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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승에서 온 레지던트
저승에서 온 레지던트
Author: 데이지

1. 죽은 남자

Author: 데이지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05 00:37:55

비가 억지로 도시를 눌러 앉히는 밤이었다.

한서대학병원 응급센터 유리문은 자정이 가까워질수록 더 자주 열렸다. 

젖은 우산을 든 보호자, 술 냄새를 풍기는 환자, 배를 움켜쥔 노인, 

아이를 안은 젊은 부부가 번갈아 들어왔고, 문이 열릴 때마다 바깥의 찬 비 냄새가 소독약 냄새와 뒤섞였다. 

응급실 안쪽에서는 모니터 알람이 끊이지 않았고, 

간호사 스테이션에는 식다 못해 거의 물이 된 커피 두 잔이 주인 없이 놓여 있었다.

도화준은 그 커피 중 하나를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카페인 때문인지, 수면 부족 때문인지, 

아니면 조금 전 사망 선언을 끝낸 환자의 얼굴이 아직 눈앞에 남아 있어서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삼 일째 제대로 잔 시간이 없었다. 

낮에는 대형 교통사고 환자가 들어왔고, 밤에는 호흡곤란 환자와 흉통 환자가 연달아 밀려왔다. 

잠깐 앉으면 콜이 울렸고, 콜이 끝나면 차트가 쌓였다.

응급실은 사람을 조금씩 닳게 한다.

그걸 알면서도 도화준은 여기까지 왔다.

그리고 지금도 버티고 있었다.

“화준 선생님.”

옆에서 서민영이 차트를 넘기며 불렀다.

도화준은 고개를 들었다.

“네.”

민영은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퇴근 찍었으면 진짜 가요. 여기서 또 차트 보고 있지 말고.”

도화준은 손에 들고 있던 펜을 내려다봤다.

“이거 하나만 마저 쓰고요.”

“그 하나만이 보통 세 개로 늘어나잖아요.”

“이번엔 진짜 하나예요.”

민영은 믿지 않는 눈으로 그를 한 번 봤다. 

눈 밑이 피곤하게 내려앉아 있었지만, 시선은 여전히 또렷했다. 

그녀도 도화준만큼이나 지쳐 있었다. 머리카락은 대충 묶여 있었고, 

가운 소매에는 언제 묻었는지 모를 소독약 자국이 희미했다. 

그래도 환자 이름을 부를 때나 보호자를 볼 때의 목소리는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그 점이 도화준은 오래전부터 조금 신기했다.

지친 사람인데도, 끝까지 사람을 놓지 않는 느낌.

민영은 그를 보며 낮게 말했다.

“진짜 위험해 보여요. 운전해서 가는 거죠?”

“네. 집 멀지 않아요.”

“멀지 않아도 졸면 똑같아요.”

“알아요.”

“알면 바로 가요. 차트는 제가 확인할게요.”

도화준은 잠시 그녀를 바라봤다.

고맙다고 말해야 했다. 그런데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응급실 사람들은 고마운 일을 너무 많이 주고받아서, 때로는 고맙다는 말이 더 어색해진다. 

민영도 그걸 아는지 더 재촉하지 않고 차트를 가져갔다.

“가요. 진짜.”

“네. 갈게요.”

도화준은 짧게 대답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리가 조금 휘청였다. 

민영이 그걸 봤는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택시 타요.”

“괜찮아요.”

“그 말 제일 못 믿겠는데.”

“정말 괜찮아요.”

민영은 무언가 더 말하려다 응급실 입구 쪽에서 울린 호출음에 고개를 돌렸다. 

구급대원이 들어오고 있었다. 다시 일이 시작되는 소리였다. 

그녀는 더 붙잡지 못하고 짧게 말했다.

“도착하면 단톡에라도 남겨요.”

“네.”

“진짜요.”

도화준은 희미하게 웃었다.

“알겠어요.”

그게 그날 밤, 도화준이 서민영에게 한 마지막 대답이었다.

병원 밖으로 나오자 비가 얼굴을 때렸다. 

새벽의 주차장은 형광등 불빛 아래 흐릿했고, 

바닥에는 물웅덩이가 불규칙하게 고여 있었다. 

도화준은 차 문을 열고 운전석에 앉았다. 차 안은 차갑고 조용했다. 

시동을 걸자 라디오가 자동으로 켜졌지만, 그는 바로 껐다.

고요해지자 피로가 더 선명해졌다.

핸들을 잡은 손이 무거웠다. 눈 안쪽이 뜨거웠다. 

