손끝이 어깨에 닿았다 떨어지는 그 짧은 순간에도, 무장승은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애꿎은 창밖만 쳐다봤다. 바리는 그 어색함이 귀엽다고 생각하며, 담요를 끌어당기며 픽 웃었다."팀장님, 저 배고파요. 근데 밥 차릴 힘이 하나도 없는데.""...뭘 먹고 싶소.""라면이요. 그냥 뜨끈한 라면 하나면 다 나을 것 같아요."무장승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너무 즉각적인 반응이라 바리가 오히려 당황할 정도였다."제가 끓일게요, 그냥.""아니오. 내가 하겠소.""팀장님이 라면을 끓인다고요? 팀장님 요리할 줄 아세요?""...규정집 읽는 것보단 쉬울 거요."바리는 그 말에 웃음이 픽 터졌다. 무장승이 부엌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냄비를 꺼내 물을 받기 시작했다. 그런데 손놀림이 어딘가 어색했다. 물 양을 재는 것도 아니고 그냥 감으로 붓다가, 냄비 뚜껑을 찾지 못해 한참을 헤맸다."팀장님, 뚜껑은 그 옆 찬장에요.""...알고 있었소.""방금 세 번째 찬장 열었다 닫으셨잖아요."무장승은 대답 없이 헛기침만 했다. 바리는 소파에 누운 채로 그 모습을 지켜보며 웃음을 참느라 애를 먹었다. 500년 저승 최고 엘리트 심사관이 라면 하나에 저렇게 쩔쩔매는 모습이라니, 아까까지의 무거운 기분이 조금씩 풀리는 것 같았다.'저 사람, 규정집은 삼백이십 페이지도 하루 만에 외우면서 라면 봉지 하나는 왜 저렇게 헤매지.'바리는 그 부조화가 웃기면서도 어쩐지 마음이 따뜻해졌다. 완벽해 보이던 사람의 서툰 구석을 발견하는 게, 이상하게 반가웠다.물이 끓기 시작하자 무장승은 면과 스프를 넣었
"거기 누구요?"노인의 목소리가 복도에 쩌렁쩌렁 울렸다. 바리는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뭐라도 말해야 하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저, 저희요? 청소하러 왔는데요!"바리가 먼지떨이를 흔들며 어색하게 웃었다. 노인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세 사람을 훑어봤다. 국장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사탕 봉지를 만지작거리고 있었고, 무장승은 헬멧 챙을 더 눌러 내렸다."청소? 이 구역은 청소 일정이 화요일인데. 오늘 목요일 아니오?"바리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때 국장이 나섰다."아이고, 영감님. 저희 신입이라 일정을 잘못 알고 왔지 뭡니까. 죄송합니다, 그럼 저희는 이만."국장이 능청스럽게 돌아서려는데, 노인의 눈이 가늘어졌다."잠깐만."세 사람의 발이 동시에 멈췄다. 노인이 천천히 다가오더니, 국장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봤다."당신, 국장 아니오?""...아, 아니요, 저는 그냥 평범한 시설관리 직원인데.""국장 맞구먼. 내가 500년 전에 신입 시절 결재판 들고 다니던 얼굴을 어떻게 잊어. 그 사탕 냄새도 똑같고."국장은 결국 한숨을 푹 내쉬며 변장을 포기했다."...들켰네요. 안녕하십니까, 오랜만입니다."노인의 표정이 의외로 부드러워졌다."오랜만이오. 그동안 승진도 못 하고 여전히 국장이구먼.""승진할 마음이 없어서 그런 겁니다.""핑계는. 예전에도 승진 시험 앞두고 도망 다니더니, 그 버릇 아직도 못 고쳤나 보오.""영감님도 여전하시네요. 잔소리도 500년 전 그대로시고."노인이 픽 웃었다. 그 웃음에 바리는 조금 안도가 됐다. 적어도 적대적인 상대는 아닌 듯했다."근데 이 시간에 여기까지 웬일이오? 그것도 이렇게 어설픈 변장까지 하고."국장이 바리와 무장승을 흘끗 쳐다봤다. 더 이상 숨길 이유가 없다고 판단한 듯, 그는 목소리를 낮췄다."영감님,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여기 이 아가씨가 찾는 사람이 있어서요."노인의 시선이 바리에게로 향했다. 바리는 침을 꼴깍 삼키며 앞으로 나섰다."저, 제 엄마를 찾고 있어요. 이름
"그러니까, 변장을 해야 한다는 거죠?"바리는 국장이 던져준 종이봉투를 열어보다가 그대로 얼어붙었다. 안에는 낡아빠진 청소부 조끼와 먼지떨이, 그리고 이름표가 삐뚤빼뚤하게 붙은 명찰이 들어 있었다."지하 3층은 아무나 못 들어가. 근데 청소 용역은 예외거든. 아무도 신경 안 써.""저기요, 이 명찰 이름이 '순자'인데요? 저 순자 아니거든요?""그럼 오늘부터 순자야. 순자 씨, 잘 부탁해."국장이 능글맞게 웃으며 사탕을 또 하나 까 물었다. 바리는 헛웃음을 흘리며 조끼를 걸쳐 입었다. 사이즈가 안 맞아 소매가 손등을 다 덮었다."근데 이 조끼 왜 이렇게 냄새나요? 이거 몇 년 된 거예요?""글쎄, 한 이백 년쯤? 폐기물 창고에서 찾은 거라 좀 그럴 거야.""이백 년이요? 세탁은 하고 보관하신 거 맞아요?""세탁이라는 개념이 저승엔 좀 느슨하게 적용되거든."바리는 코를 틀어막으며 조끼 지퍼를 겨우 채웠다. 먼지떨이를 흔들어보니 케케묵은 먼지가 풀풀 날렸다. 이 상태로 잠입은커녕 재채기부터 터질 것 같았다."팀장님은요? 팀장님도 변장하세요?"무장승 쪽을 돌아본 바리는 순간 말을 잃었다. 그는 이미 시설관리팀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서 있었는데, 문제는 그 표정이었다. 평소와 똑같이 무표정한 얼굴로 헬멧까지 쓰고 있으니, 변장이 아니라 그냥 코스프레 화보처럼 보였다."...뭘 그렇게 보시오.""아니, 팀장님 그 얼굴로 시설관리팀이라고 하면 누가 믿어요? 딱 봐도 대기업 임원 코스프레하는 건데.""업무에 지장 없소.""지장 있다니까요? 팀장님, 조금이라도 웃어보세요. 아니면 좀 구부정하게 걸으시든가."무장승은 진지하게 자세를 낮추려 시도했다. 결과는 처참했다. 구부정한 자세로 뻣뻣하게 걷는 모습이, 오히려 더 수상해 보였다. 바리는 결국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아니 그거 완전 로봇이 고장 난 줄 알겠어요! 팀장님, 그냥 평소대로 걸으세요, 제발.""...평소대로 걸으면 티가 난다 하지 않았소.""그건 그런데, 지금은 더 티가 나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