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끼이익.
갈색 나무 문이 요란스레 바닥에 쌓인 흰 눈을 밀어내며 열렸다. 집 안에 서 있는 이는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 프레드다. 집을 떠나가던 우편배달부 조지가 문이 열리자 프레드를 향해 저 멀리서 손을 흔들었다. "참 열심히 사는 젊은이란 말이야." 조지에게 마주 손을 흔들어 주며 문 앞에 놓인 상자와 편지를 바라보는 프레드. 하얀 편지에는 익숙한 글씨체로 '프레드에게' 한 문장만 간결하게 쓰여있었다. 딱 봐도 그롬이 보낸 것이 분명했다. 프레드는 자기도 모르게 번지는 미소와 함께 상자를 열었다. 상자 안에는 반지가 끼워진 채 잘린 손가락이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성질 고약한 늙은이 같으니라구. 언제쯤 철이 들는지 원... 쯧!" 거친 말과는 달리 상자를 조심스레 들어 올리며, 프레드는 집 문을 닫았다. 단출하지만 아늑한 프레드의 집. 다양한 크기와 색의 책들로 발디딜 틈 없이 가득 채워져있다. 검은 잉크와 편지지들은 프레드가 학문과 연관이 깊음을 증명하는 듯 했다. 한쪽 구석, 벽난로에 피워진 불은 잠깐 문을 연 틈새에 새어들어온 차가운 겨울바람이 내려버린 방 안 온기를 다시금 따듯하게 올려주었다. "흠.. 이번에는 얼마나 잘 만들었는지 볼까?" 프레드는 상자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는 그 옆을 더듬어 책을 읽으며 쓰고 있던 돋보기안경을 찾았다. 낡은 반달 모양의 안경. 프레드는 코끝에 안경을 얹었다. 상자 안을 살펴봤다. 꽁꽁 굳어있는 반지와 손가락. 조각가인 그롬은 프레드에게 선물을 보내줄 때면 늘 이런 식으로 보내곤 했다. 반지를 조각해 자랑하고 싶을 때면 손가락을 조각해서 반지를 끼워 보내주고, 팔찌를 빚어 보여주고 싶을 때면 팔목을 조각해서 팔찌를 끼워 보내주는 것 말이다. 말투와 행동은 거칠고 투박하지만 그롬이 조각할 때의 섬세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란 걸 프레드는 이미 알고 있었다. 같은 고향 출신으로서 오랜 시간들을 함께한 프레드와 그롬. 프레드가 일 때문에 고향을 떠나 이곳에 정착한 뒤에도 둘은 이렇게 배달부를 통해 편지와 선물들을 주고받고, 이듬해에 한 번 정도씩은 서로의 집에 초대해 식사를 대접하곤 했다. 재작년에는 그롬의 집에 초대를 받아 그롬의 딸, 지니와 함께 식사를 하며 며칠 머물렀었던 프레드. 그롬의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은 가족이 없는 프레드에게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것이었다. 그런 그롬이 보내는 조각상들의 모델은 지니였는데, 지니가 어릴 적부터 최근까지 점점 커지는 장신구들의 크기를 보며 딸 같은 지니의 성장을 느끼는 재미가 제법 쏠쏠했다. 언젠가 지니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다면 그롬이 보내온 장신구들을 자라는 속도에 맞춰 차근차근 지니의 아이에게 모두 선물하는 것이 프레드의 오랜 꿈이라, 프레드는 그롬이 보내준 장신구들을 소중히 모아놨었다. "이제는 아예 본격적이구먼!" 저번 편지에서 미술을 배우기 시작했다고 하더니, 이제는 색칠까지 해서 조각상을 보내는 것이 아닌가. "거참, 영감탱이 할 일도 없나?" 