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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화

Author: 백연
허인하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이를 악물며 말했다.

“가세요.”

허인하는 저녁 내내 병원에서 딸과 함께 아들을 돌보며 한순간도 곁을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곧 돌아오겠다던 강현재와 도아영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허인하는 걷잡을 수 없이 밀려오는 슬픔에 잠겼다.

아까 강현재와 도아영이 주고받은 카톡 메시지 사진 속에서 그는 집에 있었고 모든 것을 도아영에게 확인하고 있었다.

이것은 손님을 대하는 태도나 단순한 아이들의 엄마를 대하는 태도가 아니었다.

‘설마, 아직도 도아영을 사랑하고 있는 걸까?’

처음에는 강현재가 도아영에게 보상하고 싶어 한다고만 생각했다. 그녀가 그를 위해 두 아이를 낳았고 강현재 자신도 그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강현재가 도아영에게 보이는 태도, 그리고 오늘 그가 했던 말인 ‘계모는 역시 계모일 뿐'이라는 말은 지난 6년이 마치 고용 관계와 같았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그녀의 좋고 나쁨은 아이들에게 달려 있고 그녀의 책임은 오로지 아이들을 돌보는 것뿐인 것 같았다.

아이들이 잘하면 그녀는 현명한 아내이고 아이들에게 작은 문제라도 생기면 책임을 회피하는 계모가 되는 것이다.

그녀가 아무리 완벽하게 해내도 도아영이라는 친엄마의 신분을 이길 수 없었다.

도아영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말이다.

밤 9시 30분.

“엄마, 저 이제 괜찮아요. 집에 가요.”

강이준은 수액을 다 맞고 병원에 더 이상 있고 싶어 하지 않았다.

허인하는 잠깐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래, 그럼 엄마가 퇴원 수속 밟으러 갈게. 너랑 누나는 병실에서 나가면 안 돼. 알았지?”

“네네!”

허인하는 불안한 마음에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뒤를 돌아보았다.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강현재는 도우미 하나 보내주지 않았기에 아이들이 병원에서 길이라도 잃을까 봐 조바심이 났던 것이다.

결국 병실 문을 나서자마자 간호사에게 잠시 아이들을 부탁했다.

퇴원 수속을 마치고 난 뒤, 그녀는 바로 택시를 잡아 집으로 향했다.

...

강 씨 저택은 대낮처럼 환하게 불이 켜져 있었고 대문 앞에는 고급 승용차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그제야 강현재가 친구들을 초대했다는 사실이 문득 떠올랐다. 아마도 집에서 모임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엄마, 저 차 엄청 비싸죠?”

강이준이 차 한 대를 가리키며 눈을 반짝였다.

허인하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

“그냥 그래.”

그녀의 기준에는 정말 평범한 차들이었다.

예전에 그녀가 타던 차는 눈 감고 아무거나 골라도 저기 있는 차들을 전부 합친 것보다 훨씬 비쌌다.

두 아이와 함께 집 안으로 들어선 허인하는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넋을 잃고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가슴을 거쳐 뇌까지 웅 하는 소리가 울리는 듯했다.

집에는 사람들이 가득했고 흥겨운 만찬을 즐기고 있었다.

문은 방음이 잘 돼서 문을 열고 나서야 사람들의 환호성과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키스해! 키스해!”

“강 대표,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아영 여사, 아이들도 저렇게 큰데 뭘 부끄러워하는 거야?”

사람들은 신이 나서 떠들고 웃느라 현관에 누가 들어왔는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하지만 가정부들은 알아차리고 허인하의 안색을 살피며 감히 말을 꺼내지 못했다.

사람들 사이에서 강현재와 도아영은 서로 마주 보고 서 있었다.

도아영은 웃으며 친구들을 나무랐다.

“그만 좀 놀려. 예전에는 현재와 약혼한 사이였지만 지금은 아니잖아.”

“예전에 안 좋은 일만 없었어도 지금쯤 얼마나 행복했을까. 강 대표 회사 상장도 다시 축하하고 오랜 연인과 다시 만난 기념으로 뽀뽀해!”

