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hat ng Kabanata ng 일타 강사와 네 수인 이야기: Kabanata 1 - Kabanata 10

12 Kabanata

2화 내일이 책봉식이옵니다 (2)

소원은 속으로 비명을 질렀지만 겉으로는 그저 눈만 깜빡였다. 국어 지문은 십 년 넘게 뜯어봤어도, 지금 이 상황을 풀어줄 지문 같은 건 세상에 없었다. 서령이 탕약을 다 마신 걸 확인하고 잔을 거두며 일어섰다."하루 종일 잠들어 계셨습니다. 서고에서 급히 사람을 보내 예복 치수를 다시 재갔고, 상궁들이 내일 새벽부터 단장을 시작할 것이옵니다."말을 잇다가 서령이 문득 멈추고 소원을 똑바로 바라봤다."괜찮으십니까."'안 괜찮다고 하면 어떻게 되는 건데.'소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동작이 스스로도 어색하게 느껴졌다. 이 몸이 원래 하던 방식이 아닌 게 분명했다.서령은 그 끄덕임에 안심한 얼굴을 하고는 등롱을 챙겨 문가로 향했다. 나가려다 말고 뒤돌아 한마디를 보탰다."오늘 밤은 아무도 들이지 말라 일러두었습니다. 내일 전까지는 온전히 혼자 계실 수 있도록."문이 닫혔다. 발소리가 복도 저편으로 멀어졌다.혼자 남은 소원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앉았다. 창밖으로 등불이 줄줄이 걸려 있었다. 지붕이 몇 겹으로 겹쳐 있었고, 그 너머로도 지붕, 또 지붕. 그 규모가 이 모든 게 꿈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고 있었다.'정리하자. 하나, 나는 지금 다른 사람 몸에 들어와 있다. 둘, 이 몸은 내일 책봉식이란 걸 한다. 셋, 그 자리는 되돌릴 수 없다고 했다. 넷, 나는 이 사람이 누군지도, 이 나라가 어딘지도 모른다.'이름조차 몰랐다. 열두 해 동안 지문 읽을 때 제일 먼저 하던 게 인물 이름 확인이었는데, 정작 자기 이름을 모르는 게 제일 답답했다.베개맡에 종이 뭉치가 눈에 들어온 건 그때였다. 붉은 인장이 찍힌 문서 몇 장이 이불 아래 반쯤 깔려 있었다. 누군가 낮에 가져다 놓고 미처 치우지 못한 모양이었다.손이 저절로 그쪽으로 움직였다. 글자가 보이면 일단 읽고 보는 건, 몸이 바뀌어도 안 바뀌는 버릇이었다. 중요한 부분에 밑줄을 그으려고 반사적으로 손가락을 뻗다가, 형광펜이 없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이 나라엔 형광펜이 없을 수도 있겠다는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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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세 번입니다. 아우님(1)

