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고 측은 최소한 전체 재산의 50%는 상속돼야 한다고 봅니다. 특히 부부 공동재산의 경우, 원고 측은 이를 되찾을 권리가 있습니다.”“법의 존재 이유는 더 많은 사람들이 공정한 대우를 받도록 하는 데 있고, 그렇기에 법의 판단 또한 정의로워야 합니다.”민혁의 발언이 끝나자, 법정 안은 박수로 가득 찼다.이연과 나정은 이미 눈가가 붉어진 채, 주변에서 터져 나오는 목소리를 들었다.“하, 예전부터 그랬지. 남자가 성공하고 나서도 본처하고 끝까지 같이 가는 경우가 어디 있다고. 남자가 돈 좀 생기면 변하는 게 본성이야!”“이런 말도 안 되는 상속 제도는 도대체 누가 만든 거야? 내연녀 자식도 떳떳하게 상속받는다고? 그럼 우리 여성들의 권리는 어디서 보장받아?”“맞아. 결혼이라는 게 남자들한테는 아무런 구속도 안 되잖아. 결국 여자만 족쇄 차는 거지.”“이래서야 누가 결혼을 하겠어. 결혼율이 떨어지는 게 당연하지.”“...”분위기는 순식간에 원고 측으로 기울었다.도서라는 결국 참다못해 선글라스를 벗어 던졌다. 얼굴은 잔뜩 굳어 있었다.그럼에도 주성민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차분히 자리에서 일어났다.“원고 측 말씀, 사회적 도덕의 잣대에서 보면 충분히 일리가 있습니다. 저희 의뢰인의 처신이 도덕적으로 떳떳하지 못한 건 사실이지요.”“그러나 법은 도덕을 재단하는 도구가 아닙니다. 법은 그 자체로 지켜야 할 규범입니다.”성민의 시선이 곧장 판사석으로 향했다.“송호국 씨는 생전에 명확히 유언을 남겼습니다. 재산을 제 의뢰인과 아들에게 물려주겠다고요.”“게다가 아들은 송호국 씨의 친자입니다. 상속권이 있다는 건 명백한 사실이고, 어느 법조문을 살펴봐도 전혀 하자가 없습니다.”주변의 웅성거림이 잠시 가라앉았다. 성민은 끊김 없이 덧붙였다.“또한 원고 측이 주장하는 공동재산 문제에 대해서도, 저희는 전혀 이의가 없습니다. 오히려 원고 측이 원한다면 공동재산을 명확히 정리해 돌려주겠다는 입장입니다.”‘공동재산이라니... 웃기는 소리.’도서라
다음 날 아침, 예진과 민혁은 먼저 이연과 나정을 데리러 갔다가 함께 법원으로 향했다.피고 측 도서라와 그의 변호인은 개정 30분을 앞두고서야 여유 있게 모습을 드러냈다.예진은 민혁의 비서 자격으로 이연과 나정 곁에 앉았다.도서라는 커다란 선글라스를 낀 채, 마치 세상을 내려다보듯 오만한 태도를 숨기지 않았다.그가 선임한 변호사는 다름 아닌 주성민이었다.정하늘 사건 1심을 승소로 이끌며 이름을 떨친 성민은 최근 들어 명성이 부쩍 높아진 상태였다.돈을 아끼지 않는 도서라라면, 당연히 성민 같은 변호사를 데려왔을 터였다.예진은 맞은편에 앉은 성민을 보고도 크게 놀라지 않았다.성민 역시 시선을 마주치자, 예진에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예진도 예의 바르게 미소로 답했다.곧 재판이 시작되었다.민혁이 원고 측 대리인으로 먼저 일어나 발언을 이어갔다.“먼저 여기 계신 분들께 여쭤보고 싶습니다. 결혼... 다들 하셨습니까?”의외의 질문에 법정 안이 순간 술렁였다.방청석에 앉은 이들은 웅성거리며 서로의 상황을 주고받았다.결혼한 사람도, 이미 아이가 있는 사람도 있었다.재판부 쪽을 바라보니, 세 명의 판사 중 두 명은 남성, 한 명은 여성.겉모습만 봐도 가정을 가진 기혼자의 분위기가 느껴졌다.민혁은 멈추지 않고 다시 물었다.“그렇다면, 아이가 있으신 분들은요?”두 번째 질문에 법정 안 공기는 더 활기를 띠었다.민혁은 잠시 법정을 둘러보며 숨을 고르더니, 차분하지만 힘 있는 목소리로 이어갔다.“여기 계신 여성분들께 다시 한번 묻고 싶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남편과 함께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시작해, 돈을 벌기 위해 몸이 상할 만큼 일했고...”“결국 재산은 모았지만, 본인은 병약해져 집에서 요양만 하게 됐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세월이 흘러 안색은 수척해지고 젊음도 사라졌지만, 그래도 위안이 되는 건 남편의 사업이 번창했다는 것, 그리고 귀엽고 예쁜 딸이 곁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남편이 바람을 피웠습니다.”
