ログイン"오늘 마마께서 하실 일은 셋뿐이옵니다."
회랑을 앞서 걸으며 상궁이 손가락 세 개를 폈다.
"폐하 앞에 나아가 절을 올리시고, 서약문을 낭독하시고, 책봉을 받으십니다. 그게 답니다."
'그게 다라니.'
'그 셋 다 처음인데.'
"절은 어떻게 하는데요."
"……예?"
상궁의 걸음이 반 박자 늦어졌다.
"아니, 그러니까. 오늘 같은 날은 평소랑 다른 게 있을 거 아니에요. 뭐, 각도라든가."
"……무릎을 먼저 놓으시고, 손은 이마 높이로 모으신 다음, 상체를 세 번에 나누어 낮추시면 되옵니다. 세 번째에서 잠깐 멈추셔야 하고요."
'세 번에 나눠서. 세 번째에 멈춤.'
'각도는 끝까지 안 알려주네.'
소원은 걸으면서 손을 어정쩡하게 이마 근처로 들어 올려봤다.
"마마. 지금 하시면 아니 되옵니다."
"아, 네."
손을 내렸다.
상궁이 다시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소원은 그 등을 보며 속으로 셌다.
'아니 되옵니다.'
'오늘 아침부터 벌써 네 번째.'
거대한 문 앞에서 상궁이 멈춰 섰다.
"여기서부터는 혼자 드셔야 합니다."
"네?"
"단까지는 아무도 따라 들지 못하옵니다."
소원이 뭐라 대꾸하기도 전에 문이 열렸다.
대전은 사람으로 가득했다.
그리고 정면 단 위에, 앉아 있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저 사람이구나.'
설명은 필요 없었다.
대전 전체가 그 한 사람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으니까.
모후였다.
아직 물러나지 않은, 지금 이 나라의 황제.
'그러니까 나는 오늘 왕이 되는 게 아니구나.'
'저 사람 밑에서 후계자 자리에 앉는 거구나.'
그걸 알아챈 순간 오히려 숨이 트였다.
오늘 하루는 뭘 결정해야 하는 사람이 자기가 아니라는 뜻이었으니까.
붉은 융단이 단까지 곧게 깔려 있었다.
소원은 그 위를 걸었다.
단 아래 왼편, 대신들 앞줄에 여자 하나가 서 있었다.
소원과 이목구비가 비슷했다.
나이가 조금 더 들었고, 훨씬 정돈된 얼굴이었다.
그 여자가 소원을 보고 웃었다.
소원도 얼결에 웃어줄 뻔했다가 멈췄다.
누군지 몰랐기 때문이다.
융단 끝에 이르렀다.
절을 할 차례였다.
'무릎 먼저. 손은 이마. 세 번에 나눠서.'
소원은 무릎을 꿇고 손을 올렸다.
그리고 상체를 숙였다.
한 번에.
대전이 조용해졌다.
조용해지는 방식이 문제였다.
아무 소리도 안 나는 게 아니라, 나고 있던 소리가 일제히 멈추는 종류의 조용함이었다.
강의실에서 애 하나가 아주 이상한 답을 말했을 때, 딱 저런 정적이 온다.
'아 망했다.'
그때 옆에서 목소리가 났다.
"세 번입니다, 아우님."
아까 그 여자였다.
어느새 곁에 와 있었다.
소원의 손을 잡아 이마 높이로 다시 올려주었다.
"오래 앓으셨으니 몸이 잊었을 수도 있지요."
여자는 자연스럽게 소원 옆에 무릎을 굽혔다.
"제가 맞춰 드리겠습니다."
한 번.
두 번.
세 번.
세 번째에서 잠깐 멈추는 것까지 완벽했다.
소원은 그 속도에 겨우 매달려 따라갔다.
정적이 술렁임으로 바뀌었다가, 다시 가라앉았다.
'살았다.'
'근데 왜 하나도 안 고맙지.'
고개를 들자 그 여자가 여전히 웃고 있었다.
다정한 얼굴이었다.
