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검은 머리카락이 은빛으로 변했다.
'염색 수준이 아닌데? 탈색인가? CG인가.'
뿌리에서 번진 은빛이 순식간에 남자의 머리 전체를 집어삼켰다.
그리고 쿵, 하고 대전 바닥 전체가 묵직하게 울렸다. 남자의 뒤편에서 희미한 빛이 피어올랐다. 처음엔 연기나 연무인 줄 알았으나 아니었다. 빛이 정교하게 형태를 갖추어가고 있었다.
거대한 늑대였다.
늑대는 대전 안에서 다 자라지도 못했다. 몸이 커지는 속도가 천장 높이보다 훨씬 빨라서, 그대로 지붕을 투과해 바깥으로 웅장하게 솟아올랐다.
열린 문 너머로 보였다. 궁 서쪽 하늘에 은빛의 늑대가 거대하게 섰다.
그게 신호탄이라도 된 것처럼, 나머지 세 남자에게서도 동시에 빛이 폭발하듯 터졌다.
금발 남자의 손톱이 맹수처럼 길게 뻗어 나왔다.
"어, 어."
정작 본인이 제일 놀란 표정이었다. 그 뒤로 독수리가 솟아올라 동쪽 하늘에 날개를 폈다. 날갯짓 하나 하지 않는데도 공중에 가볍게 떠 있었다.
검은 옷을 입은 남자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눈동자만 세로로 가늘어지며 기이하게 빛났다. 그 뒤에서 거대한 뱀이 흘러나와 북쪽 담을 따라 길게 누웠다. 비늘에 어두운 초록빛이 감돌았고, 어디까지가 몸통인지 끝이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 적갈색 머리 남자의 옷자락 아래로 푹신해 보이는 꼬리가 스륵 빠져나왔다. 그 뒤에서 여우가 일어나 남쪽 하늘에 턱 하니 앉았다. 꼬리를 몸에 감고 앉은 자세가 어딘가 한가롭고 여유로웠다.
네 마리의 신수가 궁의 사방을 완벽하게 둘러쌌다.
빛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털 한 올 한 올이 생생하게 보였고, 그 투명한 몸 너머로 하늘이 함께 비쳐 보였다. 울음소리 하나 나지 않았지만, 아까부터 발바닥을 타고 올라오던 웅장한 진동이 저것들의 숨소리라는 게 피부로 느껴졌다.
게다가 그림자가 없었다. 하늘을 반이나 가리고 서 있는데 마당에는 그림자가 한 점도 지지 않는 기현상이 펼쳐졌다.
소원은 입을 반쯤 벌린 채 그 압도적인 광경을 바라보았다.
'와…… 이거 입장료 받아도 되겠는데? 무서운데 아름답고, 아름다운데 무서워. 동서남북에 하나씩, 정확히 넷. 짐승 문양이 넷이었고, 저기 선 남자가 넷이고, 지금 뜬 신수가 넷. 저 신수들이 저 남자들의 가호 같은 건가 보네.'
거기까지 생각을 정리하고 나서야 자신이 숨을 참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때, 하늘에 뜬 네 마리의 신수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대전 안을 정확히 내려다보았다.
몸은 전부 빛이라 속이 비치는데, 눈만은 고유한 짐승의 빛을 띠고 있었다. 그 네 쌍의 눈동자가 정확히 이쪽을 향했다.
'나 보는 거 맞지? 설마 이 몸 안에 딴 사람 들어 있는 것까지 알아보는 건 아니겠지? 아니, 그건 좀 곤란한데.'
소원이 머릿속으로 온갖 소설을 쓰며 동공 지진을 일으키고 있을 때, 대전 안에서 묵직한 소리가 났다. 문무백관이 한꺼번에 바닥에 부복하는 소리였다. 아무도 설명해주지 않았지만, 그 소리 하나로 상황이 정리되었다.
'합격이구나. 통과야.'
하늘을 가리던 빛이 산산이 흩어졌다. 네 마리의 신수가 연기처럼 풀어지더니, 사라지는 게 아니라 원래 없던 것처럼 깨끗하게 가라앉았다.
예관이 목을 가다듬고 웅장하게 목소리를 높였다.
"하늘이 응답하셨습니다!"
단 위에서 모후가 낮고 위엄 있는 목소리로 명령했다.
"오르너라."
