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잃고서야 알았던 사랑: Chapter 1 - Chapter 10

30 Chapters

제1화

결혼한 지 3년, 그날 밤은 지나윤이 처음으로 유시진의 서재 컴퓨터를 열어 본 날이었다.평소 같았으면 남편의 컴퓨터를 건드릴 일도 없었겠지만, 급하게 보내야 할 중요한 문서가 있어서 어쩔 수가 없었다.그 파일만 아니었다면 어쩌면 평생 보지 못했을지도 몰랐다.유시진의 컴퓨터에는 한글로 된 프로젝트 폴더들뿐이었다.누가 봐도 HF그룹 관련 업무 파일들 말이다.그런데 딱 하나 이상한 이름의 폴더가 있었다.영어 세 글자, CYS.지나윤은 단순한 호기심으로 그 폴더를 더블 클릭하자 안에는 엑셀 파일 하나만 있었고, 그 파일명은‘복수’였다.가난한 집안의 외동딸인 지나윤에게 상장사 HF그룹 후계자인 유시진과의 결혼은, 객관적으로는 너무 과분한 자리였다.둘의 만남은 딱 드라마 같았고 전개도 역시 그랬다.당시 유시진은 교통사고를 당했고 가해자는 도주했다.그 상황에서 유시진을 병원까지 업고 뛰어간 사람이 지나윤이었다.그렇게 유시진은 목숨을 건졌다.얼마 후, 유시진은 대학교 정문 앞에 나타났고 하필 그날이 밸런타인데이였다.유시진은 핑크 장미 999송이를 건네며 지나윤에게 고백했다.그해 장미 가격이 폭등한 데다가 발렌타인 데이까지 겹쳐서, 그 정도면 최소 천만 원 정도 했다.이러한 상황에 캠퍼스 전체가 들썩거렸다.지나윤은 그 꽃을 너무 아껴 침대맡에 두었고, 그 꽃 때문에 병원에 실려 가면서도 버리지 않았다.꽃가루 알레르기가 있었지만, 그 사실을 단 한 번도 유시진에게 말하지 않았다.그래서 유시진은 매번 데이트 때마다 핑크 장미를 선물했다.졸업도 하기 전에 두 사람은 결혼했고 지나윤은 전업주부가 되었다.바쁜 유시진에게는 집안일을 전담할 사람이 필요했다.또한 지나윤의 시어머니는 늘 말했다.위가 약한 유시진에게는 집밥이 좋고, 가사와 살림은 아내의 몫이며 도우미가 결코 아내를 대신할 수 없다고.그래서 지나윤은 낮에는 집안일을 하고 밤에는 부부 관계를 가지는 삶을 반복하느라, 둘 사이의 교류는 많지 않았다.컴퓨터 화면 속 엑셀 파일은 마치 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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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HF그룹 후계자가 FY주얼리 신제품 발표회에 등장했다는 뉴스 제목이 지나윤의 눈에 그대로 들어왔다.또한 문구에는 한 줄이 더 있었다.아름다운 누군가를 환하게 웃게 하려고 억 소리 나는 돈을 썼다는 기사였다.그 문구에 가슴이 순간 움찔했다.HF그룹의 후계자는 단 한 사람, 유시진뿐이었고 FY주얼리 발표회는 오늘 A시에서 열렸다.지나윤의 손끝이 차갑게 떨리면서 몸도 으슬으슬했다.뉴스를 눌러 보자 사진 한 장이 화면에 크게 나타났다.길고 반듯한 다리, 완벽하게 맞춘 정장, 어디서 찍혀도 빛나는 얼굴, 투샷으로 잡혀도 절대로 꿀리지 않을 외모였다.예전 같으면 지나윤은 이 사진을 오래도록 바라보았을 것이다.잘생겼으니까. 하지만 이번엔 화면을 단숨에 꺼버렸다.무심코 남편의 소셜 네트워크를 열었을 때, 마침 우원재가 새로운 글을 올렸다.우원재는 유시진의 고등학교 동문이었다.[FY에서 전 세계 단 10개만 만든 클래식 핑크 다이아 목걸이, 우리 연서도 가지셨네.]사진에는 여자의 목만 나와 있었고 새하얀 쇄골 위에 얹힌 핑크 다이아 목걸이가 눈부셨다.우원재가 말하는 연서가 누군지는 몰라도 이것 하나는 확실했다.지나윤이 아니라는 것.진료실에서 받은 초음파 사진을 가방에 넣고 집으로 돌아가려고 택시에 몸을 실었다.아랫배는 여전히 묵직하게 당겼다.겨우 집에 도착했다가, 오늘 장을 보지 않은 걸 떠올리고는 다시 장을 보러 나갔다.사 온 건 모두 유시진이 좋아하는 것들뿐이었고, 집에 돌아와 씻고 다듬고 요리하다 보니 어느새 해가 져 있었다.밤 아홉 시 무렵, 유시진이 돌아왔다.“말 안 했는데, 오늘 저녁 약속 있어서 밖에서 먹었어.”목소리는 차분했고 표정은 알 수 없었지만, 지나윤은 묵묵히 유시진의 외투를 받아 들었다.그런데 이상했다.3년 동안 한 번도 본 적 없는 모습이었다.