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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화

Author: 향임
말을 타고 달려온 이는 다름 아닌 한아름의 둘째 오라버니, 소씨 가문의 둘째이자 태자의 책동무로 명성이 자자한 경성 최고의 재능을 지닌 자, 소형준이었다.

말에서 내린 소형준은 바닥에 꿇고 있는 한아름을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

그는 곧장 다가가 손을 뻗었다.

“아름아, 왜 이러고 있는 것이냐? 어서 일어나거라.”

소형준이 그녀의 오른팔을 덥석 잡았다.

그러자 밀려오는 극심한 고통에 한아름은 낮게 신음을 내뱉으며 본능적으로 몸을 틀어 그를 밀쳐냈다.

소형준의 놀란 눈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름아, 너 지금…?”

어렵게 다시 찾게 된 여동생은 그야말로 거칠고 투박한 돌덩이 같았다.

글은 물론 붓을 쥐는 것조차 알지 못했기에 그가 그녀의 손을 잡고 한자 한자 가르쳤다. 그렇게 그녀는 이름과 가족들의 이름까지 쓸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 손을 뿌리치고 밀쳐내기까지 했다.

소형준의 얼굴이 조금 어두워졌다.

비록 무인은 아니지만, 장군가의 차남인 그는 늘 태자의 곁을 지키는 이였기에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분위기만으로도 사람을 압도하기에 충분했다.

“그때 너를 때렸던 나를 원망하는 것이냐?”

한아름은 왼손으로 오른팔을 감싸며 이를 악물었다.

원망?

그건 ‘원망’이라기보다, ‘억울함’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맞는 건 두렵지 않았다.

앞서 13년을 얼마나 많이 맞으며 살았는지 셀 수 없었다.

하지만 그날은 달랐다.

어린 시절 양어니에게는 억울함을 호소할수록 매는 더 가혹해졌지만, 앞으로는 절대로 상처 주는 일 없게 하겠다던, 항상 다정하게 시를 읆어주던 둘째 오라버니라면 그래도 설명은 들어줄 거라 믿었다.

그는 글씨를 가르쳐주던 그 손으로 채찍을 들어 그녀를 사정없이 내리쳤다.

채찍에 살이 갈라지고 그녀의 마음도 산산히 부서졌다.

소형준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역시 나를 원망하고 있었구나. 그럼 내가 묻겠다. 네가 미진이를 해하지 않았다면, 내가 널 때렸겠느냐?”

한아름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짙고 검은 눈동자는 마치 한겨울의 깊은 연못과도 같았고 목소리는 낮지만 싸늘했다.

“그럼 묻겠습니다, 미진이를 다치게 한 화살이 제 것이라고 단언하시는 것입니까?”

소형준의 잘생긴 얼굴에 순간 거센 파도가 휘몰아쳤다가 이내 가라앉았다.

그의 눈빛은 다시 싸늘하게 식어갔다.

“아름아…”

소 부인이 다급히 걸음을 옮기며 다가와 그녀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괜찮아, 지난 일은 그만 잊거라. 네가 얼마나 고생을 했을지 어미는 다 안단다. 이제 돌아왔으니 천천히 이야기하자꾸나.”

한아름은 소 부인의 부축임을 받았다. 그녀는 더 이상 오라버니들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그녀가 다시 계단을 오르려는 순간, 굴러가는 바퀴 소리 사이로 한 소녀의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름이 돌아온 거예요?”

3년 전, 한아름이 처음 소씨 가문으로 돌아왔을 때에도 그녀는 모습을 드러내기 전 이 말부터 꺼냈었다.

“아름이가 돌아온 거예요?”

그날, 소미진은 새빨간 무예복에 붉은 비단으로 머리를 묶고 살짝 올라간 눈꼬리에 눈을 반짝이며 등장했었다.

보석이 박힌 작은 검을 허리에 찬 모습은 늠름하고 당차 황제가 호걸이라 칭찬할 만했다.

그날의 한아름은 허름한 삼베옷에 바닥이 닳아 구멍 나기 직전인 신을 신고 있었다.

그 신발조차도 이웃집 오 할머니가 수선해 준 거였다.

소씨 가문의 응접실에 선 그녀는 화려한 꽃밭에 섞인 이름 없는 들풀같이 초라했다.

1년 만이었다.

그날 사냥터에서 끌려간 이후로 처음 마주한 소미진이였다.

소미진은 조금 야위었지만, 여전히 붉은 무예복에 검은 머리는 붉은 비단으로 정갈히 묶고 있었다.

그녀 허리춤의 검은 여전히 반짝였으며 신발은 먼지 한 톨 없이 말끔했다.

단 하나, 그녀의 몸 아래 휠체어를 제외하면 모든 게 예전 그대로였다.

소미진은 미소를 머금은 채 휠체어에 앉아 고개를 들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예전보다 훨씬 예뻐졌네. 옷도 너무 예쁘군. 역시 황후마마의 품은 물부터 다른가 보네.”

한아름은 무의식적으로 손을 움켜쥐었다.

이 화려한 비단옷 아래, 흉하게 남은 상처들과 여전히 아물지 않은 고통을 아는 이는 오직 그녀뿐이었다.