소원은 조심스럽게 계단을 올랐다. 가까이서 본 모후는 생각보다 작고 마른 체구였다. 모후가 비단 보에서 꺼내 건넨 것은 손바닥만 한 금빛 인장이었다. 두 손으로 받아 들었는데, 보기보다 꽤 묵직했다.
"네 언니가 지켜보고 있으니, 우왕좌왕하여 추태를 보이지 마라."
입을 거의 움직이지 않고, 오직 소원에게만 들릴 정도의 나지막한 음성으로 모후가 속삭였다.
'언니? 아까 절 고쳐주고 은근히 엿 먹이던 그 여조?'
"돌아보지 마라."
소원은 얼결에 고개를 돌릴 뻔했다가 목에 빡 힘을 주어 멈췄다.
예관의 목소리가 다시 대전을 울렸다.
"오늘부로 태녀의 자리가 정해졌음을, 그리고 네 부족의 화친공이 정식으로 공의 자리에 오르셨음을 고합니다!"
"만세! 만세!"
백관들의 만세 소리가 대전 바닥을 흔들었다.
의식이 모두 끝나고 신하들이 소란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소원은 인장을 가슴에 품은 채 단 아래로 천천히 내려오다가 걸음을 멈췄다.
적갈색 머리 남자의 엉덩이 뒤로 꼬리가 아직도 나와 있었다. 의식이 끝난 지 한참인데 들어갈 기색이 전혀 없었다.
'저거 몸 안으로 자동 수납되는 건가?'
그때 남자가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소원과 눈이 맞닿자, 이목구비 전체를 시원하게 쓰며 화사하게 웃었다.
그리고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의도가 뭐야? 자랑인가? 반갑다는 개 식 인사인 건가?'
소원은 남자를 위아래로 스캔했다. 허리는 묘하게 매력적인 각도로 기울어 있었고 가슴은 당당하게 펴져 있었다. 턱을 살짝 들고 눈초리를 활처럼 휘어 웃는데, 그러는 동안에도 꼬리는 미친 듯이 살랑거리기고 있었다.
'……아, 유혹이네. 반하라는 거구나.'
답을 맞히고 나니 더 문제였다. 누가 봐도 잘생긴 남신급 얼굴에 모델 같은 비율, 눈빛은 세상 진지한데 그 아래에서 꼬리가 살랑살랑 흔들리고 있다니. 사람이 꼬리로 구애를 하는 직관적인 광경이라니. '참자. 참아야 한다. 웃으면 안 돼.' 참으려고 정말 이빨을 깨물었다. 하지만 터져 나오는 실소를 막을 수 없었다. "훕, 푸흡!" 대전이 순간 조용해졌다. "……죄송합니다."
차가울 줄 알았다. 뱀이니까. 피가 찬 짐승이니까. 그런데 닿은 입술은 따뜻했다. 생각보다 훨씬.입술이 한 번 떨어졌다가 각도를 바꿔 다시 겹쳤다. 망설임이 없었다. 처음부터 어디로 갈지 정해 둔 사람처럼, 순서대로였다.그리고 혀가 들어왔다.'얇다.'얇고 길고 정확했다. 소원의 혀를 한 번 감았다가 풀고, 입 안 어디가 어떤지 하나하나 짚어 보듯 움직였다. 서두르지 않았다. 그런데 한 번도 헤매지 않았다.맛이 났다.키스는 달콤하다던데, 이상하게 쓴맛이었다. 그의 허리춤에서 나던 그 풀 냄새가 혀끝으로 그대로 옮겨 온 것 같았다. 말린 약초를 씹었을 때처럼 쌉싸름하고, 목 뒤로 서늘하게 넘어가는 맛.신기한 건, 그게 싫지 않았다는 거였다.쓴데 자꾸 다시 확인하고 싶어지는 맛. 아메리카노 같았다. 쌉싸름하면서 한 모금 더 넘기게 되는 맛이었다.'이 사람 키스를 무슨 서류 검토하듯이……'그 생각이 끝나기 전이었다.혀끝이 입천장을 천천히 훑고 지나갔다.소원의 감상이 거기서 끊겼다.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졌다.강의를 시작한 후 단 한 번도 조용해 본 적 없는 머릿속이, 그 순간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숨이 엉켰고, 뒷목을 감싼 손의 열이 그대로 느껴졌고, 혀끝에 남은 쓴맛이 전부였다.정신을 차렸을 때, 소원의 손은 묵현의 옷자락을 양손으로 쥐고 있었다. 언제부터 쥐고 있었는지 몰랐다.그때 묵현이 먼저 멈췄다. 입술이 떨어졌다. 아주 천천히, 계획대로라는 듯이. 뒷목의 손이 물러났고, 턱을 받치던 손도 물러났다. 묵현은 한 걸음 물러나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옷자락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채였다. 그리고 숨 한 번 고르지 않고 말했다."어떠십니까.""……네?""이건 부분입니다."묵현이 소원을 보았다. 업무 보고를 하는 사람의 얼굴이었다."전체도 상상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소원은 입을 벌렸다가 닫았다. 뒤늦게 얼굴이 뜨거워졌다. 귀까지.'……나 지금 몰입했었어? 머릿속이 한시도 안 쉬는 내가, 아주 잠깐 아무 생각을 안 했어.'