다만 그 다정함이, 온 대전이 보는 앞에서 태녀가 될 사람은 절 하나 제대로 못 한다는 걸 정확하게 증명하는 방식으로 발휘됐을 뿐이었다.
여자가 일어서며 옷자락을 정리했다.
그리고 지나가듯 한마디를 남겼다.
"오늘은 잘하셨습니다."
소원은 입을 열려다 말았다.
'오늘은.'
그 두 글자에 저번엔 아니었다는 말이 이미 다 들어 있었다.
아니라고 하려면 저번이 있었다는 걸 먼저 인정해야 했다.
'……대답 못 하게 만들어놨네, 이거.'
말로 먹고산 지 십이 년 만에 처음으로 할 말이 없었다.
소원은 여자의 뒷모습을 잠깐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태사가 두루마리를 두 손으로 받쳐 올렸다.
소원은 그것을 받아 펼쳤다.
그리고 굳었다.
'……한자잖아.'
'나 한문 강사 아닌데.'
손끝이 차가워졌다.
그래도 어순은 우리말이었다.
서술어가 맨 뒤에 있었다.
'읽을 수는 있겠다.'
소원은 숨을 고르고 입을 열었다.
"하늘의 뜻, 숨어……"
말이 이상하게 끝났다.
'숨어?'
'누가 숨어?'
대전 곳곳에서 웅성거림이 터졌다.
"……무어라 하셨습니까, 방금."
'아니 나도 몰라요.'
소원은 두루마리를 내려다봤다.
숨을 은(隱).
저 자리에 숨는다는 뜻이 들어갈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같은 글자가 아래에도 있었다.
그 아래에도.
굵은 글자 뒤마다 한 번씩 얌전히 붙어 있었다.
'……뜻으로 읽는 자리가 아니구나.'
'소리만 빌린 거야. 은.'
'이두잖아, 이거.'
소원은 끊긴 자리로 돌아갔다.
"하늘의 뜻은 높고, 땅의 뜻은 넓으며."
말이 됐다.
'된다.'
"이 자리에 오르는 자는 백성을 살피고, 땅을 지키며, 하늘의 뜻을 거스르지 아니하고."
목소리가 펴졌다.
"사사로이 이롭게 하지 아니하며, 사사로이 해롭게 하지 아니하고."
떨림이 빠지고 호흡이 길어졌다.
십 년 넘게 처음 보는 지문을 아이들 앞에서 소리 내 읽어온 몸이었다.
규칙만 잡히면 그다음은 그냥 일이었다.
대전이 조용해졌다.
아까와는 다른 조용함이었다.
"……보십시오."
"방금까지 더듬으셨는데."
"갑자기 저리 붙으시는 게 이상하지 않습니까?"
'어? 왜? 잘 읽고 있는데?'
읽으면서도 뒤통수가 서늘했다.
절은 못 하는데 낭독은 저렇게 한다.
처음엔 더듬더니 중간부터 갑자기 빨라진다.
이제 와서 다시 더듬을 수도 없었다.
문장은 계속 이어졌다.
백성이 어떻고 땅이 어떻고 하는, 뜻은 좋은데 특별할 건 없는 소리들.
입은 알아서 움직이고 머리로는 딴생각을 할 수 있는 종류의 문장이었다.
그 딴생각이 자꾸 아래로 흘렀다.
'근데 웬 옷마다 짐승이야.'
뒤쪽 사절들의 옷깃과 소매마다 짐승이 하나씩 박혀 있었다.
늑대, 여우, 뱀, 독수리.
두루마리에도 그 이름들이 그대로 적혀 있었다.
'아 몰라.'
'우선 이거부터 넘기고.'
그리고 다음 줄이 지나갈 때도 입은 멈추지 않았다.
"……또한 네 부족이 보낸 공들과 화친의 의를 지켜, 이 나라의 앞날을……"
머리가 뒤늦게 걸렸다.
'잠깐.'
'화친?'
'공들?'
'복수형?'
목소리는 여전히 태연했다.
