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심을 벗어난 외곽의 작은 한식집. 짙은 회색 구름이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비가 오겠네. 한동안 비가 안 오더니.”
운전석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던 옥철은 재빨리 차문을 열고, 곧장 돌아와 조수석 문을 열어젖혔다. 내리기를 망설이는 혜정을 향해 다그치듯 재촉했다.
하늘거리는 치마 아래 힐이 자갈에 걸릴까, 혜정은 조심스레 발을 내딛었다.
건물은 낡았지만, 점심시간이면 언제나 자리가 없는 곳이었다. 분명 사람들이 알아서 찾아가는 맛집임에는 틀림없었다. 혜정은 그 북적이는 소란 속에서도 혹시나 아는 이를 마주칠까 봐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긴 테이블에 마주 앉은 옥철은 익숙한 손놀림으로 메뉴를 고르며 주문을 마쳤고, 곧장 종업원에게 덧붙였다.
“소주 한 병도 같이 줘요.”
“대낮부터 술이에요?” 혜정은 피곤한 목소리로 물었다.
“한 잔쯤이야. 괜찮아. 지 여사도 괜찮잖아?”
말끝을 흐리는 대신, 그는 이미 두 개의 잔을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놓였다. 그의 태도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지만, 눈빛은 예전과 달라져 있었다.
낮은 조명 아래, 그의 시선은 느리고 무겁게 혜정의 위아래를 훑었다. 예전 같으면 대수롭지 않게 흘려넘길 수 있었을, 흔한 농담 섞인 시선.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그 나이대에 의례히 주고받는, 의미 없고 저급한 농담들까지도 오늘은 달랐다. 그 시선은 더디고 무겁게 그녀를 따라다녔다.
만남을 거절했던 여자가 다시 전화를 걸어왔을 때, 이유를 모를 사람은 없다.
혜정은 그 사실이 더욱 씁쓸했다.
“세입자가 다음 달엔 잔금 치를 거예요. 그때 갚을게요.”
혜정이 어렵게 말을 꺼내자, 옥철은 술병을 기울이며 가볍게 흔들었다. 톡— 술방울이 잔에 떨어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그 얘긴, 밥부터 먹고 해. 밥 앞에서 무슨 돈 타령이야.”
겉으로는 배려 같았지만, 혜정은 본능적으로 알았다. 저 눈빛 속엔 예전과 다른 계산이 들어 있었다.
“근데, 그 집 전세 놓으면 지 여사는 어디서 살려고?”
“딸네 집에 이사했어요. 벌써.”
옥철은 혜정의 일을 되뇌이는 듯 눈빛이 부지런히 움직였다.
“아, 사위가 약사라고 했지? 딸도 대기업 다니고.”
“네.”
혜정은 짧게 대답하며 고개를 숙였지만, 그의 시선은 테이블 위를 넘어, 혜정의 얼굴과 손끝을 타고 흘러들었다. 그는 오래 묵은 안주인을 보는 듯한 눈빛으로 혜정을 바라보다가, 술잔을 그녀 앞에 바짝 밀었다.
“한잔 해. 요즘 속도 말이 아닐 텐데.”
그 말에 혜정의 손이 젓가락을 멈췄다. 갑자기 창밖에서 천둥번개가 내리쳤다. 구름이 인내심을 다한 듯 속내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우르르 쾅!!!
—
귀를 때리는 천둥소리에 혜정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 할머니!”
옆에 앉은 하윤이는 빨리 밥을 넣으라고 입을 벌리고 기다리고 있었다.
“아! 미안해.”
“할머니, 왜 한숨 쉬어?”
아이는 모르는 것 같아도, 분위기 하나는 귀신같이 알아챈다. 혜정은 얼른 웃는 얼굴을 지어 보였다.
“아냐. 하윤아. 할머니 괜찮아.”
하지만 속으로는 ‘이젠 아이 앞에서도 한숨조차 맘대로 못 쉬는구나’ 싶었다. 혜정은 괜히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그 사이,
—삐리리리
[남편]
화면에 뜬 이름에 혜정은 잠시 머뭇거렸다. 잠시 눈을 감고는 무언가를 기도하는 듯 입술을 꼼지락거리다가 숟가락을 내려놓고 손가락으로 통화 버튼을 스윽 문질렀다.
휴대폰을 들기에는 손이 모자라 그녀는 테이블 위에 휴대폰을 올려둔 채로 스피커 버튼을 누른다.
“여보세요?”
그 저주받은 땅. 눈이 뒤집혀 주변 사람들에게까지 돈을 빌려가며 뛰어든 것이 이 지경이 되고 나서야 얼마나 무모했는지 실감하게 됐다.
한 달을 기다리지 못한다는 독촉 전화들. 결국 혜정은 남편에게 연락할 수밖에 없었다. 기대는 안 했지만.
