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ICIAR SESIÓN말발 하나로 연 수십억을 벌던 국어 일타강사 한이경. 눈 떠보니 태녀의 몸이었고, 서약문 한 줄에 남편이 넷이 됐다. 늑대, 여우, 뱀, 독수리. 발현한 수인들은 이미 눈빛부터 달라졌다. 이 나라 태녀의 첫째 의무는 후계자. 넷 중 누구와 밤을 보내고, 어느 부족의 아이를 품을 것인가. 부족들은 눈에 불을 켜고, 언니는 웃으며 뒤통수를 노린다. 침소도 정치도 말로 밀어붙여야 하는데, 이 남자들 하나같이 만만치 않다.
Ver más책봉식을 하루 앞둔 밤, 태녀궁의 대전은 이미 잠들어 있었다. 그러나 정작 태녀의 침소만은 예외였다.
침소 밖 회랑에서는 어린 궁녀 둘이 등을 맞대고 서서 소곤거리고 있었다.
"낮부터 지금까지 한 번을 안 깨셨다며?"
"의녀님 말로는 맥은 멀쩡하시다는데, 그게 더 이상하지 않아? 책봉식 전날 그렇게 곯아떨어지시는 게."
"난 또 무슨 큰일 난 줄 알고. 하긴 내일부터는 진짜 하루도 못 쉬시겠지. 그 네 분 공들도 정식으로 다 뵈어야 하고."
"그러게. 난 그중에 독수리 부족 공이 제일 걱정이더라. 아직 애 티가 안 벗겨지셨던데."
"그래도 이번엔 넷이니 낫지. 모후 마마 때는 다섯이었다며. 그중 하나는 본토 큰 부족도 아니고 군소 부족 출신이었다던데."
"그러니까 다들 저렇게 눈에 불을 켜고 있는 거 아니겠어. 세가 기울면 다음엔 그 자리, 자기네 차례가 아니게 될 수도 있으니까."
"쉿, 목소리 낮춰. 의녀님 나오신다."
궁녀들이 황급히 흩어졌다.
서령이 등롱을 들고 안으로 들어섰다.
"마마, 내일이 책봉식이옵니다."
궁 의녀 서령이 나직하게 말을 건넸다. 침상에 누운 태녀는 대답이 없었다. 눈은 뜨고 있었는데 초점이 이상했다. 방을 처음 보는 사람처럼, 서령의 얼굴도 처음 보는 사람처럼 쳐다보고 있었다.
사실 그건 정확한 관찰이었다. 지금 이 몸 안에 들어와 있는 정신은,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이 세계에 존재하지도 않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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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시간 전, 다른 세계의 서울 어느 학원 건물.
자정을 넘긴 강의실에 불빛 하나가 켜져 있었다. 국어 강사 한이경은 다음 날 라이브 특강에 쓸 자료를 다듬느라 아직 퇴근을 못 하고 있었다.
"자, 여러분. 이번 9월 모평 독서 8번 보면요."
한이경은 혼잣말로 강의를 연습했다. 늦게까지 남아 있으면 종종 생기는 버릇이었다. 듣는 사람이 없어도 상관없었다. 말은 입 밖으로 내야 정리가 되는 성격이었다. 십 년 넘게 이 짓을 하다 보니 이제는 잠꼬대도 존댓말로 한다는 게 동료 강사들 사이의 오랜 농담이었다.
"'인격체'랑 '인격 종'을 구분 못 해서 다들 틀리더라고요. 종 차별주의 얘기하다가 AI까지 끼워 넣으니까 패닉 오는 거예요. 근데 이거 어려운 거 아니에요. 지문에 다 있어요. 있는 것만 읽으면 됩니다. 포인트는 세 개예요."
혼자 손가락까지 세 개 펴 보이며 강조하다가, 다음 슬라이드로 넘어갔다.