머릿속이 뒤집혀도 입이 안 끊기는 게 이렇게 무서운 기술인 줄 몰랐다.
'이 몸은 이미 혼인을 했고.'
'상대가 하나가 아니고.'
소원은 읽으면서 눈만 아래로 내렸다.
융단 양옆.
아까부터 거기 서 있던 남자들.
넷이었다.
'저 넷이.'
마지막 줄이 남아 있었다.
읽지 않으면 끝나지 않고, 끝내지 않으면 이 자리가 끝나지 않았다.
소원은 마지막 문장을 읽어 내렸다.
"……이에 네 부족과의 화친을 맹세하나이다."
마지막 음절이 떨어졌다.
그 순간이었다.
대전의 촛불이 일제히 흔들렸다.
바람은 불지 않았다.
사람들이 하나둘 고개를 들었다.
소원도 무슨 일인가 싶어 시선을 들었다.
그리고 그때,
융단 오른편에 서 있던 한 남자의 머리카락 끝이 희게 변하기 시작했다.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은빛이 번졌다.
한 올.
두 올.
순식간에 검은색이 밀려나고 있었다.
소원은 입을 다문 채 그 모습을 바라봤다.
'……뭐야.'
남자의 머리카락이,
검은색에서 은색으로 완전히 물들었다.
6화. 시범이라고 해 두지요사흘째 저녁, 태녀궁 접견실.문이 열렸고, 묵현이 들어왔다.인사는 짧았다."뱀 부족 공, 묵현입니다."그리고 소원이 앉으라는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는 이미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어제 그 늑대는 앉으라고 몇 번을 말해야 앉았는데.'검은 옷에 검은 머리. 불빛이 닿는 자리마다 머리카락에 어두운 초록빛이 돌았다.허리춤에는 작은 약재 주머니가 매달려 있었고, 은은하게 쌉싸름한 풀 냄새가 났다.연한 황록빛 눈동자는 소원을 보는 것도, 안 보는 것도 아닌 묘한 각도에 머물러 있었다."용건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인사 다음이 바로 용건이었다. 날씨 얘기도, 안부도 없었다.묵현이 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서안 위에 올려놓았다. 두루마리도 아니었다. 접힌 종이 한 장.소원은 그것을 펼쳤다.> **약재 전매권**끝이었다. 소원은 종이를 뒤집어 봤다. 뒷면은 백지였다."이게 다예요?""다입니다.""보통 이런 건 이유라든가, 근거라든가, 부족의 공적이라든가 그런 걸 쭉 쓰지 않아요?""필요 없는 걸 쓰면 읽는 쪽이 피곤합니다."소원은 종이를 손가락으로 톡 튕겼다."근데 좀 당황스럽네요.""무엇이 말씀입니까.""보통 이런 자리엔 내가 뭘 해 드리겠다, 약속을 들고 오지 않나요? 첫 만남부터 요구서를 내미시니까."묵현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약속은 지키지 못하면 빚이 됩니다. 요구는 거래고요. 저는 빚은 지지 않습니다.""……그럼 그 거래, 대가는요? 이걸 주면 뱀 부족은 뭘 주는데요?""후계입니다. 확실하게.""확실하게라는 말을 그렇게 쉽게 해요?""쉽게 하는 말이 아닙니다."묵현이 처음으로 소원을 똑바로 보았다."대면식에서 보니 마마께서는 넷을 버거워하시더군요.""……""그럼 돌아가실 필요 없습니다. 직선으로 가시면 됩니다. 후계는 어차피 낳으셔야 합니다. 빨리 낳으시면, 그만큼 빨리 놓여나십니다."묵현은 거기서 한 박자 쉬었다."그리고 넷 중 제가 성공률이 가장 높습니다."접
