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그러던 어느 날, 이안영은 우연히 지나윤이 아주 크고 고급스러운 자동차에 올라타는 모습을 봤다.자기가 살던 낡은 아파트 단지에서도 자동차 자체는 드문 풍경이 아니었다.하지만 그렇게 크고 위압감 있는 고급 세단은 거의 본 적이 없었다.그날 이안영은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지나윤이 차에 올라타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그리고 자동차는 그대로 빠르게 멀어져 시야 밖으로 사라졌다.그 후, 이안영은 다시 지나윤을 보자마자 참지 못하고 물었다.그 차가 누구 차냐고.사실 질문을 꺼낼 때만 해도, 이안영 마음속에서는 그 차가 지나윤 친척이나 친구 집 차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아무리 생각해도 지나윤 집 차일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아, 우리 할아버지 차야.”“네 할아버지?”이안영은 깜짝 놀랐다.“응.”지나윤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표정은 왠지 말을 망설이는 듯했다.이안영은 궁금했다.곧바로 지나윤 손을 붙잡고 지나윤 할아버지 이야기를 이것저것 돌려가며 물어봤다.“우리 할아버지는 날 안 좋아하셔.”말이 끝나자마자 굵은 눈물이 지나윤 눈에서 뚝뚝 떨어졌다.이안영은 당황해서 곧바로 지나윤을 달래기 시작했다.두 아이는 사람이 없는 작은 놀이터로 갔고 놀이기구에 올라가 이야기를 나눴다.그 시절 지나윤은 이씨 집안에서 너무 괴롭고 답답하게 살고 있었다.매일 눈치 보며 조심조심 살았지만 그래도 이경성은 늘 지나윤 흠을 잡아냈다.차가운 물이 가득한 연못가에 벌 세우기도 했고 회초리로 때리기도 했다.그래서 지금 자기 이야기를 진심으로 들어주고 마음을 나눌 친구가 생긴 것이 지나윤은 너무 기쁘고 설렜다.결국 지나윤은 이씨그룹 집안에서 겪은 일들을 전부 이안영에게 털어놓았다.그제야 이안영은 알게 됐다.지나윤은 평범한 집 애가 아니라는 사실을.자기와 달랐고, 달라도 너무나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이었다.LY그룹 집안이 그 낡은 아파트 단지에 살던 이유도 그저 자기네 집 창고와 가까웠기 때문이었다.다른 지역에는 또 다른 집들도 있었다.예전의 이안영은
유시진은 지나윤이 말한 예전이 언제인지 알고 있었다.두 사람이 결혼 생활을 하던 시절, 그때를 말하는 것이었다.유시진 표정이 굳어지는 걸 본 지나윤은 씁쓸하게 웃었다.“미안, 괜히 그런 얘기 꺼냈네.”“아니야. 사과할 필요 없어.”유시진은 급하게 말을 이었다.“잘못한 건 나였어.”지나윤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다 지난 일이잖아.”“정말 다 지난 거야?”순간, 유시진이 지나윤 손을 갑자기 붙잡았고 여자는 눈을 크게 떴다.유시진 손바닥은 아까보다 열기가 많이 내려가 있었다.지나윤은 애써 자기 손을 빼냈다.“죽 더 가져올게.”유시진은 멀어지는 지나윤 뒷모습을 바라봤다.손바닥 안이 텅 빈 것 같았고 마음도 마찬가지로 빈 것 같았다.한편, 이안영은 이미 C국 D시 구치소에 수감된 상태였다.구치소는 유치장과 달랐고 유치장은 임시 구금 대상자들이 잠시 들어가는 곳이었다.며칠 지나면 대부분 풀려났지만 구치소는 수사받아야 할 피의자들이 들어오는 곳이었다.재판이 끝나면 그대로 교도소로 이감돼 형을 살아야 할 수도 있었다.또한 이안영은 공개적으로 이경성 살인을 인정했으니 당연히 형사 사건이었다.좁은 수감실 안, 이안영은 다른 여자 수감자들과 함께 갇혀 있었다.넓은 공동 침상이 공간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고, 사람들이 움직일 수 있는 자리는 아주 비좁았다.이안영은 살아오면서 이런 곳에 와본 적이 없었고 상상조차 해본 적 없었다.이런 환경은 굉장히 끔찍했다.회색빛 벽은 군데군데 벗겨져 있었고, 공기에는 역한 냄새가 가득했다.수감자들 얼굴은 하나같이 생기 없는 시체 같았다.불과 하루 전까지만 해도, 이안영은 맞춤 제작 드레스를 입고, 몸에는 온갖 보석을 두른 채 무대 위에 서 있었다.그리고 사람들의 부러움과 찬사를 한 몸에 받고 있었다.게다가 LY그룹은 올해 C국 최고의 기업상까지 받은 상태였다.그 순간, 이안영은 갑자기 멍해졌다.확실히 LY그룹은 올해 최고의 기업상을 받았다.하지만 그게 본인이랑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상을
