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황태자의 저주를 풀려다, 그와 키스해야만 안정되는 계약에 묶였다. 문제는 그에게 걸린 것이 저주가 아니라 계약이었다는 것. 계약을 우회하기 위해 새로운 술식을 만든 순간, 한 문장이 잘못 해석됐다. “해방되고 싶다.” 그 결과 황태자는 저주뿐 아니라 옷이라는 구속에서도 해방되기 시작했고, 나는 그와 일정 거리 이상 떨어질 수 없게 됐다. 더 큰 문제는 계약을 안정시키는 가장 빠른 방법이— 그와 입을 맞추는 것. 그리고 아무도 내가 황태자의 곁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선 안 된다. 그래서 왕립 마도학회의 고위 마법사였던 나는 하루아침에 그의 전속 시녀가 되었다. 누군가 문을 열면 그의 뒤에 숨고, 정체를 들킬 것 같으면 품 안으로 파고들고, 계약이 폭주하면 다시 입을 맞춘다. 처음에는 전부 계약 때문이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이상해졌다. 계약이 멀쩡한데도, 그는 내 손을 늦게 놓기 시작했다.
View More001. 황태자의 비밀 의뢰
의뢰인은 금액부터 올렸다. “아르델 경께서 통상 받으시는 금액의 세 배를 지급하겠습니다.” 펜촉이 종이 위에서 멈췄다. 이런 경우는 둘 중 하나였다. 환자가 곧 죽거나, 죽으면 나라가 흔들리거나. 나는 맞은편 남자의 옷깃에 박힌 황실 문양을 한 번 보고는 장부를 덮었다. “다섯 배.” 에드윈이 잠시 침묵했다. “네 배.” “좋습니다. 마차는 밖에 있습니까?” 그가 아주 짧게 숨을 내쉬었다. 흥정을 끝낸 사람의 안도가 아니라, 이제 정말 나를 데려가도 되는지 마지막으로 확인하는 얼굴이었다. “준비되어 있습니다.” 가방에는 필요한 것만 넣었다. 마석 펜 두 자루, 빈 술식지, 분석용 결정, 얇은 장갑. 외투를 걸치고 연구실 불을 끄려다 책상 위에 펼쳐 둔 미완성 논문을 한 번 봤다. 국가 기밀 의뢰는 대개 연구비보다 뒤처리가 더 비쌌다. 이번에는 얼마나 비쌀지 아직 몰랐다. *** 마차 창문에는 차폐 마법이 걸려 있었다. 풍경은 보이지 않았지만 바퀴가 돌을 밟는 간격과 두 번 열린 결계, 마지막 경사로의 길이만으로 위치는 짐작할 수 있었다. 황궁. 그것도 정문이 아니었다. 마차에서 내리자 오래된 별궁의 후원이 나왔다. 밤인데도 경비가 적었다. 대신 눈에 들어오는 병사들은 하나같이 평범한 황궁 경비가 아니었다. 문장이 없는 갑옷, 검자루에서 한 뼘도 떨어지지 않는 손, 방문자를 쳐다보지 않는 시선. 적게 두고 강하게 막는다. 비밀을 지키려는 배치였다. 에드윈이 앞장서며 말했다. “여기서부터 보시는 것은 모두 외부에 발설할 수 없습니다.” “기억까지 지우라는 조건이면 추가 요금입니다.” 그가 돌아봤다. “농담이십니까?” “아니요.” 이번에는 확실하게 한숨이 들렸다. 별궁 안에는 하인도 시녀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두 개의 문을 지나 마지막 복도 끝에 도착하자 에드윈이 직접 손잡이를 잡았다. “전하.” 그 한마디로 의뢰인의 정체가 확정됐다. 의뢰료를 두 배는 더 불렀어야 했다. 방 안의 남자는 창가에 서 있었다. 금장 제복도, 공식 초상화에서 보던 망토도 없었다. 검은 셔츠와 짙은 바지뿐인 간소한 차림이었는데도 오히려 체격이 더 선명했다. 넓은 어깨에서 허리까지 떨어지는 선이 반듯했고, 고개가 이쪽으로 돌아오자 어두운 방 안에서도 호박색 눈이 먼저 빛을 받았다. 