이튿날 저녁, 태녀궁 접견실.소원은 상석에 단정하게 앉아 김이 올라오는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은은한 차 향이 접견실을 채우고 있었지만, 머릿속은 이미 실전 모드로 팽팽하게 돌아가고 있었다.상담이나 면담은 한이경, 아니 소원의 본업이자 가장 자신 있는 분야였다. 십이 년 동안 학원가를 누비며 학부모 상담만 천 번도 넘게 해온 짬밥이 어디 가겠는가.'똑같아. 상대 말을 경청하고, 원하는바를 빠르게 파악하고, 약속은 함부로 남발하지 않는다. 상대가 학부모가 아니라 거대한 수인족 남편이라는 것만 다르지. ……뭐, 생각해 보니 그게 세상에서 제일 큰 차이점이긴 하다만.'정각을 알리는 소리와 함께 접견실 문이 열렸다.태율은 문턱에서 허리를 깊게 숙여 인사했다. 궁의 문이 결코 낮은 편이 아닌데도, 그 어깨가 문틀에 걸릴 것만 같은 체구였다. 그가 들어서자 넓던 접견실이 한 칸쯤 줄어든 것 같았다.'못해도 190은 넘겠네, 저거.'"늑대 부족 공, 태율이 마마를 뵙습니다.""어서 오세요. 거기 서 있지 말고 편하게 앉으세요.""서서 고하겠습니다."'아, 완벽하게 외워왔네, 외워왔어.'어깨는 각을 잡아 꼿꼿이 펴고, 시선은 정면 한 점에 고정, 두 손은 옷솔기에 딱 붙이고. 소원의 눈에는 까다로운 입학사정관 앞에서 잔뜩 굳은 고삼 면접생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소신 태율은 늑대 부족을 대표하여 이 자리에 섰습니다. 화친의 의무를 다하겠습니다.""……의무요.""그렇습니다.""의무니까 하겠다는 거예요?""그렇습니다.""그게 뭐예요. 너무 기계적이잖아요. 듣기에 영 별로인데요."태율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기계가 무엇인지는 알지 못하나, 그리 느끼시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진지하게 저러니까 더 이상하네. AI한테 너 AI냐고 물어보면 아니라고 하는 꼴이잖아.'소원은 터져 나오려는 입꼬리를 겨우 눌렀다. 어제는 꼬리를 살랑거리던 여우 앞에서 웃음을 터뜨렸다가 본의 아니게 상처를 입혔으니, 오늘은 표정 관리라는 걸 좀 해야
"……달마다 정해진 날을 나누어 각 공의 처소에 납시어 화친의 의를 몸소 행하시되, 한 이레는 비워 심신을 보하시라 하셨나이다."예관이 두루마리를 또르륵 말았다. 반 시진짜리 고문 낭독이 드디어 끝났다. 소원은 단정하게 앉아 있었다. 겉으로만.'한 이레를 비운다는 건 한 달에 일주일만 쉰다는 거고…… 그럼 나머지 스무사흘은 매일……? 그 정도면 노동 아닌가? 스테이크도 매일 먹으면 질리는데, 아무리 남신이랑 자는 것도 과유불급이다 정말.'머릿속으로 출근 일수와 체력 계산기를 두드리던 소원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혼잣말이 툭 튀어나갔다."……그러니까, 돌아가면서 자라는 거지?"순간 대전이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예관의 손에서 두루마리가 미끄러질 뻔했고, 단 아래 늘어선 네 공의 눈빛이 일제히 굳었다. 대전 뒤편에 늘어선 각 부족 사신들 사이에서는 작게 숨을 들이켜는 소리까지 났다.소원은 순간 분위기가 얼음장처럼 싸해진 것을 느끼고 아차 싶었다.'아니, 원래 몸 주인은 수줍음이 많아서 모후 앞에서는 고개도 제대로 못 들던 셋째 딸이라 하지 않았나? 궁중 대전 한복판에서 던지기엔 지나치게 솔직한 표현이었네.'순간 당황해서 눈동자를 살짝 굴렸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소원은 속으로 침을 꼴깍 삼켰다.'