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혹한황실

잔혹한황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2
By:  잔혹한 왕비Updated just now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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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년을 바친 지아비는 고아원 출신의 천박한 궁녀에게 미쳐 내 가문을 멸문시키려 했다. 국고 5천억 횡령의 누명과 암살의 위협 모든 것을 잃고 벼랑 끝에 내몰린 밤 피투성이가 된 짐승 같은 사내가 내 발밑에 엎드렸다. "마마께서 피를 묻히셔야 한다면, 기꺼이 제가 그 칼이 되겠습니다." 과거 황실에 부모를 잃은 수석 호위무사 김민혁 오직 나만을 위해 목줄을 푼 그와 함께 나는 부서진 화관 대신 피 묻은 가시관을 집어 들었다. 감히 주인을 문 개들의 목통을 비틀고 썩어빠진 제국을 무너뜨릴 황후의 잔혹하고 우아한 반격 과연 이 핏빛 사냥의 끝에서 살아남는 자는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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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제1화] 깨어진 화관과 서늘한 밤의 그림자

2026년, 대한제국 황궁

 

​세상의 모든 빛과 부귀를 긁어모은 듯 찬란하게 빛나는 제국의 심장부였지만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황궁의 밤은 뼛속까지 시릴 정도로 서늘하고 기괴했다. 

 

 

화려한 금박으로 장식된 거대한 유리창 너머로 잿빛 구름이 낮게 깔려 있었고 빗방울은 마치 누군가의 한 맺힌 눈물처럼 창문을 쉴 새 없이 두드려댔다.

 

 

​황후전의 내실 대한제국 재계 서열 1위 민석그룹의 고명딸이자 제국의 유일무이한 국모인 민시은은 거울 앞에 미동도 없이 앉아 있었다. 

 

 

가느다란 목을 짓누르는 화려한 가채와 겹겹이 두른 붉은 적의는 그녀의 숨통을 조이는 화려한 구속구와 다름없었다. 

 

 

거울 속에 비친 27세의 황후는 얼음조각처럼 차갑고 완벽하게 아름다웠지만 텅 빈 눈동자 속에는 깊은 절망의 그림자가 일렁이고 있었다.

 

 

​" 시은마마옥체가 상하실까 염려되옵니다. 차라도 한잔 드시지요 "

 

​어린 시절부터 시은의 곁을 지켜온 유모가 떨리는 손으로 따뜻한 국화차를 내려놓았다. 

 

주름진 유모의 눈가에는 언제나 시은을 향한 깊은 안타까움이 고여 있었다. 

 

시은은 대답 대신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그녀의 시선은 찻잔에 떠 있는 가엾은 국화잎에 머물러있었다.

 

뜨거운 물에 속절없이 휩쓸려 향기를 빼앗기는 저 꽃잎이 꼭 자신의 처지 같았다.

 

 

​ " 유모 "

 

​"예~ 시은 마마 "

 

 

​"비가 오니 그날이 생각나네 내가 처음 이 숨 막히는 붉은 옷을 입었던 날 말이야."

 

 

​시은의 읊조림에 유모는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13살 세상의 모든 것이 아름답고 희망차게만 보이던 나이였던시은은 민석그룹 민현석 회장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외동딸이였다.

 

시은은 어린 시절 황실 연회에서 우연히 마주쳤던 다정한 소년 황태자 유종석을 깊이 연모했다. 

 

그 순수했던 짝사랑은 어른들의 철저한 정치적 계산과 결합하여 '정략결혼'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었다. 

 

황실은 민석그룹의 막대한 자본이 필요했고민석그룹은 제국의 권력이 필요했다.

 

 

​자신을 향해 미소 지어주던 다정한 오라버니가 남편이 된다는 사실에 13살의 시은은 밤잠을 설칠 정도로 기뻐했다. 

 

제 몸집보다 큰 대례복을 입고 무거운 칠보 화관을 쓴 채 제단의 계단을 오르던 날 시은은 평생 이 남자만을 바라보며 헌신하겠노라 굳게 다짐했다.

 

 

​그러나 제단의 끝에서 그녀를 맞이한 15살의 어린 신랑 유종석의 눈빛은 시은이 기억하던 따뜻한 봄바람이 아니었다. 

 

 

그것은 혹한의 시베리아 벌판처럼 차갑고 건조했다. 

 

오직 민석그룹의 재력만을 탐욕스럽게 훑어내리는 기만의 눈빛 그때 시은은 본능적으로 깨달았어야 했다.

 

 

​자신이 쓴 화관이 사실은 보이지 않는 가시관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가시가 평생토록 자신의 심장을 파고들어 피를 흘리게 만들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시은이 13살의 나이로 화려한 새장 속에 갇혀 천천히 시들어가고 있을 때 황궁의 가장 어둡고 습한 밑바닥에서는 전혀 다른 종자의 짐승이 자라나고 있었다.