"오늘 마마께서 하실 일은 셋뿐이옵니다."회랑을 앞서 걸으며 상궁이 손가락 세 개를 폈다."폐하 앞에 나아가 절을 올리시고, 서약문을 낭독하시고, 책봉을 받으십니다. 그게 답니다."'그게 다라니. 그 셋 다 오늘 처음 해보는 거거든?!'소원은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머리 위에 얹어진 비단 장식은 고개를 약간만 돌려도 돌덩이처럼 무거웠고, 옷은 겹겹이 싸여 숨통을 막았다. 대한민국에서 십 년 넘게 아이들에게 국어를 가르치던 강사 소원이, 눈을 뜨자마자 이 황당한 빙의물 한복판에 떨어진 지 겨우 며칠째였다."절은 어떻게 하는데요.""……예?"상궁의 걸음이 반 박자 늦어졌다. 굳어버린 목덜미에서 '이 인간이 지금 무슨 소리를 하나' 하는 경악이 고스란히 느껴졌다."아니, 그러니까. 오늘 같은 날은 평소랑 다른 게 있을 거 아니에요. 뭐, 각도라든가. 45도냐 90도냐, 그런 거.""……무릎을 먼저 놓으시고, 손은 이마 높이로 모으신 다음, 상체를 세 번에 나누어 낮추시면 되옵니다. 세 번째에서 잠깐 멈추셔야 하고요."'세 번에 나눠서. 세 번째에 멈춤. OK, 매뉴얼 입력 완료. 근데 각도는 끝까지 안 알려주네. 짠순이.'소원은 걸으면서 손을 어정쩡하게 이마 근처로 들어 올려 보았다. 3단계 분할 절이라니, 무슨 팝핀도 아니고."마마. 지금 하시면 아니 되옵니다."귀신같은 상궁의 경고에 소원은 얼른 손을 내렸다."아, 네."상궁이 다시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소원은 그 꼿꼿한 등을 노려보며 속으로 횟수를 셌다.'아니 되옵니다. 오늘 아침부터 벌써 네 번째다. 금지어 수집가냐고.'거대한 문 앞에서 상궁이 멈춰 섰다."여기서부터는 혼자 드셔야 합니다.""네?""단까지는 아무도 따라 들지 못하옵니다."소원이 뭐라 항의하기도 전에 웅장한 문이 열렸다.대전 안은 사람들로 그득했다. 수백 쌍의 눈동자가 일제히 쏘아붙이듯 꽂히는데, 가히 수능 감독관 수백 명이 한꺼번에 노려보는 듯한 중압감이었다.그리고 정면 단 위에, 앉아 있는 사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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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세 번입니다. 아우님(2)

손끝이 차가워졌다. 머릿속으로 '퇴사하고 싶다'는 생각이 몰아쳤다. 하지만 직업병이란 무서운 법이었다. 자세히 보니 문장 구조가 이상했다.'어라? 어순은 우리말인데? 서술어가 맨 뒤에 있어! 읽을 수는 있겠다. 일단 음이라도 읊어보자.'소원은 숨을 고르고 입을 열었다."하늘의 뜻, 숨어……"말이 이상하게 끝났다.'숨어? 하늘의 뜻이 왜 숨어? 은둔형 외톨이야?'대전 곳곳에서 "쯧쯧", "어허" 하는 웅성거림이 터졌다."……무어라 하셨습니까, 방금."'아니, 나도 몰라요! 그렇게 적혀 있는데 어떡해!'소원은 속으로 비명을 지르며 두루마리를 구멍이 뚫려라 노려봤다.숨을 은(隱). 저 자리에 숨는다는 뜻이 들어갈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같은 글자가 아래에도, 그 아래에도 뜬금없이 붙어 있었다.'아! 뜻으로 읽는 자리가 아니구나! 소리만 빌린 거야. 은. 조사 은/는 할 때 그 은! 이두잖아, 이거! 고대 한국어 표기법!'머릿속에서 핑 하고 전구가 켜졌다. 구조를 파악하자 수능 비문학 지문 읽듯 문장이 눈에 쏙쏙 들어왔다. 소원은 끊긴 자리로 돌아갔다."하늘의 뜻은 높고, 땅의 뜻은 넓으며."말이 됐다.'된다! 이두 파악 완료!'"이 자리에 오르는 자는 백성을 살피고, 땅을 지키며, 하늘의 뜻을 거스르지 아니하고."목소리에 낭랑한 톤이 실렸다."사사로이 이롭게 하지 아니하며, 사사로이 해롭게 하지 아니하고."떨림이 빠지고 호흡이 길어졌다. 십 년 넘게 처음 보는 괴상한 지문을 아이들 앞에서 스무스하게 소리 내 읽어온 짬밥이었다. 규칙만 잡히면 이건 그냥 쉬운 일이었다.대전이 조용해졌다. 아까와는 전혀 다른, 경악에 찬 조용함이었다."……보십시오.""방금까지 더듬으시더니.""갑자기 저리 막힘없이 이어 읽으시는 게 기이하지 않습니까?"'어? 왜? 나 지금 국어 강사 신내림 받아서 존나 잘 읽고 있는데 왜 또 트집이야?'읽으면서도 뒤통수가 서늘했다. 생각해 보니 절은 못 하는데 난해한 이두 낭독은 저렇게 잘한다? 중간부터 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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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유혹하는 건가? (1)