"13번, 어댑터 스위칭 방식이랑 전압 변환. 이거 과학 지문이라고 지레 겁먹지 마시고요. 원리 하나만 잡으면 사례 적용은 그냥 대입 문제예요. 평가원이 올해 9모는 작년 9월 모평 수준으로 맞췄다는데, 제가 볼 땐……"
그때 강의실 문이 빼꼼 열리며 조교가 에너지 드링크를 들고 들어왔다.
"쌤, 아직도 안 가셨어요? 이거라도 드세요."
"어, 고마워."
한이경이 음료를 받으며 노트북에서 눈을 떼지 않고 대꾸했다.
"근데 내일 스케줄이 뭐였지? 나 지금 머리가 하나도 안 돌아가."
"내일 오전에 이거 해설강의 하시고, 오후엔 바로 실전 모의고사 문제 검토하셔야 해요. 그거 다음 주에 배포 나가는 거라."
"아, 맞다. 그거."
"근데 제가 미리 훑어봤는데, 문제들이 좀 많이 어려운 것 같아요. 특히 독서 쪽이요."
"어렵다는 게 무슨 뜻인데. 지문이 긴 거야, 선지가 꼬인 거야."
"둘 다요."
한이경이 캔을 따며 짧게 웃었다.
"내일 가서 보고 얘기하자. 지금 그거 볼 정신 없어."
조교가 인사하고 문을 닫고 나갔다. 한이경은 음료를 한 모금 마시고 다시 슬라이드로 돌아왔다. 열두 번째 장이었다.
"자, 그러니까 결국 이것도, 정보량 문제지……"
말이 거기서 끊겼다. 다음 문장을 잇기도 전에 눈꺼풀이 내려앉았다. 혼잣말이 점점 느려지더니 완전히 멈췄다. 한이경은 책상에 엎드린 채 잠들었다. 알람은 새벽 여섯 시로 맞춰져 있었다.
그것이 한이경으로서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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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녀궁.
서령은 대답 없는 태녀를 한참 들여다보다가 이마에 손을 짚었다.
"열은 없으십니다만……"
"저는……"
태녀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다음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저? 방금 내가 저는 이라고 했나?'
어디서 주워들은 단어인지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이었다. 뒤에 붙일 말이 없어서 그대로 허공에 떴다. 서령이 눈을 깜빡였다. 이 나라 태녀가 스스로를 저라고 칭한 적은 여태 한 번도 없었다.
"저라니요, 마마. 어디 편찮으신 겁니까?"
"……아니, 아니요. 그냥, 그렇게 불러도 되나 해서요."
말끝이 저도 모르게 존댓말과 반말 사이를 오갔다. 서령은 그 부자연스러움을 눈치챘지만 내일이 코앞이라 캐묻지 않기로 했다.
"밤새 식은땀을 흘리셨습니다. 맥이 흐트러지셔서 걱정했사온데, 지금 보니 다행히 안정을 찾으신 듯합니다."
서령이 자리끼 옆의 은잔에 탕약을 따랐다.
"안정탕이옵니다. 내일을 생각하시면 오늘 밤은 푹 주무셔야 하옵니다."
이 몸의 새 주인은 — 이제부터는 이 나라 사람들이 부르는 이름을 빌려 소원이라 부르기로 하자 — 잔을 받아 들면서 속으로 딴생각을 했다.
'내일. 내일 뭐. 책봉식이 정확히 뭔데.'
물어보고 싶었지만 물어볼 수 없었다. "책봉식이 뭔가요"라고 물으면 그건 그것대로 이상한 사람 취급받을 게 뻔했다. 일단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때웠다.
"내일부터는 온 나라가 마마만 보고 있을 것이옵니다. 책봉식이 끝나면 더는 물릴 수 없는 자리이니, 오늘 밤은 온전히 마마의 것으로 쓰십시오."
'물릴 수 없는 자리라니, 뭔가 단단히 잘못된 것 같은데.'
소원은 속으로 비명을 질렀지만 겉으로는 그저 눈만 깜빡였다. 국어 지문은 십 년 넘게 뜯어봤어도, 지금 이 상황을 풀어줄 지문 같은 건 세상에 없었다.
서령이 탕약을 다 마신 걸 확인하고 잔을 거두며 일어섰다.