 

​같은 시각 빈민가 외곽의 낡은 고아원12살의 신아리는 차가운 진흙 바닥에 엎드린 채 원장이 휘두르는 매질을 독기 어린 눈으로 견뎌내고 있었다. 

 

 

배고픔과 폭력 그리고 지독한 가난 아리의 세상은 온통 잿빛이었고 그녀는 단 한 번도 누군가의 대가 없는 다정함을 경험해보지 못했다.

 

​'내 잘못이 아니야 세상이 엿 같은 것뿐이야 '

 

​피멍이 든 손을 꽉 말아 쥐며 12살의 아리는 속으로 수천 번 수만 번 되뇌었다. 

 

다른 아이들이 배고픔에 울다 지쳐 잠들 때 아리는 어떻게든 살아남아 이 시궁창 같은 곳을 벗어나 세상을 발밑에 두겠다고 결심했다. 

 

동무의 빵을 훔쳐 먹고 남에게 뒤집어씌우는일 원장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끔찍한 거짓말을 지어내는 일은 아리에게 숨 쉬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러운 생존 본능이었다.

 

​그 독기와 비열함 그리고 묘하게 사람을 홀리는 처연한 미모 덕분에 아리는 하급 궁녀 선발에 합격하여 황궁에 발을 들일 수 있었다. 

 

12살 가장 낮은 곳에서 시작한 아리의 눈에 비친 황궁은 거대한 사냥터였다.

 

​그녀는 천사의 얼굴을 한 채 철저하게 타인을 짓밟고 모함하고 이용하며 차근차근 위로 기어 올라갔다. 

 

그리고 마침내 가장 꼭대기에 있는 사냥감인 황제 유종석의 눈에 띄는 데 성공했다. 

 

유종석의 오만함과 허영심을 단숨에 꿰뚫어 본 아리는 그가 가장 원하는 달콤한 독이 되어 그의 이성과 권력을 완벽하게 장악해 나갔다.

 

​그 지옥 같은 고아원에는 아리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역모라는 누명을 쓰고 하룻밤 사이에 멸문지화를 당한 옛 귀족 가문의 유일한 생존자 부모가 목이 베여 나가는 끔찍한 광경을 벽장 틈 사이로 숨죽여 지켜봐야만 했던 핏빛 상처를 안고 짐승처럼 살아가던 소년김민혁이있었다.

 

 

​세상에 대한 분노와 복수심만으로 버티던 민혁의 얼어붙은 세상에 단 한 줄기 따뜻한 빛이 스며든 건 고아원 후원 행사에 부친을 따라왔던 13살의 민시은을 본 순간이었다.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구석에 웅크려 경계의 눈빛을 보내던 민혁에게 시은은 주저 없이 다가와 자신의 하얀 손수건을 건넸다.

 

​"아프지 마  울어도 괜찮아."

 

​누구도 자신을 위해 울어주지 않던 세상에서 처음으로 자신을 향해 안타까움의 눈물을 흘려준 소녀 그 순간 민혁의 심장엔 지울 수 없는 낙인이 찍혔다. 

 

민혁은 그날 밤 고아원을 탈주하여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어둠의 뒷골목을 뒹굴며 무술을 익혔다. 

 

뼈가 부러지고 살이 찢기는 고통 속에서도 오직 한 사람 민시은을 다시 만나 그녀의 그림자가 되겠다는 일념뿐이었다.

 

​그리고 10년 뒤 지옥의 훈련을 수석으로 통과한 민혁은 대한제국 황실 경호실의 최정예 요원이 되어 마침내 시은의 곁에 섰다. 

 

비록 그녀가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어 매일 밤 눈물로 지새우는 비참한 황후의 자리에 있다 할지라도 민혁은 그녀의 발밑에 드리운 그림자가 되어 평생 시은을 지키겠노라 자신의 피와 영혼을 걸고 침묵의 서약을 맺었다.

 

​"시은마마"

 

​낮고 묵직한 목소리가 상념을 깨트렸다. 

 

내실의 휘장이 걷히고 시은의 개인 비서인 한비서가 굳은 표정으로 들어섰다. 

 

그의 등 뒤로는 어느새 젖은 머리칼을 빗어 넘긴 채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서 있는 호위무사 김민혁의 늠름한 실루엣이 보였다. 

 

시은의 시선이 아주 찰나 민혁에게 머물렀다가 다시 한비서에게로 향했다.

 

​"무슨 일입니까 한비서"

 

​"대비마마 측 김비서님으로부터 긴급한 전갈이 왔습니다. 오늘 밤, 폐하께서 신아리 처소에서 은밀히 외부 인사들과 접선 중이시라 하옵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첩보입니다."

 

​시은의 눈매가 서늘하게 굳어졌다. 