상자 속 손가락 조각상은 제법 그럴듯해 보였다. 손을 뻗어 손가락 조각상을 집어 드는 프레드. 낯선 감촉에 자기도 모르게 상자 속으로 조각상을 떨어뜨렸다. 프레드의 손끝에서 느껴진 감각은 분명 조각상의 그것이 아니었다. 프레드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조심스럽게 다시 손가락 조각상을 들어 올렸다. 그제야 깨달았다. 이건 조각상이 아니다. 진짜 손가락이다. 프레드는 구역질을 참으며 손가락을 다시 상자 속에 넣고 상자 뚜껑을 닫은 뒤, 상자와 함께 동봉된 편지를 덜덜 떨리는 손으로 펼쳤다. 편지에는 아래와 같이 적혀있었다. "친애하는 나의 친구 프레드에게. 잘 지내나? 나는 잘 지내네. 어제 지니가 딸을 낳았다네. 나한테는 손녀지. 딸의 딸이라! 이젠 지니도 알 거야. 내가 자기를 키웠을 때 얼마나 힘들었는지. 가끔씩은 한대 쥐어박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뭐, 그래도 그런 게 부모가 된다는 것 아니겠는가? 이번에 보내는 팔찌는 뇌물일세. 손녀의 이름을 아직 못 지었거든. 그래도 자네가 나보다 더 학식이 있지 않나. 답장에 내 손녀의 이름을 적어 보내주게. 의미가 있었으면 좋겠군. 예를 들면.. 어.. 언제나 행복하고.. 언제나 사랑받고.. 아프지 않고.. 다치지 않고.. 뭐, 그런 이름들 있잖은가. 자네가 지어준 이름이 이 아기를 영원히 축복해 주기를 바라네. 자네도 나중에 시간 나면 와서 보는 것이 어떤가? 매일 울고, 대부분 자고 있긴 하지만,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천사가 따로 없다네. 팔불출인 줄은 알지만, 그래도 그냥 아기라고 적을 수는 없어. 이렇게 예쁜데 어찌 그러겠나! 자네도 와서 직접 보면 나를 팔불출이라 부르지 못할 거야. 오히려 나보다 더 칭찬할 수도 있겠지, 아니, 칭찬할 수밖에 없지! 이런 아기가 우는구먼. 이만 글을 줄여야겠네. 나는 어서 이 아기에게 아기라는 이름 대신 진짜 이름을 불러주고 싶어. 빠른 답장 기다리겠네. 부디 이 편지를 받자마자 써줬으면 좋겠어. 차피 자네 할 일도 없잖은가! 그대의 친구 그롬이." 프레드는 편지와 상자를 번갈아 바라보다, 서랍에서 편지지를 꺼내서 황급히 편지를 휘갈겨 썼다. "그롬에게. 팔찌라니, 반지가 왔네. 이 손가락은 뭔가? 진짜 손가락이 맞는 건가? 자네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 제발 빠른 답장을 바라네. 프레드가." 급하게 편지 봉투를 찾아 편지를 쑤셔 넣은 뒤, 프레드는 두꺼운 코트를 입고 우편배달부 조지의 집으로 향할 준비를 했다.- 생선 창고 III남자 : “이거..”나 : “이거 뭐?”남자 : “이거.. 섬 전화야.”나 : “..뭔 소리야?”남자 : “섬에서 너한테 직접 연락을 한 거라고.한 번도 이런 일이 없었는데..”나는 책상을 손가락 끝으로 두드린다.생각에 생각을 거듭한다.정적이 자리할 무렵, 남자에게 말한다.나 : “일단 다 집어치우고,그러면 너가 아는, 너와 직접적으로 연관된 사람은, 참가자들 태운 배의 김 선장 정도라는 거지.”남자 : “..어.”나 : “그 등대가 있다는 섬에서 아마, 팔까 말까를 정해서 중국 배로 실어서 보내는 거고.”남자 : “그렇지.”나 : “..그러면 간단하네. 그 김 선장이랑 날 연결해줘.”남자 : “뭐 하려고.”나 : “뭘 하긴 뭘 해.”나는 팔짱을 끼며 남자에게 말한다.나 : “어차피 여기까지 온 거, 끝까지 가봐야지.