레오니스 발테른. 발테른 제국의 황태자. “비비안 아르델 경인가.” 목소리는 생각보다 낮았다. “그렇습니다, 전하.” “늦은 시간에 불렀군.” “시간은 괜찮습니다. 비용도 충분히 받기로 했고요.” 에드윈의 눈이 잠깐 감겼다. 레오니스는 나를 몇 초 보더니 입가를 거의 움직이지 않은 채 말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피곤한 사람의 얼굴이었다. 정확히는 얼굴보다 자세가 그랬다. 등을 곧게 세우고 있었지만 왼손이 창틀을 잡은 힘이 조금 과했다. 관절이 희게 뜰 만큼 힘이 들어가 있었다. 통증이 있다는 뜻이었다. 나는 가방을 테이블 위에 올렸다. “보겠습니다.” 레오니스가 셔츠 단추를 세 개 풀었다. 검은 천이 벌어지며 쇄골 아래 피부가 드러났다. 그리고 그 아래에서 검푸른 선들이 심장을 향해 뻗어 있었다. 처음에는 문신처럼 보였다. 가까이 가자 아니었다. 피부에 새겨진 게 아니라 피부 아래 흐르는 마력 자체가 글자가 되어 있었다. 나는 장갑을 벗었다. “손대겠습니다.” “허락하지.” 손끝에 가느다란 빛을 올렸다. 마력선을 문양 위에 겹치자 곧바로 반발이 왔다. 저주라면 침입자를 밀어내거나 마력을 빨아들여야 했다. 그런데 이건 내 마력을 읽었다. 누가 접근했는지. 어떤 권한으로 들어오는지. 확인한 뒤에야 안쪽 문장을 아주 조금 보여 줬다. 나는 손을 멈췄다. “언제부터입니까?” “약 넉 달 전.” “황위 계승과 관련된 의식을 치른 직후였습니까?” 레오니스의 눈이 아주 조금 가늘어졌다. “그걸 어떻게 알았지?” 허공에 네 개의 단어를 적었다. 대상. 조건. 명령. 대가. 그리고 문양 가장 깊은 곳에 숨어 있던 선 하나를 잡아당겼다. 빛나는 문장이 공중에서 떨렸다. 에드윈이 물었다. “무엇입니까?” 나는 그 문장을 끝까지 읽은 뒤 레오니스를 바라봤다. “전하께 걸린 건 저주가 아닙니다.” 방 안의 공기가 멎었다. 나는 마지막 단어를 덧붙였다. “계약입니다.”043. 엘로이즈 드 라베른다음 날 아침, 별궁에 꽃이 들어왔다.흰 장미와 옅은 금빛 리본.황실에서 허락한 사람만 쓸 수 있는 색이었다.“누가 보낸 겁니까?”내가 카드에 손을 뻗자 에드윈이 먼저 이름을 읽었다.“라베른 공작 영애입니다.”레오니스가 보고서에서 눈을 들었다.“엘로이즈가?”이름을 부르는 게 자연스러웠다.나는 어제 일을 떠올렸다.오래 알면 이름을 편하게 부를 수 있다.아무 문제도 없는 일이었다.“오늘 오후에 방문하겠답니다. 황후 폐하께서도 허락하셨습니다.”에드윈은 마지막 문장을 조금 무겁게 말했다.허락이라기보다 지시일 가능성이 컸다.라베른 공작가는 황후의 친정과 가까웠다. 그리고 엘로이즈 드 라베른은 오래전부터 황태자비 후보로 이름이 오르내렸다.“거절하시겠습니까?”“거절할 이유가 없다.”레오니스는 다시 보고서를 봤다.나도 꽃을 옮겼다.이유가 없는 일은 하면 된다.이유가 너무 많은 일보다 간단했다.오후 세 시, 엘로이즈는 약속 시간보다 한 치도 빠르거나 늦지 않게 도착했다.밝은 금발은 햇빛을 받은 비단처럼 정돈돼 있었고, 연청색 드레스는 화려하면서도 과하지 않았다.걸음은 가벼웠고 미소는 정확했다.나와는 모든 게 반대였다.“오랜만이에요, 레오니스.”전하도, 저하도 아니었다.레오니스는 놀라지 않았다.“귀국했다는 말은 들었다.”“그런데 먼저 보러 오지는 않았죠.”“바빴다.”“여전하네요.”엘로이즈가 웃었다.레오니스는 웃지 않았지만 불편해 보이지도 않았다.둘 사이에는 설명할 필요 없는 시간이 있었다.나는 차를 내려놓고 한 걸음 물러났다.엘로이즈의 시선이 내게 닿았다.“새 시녀인가요?”“전속 시녀다.”레오니스가 바로 대답했다.어제 학회에서 했던 말과 같았다.그런데 이번에는 이상하게 다른 의미로 들렸다.“이름은요?”“비비라고 합니다.”내가 예를 갖추자 엘로이즈가 고개를 기울였다.“예쁜 이름이네요. 전속 시녀를 두지 않던 사람이 마음을 바꾸게 할 만큼 유능한가 봐요.”“필요해서 두