"하루 종일 잠들어 계셨습니다. 서고에서 급히 사람을 보내 예복 치수를 다시 재갔고, 상궁들이 내일 새벽부터 단장을 시작할 것이옵니다."
말을 잇다가 서령이 문득 멈추고 소원을 똑바로 바라봤다.
"괜찮으십니까."
'안 괜찮다고 하면 어떻게 되는 건데.'
소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동작이 스스로도 어색하게 느껴졌다. 이 몸이 원래 하던 방식이 아닌 게 분명했다.
서령은 그 끄덕임에 안심한 얼굴을 하고는 등롱을 챙겨 문가로 향했다. 나가려다 말고 뒤돌아 한마디를 보탰다.
"오늘 밤은 아무도 들이지 말라 일러두었습니다. 내일 전까지는 온전히 혼자 계실 수 있도록."
문이 닫혔다. 발소리가 복도 저편으로 멀어졌다.
혼자 남은 소원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앉았다. 창밖으로 등불이 줄줄이 걸려 있었다. 지붕이 몇 겹으로 겹쳐 있었고, 그 너머로도 지붕, 또 지붕. 그 규모가 이 모든 게 꿈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고 있었다.
'정리하자. 하나, 나는 지금 다른 사람 몸에 들어와 있다. 둘, 이 몸은 내일 책봉식이란 걸 한다. 셋, 그 자리는 되돌릴 수 없다고 했다. 넷, 나는 이 사람이 누군지도, 이 나라가 어딘지도 모른다.'
이름조차 몰랐다. 열두 해 동안 지문 읽을 때 제일 먼저 하던 게 인물 이름 확인이었는데, 정작 자기 이름을 모르는 게 제일 답답했다.
베개맡에 종이 뭉치가 눈에 들어온 건 그때였다. 붉은 인장이 찍힌 문서 몇 장이 이불 아래 반쯤 깔려 있었다. 누군가 낮에 가져다 놓고 미처 치우지 못한 모양이었다.
손이 저절로 그쪽으로 움직였다. 글자가 보이면 일단 읽고 보는 건, 몸이 바뀌어도 안 바뀌는 버릇이었다. 중요한 부분에 밑줄을 그으려고 반사적으로 손가락을 뻗다가, 형광펜이 없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이 나라엔 형광펜이 없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까지 미치자 갑자기 억울해졌다. 그 물건 하나 없이 십 년 넘게 만든 판서 습관을 여기서 다시 만들어야 한다니.
맨 위 장 옆에 적힌 이름을 찾았다. 소원(昭遠). 낯선 두 글자였지만, 지금은 이거라도 있는 게 어디냐 싶었다. 속으로 몇 번 되뇌었다. 소원, 소원. 나쁘지 않은 이름이었다.
문서 내용까지는 눈에 잘 안 들어왔다. 다만 아래쪽에 낯선 서명이 여럿 나란히 찍혀 있다는 것 정도만 확인했다. 누구 것인지, 뭘 요구하는 건지는 지금 알아볼 상태가 아니었다. 이 나라가 어떻게 굴러가는지도, 저 서명이 몇 명 몫인지도, 전부 내일 이후의 문제였다.
'일단 살아서 내일을 맞는 게 먼저다.'
문서를 도로 이불 밑으로 밀어 넣고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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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각, 도성 안 독수리 부족 사저에서는 청운이 거울 앞에서 인사말을 연습하고 있었다.
"소신, 독수리 부족을 대표해 이 자리에 서게 된 청운이라 하옵니다."
몇 번을 반복해도 어딘가 뻣뻣했다. 뒤에서 지켜보던 유모가 웃음을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공자님, 그리 긴장하실 것 없습니다. 어차피 한 달에 몇 번 뵐 얼굴, 첫인상 하나로 정해지는 것도 아니고요."
"긴장 안 했습니다. 그냥 예의를 갖추는 것뿐입니다."
청운이 정색하며 대꾸했다. 목소리가 살짝 높아진 걸 본인만 눈치채지 못했다.
