잤으면 책임지세요 대표님

잤으면 책임지세요 대표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1
By:  루니Updated just now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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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하룻밤을 보낸 남자는 유부남이었다. 더 미친 건, 그 남자가 내 회사 대표라는 사실이었다!🔥 “어젯밤엔 그렇게 예쁘게 안기더니, 오늘은 모르는 척할 거예요?” 회사에선 남남, 둘만 남으면 세상에서 가장 뜨거운 연인. 💋 아무도 모르게 시작된 사랑은 멈출 수 없을 만큼 깊어지고, 마침내 대표의 아내가 찾아온다. “남의 남편이잖아!” “사랑에 죄가 있나요?” 남자는 말없이 여자를 감싸 안는다. 이혼할 생각 없는 남자, 헤어질 생각 없는 여자. 그리고 두 사람에게 찾아온 아이까지. ❤️세상이 불륜이라 손가락질해도, 그들의 사랑은 끝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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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1화. 뺨을 맞은 남자

“키스해 줘요. 내일 아침에도 오늘 밤이 생각나게.”

그는 내 입술 대신 손등에 먼저 입을 맞췄다. 손가락 끝에서 시작된 간지러움이 가슴까지 올라와서, 나는 그의 셔츠 소매를 꼭 쥐었다.

“그러면 내일 아침엔 제가 생각날 텐데요.”

“그게 좋겠어요.”

“큰일이네요. 저도 같은 생각이라서.”

겨우 몇 시간 전에 만난 남자였다. 이름도, 나이도,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몰랐으나 그가 웃으면 나도 따라 웃었고, 입술이 가까워질 때마다 심장은 처음 고백을 듣는 열일곱 살처럼 서둘렀다.

시작은 호텔 라운지였다.

누군가에게 마음이 기울면 숨기지 못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날도 마찬가지여서, 낯선 남자의 시선이 내게 머무를 때마다 괜히 잔을 돌렸고 웃음이 날 때마다 입술을 가렸다. 그가 눈치채지 못했으면 하면서도, 꼭 알아줬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동시에 들었다.

새 회사에 출근하기까지 이틀. 이직 기념으로 혼자 휴가를 보내던 나는 창가 자리에 앉아 야경을 구경하고 있었는데, 맞은편 의자에 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혹시 여기 앉아도 될까요?”

“저 말고도 혼자 계신 분 많은데요?”

“알아요. 그런데 다른 분은 제가 앉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안 들어서요.”

그 말에 웃음이 터졌다. 훤칠한 키에 단정한 셔츠, 웃을 때마다 부드럽게 접히는 입가까지. 저 얼굴로 저렇게 뻔뻔한 말을 하면 반칙 아닌가.

“앉으세요. 대신 재미없으면 바로 쫓아낼 거예요.”

“그럼 오래 있고 싶으니까 열심히 해야겠네요.”

그는 내가 마시던 음료를 흘끗 보더니 뭐가 맛있는지 묻고, 메뉴판을 내 쪽으로 돌려 함께 골랐다. 내가 딸기를 좋아한다는 말을 기억했는지, 잠시 뒤 직원이 가져온 작은 디저트 접시를 내 앞으로 밀어주었다.

“이것도 드셔 보세요. 방금 눈이 반짝였거든요.”

“저 지금 꼬시는 거예요?”

“성공할 가능성이 있다면요.”

“조금은요.”

그가 소리 내어 웃었다. 그 웃음이 좋았다.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한 번도 꺼내지 못했던 시시한 이야기가 자꾸 흘러나왔고, 그는 내가 끝맺지 못한 말까지 기다렸다가 엉뚱한 대답으로 다시 나를 웃겼다.

“이상하네요.”

“뭐가요?”

“아직 이름도 모르는데, 내일 또 만나고 싶어요.”

내가 잔을 내려놓자 그는 아무 말 없이 기다렸다. 그러는 사이 이상한 용기가 생겨서 나는 테이블 한가운데 손을 내밀었다.

“그럼 손부터 잡아요. 이름은 내일 알려줄게요.”

그는 내 손을 덥석 붙들지 않았다. 먼저 손바닥을 펴 보였고, 내가 손가락을 얹자 천천히 감싸 주었다. 단지 손을 잡았을 뿐인데 어깨에 힘이 풀리고 입꼬리가 자꾸 올라갔다.