 

최근 황실 내에 막대한 자금이 알 수 없는 곳으로 새어나가고 있다는 정황을 한비서를 통해 은밀히 추적하던 중이었다.

 

​"채비를 하겠어 황제의 처소로 간다."

 

​"마마! 이 늦은 밤에 어딜 가신단 말씀이십니까 폐하께서 진노하실 텐데"

 

​유모가 만류했지만 시은은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구속 같던 적의를 벗어 던지고 검은색 실크 가운을 걸친 그녀의 발걸음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폐하를 뵙는 것이 아니다. 내 것을 훔치는 도둑들의 꼬리를 밟으러 가는 것이지."

 

​어두운 회랑을 걷는 시은의 뒤를 민혁이 소리 없이 따랐다. 

 

오직 서로의 숨소리만이 빗소리에 섞여 맴도는 기나긴 복도에 마침내 황제의 개인 처소인 교태전 앞 가장 구석진 비밀스러운 별채에 다다랐다.

 

​경비마저 물려버린 한적한 별채 앞에 반쯤 열린 창문 틈으로 역겨울 만치 달콤하고 끈적이는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폐하, 정말로 민석그룹을 치실 작정이시옵니까? 만약 황후가 알게 된다면..."

 

 

​신아리의 교태 섞인 목소리였다. 

 

간드러지는 그 음성 속에는 숨길 수 없는 통쾌함과 탐욕이 뚝뚝 묻어나고 있었다.

 

​"그 계집이 알면 무엇을 어찌할 수 있단 말이냐? 13살부터 내 바짓가랑이만 붙잡고 울던 멍청한 인형일 뿐이다."

 

 

​이어지는 유종석의 오만한 비웃음은 시은의 심장이 차갑게 얼어붙다 못해 산산조각이 나는 듯했다.

 

​"이미 황실 복원 사업을 빙자해 빼돌린 국고 5천억은 네 이름의 차명 계좌로 완벽하게 세탁해 두었다 내일 아침 내각을 움직여 이 모든 횡령의 배후를 민석그룹과 황후로 몰아갈 것이다 그 가증스러운 민현석 영감의 숨통을 끊어놓고 나면 이 제국의 옆자리는 온전히 너의 것이 될 것이다. 나의이쁜 아리야"

 

 

​"아아~ 폐하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시건방진 황후가 무릎을 꿇고 눈물 콧물 쏟으며 폐위되는 꼴을 빨리 보고 싶사옵니다."

 

​쾅-!

 

​천둥이 치며 순간 별채 안을 환하게 밝혔다. 

 

창밖의 어둠 속에 서 있는 시은의 얼굴은 핏기하나 없이 창백했다.

 

​14년의 세월 13살의 순수했던 애정과 아내로서 다하고자 했던 알량한 의무감마저 철저하게 짓밟히고 유린당한 순간이었다. 

 

자신을 버리는 것을 넘어 자신을 낳아준 아비와 가문마저 파멸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으려는 저 극악무도한 기만이 시은의 몸이 충격과 배신감으로 파들파들 떨렸다. 

 

당장이라도 다리가 풀려 주저앉을 것 같던 그 찰나 크고 거친 손이 시은의 가녀린 어깨를 단단하게 감싸 쥐었다.

 

놀라 고개를 돌린 시은의 시선 끝에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야수 같은 눈빛을 한 김민혁이 서 있었다.

 

​민혁의 눈빛은 무너지려는 시은을 향해 소리 없이 외치고 있었다.

 

​'마마 절대 무너지지 마십시오 그리고 울지 마십시오 '

 

​시은은 입술을 꽉 깨물어 흐르려는 눈물을 억눌렀다. 

 

입술이 터져 비릿한 피 맛이 입안에 번졌지만 그녀의 텅 비어있던 눈동자 속에 처음으로 시퍼런 불꽃이 점화되고 있었다.

 

​그래 네놈들이 그토록 원한다면 내가 기꺼이 이 황실을 피로 씻어내어 주마 유종석! 

 

​시은이 싸늘하게 식은 눈으로 돌아서려는 순간이었다.

 

​민혁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자신의 품속에서 붉은 피가 낭자하게 묻어있는 가죽 수첩 하나를 꺼내 시은의 손에 쥐여주었다. 

 

시은의 눈이 경악으로 커졌다. 

 

수첩의 표지에는 금박으로 황실 재무부의 문양이 찍혀 있었고 끄트머리는 누군가의 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이....이게무엇이냐."

 

​시은이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민혁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빗물에 젖은 그의 어깨 위로 깊게 베인 검상이 드러났고, 붉은 피가 빗물과 함께 뚝뚝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조금 전 신아리의 수하들이 외부로 반출하려던 5천억 횡령의 진짜 장부 원본입니다."

