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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Author: 주광
“야... 설마 결혼하고 몇 년 동안, 매일 이렇게 아침밥 차린 건 아니지?”

은주의 말에 예진은 민망하게 웃었다.

“부윤제 위가 안 좋잖아. 입맛도 까다롭고... 그래서 요리 수업도 몇 달 다니고, 매일 메뉴 바꿔가면서 해다 바쳤지, 뭐.”

‘그땐... 잘해주면 언젠간 마음 돌리겠지 싶었어.’

‘하지만, 사람 마음은... 그런 게 아니더라.’

은주는 입을 삐죽 내밀며 고개를 저었다.

“하... 진짜 부윤제 그 개XX는 전생에 나라를 몇 개는 구했나 보다. 우리 예진이가 매일 아침상까지 차려줬는데...”

예진이 맞은편에 앉자 두 사람은 조용히 아침을 먹기 시작했다.

잠시 후, 은주가 핸드폰을 꺼내 예진에게 명함 하나를 툭 보내줬다.

“참, 변호사 일은 내가 알아봤어.”

예진이 받은 명함 위엔 ‘서민혁 변호사’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서민혁? 이 이름, 어디서 많이 들어봤는데?”

은주는 달걀부침 하나를 입에 넣으며 말했다.

“우리 사촌 오빠야. 너보다 두 학번 위였을 거야. 진대영 교수님 제자였지, 아마? 너도 교수님 수업 들었잖아. 기억 안 나?”

그 말을 듣자 예진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맞아... 대학교 때 법대에서 서민혁 선배 이름 모르는 사람이 없었지.’

‘뛰어난 성적으로 항상 상위권에 있었고, 얼굴까지 잘생겨서 학교 안팎에서 인기가 많았던 그 인물...’

‘교수님이 특히 아끼던 제자이기도 했지.’

‘졸업하자마자 바로 사법시험 붙었다는 소문도 있었고, 법원에서 일하라는 제안도 거절하고 자기 로펌 차렸다는 말도 들었는데.’

“원래는 너한테 다른 변호사 붙이려고 했거든? 근데 어제 오빠한테 네 사정 말했더니, 오빠가 직접 맡겠다고 하더라. 완전 바쁜 사람인데도 말이야.”

은주는 마지막으로 찐빵 하나를 입에 욱여넣더니 시간을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튼, 너 일단 민혁 오빠랑 연락해서 만나서 얘기 잘 해봐. 나는 출근해야 해서 이만.”

“응, 조심해서 다녀와.”

은주가 나가고 난 뒤, 예진은 서민혁에게 조심스럽게 메시지를 보냈다.

[서 변호사님, 안녕하세요. 은주 친구 고예진입니다. 오늘 혹시 시간 되시면 뵙고 상담하고 싶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답장이 도착했다.

[그럼 오늘 점심시간에 루미에르에서 뵐 수 있을까요?]

예진은 잠시 핸드폰을 바라보다가, 곧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장을 보냈다.

[네, 그때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제... 진짜 시작이야.’

‘이번엔, 누구한테도 휘둘리지 않을 거야.’

...

예진은 과일을 사러 나갔다가 카드가 정지됐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계산대 앞에서 ‘승인 거절'이라는 말이 들리는 순간, 예진은 피식 웃었다.

‘그래, 올 게 왔네.’

‘이걸로 부윤제가 뭘 원하는지, 너무도 뻔하다.’

‘이쯤 되면 내가 굴복하고, 전화를 걸어서, 미안하다고 울며 빌 줄 알았겠지.’

‘부윤제, 당신은 아직도 날 잘 안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난... 이미 준비 다 해놨어.’

예진은 아무 말 없이 다른 카드로 결제했다.

다른 통장, 다른 카드, 이혼을 입 밖에 내기 전부터 이미 만반의 준비를 다 해 둔 상태였다.

과일 봉지를 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막 건물 입구에 도착했을 때, 핸드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이안이 어머니시죠? 지금 좀 와주실 수 있나요?]

유치원 선생님의 목소리는 다급했다.

[이안이가 다른 아이랑 놀다가 상처 부위를 건드렸는지... 계속 울고 있어요. 통증이 심한가 봐요.]

그 말을 들은 순간, 예진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아무리... 그래도 아이가 다쳤다는데...’

발걸음이 저절로 택시 쪽으로 향했다.

하지만, 어제 병원에서 아린의 품에 안겨 ‘고모가 엄마였으면 좋겠다’라는 말과 함께 환하게 웃던 이안의 얼굴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 자리에서 예진의 발이 딱 멈췄다.

[이안이 어머니, 듣고 계세요?]

선생님의 목소리에 정신이 돌아온 예진은 이를 꾹 깨물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선생님, 죄송하지만, 저... 이안이 아버지랑 이혼했습니다. 앞으로 아이 일로 저한테 연락하지 마세요.”

그 말을 들은 선생님은 순간 얼어붙었다.

전화를 듣고 있는 이안을 보며 안쓰럽게 입을 열었다.

[이안아... 엄마랑 통화해 볼래?]

이안은 울다 지친 얼굴로 전화를 받아서 들었다.

그리고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 빨리 와. 나 병원 가야 해. 상처 터졌단 말이야.]

그 말투는 어김없이 명령조였다.

예진은 그 말투가 낯설지 않았고, 오히려 너무 익숙했다.

‘그래... 내 아들... 항상 이렇게 말했지.’

예진은 핸드폰을 귀에서 떼었다. 잠시, 말없이 눈을 감았다.

예전엔 이안에게 감기 기운만 있어도 예진은 모든 일을 제쳐두고 유치원으로 달려갔다. 하물며 머리카락 하나만 빠져도 걱정할 정도였다.

