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제3화

Author: 주광
이 사람들과 같은 공간에 단 1분, 1초라도 더 있는 게 예진에겐 고통 그 자체였다.

하지만, 그녀가 목발을 짚고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병실을 나서려는 순간, 윤제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날아왔다.

“당신 진짜 이혼할 생각이면, 앞으로 이안이는 못 본다고 생각해.”

이혼 얘기를 먼저 꺼낸 쪽은 예진이었지만, 사실 먼저 마음이 떠났던 건 윤제였다.

그런 그가 마치 버려진 사람처럼 행동하며 아이를 볼모로 삼다니, 예진은 속으로 너무나 어이가 없었다.

‘진짜 웃긴다. 먼저 마음이 떠난 사람은... 당신이잖아.’

‘지금 와서 피해자인 척한다고?’

그녀는 돌아보지 않았다. 단지 잠시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안이 양육권은 당신이 가져요. 앞으로 나는... 이안이 엄마가 아니니까.”

그 말이 끝나자, 예진은 단호하게 병실을 떠났다.

뒤에서, 아린의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올라갔다.

그러다 곧,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오빠... 감정적으로 굴지 마. 예진 씨 저대로 그냥 가게 놔두면 안 돼. 얼른 따라가 봐.”

하지만 윤제는 이제 예진에게 단 1%의 관심도 없어 보였다.

“저 혼자 퍼붓고 나가는 걸 어떻게 해. 그냥 먹자.”

말을 마치고 자리에 앉은 윤제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다시 수저를 들었다.

도순희도 얼른 아린 앞에 삶은 달걀을 까서 건넸다.

“걱정하지 마, 잘 된 거야. 어차피 할 이혼이면 미룰 것 없지.”

이안도 아린에게 우유를 건네며 말했다.

“맞아, 고모. 엄마가 없으면... 고모가 계속 이안이 곁에 있어 줄 수 있잖아.”

아린은 애정을 담은 손길로 이안의 머리를 쓰다듬고, 우유를 조용히 마셨다.

...

병원 복도를 나선 예진은 코끝을 찌르는 소독약 냄새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하지만, 끝끝내 눈물은 떨어지지 않았다.

‘울면 지는 거야. 지금은... 일단 여기서 벗어나야 해.’

예진은 상처로 무뎌진 다리를 끌고, 텅 빈 머리로 목발을 짚어가며 혼잣말처럼 속삭였다.

“조용한 데 가서, 혼자 있고 싶어... 조금만, 나 자신을 좀 추슬러야 해.”

택시에 올라탄 예진은 겨우 정신을 가다듬고, 핸드폰을 꺼내 서은주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날 술을 마신 은주는 여전히 몽롱한 상태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누구...?]

예진의 떨리는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자, 순간 잠이 확 깨버린 은주는 바로 외투를 챙겨 입고 집을 나섰다.

...

예진이 짐을 다 챙겨 나올 무렵, 은주의 차가 집 앞에 도착해 멈췄다.

예진은 한 손에는 목발, 다른 한 손은 캐리어 손잡이를 쥐고 그림자처럼 문을 나서고 있었다.

은주는 뛰어 내려와 예진의 캐리어를 받아 들며 친구의 어깨를 붙잡았다.

“야, 너... 이게 무슨 꼴이야. 어디 아파? 왜 이렇게 초췌해?”

예진은 고개를 가볍게 저으며 말했다.

“나중에 말할게. 지금은... 여기서, 일단 벗어나고 싶어.”

은주는 예진을 부축해 조수석에 태운 뒤, 차에 올랐다.

그리고 그 후 10분 동안 예진이 털어놓은 어제와 오늘의 이야기를 들은 은주는, 말을 잇지 못하다가 결국 도로 한복판에서 급브레이크로 차를 세워버렸다.

“뭐?! 부윤제 그 개XX, 그리고 네 그 싹수없는 아들놈까지?! 야, 당장 병원으로 가자! 내가 다 엎어버릴 거야!”