“이렇게 웃으면 저 곤란한데.”

“왜요?”

“자꾸 예쁘다고 말하고 싶어서요. 지겨울까 봐 참는 중이에요.”

“안 지겨운데. 한 번만 더 해봐요.”

“예뻐요. 제가 오늘 만난 사람 중에 제일.”

“오늘 몇 명 만났는데요?”

“많아요. 그런데 지금은 한 사람밖에 기억이 안 나네요.”

그 순간 가슴 한쪽이 간질거려 손을 빼려 했으나, 그가 놓아주기 전에 내가 다시 잡았다. 함께 걷자는 말은 내가 먼저 꺼냈고, 라운지를 나서며 그가 코트로 내 어깨를 감싸 주었을 때는 내일이 벌써 기다려졌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우리는 마주 보고 섰다. 반짝이는 층수 표시가 내려오는 동안 그는 내 머리카락에 걸린 귀걸이를 조심스레 빼 주었고, 나는 가까워진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 한숨처럼 말했다.

“나, 오늘 헤어지기 싫어요.”

“저도요.”

“그러면 조금만 더 같이 있어 줄래요?”

“채워야 할 약속이 생겼네요. 아침까지 웃게 해 드릴게요.”

그렇게 우리는 키스했고, 서로의 마음을 다시 확인한 뒤 같은 방으로 들어갔다. 그가 이불을 끌어올려 내 어깨를 덮어 주자 나는 웃으며 그의 품을 파고들었다.

창밖의 불빛이 커튼 틈으로 새어 들었고, 그는 내가 추울까 봐 이불 끝을 다시 여며 주었다. 이런 사소한 손길에 자꾸 마음이 무너지는 게 우스워서 그의 가슴에 뺨을 묻었는데, 그가 내 머리 위에 입술을 눌렀다. 순간 정말 내일이 오지 않았으면 했다.

“내일 아침에도 이렇게 다정할 거예요?”

“내일은 더요. 오늘보다 당신을 하루 더 알게 되니까.”

새벽에 먼저 눈을 떴을 때도 그의 팔은 내 허리께에 있었다. 몰래 웃다가 침대 옆 가방 위에 놓인 흰 봉투를 발견했다. 잠결에 집어 든 봉투는 두툼했고, 머릿속에 너무도 싫은 생각이 스쳤다.

“이거, 설마 돈이에요?”

“그거 제가 설명할게요.”

“어젯밤을 돈으로 계산하려고 했어요?”

그가 다가오는 순간, 겁보다 서운함이 먼저 터졌다. 손바닥이 그의 뺨에 닿았고 나 자신도 놀라 뒤로 물러섰다. 그는 한참 나를 보다가 내 손을 살폈다.

“손 아프겠어요. 기분 상하게 했다면 미안해요. 하지만 어젯밤이 가벼웠던 건 아니에요.”

봉투에는 호텔 아침 식사 초대권 두 장과 작은 카드가 들어 있었다. ‘아침에도 당신과 마주 앉고 싶어서.’ 그 글씨를 보는 순간 얼굴이 화끈거렸다. 차라리 화를 내 주었으면 변명이라도 했을 텐데, 그는 여전히 내 안색부터 살폈다.

“미안해요.”

“괜찮아요. 아침 먹고 가요.”

그 다정함이 더 견디기 어려워서 나는 가방을 챙겼다. 뒤돌아서면 당장 붙잡히고 싶어질 것 같아 문손잡이만 바라봤다.

“우리, 다시 만나지 말아요.”