결혼식은 대체로 무난히 끝났다.하지만 아린의 마음 한구석은 개운치 않았다.수년간 꿈꿔온 웨딩마치, 인생의 가장 빛나는 날이 될 줄 알았는데... 결국 예진의 이름 섞인 뒷말들로 얼룩진 것이다.신혼 첫날밤, 신혼집은 다름 아닌 윤제와 예진이 함께 살던 그 집이었다.하루 종일 이어진 피로 탓인지, 윤제는 밤이 깊어져도 별다른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아린은 샤워를 마치고 침대에 누워 윤제의 옆구리에 바짝 붙었다.윤제는 여전히 책을 들여다보고 있었고, 아린은 그의 팔을 끌어안으며 속삭였다.“오빠, 아직도 믿기지 않아. 우리가 진짜 결혼하다니... 이제 정말 한 가족이 된 거잖아.”윤제는 그제야 책을 덮고 아린을 끌어안았다.“그래, 오늘 하루 고생 많았지. 얼른 자자. 내일도 피곤할 거야.”윤제가 스탠드 쪽으로 손을 뻗자, 아린은 순간 몸을 일으켰다.“오빠, 사실 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윤제도 상체를 세우며 아린을 바라봤다.“우리 이제 부부고, 새로운 가정을 꾸렸잖아. 그런데 언제까지나 어머니랑 한집에 살 순 없잖아. 그래서...”아린은 눈치를 보듯 말을 흐렸다.윤제가 본가로 돌아가 도순희와 이안과 함께 지내길 내심 원한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러나 아린은 바보가 아니었다.며느리로서 도순희의 간섭을 받으며 살 바엔, 지금처럼 두 사람만의 집에서 가사도우미 도움을 받는 편이 훨씬 편안했다.윤제가 눈썹을 미세하게 찌푸렸다.“네 말은... 우리가 앞으로 여기서 계속 따로 살자는 거야?”아린은 서둘러 그의 팔을 끌어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아니, 오해하지 마. 나도 어머니가 싫어서 그러는 건 아니야. 근데 알잖아, 세대 차이도 있고...”“또 어머니는 연세도 있으신데, 우리 옆에 계시면 자꾸 신경 쓰셔야 하잖아. 차라리 우리가 따로 살면 어머니도 오히려 편하시지 않을까 해서.”윤제는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아린을 바라봤다.아린은 조심스레 말을 이어갔다.“솔직히 말하면, 그냥 오빠랑 단둘이 지내보고 싶어. 우리 둘, 여기까지 오
예진은 피식 웃으며 은주의 손을 잡아 끌어 다시 앉혔다.“내 말은 그게 아니야. 부씨 집안이라는 게 마치 불구덩이 같잖아. 나야 겨우겨우 기어 나왔는데, 어떤 사람은 젊은 나이에 스스로 뛰어들겠다니... 그게 참 안쓰럽단 말이지.”은주는 예진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톡 하고 찔렀다.“야, 너 제정신이야? 내연녀 걱정을 다 하고 있네. 내가 보기에, 너 지금 성인군자병 걸린 거야. 고쳐야 돼.”예진은 고개를 천천히 저으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나도 알아. 그래도 이제 난 새로운 삶을 시작했어. 부씨 집안과 얽힌 모든 건, 이제부턴 내 삶과는 아무 상관없어.”...같은 시각, 결혼식장은 분주해졌다.시간이 되자 사회자의 멘트와 함께 드디어 결혼식이 시작된 것이다.별다른 이벤트도 들러리 입장도 없었다.게다가 아린의 아버지 역시 해외 일정으로 참석하지 못해, 결국 신랑과 신부가 함께 입장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신랑, 신부 입장하겠습니다!”사회자의 외침에 맞춰, 아린은 윤제의 팔짱을 끼고 천천히 붉은 카펫 위를 걸었다.윤제의 얼굴에는 여유로운 미소가 번졌고, 아린은 의기양양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화동 복장으로 차려 입고 앞장선 이안은, 두 사람 앞에서 꽃잎을 흩날리며 깡충깡충 뛰고 있었다.따뜻한 음악이 흐르고, 곳곳에서 우레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식장 곳곳에서 들려오는 수군거리는 소리가 아린의 귀에 또렷이 꽂혔다.“내연녀 치고는 대단할 줄 알았는데... 막상 보니까 고씨 집안 딸이랑은 비교도 안 되네.”“그래? 신랑 전처 본 적 있어?”“아, 너는 H시에 나중에 와서 모르겠구나. 예전에 고씨 집안 잘나갈 땐, 예진이가 H시에서 알아주는 금수저였어. 성인식도 완전 성대하게 했지. 그때 나도 갔었거든.”“맞아, 고예진은 얼굴도 기품도 흠잡을 데가 없었어. 결혼한 뒤엔 집에만 틀어박혀 잘 안 보이더니, 집안 망하니까 흔적도 없어졌지만...”“그러게. 결국 남자는 꽃도 제대로 못 가꾸잖아. 그렇게 예쁜 아내 두고도