지나윤은 유시진이 저 정도로 아픈 와중에도 잔머리를 굴리고 있을 줄은 몰랐다.바로 눈앞에 있는 창백한 얼굴, 아픈 와중에도 웃을 때면 어딘가 능글맞고 교활한 느낌까지 섞여 있었다.덕분에 지나윤은 유시진 말이 진심인지 아닌지 순간 헷갈릴 정도였다.그래도 어쨌든 어젯밤 유시진은 자기 곁에 있어 줬고 자기 재킷까지 벗어 지나윤에게 덮어준 건 사실이었다.그러니 이렇게 심하게 감기에 걸린 것도 결국 자기 때문이었다.어떻게 생각해도 이번만큼은 자기가 유시진을 챙겨주는 게 맞았다.게다가 이 집에는 지금 둘밖에 없었다.“얌전히 누워 있어. 내가 밥 해줄게.”지나윤이 몸을 일으켜 나가려던 순간, 뒤에서 유시진 목소리가 들려왔다.“주문해도 돼?”지나윤이 뒤돌아봤는데 표정에는 대놓고 지금 메뉴까지 고르겠냐는 뜻이 담겨 있었다.유시진은 기침을 두어 번 하더니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난 갈비찜, 족발, 갈릭 새우랑, 곱창이랑...”“불고기버거랑 그리고 생선탕 먹고 싶어.”술술 나오는 메뉴들에 지나윤은 말문이 막혔다.조금 전 직접 체온까지 재보지 않았으면 진짜 꾀병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그래. 기다리고 있어.”지나윤이 방을 나가 주방으로 들어가는 걸 본 유시진은 텅 빈 배를 문지르며 입맛을 다셨다.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지나윤이 다시 돌아왔고 손에는 작은 쟁반이 들려 있었다.쟁반 위에는 좁쌀죽 한 그릇과 반찬 두 접시가 올려져 있었다.유시진은 눈을 크게 떴고 황당하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이에 지나윤은 피식 웃었다.“설마 진짜 네가 주문한 거 다 해줄 거라고 믿은 거야?”왠지 무시당한 기분이 든 유시진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상처받은 사람 같은 얼굴이었다.“지금 열도 나고 약 먹는 중이잖아. 기름지고 자극적인 거 먹으면 안 돼.”지나윤은 침대 옆에 앉아 죽 그릇을 들어 올렸다.“이런 거 먹어야 빨리 나아.”말이 끝나자마자 유시진이 갑자기 입을 크게 벌렸다.“아...”이에 지나윤은 멍한 얼굴로 유시진을 바라봤다.원래 지나윤 생각
지나윤은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하지만 이경성은 손금을 봐준 뒤에도 끝까지 이안영과 유시진을 이어주려 했다.생각하면 할수록 이해되지 않았기에 지나윤은 점점 더 답답해졌다.핏줄로 이어진 자기 할아버지, 지나윤은 그 사람을 꽤 잘 안다고 생각해 왔다.이경성은 오직 운명만 믿는 사람이었다.미신과 사주, 손금 같은 걸 누구보다 맹신했다.그렇다면 오히려 이안영이 조작한 가짜 유언장이 더 이경성다운 내용이어야 맞았다. “대체 왜? 왜 LY그룹 전부를 나한테 남긴 거지?”지나윤은 바다를 바라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유시진은 그런 지나윤을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자기 재산 나한테 남겼다고 내가 과거 일을 전부 용서할 거라고 생각한 건가?”지나윤은 팔짱을 낀 채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하지만 유시진은 지나윤 눈가가 붉게 젖어 있다는 걸 보았다.“나윤아.”유시진은 천천히 두 팔을 벌리고는 그대로 지나윤을 품 안으로 끌어안았다.얇은 몸이 작게 떨렸고, 유시진은 지나윤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이경성에 대한 복잡한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지나윤은 이경성을 싫어했다.어쩌면 그게 당연했을지도 몰랐다.이경성은 실제로 지나윤 어린 시절에 깊은 상처를 남긴 사람이었으니까.지나윤 어두운 유년 시절 대부분은 결국 이경성에 의해 비롯된 것이었다.그런데 그런 사람이 죽기 전 모든 재산을 지나윤에게 남겼다.그리고 그 유산 때문에 오히려 지나윤은 죽을 뻔한 위험까지 겪게 됐다.유시진은 지나윤은 사실 이경성을 이해하고 싶어 했고 용서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눈치챘다.하지만 과거를 내려놓지 못하고 있었다.“그리고...”유시진 품에 안긴 지나윤 목소리는 마치 바닷바람에 흩어질 듯 희미했다.“그분은 정말 날 사랑한 적 있었을까?”그 질문에 유시진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그리고 유시진 또한 지나윤이 정말 자기에게 답을 구하는 게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지나윤은 단지 이씨 집안과 자기 사이에 정말 가족이라는 감정이 존재했던 건지 알고 싶었던 것이다