그리고 끝까지 가지 않으면, 네 선에서 내가 정리될 것 같거든.”남자는 책상 밑에서 쥐고 있던 사시미 칼을 들어 책상 위에 올려둔다.남자 : “알고 있었냐?”나 : “모르는 게 더 이상하잖아.그렇게 한쪽 손만 계속 책상 밑에 두고 있으면.”남자는 알 수 없는 표정을 짓더니,남자 : “..형이랑 비슷하네.”나 : “내가?”남자 : “어. 니네 형도 나한테 그 말 똑같이 했거든. 더 젠틀하게 말하긴 했지만.”나 : “젠틀은 니미.. 그냥 가식적인 거지.”남자 : “뭐, 그건 마음대로 생각하고. 어쨌든 섬에서 너한테 직접 연락을 했다는 건..”남자는 잠시 고민하다가남자 : “따라와.”나 : “어디로 가는데.”남자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나를 보며남자 : “김 선장이랑 연결해 달라매.”남자는 일어나 반대쪽 문을 열고 나간다.나도 남자를 따라나선다.나 : "..근데 사업 빠그라졌다면서, 그러면 왜 나한테 말을 건 거야?"남자 : "그 부둣가에서 그러고 멍청히 서 있는 연놈들은 다 똑같아서.혹시나 한 거지."나 : "내가 경찰이었
- 생선 창고 II스마트폰은 동영상이 틀어져 있다.뉴스의 장면 중 하나다.여자 아나운서가 말한다.아나운서 : [..등대지기를 구한다는 광고에 대해 많은 분들이 들어보셨을 텐데요.높은 급여와 까다롭지 않은 대상 조건으로 인해 화제가 되었던 그 광고가 사실은 참여자들을 중국으로 가져다 파는 인신매매 수단이라는 것이 밝혀졌습니다.우리나라의 동해를 지키는 해경이 지난 12일, 서해상 등록되지 않은 수상한 배를 수색한 결과, 한국에서 중국으로 사람들을 팔아넘기는 브로커 이 모씨를 비롯한 다섯 명의 한국인들과 세 명의 중국인 선원들을 체포했습니다. 검경은 합동 조사를 시작했으며,팔려간 사람들의 신원이 전혀 확보되지 않는다는 점, 피의자들로부터참여자들의 신원을 말소시키는 전문 업자가 있다는 점 등을 알아냈다고 밝혔습니다.수십 명이 넘는 피해자의 가족들은 미적지근한 정부의 태도를 비판하며 청와대 앞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으며..]남자는 자기 스마트폰을 도로 가져간다.나는 남자에게 묻는다.나 : “..그러면 형, 아니, 이현우도 팔려간 거야?”남자 : “아니, 아마도.”나 : “그러면 뭔데. 앞뒤가 안 맞잖아.”남자 : “에이, 씨발..”나 : “뭐냐고.”남자 : “내가 알고 있는 건 딱 이 정도야. 참여자들을 만나고, 인원을 체크 한 다음에, 그 새끼들을 교육장이 있는 섬으로, 김 선장 배에 태워 보낸다.이게 내 역할이야. 그 이상은 몰라.뉴스에 뜨고, 이 사업은 빠그라졌어. 나한테도 연락 한 번 안 온다고.”나 : “그러면 내 신상정보는 여기 왜 있는 거야.이현우가 안 팔려갔다는 건 또 어떻게 아는 거고.나한테 전화는 그럼 누가 한 거야, 대체.”남자는 다시 담배를 꺼내 피운다.남자 : “이현우는 그 계획 핵심 간부였어. 참여자가 어떻게 간부까지 된 건지는 나도 몰라.아무튼, 팔아버릴 연놈들 정하는 것도간부들 회의에 따라 정하는 거니까, 팔려가진 않았겠지.이