검은 머리카락이 은빛으로 변했다.'염색 수준이 아닌데? 탈색인가? CG인가.'뿌리에서 번진 은빛이 순식간에 남자의 머리 전체를 집어삼켰다.그리고 쿵, 하고 대전 바닥 전체가 묵직하게 울렸다. 남자의 뒤편에서 희미한 빛이 피어올랐다. 처음엔 연기나 연무인 줄 알았으나 아니었다. 빛이 정교하게 형태를 갖추어가고 있었다.거대한 늑대였다.늑대는 대전 안에서 다 자라지도 못했다. 몸이 커지는 속도가 천장 높이보다 훨씬 빨라서, 그대로 지붕을 투과해 바깥으로 웅장하게 솟아올랐다.열린 문 너머로 보였다. 궁 서쪽 하늘에 은빛의 늑대가 거대하게 섰다.그게 신호탄이라도 된 것처럼, 나머지 세 남자에게서도 동시에 빛이 폭발하듯 터졌다.금발 남자의 손톱이 맹수처럼 길게 뻗어 나왔다."어, 어."정작 본인이 제일 놀란 표정이었다. 그 뒤로 독수리가 솟아올라 동쪽 하늘에 날개를 폈다. 날갯짓 하나 하지 않는데도 공중에 가볍게 떠 있었다.검은 옷을 입은 남자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눈동자만 세로로 가늘어지며 기이하게 빛났다. 그 뒤에서 거대한 뱀이 흘러나와 북쪽 담을 따라 길게 누웠다. 비늘에 어두운 초록빛이 감돌았고, 어디까지가 몸통인지 끝이 보이지 않았다.그리고 마지막, 적갈색 머리 남자의 옷자락 아래로 푹신해 보이는 꼬리가 스륵 빠져나왔다. 그 뒤에서 여우가 일어나 남쪽 하늘에 턱 하니 앉았다. 꼬리를 몸에 감고 앉은 자세가 어딘가 한가롭고 여유로웠다.네 마리의 신수가 궁의 사방을 완벽하게 둘러쌌다.빛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털 한 올 한 올이 생생하게 보였고, 그 투명한 몸 너머로 하늘이 함께 비쳐 보였다. 울음소리 하나 나지 않았지만, 아까부터 발바닥을 타고 올라오던 웅장한 진동이 저것들의 숨소리라는 게 피부로 느껴졌다.게다가 그림자가 없었다. 하늘을 반이나 가리고 서 있는데 마당에는 그림자가 한 점도 지지 않는 기현상이 펼쳐졌다.소원은 입을 반쯤 벌린 채 그 압도적인 광경을 바라보았다.'와…… 이거 입장료 받아도 되겠는데? 무서운데 아름답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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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유혹하는 건가? (2)