 

 

​민혁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시은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동자에는 피비린내 나는 살기와 짐승 같은 충성심이 기괴하게 얽혀 있었다.

 

​"그리고 마마 "

 

​"……."

 

​"오늘 밤 자정폐하의 은밀한 지시를 받은 암살단이 마마의 아버님이신 민현석 회장님의 침소로 투입될 예정입니다."

 

​심장이 멈추는 듯한 충격 시은의 동공이 거칠게 흔들렸다. 

 

자신의 목을 조여오는 단순한 음모가 아니었다. 

 

이것은 오늘 밤, 모든 것을 끝장내려는 유종석과 신아리의 잔혹한 선전포고였다.

 

​"제게 명을 내려주십시오 마마를 위해 저들의 숨통을 끊을 수 있도록"

 

​피를 흘리며 엎드린 민혁의 등 위로 벼락이 내리꽂혔다.

 

손에 쥐어진 피 묻은 장부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아버지를 향해 다가가고 있을 암살단 시은은 더 이상 떨지 않았다. 

 

슬픔과 배신감은 산산이 부서져 날카로운 복수의 칼날로 벼려졌다. 

 

그녀는 천천히 허리를 숙여 피투성이가 된 민혁의 차가운 뺨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제국의 황후가 가장 천한 호위무사의 얼굴에 제 체온을 나누어주는 불경하고도 애절한 순간에도시은의 붉은 입술이 서늘한 호선을 그리며 말아 올라갔다.

 

​"민혁아"

 

​"예.. 마마"

 

​"황제의 사냥개들을 모조리 물어뜯어라 단 한 놈도 살려두지 마라" 

 

깨어진 화관 대신, 스스로 피 묻은 가시관을 집어 든 황후의 잔혹한 반격이, 폭우가 쏟아지는 제국의 밤하늘 아래서 그 거대한 서막을 올리고 있었다. 

 

 