사흘째 저녁, 태녀궁 접견실.문이 열렸고, 묵현이 들어왔다.인사는 짧았다."뱀 부족 공, 묵현입니다."그리고 소원이 앉으라는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는 이미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어제 그 늑대는 앉으라고 몇 번을 말해야 앉았는데.'검은 옷에 검은 머리. 불빛이 닿는 자리마다 머리카락에 어두운 초록빛이 돌았다.허리춤에는 작은 약재 주머니가 매달려 있었고, 은은하게 쌉싸름한 풀 냄새가 났다.연한 황록빛 눈동자는 소원을 보는 것도, 안 보는 것도 아닌 묘한 각도에 머물러 있었다."용건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인사 다음이 바로 용건이었다. 날씨 얘기도, 안부도 없었다.묵현이 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서안 위에 올려놓았다. 두루마리도 아니었다. 접힌 종이 한 장.소원은 그것을 펼쳤다.> **약재 전매권**끝이었다. 소원은 종이를 뒤집어 봤다. 뒷면은 백지였다."이게 다예요?""다입니다.""보통 이런 건 이유라든가, 근거라든가, 부족의 공적이라든가 그런 걸 쭉 쓰지 않아요?""필요 없는 걸 쓰면 읽는 쪽이 피곤합니다."소원은 종이를 손가락으로 톡 튕겼다."근데 좀 당황스럽네요.""무엇이 말씀입니까.""보통 이런 자리엔 내가 뭘 해 드리겠다, 약속을 들고 오지 않나요? 첫 만남부터 요구서를 내미시니까."묵현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약속은 지키지 못하면 빚이 됩니다. 요구는 거래고요. 저는 빚은 지지 않습니다.""……그럼 그 거래, 대가는요? 이걸 주면 뱀 부족은 뭘 주는데요?""후계입니다. 확실하게.""확실하게라는 말을 그렇게 쉽게 해요?""쉽게 하는 말이 아닙니다."묵현이 처음으로 소원을 똑바로 보았다."대면식에서 보니 마마께서는 넷을 버거워하시더군요.""……""그럼 돌아가실 필요 없습니다. 직선으로 가시면 됩니다. 후계는 어차피 낳으셔야 합니다. 빨리 낳으시면, 그만큼 빨리 놓여나십니다."묵현은 거기서 한 박자 쉬었다."그리고 넷 중 제가 성공률이 가장 높습니다."접견실이 조용해졌다.'대면식에
"태율공.""예.""하나만 물어봐도 돼요?""하문하십시오.""이거, 진짜 괜찮으세요?""무엇이 말씀입니까.""이 화친이요. 넷이서 순서 정해서 돌아가며 지내는 거……""부족이 소신을 보낸 것은,"태율이 소원의 말을 끊었다. 그가 소원의 말을 중간에 자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소신이 견딜 줄 알기 때문입니다.""뭘 견디는데요?""……법도를 견딘다는 말씀입니다."'순간적으로 말을 바꿨네.'소원은 조금 더 밀어붙였다."늑대 부족은 원래 혼인하면 한 사람만……""소신은 늑대 부족을 대표하여 이 자리에 왔습니다."태율의 시선이 처음으로 병풍에서 내려와 소원의 눈에 똑바로 닿았다."이 자리에 소신 개인의 일은 없습니다."목소리는 낮고 묵직했으며,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소원은 입을 다물었다. 더 물어볼 수가 없었다.'아. 본인한테는 엄청난 굴욕일 텐데, 개인의 감정보다 부족이 더 큰 거구나. 그래서 의무라는 단어 뒤에 자신을 숨기고 있는 거였어. ……그걸 내가 대놓고 들춰내서 뭐 하겠다고.'소원은 약정서를 조심스럽게 다시 말았다."알겠어요. 잘 접수할게요.""감사합니다.""그리고 이건 분위기 전환 겸 범위 확인인데요.""예.""그 의무라는 건 어디까지고, 선택은 어디부터예요?"