민영의 말대로 택시를 탔어야 했나, 

하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지만 이미 차는 주차장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비 오는 새벽 도로는 이상하게 비현실적이었다.

차량은 많지 않았다. 대신 간간이 지나가는 트럭의 불빛이 젖은 도로 위에서 길게 찢어졌고, 

신호등 색은 물 위에 번진 잉크처럼 흔들렸다. 

도화준은 창문에 맺힌 빗물을 보지 않으려고 앞만 봤다. 

손목시계는 새벽 두 시를 조금 넘기고 있었다.

그는 한 번 하품을 삼켰다.

‘졸면 안 된다.’

휴대폰이 짧게 울렸다.

응급의학과 단체방이었다.

[서민영] 도착하면 확인 남겨요.

[차태겸] 야 도화준 졸지 마라. 죽으면 내일 당직표 꼬인다.

[서민영] 말 좀 예쁘게 해.

[차태겸] 살아서 도착하라는 뜻이잖아.

도화준은 신호 대기 중에 화면을 봤다.

피곤한데도 아주 작게 웃음이 새었다. 

태겸은 늘 그런 식이었다. 걱정도 장난처럼 했다. 

민영은 늘 그 장난을 받아주면서도, 중요한 순간에는 이상할 만큼 정확하게 사람을 봤다.

도화준은 답장을 치려다 

신호가 바뀌자 휴대폰을 조수석에 내려놓았다.

‘도착해서 보내자.’

그렇게 생각했다.

그 생각이 마지막으로 또렷한 생각이었다.

고속도로 진입로에 들어서자 비가 더 거세졌다. 

와이퍼가 빠르게 움직였지만 앞유리는 금세 흐려졌다. 

차 안의 히터가 낮게 돌아갔고, 일정한 엔진 소리가 귀를 감쌌다. 

피로는 늘 이렇게 온다. 갑자기 덮치는 게 아니라, 

괜찮다고 생각하는 순간 아주 조용히 몸을 끌어내린다.

도화준은 눈을 한 번 감았다 떴다.

그러면 안 됐다.

그는 창문을 조금 열었다. 찬 비 냄새가 차 안으로 들어왔다. 

정신이 드는 듯했다. 그러나 몇 분 지나지 않아 눈앞의 불빛이 다시 번졌다. 

멀리 앞서가던 화물트럭의 후미등이 두 개였다가 네 개로 보였다가 다시 두 개가 되었다.

‘졸지 마.’

민영의 말이 떠올랐다.

도화준은 핸들을 고쳐 잡았다.

그 순간, 반대편 차선에서 달려오던 화물트럭 하나가 크게 흔들렸다. 

빗길에 미끄러진 건지, 차체가 비정상적으로 틀어지더니 중앙분리대 쪽으로 밀려왔다. 

도화준은 본능적으로 브레이크를 밟고 핸들을 꺾었다.

타이어가 젖은 도로 위에서 비명을 질렀다.

시간이 갑자기 길어졌다.

헤드라이트가 눈앞을 가득 채웠다. 

너무 밝아서, 오히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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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승에서 온 레지던트   34. 돌아오겠다는 말이 지닌 무게

    태겸은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공기를 보고 입술을 굳혔다. 그는 환자 이송팀을 따라가야 했지만, 잠시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민영이 도진을 보는 눈이 달라지고 있었다. 아주 미세하게, 그러나 분명히.그것이 태겸을 불안하게 했다.수술방 앞에서 보호자 설명을 마친 뒤, 민영은 한참 동안 돌아오지 못했다.박성재의 아내는 젖은 케이크 상자를 품에 안고 있었다. 구급대원이 챙겨준 것이라고 했다. 상자 옆면은 찌그러졌고, 리본은 피와 빗물로 젖어 있었다. 아내는 그것을 버리지 못하고 계속 품에 안았다.“오늘… 딸 생일이라서요.”그녀는 울면서 말했다.“퇴근길에 사 온다고 했는데…”민영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응급실에서 자주 보는 장면이었다. 사람은 늘 평범한 일을 하다가 죽음에 닿는다. 케이크를 사러 가다가, 퇴근하다가, 횡단보도를 건너다가, 잠깐 바람을 쐬러 나갔다가. 죽음은 특별한 장면에서만 오지 않는다.그래서 더 잔인하다.“수술 들어갔습니다.”민영은 조심스럽게 설명했다.“상태가 많이 위중해요. 출혈이 컸고, 응급실에서 심장이 한 번 멈췄습니다. 그래도 지금 다시 뛰고 있고, 수술팀이 계속 보고 있습니다.”아내는 케이크 상자를 더 세게 끌어안았다.“살 수 있나요?”민영은 그 질문 앞에서 늘 같은 무게를 느꼈다.확실히 말할 수 없는 것.그래도 말해야 하는 것.“지금은 최선을 다해 버티고 있어요.”그녀는 거짓말하지 않았다.“저희도 놓지 않을 겁니다.”아내는 무너져 울었다.민영은 잠시 그녀 곁에 있었다. 할 말은 많지 않았다. 대신 의자에 앉을 수 있게 도왔고, 물을 가져다주었고, 연락할 가족이 있는지 물었다. 설명이 끝나도 보호자를 바로 떠나지 않는 것. 그것은 민영이 자신도 모르게 지켜온 습관이었다.응급실로 돌아왔을 때, 새벽은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도진은 회복실에 있어야 했다.그러나 그는 응급실 한쪽 휠체어에 앉아 있었다. 이번엔 간호사와 함께 있었다. 적어도 혼자 움직이지는 않았다. 민영은 다가