"유종석,신아리 너네둘은 내가그동안 겪어온 고통을  이제부터 다시 되돌려줄게 이제는 내가 빛을 갚아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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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가시관을 벗어던진 여제
창밖으로 억수같이 쏟아지는 폭우 소리조차 시은의 서늘하고도 잔혹한 음성을 덮지 못했다. 그것은 제국의 국모가 14년의 끔찍한 침묵을 깨고 내린 성은(恩)이자 어둠 속에서 평생을 숨죽여 온 사냥개에게 처음으로 허락된 핏빛 세례였다.​시은의 명령이 날카로운 비수처럼 빗소리를 가르고 귓가에 꽂히는 순간 그녀의 발치에 무릎을 꿇고 있던 수석 호위무사 김민혁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렸다. 언제나 감정을 철저히 통제하던 그의 칠흑 같은 눈동자 깊은 곳에서 숨길 수 없는 기괴한 희열과 짐승 같은 맹목적인 충성심이 번뜩이고 있었다.​시은은 천천히 손을 뻗어 민혁의 거친 뺨을 감싸 쥐었다.15년 전 고아원의 흙구덩이 속에서 얼어붙어 가던 소년에게 내밀었던 그 작고 여린 손은 이제 제국의 옥좌를 피로 물들일 준비를 마친 여제의 단호한 손이 되어 있었다.민혁의 불덩이 같은 뺨을 감싼 황후의 가녀린 두 손그 손끝에서 전해지는 미세한 떨림과 얼음장처럼 차가운 체온은 오히려 민혁의 핏속에 깊이 잠들어 있던 흉포한 야성을 완전히 깨워버리는 기폭제가 되었다.​"마마의 뜻대로하시십시요"​민혁은 낮게 마치 주인의 손길에 길들여진 맹수처럼 짐승의 으르렁거림을 흘리며 시은의 손등에 자신의 이마를 깊숙이 맞대었다. 눈을 감은 그의 속눈썹 위로 빗물인지 땀인지 모를 물방울이 맺혔다. 그것은 단순한 대답이 아니었다. 주군을 위해 기꺼이 지옥불에 뛰어들어 모든 죄업을 대신 짊어지겠다는 절대적인 복종의 서약이자 자신의 목숨을 건 핏빛 맹세였다.​짧고도 묵직한 인사를 끝으로 몸을 일으킨 민혁의 거대한 신형이 벼락이 치는 어둠 속으로 활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튕겨 나가듯 사라졌다.​열린 창문 틈으로 거센 비바람이 몰아쳤다. 빗물인지 아니면 앞으로 다가올 피바람의 예언인지 모를 차가운 액체가 대리석 바닥에 흩뿌려졌다. 시은은 허공에 남겨진 제 두 손을 말없이 응시했다.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심장이 터질 듯이 거세게 뛰고 있었다.​두려움이 아니었다 그것은 지난 14년 동안 자신의 목을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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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각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폭우가 쏟아지는 서울 외곽의 고급 주택강민회장댁이다.대한제국 재계 서열 1위, 민석그룹 민현석 회장의 본가로 향하는 구불구불한 진입로에는 평소 환하게 불을 밝히던 가로등마저 모두 꺼져있다.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칠흑 같은 어둠이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다.​그 먹먹한 어둠 속을 소리 없이 기어가는 다섯 개의 검은 그림자가 있었다. 황제 유종석이 제국의 법망을 피해 자신에게 거슬리는 자들을 조용히 제거하기 위해 은밀하게 키워낸 황실 직속의 어둠, '흑영(黑影)' 소속의 최정예 암살자들이었다.​그들의 오늘 밤 목표는 오직 하나였다. 건방지게 황제에게 밉보인 민석그룹의 심장 민현석 회장의 목을 쥐도 새도 모르게 따오는 것이다.​최신형 소음기 장착이 완료된 특수 총기를 차갑게 쓰다듬으며 암살조장이 손가락 세 개를 펼쳐 수신호를 보냈다. 그들이 훈련받은 대로 높은 담장을 민첩하게 넘으려던 찰나였다.​서걱-!​거센 빗소리에 완전히 묻혀버린 그러나 뼈와 살을 가르는 기괴하고도 섬뜩한 파공음이 어둠을 찢었다.​동시에 가장 뒤에 서 있던 암살자의 목통에서 시뻘건 핏물 분수가 뿜어져 나오며, 짐승이 앓는 듯한 억눌린 비명이 터져 나왔다.​"크윽……! 커헉!"​놀란 조장이 황급히 총구를 겨누며 뒤를 돌아본 순간, 밤하늘을 찢어발기는 새하얀 번개가 내리쳤다. 찰나의 환해진 시야 속에, 지옥의 가장 밑바닥에서 갓 기어 올라온 듯한 야차(夜叉)의 얼굴이 드러났다.​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 제복이 빗물과 피로 흠뻑 젖은 거대한 사내 황후의 직속 수석 호위무사, 김민혁이었다.​그의 오른손에 들린 특수 제작된 티타늄 검의 칼날 끝에서는 빗물에 채 씻기지 못한 끈적한 핏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아까 초저녁 신아리의 은밀한 별채를 습격하여 정보를 캐내는 과정에서 입은 팔뚝의 깊은 자상에서 붉은 피가 흐르고 있었지만 민혁은 고통 따위는 전혀 느끼지 못하는 괴물처럼 기괴하게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고 있었다.​"너... 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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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핏빛 눈물과 반격의 서막
