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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화. 보고 싶은 사람

Author: 루니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13 04:55:18

“태준 씨, 나 아직 좋아하나 봐.”

녹음을 끝내고도 한동안 휴대전화를 귀에서 떼지 못했다. 그 말은 그에게 간 적이 없었다. 내 번호에만 남은 고백이었다. 그런데도 얼굴이 달아올랐다. 혼자 좋아한다고 말하고 혼자 부끄러워하는 여자라니. 이쯤 되면 짝사랑에도 벌금이 붙어야 했다.

재생 버튼에 손을 올렸다가 거뒀다. 다시 들으면 정말로 인정하게 될 것 같아서였다. 어차피 이미 알고 있었다. 그가 결혼한 사람이라는 사실도, 내가 속았다는 사실도, 그런데 여전히 저녁마다 그의 이름을 떠올린다는 사실까지. 사랑이 성적표라면 나는 이미 낙제였다. 알면서도 좋아한다는 문제에 또 같은 답을 쓰고 있으니. 그렇다고 정답을 몰라서 틀리는 건 아니었다.

“이채린, 정신 차려. 좋아한다고 다 가져도 되는 건 아니잖아.”

스스로에게 한마디 하고 휴대전화를 뒤집었다. 식탁 맞은편 빈 의자는 그대로였다. 태준은 그 자리에 앉은 적도 없는데, 왜 나는 자꾸 그가 앉아 있는 모습을 상상할까. 좋아하는 마음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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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잤으면 책임지세요 대표님   29화. 다시 묻는 밤

    “태준 씨. 내일 나한테 한 번만 더 물어봐요.”그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고 다음 날 저녁 7시와 카페 주소를 문자로 보냈다. 돌아온 답장은 ‘알겠습니다’ 단 한마디였다. 나는 잠시 꺼진 화면을 바라봤다. 대답할 자신도 없으면서 질문을 예약하다니, 이채린 인생에서 가장 무모한 약속이었다.밤새 마음이 수십 번 바뀌었다. 만나지 말자고 적은 메모를 구겨 버렸다가, 다시 펴서 책 사이에 끼웠다. 그 책은 우리가 똑같은 표지를 고르며 웃었던 날의 것이었다. 마지막 장은 아직 읽지 못했다. 해피엔딩이 아닌 걸 알면서 책장을 넘기는 사람의 마음이 이런 걸까.다음 날 태준에게서는 별다른 연락이 없었다. 나는 맡은 일을 끝낸 뒤 사무실을 나왔다. 오늘의 대답으로 내 일까지 흔들리고 싶지는 않았다.오후 7시, 약속한 카페에 먼저 도착했다. 창가가 아닌 안쪽 구석에 앉아 손바닥으로 컵을 감쌌다. 립밤도 고쳐 바르지 않았다. 예쁘게 보이는 것보다 제대로 말하는 일이 중요했으니까.태준은 약속 시간에 맞춰 들어왔다. 내 앞에 앉은 그는 메뉴판조차 펼치지 못하고 손등에 시선을 내려놓았다. 오늘은 나도 그 말을 먼저 꺼낼 수 없었다.“어제 잠은 잤어요?”“질문은 하나만 하기로 했잖아요.”“그건 내일 다시 해 달라고 하신 질문이고요.”“오늘이 그 내일이에요, 태준 씨.”그가 희미하게 웃었다. 나도 따라 웃고 말았다. 이렇게 심각한 순간에도 우리는 시답잖은 말로 서로의 긴장을 풀려고 했다. 그 버릇까지 그리웠다는 사실이 조금 화가 났다.직원이 주문을 받으러 오자 태준은 내 앞의 찻잔을 한번 보고는 평소 마시던 커피 대신 같은 차를 골랐다.“왜 따라 시켜요?”“오늘은 채린 씨랑 같은 걸 마셔 보고 싶어서요.”“그러면 같은 마음도 되는 줄 알아요?”“아니요. 그건 제가 감히 바라면 안 되는 일이죠.”그가 찻잔 손잡이를 반대쪽으로 돌렸다. 예전 같으면 내 컵도 챙겨 줬겠지만 오늘은 제 잔만 만졌다. 그 작은 거리감이 서운해서, 나는 내 컵을 일부러 그의 컵 옆에 바

