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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자와 편지 1

Author: 장순혁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4-07 11:04:22

끼이익.

갈색 나무 문이 요란스레

바닥에 쌓인 흰 눈을 밀어내며 열렸다.

집 안에 서 있는 이는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

프레드다.

집을 떠나가던 우편배달부 조지가

문이 열리자 프레드를 향해

저 멀리서 손을 흔들었다.

"참 열심히 사는 젊은이란 말이야."

조지에게 마주 손을 흔들어 주며

문 앞에 놓인 상자와 편지를 바라보는 프레드.

하얀 편지에는 익숙한 글씨체로

'프레드에게'

한 문장만 간결하게 쓰여있었다.

딱 봐도 그롬이 보낸 것이 분명했다.

프레드는 자기도 모르게 번지는 미소와 함께

상자를 열었다.

상자 안에는 반지가 끼워진 채 잘린 손가락이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성질 고약한 늙은이 같으니라구.

언제쯤 철이 들는지 원... 쯧!"

거친 말과는 달리 상자를 조심스레 들어 올리며,

프레드는 집 문을 닫았다.

단출하지만 아늑한 프레드의 집.

다양한 크기와 색의 책들로

발디딜 틈 없이 가득 채워져있다.

검은 잉크와 편지지들은

프레드가 학문과 연관이 깊음을 증명하는 듯 했다.

한쪽 구석, 벽난로에 피워진 불은

잠깐 문을 연 틈새에 새어들어온

차가운 겨울바람이 내려버린 방 안 온기를

다시금 따듯하게 올려주었다.

"흠.. 이번에는 얼마나 잘 만들었는지 볼까?"

프레드는 상자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는

그 옆을 더듬어 책을 읽으며 쓰고 있던

돋보기안경을 찾았다.

낡은 반달 모양의 안경.

프레드는 코끝에 안경을 얹었다.

상자 안을 살펴봤다.

꽁꽁 굳어있는 반지와 손가락.

조각가인 그롬은 프레드에게

선물을 보내줄 때면 늘 이런 식으로 보내곤 했다.

반지를 조각해 자랑하고 싶을 때면

손가락을 조각해서 반지를 끼워 보내주고,

팔찌를 빚어 보여주고 싶을 때면

팔목을 조각해서 팔찌를 끼워 보내주는 것 말이다.

말투와 행동은 거칠고 투박하지만

그롬이 조각할 때의 섬세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란 걸

프레드는 이미 알고 있었다.

같은 고향 출신으로서

오랜 시간들을 함께한 프레드와 그롬.

프레드가 일 때문에 고향을 떠나 이곳에 정착한 뒤에도

둘은 이렇게 배달부를 통해 편지와 선물들을 주고받고,

이듬해에 한 번 정도씩은 서로의 집에 초대해

식사를 대접하곤 했다.

재작년에는 그롬의 집에 초대를 받아

그롬의 딸, 지니와 함께 식사를 하며

며칠 머물렀었던 프레드.

그롬의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은

가족이 없는 프레드에게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것이었다.

그런 그롬이 보내는 조각상들의 모델은 지니였는데,

지니가 어릴 적부터 최근까지

점점 커지는 장신구들의 크기를 보며

딸 같은 지니의 성장을 느끼는 재미가 제법 쏠쏠했다.

언젠가 지니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다면

그롬이 보내온 장신구들을

자라는 속도에 맞춰 차근차근

지니의 아이에게 모두 선물하는 것이

프레드의 오랜 꿈이라,

프레드는 그롬이 보내준

장신구들을 소중히 모아놨었다.

"이제는 아예 본격적이구먼!"

저번 편지에서 미술을 배우기 시작했다고 하더니,

이제는 색칠까지 해서 조각상을 보내는 것이 아닌가.

"거참, 영감탱이 할 일도 없나?"

상자 속 손가락 조각상은 제법 그럴듯해 보였다.

손을 뻗어 손가락 조각상을 집어 드는 프레드.

낯선 감촉에 자기도 모르게

상자 속으로 조각상을 떨어뜨렸다.

프레드의 손끝에서 느껴진 감각은

분명 조각상의 그것이 아니었다.

프레드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조심스럽게 다시 손가락 조각상을 들어 올렸다.

그제야 깨달았다.

이건 조각상이 아니다.

진짜 손가락이다.

프레드는 구역질을 참으며

손가락을 다시 상자 속에 넣고

상자 뚜껑을 닫은 뒤,

상자와 함께 동봉된 편지를

덜덜 떨리는 손으로 펼쳤다.

편지에는 아래와 같이 적혀있었다.

"친애하는 나의 친구 프레드에게.

잘 지내나?

나는 잘 지내네.

어제 지니가 딸을 낳았다네.

나한테는 손녀지.

딸의 딸이라!

이젠 지니도 알 거야.

내가 자기를 키웠을 때 얼마나 힘들었는지.

가끔씩은 한대 쥐어박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뭐, 그래도 그런 게 부모가 된다는 것 아니겠는가?

이번에 보내는 팔찌는 뇌물일세.

손녀의 이름을 아직 못 지었거든.

그래도 자네가 나보다 더 학식이 있지 않나.

답장에 내 손녀의 이름을 적어 보내주게.

의미가 있었으면 좋겠군.

예를 들면.. 어..

언제나 행복하고.. 언제나 사랑받고..

아프지 않고.. 다치지 않고..

뭐, 그런 이름들 있잖은가.

자네가 지어준 이름이

이 아기를 영원히 축복해 주기를 바라네.

자네도 나중에 시간 나면 와서 보는 것이 어떤가?

매일 울고, 대부분 자고 있긴 하지만,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천사가 따로 없다네.

팔불출인 줄은 알지만,

그래도 그냥 아기라고 적을 수는 없어.

이렇게 예쁜데 어찌 그러겠나!

자네도 와서 직접 보면

나를 팔불출이라 부르지 못할 거야.

오히려 나보다 더 칭찬할 수도 있겠지,

아니, 칭찬할 수밖에 없지!

이런 아기가 우는구먼.

이만 글을 줄여야겠네.

나는 어서 이 아기에게

아기라는 이름 대신 진짜 이름을 불러주고 싶어.

빠른 답장 기다리겠네.

부디 이 편지를 받자마자 써줬으면 좋겠어.

차피 자네 할 일도 없잖은가!

그대의 친구 그롬이."

프레드는 편지와 상자를 번갈아 바라보다,

서랍에서 편지지를 꺼내서

황급히 편지를 휘갈겨 썼다.

"그롬에게.

팔찌라니,

반지가 왔네.

이 손가락은 뭔가?

진짜 손가락이 맞는 건가?

자네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

제발 빠른 답장을 바라네.

프레드가."

급하게 편지 봉투를 찾아 편지를 쑤셔 넣은 뒤,

프레드는 두꺼운 코트를 입고

우편배달부 조지의 집으로 향할 준비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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