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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Author: 주광
아린을 대하는 이안의 목소리는 한없이 부드럽고, 살갑기까지 했다.

아린은 이안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고모 괜찮아, 이안이는 걱정 안 해도 돼.”

도순희는 깎아놓은 사과를 얇게 잘라 접시에 담으며 혀를 찼다.

“고예진 그것이 화근이지. 평소에는 누가 이안이를 데리러 가도 아무 일도 없었는데, 왜 하필 고예진이 유치원 갔던 날 불이 난다니? 고씨 가문 망하게 한 것도 모자라서, 이제 우리 부씨 가문까지 망치려는 거지.”

아린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이모, 이안이 듣고 있어요. 아이 앞에서 그런 말씀은 좀...”

하지만 이안은 사과 한 조각을 들어 아린 입에 쏙 넣어주며, 볼을 불룩하게 부풀렸다.

“고모, 할머니 말이 맞는 것 같아. 나도 엄마 싫어. 고모가 내 진짜 엄마였으면 좋겠어.”

아린은 잠시 놀란 듯했지만, 이내 다정한 눈빛으로 이안의 머리를 다시 쓰다듬었다.

이안은 그 손길에 기분이 좋은 듯, 고양이처럼 아린 손에 얼굴을 비볐다.

‘이안이는 단 한 번도... 나한테 그렇게 웃어준 적 없잖아...’

‘엄마는 네가 그렇게 웃을 수 있는 아이인 줄 몰랐어...’

예진의 가슴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으로 조여왔다.

그리고 문틈 사이로 보이는 모든 장면이, 귀에 박히는 모든 말들이 가슴을 도려내듯 아프게 했다.

도순희는 한숨을 깊이 내쉬었다.

“나는 처음부터 고씨 가문이랑 혼사 맺자는 거 반대했었다. 윤제 아버지가 약속만 안 했어도, 고예진 같은 여자는 우리 집 문턱을 평생 넘어보지도 못했을 거야.”

“지금 고씨 가문도 말 그대로 짐짝이야. 그런 고예진한테 계속 발목 잡히느니, 우리 윤제가 이참에 이혼이나 했으면 좋겠어.”

그 말을 들은 이안은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빠가 엄마랑 이혼하면, 고모가 아빠랑 결혼해 줄 수 있어? 그러면 고모가 진짜 내 엄마가 되는 거잖아.”

아린은 난처한 듯 미소를 지었다.

“이모, 그건 좀... 그런 얘기는...”

도순희는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뭐가 어때서? 나는 애초부터 고예진이 맘에 안 들었어. 아린아, 네가 우리 집 며느리가 된다면, 난 진짜 더 바랄 게 없다.”

아린은 수줍은 듯, 하지만 분명히 기분이 나쁘지 않은 듯한 미소를 지었다.

“이모... 그건 윤제 오빠가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달린 거죠.”

‘그래, 결국 이게 현실이야.’

‘내가 이안의 엄마였던 시간은, 이 사람들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었어.’

예진은 더 이상 숨을 쉴 수 없었다.

숨이 막히게 하는 건 목이 아니라, 마음이었다.

예진은 문틈 사이로 들여다보며, 그 안의 화기애애한 풍경에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저기 있는 아이가... 내가 목숨 걸고 낳은 내 아들이 맞기는 할까...’

눈물이 아무런 예고도 없이, 쏟아지듯 흘러내렸다.

그 순간, 음식을 사서 들고 오던 윤제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깼어? 왜 안 들어가고 있어?”

예진은 화들짝 놀라며 정신을 차렸고, 황급히 손등으로 얼굴을 훔친 뒤, 윤제를 돌아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내가 들어가면, 당신네 ‘화목한 가족극’에 방해될까 싶어서요.”

윤제의 얼굴이 단번에 굳어졌다.

“또 시작이네. 일어나자마자 왜 이렇게 감정적으로 굴어?”

예진의 말을 단칼에 잘라낸 윤제는 그녀를 지나쳐 병실 문을 밀고 들어갔다.

윤제를 본 이안은 반가운 듯 침대에서 펄쩍 뛰어내렸다.

하지만, 윤제 뒤로 보이는 예진을 본 순간, 그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도순희 역시 얼굴이 굳어졌고, 순간 방 안의 공기는 얼어붙은 듯 가라앉았다.

이를 눈치챈 아린이 몸을 일으키려 하자, 윤제가 재빠르게 다가가 그녀를 다시 눕히며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일어나지 마. 상처 벌어지면 어쩌려고 그래.”

아린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예진 씨, 어서 들어와 앉아도 돼.”

예진은 조용히 목발을 짚고 병실 안으로 들어섰다.

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자기 남편이 다른 여자를 조심스럽게 챙기고, 자신은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하는 것이었다.

‘저 사람이 손을 잡아줘야 할 사람은 나잖아...’

‘왜 내가 다리에 깁스까지 하고, 아직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데...’

“엄마 여기 왜 와? 고모 다쳤잖아. 고모는 지금 쉬어야 해.”

이안의 말은 차갑기까지 했다.

‘내가 다친 건 아무 상관도 없다는 건가...’

‘나는... 이 집에서 도대체 어떤 존재인가?’

‘아린이는 손만 다쳤는데, 분더 크게 다친 사람은 나잖아...’

‘이 사람들 내 가족이잖아...’

하지만, 지금의 예진은 그저 ‘불청객’처럼 느껴졌다.

그때, 도순희가 눈초리를 번뜩이며 예진을 향해 날을 세웠다.

“참 희한하지, 어째서 이안 에미만 나타났다 하면 꼭 일이 생겨. 고씨 집안 말아먹더니, 이젠 우리 집까지 들쑤셔놓네. 우리 집안이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는지, 원.”