예진은 깜짝 놀라 은주의 팔을 붙잡았다.

“야, 나 이제 이혼할 거야. 굳이 더럽게 끝낼 필요 없어.”

은주는 헉헉 숨을 고르며 분을 삭였다가, 한참을 뜸 들이다 다시 물었다.

“진짜야? 진짜 이혼할 거야?”

예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혼이 장난이겠어?”

그 말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녀의 마음은 처음으로 이렇게 조용하고 평온했다.

‘8년 동안 내가 쏟아부은 모든 정성과 시간이... 결국 그 사람들에게는 아무 의미도 아니었구나.’

‘그래도... 지금이라도 끝내서 다행이야.’

“은주야... 변호사 좀 소개해 줘. 제대로 된 사람으로.”

은주는 단번에 예진의 어깨를 딱 치며 말했다.

“당연하지. 내가 아는 이혼 전문 변호사 중에 제일 싸움 잘하는 사람으로 알아봐 줄게. 뺏길 거 1도 없어. 류아린 그 여우 같은 여자한테 절대 쉽게 넘겨주지 말자.”

예진은 몸이 다 낫지도 않은 상태로 갑자기 집을 나온 바람에, 당장 혼자서 살 집을 구하는 건 무리였다.

그래서 짐을 챙겨 은주의 집에서 당분간 머무르기로 했다.

...

그 시각, 병원에서는 이안과 아린 모두 정밀검사 결과 큰 이상이 없다는 진단이 나왔고, 윤제는 곧바로 퇴원 수속을 밟았다.

도순희는 윤제가 바쁘다며 이안과 아린을 부씨 가문의 본가로 데려갔다.

그리고 윤제는 마치 아무 일 없다는 듯 회사에서 걸려 온 전화를 받고 다시 일에 복귀했다.

그날 밤, 윤제는 거래처와 술자리를 갖고 꽤 많은 양의 술을 마셨다.

비틀비틀 집에 돌아온 윤제는 갑자기 위에 통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속이... 미친 듯이 쓰리네...’

평소 같았으면, 예진이 말없이 미리 준비해 둔 해장국이나 따뜻한 죽이 상에 놓여 있었을 텐데, 오늘은... 집 안이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

윤제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외쳤다.

“이모님, 예진이 좀 불러줘요. 속 좀 달래게 해장국 좀 끓여달라고 해줘요.”

그 말에, 주방 쪽에서 오미자가 조심스레 다가왔다.

“도련님... 사모님은 오늘 오전에 나가셨어요. 짐도 다 챙겨 가셨고요. 서랍에 있던 서류며 신분증까지 전부 챙겨 가셨어요.”

윤제는 오미자의 말을 듣고 잠시 멍해졌다. 이마 한가운데에 미세한 주름이 잡히며, 표정이 서서히 굳어졌다.

“하... 어디까지 가나 두고 보자고.”

그는 짜증 섞인 숨을 내쉬며 핸드폰을 꺼냈다.

그리고 예진이에게 톡으로 음성 메시지를 보냈다.

[적당히 하고 당장 돌아와. 계속 이런 식이면 나 진짜 화낼 거야.]

메시지를 보내자마자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낀 윤제는, 예진이 자신의 연락처를 차단했다는 사실을 그제야 눈치챘다.

윤제의 얼굴빛이 순식간에 싸늘해졌고, 눈엔 불쾌감이 서렸다.

그는 전화도 했지만, ‘연결할 수 없는 번호’ 라는 음성사서함의 안내 음성만 반복되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전화를 걸었지만, ‘현재 전화를 받을 수 없는 번호’ 라는 차가운 안내음만 되풀이됐다.

‘진짜 나랑 연락을 끊으려고? 진짜, 날 끓어?’

윤제는 이를 꽉 물고 오미자를 노려보았다.

“이모님도 한 번 해봐요. 전화해 보세요.”

오미자는 조심스럽게 핸드폰을 꺼내 예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 시각, 예진은 병원 진료실에서 상처 소독을 받고 있었다.