소원은 황급히 입을 가리고 고개를 숙였다.지환의 입꼬리가 내려갔다. 그는 사람 얼굴을 읽는 게 특기인 남자였다. 그래서 방금 그 웃음이 어떤 종류인지도 즉시 알아봤다.반한 얼굴이 아니었다.'우스운가? 수호신의 가호까지 받아 발현을 했는데? 이 신비로움과 내 자태가 안 먹힌다고?'꼬리가 뚝 멈췄다.소원은 눈을 슬쩍 피하며 속으로 생각했다.'미안 해요, 여우님. 출제자의 의도와 전혀 다른 감상을 해 버렸네. 그런데 좀 전달이 되게 의도를 표현하란 말이야.'"마마."뒤에서 목소리가 났다. 소진이었다. 입가에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미소가 편하지 않았다."괜찮으십니까?""네.""다행입니다."소진이 소원의 옷매무새를 가볍게 살폈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오늘은 많이 달라지셨네요."'저년 또 저러네.'소원의 마음속에서 소진은 벌써 저년으로 격하되어 있었다.'한번 해보자는 거니? 이제 슬슬 적응도 되어 가겠다, 내가 참는 사람이 아니야. 네가 덤비는 사람이 누군지는 아니? 꿈이든 환상 세계든 이기고 보자.'"예전에는 이런 자리에 서 계시는 것만으로도 많이 힘들어하셨으니까요.""제가 많이 아팠다고 들었습니다.""그랬지요. 그래서 걱정했습니다."소진이 고개를 끄덕였다."혹시 아직 궁의 법도를 다 기억하지 못하실까 해서요.""그럼 앞으로 많이 가르쳐 주시겠네요.""물론이지요."소진의 미소가 조금 깊어졌다."마마께서는 원래 배우는 속도가 조금 느리셨으니까요."'와 선지 구성에 함정을 몇 겹으로 파놓은 거 봐라.'소원은 인장이 들어 있는 보자기를 가슴 쪽으로 당겨 안았다. 그리고 소진을 똑바로 봤다."언니.""예, 마마.""방금 그 말 아주 설계가 잘 됐습니다."소진의 눈이 살짝 커졌다."……예?""'원래'요."소원이 손가락 하나를 폈다."거기가 이 문장의 포인트입니다.""……""'원래 느리셨다'고 전제를 깔아버리면 제가 반박을 못 해요. 반박하려면 원래가 어떤 상태였는지 구체적으로 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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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돌아가면서 자라는 거죠?(1)

"……달마다 정해진 날을 나누어 각 공의 처소에 납시어 화친의 의를 몸소 행하시되, 한 이레는 비워 심신을 보하시라 하셨나이다." 예관이 두루마리를 또르륵 말았다. 반 시진짜리 고문 낭독이 드디어 끝났다. 소원은 단정하게 앉아 있었다. 겉으로만. '한 이레를 비운다는 건 한 달에 일주일만 쉰다는 거고…… 그럼 나머지 스무사흘은 매일……? 그 정도면 노동 아닌가? 스테이크도 매일 먹으면 질리는데, 아무리 남신이랑 자는 것도 과유불급이다 정말.' 머릿속으로 출근 일수와 체력 계산기를 두드리던 소원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혼잣말이 툭 튀어나갔다. "……그러니까, 돌아가면서 자라는 거지?" 순간 대전이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예관의 손에서 두루마리가 미끄러질 뻔했고, 단 아래 늘어선 네 공의 눈빛이 일제히 굳었다. 대전 뒤편에 늘어선 각 부족 사신들 사이에서는 작게 숨을 들이켜는 소리까지 났다. 소원은 순간 분위기가 얼음장처럼 싸해진 것을 느끼고 아차 싶었다. '아니, 원래 몸 주인은 수줍음이 많아서 모후 앞에서는 고개도 제대로 못 들던 셋째 딸이라 하지 않았나? 궁중 대전 한복판에서 던지기엔 지나치게 솔직한 표현이었네.' 순간 당황해서 눈동자를 살짝 굴렸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소원은 속으로 침을 꼴깍 삼켰다. '아니, 근데 내가 틀린 말 했나? 말을 괜히 빙빙 돌려봤자 서로 간만 보고 기싸움만 길어지지. 핵심은 이거잖아.' 소원은 슬그머니 마음을 가다듬고 표정을 뻔뻔하게 바꿨다. "아니…… 제가 표현이 좀 거칠었을진 몰라도, 결론적으로 돌아가면서 뭘 하라는 건 맞잖아요? 돌려 말하면 전달만 안 되니까 요점만 짚자는 겁니다." 뻔뻔하지만 정확한 정곡. 예관은 입만 뻐끔거렸고, 단 위에 앉은 모후는 말없이 소원을 내려다보았다. 화를 내는 것도, 제지하는 것도 아닌—마치 '네가 어디까지 하나 보자'는 듯한 무거운 침묵. 그 침묵이 오히려 소원에게 판을 깔아준 꼴이 되었다. 소원은 십이 년 동안 학원가에서 단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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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돌아가면서 자라는 거죠?(2)