그렇게 몇 년간 모든 것을 쏟아부은지라, 이안은 당연하게 예진을 ‘엄마’가 아닌 ‘부리는 사람’쯤으로 여기게 되었다.

‘그런데 이제... 그럴 필요 없어.’

‘아들은 날 원하지도 않는데, 왜 내가 또 달려가야 하지?’

예진은 수화기 너머, 울상 짓는 이안의 목소리를 애써 무시하며 조용하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이안아, 어제 내가 뭐라고 했는지 잊었니? 나는 더 이상 네 엄마가 아니야. 앞으로 나한테 전화하지 마.”

그리고, 예진은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전화를 끊었다.

...

한편, 이안은 핸드폰을 든 채 그대로 굳어버렸다.

‘엄마가... 전화를 끊었어? 진짜... 안 올 거야?’

이안의 머릿속은 온통 혼란이었다. 늘 자신이 아프면 가장 먼저 달려오던 엄마, 조금만 찡찡대도 손부터 잡아주던 사람이 오늘은 너무도 차가웠다.

‘그냥... 화나서 그런 거겠지?’

불안한 마음에 이안은 곧바로 윤제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 시각, 회의실.

윤제는 프레젠테이션 도중 전화를 받고 즉시 회의를 중단한 뒤 사무실로 돌아왔다.

사내 전화기로 예진의 번호를 눌렀다.

신호음이 길게 울리고, 예진이 받자마자 윤제는 다짜고짜 말했다.

“이안이가 다쳤어. 상처 부위가 다시 벌어졌다고. 당장 유치원으로 가서 병원에 데려가.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예진은 막 씻은 과일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비웃듯 웃음을 흘렸다.

[참 속 편하네요. 필요할 땐 부르고, 필요 없을 땐 밀어내고. 분명히 말했을 텐데요? 앞으로 당신들이 무슨 일을 하든, 나하고는 상관없어요. 나는 이제 이안이 엄마 아니에요.]

그 말에 윤제는 순간 이성을 잃었다. 탁자를 주먹으로 세게 내려치며 외쳤다.

“고예진! 너 진짜 너무한다. 아무리 이혼한다고 해도 이안이는 네 아들이야! 애한테까지 이러는 건 아니지!”

하지만 예진은 서늘한 어조로 말했다.

[부윤제 씨, 그 말... 당신 어머니가 이안이를 데려가겠다고 했을 때 했어야죠. 그땐 조용하더니, 지금 와서야 ‘내 아들’이라고 해요?”

‘당신들은 나를 배제하면서 엄마 노릇은 계속하라고 하고... 이제 더는 안 해.’

[그건 이안이가 먼저 말한 거예요. 자기 입으로 ‘엄마가 싫다’ 고 했죠. 난 그냥 그 아이의 바람을 들어준 것뿐이에요. 그리고 이혼 서류 보내기 전까지... 당신도, 부씨 집안 그 누구도 나한테 연락하지 마요.]

예진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전화를 단칼에 끊었다.

‘이제야... 정말 끝이 보인다.’

‘그래, 고예진. 이제 진짜 너를 위해 살아야 할 때야.’

...

윤제는 예진이 그런 차가운 말투로 자신에게 말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는 순간 얼어붙은 듯 멍하니 서 있다가, 한참이나 지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입술이 파랗게 질린 만큼 얼굴빛도 하얗게 질렸다.

‘대체 왜 이렇게까지... 뭐가 그렇게 못마땅한 건데.’

알 수 없는 불안감과 초조함이 윤제의 마음을 들쑤셨다. 온몸을 아무리 의자에 붙여도 자리에 가만히 앉아있을 수 없었다.

그가 예진과 싸운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하지만 예진이 이렇게까지 단호하게 행동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무엇보다 이안이 문제에 있어서는, 늘 마음 약해지던 예진이었다.

‘이번엔 정말, 끝장을 보겠다는 각오구나...’

이안의 상태는 심각했다.

그런데 하필 윤제는 중요한 회의 중이라 자리를 뜰 수 없었다.

결국, 마지못해 아직 회복 중인 아린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린은 부씨 가문의 본가 정원에서 물을 주며 한가롭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화가 난 예진이 아이를 데리러 가지 않을 거라는 소식을 들은 아린은, 전화를 끊자마자 홀로 미소를 지었다.

윤제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날카로운 피로감이, 그녀에겐 꽤 유쾌하게 들렸다.

그러고는 재빨리 도순희 이모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모, 이안이 유치원에서 상처가 벌어졌다고 전화가 왔어요. 윤제 오빠가 지금 회의 중이라 저더러 대신 데리러 가달래요.”

그 시각, 도순희는 쇼핑 중이었다. 말을 듣자마자 걸음을 멈췄다.

[뭐라고? 이안이 상태가 많이 안 좋아?]

“심하진 않은 거 같아요. 심각했으면 유치원에서 바로 병원에 보냈겠죠.”

그제야 도순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근데 너도 아직 몸 다 안 나았잖아. 윤제도 참... 어떻게 너한테 그런 부탁을 한다니? 이안이 에미라는 고예진은 도대체 뭐 하는 X이야? 꼭두각시야 뭐야?]

아린은 입꼬리를 살짝 말아 올렸다. 차가운 미소였지만, 목소리엔 그늘 한 점 없는 걱정이 묻어났다.

“이모... 제 마음이 괜히 불편해서요. 혹시 어제 일 때문에 예진 씨가 화가 나서, 오빠랑 다툰 건 아닐까 싶어요.”

“그래서... 이안이 데리러 가는 것도 일부러 안 나서는 건가... 싶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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