그가 잠시 침묵하더니, 어젯밤 내 손을 잡을 때처럼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건 어려울 것 같은데요. 내일 회사에서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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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뺨을 맞은 남자
“키스해 줘요. 내일 아침에도 오늘 밤이 생각나게.”그는 내 입술 대신 손등에 먼저 입을 맞췄다. 손가락 끝에서 시작된 간지러움이 가슴까지 올라와서, 나는 그의 셔츠 소매를 꼭 쥐었다.“그러면 내일 아침엔 제가 생각날 텐데요.”“그게 좋겠어요.”“큰일이네요. 저도 같은 생각이라서.”겨우 몇 시간 전에 만난 남자였다. 이름도, 나이도,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몰랐으나 그가 웃으면 나도 따라 웃었고, 입술이 가까워질 때마다 심장은 처음 고백을 듣는 열일곱 살처럼 서둘렀다.시작은 호텔 라운지였다.누군가에게 마음이 기울면 숨기지 못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날도 마찬가지여서, 낯선 남자의 시선이 내게 머무를 때마다 괜히 잔을 돌렸고 웃음이 날 때마다 입술을 가렸다. 그가 눈치채지 못했으면 하면서도, 꼭 알아줬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동시에 들었다.새 회사에 출근하기까지 이틀. 이직 기념으로 혼자 휴가를 보내던 나는 창가 자리에 앉아 야경을 구경하고 있었는데, 맞은편 의자에 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혹시 여기 앉아도 될까요?”“저 말고도 혼자 계신 분 많은데요?”“알아요. 그런데 다른 분은 제가 앉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안 들어서요.”그 말에 웃음이 터졌다. 훤칠한 키에 단정한 셔츠, 웃을 때마다 부드럽게 접히는 입가까지. 저 얼굴로 저렇게 뻔뻔한 말을 하면 반칙 아닌가.“앉으세요. 대신 재미없으면 바로 쫓아낼 거예요.”“그럼 오래 있고 싶으니까 열심히 해야겠네요.”그는 내가 마시던 음료를 흘끗 보더니 뭐가 맛있는지 묻고, 메뉴판을 내 쪽으로 돌려 함께 골랐다. 내가 딸기를 좋아한다는 말을 기억했는지, 잠시 뒤 직원이 가져온 작은 디저트 접시를 내 앞으로 밀어주었다.“이것도 드셔 보세요. 방금 눈이 반짝였거든요.”“저 지금 꼬시는 거예요?”“성공할 가능성이 있다면요.”“조금은요.”그가 소리 내어 웃었다. 그 웃음이 좋았다.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한 번도 꺼내지 못했던 시시한 이야기가 자꾸 흘러나왔고, 그는 내가 끝맺지 못한 말까지 기다렸다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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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신임 대표의 얼굴
“내일 회사에서 봅시다.”그 다정한 말이 농담이기를 바랐다. 다시 만나면 틀림없이 좋아하게 될 남자였으니까. 그런데 지금, 나는 그 사람의 뺨을 때리고 도망친 여자였다.호텔에서 나온 뒤에도 손끝에는 그가 입 맞췄던 자리가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몇 번이나 손등을 문질렀고, 가방에서 아침 식사 초대권이 나올 때마다 얼굴이 달아올랐다. 내가 오해했는데도 그는 화내지 않았다. ‘손 아프겠어요.’ 그 말만 자꾸 떠올라 결국 휴대전화를 들었으나, 우리는 전화번호조차 교환하지 않았다.초대권 뒤에 적힌 그의 글씨를 손톱으로 따라 그려 보았다. ‘아침에도 당신과 마주 앉고 싶어서.’ 그저 아침을 함께 먹자는 말일 뿐인데, 그 속에 내일을 약속받은 사람처럼 마음이 들떴다. 하필 그런 사람에게 손을 올렸다는 사실이 다시 부끄러워졌다. 미안하다고 말하면 한 번쯤 웃어 줄까. 웃어 준다면, 이번에는 도망치지 않을 수 있을까.“다시 만나지 말자고 한 건 나면서.”거울 속의 나에게 투덜대고는 입술에 남은 웃음을 지웠다. 