접대 후 돌아오면 늘 과한 스프레이와 술 냄새가 났는데 오늘은 정반대였다.은은한 향수 냄새만 남아 있었고, 머리에는 젤도 바르지 않은 모습이 마치 방금 씻고 나온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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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지나윤은 병원에 한 달 가까이 누워 지냈다.밤마다 꿈꾸었다.꿈속에서 유시진이 병실로 찾아와 침대맡에 앉아 있었고, 하루 종일 자신의 곁을 지키며 배 속 작은 아이의 움직임에 귀를 기울이며 웃곤 했다.눈을 뜰 때마다 눈물부터 고였다.‘아이가 이제는 없어.’그리고 그 한 달 동안 유시진은 단 한 번도 병원에 오지 않았다.출장 때문에 M국에 갔다고 했고, 대신 비서인 장우영이 두 번 꽃을 가져다준 게 전부였다.모두 핑크 장미였고 치료비는 이미 정산이 되어 있었다.몇 번이고 지나윤은 그 꽃을 간호사에게 넘기려다가, 막상 또 아까워서 도로 끌어안았다.차라리 매일 재채기를 하더라도 그대로 두고 싶었다.임신 8주 차라 육체적으로 큰 통증은 남지 않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늘 습관처럼 배를 쓰다듬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그럴 때마다 자신의 몸 안에 잠깐이나마 머물렀던 작은 생명을 떠올리며 코끝이 시큰거렸다.첫 아이였고, 10년을 사랑해 온 남자와의 아이였던 그 아이는 그렇게 사라졌다.밤마다 눈물로 베개를 적시느라 몸도 잘 회복되지 않았다.결국 병원에서 새 환자 때문에 병실을 비워 달라고 하자, 지나윤은 천천히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그때 문이 열렸고 낯선 여자가 병실로 들어왔다.단정한 이목구비에 공들인 화장, 바비 핑크 끈 벨벳 원피스에 몸을 맡긴 채, 목에는 강렬하게 빛나는 핑크 다이아몬드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지나윤은 한눈에 알아보았다.우원재가 소셜 네트워크에서 자랑하던 FY주얼리 전 세계 한정 핑크 다이아몬드 목걸이였다.여자는 자연스럽게 미소 지으며 인사했다.“안녕하세요. 저는 채연서예요. 시진이랑 고등학교 동창이에요.”이름을 듣자마자 지나윤은 속으로 초성을 떠올렸다.‘CYS. 맞는 것 같네.’채연서가 손을 내밀자 지나윤도 예의 있게 맞잡았다.“안녕하세요. 저는 지나윤이에요. 시진 씨 아내죠. 사모님이라고 부르셔도 되고요.”순간, 채연서의 표정이 아주 짧게 흔들렸지만, 금세 아무 일 없었던 듯 다시 미소를 되찾았다.“오늘은 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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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유시진은 미간을 찌푸리면서 꽃다발과 한약 봉투를 내려놓았다.그리고 천천히 핸드폰을 꺼내 지나윤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전화는 연결되지 않았다.유시진은 아내가 집에 없는 날이 있을 거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그래도 늘 하던 대로 먼저 LP를 올리고, 가장 좋아하는 쇼팽 야상곡을 틀었다.한 시간이 지나고 두 시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세 시간이 지나자, 유시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옷장을 열어 보았다.옷장 안에는 지나윤의 옷이 대부분 그대로 걸려 있었는데, 전부 자신이 사 준 옷들이었고 전부 핑크색 계열이었다.그런데 결혼 전에 입던 파란색 정장 두 벌만 감쪽같이 사라진 상태였다.그때, 초인종 대신 택배 기사가 인터폰을 눌렀다.수취인은 유시진이지만, 자신은 아무것도 주문한 기억이 없었다. 택배 상자는 꽤 큰 종이상자였다.