짙은 밤바다 앞.지나윤이 손을 들어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정리하려던 순간이었다.유시진이 먼저 손을 뻗더니 바닷바람에 흐트러진 머리칼을 조심스럽게 귀 뒤로 넘겨주었다.곧 지나윤은 고개를 돌려 유시진을 바라봤다.유시진 눈빛에는 바다보다도 깊은 감정이 담겨 있었고 어깨 위에는 남자의 재킷이 걸쳐져 있었다.그래서인지 지나윤은 조금도 춥지 않았다.“나 진짜 유언장 봤어.”지나윤은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며 입을 열었다.“응.”유시진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그 유언장은 유시진도 봤다.오늘 시상식 대형 스크린에 공개된 바로 그 내용이었다.물론 이안영을 떠보기 위해 사용한 CCTV 영상은 가짜였지만 유언장만큼은 달랐다.오현준에게 직접 받아낸 진짜 유언장이었다.“도저히 이해가 안 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지나윤은 거칠게 밀려오는 파도를 바라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사실 진짜 유언장을 보기 전부터도 지나윤은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다.이안영이 살인까지 감수하며 조작하려 했던 유산, 대체 뭐가 들어 있었길래 그렇게까지 했는지.하지만 막상 진짜 유언장을 펼쳐 내용을 확인했을 때, 지나윤 역시 적잖이 충격받았다.2년 전.이씨 저택에서 들었던 유언 내용과 이경성이 남긴 진짜 유언장은 사실 거의 차이가 없었다.달라진 건 단 하나, 지나윤과 이안영 이름만 서로 뒤바뀌어 있었을 뿐이었다.진짜 유언장 속에서 LY그룹과 이경성 개인 명의의 모든 자산, 그룹 지분과 투자 펀드, 각종 특허 권리까지 전부 지나윤 앞으로 남겨져 있었다.반면 LY재단만이 이안영에게 남겨진 유일한 유산이었다.그런 유언 내용이 지나윤에게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물론 남들이 보기에는 자연스러운 일이었다.진짜 혈육에게 재산을 남긴 것뿐이니까.하지만 지나윤 본인은 이경성이 얼마나 자기 자신을 싫어했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아니 거의 증오에 가까울 정도였다는 것도 알았다.솔직히 말해 이경성이 LY그룹 전부를 자기에게 남겼다는 사실보다, 차라리 이안영에게 전부
지나윤은 이안영과 정면으로 눈을 마주쳤다.실성한 이안영은 체면이고 뭐고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채 손가락으로 지나윤을 가리키며 막말을 퍼붓기 시작했다.“지나윤, 왜 너만 그렇게 운이 좋은 건데?”“태어나자마자 부잣집 딸이었고, 먹고사는 걱정도 없었잖아.”“이름 바꾸고 살아도 결국 유시진이랑 결혼해서 사모님 소리 들으며 살았고...”“심지어 이혼하고도 유시진은 아직까지 널 지켜주고 있잖아.”이안영 입에서 나오는 말마다 지나윤을 향한 노골적인 질투가 묻어났다.“넌 원래 운이 나빠야 하는 사람이었어. 운이 나빴으니까 이경성한테 버려졌던 거 아니야?”거기까지 말한 이안영은 어깨를 으쓱하며 비웃었다.“다들 이경성이 날 친손녀처럼 아꼈다고 하지?”“근데 정말 친손녀처럼 생각했다면 왜 유언장엔 돈 안 되는 재단만 남겨놨는데?”“처음부터 날 LY그룹 후계자로 만들 생각이 없었다면 왜 날 키웠는데?”“왜 날 입양시키고, 왜 그렇게 공들여 가르쳤는데? 하늘까지 올라갈 희망을 줘놓고 다시 지옥으로 밀어 떨어뜨려?”“왜? 대체 날 뭐로 본 건데? 사람은 자기 살길 찾아야 하는 거잖아.”“내가 여기까지 올라왔는데 어떻게 다 포기하고 널 다시 이씨 집안으로 들여보내? 내 위에 올라타게 두라고?”“하, 그러니까 내가 그 사람 죽인 건 그 사람이 자초한 거야. 내 잘못 아니라고!”“이안영!”이원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화가 머리끝까지 났는지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너 같은 배은망덕한 인간이 또 어딨어! 우리 집안이 널 얼마나 아꼈는데!”하지만 이원호 분노 섞인 외침에도 이안영은 오히려 비웃듯 눈을 흘겼다.“이경성이 스스로 늑대를 집 안에 들인 거잖아. 호랑이 새끼 키워놓고 나중엔 또 자기 친손녀 편만 들었고.”“애초에 유언장에 이씨 집안 재산 전부 나한테 넘겼으면 이렇게까지 안 왔어. 그러니까 그 사람이 내 손에 죽은 건 당연한 거야.”그때 경찰들이 행사장 안으로 들이닥쳤다.경찰들은 곧장 이안영을 둘러쌌고 여자는 그대로 체포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