"게다가 이 방 안에서 내가 가장 젊고 또 무예도 가장 뛰어나니까. 예쁘기도 하고. 마마께서도 금방 알아보실 겁니다."
유모는 대꾸 없이 그저 웃었다. 청운은 그 웃음의 의미를 알아채지 못한 채, 거울 속 자신을 향해 다시 허리를 곧게 폈다. 내일이면 드디어 소문으로만 듣던 태녀를 직접 뵙는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 벌써 심장이 두 배로 뛰고 있다는 건, 본인도 아직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그날 밤 도성 안에서 잠 못 이루는 사람이 저 하나만은 아니라는 것도, 물론 그는 알 리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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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녀궁. 창밖이 부옇게 밝아왔다. 소원이 새 이름을 입안으로 채 다 굴려보기도 전이었다.
그리고 문이, 이번엔 아무 기척도 없이 활짝 열렸다.
"마마! 어찌 아직도 침소에……! 시각이 벌써 이리 됐사온데!"
여인 여럿이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누구는 예복을, 누구는 빗과 경대를, 누구는 향합을 들고 있었다.
"세숫물 먼저 대령하라!"
"머리부터 손봐야 시간을 맞춥니다!"
"예복이 아직 마지막 손질이……!"
"상궁 어른, 그러다 다들 부딪칩니다!"
서로 다른 지시가 동시에 쏟아졌다. 소원은 뭐라 말할 틈도 없이 사방에서 뻗어오는 손에 옷고름이 풀리고 머리카락이 걷어 올려졌다. 국어 시험이었다면 이쯤에서 "가장 적절한 것은?" 하고 골라 줬을 텐데, 지금은 선택지 자체가 없었다. 넷도 아니고 다섯도 아니고, 그냥 전부 동시에 밀려드는 상황이었다.
'일단 오늘 하루만 버티자. 문제 만들다가 죽는 것보다야 이게 낫겠지, 아마. 확신은 없지만.'
책봉식이,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6화. 시범이라고 해 두지요사흘째 저녁, 태녀궁 접견실.문이 열렸고, 묵현이 들어왔다.인사는 짧았다."뱀 부족 공, 묵현입니다."그리고 소원이 앉으라는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는 이미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어제 그 늑대는 앉으라고 몇 번을 말해야 앉았는데.'검은 옷에 검은 머리. 불빛이 닿는 자리마다 머리카락에 어두운 초록빛이 돌았다.허리춤에는 작은 약재 주머니가 매달려 있었고, 은은하게 쌉싸름한 풀 냄새가 났다.연한 황록빛 눈동자는 소원을 보는 것도, 안 보는 것도 아닌 묘한 각도에 머물러 있었다."용건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인사 다음이 바로 용건이었다. 날씨 얘기도, 안부도 없었다.묵현이 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서안 위에 올려놓았다. 두루마리도 아니었다. 접힌 종이 한 장.소원은 그것을 펼쳤다.> **약재 전매권**끝이었다. 소원은 종이를 뒤집어 봤다. 뒷면은 백지였다."이게 다예요?""다입니다.""보통 이런 건 이유라든가, 근거라든가, 부족의 공적이라든가 그런 걸 쭉 쓰지 않아요?""필요 없는 걸 쓰면 읽는 쪽이 피곤합니다."소원은 종이를 손가락으로 톡 튕겼다."근데 좀 당황스럽네요.""무엇이 말씀입니까.""보통 이런 자리엔 내가 뭘 해 드리겠다, 약속을 들고 오지 않나요? 첫 만남부터 요구서를 내미시니까."