은주의 말에 예진은 걸음을 멈추고 곧장 은주를 바라봤다.“은주야,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네 진짜 마음은 뭐야? 영호 씨랑 같이 있는 게 그렇게 창피한 일이야?”“나...”은주는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눈가가 금세 붉어지면서, 당장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듯했다.“그런 뜻은 아니야. 그냥...”그러나 그 다음을 끝내 입 밖에 내지 못했다.예진은 오랜 친구를 잘 알고 있었다.은주는 결코 돈만 보고 사람을 고르는 타입이 아니었다.그랬다면 아예 영호와 사귀지도 않았을 것이다.다만 은주의 뼛속 깊은 자존심이 문제였다. 윤미에게 비웃음 당하는 꼴은, 절대로 참을 수 없는 성격이니까.예진은 작은 한숨을 내쉬며 진지하게 말했다.“네가 정말 영호 씨를 좋아한다면, 그냥 당당하게 인정해. 별 의미 없는 사람들 눈치 보다가 네 마음까지 망치면 안 되지.”은주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예진은 한층 더 부드럽게 말을 이어갔다.“영호 씨가 재벌 2세처럼 배경이 화려한 건 아닐 거야. 근데 영호 씨가 널 얼마나 진심으로 아끼는지, 다들 다 알잖아.”“요즘 같은 세상에 그렇게 마음 다해 사랑해주는 사람 만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줄 알아? 나라면 창피해하기는커녕, 오히려 자랑스러울 것 같아.”그 말을 듣고 은주는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알아, 예진아. 나도 알아. 근데 지금은... 영호 씨가 아직 화가 풀리지 않았잖아. 이러면 동창회도 같이 못 가겠지.”예진은 잔잔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꼭 그렇지도 않아. 시간하고 장소만 전해줘. 마지막에 어떻게 할지는 영호 씨가 스스로 선택할 거야.”...한편, 민혁은 준비해온 식재료를 모두 꺼내 정리하고 있었다.멀찍이서 예진과 은주가 다정히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보며, 민혁은 천천히 과일을 씻기 시작했다.여자들은 마음이 불편할 때면 꼭 절친에게 속내를 털어놓곤 한다.민혁 눈에는 지금 은주가 예진을 달래 주고 있는 듯 보였다.‘예진이 혹시 부윤제 결혼 소식 때문에
예진은 순간 멈칫하더니 헛기침을 두어 번 했다.“근데 은주야, 그게 진짜 영호 씨가 냉담한 거 맞아? 사실은 네가 먼저 연락 안 한 거 아니야?”예진은 은주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학창 시절 사귀던 남자친구와도, 은주는 늘 화가 나면 먼저 연락을 끊는 스타일이었다.은주는 허리에 손을 얹고 발끈했다.“내가 언제 안 했다 그래? 예영호는 아예 톡도 안 하고, 전화도 안 했어. 저번 데이트 끝나고 나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예진은 순간 말을 잃었다.‘이 정도면... 문제가 좀 심각한데.’“혹시 영호 씨가 경찰이라 바빠서 그럴 수도 있잖아. 근무가 워낙 불규칙하니까.”은주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단호하게 말했다.“아무리 바빠도 며칠에 한 번 톡 하나는 할 수 있지. 그건 핑계야.”예진은 굳이 영호 편을 들 생각은 없었지만, 불필요하게 싸움이 커지는 건 피하고 싶었다.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은주야, 나야 당연히 네 편이지. 근데 솔직히 말하면... 만약 내가 영호 씨 입장이었다면, 너랑 윤미가 나눈 그 얘기를 들었다면, 나도 오해했을 거야. 기분 상했을 수도 있고.”은주는 그 말에 눈길을 피했다.사실 본인도 잘못이 있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요 며칠 내내 마음이 뒤숭숭했다.‘솔직히 톡 한 번만 보내줘도, 내가 바로 받아줄 텐데...’‘근데 왜 끝까지 안 하는 거야.’예진은 은주의 불안한 표정을 눈치채고, 다시 차분히 말을 이어갔다.“생각해봐. 영호 씨도 이제 막 사회생활 시작했잖아. 월급이 많지도 않고, 집안 사정도 넉넉하지 않다는 거 너도 알잖아.”“근데 첫 데이트에서 용기 내서 원피스 사줬는데, 네 친구한테 비아냥이나 당하고...”“거기다 네가 그 친구한테 ‘그래서 남자친구 데리고 모임 나간다’는 식으로 말한 거, 그걸 옆에서 들었다고 생각해봐. 기분이 좋을 수 있을까?”예진의 말이 이어질수록, 은주는 점점 억울한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나도 알아, 내가 잘못한 게 있다는 거. 근데 너 알잖아. 나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