포장을 뜯자 안에서 쏟아져 나온 건 온통 화려한 물건들이었다.핑크 장미 모양의 영구 보존 꽃, 핑크 다이아몬드 목걸이, 핑크색 H사 가방, 반짝이는 핫핑크 하이힐, 체리 블로썸 색 드레스가 있었다.또한 핑크 다이아 시계, 금장식 오브제, 복숭앗빛 실크 스카프, 하이엔드 향수, 핑크 다이아 브로치, 차 키, 핑크 다이아 반지까지.유시진의 표정이 점점 굳어지면서, 눈동자 깊은 곳에서 폭풍이 서서히 일어나는 것 같았다.이것들은 전부 예전에 지나윤을 쫓아다니며 선물했던 것들이었다.그리고 핑크 다이아 반지는 프러포즈했을 때의 반지였다.대충 집어 들어 확인해 보니, 그 많은 선물들은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태그조차 떼어지지 않은 채였다.박스 안에서 유일하게 선물이 아닌 것은 서류 봉투 하나였다.유시진은 아무 생각 없이 봉투를 열어 안에 든 서류를 꺼냈다.A시의 밤 풍경은 여전히 화려했다.불빛이 가득했고 금빛으로 물든 도시였다.삼호거리에 있는 낡은 집은 몇 년째 불이 켜진 적이 없었지만 오늘은 예외였다.해 질 무렵 켜진 불이 밤늦도록 꺼지지 않았다.지나윤은 반나절 넘게 걸려 방 안을 말끔히 치웠다.집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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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지나윤은 오랜만에 아침부터 늦잠을 잤다.어젯밤에 늦게 잔 데다가, 무엇보다 이제는 새벽마다 재래시장에 나가 가장 싱싱한 채소를 살 필요도 없었다.싱크대 앞에서 봉지라면 하나를 끓였다.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스테인리스 냄비를 식탁 위에 내려놓고 젓가락으로 라면을 집어 올리자, 간단한 국물 냄새가 오히려 마음을 편하게 해 줬다.라면 국물까지 싹 비우고 나서야 밖으로 나섰고 은행에 들러 창구에서 이체 수표 한 장을 적었다.금액란에 숫자를 또박또박 적고 비고란에는 짧게 한 줄을 썼다.[병원비]계좌 이체 금액은 20억 원이었다.창구 직원이 재확인하고 도장을 찍는 동안 지나윤은 한 번도 망설이지 않았다.은행을 나온 뒤에는 하란카페로 향했다. 오늘은 고아라와 점심을 먹기로 해서.결혼 이후, HF그룹 며느리로서 집안일에만 매달리며 살겠다고 마음먹은 뒤로는 동창이나 친구들과의 연락을 거의 끊다시피 했다.그나마 남아 있던 마지막 친구가 고아라였지만, 마지막으로 얼굴을 본 건 3년 전이었다.그 3년 동안 흘러가 버린 자신의 청춘을 떠올리자, 지나윤은 마음속으로 스스로에게 욕을 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예약해 둔 창가 자리에 먼저 앉아 고아라를 기다렸다.고아라는 지금 A시에서 제법 이름 있는 입시 및 취미 겸용 음악 학원에서 성악 강사로 일하고 있었다.오늘 밥을 사겠다고 먼저 연락이 온 걸 보면, 순수하게 반갑기도 하겠지만 한편으로는 무슨 일을 소개해 주려는 생각도 있을 거라고 짐작했다.역시나, 자리에 앉자 인사만 몇 마디 나눈 뒤 곧바로 본론으로 넘어갔다.“야, 우리 학원 이번에 피아노 선생님 추가로 뽑거든. 경력 있으면 더 좋고 없으면 차근차근 배우게 해 준대.”“아라야, 고마워.”지나윤은 가볍게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근데 나 다시는 피아노 안 치겠다고 다짐했어. 그리고 이미 다른 일자리 구해놨어.”“어?”고아라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설마 주얼리 디자인 회사? 전공 살린 거야?”지나윤은 다시 고개를 저었다.“아니야. 나 대학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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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지나윤은 이날 저녁, 뜻밖의 풍경을 마주하게 되었다.채연서는 원래 유시진이 도착하면 당당히 VIP 통로로 들어갈 생각이었다.