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호는 술잔을 비우며 멍하니 식탁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혼자 마신 지 얼마나 됐을까. 어깨가 묵직하고, 이마엔 잔잔한 열감이 돌았다.
“이제 그만 마셔야 되는 거 아니야?”
아이방 쪽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준호는 고개를 돌렸다. 아이는 생각보다 순순히 잠든 것 같았다.
“나도 사위랑 한잔 하고 싶었는데…”
준호는 손사래를 쳤다.
“아니에요. 안주도 남았고… 어서 오세요, 어머님.”
혜정은 말없이 미소를 짓다가 테이블 쪽으로 쪼르르 와서는 준호 앞에 놓인 전골냄비를 집어든다. 준호는 아까 경험했던 그 살색 향기가 나는 듯 자신도 모르게 코를 돌렸다.
“잠깐만. 식었겠다. 국 데워올게.”
그녀가 냄비를 다시 챙기며 종종걸음으로 돌아가는 뒷모습을 준호는 가만히 바라보았다. 불그스름한 얼굴, 약간 흐릿해지는 시야 속에서 유난히 살랑거리는 엉덩이만 또렷하다.
술 때문일까. 아니면, 요 며칠 내내 가슴 깊숙이 맴돌던 무언가 때문일까. 준호는 심호흡을 길게 내쉬며 입술을 한번 지그시 깨물었다.
“후우우…”
—
끓고 있는 찌개의 수증기가 유리창에 하얗게 번졌다. 그 너머, 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어딘가 낯설다고 혜정은 생각했다. 잔잔하게 웃고 있었다. 누굴 기다리는 듯한 얼굴…
‘나 참… 뭐 하는 거야, 지금…’
그런데도, 그녀는 목 늘어진 티셔츠의 주름을 펴고, 다시 한번 머리카락을 정리하고 있었다. 술이 취한 사위의 얼굴이 떠오른다. 아이를 재우는 동안 혼자 조용히 마시던 그의 옆모습.
자신을 도우려 삶의 고단함을 하나 더 얹은 걸일까… 어딘지 모르게 피로해 보이는 준호의 얼굴을 떠올리며 혜정은 다시 한번 셔츠를 내려다보고는 자작하게 졸여진 전골 냄비에 불을 껐다.
손가락 끝으로 조심스럽게 냄비를 집어들어 옮기는 혜정, 따뜻한 국물 냄새가 테이블을 감쌌다.
“됐어. 자, 한잔 따라드리겠습니다~ 우리 사위님”
그녀가 소주를 따라주자 준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잔을 들었다.
“잘될 거예요. 기운내세요.”
혜정이 조용히 웃는다.
“고마워. 정말…”
잔을 부딪히는 소리가 은근한 긴장감처럼 테이블 위를 조용히 타고 흘러내렸다.
—챙
—
술잔이 몇 번 오가자, 어색했던 분위기는 어느새 사라졌다. 준호의 어린 시절 이야기에 혜정은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사돈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혜정에게, 준호의 과거는 좀처럼 상상하기 어려운 그림이었다.
사돈을 직접 만났다면, 어떤 환경에서 사위를 키웠을지, 어떤 말들을 해줬을지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을 텐데. 준호의 어머니는 오래전 이혼 후 연락이 끊긴 상태였고, 바깥사돈이 되었어야 할 준호의 아버지는 결혼 이야기가 나오기 얼마 전 세상을 떠났다.
상견례 한 번 못 해본 사돈의 장례식 자리에 혜정은 다희와 함께 조용히 문상을 다녀올 수밖에 없었다. 장례식은 그야말로 조용했다. 지인보다는 가족 위주로 꾸려진 자리였고, 그 속에서 준호는 묵묵히 손님을 맞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 역시 말수가 적고, 세상과 거리를 두고 사는 사람 같았다. 아무리 이혼한 사이였다고는 해도, 전 부인의 얼굴 정도는 볼 법도 한데…
안사돈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고 했다. 혜정은 그 사연이 궁금했지만 감히 묻지 못했다. 말하지 않는 데는 다 이유가 있을 테니까.