- 생선 창고 I남자를 따라 도착한 곳은 부둣가에서도 외진 곳에 있는 한 생선 창고.남자는 창고의 자물쇠를 열고 들어간다.나도 남자를 따라 들어간다.창고 안에 들어서면, 비린내가 코를 찌른다.한쪽 벽은 상자째 쌓여있는 생선.그 반대 벽에는 작은 책상과 의자들.남자가 문을 다시 닫는다.남자 : “이쪽으로.”남자는 책상으로 가서 앉는다.나는 책상 앞 의자에, 남자를 마주 보고 앉는다.남자는 책상 위의 공책을 들어 한참을 이리저리 넘겨본다.그러다 마침내 찾은 듯, 책상에 공책을 펼쳐 내려놓는다.내가 볼 수 있게 공책을 돌려준다.품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는 남자.담배와 라이터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하얀 연기를 내뱉으며 동시에 말한다.남자 : “이연우.. 이현우 동생, 맞지?”나는 공책을 보며 대강 답한다.나 : “예.”공책에 적혀있는 건 내 신상정보다.이름, 주민등록번호, 주소, 학력, 그리고 가족관계서.아버지, 사망.어머니, 사망....이상하다.가족관계서에 나는 외동으로 적혀있다.형이 적혀있지 않다.나 : “이거..”내 말을 끊고 남자는 묻는다.남자 : “여긴 어떻게 알고 왔지?”나 : “..여기로 오라던데요?”남자 : “누가?”나 : “전화 걸어보니까요.”나는 품속에서 너절한 서류를 꺼내 남자에게 건네준다.남자는 서류를 읽는다.난 책상 위의 담배를 집고 남자를 따라 담배를 피운다.남자는 그런 나를 흘깃, 바라봤다가 다시 서류에 눈을 돌린다.곧이어 서류를 내려놓고는남자 : “이상하네.”나 : “이상하긴 하지.그나저나 너는 언제 봤다고 반말이냐?”뼛속까지 스며든 내 반골 기질.남자 : “꼬우면 너도 반말하고.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나 : “그렇지. 그건 중요한 게 아니지. 중요한 건 왜 내가 외동으로 적혀 있느냐야, 이 가족관계서에.”남자는 나를 새삼스러운 눈으로 바라본다.남자 : “형한테 아무 얘기도 못 들었냐?”나 : “그렇게 친하진 않았거든.”
- 오천항오천항은 생각보다 한산했다.하긴, 생선잡이 배들은 모두 새벽이 되자마자 나갈 테니까.오후 한시인 지금은생선을 잡으러 나갈 시간도생선을 잡으러 나갔던 배가 돌아올 시간도 아닌 것은 분명했다.부둣가에는 나가지 못한 배들, 쌓인 생선들을 손질 중인 아줌마들, 손수레에 얼음을 옮기며 이곳저곳 바쁘게 다니는 남자뿐이었다.그 와중에 홀로 이곳과 어울리지 않는, 오천항 끄트머리에멀거니 선 나.이곳저곳 고개를 돌려 둘러본다.그러나 아무도 나를 찾지 않는다.등대지기 면접을 보러온 것 같은사람들도 하나 보이지 않는다.나 (생각) : ‘언제 온다는 거야?’그때 얼음을 옮기던 남자가 내 앞에서 넘어진다.수레에서 얼음이 요란스럽게 쏟아진다.남자는 중얼거린다.남자 : “에이씨, 진짜..”남자는 바닥의 얼음들을하나하나 줍기 시작하고,그 모습을 보던 나는남자를 도와 얼음을 수레에 담아준다.남자가 가늘게 웃으며 말한다.남자 : “아이고, 감사합니다.”나 : “별말씀을요.”다시 한번 허리를 굽히고 얼음을 집으려 할 때 남자가 내게 조용히 묻는다.남자 : “이름.”나 : “..예?”남자가 나를 보지도 않은 채얼음을 모으며 다시 묻는다.남자 : “이름.”나는 그런 남자를 바라본다.겉으로 보기에는 쓰러진 얼음을 요란스레 다시 담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나는 이내 대답한다.나 : “..이연우요.”남자는 내 이름을 듣고잠시 동작을 멈춘다.이내 주변을 살펴보던 남자.수레에 도로 담은 얼음을 옆 바닷물에 쏟아버린다.바닥의 얼음들도 발로 쓸어 넣는다.나도 손에 쥐고 있던 얼음들을남자를 따라 바다에 집어 던진다.남자는 다시 손수레의 손잡이를 잡고, 남자 : “따라와.”남자는 조용히 말하고는, 뛰어가듯이 걷는다.나도 그런 남자의 뒷모습을 따라 발걸음을 옮긴다.남자의 장화 모양을 따라오천항 바닥에 발자국들이 새겨지고그 발자국들을나는 말없이 바라보며남자를 따라 간다.