“나한테 그런 돈이 어딨어. 카드 현금서비스로 땡겨봐도 오백이 전부인데. 이거라도 보내줄까?”
“하… 됐어요. 그 정도면.”
전화를 끊고 나서야 비로소 혜정은 ‘기대한 내가 미친년이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옥철의 제안을 왜 거절했을까. 도심지의 외곽, 점심 식사와 함께한 술, 아마 그 잔을 마셨다면 급한 돈 얼마 정도는 빌려줄 태세였다. 물론 그 이후에는 그가 원하는 것을 내줘야 하겠지만.
허벅지 위로 덮인 그의 메마른 손. 담배와 은단 냄새가 섞인 거친 체취. 혜정은 그 생각만으로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니야.’
그나마 옥철도 눈치를 봤는지 손길을 금세 거두었고, 혜정은 손자의 하원 시간에 맞춰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억수 같은 비에 하윤이를 그의 차에 태운 건 미안했지만, 그 상황에서 거절할 힘은 없었다.
—우르르릉 쾅!!!!!!
천둥소리에 놀란 혜정은 다시 아이를 바라보았다. 그 옆에서 아이는 가만히, 걱정스러운 혜정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
퇴근한 준호는 아이와 나란히 누워 있었다. 밤마다 반복되는 책 읽기 의식. 몇 권을 읽어준 후엔 자연스럽게 낮의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찾아왔다.
혹여나 오늘은 아이가 엄마 이야기를 꺼내진 않을까— 준호는 긴장된 마음으로 아이의 말을 기다렸다.
하지만 아이는 자신조차 그 슬픔을 다 감당하지 못한다는 걸 아는 듯, 엄마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다행이라는 안도와 함께 준호는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아이가 좋아하는 만화 캐릭터를 흉내 내자 아이의 말문이 터졌고, 방 안은 깔깔대는 웃음으로 채워졌다.
잠이 스르르 내려앉을 틈도 없이 아이의 목소리는 한껏 높아졌다가 점차 낮아졌다. 한참을 웃던 끝에 준호는 조용히 손바닥을 아이의 배 위에 올렸다.
“이제 자장해야지…”
“하~~암…”
아이의 하품. 그보다 반가운 소리가 또 있을까. 준호는 속으로 조용히 쾌재를 불렀다. 아이의 숨결이 일정해지는 걸 느끼며 준호도 눈을 감으려는 순간—
“할머니 요새 기분 안 좋아.”
아이의 입에서 터져나온 말 한마디에 준호의 눈꺼풀이 다시 천천히 떠올랐다.
“…왜 그렇게 생각했어?”
“할아버지랑… 전화하면서 울었어. 할아버지 돈 없대. 할머니가 다 써버렸대…”
준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자세히는 몰라도 장인과 혜정 사이에 무슨 일이 있는지 짐작은 충분했다. 뭐 어쩔 수 없었다. 시간이 해결해주는 것 말고는…
“…괜찮아. 걱정 마, 하윤아. 이런 일은 어른들이 다 해결할 수 있어. 조금 있으면 다 괜찮아져.”
준호는 최대한 부드럽게 말했다. 아이에게 불안이 번지지 않도록 자신의 목소리를 다독이며.
“하~~~암…”
다시 한 번 이어지는 하품. 준호는 아이의 이마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그런데—
“아빠, 근데 오늘 이상한 할아버지 차 타고 집에 왔어.”
“…응?”
순간 준호의 온몸에 긴장이 스쳤다. 이미 스르르 잠든 줄 알았던 아이의 입에서 나온 낯선 단어 하나. 이상한 할아버지? 준호의 시선이 천장을 뚫고 거실 너머, 장모의 방 쪽으로 날아갔다.
더 묻고 싶었다. 정확히 누구 차를 탔는지, 어떤 상황이었는지. 그러나 아이는 금세 잠들어 버렸다.
준호는 입술을 꾹 다문 채 아이를 바라보다 이불을 살며시 끌어올려주었다. 머릿속엔 낯선 장면이 하나둘 그려지기 시작했다.
‘장모님을 어린이집에 태워다줄 만큼 가까운 남자가 있었던가?’
준호는 장모와 지나가듯 나누었던 대화들을 더듬었다. 막연한 의문은 곧 기분 나쁜 상상으로 변해갔다.
‘혹시… 남자친구라도?’
질투라고 부르기 싫었다. 자격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심장은 알 수 없는 압박처럼 조여왔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준호는 문득 장인의 얼굴을 떠올렸다.
‘아무리 그래도 장인이 아직 살아계시는데… 장모님이 다른 남자를 만난다고?’