사위와 둘이 술잔을 나눈 것도, 생각해보면 다른 집보다는 잦은 편이었지만 준호는 단 한 번도 자신의 가족 이야기를 먼저 꺼낸 적이 없었다. 혜정은 그것을 억지로 묻지 않고, 그저 조용히 받아들이는 쪽을 택했다.
하지만, 늘 한켠으로는 걱정스러웠다. 속이 깊고 성실한 사위였지만, 그런 사람일수록 혼자 끌어안는 것들이 더 많지 않던가.
준호는 외려 그런 짐을 들킨 듯, 짧게 웃으며 말했다.
“엄마는… 어릴 때 재혼하셨어요.”
—
혜정은 그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항상 담담하게 보였던 얼굴이 묘하게 부서져 보였다. 얼굴이 아니라, 마음 한쪽이 울컥한 듯한 표정.
“아버지는 겉으로는 사람 좋아 보이셨는데… 집에서는 좀… 그랬어요. 외도도 잦았고, 엄마를 계속 의심했죠. 자주 싸웠어요. 손찌검도 자주 했고, 엄마도 이혼하시고 얼마 안 돼 재혼하신 걸 보면 그 의심이 근거가 없던 것도 아닌 것 같고… 뭐 두 분 다 서로 안 맞았어요.”
준호는 웃으며 말했지만, 웃음은 오래 가지 않았다.
“아버지랑 사는 게 힘들더라고요. 그래서 독하게 공부했죠. 어떻게든 집에서는 나가자는 심정으로…”
잠시 침묵이 흘렀다.
혜정은 조심스레 잔을 들어올렸다.
“…대단하네. 대견해. 장서방.”
목소리에 담긴 떨림이 들켰을까, 그녀는 시선을 내렸다.
“힘든 이야기 고마워. 말해줘서…”
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뭐 요즘 일어난 일들, 저희 엄마한테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돼요. 저한테는 장모님이 더 중요하니까.”
그 말을 듣는 순간, 혜정은 문득 그의 뺨을 쓰다듬고 싶어졌다.
하지만 손끝이 멈췄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가볍게 등을 두드렸을 테지만… 지금 이 거리는 너무 가까웠다.
술기운은 둘 사이의 공기를 조금씩 진득하게 만들고 있었다.
가볍게 웃고 떠들던 분위기에서, 문득 혜정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괜히 나 때문에… 장서방이 더 외로워진 것 같아서 미안해. 그래도 한창때인데…”
준호는 순간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
한참을 망설이다 꺼낸 말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마치, 오래전부터 꾹 눌러둔 말이 입술 끝에서 미끄러져 나온 듯한.
“그런 걱정 하지 마세요. 어머님도 뭐 젊으신데…”
혜정은 눈을 피하듯, 잔에 남은 소주를 한 모금 들이켰다. 잠깐의 침묵이 찾아왔다.
그리고 나직이 말했다.
“…사실 나… 누군가랑 손을 잡아본 게, 언제였는지도 기억이 안 나.”
“누군가에게 ‘여자’로 보였던 적이 있었는지도 잘 모르겠고.”
“어제 장서방이 나 어깨 감싸줬을 때, 사람 손이 그렇게 따뜻한지 몰랐네.”
준호는 손에 쥔 술잔을 내려놓았다. 그 말이 너무 적막하게 느껴졌다.
안쓰러웠다. 자신도. 눈 앞의 여자도.
“왜요… 지금도 충분히… 아니, 솔직히 말씀드리면—”
준호는 말을 멈췄다. 입안에서만 맴돌던 말이 끝내 밖으로 새어 나오기 직전이었다.
혜정은 그를 바라보며 작게 웃었다.
“괜찮아. 알아. 나이 들면 다 그래. 누가 날 바라봐주기만 해도 그 순간이 고맙거든.”
그리고는 조용히 잔을 내밀었다.
“우리, 그 고마운 마음으로 한 잔 더 할까?”
잔이 맞닿는 소리와 함께, 작은 물방울이 튀어 서로의 술잔에 섞여들었다.
말없이 술을 비우는 두 사람.
엇갈리듯, 그러나 은근히 서로를 살피는 시선.
준호는 잔을 내려놓으며 혜정을 바라보다 이내 눈을 피했지만, 시선은 자꾸만 그곳으로 돌아갔다.