내일부터는 새로운 직장이었다. 연애할 틈도 없이 바쁘겠지. 그 생각으로 겨우 잠들었다.다음 날 아침, 세온그룹 로비에 들어서자 유리문에 비친 내 얼굴이 낯설었다. 새 출발을 위해 고른 아이보리 블라우스, 전날 밤 두 번이나 다려 놓은 치마. 서류보다 먼저 챙긴 건 어이없게도 입술 색이었다. 화장실 거울 앞에서 립스틱을 고쳐 바르다 말고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혹시라도 만나면 예뻐 보이려고? 미쳤네, 이채린.”“이채린 선임님 맞으시죠?”뒤에서 부르는 소리에 화들짝 돌아섰다. 전략기획팀 동료라는 정수아가 사원증을 건네며 웃었다. 나는 얼른 립스틱을 가방에 넣었고, 수아는 새 대표 취임 설명회부터 참석하면 된다고 알려 주었다.“오늘 대표님 오시거든요. 영상도 보여 준대요. 새로 오신 분이 엄청 젊다던데.”“저희 팀은 업무가 좀 바쁘지만 분위기는 좋아요. 모르는 게 있으면 언제든 물어보세요.”나는 고맙다고 웃으면서도 어젯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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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직함을 붙이는 입술
어젯밤 내 입술에 키스했던 남자가, 오늘은 수십 명 앞에서 내 이름을 부를 예정이었다.나는 회의 자료를 다시 내려다봤다. ‘고객경험 개편 TF 실무 책임자 이채린.’ 새 회사에 들어온 지 2시간도 되지 않았는데, 내 이름은 신임 대표에게 보고할 사람들 명단 맨 위에 올라 있었다.“이거 정말 제가 하는 거예요?”옆자리의 수아가 고개를 끄덕였다.“입사 전에 제출하신 개선안 있죠? 그걸 바탕으로 오늘 첫 보고를 하기로 했어요. 팀장님이 같이 들어가실 거고요.”면접 준비를 하며 밤새 정리했던 자료였다. 고객이 불편을 겪는 순서를 따라가며 상담 절차를 고치자는 제안. 분명 자신 있는 일이었는데, 보고 상대가 강태준이라는 사실 하나로 글자들이 낯설어졌다.수아는 내가 새로 온 사람이라 부담을 느끼는 줄 알고 종이컵에 따뜻한 물을 따라 주었다. 고맙다고 받으면서도 나는 컵을 두 손으로 감쌌다. 어제 그 사람이 잡아 주었던 손이었다. 하룻밤 동안 여러 번 웃고, 웃다가 입을 맞췄으며, 아침에 다시 만나자던 약속까지 들었다. 돌이켜 보면 내일을 함께 보내고 싶다는 말이 좋았다. 그 기억 때문에 나는 그에게 제대로 사과하고 싶었다. 하지만 오늘 회의에선 내 일을 잘하는 것부터 보여 주고 싶었다.‘회사에서는 모르는 사람처럼.’아직 그와 그런 약속을 나눈 적도 없으면서 나는 마음속으로 몇 번이나 되뇌었다. 어제 그가 내 손을 쥐어 주던 순간까지 떠올리면, 이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어질 것 같았다.회의실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태준이 들어왔다. 화면 속 정장보다 실물이 훨씬 가까웠다. 내 손등에 입 맞추며 내일도 보고 싶다고 하던 남자가 같은 손으로 서류를 펼쳤다.“시작하시죠.”그는 내 쪽을 따로 보지 않았다. 다른 직원의 설명을 듣고 메모한 다음, 자료를 넘겼다. 나는 서운해야 할지 안심해야 할지 몰랐으나, 적어도 이곳에서 그가 나를 곤란하게 만들 생각은 없다는 걸 알 수 있었다.팀장이 나를 소개했다.“고객경험 개편 실무를 맡을 이채린 선임입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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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같은 엘리베이터