강현재의 오랜 친구 임승호가 분위기를 띄웠다.

과거 이야기에 강현재는 자신을 감싸는 도아영을 바라봤다. 그녀는 늘 자신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녀에게 해준 게 없었다.

도아영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지난 일은 다 잊어. 지금 현재가 이렇게 성공했으니 그걸로 됐지 뭐.”

도아영의 말에 강현재는 죄책감에 휩싸여 도아영의 뺨으로 다가갔다.

“키스해! 키스해!”

주변 사람들은 더욱 열광하며 환호했고 특히 임승호가 가장 신이 나 있었다.

하지만 다른 오랜 친구는 미간을 찌푸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모두가 숨죽인 채 두 사람이 키스하는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기에 그 어느 때보다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

그만큼 주변이 조용해졌기에 허인하가 입을 여는 소리가 더욱 또렷하게 들렸다.

“재밌으세요?”

평온한 한마디였지만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심장을 철렁하게 만들었다.

강현재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뒷걸음질 치며 거리를 벌렸고 도아영 역시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허인하가 갑자기 돌아올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허인하의 마음은 갈기갈기 찢어지는 듯 아팠다.

‘만약 내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두 사람은 지금쯤 키스를 하고 있었겠지.’

강현재는 억지로 한다고 될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니 방금 도아영에게 다가가려 했던 것은 그의 진심에서 우러나온 행동이었을 것이다.

결국 그는 도아영을 여전히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달은 허인하는 숨쉬기조차 힘겨워졌다.

그녀는 홀로 아이들을 간호하고 있는데 그들은 곧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잊은 채 이곳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신나게 웃고 떠들며 저녁 식사를 즐기고 있었다.

강현재의 친구들은 허인하를 본 적이 있지만 몇 번 되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허인하가 공짜로 쌍둥이를 얻었고 내세울 것도 없이 평범한 집안 출신에 직업도 없는 가정주부일 뿐이며 그저 외모와 분위기가 뛰어날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예전에 제아시 최고의 귀공자였던 강현재의 눈에 들 수 있었겠는가?

하지만 이제 허인하는 엄연히 강씨 가문의 안주인이니, 그들의 행동은 예의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임승호가 농담처럼 말을 건넸다.

“형수님 오셨네요? 애들은 병원에 있다고 들었는데...”

허인하는 입꼬리를 올리며 가볍게 웃고는 강현재와 도아영 쪽을 훑어보았다.

“맞아요, 저는 병원에 있었지요.”

‘그래서 너희들은 지금 뭐 하고 있는 거니?’

허인하의 말에 주변 사람들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강이연은 못마땅한 듯 쏘아붙였다.

“아빠, 친구들하고 잠깐 인사만 하고 병원에 바로 온다고 했잖아요!”

강이준 또한 삐죽거리며 불만을 토로했다.

“아빠는 내가 죽든 말든 상관없나 봐요. 내가 알레르기 때문에 죽을 뻔했는데, 나를 이렇게 만든 사람이랑 여기서 신나게 놀고 있다니. 아빠 진짜 싫어요!”

주변 사람들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들은 자세한 내막을 알지 못했다.

아이들의 말은 강현재의 뺨을 후려치는 것만큼이나 따갑게 느껴졌다.

사실 그는 아이들이 걱정되어 병원에 가려고 했다. 그래서 급히 집에서 모이는 것으로 계획을 변경했다. 이렇게 하면 늦게라도 아이들의 갈아입을 옷을 가지고 병원으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친구들이 억지로 붙잡고 임승호가 또 도아영을 불러들이는 바람에 시간이 지체된 것이었다.

허인하는 거실에 모여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현재 씨의 소중한 친구분들이시니, 이렇게 우리 집에 귀한 발걸음을 해주신 건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부디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주셨으면 좋겠네요. 도아영 씨는 저와 현재 씨의 손님이니, 부디 결례되는 행동은 삼가주세요.”