접견실이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아. 이것도 괜히 야하게 들리는 질문이었네. 난 정말 순수하게 업무 범위 확인이었는데. 진심으로.'태율의 시선이 병풍에서 천장으로 갔다가 황급히 소원에게로 돌아왔다."그것은…… 도리상 마마께서, 아니 소신이, 아니…… 의무의 범위는 그때 마마의 명에 따라……""방금 말 엄청 꼬이셨는데.""꼬이지 않았습니다.""완전 꼬였는데요.""……꼬이지 않았습니다."대답은 단호했지만, 그의 두 귀는 이미 잘 익은 홍시처럼 붉게 물들어 있었다."오늘은 여기까지 하죠. 순서는 제가 알아서 정할게요.""명을 받들겠습니다."태율은 깍듯하게 예를 올리고 몸을 돌렸다. 문턱을 넘는 걸음이 아주 찰나, 반 박자 느
이튿날 저녁, 태녀궁 접견실.소원은 상석에 단정하게 앉아 김이 올라오는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은은한 차 향이 접견실을 채우고 있었지만, 머릿속은 이미 실전 모드로 팽팽하게 돌아가고 있었다.상담이나 면담은 한이경, 아니 소원의 본업이자 가장 자신 있는 분야였다. 십이 년 동안 학원가를 누비며 학부모 상담만 천 번도 넘게 해온 짬밥이 어디 가겠는가.'똑같아. 상대 말을 경청하고, 원하는바를 빠르게 파악하고, 약속은 함부로 남발하지 않는다. 상대가 학부모가 아니라 거대한 수인족 남편이라는 것만 다르지. ……뭐, 생각해 보니 그게 세상에서 제일 큰 차이점이긴 하다만.'정각을 알리는 소리와 함께 접견실 문이 열렸다.태율은 문턱에서 허리를 깊게 숙여 인사했다. 궁의 문이 결코 낮은 편이 아닌데도, 그 어깨가 문틀에 걸릴 것만 같은 체구였다. 그가 들어서자 넓던 접견실이 한 칸쯤 줄어든 것 같았다.'못해도 190은 넘겠네, 저거.'"늑대 부족 공, 태율이 마마를 뵙습니다.""어서 오세요. 거기 서 있지 말고 편하게 앉으세요.""서서 고하겠습니다."'아, 완벽하게 외워왔네, 외워왔어.'어깨는 각을 잡아 꼿꼿이 펴고, 시선은 정면 한 점에 고정, 두 손은 옷솔기에 딱 붙이고. 소원의 눈에는 까다로운 입학사정관 앞에서 잔뜩 굳은 고삼 면접생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소신 태율은 늑대 부족을 대표하여 이 자리에 섰습니다. 화친의 의무를 다하겠습니다.""……의무요.""그렇습니다.""의무니까 하겠다는 거예요?""그렇습니다.""그게 뭐예요. 너무 기계적이잖아요. 듣기에 영 별로인데요."태율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기계가 무엇인지는 알지 못하나, 그리 느끼시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진지하게 저러니까 더 이상하네. AI한테 너 AI냐고 물어보면 아니라고 하는 꼴이잖아.'소원은 터져 나오려는 입꼬리를 겨우 눌렀다. 어제는 꼬리를 살랑거리던 여우 앞에서 웃음을 터뜨렸다가 본의 아니게 상처를 입혔으니, 오늘은 표정 관리라는 걸 좀 해야
"앉으세요."아무도 안 앉았다."앉으시라고요." 넷이 앉았다. 각 부족 사신들도 주춤주춤 앉았다."한 분씩 하겠습니다. 손 드시고요.""……손이요?""네, 손. 안 들고 말씀하시면 안 받습니다."대전이 다시 조용해졌다. 이번엔 어이없어서 조용한 쪽이었다. 그때 손이 하나 올곧게 올라왔다. 청운이었다.'……저 사람 진짜 손 들었네.'"네, 말씀하세요.""아까 하다 만 말이 있습니다.""하세요."청운이 숨을 한 번 쉬었다. 이 궁에 온 뒤로 그는 여러 번 말을 시작했다가 여러 번 잘렸다. 어리다고, 서툴다고, 아직 모른다고. 하라는 말은 처음 들었다."저희 부족이 고생하는 건 사실입니다. 그런데……""그런데요?""……그것 때문만은 아닙니다.""