- 다시, 장례식엄마가 죽었다.엄마의 장례식장은 아버지의 장례식장과 달랐다.그 누구도 찾아오지 않았다.나는 혼자 앉아 엄마의 사진을 바라봤다.울고 싶지는 않았다.나는 형과 다르니까.기도하고 싶지도 않았다.나는 정말 형과 다르니까.다르고 싶었던 건지, 달라지고 싶었던 건지.정확히는 모르겠지만 희미하게는 같았다.손님도, 통곡도 없이 엄마의 장례식은 끝이 났다.나는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왔다.집 문 앞에는 세금고지서, 우편, 광고지 등등이 쌓여있었다.그것들은 모조리 집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뽀얗게 먼지가 내려앉은 거실 바닥에 대충 앉아 하나하나 살펴보던 중, 흰 봉투가 하나 끼워져 있음을 알았다.고개를 갸웃하며, 내용물을 꺼냈다.찢어진 것을 테이프로 하나하나, 너덜너덜하게 감은 종이였다.펼쳐보았다.그 언젠가, 형이 내게 준 서류였다.내가 찢어버렸던, 등대지기를 구한다는 서류.내용은 같았다.[등대지기 모집.장소 - 서해 중 하나의 섬.대상 – 스무 살 이상의 누구나.모집 인원 – 00명.월 급여 700만원.하는 일 - 등대 보수 및 유지.- 6개월 간격으로 교대 근무.- 처음 계약서를 작성하고 섬으로 출발하기 전 3개월 치 지급.- 다음 차례와 교대할 때 나머지 3개월 치 지급.- 생필품 및 각종 생존 물자 제공.- 인터넷 x, 전화 x, 편지 x.- 외부와 연락할 방법은 없음.- 신청, 면접, 등대를 다루는 일주일간의 교육. (교육비 별도 제공)]그러나 달랐던 것은 맨 밑 여백에 적힌 두 문장의 글.형의 글씨체로 적힌,+82 050 – 3967등대로나는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들고 적힌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뚜루루뚜루루달칵남자 목소리 : “나흘 후, 십삼 시, 서해 오천항.”달칵뚜뚜뚜전화가 끊겼다.나는 한동안 가만히 앉아있다가, 불현듯 일어나 낡은 가방에 옷가지들을 쑤셔 넣었다.그러다, 가방을 팽개치고 지갑만 챙겨 집 밖으로 나섰다.어차피
- 병이 짙어지다 II 그러던 어느 날, 엄마의 병실에 갔더니 형이 어떤 서류를 읽고 있었다. 내가 옆자리에 털썩, 하고 앉으면 형은 말없이 서류를 접어 품에 넣었다. 나는 굳이 묻지 않았고, 형도 굳이 말해주지 않았다. 그 날도 그렇게 지나가는 듯했다. 내가 병실을 나갈 때, 형이 내 손목을 붙잡았다. 놀랐지만 그렇지 않은 척하며 형을 돌아보니 형은 품속의 서류를 내게 건넸다. 그러고는 나보다 먼저 병실을 나갔다. 나는 다시 자리에 앉아 서류를 펼쳐봤다. [등대지기 모집. 장소 - 서해 중 하나의 섬. 대상 – 스무 살 이상의 누구나. 모집 인원 – 00명. 월 급여 700만원. 하는 일 - 등대 보수 및 유지. - 6개월 간격으로 교대 근무. - 처음 계약서를 작성하고 섬으로 출발하기 전 3개월 치 지급. - 다음 차례와 교대할 때 나머지 3개월 치 지급. - 생필품 및 각종 생존 물자 제공. - 인터넷 x, 전화 x, 편지 x. - 외부와 연락할 방법은 없음. - 신청, 면접, 등대를 다루는 일주일간의 교육. (교육비 별도 제공)] 무슨 뜻이지? 나보고 하라는 걸까? 엄마는 자기가 돌볼 테니? 기분이 나빴다. 언제까지 아빠 행세를 할 건지. 나는 서류를 찢어 옆에 놓인 쓰레기통에 버렸다. 엄마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병실 밖으로 나섰다. 병실 밖, 벽에 형이 기대고 서 있었다. 내게 뭔가를 말하려는 듯싶었지만, 나는 무시하고 발길을 돌렸다. 형은 구태여 나를 잡지 않았다, 아니, 잡지 못했던 걸까. 뭐, 달라질 건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날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나는 형을 본 적이 없다. 형은 소리도 없이 존재를 감췄다. 엄마의 옆에는 그때부터 나만 있었다, 나만. 형도 없이. 나만. 엄마와 함께 있었지만 고독했다. 외로웠고, 괴로웠다.