유시진에게 초대장이 없더라도, 그 사람의 지위와 얼굴이면 어디든 통행증이나 마찬가지였다.하지만 파티 시작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도 유시진은 끝내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결국 채연서는 오희나와 송려화를 데리고 직원 통로로 발걸음을 옮겼다.직원 구역에서 회장 안으로 들어선 뒤 채연서는 고개를 두리번거렸다.그러나 지나윤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아까 그 지나윤 분명 배달하러 온 거야. 초대장은 절대 본인 게 아닐 거야.”오희나가 코웃음을 쳤다.“그러니까. 대학교 졸업도 못 했는데 FY주얼리 파티에 초대? 말도 안 돼.”송려화도 맞장구쳤다.두 사람의 비웃음에 채연서는 조금 안심한 숨을 내쉬었다.FY주얼리는 전 세계에서도 손에 꼽히는 하이엔드 브랜드였다.이번 연회 역시 네 해 연속 매출 1위를 차지한 피아노 시리즈의 성과를 기념하는 자리였다.업계 최고의 특허 기술에 예술적인 디자인, 대중의 반응까지 모두 완벽했던 그 시리즈는 지금도 하이엔드 주얼리의 상징처럼 취급됐다.“오늘 그 피아노 시리즈의 디자이너도 여기 온다는 말이 있어.”그 말에 채연서가 눈을 반짝였고 그 표정엔 설렘과 동경이 가득했다.“그 사람 되게 신비롭다며?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아무도 모른대.”오희나가 덧붙였다.“연서야, 너도 이제 FY 직원이잖아. 너도 모르는 거야?”송려화가 묻자 채연서는 아쉽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서명은 BYC로만 남겨져 있고, 다른 건 나도 모르지. 우리 팀장도 모른다더라.”2층 VIP 라운지에서는 피터가 지나윤을 맞이했다.FY주얼리의 공동 창립자이자 현 대표인 남자였다.“3년 만이네요. 더 예뻐졌어요.”그러고는 커피 한 잔을 조용히 내밀었다.사실 지나윤은 그게 단순한 예의라는 걸 잘 알았다.유시진과 살던 지난 3년 동안 지나윤은 부엌과 집안일에 파묻혀 살았다.자신을 돌보는 시간도 꾸미는 여유도 없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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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누구지? 처음 보는 얼굴인데, 요즘 뜬 연예인인가?”“아냐, 지금 잘나간다는 신인들보다 훨씬 예쁜데?”다들 피터 옆에 선 여인에게 시선이 쏠렸다.피터 곁에 선 여자는 존재감이 굉장히 강했다.블랙 벨벳 소재의 스트랩리스 드레스는 지나윤의 몸선을 고급스럽게 감싸고 있었다.그리고 올려 묶은 웨이브 헤어에는 FY주얼리 피아노 시리즈의 최고가 액세서리가 달려 있었다.흑백 다이아의 강렬한 반짝임이 모든 조명 아래서 한 번도 흔들리지 않는 존재감으로 빛났다.그때, 얼마 전까지 단 한 번도 여자를 제대로 보지 않던 유시진의 시선이 멈췄다.“지나윤?”그러자 옆에 서 있던 채연서, 송려화, 오희나는 동시에 숨을 들이켰다.피터 옆에서 고개를 돌려 막 미소 지은 지나윤의 얼굴이 드러난 순간, 세 사람의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유시진은 숨조차 고르게 쉬지 못하면서 입술을 꽉 깨물었고, 그 눈빛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낯설만큼 선명하면서 어딘가 뒤늦게 뭔가를 깨달은 것 같은 눈빛이었다.이때 채연서가 작게 속삭였다.“정말 생각도 못 했네. 벌써 새 남자를 찾았나 봐.”부드러운 톤이었지만 말끝엔 시린 기류가 섞여 있었다.그 말에 유시진의 눈빛이 일순 어두워졌다.지나윤은 피터에게서 빌린 선물을 착용하고 있었다.또한 유시진과 채연서가 꽁냥대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지만, 이 자리를 피하지 않기로 스스로 선택한 이상 고개를 숙이고 도망칠 이유도 없었다.홀 전체에서 퍼지는 시선들 속에서 오직 유시진만이 지나윤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움직이지 못했다.