  • 저승에서 온 레지던트   33. 지금은 살아 있다는 문장의 무게

    응급 개흉.그 단어는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지만 모두가 떠올렸다. 흉부를 열고, 심장을 직접 압박하고, 출혈을 잡는 마지막 선택. 성공 가능성은 높지 않다. 그러나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끝난다.민영은 환자의 얼굴을 보았다.딸.생일.젖은 케이크 상자.그녀는 숨을 짧게 들이마셨다.“준비해요.”태겸이 그녀를 봤다.“민영아.”“수술방 못 가면 여기서라도 해야 해.”외상외과 의사가 고개를 끄덕였다.“응급 개흉 준비합니다.”응급실이 다시 한 번 뒤집혔다.멸균포가 펼쳐지고, 기구가 준비되고, 추가 수혈이 연결됐다. 보호자들이 있던 쪽은 간호사들이 막았다. 누군가는 울음을 삼켰고, 누군가는 고개를 돌렸다. 응급실에서 생명을 붙잡는 장면은 때로 너무 잔인하다.도진은 휠체어 손잡이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이 몸은 움직이면 안 된다.하지만 저 환자는 가고 있다.그리고 민영은 그 앞에 서 있다.피 묻은 장갑을 낀 채, 두려움보다 먼저 손을 뻗는 사람.도진은 처음으로 그 장면을 보는 것이 불편했다. 민영이 다칠까 봐서인지, 실패했을 때 그녀가 무너질까 봐서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가슴 안쪽에서 심장이 너무 시끄럽게 뛰었다.태겸이 압박을 교대하며 외쳤다.“민영아, 네가 빠져. 외상외과가 들어왔어.”“나 보조할게.”“너 지금 손 떨려.”“안 떨어.”“떨고 있어...”민영은 대답하지 않았다.정말 떨리고 있었다. 환자 때문만은 아니었다. 도화준 사고 때의 피 냄새가 다시 올라왔다. 고속도로, 흉부 손상, 수술방, 보호자에게 전할 말. 다 겹쳤다.그때 도진이 말했다.“민영 선생님.”그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민영은 들었다.“손을 보십시오.”민영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손을 봤다.떨리고 있었다.도진이 낮게 말했다.“숨을 한 번 쉬십시오.”민영은 그를 바라봤다.그 짧은 순간, 응급실 소음이 조금 멀어졌다. 도진의 눈은 차가웠지만, 이상하게 흔들리지 않았다. 그 눈이 “지금 무너지지 말라”고 말하는 것