핸드폰이 진동했고, 화면에 ‘오미자 이모님’이라는 이름이 떴다.

‘뭐지... 내가 뭘 놓고 나왔나?’

예진은 아무 생각 없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사모님... 도련님이 술을 너무 많이 드셔서 속이 안 좋으시대요. 사모님이 끓여주신 해장국 찾으세요. 지금이라도 오시면...]

예진은 순간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해장국? 그걸 얼마나 싫어했는데...’

머릿속을 스치는 장면... 정성껏 끓인 해장국 앞에서 윤제가 했던 말.

“또 국이야? 제대로 밥 좀 없어?”

‘그땐... 정말 최선을 다했는데.’

‘지금 와서 그걸 내놓으라고? 이혼 통보까지 받고 나서?’

예진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속 아프면 병원으로 가라고 하세요. 국을 먹고 싶으면 요리사 부르시고요.”

“이모님, 저희... 이혼하기로 했어요. 그 사람 일, 이제 더는 제 일이 아니에요. 다신 저에게 전화하지 마세요.”

그 말을 끝으로 예진은 전화를 끊었다.

이번엔, 정말로 무언가를 정리한 듯한 얼굴이었다.

‘이제 정말 끝이야. 다시는, 돌아가지 않겠어.’

...

스피커폰으로 울리는 목소리는 한 단어, 한 문장도 빠짐없이 윤제의 귀에 꽂혔다.

예진의 마지막 말이 끝나자, 윤제의 얼굴은 순식간에 흙빛으로 굳어졌고 자기도 모르게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감히 나랑... 이혼해? 지금 누구 마음대로 끝내는 건데.’

옆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오미자는 직감적으로 위험을 느꼈다.

‘예전 같았으면 아무리 화가 나도 사모님은 늘 도련님 중심이었지.’

‘툭하면 돌아와 해장국을 끓이고, 심한 잔소리를 들어도 웃으며 참으셨어.’

‘그랬던 사모님이... 이제 정말 끝내려는 분위기인데...’

이렇게 생각한 오미자가 침을 한 번 꿀꺽 삼키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도련님... 그럼 제가 국 좀 끓여드릴까요?”

윤제는 이를 악물고 고개를 저었다.

위통 탓에 이마에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필요 없어요.”

그 말투는 더 이상 건드리면 안 될 정도로 날이 서 있었다.

하지만 오미자는 차마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조심히 물었다.

“도련님... 정말 사모님하고 이혼하시는 건가요...?”

윤제와 예진의 관계를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사람 중 하나가 오미자였다.

그 누구보다 윤제를 사랑했던 예진.

심지어 ‘고예진은 부윤제 없으면 숨도 못 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동안 부부가 다툰 적은 많았다.

예진이 종종 속상해하며 방에 들어가면, 윤제는 신경도 안 썼다. 하지만, 결국 언제나 예진이 먼저 나와 밥을 차리고, 아무 일 없던 듯 다시 예전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오매불망 윤제 도련님만 바라보던 사모님... 정말로 이혼을 원한다고?’

오미자의 질문에 윤제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리고 뭐든 물어뜯을 듯 이를 악물고 말했다.

“이혼? 그 사람이 감히 날 떠나겠다고? 그냥 또 감정적으로 구는 거야. 며칠 지나면 알아서 기어들어 오겠지.”

윤제는 말을 마치자마자 핸드폰을 들었다.

“고예진 명의로 된 카드 전부 정지시켜.”

‘돈이 끊기면, 과연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어디 한번 지켜보자.’

...

다음 날 아침.

예진은 평소처럼 조용히 눈을 떴다. 습관처럼 주방으로 가 조리대를 정리하고, 냉장고를 열어 아침 식사를 준비했다.

이틀 동안 제대로 먹지 못해 몸이 허전했기에, 몸에 좋은 재료로 정성껏 밥상을 차렸다.

얼마 후, 방에서 꾸물꾸물 나온 은주가 고개를 갸웃거리다 코를 킁킁거리더니 식탁 위를 보고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헐... 너 뭐야? 이건 거의 호텔 조식 뷔페 수준 아냐?”