‘그리고 이제야 이름을 알았네요. 채린 씨.’나는 사내 메신저의 마지막 줄을 한참 바라보았다. 이름 세 글자를 읽었을 뿐인데 귀 끝까지 뜨거워졌고, 손가락은 답장 칸 위에서 자꾸 망설였다. 호텔에서는 끝내 알려 주지 않았던 이름. 그 사람이 지금 내 이름을 알고 있었다.‘업무용 메신저인데요, 대표님.’보내기 버튼을 누르자마자 후회했다. 너무 퉁명스러웠나 싶어 다시 입력창을 열었을 때, 답장이 먼저 도착했다.‘맞습니다. 이 선임님께는 업무 관련해서만 연락드리겠습니다.’마땅히 안심해야 했다. 그런데 그의 마지막 문장을 읽으니 서운함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내가 먼저 선을 그었으면서도, 그가 너무 얌전히 물러나는 건 아쉬웠다.‘아, 그건 아니고요.’급하게 쓰고 지웠다. 결국 메신저 창을 닫고 모니터 앞에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어젯밤엔 그렇게 용감했으면서, 오늘은 문자 한 줄에도 쩔쩔매다니.“선임님, 퇴근 안 하세요?”수아가 가방을 들고 일어났다. 창밖은 벌써 어두워져 있었고, 책상 위엔 오전 회의에서 수정하기로 한 자료가 남아 있었다.“이것만 마무리하고 갈게요. 먼저 들어가요.”수아를 보내고 파일을 정리했다. 회의에서 나온 의견을 빠뜨리지 않으려고 집중했으나, 새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그의 손이 떠올랐다. 어젯밤 손등에 입 맞추던 사람의 손이 오늘은 회의 자료 위에서 숫자를 짚었다. 내 인생에 그토록 다른 두 모습이 한 사람에게 있을 줄 누가 알았을까.밤 9시가 가까워졌을 무렵, 수정본을 저장하고 복도로 나왔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니 곧 문이 열렸고, 아무도 없는 안으로 들어섰다. 거울에 비친 얼굴을 보고 머리칼을 정리하는데 닫히던 문이 다시 벌어졌다.“타도 될까요?”그가 서 있었다.“대, 대표님.”“아까보다 더 놀라시네요.”“어디서 자꾸 나타나세요?”“회사인데요. 제가 여기서 일하거든요.”너무 당연한 대답이어서 웃음이 터질 뻔했다. 그가 들어오자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고, 우리는 거울 속에서 시선을 마주쳤다가 동시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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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늦은 귀가의 안부
“잘 들어갔어요?”그 질문을 듣는 순간, 나는 집에 도착한 지 한참 됐다는 사실도 잊었다. 이 남자는 대체 무슨 재주가 있기에 안부 한마디로 사람을 사랑에 빠지기 직전까지 데려가는 걸까. 그가 내 이름을 부르기만 기다렸던 사람처럼 휴대전화를 두 손으로 감싸 쥐었고, 통화 너머에서 작게 웃는 기척이 들리자 괜히 창문 쪽으로 걸어갔다.“대표님이세요?”“네. 명함 뒷면의 번호가 맞는지 확인하고 싶었어요. 지금 전화해도 괜찮은지도요.”“이미 하셨으면서 그런 걸 물어봐요?”“안 괜찮다고 하시면 바로 끊으려고요.”나는 방금 벗은 구두를 가지런히 놓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엘리베이터에서 그의 손에 명함을 쥐여 준 건 나였으면서, 정작 전화를 받으니 열일곱 살처럼 마음이 부산했다.“괜찮아요. 아주 조금은요.”“조금이라도 허락받았으니까 기쁘네요.”“대표님은 그렇게 말하면 여자들이 다 넘어올 거라고 생각해요?”“다른 사람은 모르겠고, 채린 씨가 웃으면 좋겠어요.”나는 결국 소리 내 웃고 말았다. 회사에서는 내 이름 뒤에 꼬박꼬박 ‘선임님’을 붙이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문 하나를 사이에 둔 것도 아니고 서로 다른 집에서 통화하고 있을 뿐인데, 그가 ‘채린 씨’라고 부르면 어젯밤 호텔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회사에서는 그러지 마세요. 오늘 회의 때 얼마나 떨었는지 알아요?”“알아요. 그래도 발표 잘했어요.”“그건 제가 원래 잘하는 일이거든요.”“네. 그래서 더 멋있었어요.”그가 웃으며 한마디를 보태자 나는 냉장고 문을 열었다가 아무것도 꺼내지 못했다. 칭찬 하나에 이렇게 기분이 좋아지는 게 자존심 상했지만, 진짜 마음은 숨길 수 없었다.“우리 약속해요. 회사에서는 대표님이랑 직원이에요. 업무 메신저로 사적인 얘기도 하지 말고, 다른 사람 있을 때 특별하게 굴지도 말기.”“약속할게요. 채린 씨 일에 제가 방해가 되는 일은 없었으면 해요.”“그리고 아침에 제가 사과한 거, 아직 안 받아 주셨죠?”“받았어요. 제가 아픈 것보다 채린 씨가 놀란 게 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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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5분의 연장