묵현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약속은 지키지 못하면 빚이 됩니다. 요구는 거래고요. 저는 빚은 지지 않습니다.""……그럼 그 거래, 대가는요? 이걸 주면 뱀 부족은 뭘 주는데요?""후계입니다. 확실하게.""확실하게라는 말을 그렇게 쉽게 해요?""쉽게 하는 말이 아닙니다."묵현이 처음으로 소원을 똑바로 보았다."대면식에서 보니 마마께서는 넷을 버거워하시더군요.""……""그럼 돌아가실 필요 없습니다. 직선으로 가시면 됩니다. 후계는 어차피 낳으셔야 합니다. 빨리 낳으시면, 그만큼 빨리 놓여나십니다."묵현은 거기서 한 박자 쉬었다."그리고 넷 중 제가 성공률이 가장 높습니다."접
이튿날 저녁, 태녀궁 접견실.소원은 상석에 단정하게 앉아 김이 올라오는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은은한 차 향이 접견실을 채우고 있었지만, 머릿속은 이미 실전 모드로 팽팽하게 돌아가고 있었다.상담이나 면담은 한이경, 아니 소원의 본업이자 가장 자신 있는 분야였다. 십이 년 동안 학원가를 누비며 학부모 상담만 천 번도 넘게 해온 짬밥이 어디 가겠는가.'똑같아. 상대 말을 경청하고, 원하는바를 빠르게 파악하고, 약속은 함부로 남발하지 않는다. 상대가 학부모가 아니라 거대한 수인족 남편이라는 것만 다르지. ……뭐, 생각해 보니 그게 세상에서 제일 큰 차이점이긴 하다만.'정각을 알리는 소리와 함께 접견실 문이 열렸다.태율은 문턱에서 허리를 깊게 숙여 인사했다. 궁의 문이 결코 낮은 편이 아닌데도, 그 어깨가 문틀에 걸릴 것만 같은 체구였다. 그가 들어서자 넓던 접견실이 한 칸쯤 줄어든 것 같았다.'못해도 190은 넘겠네, 저거.'"늑대 부족 공, 태율이 마마를 뵙습니다.""어서 오세요. 거기 서 있지 말고 편하게 앉으세요.""서서 고하겠습니다."'아, 완벽하게 외워왔네, 외워왔어.'어깨는 각을 잡아 꼿꼿이 펴고, 시선은 정면 한 점에 고정, 두 손은 옷솔기에 딱 붙이고. 소원의 눈에는 까다로운 입학사정관 앞에서 잔뜩 굳은 고삼 면접생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소신 태율은 늑대 부족을 대표하여 이 자리에 섰습니다. 화친의 의무를 다하겠습니다.""……의무요.""그렇습니다.""의무니까 하겠다는 거예요?""그렇습니다.""그게 뭐예요. 너무 기계적이잖아요. 듣기에 영 별로인데요."태율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기계가 무엇인지는 알지 못하나, 그리 느끼시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진지하게 저러니까 더 이상하네. AI한테 너 AI냐고 물어보면 아니라고 하는 꼴이잖아.'소원은 터져 나오려는 입꼬리를 겨우 눌렀다. 어제는 꼬리를 살랑거리던 여우 앞에서 웃음을 터뜨렸다가 본의 아니게 상처를 입혔으니, 오늘은 표정 관리라는 걸 좀 해야
"……달마다 정해진 날을 나누어 각 공의 처소에 납시어 화친의 의를 몸소 행하시되, 한 이레는 비워 심신을 보하시라 하셨나이다."예관이 두루마리를 또르륵 말았다. 반 시진짜리 고문 낭독이 드디어 끝났다. 소원은 단정하게 앉아 있었다. 겉으로만.'한 이레를 비운다는 건 한 달에 일주일만 쉰다는 거고…… 그럼 나머지 스무사흘은 매일……? 그 정도면 노동 아닌가? 스테이크도 매일 먹으면 질리는데, 아무리 남신이랑 자는 것도 과유불급이다 정말.'머릿속으로 출근 일수와 체력 계산기를 두드리던 소원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혼잣말이 툭 튀어나갔다."……그러니까, 돌아가면서 자라는 거지?"