아니, 근데 내가 틀린 말 했나? 말을 괜히 빙빙 돌려봤자 서로 간만 보고 기싸움만 길어지지. 핵심은 이거잖아.'소원은 슬그머니 마음을 가다듬고 표정을 뻔뻔하게 바꿨다."아니…… 제가 표현이 좀 거칠었을진 몰라도, 결론적으로 돌아가면서 뭘 하라는 건 맞잖아요? 돌려 말하면 전달만 안 되니까 요점만 짚자는 겁니다."뻔뻔하지만 정확한 정곡. 예관은 입만 뻐끔거렸고, 단 위에 앉은 모후는 말없이 소원을 내려다보았다. 화를 내는 것도, 제지하는 것도 아닌—마치 '네가 어디까지 하나 보자'는 듯한 무거운 침묵. 그 침묵이 오히려 소원에게 판을 깔아준 꼴이 되었다.소원은 십이 년 동안 학원가에서 단련된 '질문 정리' 버릇을 발동했다."그럼 다음 질문입
검은 머리카락이 은빛으로 변했다.'염색?''아니, 저건 그런 수준이 아닌데.'뿌리에서 번진 은빛이 순식간에 머리 전체를 집어삼켰다.그리고 쿵, 하고 바닥이 울렸다.남자의 뒤편에서 희미한 빛이 피어올랐다.처음엔 연기인 줄 알았다.아니었다.빛이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거대한 늑대였다.늑대는 대전 안에서 다 자라지 못했다. 몸이 커지는 속도가 천장보다 빨라서, 그대로 지붕을 통과해 바깥으로 솟아올랐다.열린 문 너머로 보였다.궁 서쪽 하늘에 늑대가 섰다.그게 신호였던 것처럼, 나머지 셋에게서도 동시에 빛이 터졌다.금발 남자의 손톱이 길게 뻗어 나왔다."어, 어."본인이 제일 놀랐다.그 뒤로 독수리가 솟아 동쪽 하늘에 날개를 폈다. 날갯짓을 하지 않는데 떠 있었다.검은 옷을 입은 남자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눈동자만 세로로 가늘어졌다.그 뒤에서 뱀이 흘러나와 북쪽 담을 따라 길게 누웠다. 비늘에 어두운 초록빛이 돌았고, 어디까지가 몸인지 끝이 보이지 않았다.그리고 마지막.적갈색 머리 남자의 옷자락 아래로 꼬리가 빠져나왔다.그 뒤에서 여우가 일어나 남쪽 하늘에 앉았다. 꼬리를 몸에 감고 앉은 자세가 어딘가 한가로웠다.네 마리가 궁의 사방에 섰다.빛으로 되어 있는데 털이 한 올씩 다 보였고, 그 너머로 하늘도 같이 보였다.소리는 나지 않았다.그런데도 거기 있다는 게 몸으로 느껴졌다. 아까부터 발바닥을 타고 올라오던 떨림이 저것들의 숨이었다.그리고 그림자가 없었다.하늘을 반이나 가리고 있는데 마당에 그림자가 한 점도 지지 않았다.소원은 입을 반쯤 벌린 채 서 있었다.'……이거 입장료 받아도 되겠는데.'무서운데 아름다웠다.아름다운데 무서웠다.그 와중에도 머리는 딴 데로 굴러갔다.'동서남북에 하나씩. 정확히 넷.''짐승 문양이 넷이었고, 저기 선 남자가 넷이고, 지금 뜬 게 넷. 저걸 뭐라고 하나? 신수? 저 신수가 남자들 거구나.'거기까지 세고 나서야 숨을 참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넷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
"오늘 마마께서 하실 일은 셋뿐이옵니다."회랑을 앞서 걸으며 상궁이 손가락 세 개를 폈다."폐하 앞에 나아가 절을 올리시고, 서약문을 낭독하시고, 책봉을 받으십니다. 그게 답니다."'그게 다라니.''그 셋 다 처음인데.'"절은 어떻게 하는데요.""……예?"상궁의 걸음이 반 박자 늦어졌다."아니, 그러니까. 오늘 같은 날은 평소랑 다른 게 있을 거 아니에요. 뭐, 각도라든가.""……무릎을 먼저 놓으시고, 손은 이마 높이로 모으신 다음, 상체를 세 번에 나누어 낮추시면 되옵니다. 세 번째에서 잠깐 멈추셔야 하고요."'