  • 저승에서 온 레지던트   32. 따님의 생일이라는 마지막 끈

    응급실 안의 움직임이 더 빨라졌다.환자의 보호자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그러나 구급대원이 가져온 휴대폰 화면에는 부재중 전화가 여러 개 떠 있었다. ‘여보’라고 저장된 이름이 반복해서 울리고 있었다. 민영은 그 화면을 보지 않으려고 했다. 지금은 먼저 숨을 열어야 했다.“민영아, 복부 안에 피 있어.”태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초음파 화면 속 검은 액체가 보였다.민영은 망설이지 않았다.“외상외과 콜. 수술방 바로 준비해달라고 해요. 수혈 프로토콜 시작합니다.”그녀는 왼쪽 흉부 쪽으로 이동했다. 바늘 감압 준비가 끝났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지만, 움직임은 정확했다. 늑골 사이 위치를 확인하고, 소독하고, 바늘을 밀어 넣는 순간 공기가 빠져나오는 소리가 들렸다.쉭~환자의 산소포화도가 조금 올랐다.“흉관 들어갑니다.”민영은 바로 다음 처치를 이어갔다. 절개, 기구, 튜브 삽입. 피 섞인 공기와 액체가 배액관으로 흘러나왔다.간호사가 양을 확인하며 소리쳤다.“초기 배액량 600 넘습니다!”태겸의 얼굴이 굳었다.“계속 나오면 수술방 가야 돼.”“어차피 복부 출혈도 있어. 바로 올려야 해.”민영은 환자 손목의 맥박을 확인했다.약하고 빨랐다.“박성재 씨, 들리면 눈 떠보세요. 지금 병원이에요. 저희가 보고 있어요.”환자의 눈꺼풀이 잠깐 떨렸다.그리고 아주 희미하게 말했다.“…딸…”민영의 손이 멈칫했다.“따님이요?”환자의 입술이 다시 움직였다.“…생일…”민영은 숨을 삼켰다.그 한마디가 응급실의 모든 소음 사이를 뚫고 들어왔다. 구급대원 가방 옆에 놓인 작은 종이 쇼핑백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비닐 안쪽으로 젖은 리본이 보였다.민영은 보지 않으려 했지만, 봐버렸다.케이크 상자였다.태겸도 그걸 봤다.“민영아.”“알아.”민영은 환자에게 다시 몸을 숙였다.“따님한테 가야죠. 그러니까 지금 버텨요.”환자의 눈가가 아주 희미하게 젖었다.그것이 눈물인지 빗물인지 피인지 알 수 없었다.모니터 알람이

  • 저승에서 온 레지던트   31. 트라우마 콜

    민영은 돌아오지 않았다.도진은 당직실 의자에 앉은 채 복도 쪽을 보고 있었다. 민영이 남기고 간 컵라면은 불어 있었다. 뚜껑은 반쯤 열려 있었고, 국물 위로 식은 기름이 얇게 떠 있었다. 조금 전 그녀가 웃으며 “다녀올게요”라고 말했을 때만 해도 방 안에는 아주 작은 온기가 남아 있었는데, 지금은 형광등 아래 오래 방치된 음식 냄새와 식은 공기만 남아 있었다.복도 끝에서 들렸던 웃음소리는 사라졌다.그러나 도진은 그것이 완전히 없어진 것이 아니라고 느꼈다. 누군가 이 병원의 바깥쪽을 손끝으로 긁고 있다. 아직 문을 열지는 않았지만, 이곳에 자신이 있다는 것을 알아챈 듯한 기척. 도진은 그 불쾌한 감각을 따라가려다 멈췄다.약속했다.혼자 움직이지 않겠다고.그 말이 이렇게 몸을 묶을 줄은 몰랐다. 저승에서의 명령과는 달랐다. 명령은 지키거나 어기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약속은 이상하게 사람의 얼굴을 함께 떠올리게 했다. 민영이 손목을 잡고 “이번엔 진짜 안 돼요”라고 말하던 얼굴. 태겸이 “너 또 움직이면 진짜 묶어버린다”고 하던 목소리.도진은 문밖으로 시선을 두었다.응급실 쪽 소음이 평소보다 거칠었다.침대 바퀴 소리, 간호사들의 뛰는 발소리, 보호자의 울음, 누군가 낮게 욕을 삼키는 소리. 그 사이에서 민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또렷하고 빠르게, 그러나 흔들리지 않게.“압박 준비해요. 기도 먼저 봐요.”그 목소리를 들은 순간 도진은 자신도 모르게 의자 손잡이를 잡았다.민영은 살아 있었다.다녀오겠다고 했으니 돌아올 것이다.그렇게 생각한 순간, 응급실 전체를 찢는 호출음이 울렸다.트라우마 콜. 트라우마 콜. 응급센터 외상구역 준비 바랍니다.도진은 눈을 들었다.트라우마.도화준의 기억이 그 단어를 열었다. 대형 외상. 교통사고, 추락, 압궤 손상, 다발성 출혈. 한 생명이 여러 방향에서 동시에 무너지는 순간. 응급실에서 가장 빠르게 움직여야 하는 시간.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가 다시 멈췄다.민영은 돌아오지