순간 대전이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예관의 손에서 두루마리가 미끄러질 뻔했고, 단 아래 늘어선 네 공의 눈빛이 일제히 굳었다. 대전 뒤편에 늘어선 각 부족 사신들 사이에서는 작게 숨을 들이켜는 소리까지 났다.소원은 순간 분위기가 얼음장처럼 싸해진 것을 느끼고 아차 싶었다.'아니, 원래 몸 주인은 수줍음이 많아서 모후 앞에서는 고개도 제대로 못 들던 셋째 딸이라 하지 않았나? 궁중 대전 한복판에서 던지기엔 지나치게 솔직한 표현이었네.'순간 당황해서 눈동자를 살짝 굴렸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소원은 속으로 침을 꼴깍 삼켰다.'아니, 근데 내가 틀린 말 했나? 말을 괜히 빙빙 돌려봤자 서로 간만 보고 기싸움만 길어지지. 핵심은 이거잖아.'소원은 슬그머니 마음을 가다듬고 표정을 뻔뻔하게 바꿨다."아니…… 제가 표현이 좀 거칠었을진 몰라도, 결론적으로 돌아가면서 뭘 하라는 건 맞잖아요? 돌려 말하면 전달만 안 되니까 요점만 짚자는 겁니다."뻔뻔하지만 정확한 정곡. 예관은 입만 뻐끔거렸고, 단 위에 앉은 모후는 말없이 소원을 내려다보았다. 화를 내는 것도, 제지하는 것도 아닌—마치 '네가 어디까지 하나 보자'는 듯한 무거운 침묵. 그 침묵이 오히려 소원에게 판을 깔아준 꼴이 되었다.소원은 십이 년 동안 학원가에서 단련된 '질문 정리' 버릇을 발동했다."그럼 다음 질문입
검은 머리카락이 은빛으로 변했다.'염색?''아니, 저건 그런 수준이 아닌데.'뿌리에서 번진 은빛이 순식간에 머리 전체를 집어삼켰다.그리고 쿵, 하고 바닥이 울렸다.남자의 뒤편에서 희미한 빛이 피어올랐다.처음엔 연기인 줄 알았다.아니었다.빛이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거대한 늑대였다.늑대는 대전 안에서 다 자라지 못했다. 몸이 커지는 속도가 천장보다 빨라서, 그대로 지붕을 통과해 바깥으로 솟아올랐다.열린 문 너머로 보였다.궁 서쪽 하늘에 늑대가 섰다.그게 신호였던 것처럼, 나머지 셋에게서도 동시에 빛이 터졌다.금발 남자의 손톱이 길게 뻗어 나왔다."어, 어."본인이 제일 놀랐다.그 뒤로 독수리가 솟아 동쪽 하늘에 날개를 폈다. 날갯짓을 하지 않는데 떠 있었다.검은 옷을 입은 남자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눈동자만 세로로 가늘어졌다.그 뒤에서 뱀이 흘러나와 북쪽 담을 따라 길게 누웠다. 비늘에 어두운 초록빛이 돌았고, 어디까지가 몸인지 끝이 보이지 않았다.그리고 마지막.적갈색 머리 남자의 옷자락 아래로 꼬리가 빠져나왔다.그 뒤에서 여우가 일어나 남쪽 하늘에 앉았다. 꼬리를 몸에 감고 앉은 자세가 어딘가 한가로웠다.네 마리가 궁의 사방에 섰다.빛으로 되어 있는데 털이 한 올씩 다 보였고, 그 너머로 하늘도 같이 보였다.소리는 나지 않았다.그런데도 거기 있다는 게 몸으로 느껴졌다. 아까부터 발바닥을 타고 올라오던 떨림이 저것들의 숨이었다.그리고 그림자가 없었다.하늘을 반이나 가리고 있는데 마당에 그림자가 한 점도 지지 않았다.소원은 입을 반쯤 벌린 채 서 있었다.'……이거 입장료 받아도 되겠는데.'무서운데 아름다웠다.아름다운데 무서웠다.그 와중에도 머리는 딴 데로 굴러갔다.'동서남북에 하나씩. 정확히 넷.''짐승 문양이 넷이었고, 저기 선 남자가 넷이고, 지금 뜬 게 넷. 저걸 뭐라고 하나? 신수? 저 신수가 남자들 거구나.'거기까지 세고 나서야 숨을 참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넷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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