노골적으로 염치없고 뻔뻔하다는 말을 돌려 하는 것이나 다름없었으니 누구라도 그 속뜻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꾹 다물었다.

허인하는 갑자기 도아영에게 날카로운 시선을 던지며 말했다.

“도아영 씨, 혹시 강현재가 유부남이라는 사실을 망각하신 건 아니겠죠?”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평소에는 온화하고 조용하며 무슨 말을 해도 웃어넘기던 허인하가 사람들 앞에서 이렇게까지 날카롭게 감정을 드러낼 줄은 말이다.

그렇다. 허인하는 작심하고 몰아세우고 있었다.

특히 어릴 적부터 강현재와 도아영과 함께 자라온 임승호의 눈에 도아영은 가냘프고 보호 본능을 자극하는 존재인 반면 허인하는 강하고 억센 여자였다.

그런데 이득을 보고도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화를 내다니.

도아영은 당황한 듯 어쩔 줄 몰라 하며 더듬거렸다.

“죄송해요, 저는...”

그때 강현재가 입을 열었다.

“당신 말이 너무 심하잖아!”

“내가 심하다고?”

허인하는 눈물을 글썽이며 울먹였다.

“나는 지금 병원에서 아픈 아이들 곁을 지키고 있는데 당신들은 집에서 뻔뻔하게 뽀뽀나 하고 있고. 염치라는 게 뭔지도 몰라?”

강현재는 분노에 찬 목소리로 윽박질렀다.

“그만해!”

주변은 삽시간에 정적에 휩싸였다.

허인하는 그의 고함 소리에 굳어버렸다.

눈앞에는 분노에 찬 강현재의 얼굴이, 곁눈으로는 구경거리가 났다는 듯 쳐다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귓가에는 엄마를 부르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그녀의 머릿속에는 결혼식 날 강현재가 그녀의 손을 잡고 했던 ‘허인하를 아내로 맞이하겠습니다’라고 했던 말이 스쳐 지나갔다.

6년간 온 마음을 다해 쏟아부은 노력은 무엇으로 돌아왔단 말인가?

돌아온 것은 강현재의 ‘계모'라는 말과 다른 사람들의 조롱이 섞인 ‘형수님'이라는 칭호뿐이었다.

그녀는 다양한 역할을 시도했지만 정작 허인하라는 이름으로 강현재의 감정을 바라보는 것을 잊고 있었다.

무언가가 마음속에서 조용히 부서지는 듯했다.

6년...

그녀는 이제 계모나 사모님이라는 역할에서 벗어나 허인하 자신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았다.

여자의 눈물은 너무나도 슬프고 아파 보였다. 허인하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나지막이 말했다.

“그래. 계속해.”

강현재는 심장이 꽉 막히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무의식적으로 허인하를 붙잡으려 했지만 그녀는 그의 손을 피했다.

그의 손은 허공에 멈춰 섰다.

강이연은 다급하게 그녀를 막아섰다.

“엄마 어디 가요? 저랑 동생도 데려가요.”

그제야 정신을 차린 강현재 또한 감정이 격해진 듯했다.

그는 강이준을 번쩍 안아 올리고 강이연의 손을 잡으며 다정하게 말했다.

“아빠가 너희 곁에 있을게.”

도아영은 아이들에게 다가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달랬다.

“엄마도 여기 있잖아. 걱정 마.”

그들의 다정한 모습은 허인하에게 이 집에는 자신이 없어도 아무 문제없다는 사실을 명확히 깨닫게 해주었다.

그들이야말로 완벽한 네 식구였고 그녀는 그저 불필요한 존재일 뿐이었다.

거실에서 유일하게 흥에 겨워 떠들지 않았던 양우진이 서둘러 일어나 허둥지둥 사과했다.

“형수님, 죄송합니다. 승호가 술에 너무 취해서 실언을 했습니다. 부디 너그럽게 용서해주세요.”