​"마마..."​목구멍까지 차오른 벅찬 감정을 억누르듯 민혁의 거친 숨소리가 내실의 무거운 공기를 흔들었다. 황후의 고귀한 손길이 자신의 상처를 감싸 안을 때마다 그는 이 목숨을 몇 번이고 바쳐서라도 저 가녀린 여인을 짓밟으려는 자들을 지옥 끝까지 쫓아내리라 맹세하고 또맹세했다.​시은은 눈앞에 무릎 꿇린 짐승 같은 충신을 바라보며 14년 동안 얼어붙어 있던 심장에 뜨거운 피가 다시 도는 것을 느꼈다.​더 이상 슬픔에 겨워 눈물 흘리는 허울뿐인대한제국에 국모가 아니었다.​"일어나거라 민혁아."​시은이 차갑고도 단단한 음성으로 명하자 민혁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의 눈빛은 방금 전까지 본가 앞마당의 살귀처럼 잔혹했던 빛을 거두고 오직 주군의 명령만을 기다리는 절대적인 경외로 가득 차 있었다.​"오늘 밤이 지나면 저 오만한 황충들은 우리가 파놓은 무덤 속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오게 될 것이다."​시은의 붉은 입술이 서늘한 미소를 그려냈다.​다음 날 아침​세상을 집어삼킬 듯 몰아치던 간밤의 폭우가 모든 오물을 씻어내린 듯 황궁의 하늘은 눈이 시리도록 푸르고 청명했다. 그러나 따스하고 평화로운 아침의 햇살이 무색하게도 황제의 편전은 폭풍전야의 기괴한 고요함에 휩싸여 있었다.​황제 유종석은 최고급 백자 찻잔에 담긴 향긋한 차를 마시며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넓은 용상 위 그의 무릎에는 속이 훤히 비치는 천박한 붉은 실크 슬립 차림의 신아리가 나른한 고양이처럼 기대앉아 있었다.​"폐하 간밤에 좋은 꿈은 꾸셨사옵니까?"​아리가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종석의 귓가에 속삭였다.​"하하하 물론이지 오늘 아침이면 내 눈엣가시 같던 민현석 늙은이가 제 명을 다했다는 반가운 부고가 들려올 테니깐 말이야 내가 친히 기른 흑영의 실력은 대한 제국 제일이니깐 아마 지금쯤 흔적도 없이 그 늙은이의 숨통을 끊어놓고 지옥으로 보냈을것이다."​종석은 마치 이미 승리라도 거머쥔 듯 오만하게 웃음을 터뜨렸다.​"호호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평생 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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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황제의 기만 피어나는 불신
​"기대하십시오 폐하 어젯밤의 지옥은 이제 겨우 시작일 뿐이니까요."​서늘하고도 잔혹한 귓속말을 끝으로 시은은 미련 없이 뒤를 돌았다. 황금빛 적의(翟衣)가 대리석 바닥을 스치며 내는 사각이는 파찰음만이 죽은 듯 고요해진 편전 안을 날카롭게 가르며 울려 퍼졌다.​"이...이 독부 같은 년! 감히 폐하 앞에서 피를 보이고 협박을 해? 황후! 네가 정녕 미친 것이로구나! 멈춰라! 거기 서지 못할까!" 민시은!!!!​사색이 된 황제 유종석이 등 뒤에서 악을 쓰며 소리쳤지만 시은의 고고한 발걸음은 단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한비서가 얼음장 같은 얼굴로 무미건조한 목례를 남긴 뒤 시은의 뒤를 따랐고 마지막으로 편전 문을 나서던 호위무사 김민혁은 고개를 돌려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종석과 아리를 서늘하게 내려다보았다.​오직 살육과 주군의 안위만을 위해 훈련된 들개처럼 무감각하면서도 잔혹한 눈빛 그 칠흑 같은 시선과 마주친 순간 종석은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섬뜩한 한기에 자신도 모르게 숨을 헉, 하고 삼켰다.​쾅-!​거대한 편전의 문이 무거운 굉음을 내며 닫히는 소리와 함께 14년간 오만하게 군림했던 황제의 권위도 산산조각이 났다.​"꺄아아아악! 치워! 당장 치워! 저 끔찍한 것을 내 눈앞에서 당장 치우란 말이야!"​그제야 정신을 차린 신아리가 자개 상자 안에 담긴 흑영 조장의 잘린 손목을 보며 발작하듯 비명을 질렀다. 황제의 수석 비서관이 파랗게 질린 얼굴로 황급히 다가와 상자를 덮고는 밖으로 쫓기듯 뛰쳐나갔다. 넓고 화려한 편전 안에는 거친 숨을 몰아쉬는 종석과 공포에 질려 바닥을 기어가는 아리만이 남았다.​"폐...폐하 ! 저. .저민시은 저년이 드디어 본색을 드러냈습니다. 폐하의 수족을 저리 잔인하게 베어내고 우리를 죽이려 들고 있습니다! 저 무서운 년을 당장 폐위시켜야 하옵니다!"폐하!시끄럽다! 민시은 이.. 이독한년!​아리가 종석의 바짓가랑이를 부여잡고 처절하게 울부짖었다. 그 가증스러운 눈물과 비명에, 종석은 이를 뿌득 갈았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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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역전된 올가미와 잔혹한 심판