  • 잤으면 책임지세요 대표님   28화. 1분의 고백

    “딱 1분만 제 얘기 들어요.”수화기 너머에서 태준이 숨을 들이켰다.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하기 전에 휴대전화를 더 단단히 쥐었다.“대답도 하지 마요. 제가 끊을 때까지 듣기만 해요.”“알겠어요, 채린 씨.”“그것도 대답이잖아요.”잠깐 침묵이 흐르자 웃음이 나올 뻔했다. 이런 순간에도 그 사람은 내가 투정 부리면 곧이곧대로 들어줬다. 그게 얼마나 얄미운지, 얼마나 그리웠는지.횡단보도에 파란불이 들어왔다. 나는 길을 건너지 않고 지하철역 옆 벤치에 앉았다. 지나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혼자만 멈춰 선 기분이었다.“나 오늘 당신이랑 회의했어요. 아주 멀쩡하게요. 보고서 설명도 잘했고, 수아 씨랑 웃으면서 나왔어요.”그는 약속대로 듣기만 했다.“그런데 문이 닫히니까 보고 싶더라고요. 화가 나서 미치겠는데, 또 보고 싶었어요. 나 이거 어떻게 해야 해요?”휴대전화 화면에 뜬 통화 시간이 1분을 넘겼다. 끊어야 했다. 내가 정한 시간이었으니까. 그런데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았다.“1분 지났네요.”“네.”“왜 먼저 안 끊어요?”“채린 씨가 할 말이 남아 있는 것 같아서요.”“끝까지 사람 나쁘게 만드네요. 내가 끊으면 될 걸.”“제가 나쁜 일을 한 겁니다. 채린 씨는 잘못한 거 없어요.”나는 벤치 끝에 놓인 가방을 끌어안았다. 듣고 싶었던 말인데, 듣고 나니 더 속이 쓰렸다.“처음부터 결혼했다고 했어야죠. 호텔에서든, 회사에서 다시 만났을 때든. 내가 당신을 좋아하기 전에 선택할 시간을 줬어야죠.”“맞아요. 제가 그 시간을 빼앗았어요. 미안합니다.”“미안하다고 하면 다예요? 나는 우리가 같은 책을 읽고, 손을 잡고, 다음 주말을 고르는 동안 나만 특별한 줄 알았어요.”“채린 씨를 향한 마음은 거짓이 아니었어요. 그렇다고 숨긴 사실이 달라지는 건 아닙니다.”그는 아내와의 혼인 관계가 지금도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다시 말했다. 이혼할 거라는 약속도, 곧 모든 게 괜찮아질 거라는 변명도 꺼내지 않았다. 나는 차라리 뻔뻔하게 거짓말을 해 주면

  • 잤으면 책임지세요 대표님   27화. 보고 싶은 사람

    “태준 씨, 나 아직 좋아하나 봐.”녹음을 끝내고도 한동안 휴대전화를 귀에서 떼지 못했다. 그 말은 그에게 간 적이 없었다. 내 번호에만 남은 고백이었다. 그런데도 얼굴이 달아올랐다. 혼자 좋아한다고 말하고 혼자 부끄러워하는 여자라니. 이쯤 되면 짝사랑에도 벌금이 붙어야 했다.재생 버튼에 손을 올렸다가 거뒀다. 다시 들으면 정말로 인정하게 될 것 같아서였다. 어차피 이미 알고 있었다. 그가 결혼한 사람이라는 사실도, 내가 속았다는 사실도, 그런데 여전히 저녁마다 그의 이름을 떠올린다는 사실까지. 사랑이 성적표라면 나는 이미 낙제였다. 알면서도 좋아한다는 문제에 또 같은 답을 쓰고 있으니. 그렇다고 정답을 몰라서 틀리는 건 아니었다.“이채린, 정신 차려. 좋아한다고 다 가져도 되는 건 아니잖아.”스스로에게 한마디 하고 휴대전화를 뒤집었다. 식탁 맞은편 빈 의자는 그대로였다. 태준은 그 자리에 앉은 적도 없는데, 왜 나는 자꾸 그가 앉아 있는 모습을 상상할까. 좋아하는 마음이란 정말 염치가 없었다.다음 날 회사에 도착하자 팀장이 급히 나를 불렀다. 최종 보고 자료에서 시범 운영 결과를 다시 확인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대표가 산정 기준을 직접 확인하고 싶어 한다며 오후에 실무 설명을 요청했다.“이 선임님이 가장 잘 아니까 직접 보고하시죠. 대표님 일정상 짧게 단독 면담으로 잡겠습니다.”손에 든 파일이 무겁게 느껴졌다. 단둘이 있으면 어떤 말이 먼저 나올까. ‘보고 싶었어요’일까, 아니면 ‘왜 그랬어요’일까. 둘 다 회사에서 해서는 안 되는 말이었다.“팀장님, 수아 씨도 같이 들어와도 될까요? 현장 검증 자료를 함께 정리해서요.”“그게 낫겠네요. 질문이 나오면 바로 답할 수 있으니까.”수아는 내 부탁을 듣자 흔쾌히 노트북을 챙겼다.“선임님, 제가 수치 설명 맡을게요. 선임님은 전체 흐름만 잡으세요.”“고마워. 오늘 네가 없으면 내가 좀 떨릴 것 같았거든.”“에이, 선임님이 대표님 앞에서 언제 떨었다고요.”나는 대답 대신 출력물을 가지런히 맞