그러다 이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채연서 곁으로 걸어갔다.아무렇지도 않다는 듯한 얼굴이었지만, 그 얼굴 아래 감춰진 미세한 긴장과 억눌림은 지나윤만 읽을 수 있었다.그리고 그 미소는 결혼 내내 단 한 번도 자신에게 보여준 적이 없던 얼굴이었다.그 사실에 마음이 더 아팠다.그녀의 마음속에 피어난 잠깐의 승부욕은 곧 허무함과 싸늘한 상실감으로 바뀌었다.잠시 뒤, 지나윤은 그저 생각을 좀 정리하고 싶어서 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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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오늘 밤 파티가 시작된 지 벌써 두 시간이 지났지만 유시진의 앞에 놓인 술잔은 그대로였다.유시진이 술을 입에도 대지 않은 이유는 명확했다. 만성 위염이 또 도진 것이다.생각해 보니까, 지난 며칠간 이혼 얘기로 시끄러워진 뒤, 지나윤은 유시진의 한약을 한 번도 달여주지 않았다. 비율도, 불 조절도, 끓이는 시간도 자신만 알고 있었으니 약을 챙겨 먹을 리도 없었다.‘잠깐만, 아예 그 사람 위가 더 아파져도 상관없잖아?’그런 독한 생각이 스쳤지만, 지나윤은 그렇게까지 악하지 못한 사람이었다.그래서 핸드폰을 꺼내 유시진의 한약 처방을 하나하나 떠올렸다.약재 이름, 양, 배합 비율, 끓이는 순서와 시간까지 한 글자도 틀리지 않게 정리해서 메시지로 입력했다.보내기 직전, 인사를 쓸지 고민했다.‘설명이라도 덧붙일까? 차갑게 보일까?’그렇게 여러 문장을 썼다가 지우다가 결국 아무 말도 붙이지 않은 채 메시지를 전송했다.하지만 유시진의 핸드폰을 확인한 사람은 본인이 아니었다.사람들 틈을 벗어나 조용히 뒤로 돌아서 있던 채연서는, 메시지 알림을 본 순간 눈빛이 단단히 굳어졌다.채연서는 지나윤이 보낸 장문의 처방 내용을 하나하나 눈으로 훑고는 그 내용을 그대로 머릿속에 새겼다.그리고 아주 깨끗하게 모든 기록을 다 삭제했다.그 시각, 유시진은 파티장 곳곳에서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오늘은 채연서와 함께 온 자리였지만, HF그룹의 후계자를 알아보는 사람들은 너무 많았다.그래서 어쩔 수 없이 술을 권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남자는 술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다.이미 위는 엄청나게 아팠지만, 불편함이 얼굴에 드러날까 애써 표정을 굳게 유지하고 있었다.그래서 유시진의 기류는 평소보다 훨씬 더 차갑고 예민했다.사실 오늘 이 모든 분위기가, 이 모든 상황이 마치 자신을 옭아매는 족쇄처럼 느껴지고 있었기에 그럴 법도 했다.“시진아.”파티가 거의 끝나갈 무렵, 채연서는 손수 들고 온 뜨끈한 탕약을 유시진 앞으로 내밀었다.그 향은 유시진에게 너무 익숙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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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굳이 내가 가야 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해요.”지나윤은 고개를 틀어 차갑게 말했지만, 유시진은 문을 닫으며 낮게 말을 이었다.“할아버지가 아침부터 계속 네 얘기만 하셨어. 오늘 모임은 HF그룹 본가에서 하는 가족 식사고.”유시진의 할아버지 유희봉은 그녀가 이 집안에 들어온 뒤, 진심으로 잘 대해준 유일한 사람이었다.그 생각이 스치자, 지나윤은 결국 걸음을 멈췄다.잠시 숨을 고른 조수석 쪽으로 돌아가서 문을 열었지만, 그 안에 앉아 있는 사람을 보자마자 표정이 얼어붙었다.“지나윤 씨, 또 뵙네요.”채연서는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있었다.오늘 채연서는 연한 핑크 그레이의 정장 차림이었다.