​며칠 뒤 궁지에 몰린 황실의 교활한 기만은 본격적으로 그 추악한 민낯을 드러내기 시작했다.​다음 날 대한제국 전역의 뉴스 채널과 주요 일간지 1면은 일제히 황실 언론 통제관들이 뿌린 자극적인 헤드라인으로 도배되었다.​[특보: 민석그룹 황실 문화재 사업 독점 실패하자 국고 지원 전면 중단 선언!][재벌의 끝없는 갑질 대한제국 황실의 존엄성 훼손 논란!][황후 민시은 친정의 막강한 권력을 등에 업고 내명부 권력 사유화 의혹]​긴급 기자회견장에 선 황제 유종석은 완벽한 피해자의 얼굴을 연기하고 있었다. 그는 수십 대의 카메라 플래시 세례 속에서 짐짓 비통하고 고뇌에 찬 표정으로 단상에 올라 백성들을 향해 깊이 고개를 숙였다.​"친애하는 대한제국 국민 여러분 작금의 사태에 황제로서 참담한 심정과 깊은 유감을 표합니다. 대한제국 경제의 기둥이라 믿었던 민석그룹은 제국의 상징인 황실의 고유 권한마저 거대한 자본으로 쥐고 흔들려 하였습니다. 그들이 내명부의 수장인 황후의 친정이라는 이유만으로 묵인하고 넘어가기에는 그들의 오만한 탐욕이 이미 도를 넘었습니다."​종석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치밀하게 계산된 가증스러운 연기였다.​"짐은 비록 황실의 곳간이 비어 이슬을 마시고 사는 한이 있더라도 한 줌의 권력을 쥔 재벌의 횡포에 무릎 꿇고 굴복하여 황실의 숭고한 명예를 팔아넘기지 않을 것입니다 백성 여러분 황실을 지켜주십시오!"​그의 거짓 눈물 연기는 완벽하게 대중의 감정을 파고들었다. 진실을 알 리 없는 백성들은 분노했고 여론은 순식간에 황실을 핍박하는 악랄한 거대 재벌 민석그룹과 아비의 막강한 자본 뒤에 숨어 황제를 능멸하는 오만한 황후를 질타하는 방향으로 들끓기 시작했다.​같은 시각 신아리의 처소인 화려한 별궁에서는벽면을 가득 채운 대형 TV 중계를 지켜보던 신아리는 최고급 붉은 와인을 단숨에 들이켜며 통쾌하다는 듯 광기 어린 폭소를 터뜨렸다.​"하하하! 멍청한 백성들 같으니! 저렇게 단상에 서서 적당히 불쌍한 척 눈물 몇 방울 흘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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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역전된 덫, 무너지는 옥좌
다음 날 오전 황실 내수사 특별 청문회 감사장 ​거대한 국왕의 옥좌 아래 수십 명의 깐깐한 감사관들과 특종을 노리는 언론사 기자들이 구름 떼처럼 몰려들어 장내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황제 유종석은 완벽한 승리자의 여유를 숨긴 채 짐짓 근엄하고 무거운 표정으로 상석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옆 화려하게 늘어진 진주 주렴 뒤에는 내명부의 수장 자격으로 참석한 황후 민시은이 미동도 없이 고요히 앉아 있었다.  주렴에 가려 그녀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종석은 콧방귀를 뀌었다.  보나 마나 공포에 질려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이제 황실 특별 감사를 시작하겠다." ​종석의 엄숙한 목소리가 마이크를 타고 감사장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오늘 이 자리는 백성들의 피땀 어린 세금인 황실의 신성한 국고 5천억 원이 어찌하여 민석그룹의 불법 비자금으로 흘러 들어갔는지 그 추악한 진실을 명백히 밝히는 자리다.  핵심 증인인 재무부 박동식 회계관을 당장 안으로 들라 하라!" ​육중한 문이 열리고, 겁에 질려 파랗게 질린 표정의 사내 하나가 내수사 호위병들의 삼엄한 호위를 받으며 중앙으로 걸어 들어왔다. ​종석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저 어리숙한 박동식의 입에서 '황후의 사주를 받았다'는 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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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버림받은 요부와 텅 빈 감사장의 광기
​황실 내수사 감사장 수십 개의 샹들리에가 뿜어내는 찬란한 불빛조차 지금 이 공간을 짓누르는 무거운 한기를 걷어내진 못했다.​"이 시각 부로 내명부 수장의 권한으로 황제 직속 궁녀 신아리를 국고 횡령 및 황후 암살 미수 혐의로 즉각 하옥할 것을 명한다. 방해하는 자는 그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역모의 죄로 다스릴 것이다!"​시은의 차갑고도 단호한 선언이 숨 막히는 긴장감으로 팽팽했던 감사장의 허공을 날카로운 검처럼 베어냈다.일순간 호흡 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 지독한 정적이 공간을 집어삼켰다.​그 서늘하고도 압도적인 황명(皇命)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시은의 등 뒤에 그림자처럼 도열해 있던 호위무사 김민혁의 손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그의 턱짓 수신호를 받은 덩치 큰 내수사 소속 호위병들이 무거운 갑옷 소리를 절렁이며 맹수처럼 우르르 몰려들었다.​그들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바닥에 주저앉아 넋을 잃고 있던 신아리에게 달려들어 그녀의 가녀린 양팔을 거칠고 억세게 꺾어 결박했다.​"이....이거 놔! 당장 놓으란 말이야! 내가 누군지 알아? 내 몸에 감히 손을 대고도 네놈들의 목숨이 온전할 줄 아느냐! 나는 폐하의 사람이야! 감히 나를 건드려?!"​아리가 미친 듯이 발버둥 치며 악을 썼다. 