"앉으세요."아무도 안 앉았다."앉으시라고요." 넷이 앉았다. 각 부족 사신들도 주춤주춤 앉았다."한 분씩 하겠습니다. 손 드시고요.""……손이요?""네, 손. 안 들고 말씀하시면 안 받습니다."대전이 다시 조용해졌다. 이번엔 어이없어서 조용한 쪽이었다. 그때 손이 하나 올곧게 올라왔다. 청운이었다.'……저 사람 진짜 손 들었네.'"네, 말씀하세요.""아까 하다 만 말이 있습니다.""하세요."청운이 숨을 한 번 쉬었다. 이 궁에 온 뒤로 그는 여러 번 말을 시작했다가 여러 번 잘렸다. 어리다고, 서툴다고, 아직 모른다고. 하라는 말은 처음 들었다."저희 부족이 고생하는 건 사실입니다. 그런데……""그런데요?""……그것 때문만은 아닙니다.""그럼 뭐 때문인데요?""……"청운이 입을 다물었다. 귀가 다시 빨개졌다."됐습니다. 다음 분 하십시오."'뭐야 저거. 말을 하다 말아, 자꾸.'넷이 차례로 말했다. 손을 들고, 한 명씩.그리고 넷이 다 말하고 나서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넷 다 자기가 먼저여야 한다고 했기 때문이다.'이럴 줄 알았지. 발언 기회를 공평하게 주면 결론이 날 줄 알았지. 안 나지.'"그럼 이거, 서로 얘기해서는 못 정하는 거네요?"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못 정하시는 거 맞죠?""……"예관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저, 마마. 제비를 뽑으시는 건 어떠하올지.""제비요?""예. 넷이 한자리에 모여 뽑으시면, 하늘의 뜻으로 돌릴 수 있사옵니다."'하늘의 뜻은 무슨. 아무도 책임 안 지겠다는 소리지.'소원은 넷을 둘러봤다. 태율은 못마땅한 얼굴이었다. 지환은 웃고 있었는데 눈은 안 웃었다. 청운은 또 뭔가 말하려다 말았고, 묵현만 고개를 끄덕였다."저는 좋습니다.""묵현공은 아까부터 다 좋으시네요.""제가 뽑힐 확률은 넷 중 하나니까요. 저 셋이 다투는 동안에도 넷 중 하나였고, 지금도 넷 중 하나입니다. 달라진 게 없습니다."아무도 반박하지 못했다."……그럼 제비로 하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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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그 밤에는 다른 공들의 이름은 올리지 아니한다.(1)