달콤하지만 세련된 냄새가 스쳤고, 목에 걸린 핑크 다이아 목걸이는 유시진이 예전에 직접 건네줬던 그 목걸이였다.품에 안고 있는 핑크 장미도 굳이 묻지 않아도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있었다.‘장미. 또 핑크 장미야.’그녀는 대학 시절, 유시진이 자신을 쫓아다니던 때를 떠올렸다.매일 건네던 꽃, 데이트 때마다 빠지지 않던 색.그때 룸메이트는 말했다.“너, 그 사람 눈에는 핑크 장미처럼 보이나 봐. 그래서 매번 그 색이겠지?”그땐 웃어넘겼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모두가 사랑에 취해 있었던 것이다.현실을 정확하게 볼 눈이 없던 시절이었다.지나윤은 말없이 뒷좌석으로 조용히 자리를 옮겼다.“지나윤 씨, 아니, 앞으로 그냥 말 놓고 편하게 불러도 될까요? 우리 점점 친해지는데 매번 성까지 부르려니 어색해서요.”대답하지 않는 지나윤과 달리 채연서는 힐끗 뒤를 보며 계속 떠들었다.“아, 오해는 하지 말아요. 우리 집이 원래 HF그룹과 친해서 오늘 같은 모임에 제가 가는 건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에요.”“그래서 시진이도 굳이 저보고 같이 오라고 한 거고요.”그 말끝에서 뒤쪽에 앉아 있는 지나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보였는지, 채연서는 뒷미러로 몰래 여자의 표정을 살폈다.“저랑 시진이는 고등학교 동창이에요. 연애할 때도 제가 자주 본가에 드나들었죠.”“그때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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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지나윤은 멈칫했다가 툭 떨어지는 앞치마를 반사적으로 받아 들었다.너무나도 익숙한 일이라서 몸이 먼저 반응할 정도였다.하지만 오래된 얼룩이 남은 앞치마를 손에 쥐고도 예전처럼 바로 자신의 허리에 둘러매진 않았다.예전 가족 모임 때마다 가장 바쁘게 움직인 사람은 항상 지나윤이었다.서른 가지가 넘는 요리를 손질하고, 씻고, 굽고, 볶는 데다가 데우고 플레이팅까지, 모든 것들이 그녀의 몫이었다.유희봉은 늘 그런 지나윤을 말렸다.본가에는 전문 요리사도 있고 도와주는 분들도 충분하다고.하지만 유희봉이 자신이 만든 음식을 더 좋아한다는 걸 잘 아는 지나윤은 늘 가장 먼저 일을 거들었다.이에 다른 친척들도 유희봉의 눈치를 보며 적당히 칭찬 몇 마디를 얹었다.그리고 마지막 설거지와 뒷정리까지 언제나 그녀의 몫이었다.시어머니 양화영은 늘 말했다.여자라면 살림을 알아야 하고 그래야 현명한 며느리라고.하루 종일 움직이고 나서 지쳐도, 유시진이 건네는 짧은 한마디에 잠시라도 위로를 받았다.“고생했어.”그 한마디면 힘들었던 마음이 모두 풀린다고 믿었던 시절이었다.지금 생각하면 참 바보 같았다.“거기서 뭐 해? 얼른 가서 도와.”오희란이 다그쳤지만, 지나윤은 그대로 서 있다가 앞치마를 옆으로 밀어버렸다.“주방에 요리사도 있고 도와주는 분들도 있는데, 제가 들어가면 더 방해돼요.”오희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뭐라고? HF그룹 며느리 가운데 누가 일을 안 하고 있어?”“둘째 어머님도 HF그룹 며느리시잖아요. 근데 왜 직접 안 하세요?”그 말에 오희란은 거의 혀를 깨물 뻔했다.“말버릇이 그게 뭐지? 너는 어른한테 그런 식으로 말할 처지가 아니지.”“어른이라면 오히려 모범을 보이셔야죠. 제가 배울 수 있게요.”주변 공기가 조용히 얼어붙었고, 오희란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지나윤을 그렇게 오래 보아온 사람들조차 이런 여자의 모습은 처음이었다.“약이라도 먹은 거야? 오늘? 동서, 얼른 와서 동서 며느리 좀 봐!”오희란이 양화영을 불러 세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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