042. 필요의 뜻필요하다.그 한마디 뒤로 마차 안이 이상하게 조용해졌다.나는 먼저 계약을 확인했다.문양 없음.거리 안정.의복 고정 정상.당장 처리해야 할 위급 상황도 없었다.“무슨 일에 필요하십니까?”레오니스의 입술이 열렸다가 닫혔다.그제야 그도 답을 준비하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별궁에 도착하면 말하지.”“지금 말씀하기 어려운 일입니까?”“그대는 질문이 많군.”“정확한 업무를 알아야 준비합니다.”그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조용히 있을 준비를 해.”말이 되지 않았다.그러나 나는 더 묻지 않았다. 황태자가 일을 만들겠다면 별궁에 도착할 때까지는 기다릴 수 있었다.문제는 내가 이상하게 안도했다는 점이었다.데미안과 남아 자료를 보는 편이 연구에는 훨씬 유리했다.그런데 필요하다는 말을 듣자마자 돌아오는 길이 싫지 않았다.나는 그 감각을 피로 항목에 넣었다.별궁에 도착하자 에드윈이 현관에서 우리를 맞았다.“예정보다 두 시간 일찍 오셨군요.”“일정이 끝났다.”“학회 쪽에서는 방금 추가 자료 반출 승인서를 보냈는데요.”나는 레오니스를 봤다.그는 외투를 벗으며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내일 보면 된다.”에드윈이 서류를 넘겼다.“그보다 전하, 오늘 남은 일정은 없습니다.”역시 없었다.나는 손을 내밀어 레오니스의 외투를 받았다.시녀의 일이니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그런데 외투를 놓는 순간 그가 말했다.“차.”“지금 준비하겠습니다.”“서재로.”그게 업무의 전부였다.나는 차를 끓이고, 온도를 맞추고, 서재 탁자에 내려놓았다.레오니스는 보고서를 읽었다.십 분이 지났다.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전하.”“듣고 있다.”“저를 부르신 이유가 차입니까?”그가 펜을 내려놓았다.“전속 시녀에게 차를 부탁하는 게 이상한가?”“학회 연구를 중단시킬 만큼 급한 일은 아닙니다.”“그 남자가 아니어도 자료는 볼 수 있어.”“데미안은 금고 출입 권한이 있습니다.”“이름을 편하게 부르는군.”나는 멈췄다.그
042. 필요의 뜻필요하다.그 한마디 뒤로 마차 안이 이상하게 조용해졌다.나는 먼저 계약을 확인했다.문양 없음.거리 안정.의복 고정 정상.당장 처리해야 할 위급 상황도 없었다.“무슨 일에 필요하십니까?”레오니스의 입술이 열렸다가 닫혔다.그제야 그도 답을 준비하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별궁에 도착하면 말하지.”“지금 말씀하기 어려운 일입니까?”“그대는 질문이 많군.”“정확한 업무를 알아야 준비합니다.”그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조용히 있을 준비를 해.”말이 되지 않았다.그러나 나는 더 묻지 않았다. 황태자가 일을 만들겠다면 별궁에 도착할 때까지는 기다릴 수 있었다.문제는 내가 이상하게 안도했다는 점이었다.데미안과 남아 자료를 보는 편이 연구에는 훨씬 유리했다.