상 위엔 따뜻한 미역국과 계란말이, 연어구이, 제철 채소 무침까지 놓여있었다.

예진은 잔잔한 미소로 말했다.

“습관이 남아 있는 건지, 손이 저절로 움직이더라고.”

‘그래도... 이제 나는...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나를 위해 밥을 차릴 거야.’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Comments (2)
goodnovel comment avatar
이호정
AM. 02:52
goodnovel comment avatar
이호정
2025. 12. 04. AM.
VIEW ALL COMMENTS

Latest chapter

  • 전남편도, 아들도 내 발밑에 매달렸다   제696화

    지금 분노와 실망이 뒤엉키면서 감정이 복받치자, 신용원은 다시 먼지털이를 움켜쥐고 세준을 향해 내리치려고 했다.“이 망할 자식. 내가 진작부터 말했지. 살고 싶으면 그런 일에는 손대지 말라고. 그런데도 넌 끝까지 말을 안 들었어. 내가...!”그 순간, 신용원의 가슴속에서 터질 듯한 날카로운 통증이 밀려왔다. 반사적으로 가슴을 움켜쥔 신용원은 힘이 풀리면서 소파에 주저앉아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목에 핏대를 세운 채 세준이 그 자리에 버티고 서 있자, 본능적으로 아들 앞을 가로막은 임보미는 신용원의 상태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아들한테 뭐라고 할 자격이 있어? 당신이 무능하지 않았다면, 애가 이런 비정상적인 방법을 선택했겠어?” “일이 이렇게 커졌으면 해결할 생각부터 해야지. 오히려 아들 탓이나 하고... 그러고도 남자라고 할 수 있어?”분노로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한 채, 가슴을 부여잡은 신용원은 소파에 앉아 호흡을 가다듬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정신을 좀 차렸지만, 얼굴은 백지장처럼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신용원은 떨리는 손으로 세준과 임보미를 가리키면서 말했다.“그래, 당신은 끝까지 아들 편을 들겠다는 거지. 가장인 내가 아무리 말해도 들을 생각도 않더니 이제 진짜 큰일이 닥쳤어. 신씨 집안만 망하는 게 아니야!” “그런 일에 손댄 이상, 결국 너 자신도 같이 파멸하게 될 거야! 우리 신씨 가문은 끝장났어. 둘 다 나가. 내 앞에서 당장 꺼져!”이렇게까지 격노한 신용원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세준 자신도 잘못을 알고 있기에, 어금니를 꽉 깨문 채 어머니 임보미를 부축하고 문 쪽으로 향했다.“알았어요, 나가면 되잖아요. 나도 진작부터 이 집에 있고 싶지 않았거든요!” “엄마, 우리 가. 나중에 내가 돈 많이 벌어서, 다시는 그 인간들 눈치 안 보고 살게 해 줄게!”울어서 얼굴이 엉망이 된 임보미는 세준의 부축을 받으면서 천천히 집을 나섰다.민혁이 주도한 신씨 가문에 대한 압박은 실로 치명적이었다. 일이 터진 다음 날, 신씨 가