세 번에 나눠서. 세 번째에 멈춤.''각도는 끝까지 안 알려주네.'소원은 걸으면서 손을 어정쩡하게 이마 근처로 들어 올려봤다."마마. 지금 하시면 아니 되옵니다.""아, 네."손을 내렸다.상궁이 다시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소원은 그 등을 보며 속으로 셌다.'아니 되옵니다.''오늘 아침부터 벌써 네 번째.'거대한 문 앞에서 상궁이 멈춰 섰다."여기서부터는 혼자 드셔야 합니다.""네?""단까지는 아무도 따라 들지 못하옵니다."소원이 뭐라 대꾸하기도 전에 문이 열렸다.대전은 사람으로 가득했다.그리고 정면 단 위에, 앉아 있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저 사람이구나.'설명은 필요 없었다.대전 전체가 그 한 사람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으니까.모후였다.아직 물러나지 않은, 지금 이 나라의 황제.'그러니까 나는 오늘 왕이 되는 게 아니구나.''저 사람 밑에서 후계자 자리에 앉는 거구나.'그걸 알아챈 순간 오히려 숨이 트였다.오늘 하루는 뭘 결정해야 하는 사람이 자기가 아니라는 뜻이었으니까.붉은 융단이 단까지 곧게 깔려 있었다.소원은 그 위를 걸었다.단 아래 왼편, 대신들 앞줄에 여자 하나가 서 있었다.소원과 이목구비가 비슷했다.나이가 조금 더 들었고, 훨씬
책봉식을 하루 앞둔 밤, 태녀궁의 대전은 이미 잠들어 있었다. 그러나 정작 태녀의 침소만은 예외였다.침소 밖 회랑에서는 어린 궁녀 둘이 등을 맞대고 서서 소곤거리고 있었다."낮부터 지금까지 한 번을 안 깨셨다며?""의녀님 말로는 맥은 멀쩡하시다는데, 그게 더 이상하지 않아? 책봉식 전날 그렇게 곯아떨어지시는 게.""난 또 무슨 큰일 난 줄 알고. 하긴 내일부터는 진짜 하루도 못 쉬시겠지. 그 네 분 공들도 정식으로 다 뵈어야 하고.""그러게. 난 그중에 독수리 부족 공이 제일 걱정이더라. 아직 애 티가 안 벗겨지셨던데.""그래도 이번엔 넷이니 낫지. 모후 마마 때는 다섯이었다며. 그중 하나는 본토 큰 부족도 아니고 군소 부족 출신이었다던데.""그러니까 다들 저렇게 눈에 불을 켜고 있는 거 아니겠어. 세가 기울면 다음엔 그 자리, 자기네 차례가 아니게 될 수도 있으니까.""쉿, 목소리 낮춰. 의녀님 나오신다."궁녀들이 황급히 흩어졌다.서령이 등롱을 들고 안으로 들어섰다."마마, 내일이 책봉식이옵니다."궁 의녀 서령이 나직하게 말을 건넸다. 침상에 누운 태녀는 대답이 없었다. 눈은 뜨고 있었는데 초점이 이상했다. 방을 처음 보는 사람처럼, 서령의 얼굴도 처음 보는 사람처럼 쳐다보고 있었다.사실 그건 정확한 관찰이었다. 지금 이 몸 안에 들어와 있는 정신은,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이 세계에 존재하지도 않았으니까.--------------------------------------------------------------------------------------------------------------몇 시간 전, 다른 세계의 서울 어느 학원 건물.자정을 넘긴 강의실에 불빛 하나가 켜져 있었다. 국어 강사 한이경은 다음 날 라이브 특강에 쓸 자료를 다듬느라 아직 퇴근을 못 하고 있었다."자, 여러분. 이번 9월 모평 독서 8번 보면요."한이경은 혼잣말로 강의를 연습했다. 늦게까지 남아 있으면 종종 생기는 버릇이었다. 듣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