‘대표님, 저 지금 6분째 기다려요.’문자를 보내고서야, 아직 연인도 아닌 남자에게 하루의 마지막 시간을 기꺼이 내주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마음은 허락을 기다려 주지도 않았다. 보내기 버튼을 누른 지 3초 만에 후회했다. 기다린다는 말은 너무 솔직했고, 6분을 세었다는 사실은 더 민망했다. 휴대전화를 뒤집어 놓으려는 순간 화면이 밝아졌다.‘미안해요. 채린 씨한테 전화하려고 시계만 보고 있었어요.’나는 횡단보도 앞에 멈춰 섰다. 퇴근길 사람들은 신호가 바뀌자 일제히 건너갔지만, 나는 다음 문장이 올 때까지 꼼짝하지 못했다.‘5분만 통화해도 될까요?’‘대표님은 왜 맨날 허락부터 받아요?’‘채린 씨가 싫다고 하면 그만해야 하니까요.’그 대답이 좋아서 나는 건너편 건물의 불빛을 멍하니 바라봤다. 전화를 걸어 달라고 말하면 너무 들뜬 사람처럼 보일까 봐 한 글자씩 답장을 고르고 있었는데, 그때 전화가 걸려 왔다. 화면에 그의 이름이 떴다. 나는 일부러 두 번 울리게 둔 뒤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6분이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요.”“혼내려고 했는데, 그렇게 나오시면 제가 뭘 해요?”“내일은 1분 먼저 전화할게요. 그럼 오늘 기다린 시간 중 1분은 갚는 거죠?”“나머지 5분은요?”“매일 조금씩 갚아도 될까요?”웃음이 새어 나와 입을 가렸다. 그는 내가 웃는 걸 알아챘는지 이제야 안심했다며 말끝을 늘였다. 나는 길가 서점의 불 켜진 진열창 앞에 멈춰 섰다.“근데 오늘 회사에서는 저한테 인사도 안 하시던데요.”“인사는 했는데요. 채린 씨가 보고서를 안고 지나가길래 고개 숙였어요.”“그건 다들 하는 인사잖아요.”“그렇죠. 약속했으니까요.”아쉽다고 투정한 사람이 나라는 걸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퇴근 후의 그는 이렇게 친절한데 회사에서까지 다정하게 굴어 달라는 건 욕심이었다. 그의 자리와 내 자리가 멀다는 사실도, 내가 일을 잘해 보려고 이 회사에 왔다는 사실도 분명했다.오늘 오후, 태준은 내가 제출한 보고서에서 상담 직원의 처리 시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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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비를 핑계 삼아
“5분만은 싫어요. 채린 씨를 좋아하는 시간이 그걸로 끝나면 너무 아쉽잖아요.”통화 너머가 잠깐 조용해졌다. 내가 너무 대담한 질문을 했나 싶어 휴대전화를 고쳐 쥐었을 때, 태준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내일은 오늘보다 조금 더 좋아해도 됩니까?”나는 집 앞 가로등 아래에서 한참 발끝만 내려다봤다. 안 된다고 해야 옳을 것 같았으나, 이미 입가엔 웃음이 번져 있었다.내일 아침에 눈을 뜨면 가장 먼저 떠오를 사람이 누군지 이미 알고 있어서, 부정하는 말은 소용없었다. 나는 일부러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그럼 6분까지만 허락할게요.”“내일은 7분 달라고 졸라도 될까요?”“대표님, 은근히 욕심 많으시네요.”“채린 씨 앞에서만 그런가 봐요.”전화를 끊고서도 한동안 현관에 기대 있었다. 우리는 하루에 몇 분씩 마음을 내주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시간이 줄어드는 게 아까웠다. 그에게서 전화가 오지 않는 순간까지도 그가 궁금했으니까.다음 날 오후, 창밖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오전부터 맑던 하늘이 거짓말처럼 흐려지더니 퇴근 무렵에는 빗방울이 사무실 창을 두드렸다. 나는 회의 자료를 저장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회사에서는 오늘도 태준과 업무 이야기밖에 나누지 않았다. 