  • 잤으면 책임지세요 대표님   26화. 들키지 않은 얼굴

    “선임님, 방금 웃으셨어요. 무슨 좋은 일 있어요?”수아의 질문에 나는 책갈피를 황급히 책장 사이로 밀어 넣었다. 웃고 있었다는 걸 들킨 순간에도 입가에는 태준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 사람이 내 이름을 부르지도 않았는데, 손글씨 여덟 글자만으로 이렇게 기뻐하다니.“책이 재미있어서. 어제 읽다가 웃긴 부분이 있었거든.”“무슨 책인데요? 저도 읽어 볼래요.”“다 읽으면 빌려줄게. 결말은 아직 나도 몰라.”수아는 금세 관심을 돌려 오후 회의 자료를 물었다. 나는 파일을 열어 필요한 표를 찾아줬고, 그녀가 자리로 돌아간 뒤에야 가방 지퍼를 닫았다. 책갈피는 버리지 못했고, 내 웃음은 아무 일도 없던 표정 뒤에 감춰졌다.점심시간, 수아가 사내 카페에서 딸기 음료를 주문했다. 그 이름을 듣자 태준이 떠올랐다. 시럽은 반만 넣고 얼음도 조금. 내가 말한 걸 한 번에 외운 사람. 혹시라도 내 얼굴에 생각이 드러날까 봐 메뉴판을 오래 내려다보다 따뜻한 차를 골랐다.“선임님은 딸기 안 좋아하세요?”“좋아하지. 오늘은 따뜻한 게 당겨서.”그렇게 말한 뒤 컵을 받았는데, 손바닥이 따뜻해질수록 이상하게 허전했다. 태준과 함께였다면 내 잔을 기웃거리며 ‘한 입만 마셔도 될까요?’라고 물었을 것이다. 그러면 나는 아까부터 자기 잔은 왜 안 마시느냐고 타박하면서도 기어코 컵을 건네줬겠지.오후에는 TF 실무 자료를 정리했다. 수아가 빠뜨린 첨부 파일을 찾아줬고, 팀장의 요청에 맞춰 표의 순서를 바꿨다. 누가 나를 특별히 쳐다보지도 않았고, 태준이 지나가는 복도에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회의 일정과 수정 지시가 오가는 동안 사무실은 늘 그렇듯 분주했다. 우리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늦은 오후 회의실에서 출력물을 정리하다 태준의 서명이 있는 검토표를 발견했다. 몇 줄의 수정 의견이 적혀 있었고, 내가 처음 제안한 방식대로 진행하라는 표시도 있었다. 업무에 필요한 표시일 뿐이었다. 나는 서류를 정해진 순서대로 묶으면서도, 그의 필체를