말끝마다 번지는 미소, 눈가의 주름, 가끔씩 길게 내쉬는 숨결.
평범하게 보아왔던 얼굴이 자꾸 낯설게 느껴졌다. 혜정은 무심히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말했다.
“술기운인가 봐. 자꾸 말이 많아지네.”
머리카락이 귀를 넘어가며 흰 목덜미가 드러났다. 나이를 숨기기 힘든 목의 주름, 하지만 취기와 며칠간 쌓인 감정 등이 뒤섞여 준호는 그곳의 향기를 더 가까이서 느끼고 싶었다.
준호는 그것을 겨우 꾹꾹 눌러 담았다. 그리고 그것을 미소로 숨기며 말했다.
“아뇨… 전 좋은데요.”
혜정은 그 말에 잠깐 멈칫했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잔을 다시 채웠다.
준호도 잔을 들었다.
잔이 부딪히는 소리는 유난히 또렷했다.
그리고 다시, 마주 본 눈.
길게 이어지는 침묵.
테이블 위로 놓인 준호의 손가에, 혜정의 손이 천천히 미끄러져 닿았다.
무언가를 움켜쥐려는 것도 아닌, 단지 거리를 좁히려는 듯한 동작.
입술을 살짝 열었다 다무는 혜정.
심장이 뛰는 소리를 스스로도 느낄 만큼 가까워졌다.
살며시, 그녀의 손바닥이 준호의 손 위로 포개졌다.
“우리 사위… 고마워. 모두…”
“아니에요.”
준호도 다른 손을 포갰다.
따뜻한 온기가 손바닥 사이를 천천히 스며들었다.
둘은 동시에 시선을 들어 올렸다.
지금이라면— 입술이 다가가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거리.
준호는 다가가려 했고, 혜정은 끌어당기려 했다.
그 순간.
두 사람은 동시에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잔이 달그락 부딪히며 흔들리고, 식탁 위 접시가 덩달아 흔들렸다.
“…아, 저 물… 물 좀.”
준호가 먼저 말을 꺼냈다. 당황해 눈치를 보는 목소리.
“에휴… 나도 이제 자러가야겠다. 취했어.”
혜정도 고개를 숙이며 중얼거렸다.
잠시, 서로 멈춰 선 채 아무 말이 없었다.
윙— 하고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만 방 안을 채웠다.
“오늘 정말 고마웠어. 나 먼저 자러갈게. 치우지 말고 들어가, 알았지?”
말끝이 흐려진 채, 혜정은 방으로 몸을 돌렸다.
준호는 여전히 자리에 앉지 못한 채, 자신이 두 손으로 무릎을 꼭 움켜쥐고 있다는 걸 뒤늦게 알아차렸다.
—
“저기, 장서방?”
꿈결인지 현실인지, 아득한 틈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장서방?”
이번엔 어깨를 부드럽게 흔드는 감촉. 따뜻한 손길이 팔을 타고 전해지며 의식이 천천히 떠올랐다.
“하암…”
입가로 하품이 새어 나왔다. 짙은 알콜향이 입 안을 맴돌다 코로 올라왔다. 준호는 인상을 찌푸렸다.
“늦었어. 출근해야지.”
눈이 번쩍 떠졌다.
“아, 아!!”
준호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어젯밤 술자리, 그리고 방에서 혼자 소주를 마시다 컴퓨터 앞에서 깜빡 졸던 기억. 새벽녘, 불편한 자세에 못 이겨 겨우 침대에 몸을 옮겨 눕던 장면이 스쳤다.
“헉, 어머님!!”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준호는 헝클어진 머리로 허둥지둥 일어났다. 문 쪽엔 이미 준비를 마친 혜정과 아이가 서 있었다.
“아빠, 나… 어린이집 가기 싫어.”
하윤이는 입이 삐죽 나와 가방끈을 질질 끌고 있었다.
“안 돼, 안 돼! 아빠 1분만에 나올게!!”
준호는 양말도 제대로 신지 못한 채 아이를 들쳐 안고 현관문을 열어젖혔다. 이불처럼 엉켜 있는 현실을 잠시 덮어두고, 아이부터 데려다주는 게 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