복도에서 스쳐 지나갈 때조차 그는 다른 직원들에게 하듯 내게 고개를 숙였고, 나 역시 아무렇지 않은 척 인사했다.그런데 그의 옷소매가 지나간 자리만큼은 한참 바라보게 됐다. 누구에게나 같은 태도로 대하는 그가 고마웠다. 내가 회사에서 잘해 내는 일을 그는 소중하게 여겼고, 그래서 그의 다정함이 더 특별하게 느껴졌다.휴대전화가 짧게 울렸다.‘우산 챙겼어요?’‘네. 대표님은요?’‘저도요. 그런데 오늘 비가 와서 조금 기뻐요.’‘왜요?’‘함께 걸어 달라고 부탁할 핑계가 생겨서요.’나는 문자를 읽다가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사무실 근처에서 만나면 안 된다는 걸 그도 알았다. 그가 적어 보낸 곳은 회사에서 몇 정거장 떨어진 작은 골목이었다. 근처에 조용한 찻집이 있고, 인적이 뜸한 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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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비가 오지 않는 날
“내일 비 오면요.”내가 그렇게 말했을 때 태준은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내일 아침부터 비가 오길 빌어야겠네요.”“대표님이 기도도 하세요?”“오늘부터는 할 것 같아요.”우산 아래에서 웃던 얼굴이 자꾸 생각났다. 집에 돌아와 젖은 신발을 벗으면서도, 머리를 말리면서도 그의 오른쪽 어깨가 떠올랐고, 괜히 휴대전화를 뒤집었다 바로 놓았다. 함께 걷는 동안 내 쪽으로 기울어 있던 우산과 그 아래 겹쳐진 손. 그 짧은 시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잠이 아까웠다.다음 날 아침에는 구름 하나 보이지 않았다.출근 준비를 하던 나는 창문을 열고 하늘을 원망스럽게 바라봤다. 햇빛이 너무 좋아 화가 날 지경이었다.‘오늘 날씨 정말 좋네요.’태준에게서 온 메시지를 읽고 입술을 삐죽였다.‘대표님은 좋으세요?’‘채린 씨가 출근하기 좋은 날씨니까요.’‘그런데 비는 안 오잖아요.’메시지를 보내고 3초 만에 얼굴이 뜨거워졌다. 꼭 만나자고 조르는 사람 같잖아. 서둘러 말을 덧붙이려는데 답장이 먼저 왔다.‘네. 많이 아쉽네요.’어쩌면 나와 같은 마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출근길 내내 웃음이 났다. 사무실에선 평소처럼 보고서를 확인했고, 점심시간에는 수아와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었다. 태준은 멀리 회의실 문 앞에서 다른 직원들에게 인사를 받았지만, 나는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우리 둘만 아는 어제의 우산을 아무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휴게실에서 누군가 산책하기 좋은 날씨라고 말하자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수아가 무슨 좋은 일 있느냐고 묻기에 나는 아침에 맛있는 걸 먹었다고 둘러댔다. 사실 아침부터 기다린 건 퇴근 후의 시간이었다.퇴근 무렵까지 하늘은 얄밉게 맑았다. 약속을 한 것도 아니니 곧장 집으로 가면 됐다. 그런데 지하철역 계단 앞에서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제 걸었던 골목이 자꾸 생각나서, 나도 모르게 반대편 승강장으로 향했다.‘산책만 하고 오는 거야.’그렇게 변명하며 도착한 골목에는 저녁 햇살이 길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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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아무도 모르는 습관