프레드가 사는 곳에서그롬이 사는 곳까지는말을 타고 달려도 일주일이 넘게 걸린다.그간 프레드는 몇 번이고그롬의 집으로 들이닥칠까,당장 그롬의 집으로 갈까,괴로워하며 일주일간 그롬의 답장을 기다렸다.상자를 다시 열어볼 용기가 나지 않는 프레드.꽉 상자를 닫은 채 서랍장 맨 위에 넣어놓았다.조지에게 편지를 부탁한 지딱 일주일 후,누군가 프레드의 집 문을 두드렸다.프레드는 지체 없이 문을 열었고,문 앞에는 조지가 웃으며 서 있었다.또 하나의 상자를 들고."선생님, 좋은 아침입니.."조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후.."프레드는 심호흡을 하며상자를 다시 열었다."윽.."상자 속에서 악취가 나고 있었다.집을 뒤덮은 모닥불의 훈훈한 온기 때문에차갑게 배송되어 얼어있던 손가락이 녹아,손가락으로부터 흘러나온 검붉은 피가상자 바닥에 조금 고여있었다.프레드는 인상을 찡그리며손가락을 들어 올렸다.그러곤 손가락에서 반지를 빼내어옆의 탁자에 올려두고프레드는 손가락을 자세히 살펴봤다.손가락은 벌써 조금씩 썩어가고 있었다."물론 아니겠지만,혹시 그롬이 보낸 것이라면그롬의 가족 중 한 명의 손가락일 거야."프레드는 손가락을 이
쾅쾅쾅!쾅쾅쾅!벌컥!"누구십니.."잠을 자던 중이었던 듯잔뜩 짜증과 졸음이 가득한 얼굴을 내밀던 조지가프레드를 발견하자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아니, 프레드 선생님.이 밤중엔 어쩐 일이십니까?"프레드는 정신없이 대답했다."아, 미안하네. 자고 있었나?물론 자고 있었겠지. 시간이 시간이니까.미안하구만. 그래도 말이야,내일까지 기다릴 수가 없어서.늦춰졌다간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아니지, 어쩌면 벌어졌는지도..아니, 아니야.그러니까 이게 무슨 말이냐면.."조지는 횡설수설하는 프레드를걱정어린 눈으
그대는 나와 함께 소파에 앉아내가 그대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테레비 속 축구를 보며 웃을 때에도그대는 테레비 너머의 벽을 보았지난 홀로 웃다가 괜히 멋쩍어서그대에게 재밌지 않냐고 물었고그대는 그 벽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대강의 대답으로 나의 질문을 넘겼지나는 그러려니 했어뭐, 누구에게는 테레비 속 축구보다테레비 너머 벽이 더 흥미로울 수도 있으니까그게 우리의 일상이었지하지만 그날은 유독 심했어우리가 함께 밥을 먹을 때도,우리가 함께 커피를 마실 때도,우리가 함께 침대에 누울 때까지도그대는 그 벽만 바라보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