그럼 뭐 때문인데요?""……"청운이 입을 다물었다. 귀가 다시 빨개졌다."됐습니다. 다음 분 하십시오."'뭐야 저거. 말을 하다 말아, 자꾸.'넷이 차례로 말했다. 손을 들고, 한 명씩.그리고 넷이 다 말하고 나서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넷 다 자기가 먼저여야 한다고 했기 때문이다.'이럴 줄 알았지. 발언 기회를 공평하게 주면 결론이 날 줄 알았지. 안 나지.'"그럼 이거, 서로 얘기해서는 못 정하는 거네요?"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못 정하시는 거 맞죠?""……"예관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저, 마마. 제비를 뽑으시는 건 어떠하올지.""제비요?""예. 넷이 한자리에 모여 뽑으시면, 하늘의 뜻으로 돌릴 수 있사옵니다."'하늘의 뜻은 무슨. 아무도 책임 안 지겠다는 소리지.'소원은 넷을 둘러봤다. 태율은 못마땅한 얼굴이었다. 지환은 웃고 있었는데 눈은 안 웃었다. 청운은 또 뭔가 말하려다 말았고, 묵현만 고개를 끄덕였다."저는 좋습니다.""묵현공은 아까부터 다 좋으시네요.""제가 뽑힐 확률은 넷 중 하나니까요. 저 셋이 다투는 동안에도 넷 중 하나였고, 지금도 넷 중 하나입니다. 달라진 게 없습니다."아무도 반박하지 못했다."……그럼 제비로 하시지요."
"……달마다 정해진 날을 나누어 각 공의 처소에 납시어 화친의 의를 몸소 행하시되, 한 이레는 비워 심신을 보하시라 하셨나이다." 예관이 두루마리를 또르륵 말았다. 반 시진짜리 고문 낭독이 드디어 끝났다. 소원은 단정하게 앉아 있었다. 겉으로만. '한 이레를 비운다는 건 한 달에 일주일만 쉰다는 거고…… 그럼 나머지 스무사흘은 매일……? 그 정도면 노동 아닌가? 스테이크도 매일 먹으면 질리는데, 아무리 남신이랑 자는 것도 과유불급이다 정말.' 머릿속으로 출근 일수와 체력 계산기를 두드리던 소원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혼잣말이 툭 튀어나갔다. "……그러니까, 돌아가면서 자라는 거지?" 순간 대전이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예관의 손에서 두루마리가 미끄러질 뻔했고, 단 아래 늘어선 네 공의 눈빛이 일제히 굳었다. 대전 뒤편에 늘어선 각 부족 사신들 사이에서는 작게 숨을 들이켜는 소리까지 났다. 소원은 순간 분위기가 얼음장처럼 싸해진 것을 느끼고 아차 싶었다. '아니, 원래 몸 주인은 수줍음이 많아서 모후 앞에서는 고개도 제대로 못 들던 셋째 딸이라 하지 않았나? 궁중 대전 한복판에서 던지기엔 지나치게 솔직한 표현이었네.' 순간 당황해서 눈동자를 살짝 굴렸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소원은 속으로 침을 꼴깍 삼켰다. '아니, 근데 내가 틀린 말 했나? 말을 괜히 빙빙 돌려봤자 서로 간만 보고 기싸움만 길어지지. 핵심은 이거잖아.' 소원은 슬그머니 마음을 가다듬고 표정을 뻔뻔하게 바꿨다. "아니…… 제가 표현이 좀 거칠었을진 몰라도, 결론적으로 돌아가면서 뭘 하라는 건 맞잖아요? 돌려 말하면 전달만 안 되니까 요점만 짚자는 겁니다." 뻔뻔하지만 정확한 정곡. 예관은 입만 뻐끔거렸고, 단 위에 앉은 모후는 말없이 소원을 내려다보았다. 화를 내는 것도, 제지하는 것도 아닌—마치 '네가 어디까지 하나 보자'는 듯한 무거운 침묵. 그 침묵이 오히려 소원에게 판을 깔아준 꼴이 되었다. 소원은 십이 년 동안 학원가에서 단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