  • 잤으면 책임지세요 대표님   25화. 끊어내는 연습

    '그건 약속 못 지키겠습니다.’나를 생각하지 말라는 부탁 앞에서만, 태준은 끝내 말을 듣지 않았다.나는 그 문장을 밤새 열어 보았다. 읽을 때마다 속이 아렸고, 아파하면서도 그가 나를 아직 생각한다는 사실이 좋아졌다. 휴대전화 화면에 손가락을 올린 채 한참 망설였으나 답장은 보내지 않았다. 그렇게 다정한 사람이 어떻게 내게 가장 아픈 비밀을 숨겼을까. 미워하다가도 보고 싶어지는 마음이 너무 우스웠다.‘그럼 실컷 생각해요.’입력창에 적었다가 지웠다. 내가 원하는 말은 그게 아니었다.‘내가 얼마나 좋아했는지 알기나 해요?’이것도 지웠다. 이미 알고 있을 사람이었다. 손을 잡을 때마다 웃음부터 터지던 나를, 전화를 끊기 싫어 5분만 더 달라던 나를, 그가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알고 있었다면서 왜 그렇게 늦게 말했을까.다음 날 아침, 나는 달력부터 열었다. 토요일 칸에는 ‘같이 책 읽고 맛있는 거 먹기 ♡’라고 적혀 있었다. 카페에서 그와 정한 약속이었다. 하트를 하나 더 그려 넣을까 고민하던 날에는 토요일이 오기만을 기다렸는데, 이제는 그 날짜를 바라보는 것도 힘들었다.나는 일정을 눌러 삭제했다. 확인 창이 나타나자 잠깐 멈췄다가 다시 눌렀다. 약속 하나가 사라진 빈칸을 보며 이렇게까지 쉽게 지울 수 있는 거였냐고,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투덜거렸다.가방에서는 호텔 라운지 영수증이 나왔다. 첫날 혼자 마셨던 음료값이 적힌 종이였다. 버릴 생각으로 펼쳤는데 날짜가 눈에 들어왔다. 그날 나는 낯선 남자에게 재미없는 얘기는 하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았고, 그는 나를 웃기기 위해 애쓰겠다고 했다. 딸기 디저트를 내 앞으로 밀어 주면서도 뭘 강요하지 않았던 손, 내 손바닥 위에 먼저 펼쳐졌던 그의 손.“그날로 돌아가면, 나 안 앉혔을까.”혼잣말을 하고도 답을 찾을 수 없었다. 그가 처음 다가왔을 때 거절했을까. 어쩌면 똑같이 웃고 똑같이 반했을 것이다. 아무것도 몰랐던 그 밤의 나는 무척 행복했으니까.사진첩도 열었다. 함께 찍은 얼굴은 없었다. 대신

  • 잤으면 책임지세요 대표님   24화. 답장 한 줄

    ‘전송 완료.’하필 그 사람에게 보내지 않기로 한 말을, 손가락 하나가 먼저 건네 버렸다.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휴대전화를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밥 먹었어요?’ 겨우 다섯 글자와 물음표 하나. 지우기 버튼을 찾아보았으나 이미 상대에게 도착했다는 표시가 떠 있었다. 회사 보고서를 세 번씩 검토하는 내가 왜 하필 이런 순간에는 손끝 하나 제대로 가누지 못할까.‘잘못 보냈어요.’그 말을 쓰고도 보내지 못했다. 태준이 정말 밥을 먹었는지 궁금했으니까. 이제 연락하지 말라고 한 건 나였고, 마지막으로 그를 돌아보지 않은 것도 나였다. 그런데 그의 저녁을 걱정하는 마음만은 끝내 집으로 데려와 버렸다.화면이 밝아졌다.‘네, 먹었습니다.’짧은 답장이었다. 좋아하는 메뉴도, 늦게까지 일했는지도 묻지 않았다. 그토록 기다렸던 말이 고작 한 줄이었는데 눈물이 먼저 떨어졌다. 베개에 휴대전화를 내려놓아도 글자가 눈앞에 남았다. 예전 같으면 그 뒤에 꼭 한마디가 더 왔을 것이다. ‘오늘 제일 맛있었던 건 뭐예요?’ 하고 물은 다음, 내가 달콤한 음식을 골랐다고 하면 ‘그럼 저는 채린 씨가 웃는 얼굴이 제일 맛있었어요’ 같은 말로 나를 놀렸겠지. 그 유치한 농담에 또 넘어가면서도 모르는 척 웃었을 텐데, 오늘은 더 이어질 말이 없었다.잘 먹었구나. 아프지 않고, 굶지도 않았구나.안도하고 있는 나 자신이 싫어서 이불을 끌어당겼다. 결혼한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된 뒤에도 나는 그가 끼니를 거르지 않았다는 사실에 이렇게 기뻐했다. 그가 내 앞에서 딸기 라테를 한 모금 마시고 '채린 씨가 마시는 게 더 맛있어 보여요'라던 날까지 떠올랐다.그날 나는 일부러 빨대를 내 쪽으로 돌려 놓았다. 그가 웃으면 나도 웃었고, 한 번 더 만나기 위해 메뉴 맞히기 내기에서 일부러 졌다. 그에게는 아내가 있었는데, 나는 세상에서 가장 귀여운 비밀을 가진 여자처럼 굴었다. 그 사실을 몰랐을 때의 나는 아무것도 부끄럽지 않았다. 오늘 내가 예쁘게 웃으면 내일 그가 또 만나자고 해 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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