그녀는 한아름의 고운 비단 신발을 흘긋 보고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까지 걸어 오느라 고생 많았지. 어서 들어가 쉬어.”

하지만 그녀의 말투 속에 ‘걸어’에 유독 힘이 실려 있었다.

그 단어 하나가 소형민의 애써 억누르고 있던 분노를 다시금 부추기고 말았다.

“쉬긴 뭘 쉬어?! 걷는 거 좋아하고 무릎 꿇는 것도 잘하잖아? 그냥 거기 무릎 꿇고 있어!”

그러자 소 부인은 한아름의 손을 잡아끌며 자신의 뒤로 숨겼다. 그녀의 눈가는 이미 벌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그만하거라. 그 아이는 네 친동생이다.”

순간 소미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지만, 그녀는 애써 웃음을 지었다.

“맞아요, 오라버니. 아름이는 오라버니의 친여동생이니 그건 너무 가혹한 벌이에요.”

소 부인은 순간 멈칫하다가 한아름의 손을 뿌리치고는 황급히 소미진의 곁으로 달려 그녀를 꼭 껴안았다.

“아가야, 어미가 잘못했다. 말이 헛나왔구나. 너희 둘 모두 소중한 동생이란다.”

소형민은 그 광경에 다시 분노가 치밀었고, 한아름의 어깨를 발로 걷어차며 고래고래 소리쳤다.

“집안을 아주 들쑤셔 놓는구나! 다리가 있다는 걸 자랑이라도 하려는 것이냐?!”

한아름은 어깨가 부서질 듯 아팠지만 이를 악물고 다시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소형준이 그녀의 어깨를 받쳐주며 낮게 속삭였다.

“그냥 고개 숙이면 안 되겠니?”

한아름은 조용히 다물고 있던 입술을 열었다.

“이미 무릎까지 꿇고 사죄하고 있는데, 더 어떻게 숙이라는 거죠?”

소 부인의 품에 기댄 소미진이 나긋하게 말했다.

“바닥이 너무 차요. 무릎이라도 다치면 어쩌려고…”

“괜찮습니다. 천한 몸이라, 아가씨처럼 귀하게 길러진 몸과는 다르지요. 그때 모두 제 잘못이었다. 미안하다.”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차가운 눈빛은 예전에 눈물을 흘리며 해명하던 때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소미진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손을 꽉 움켜쥐었고, 자리에서 일어서려 몸을 움직였다.

그 모습에 깜짝 놀란 소 부인이 부리나케 그녀를 붙잡았다.

“안 돼! 안 돼. 어서 안으렴. 아름아, 그때 그 일은 네 탓이 아니다.”

소형민은 분노를 억누르지 못했다.

“1년이 지났는데도 원망이 가시지 않았느냐?! 대체 얼마나 미워해야 직성이 풀리겠느냐?! 네가 돌아온다고 해서 기다렸거늘! 뭘 더 어쩌라는 것이냐?”

“넌 세가의 교육을 받은 적이 없으니 황후마마께서 몸소 예법을 가르쳐주신 건 어쩌면 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란다.”

소형준은 한숨 섞인 말로 덧붙였다.

‘복’이라… 한아름은 속으로 조용히 냉소했다.

사람이 아닌 존재로 취급당하며 온갖 고통을 견뎌낸 세월, 그녀가 마음을 굳게 다잡지 않았다면 아마 진작 미쳐버렸을 것이다.

소형민은 그녀의 싸늘한 표정에 다시금 분노가 치밀어 손을 들어 올리려 했지만 소형준이 막아섰다.

“형님, 그만하시지요.”

그는 살짝 찌푸린 미간으로 고개를 저으며 조용히 말했다.

“저잣거리에서 이러다간 웃음거리가 됩니다.”

“오라버니들 제발 그만 하세요.”

소미진은 기운 없는 목소리로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아직 모르고 있는 모양이군. 시골에서 널 돌봐주던 오 씨 할머니께서 널 기다리고 있단다.”

한아름은 그 말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귀가 먹먹해지면서 머릿속엔 송미란의 말이 맴돌았다.

“얌전히 장군부로 돌아가거라. 좋은 선물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니라.”

오 씨 할머니는 그녀가 시골에서 유일하게 의지했던 분이다.

그분이 없었다면, 아마 오래전에 굶어 죽거나 매 맞아 죽었을 것이다.

황후의 별원에서 나온 한아름은 도망칠 생각도 했었다.

이름을 바꿔 숨어 살아도 좋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도망칠 수도 없다는 것을 그녀도 알고 있었다.

한아름은 다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소형민의 얼굴이 더욱 어두워졌다.

어머니와 형제들이 버선발로 나와 그녀를 맞았건만, 그녀는 싸늘하기만 했다.

하지만 시골 늙은이 얘기에는 즉각 반응하는 모습이 너무 화가 났다.

정말이지, 정을 붙일 수 없는 존재다.

소형민은 팔을 뻗어 그녀를 막아서며 소리쳤다.

“여봐라! 표 아씨를 사당으로 끌고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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