목에 핏대가 서고 고운 얼굴이 흉측하게 일그러졌지만 오직 살육과 무력만을 위해 길러진 건장한 호위병들의 악력을 이겨낼 방도는 없었다.​버둥거릴수록 황제가 직접 하사했던 최고급 실크 드레스가 찢어질 듯 구겨졌고 머리를 장식하고 있던 수천만 원짜리 다이아몬드 티아라가 바닥에 나뒹굴며 파열음을 냈다.​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짐짝처럼 질질 끌려가면서도 아리는 핏발이 선 살기 어린 눈으로 단상 위의 유종석을 향해 구원의 손길을 뻗었다.​"폐...폐하..폐하! 저를 살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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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밑바닥 요부의 탄생, 14년 전 엇갈린 그날]
민석그룹의 두뇌 한비서와 손에 피를 묻힐 준비를 마친 흉포한 호위무사 김민혁이 그 뒤를 철통같이 호위하며 따랐다. ​모두가 썰물처럼 빠져나간 텅 빈 옥좌 앞에는 처참하게 구겨지고 짓밟힌 황제의 알량한 위엄만이 깨진 도자기 파편처럼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같은 시각 황궁의 가장 어둡고 습한 밑바닥 내명부 지하 감옥에서는 ​빛 한 줌 들어오지 않는 서늘하고 퀴퀴한 감옥의 더러운 지푸라기 위로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신아리가 마치 쓰레기 짐짝처럼 무참하게 내동댕이쳐졌다. ​철컹-! ​육중한 철창문이 닫히고 묵직한 자물쇠가 잠기는 소리가 지하의 적막을 찢었다. ​"이것들이 미쳤어! 감히 내 몸에 손을 대? 당장 문 열어! 문 열지 못해?! 폐하께서 아시면 너희 놈들 목숨은 당장 파리 목숨이 될 줄 알아라!" ​철창에 미친 듯이 매달려 발악하며 흔들어대던 아리의 하얀 손가락 마디에서 붉은 피가 배어 나왔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이끼 낀 돌벽에 부딪혀 돌아오는 자신의 찢어지는 목소리와 차가운 메아리뿐이었다. ​발버둥 치던 아리는 다리에 힘이 풀려 털썩, 차가운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바닥에서부터 뼛속까지 스며 올라오는 지독한 한기와 코를 찌르는 역겨운 곰팡내 그리고 썩은 쥐들의 냄새가 가득했다. ​아리는 그 끔찍하리만치 익숙한 냄새에 흠칫 온몸을 떨며 자신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이 냄새……. 맞아 이 냄새야 내가 그토록 도망치고 싶어 발악했던 그 지독하게 가난하고 끔찍했던 그곳의 냄새야' ​아리의 초점 잃은 눈동자가 애써 머릿속 깊은 곳에 파묻어두었던 14년 전 과거의 끔찍하고 더러운 기억 속으로 거칠게 빨려 들어갔다. ​14년 전 서울 외곽에 자리한 낡고 썩어빠진 고아원, ​그곳은 버림받은 아이들을 따뜻하게 품어 보호하는 울타리가 아니었다. ​피도 눈물도 없는 원장이 아이들의 노동력을 착취하고 정부에서 나오는 얄팍한 보조금마저 제 주머니로 횡령하며 배를 불리는 지옥의 수용소였다. ​겨울에는 얼어 죽고 여름에는 썩은 음식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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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피로 물든 제국, 어둠 속에서 태어난 사신(死神)
​흙먼지가 묻어 엉망이 된 얼굴이었지만, 묘하게 사내의 마음을 홀리는 아리의 크고 깊은 눈망울에는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한 처절한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완벽하게 계산된 너무나도 가련하고 아름다운 희생양의 모습이었다.갑작스러운 소란에 미간을 찌푸리며 신경질을 내려던 황태자 종석은 제 발밑에 납작 엎드려 자신을 마치 유일한 구원자처럼혹은 절대적인 신처럼 우러러보는 소녀의 묘한 눈빛에 멈칫했다."아프냐?"종석이 짐짓 근엄한 척 거드름을 피우며 묻자아리는 기다렸다는 듯 종석의 바짓가랑이를 가녀린 두 손으로 꽉 부여잡았다.최고급 실크 바지에 끈적한 진흙이 묻어났지만, 종석은 웬일인지 발을 빼지 않았다. ​"흐윽, 황태자 전하…… 제, 제발 저 좀 살려주세요."아리의 가냘픈 목소리가 봄바람에 나부끼는 낙엽처럼 애처롭게 떨렸다."이곳의 악마 같은 원장이 밤마다 이유 없이 저를 때리고 어두운 지하실에 가둡니다. 흐흑…… 너무 아파서 이제는 뼈가 부서질 것 같아서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요 전하께서 자비로운 손길로 저를 이 지옥에서 꺼내주시지 않는다면 저는 내일 아침 매를 맞아 차가운 주검이 되고 말 거예요. 제...제발 제 목숨을 거두어 주십시오 전하!"종석은 자신의 바짓가랑이를 생명줄처럼 붙잡고 처절하게 매달리는 이 어리고 가녀린 소녀를 흥미로운 그리고 탐욕스러운 눈길로 내려다보았다.황태자라는 자신의 신분을 철저히 우러러보며 맹목적으로 구원을 비는 이 절대적인 복종과 의존 그것은 15살 종석의 가슴속 깊은 곳에 음습하게 똬리를 틀고 있던 비열한 우월감과 알량한 지배욕을 완벽하게그리고 달콤하게 자극했다. 늘 자신과 동등한 아니 오히려 더 기품 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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