  • 전남편도, 아들도 내 발밑에 매달렸다   제695화

    “당신 미쳤어? 자기 아들 때리는 것 말고 할 줄 아는 게 뭐야? 집안의 가장이라는 남자가 밖에서는 아무 말도 못 하면서 집에 와서 아내하고 자식한테만 큰소리야? 그 잘난 능력을 왜 밖에서는 못 쓰는 건데?”임보미는 세준을 꼭 끌어안은 채 통곡하기 시작했다.“때릴 거면 나를 때려! 차라리 나를 때려 죽여! 다음 생에는 정신 똑바로 차리고, 당신처럼 이렇게 무능한 남자하고는 절대로 같이 안 살 거야!”임보미를 껴안고 있던 세준도 눈시울을 붉혔다.“엄마, 일어나.”집안이 아수라장이 된 모습을 바라보던 신용원은 결국 들고 있던 먼지털이를 힘없이 바닥에 떨어뜨렸다.그는 허탈한 얼굴로 다시 소파에 앉았다. 늘 엄격하던 표정은 완전히 무너졌고, 눈가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우리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다고... 몇 대에 걸쳐서 내 평생을 바쳐서 겨우 일군 우리 집안이 이렇게 하루아침에 무너질 줄이야. 결국 다 내 손에서 끝나 버렸어. 내가 나중에 조상들 얼굴을 어떻게 보겠어...”그 말을 듣자, 임보미는 더 크게 울음을 터뜨렸다.세준은 대충 무슨 일인지 짐작이 갔다.‘언젠가는 서민혁이 신씨 가문까지 파고들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그는 줄곧 이렇게 생각해 왔다.‘외삼촌 체면도 있는 데다가, 서씨 가문이 원래 이렇게까지 독하게 굴지는 않았잖아. 설령 알게 되더라도, 서씨 가문의 원칙상 그렇게까지 몰아붙이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하지만 민혁과 서중국은 전혀 다른 사람이다. 특히 민혁은 한 번 결단을 내리면 망설임 없이 밀어붙이는 성격이다.이번에는 더더욱 그랬다. 신씨 가문의 모든 퇴로를 완전히 막아 버린 결과, 신씨 가문 전체가 하룻밤 사이에 붕괴되면서 막대한 빚더미에 올라앉게 되었다.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 모든 이야기를 알게 된 세준은 분노로 이를 갈았다.지금 눈앞에서 부모가 이렇게 처참하게 우는 모습을 보자, 분노가 더욱 치밀어 올라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조상들이 몇 대에 걸쳐서 일군 게 뭐가 대단해요? 결국 다른 사람의

  • 전남편도, 아들도 내 발밑에 매달렸다   제694화

    사실 그 일 이후로 신용원은 세준에게 단 한 통의 전화도 걸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친아들인데,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마주해야 할지 자신도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하지만 지금 분노가 극에 달한 신용원은 이가 부서질 정도로 어금니를 악물었다.[너 이 나쁜 새끼, 잘 들어. 네 외삼촌이 뒤를 봐준다고 해서 뭐든지 할 수 있을 거라 착각하지 마.] [마지막으로 말하겠다. 지금 당장 집으로 돌아와! 그렇지 않으면, 네 외삼촌에게 직접 사람을 내놓으라고 할 테니까!”세준은 부모는 두렵지 않았지만 외삼촌만큼은 달랐다. 몇몇 일들은 여전히 외삼촌의 손을 거쳐야 했기 때문이다.마음속으로는 집에 가는 게 죽기보다 싫었기에, 그는 이를 악문 채 핸드폰을 바닥에 내던졌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도 모두 놀라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전화를 끊자마자, 신용원은 곧바로 임보미에게 삿대질을 하며 소리쳤다.“다 당신 오빠가 이렇게 만든 거야. 아들놈을 저렇게까지 버릇없게 만들어 놨는데 아직도 모르겠어? 저 자식은 이제 겁이라는 게 없어. 만약 정말로 큰 사고라도 쳤다가는, 신씨 가문 전체가 같이 끝장이 날 거야!”마음이 새카맣게 타 들어 가고 있던 임보미는 결국 분노가 솟구치면서 울음을 터뜨렸다.그녀는 신용원의 손을 거칠게 밀치면서 벌떡 일어섰다.“그게 무슨 말이야? 그동안 사업을 하면서 우리 오빠 덕을 얼마나 봤는데! 오빠가 아이를 좀 오냐오냐 해준 건 맞지만, 당신 같은 아빠보단 백 배는 나아!” “고작 프로젝트 하나 때문에 자기 아들까지 팔아 넘긴 사람이 누군데? 세준이가 당신한테 화가 나서 그런 짓을 한 거잖아. 그게 아니라면 어떻게 서씨 가문을 건드렸겠어!”“당신...!”신용원은 가슴을 부여잡은 채 떨리는 손으로 그녀를 가리켰지만, 임보미는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전혀 물러서지 않았다.세준이 집에 도착했을 때, 임보미와 신용원은 소파 양쪽 끝에 앉은 채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살벌한 분위기로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세준은 불만이 가득한 얼굴을 한 채 건들