“그럼 맑은 날도 내일이 있나요?”그렇게 묻는 남자가 너무 좋아서, 나는 하마터면 매일 만나자고 대답할 뻔했다. 대신 맞잡았던 손을 그의 손바닥 위에 한 번 더 얹고 짐짓 고개를 갸웃했다.“대표님, 날씨 핑계 다 떨어지면 어떡하시려고요?”“그때는 솔직하게 말해야죠. 채린 씨가 보고 싶다고.”“그 말도 매일 하면 지겨운데.”“그럼 매일 다르게 말해 볼게요. 오늘은 같이 걷고 싶고, 내일은 웃는 얼굴이 궁금하고.”“모레는요?”“모레 것은 그날 만나서 알려 드려도 될까요?”나는 웃으면서 손을 놓았다. 지금 더 오래 붙잡고 있으면 정말 그를 보내지 못할 것 같아서였다. 뒤돌아보니 그는 여전히 서 있었다. 먼저 가라는 손짓 대신 내 이름을 부를 듯 입술만 움직여서, 나는 괜히 내일도 그 자리에 가고 싶어졌다.다음 날 아침부터 휴대전화만 들여다봤다. 별일 아닌 안부가 꼭 약속처럼 느껴져서, 출근길에 산 빵을 먹다가도 혼자 웃었다. 회사에서는 그를 제대로 마주칠 틈이 없었다. 그런데도 오후 3시만 되면 복도를 돌아보게 됐다. 그 무렵 태준은 회의실과 대표실 사이를 오갔고, 다른 사람들의 빠른 걸음 사이에서 유난히 일정한 구두 소리가 들려오면 나는 서류에서 고개를 들고 싶어졌다.한 번은 정말 그가 지나갔다. 열린 문 너머로 재킷 자락이 보였고, 나도 모르게 의자를 밀었다가 황급히 멈췄다.“선임님, 뭐 찾으세요?”수아가 물었다. 나는 책상 끝에 놓인 출력물을 들어 보였다.“아, 회의 자료요. 이거 참석자들한테 나눠 줄 수 있어요? 저는 수정본 확인할게요.”“그럼요. 대표님 회의실에도 놓아드릴까요?”“응, 다른 회의실이랑 똑같이 부탁해요.”수아가 나간 뒤에야 숨을 골랐다. 혹시라도 내가 복도로 뛰어나갔다면, 태준은 놀랐을까. 어젯밤처럼 장난스럽게 웃어 주었을까.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볼을 손바닥으로 눌렀다. 스스로도 어이가 없었다. 어른이 되면 이런 마음은 조금 얌전할 줄 알았는데,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는 자꾸만 서툴러졌다. 아무도 모르는 사이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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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첫 번째 규칙
‘채린 씨 웃는 시간.’그 짧은 문구를 읽고 나는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오늘 하루 종일 참아 온 웃음이 그제야 터졌고, 다시 휴대전화를 들어 사진을 확대했다. 작은 자물쇠 옆에 적힌 내 이름. 그의 비밀스러운 저녁 한 칸에 내가 들어가 있었다.‘제 웃는 시간까지 예약하시면 어떡해요?’답장은 금세 왔다.‘예약 안 하면 다른 일에 밀릴까 봐요. 제일 기다리는 시간이거든요.’‘대표님, 저 웃는 거 비싸요.’‘얼마죠?’‘매일 보고 싶다고 한 번씩 말해 주세요.’잠시 뒤 전화가 울렸다. 받자마자 그가 말했다.“보고 싶어요, 채린 씨. 오늘 몫은 미리 드립니다.”나는 이불을 끌어당겨 턱까지 덮었다. 분명 혼자 있는 방인데도 누가 내 얼굴을 볼까 봐 부끄러웠다.“그렇게 쉽게 주면 제가 막 웃잖아요.”“그럼 예약이 성공한 거네요.”웃으며 전화를 끊었지만 쉽게 잠들지 못했다. 좋아하는 사람이 내일을 기다려 준다는 사실이 이렇게 마음을 간지럽힐 줄은 몰랐다. 다만 아침이 오면 우리는 다시 대표와 직원이 되어야 했다. 누구의 눈에도 특별해 보이지 않는 사이. 그것만큼은 꼭 지키고 싶었다. 태준이 준 다정함을 회사에 가져가 마음껏 누리고 싶기도 했지만, 내 이름으로 얻은 자리에서 내 힘으로 일하는 기쁨 역시 포기할 수 없었다.다음 날, 회의실 앞 복도에서 태준과 마주쳤다. 그가 직원 둘과 일정표를 확인하는 동안 나는 수아에게 수정 자료를 건네고 지나갔다. 눈을 들면 그가 나를 볼 것 같아서 일부러 가방 속 펜을 찾았다. 그런데도 구두가 바닥을 스치는 익숙한 걸음이 멀어질 때까지 귀를 기울였다. 그가 지나간 뒤 수아가 내 쪽을 돌아보며 점심 메뉴를 물었다. 아무렇지 않게 메뉴를 고르면서도 아까 태준의 얼굴을 한 번만 더 볼 걸 그랬나 싶었고, 그 마음을 들킬까 봐 수아의 이야기에는 평소보다 더 열심히 맞장구쳤다.점심 무렵 팀장이 보고서의 담당자를 다시 확인해 달라고 했다. 태준에게 직접 보내면 빨리 끝날 일이었지만 나는 정해진 결재 경로를 따라 팀장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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