단순한 분노나 실망이 아니었다. 그 생각 자체가 싫었다. 묘하게 거슬렸다. 요즘 세상에 이성 친구 한둘 있는 게 당연하다지만, 적어도 자신의 장모만큼은 아니라 믿고 싶었다. 아니, 믿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
준호는 아이가 잠든 모습을 다시 확인한 뒤 조심스럽게 방문을 닫았다. 복도 끝, 장모의 방문은 고요한 어둠에 잠겨 있었다. 아무 일 없는 듯 변함없는 그 방의 침묵이 오히려 준호를 더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후…”
숨을 깊게 들이마신 그는 천천히 현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집에 계속 있다가는 냉장고를 열어 소주병을 꺼낼 것만 같았다.
현관으로 나가 슬리퍼에 발을 집어넣으면서 불현듯 얼마 전 자신이 저지른 미친 짓이 떠올랐다. 살을 타고 전해지던 체온, 숨죽인 밤의 정적 속에서 손을 뻗던 순간.
‘도대체 뭐에 홀린 거야.’
닫힌 문 너머로 모든 기억이 또렷이 되살아났다. 장모의 숨결, 손안에 감기던 살결— 그리고…
‘아냐. 한 발만 더 내디뎠다면 진짜 끝장이었겠지.’
결혼생활은 물론 인생 전체가 나락으로 떨어졌을지도 모른다.
현관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그저 걷고 싶었다.
—
“담배를 끊지 말 걸 그랬나.”
준호는 아파트 단지 산책로를 느릿하게 걸었다. 선선한 가을밤의 공기가 귓가를 스치고, 발끝에 밟히는 낙엽이 바스락 소리를 내며 감각을 깨웠다.
한 손에 쥔 휴대폰 화면은 텅 비어 있었다. 연락할 사람도, 기대할 답장도 없는 고요한 불빛.
‘가정 있는 남자는 다들 이런 건가…’
한숨처럼 떠오른 생각에 입꼬리를 씰룩였지만, 걷는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묘한 위안이 되는 순간이었다.
그때 멀리 화단 근처, 경계석에 앉아 있는 실루엣이 눈에 들어왔다. 가로등 불빛에 드러나는 모습은 익숙했다.
‘…장모님?’
입술 끝까지 올라온 부름을 준호는 꾹 삼켰다. 그녀 손에 들린 휴대폰이 눈에 들어온 순간이었다. 그는 곧 걸음을 멈추고, 어둠 속에 몸을 숨겼다.
“그러니까… 다음 달까지만. 조금만 기다려줘.”
혜정의 목소리가 떨렸다.
“정말 미안해… 내가, 어떻게든…. 한 달만이야…”
잠시 후—
“그럼 나보고 어쩌라고?!!”
갑작스레 터져 나온 격한 목소리가 밤공기를 찢었다. 정적 속에 울린 그녀의 외침은 날 선 비명처럼 멀리까지 번져갔다.
이내—
“흐윽…”
전화는 끊긴 듯했고, 몸을 일으키다 주저앉은 그녀의 어깨가 작은 파도처럼 흔들렸다. 멀리서도 느껴지는 무너짐. 분노와 수치, 좌절이 한 덩어리로 그녀를 짓누르고 있었다.
준호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물론, 상황은 대강 알고 있었다. 무리한 투자. 허술한 계약. 독촉과, 아직 들어오지 않은 전세 잔금.
‘다가가야 할까.’
지금 다가가면 어깨를 감싸줄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사위 앞에서 이 무너진 모습을 들켰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녀는 더 깊은 상처를 입을 수 있다.
그가 갈피를 못 잡는 사이, 혜정은 눈물을 훔치며 다시 전화를 들었다. 통화 연결음이 이어지는 동안, 그녀는 억지로 정신을 붙들 듯 눈가를 닦았다. 목소리는 낮고 작았지만, 고요한 밤의 적막 때문에 준호의 귀에 또렷이 들려왔다.
“사장님… 아까는 갑작스럽기도 하고, 아이 하원 때문에 그랬어요. 내일… 만날까요? 우리?”
그 말이 준호의 뇌리에 울렸다. 비굴하지 않으려는 어조. 그러나 담담한 겉모습 속에 스며든 필사적인 간청.
그제야 준호는 상황이 짐작되는 듯했다. 돈 때문에 내린 선택은 천박해 보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선택 뒤에 깔린 무게, 자신을 끝없이 낮추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결심의 깊이가 전해졌다.
더 놓아둔다면 장모의 추락은 막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준호는 숨을 고르며 천천히 다가갔다. 어둠을 가르며 드리운 그림자가 그녀 앞에 닿았을 때—
“아…”
혜정이 놀란 듯 고개를 홱 돌렸다. 손에 들린 휴대폰을 황급히 끊으며 눈동자가 동그랗게 커졌다.
“어… 어머?!”
숨이 섞인 목소리.
“어, 언제… 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