  • 전남편도, 아들도 내 발밑에 매달렸다   제693화

    서중국은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너도 이미 마음속에 짐작 가는 사람이 있을 텐데, 굳이 나한테 물을 필요가 있어? 다만... 원상문은 네 고모부야.” “네 고모하고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사이고, 두 사람 사이의 감정도 늘 좋았지. 이 일을 끝까지 파헤쳤다가... 네 고모가 감당하지 못할까 봐 그게 걱정이야.”다시 의자 앞에 앉은 민혁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면서 물을 한 모금 마셨다.사실 민혁은 일찌감치 원상문을 의심하고 있었다.겉보기엔 가장 무해해 보이는 사람이 오히려 가장 큰 죄를 짓는 경우가 많은 법이니까.서중국이 민혁을 바라보며 말했다.“네 고모는 나한테는 하나뿐인 여동생이야. 고작 돈 좀 빼돌린 거잖아. 네 고모부가 돈을 원한다면, 그까짓 돈은 주면 돼.” “다 같은 가족인데, 눈 한 번 감으면 넘어갈 일 아니겠니? 꼭 끝까지 파헤쳐서 돌이킬 수 없게 만들 필요는 없잖아.”서씨 가문은 늘 ‘가화만사성’을 중시해 왔지만, 민혁의 생각은 달랐다.“작은아버지, 고모를 생각해서 하신 말씀인 건 압니다. 하지만 정말 고모를 위한다면, 지금이라도 멈추게 해야 합니다.” “지금은 공금을 빼돌렸지만, 이걸 눈감아 준다면 언젠가는 더 큰 범죄도 서슴지 않을 겁니다. 그때 가면 정말 손을 쓸 수가 없어요.”서중국은 민혁의 성격을 잘 알고 있다. 한 번 마음먹으면 좀처럼 물러서지 않는 황소 고집인 민혁이 이 얘기을 꺼냈다는 건, 대충 넘어갈 생각이 없다는 뜻이다.그건 곧, 이 일을 이렇게 어물쩍 넘길 생각이 전혀 없다는 의미였다.아무리 말려도 소용없다는 걸 깨닫자, 서중국은 고개를 저으면서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됐다. 어쨌든 잘못은 그쪽에 있으니까, 네가 뿌리째 뽑고 싶다면 그렇게 해. 이 회사는 원래 네 건데, 이제 네가 돌아왔으니 주인 노릇을 하는 것도 당연하지.”말을 마친 서중국은 자리에 누워 눈을 살짝 감으면서 잠든 척했다.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려던 민혁이, 문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걱정하지 마세요. 고