임승호가 반박하려 하자 양우진은 매서운 눈빛으로 그를 제지했다.

이미 충분히 사고를 쳤는데 더 치고 싶으냐는 눈빛이었다.

“저희는 먼저 가보겠습니다.”

양우진은 임승호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고 다른 사람들도 함께 따라나섰다.

차에 올라타자 임승호가 참지 못하고 항의했다.

“너 왜 그래? 왜 아영이를 깎아내리고 그 여자한테 사과하는 거야? 굴러들어온 돌멩이 주제에 존중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

양우진은 운전 기사에게 차를 출발시키라고 지시하며 말했다.

“네가 앞으로 또 그런 식으로 행동하면 우리 관계는 여기서 끝이다.”

임승호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너 왜 그...”

양우진은 말을 끊으며 말했다.

“허인하가 어떻든, 네 마음에 들든 안 들든 그 여자는 현재의 아내이고 법적인 아내야! 그런데 아영이가 저렇게 뻔뻔하게 남의 집에 눌러앉는 건 말이 안 되잖아? 게다가 키스하라고 부추기는 건 또 뭐야? 너 제정신이야?”

임승호는 자신이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평범한 여자가 현재 같은 남자와 결혼한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해야지! 게다가 복덩이 같은 아이들을 덤으로 얻었으니, 당연히 헌신해야 하는 거 아니야? 뭘 잘했다고 짜증을 내고 삐딱하게 구는 건데?”

“자기 자식도 아닌 아이들을 친자식처럼 아끼고 헌신적으로 키워낸 것만 봐도 존경받아 마땅해! 네 여동생이라면 그렇게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임승호는 흥분하며 소리쳤다.

“내 동생이 감히 새엄마 노릇을 하겠다고 나서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

말을 마친 임승호는 무언가 깨달은 듯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 시각, 강 씨 저택 대문 앞.

허인하는 집을 나서려다 현관 신발장 위에 놓인 휴대폰을 발견했다. 누군가 잊고 간 듯했다.

화면에는 사진첩이 켜져 있었는데 사진 속 강현재는 앳된 고등학생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강현재가 입고 있는 셔츠였다. 놀랍게도 도아영 또한 똑같은 디자인의 셔츠를 입고 있었다. 누가 봐도 커플룩이었다.

강현재는 그 셔츠를 아직까지 버리지 않고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었다. 비록 지금은 몸에 맞지 않아 입을 수 없지만 옷장에 잘 걸어두고 그 누구도 함부로 만지지 못하게 할 정도였다.

허인하는 그 셔츠가 강현재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는 것은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지만, 그의 어머니가 선물한 것이라고만 생각했을 뿐, 도아영과의 추억이 깃든 커플 아이템일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갑작스럽게 마주한 진실은 허인하의 머릿속을 하얗게 만들었다.

허인하는 결국 봇물 터지듯 눈물을 쏟아냈다. 심장이 찢어지는 듯 고통스러워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휘청거리며 집을 나섰다.

강현재는 그런 그녀를 묵묵히 바라보다 도아영에게 말했다.

“먼저 들어가서 쉬어.”

“엄마!”

강이연과 강이준은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허인하에게 달려갔다.

몇 걸음 채 떼지 못한 허인하는 강이연에게 붙잡혔다. 고개를 숙인 허인하의 뺨에는 눈물이 매달려 있었다.

“엄마는 오늘 친구 집에 갈 거야. 너희는 집에서 말 잘 듣고 있어야 해.”

“싫어요!”

강이준은 단호하게 거부했다.

강이연은 허인하를 감싸 안으며 소리쳤다.

“갈 거면 저 아줌마가 가야지 왜 엄마가 가야 해요? 엄마는 우리 엄마고 이 집안의 안주인이잖아요!”

허인하는 강이연의 말에 멍하니 굳어버렸다.

‘그래, 내가 이 집 안주인이었지...’

하지만 강현재는 계속해서 그녀의 자존심을 짓밟았다.