이튿날 저녁, 태녀궁 접견실.소원은 상석에 단정하게 앉아 김이 올라오는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은은한 차 향이 접견실을 채우고 있었지만, 머릿속은 이미 실전 모드로 팽팽하게 돌아가고 있었다.상담이나 면담은 한이경, 아니 소원의 본업이자 가장 자신 있는 분야였다. 십이 년 동안 학원가를 누비며 학부모 상담만 천 번도 넘게 해온 짬밥이 어디 가겠는가.'똑같아. 상대 말을 경청하고, 원하는바를 빠르게 파악하고, 약속은 함부로 남발하지 않는다. 상대가 학부모가 아니라 거대한 수인족 남편이라는 것만 다르지. ……뭐, 생각해 보니 그게 세상에서 제일 큰 차이점이긴 하다만.'정각을 알리는 소리와 함께 접견실 문이 열렸다.태율은 문턱에서 허리를 깊게 숙여 인사했다. 궁의 문이 결코 낮은 편이 아닌데도, 그 어깨가 문틀에 걸릴 것만 같은 체구였다. 그가 들어서자 넓던 접견실이 한 칸쯤 줄어든 것 같았다.'못해도 190은 넘겠네, 저거.'"늑대 부족 공, 태율이 마마를 뵙습니다.""어서 오세요. 거기 서 있지 말고 편하게 앉으세요.""서서 고하겠습니다."'아, 완벽하게 외워왔네, 외워왔어.'어깨는 각을 잡아 꼿꼿이 펴고, 시선은 정면 한 점에 고정, 두 손은 옷솔기에 딱 붙이고. 소원의 눈에는 까다로운 입학사정관 앞에서 잔뜩 굳은 고삼 면접생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소신 태율은 늑대 부족을 대표하여 이 자리에 섰습니다. 화친의 의무를 다하겠습니다.""……의무요.""그렇습니다.""의무니까 하겠다는 거예요?""그렇습니다.""그게 뭐예요. 너무 기계적이잖아요. 듣기에 영 별로인데요."태율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기계가 무엇인지는 알지 못하나, 그리 느끼시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진지하게 저러니까 더 이상하네. AI한테 너 AI냐고 물어보면 아니라고 하는 꼴이잖아.'소원은 터져 나오려는 입꼬리를 겨우 눌렀다. 어제는 꼬리를 살랑거리던 여우 앞에서 웃음을 터뜨렸다가 본의 아니게 상처를 입혔으니, 오늘은 표정 관리라는 걸 좀 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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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그 밤에는 다른 공들의 이름은 올리지 아니한다.(2)

"태율공.""예.""하나만 물어봐도 돼요?""하문하십시오.""이거, 진짜 괜찮으세요?""무엇이 말씀입니까.""이 화친이요. 넷이서 순서 정해서 돌아가며 지내는 거……""부족이 소신을 보낸 것은,"태율이 소원의 말을 끊었다. 그가 소원의 말을 중간에 자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소신이 견딜 줄 알기 때문입니다.""뭘 견디는데요?""……법도를 견딘다는 말씀입니다."'순간적으로 말을 바꿨네.'소원은 조금 더 밀어붙였다."늑대 부족은 원래 혼인하면 한 사람만……""소신은 늑대 부족을 대표하여 이 자리에 왔습니다."태율의 시선이 처음으로 병풍에서 내려와 소원의 눈에 똑바로 닿았다."이 자리에 소신 개인의 일은 없습니다."목소리는 낮고 묵직했으며,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소원은 입을 다물었다. 더 물어볼 수가 없었다.'아. 본인한테는 엄청난 굴욕일 텐데, 개인의 감정보다 부족이 더 큰 거구나. 그래서 의무라는 단어 뒤에 자신을 숨기고 있는 거였어. ……그걸 내가 대놓고 들춰내서 뭐 하겠다고.'소원은 약정서를 조심스럽게 다시 말았다."알겠어요. 잘 접수할게요.""감사합니다.""그리고 이건 분위기 전환 겸 범위 확인인데요.""예.""그 의무라는 건 어디까지고, 선택은 어디부터예요?"접견실이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아. 이것도 괜히 야하게 들리는 질문이었네. 난 정말 순수하게 업무 범위 확인이었는데. 진심으로.'태율의 시선이 병풍에서 천장으로 갔다가 황급히 소원에게로 돌아왔다."그것은…… 도리상 마마께서, 아니 소신이, 아니…… 의무의 범위는 그때 마마의 명에 따라……""방금 말 엄청 꼬이셨는데.""꼬이지 않았습니다.""완전 꼬였는데요.""……꼬이지 않았습니다."대답은 단호했지만, 그의 두 귀는 이미 잘 익은 홍시처럼 붉게 물들어 있었다."오늘은 여기까지 하죠. 순서는 제가 알아서 정할게요.""명을 받들겠습니다."태율은 깍듯하게 예를 올리고 몸을 돌렸다. 문턱을 넘는 걸음이 아주 찰나, 반 박자 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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