  • 전남편도, 아들도 내 발밑에 매달렸다   제692화

    말을 마치자마자, 분을 이기지 못한 서중국은 바로 전화를 끊었다.“참, 끼리끼리 논다더니... 그런 짓을 해 놓고도 염치없이 나한테 전화해서 사정을 해?”민혁은 씩 웃고는 물 한 잔을 따라 주었다.“이제 그만 화내세요. 신세준 쪽은 머지않아서 법의 심판을 받게 될 겁니다. 신씨 가문도 더 이상 버틸 여지가 없고요. 다만 지금 더 급한 문제는 따로 있습니다.”“무슨 일인데?”“최근에 회사 재무 상태를 다시 정리해 봤는데, 곳곳에 허점이 많았습니다. 내부에 공금을 빼돌리는 사람이 있는 것 같아요.”순간 표정이 굳어진 서중국이 손에 들고 있던 물컵을 내려놓고, 진지한 눈빛으로 민혁을 바라보았다.“이 일은 더 깊이 파고들지 말거라. 나도 다 알고 있거든.”민혁도 이미 의심이 가는 대상이 있었다. 공과 사를 철저하게 구분하던 서중국이 갑자기 더 파지 말라고 하는 이유도 짐작이 갔다.하지만 그저 눈감고 넘어갈 수는 없었다.“기왕에 몸도 많이 회복하셨으니까, 앞으로는 서 비서가 병원에 와서 직접 업무 보고를 드리게 하죠.”그 말을 남기고 민혁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서중국은 그제서야 다급해졌다.“이 못된 자식, 어디를 가겠다는 거야? 방금 그 말이 무슨 뜻이야? 이제 막 회복한 내게 벌써부터 일을 시키겠다는 거야?”민혁은 알고 있었다. 서중국에게는 상속 문제를 건드리면 항상 효과가 있다는 것을.그는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서 말했다.“어쩔 수 없죠. 저보고 회사 일을 깊이 관여하지 말라고 하셨으니, 저도 손을 떼겠습니다. 애초부터 이 복잡한 상황을 떠맡고 싶지도 않았거든요.” “H시에 처리할 일도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데, 여기서 너무 오래 있었어요. 이제 남은 건 작은아버지가 직접 해결하셔야죠.”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서중국은 옆에 있던 베개를 그대로 집어 던졌다.“너 이 못된 자식, 배은망덕한 놈! 네 아빠가 남긴 회사를 내가 그동안 고생해서 지켜 왔는데, 내가 이 지경이 된 지금 와서 손 털고 나가겠다고? 내가 널 괜히 아꼈어!”민혁은

  • 전남편도, 아들도 내 발밑에 매달렸다   제691화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지시하겠습니다. 그런데 부회장님 신변의 안전에 꼭 유의하셔야 합니다. 경호원을 붙여 드리는 게 어떨까요?”민혁은 피식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괜찮습니다. 저는 정말 아무 일도 없어요. 그렇게까지 호들갑을 떨 필요는 없습니다. 그 정도의 파문을 일으킬 힘이 신씨 가문에는 없거든요.”서일그룹에서 발표한 지시는, 업계에서 신씨 가문을 사실상 퇴출시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불과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신씨 가문과 맺고 있던 모든 협력 관계가 일제히 해지되었다. 자금 흐름마저 끊기면서, 회사는 곧바로 파산 위기로 내몰렸다.신용원과 임보미는 오전 내내 정신없이 뛰어다녀야 했다. 회사가 무너져 내릴 위기에 처하자, 분노를 참지 못한 신용원이 책상을 내리치며 소리쳤다.“서씨 가문이 너무 심한 거 아니야? 처음에 우리 아들을 때린 것도 그쪽이었고, 화해하자고 하면서 이렇게 큰 프로젝트까지 줬잖아? 그런데 이제 와서 이러다니, 이건 완전 배신이야! 도의라는 게 전혀 없어!”임보미는 눈가가 붉어질 정도로 다급해졌다.“지금 와서 그런 말이 무슨 소용이야. 서씨 가문이 정말 마음먹고 우리를 정리하려고 나섰다면, 우리하고 화해를 안 했더라도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을 거야.” “그나마 화해하고 프로젝트까지 준 걸 보면 우리 체면을 세워준 거야. 우리가 뭔가 실수해서 또 분노하게 만든 건 아닐까?”이렇게 생각한 신용원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지금 당장 서씨 가문에 전화해서 확실히 따져야겠어.”신용원이 서중국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었을 때, 서중국은 병원에서 민혁이 가져온 점심을 먹고 있었다.이미 사건의 전후를 파악한 민혁이 병원에 들러서 서중국에게 모두 설명했기 때문에, 서중국은 전후 사정을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신용원의 전화라는 걸 확인한 서중국이 핸드폰을 민혁 앞에 흔들어 보였다.“봐라, 봐. 이런 상황에서도 전화할 염치는 있네.”입술을 삐죽거리면서 목을 가다듬은 서중국은, 일부러 딱딱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신 회장님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