그런데 필요하다는 말을 듣자마자 돌아오는 길이 싫지 않았다.나는 그 감각을 피로 항목에 넣었다.별궁에 도착하자 에드윈이 현관에서 우리를 맞았다.“예정보다 두 시간 일찍 오셨군요.”“일정이 끝났다.”“학회 쪽에서는 방금 추가 자료 반출 승인서를 보냈는데요.”나는 레오니스를 봤다.그는 외투를 벗으며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내일 보면 된다.”에드윈이 서류를 넘겼다.“그보다 전하, 오늘 남은 일정은 없습니다.”역시 없었다.나는 손을 내밀어 레오니스의 외투를 받았다.시녀의 일이니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그런데 외투를 놓는 순간 그가 말했다.“차.”“지금 준비하겠습니다.”“서재로.”그게 업무의 전부였다.나는 차를 끓이고, 온도를 맞추고, 서재 탁자에 내려놓았다.레오니스는 보고서를 읽었다.십 분이 지났다.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전하.”“듣고 있다.”“저를 부르신 이유가 차입니까?”그가 펜을 내려놓았다.“전속 시녀에게 차를 부탁하는 게 이상한가?”“학회 연구를 중단시킬 만큼 급한 일은 아닙니다.”“그 남자가 아니어도 자료는 볼 수 있어.”“데미안은 금고 출입 권한이 있습니다.”“이름을 편하게 부르는군.”나는 멈췄다.그
041. 비비는 내 전속 시녀입니다데미안은 회의가 끝났는데도 돌아가지 않았다.정확히는 내 옆에서 책을 세 권째 펼치고 있었다.“이 문장도 보세요. 계승 계약에서 수락은 한 번인데, 유지 의사는 반복해서 확인합니다.”“주기가 적혀 있어요?”“월식마다.”나는 주석을 빠르게 베꼈다.데미안이 종이 한쪽을 눌러 줬다. 오래 함께 일할 때 하던 버릇이었다.“글씨는 여전하네요.”“알아볼 수 있으면 됩니다.”“본인만 알아보잖아요.”“그러니까 제 기록이죠.”그가 웃었다.맞은편에서는 책장이 넘어가는 소리가 났다.레오니스는 조금 전부터 같은 페이지를 보고 있었다.나는 책의 제목을 확인했다. 짧은 판례문 세 개가 전부인 페이지였다.그가 읽는 속도로는 이미 열 번도 넘게 넘겼어야 했다.“전하, 필요한 부분을 찾지 못하셨습니까?”“찾는 중이다.”“어떤 단어를 찾으시는지 말씀해 주시면—”“비비.”학회에서 들을 이름이 아니었다.주변 연구자들의 펜이 잠깐 멎었다.나는 레오니스를 똑바로 봤다.그도 실수를 깨달은 듯했지만 말을 고치지는 않았다.“잠깐 와.”데미안이 나와 레오니스를 번갈아 봤다.“비비?”“황궁에서 쓰는 가명입니다.”“가명까지 필요할 정도로 위험한 일입니까?”“그래서 국가 기밀이라고 했잖아요.”나는 펼쳐 둔 자료를 정리했다.데미안이 종이를 놓지 않았다.“저녁까지 계실 거면 금고 자료도 꺼내 드리죠. 아르델 경 혼자서는 반출 허가가 안 날 겁니다.”맞는 말이었다.지금 끊기에는 아까운 실마리도 있었다.“그럼 부탁할게요.”“안 된다.”대답은 레오니스에게서 나왔다.데미안의 눈썹이 올라갔다.레오니스는 그제야 책을 덮었다.“오늘 자문은 여기까지다. 아르델 경은 황궁으로 돌아간다.”“전하, 아직 예정 시간이 남았습니다.”“별궁에서 처리할 업무가 있다.”처음 듣는 업무였다.나는 그를 살폈다. 문양은 보이지 않았고 옷도 멀쩡했다. 거리 제한이 흔들릴 만큼 떨어져 있지도 않았다.데미안이 조심스럽게 물었다.“급한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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