윤제가 조용히 도시락을 열었다.

“어머니, 그런 말씀 마세요.”

그 말과 동시에, 예진을 힐끔 바라봤다.

“당신이 이렇게 빨리 깰 줄 몰랐어. 그래서 당신 건 안 샀어. 배고프면 아래층 식당 가서 먹어.”

그렇게 말하곤, 아무렇지 않게 도시락을 나눴다.

넷이 함께 도란도란 식사를 시작했다.

문가에 선 예진.

그 누구도 그녀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았다.

‘이게 내가 지키고 싶었던 가족인가?’

‘내가 목숨까지 걸며 붙잡고 싶었던 사람들?’

예진의 가슴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래, 내가 그 불길 속에서도 살아남았다는 건...’

‘이 삶을 새로 시작하라는 뜻이겠지.’

그녀는 목발을 짚고 앞으로 한 걸음, 또 한 걸음 내디뎠다.

그리고 눈앞의 아이, 이안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안아... 정말로 엄마를 원하지 않는 거니?”

예진의 목소리에 방 안이 정적에 휩싸였다.

모두가 젓가락을 멈춘 채, 예진을 바라봤다.

어린 이안은 잠시 망설이다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난 고모가 더 좋아. 만약 내가 고를 수 있다면, 고모가 내 진짜 엄마였으면 좋겠어.”

예상한 답변이었다.

하지만 예진의 마음은, 마치 칼로 깊게 도려낸 듯 아팠다.

예진은 차갑게 웃으며, 이번엔 도순희를 바라보았다.

“어머님, 어머님도... 절 며느리로 원한 적 없으시죠?”

도순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래도 최소한의 눈치는 있네. 맞아, 넌 처음부터 우리 집과 안 맞았어. 이안이 말이 맞아. 고를 수 있었다면, 나도 절대 널 안 골랐지.”

윤제는 묵묵히 죽을 떠먹으며, 그 날카로운 말들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아린이 가식적인 표정으로 도순희의 소매를 붙잡았다.

“이모... 그만해요. 예진 씨가 듣고 있어요.”

하지만 도순희는 되려 기세등등해졌다.

“아린아, 너도 잘 들어. 오늘은 그냥 다 말할 거다. 내가 이안 에미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든다고 했지?”

“윤제 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 고씨 집안과 약속만 안 했어도, 절대 며느리로 안 들였을 거야.”

“이안 에미, 애 낳고 병들었다는 말, 몇 년째 입에 달고 살면서 일은커녕 집안일도 제대로 안 해. 맨날 우리 집 등만 처먹고 살아. 하는 짓 보면 진짜 폐인이나 다름없어!”

‘폐인...? 게으르고, 무능하다고?’

예진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모두가 예진을 향해 비난의 화살을 쏟아붓는 동안, 윤제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아니, 마치 아무것도 듣지 못한 사람처럼, 묵묵히 밥만 뜨고 있었다.

예진은 그 자리에 서 있는 것만으로 숨이 막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난산으로 입원했을 때... 일하겠다고 했던 사람은 나였잖아.’

‘그때... 당신이 뭐라고 했더라, 부윤제?’

‘당신은 내가 몸도 약한데 무슨 일을 할 수 있냐고 화냈어!’

‘그리고 나더러 집에서 이안이를 잘 돌보라고 했지!’

‘당신이 밖에서 돈을 벌겠다고! 당신만 믿고 편히 쉬라고!’

‘하지만, 당신 어머니가... 이제 와서 내 모든 걸 ‘게으름’이라고 말하고 있어!!’ ‘부윤제, 당신은 왜 계속 가만히 있어? 왜 나를 위해 나서지 않아?’

‘그래, 이게 바로 마음이 식었다는 뜻이구나.’

‘누구보다 날 잘 알면서도, 아무 말도 안 해주는 거... 진짜 끝이구나.’

눈가가 벌겋게 달아오른 예진은 끝내 윤제를 바라보며 물었다.

“당신은요? 윤제 씨, 당신도... 나 같은 아내는 이제 싫은 거예요?”

그제야 윤제가 숟가락을 내려놓고, 한숨 섞인 말투로 예진을 쳐다봤다.

“도대체 왜 이래? 깨어나자마자 또 감정 소모 시작이야? 나 지금 너무 지쳐서 그런 유치한 질문에 대답할 힘도 없어.”

그 말은, 대답하지 않는 것이 곧 대답이라는 뜻이었다.

‘그래... 여기까지구나.’

‘나는 이제... 이 사람에게 필요 없는 사람이구나.’

그 순간 예진의 눈빛이 달라졌다. 매달리고 싶지도, 존재 가치를 증명하고 싶지도 않았다.

‘이 집, 내가 기를 쓰고 지켜오던 이 집도... 인제 그만 떠날 때야.’

예진은 조용히 고개를 돌려, 아린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입가엔 냉소적인 미소가 번졌다.

“축하해요. 당신들, 원하는 전부를 손에 넣었네요.”

아린은 놀란 척했지만, 눈빛 어딘가에 희미한 승리감이 스쳐 지나갔다.

윤제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한층 더 불쾌한 얼굴로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예진은 담담하게 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우리... 이혼해요.”

윤제의 미간이 더 깊게 찌푸려졌다.

“진짜 계속 이럴 거야? 당신, 정말 내가 이혼 못 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예진은 피식 웃었다.

“못 한다고요? 아니요, 난 오히려... 당신이 지금 당장 도장 찍고 싶어 안달 난 줄 알았는데요?”

“여보!”

윤제는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예진은 차가운 웃음만 지으며 마지막 말을 남겼다.

“이혼서류는 내가 정리해서 보낼게요. 당신은 그냥 도장 준비만 하고 있으면 돼요.”

이제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예진을 붙잡지 않을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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