  • 저승에서 온 레지던트   30. 다녀올게요라는 말이 주는 돌아옴의 무게

    죽음의 냄새 때문은 아니다. 민영에게서는 죽음의 냄새가 나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다. 오래 버텨 닳은 사람의 피로, 소독약, 커피, 그리고 살아 있는 환자를 끝까지 놓지 않는 이상한 온기.그는 그 온기가 낯설어서 보고 있었다.“확인하게 됩니다.”“뭘요?”“민영 선생님이 무너지지 않았는지.”민영은 숨을 멈췄다.그 말은 너무 조용했다. 꾸미거나 떠보는 말이 아니었다. 그래서 더 당황스러웠다.“저 안 무너져요.”“그건 모릅니다.”“왜요?”“무너지는 사람들도 대부분 직전까지 괜찮다고 합니다.”민영은 대답하지 못했다.그 말은 이상하게 정확했다.환자도, 보호자도, 의사도 그랬다. 괜찮다고 말하다가 무너진다. 버틸 수 있다고 말하다가 주저앉는다. 자신도 여러 번 그랬을 것이다. 다만 아무도 그 순간을 그렇게 똑바로 보지 않았을 뿐.도진은 그녀가 말이 없자 낮게 덧붙였다.“아까 태겸이도 같은 말을 했습니다.”민영은 그제야 아주 작게 웃었다.“태겸이는 원래 잔소리가 많아요.”“걱정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맞아요.”민영은 시선을 내렸다.“오래 같이 일했으니까요.”도진은 그 말을 조용히 받아들였다.‘오래.’그 단어는 인간에게 무게가 있다.도진은 문득 자신에게는 그런 오래가 없다는 것을 느꼈다. 저승에서 보낸 시간은 길었지만, 누군가와 함께 쌓은 오래는 아니었다. 그는 지나가는 죽음을 봤고, 끝난 시간을 데려갔고, 남겨진 사람들의 울음을 스쳐 지나갔다. 머문 적은 없었다.그런데 지금은 멈춰 서 있었다.민영 앞에서.“화준 선생님.”민영이 조용히 불렀다.“네.”“진짜로 잠이 안 와요?”도진은 잠시 침묵했다.“잠드는 방법을 모르겠습니다.”민영의 눈빛이 흔들렸다.농담처럼 들릴 수도 있는 말이었다. 그러나 도진의 얼굴은 너무 진지했다. 사고 후 불면, 불안, 통증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말의 결이 달랐다.잠을 못 자는 사람이 아니라, 잠이라는 행위를 새로 배워야 하는 사람 같았

  • 저승에서 온 레지던트   29. 살아 있으려고 애쓰는 소리

    “너 말 잘한다.”“뭐가.”“죄책감은 나중에 와도 늦지 않다는 거.”민영은 잠시 멈췄다.“그냥… 지금 무너지면 아무것도 못 하니까.”“너한테도 해당되는 말이야.”민영은 대답하지 않았다.태겸은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화준이 사고, 네 탓 아니야.”“그 얘기 또 하려고?”“할 때 됐으니까.”“나 진짜 괜찮아.”“그 금지어 들으면 나 이제 혈압 오른다.”민영은 아주 작게 웃었다.“그럼 혈압 재봐.”“장난치지 말고.”태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민영은 그제야 그를 제대로 봤다.태겸은 평소처럼 농담을 섞고 있었지만, 눈은 진지했다. 그는 오래전부터 그녀를 이런 식으로 봤다. 너무 오래 버티고 있는지, 밥은 먹었는지, 손이 떨리는지, 웃는 척하는지.그 시선은 익숙했다.그래서 때로는 더 피하고 싶었다.“알아.”민영은 조용히 말했다.“내 탓 아닌 거 알아.”“아는 얼굴이 아닌데.”“그래도 알아.”태겸은 더 밀어붙이지 않았다. 대신 주머니에서 초콜릿 하나를 꺼내 그녀에게 던졌다.“먹어.”“나 애 아니야.”“애보다 말을 안 들으니까.”민영은 초콜릿을 받아 들고 피곤하게 웃었다.그 순간 회복실 쪽에서 도진이 두 사람을 보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민영은 웃음을 거두었다. 도진은 멀리서 조용히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질투 같은 건 아니었다. 아직 그에게 그런 감정이 있을 리 없다.그런데도 그의 시선이 묘하게 걸렸다.태겸도 그걸 느꼈는지 고개를 돌렸다.“또 보고 있네.”민영은 대답하지 않았다.도진은 눈을 피하지 않았다.그는 두 사람이 주고받는 초콜릿, 짧은 농담, 걱정 섞인 말투를 보고 있었다. 인간의 관계는 복잡했다. 민영과 태겸은 서로를 오래 알고 있었다. 그 안에는 편함도 있고, 걱정도 있고, 말하지 않는 감정도 있어 보였다.도진은 그것을 불편하다고 해야 할지, 낯설다고 해야 할지 몰랐다.다만 가슴 안쪽이 조금 조용하지 않았다.밤이 다시 내려앉았다.사실 병원 안에서는 낮과 밤의 구분이 희미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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