강현재는 딸의 외침을 듣고서야 아이들이 도아영을 얼마나 거부하고 허인하를 얼마나 따르는지 깨달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밤새도록 아이들을 돌보던 허인하의 헌신적인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지난 세월 동안 허인하가 보여준 노력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다.

“허인하.”

여자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의 부름에 그녀는 문득 훈련반에서 처음 만났던 그 날 아침을 떠올렸다.

허인하는 눈물을 더욱 참지 못하고 물었다.

“아직도 그 여자를 사랑해?”

강현재는 침묵했다.

허인하는 쓴웃음을 지었다.

곧 강현재가 입을 열었다.

“사랑하고 말고가 무슨 상관이야. 지금 내 아내는 당신이고 우리가 부부인데.”

허인하는 충격에 휩싸인 채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나한테는 그저 부부로서의 의무만 남아 있는 거야? 당신은...”

귀하게 자란 허인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산산이 부서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사람은 정말 극한의 상황에 몰리면 아무런 소리도 낼 수 없는가 보다.

이 순간 허인하는 다시 그에게 묻고 싶었다.

‘그럼 당신은 두 아이를 돌봐 줄 사람이 필요해서 나랑 결혼한 거야?’

그녀는 큰 꿈에서 깨어난 듯, 갑자기 자신이 정말 잘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부모님과 오빠의 간절한 만류를 외면한 채 고집을 부렸던 것이 잘못이었고, 결혼 후 자신의 꿈과 재능을 억누른 채 오로지 그의 행복만을 바라며 살아왔던 것이 잘못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깎아내리고 그의 눈에 ‘애나 보는 여자'로 비치도록 만든 것이 가장 큰 잘못이었다.

잘못된 선택들이 쌓여 지금의 비참한 현실을 만들어낸 것이다.

부모님은 자신을 옭아매는 굴레라고 생각했기에 그를 위해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하게도 부모님은 자신을 보호해주는 존재이자 자신의 존엄성을 지켜주는 존재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었다.

허인하는 봇물 터진 듯 하염없이 눈물을 쏟아냈다.

강현재는 당황한 표정으로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말했다.

“허인하, 너...”

그녀는 단 한 번도 이렇게 울었던 적이 없었다. 결혼한 6년 동안 단 한 번도...

문득 강현재는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을 느끼며 그녀를 안아주고 싶어졌다.

그때, 도아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허인하 씨, 제가 설명해 드릴게요. 가지 마세요...”

“아악!”

위층으로 올라가 쉬고 있던 도아영이 갑자기 나타나 다급하게 계단을 내려오다 발목을 삐끗했다.

비명 소리를 들은 강현재는 화들짝 놀라 뒤돌아보며 외쳤다.

“아영아!”

도아영은 발목을 심하게 삔 듯, 이마에 식은땀이 맺히며 고통스러워했다.

“못 움직이겠어... 너무 아파...”

강현재는 허인하를 뒤로한 채 도아영을 안아 들고 서둘러 집을 나섰다.

굉음을 내며 달려가는 차 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그 자리에 남겨진 허인하는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에 몸을 떨었다.

순간 모든 기대와 자기 위안은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

...

깊은 밤.

집에는 가정부들밖에 없었기에 허인하는 차마 아이들을 내버려 두고 떠날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졸음에 지친 두 아이를 재우고 있었다.

작은 침대 옆에서 허인하는 강이연의 작은 손을 쓰다듬었다. 딸이 자신을 감싸줄 때마다, 지난 세월이 헛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아이들에게 얽매이는 것이 어떤 것인지도 깨달았다.

갑자기 문이 열렸다.

강현재가 돌아온 것이었다.

허인하는 그를 흘끗 보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이들은 모두 잠들었어?”

“어.”

허인하는 자리에서 일어나 아이 방을 나섰다.

그리고 돌아서서 강현재를 똑바로 바라보며 차분하게 말했다.

“우리 얘기 좀 해.”

강현재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안방에서 허인하는 자리에 앉아 단호하게 말했다.

“우리 이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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