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제5화

Author: 주광
도순희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벌컥 화부터 냈다.

[화가 나? 고예진이 뭔데 우리 윤제한테 화를 내? 그것이 지금까지 윤제가 먹여 살린 거 모르나 본데? 고작 새장 속에 앉아 자기 자리나 유지하던 것이 내 아들에게 감히 화를 내?]

아린은 일부러 난처한 척 목소리를 낮췄다.

“이모... 제가 이안이를 데리러 갔다가, 혹시 예진 씨가 알면... 기분 상할까 봐 걱정돼요.”

도순희는 더 흥분한 목소리로 받아쳤다.

[그냥 네가 데리러 가. 이안이가 너 엄청나게 따르잖아. 고예진? 감히 너한테 뭐라고 하기만 해봐라. 내가 가만있나 봐!]

“그럼... 그렇게 할게요.”

전화를 끊자마자, 아린의 얼굴에는 숨기지 못한 미소가 번졌다.

‘이것 봐, 결국 이렇게 되는 거야.’

그제야 그녀는 차를 몰아 유치원으로 향했다.

...

아린이 도착했을 때, 이안은 보건실 침대에 앉아 있었다.

아이의 창백한 얼굴, 미간은 잔뜩 찌푸려져 있었고, 손으로 무릎을 꽉 잡고 있었다.

아린이 문을 열고 들어서자, 이안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눈빛이 환하게 밝아진 아이는 벌떡 일어나 아린에게로 달려왔다.

“고모! 드디어 왔어! 이안이 아파...”

아린은 일부러 걱정스러운 얼굴로 아이를 껴안았다.

“괜찮아, 이안아. 고모가 병원에 데려가 줄게. 이젠 안 아플 거야.”

다행히 상처는 심각하지 않았다.

병원에서 간단하게 치료받고 나자, 이안의 얼굴도 금세 좋아졌다.

모든 게 끝난 뒤, 아린은 아이의 손을 잡고 병원 문을 나섰다.

그때, 이안이 고개를 들어 아린을 바라보았다.

“고모, 나 다음에 또 이런 일 있으면... 고모한테 바로 전화해도 돼?”

아린은 멈춰 서서 아이 눈높이에 맞춰 몸을 낮췄다.

“이안아, 네가 고모한테 바로 전화하면... 엄마가 속상해할 수도 있어.”

역시나... ‘엄마’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이안의 표정이 다시 어두워졌다.

“속상하든 말든 무슨 상관이야... 엄마는... 엄마 자격 없어! 오늘 내가 전화해서 데리러 와달라고 했더니, 이제는 내 엄마 아니래. 앞으로 찾지도 말라고 했어!”

아린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가, 곧장 얼굴에서 감정을 지웠다.

그 미소는 이안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순식간이었다.

“정말... 엄마가 그렇게 말했어?”

이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진짜야. 나 원래도 엄마 싫었는데... 오늘처럼 그러면 진짜 보기 싫어. 고모, 고모가 진짜 내 엄마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해?”

아린은 조심스럽게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이안아, 고모도 정말 이안이 엄마가 되고 싶어. 근데 그건 말이지... 아빠랑 엄마가 이혼해야만 고모가 아빠랑 결혼할 수 있어. 그래야만 고모가 이안이 새엄마가 될 수 있는 거야.”

그 말을 들은 이안은 깜짝 놀라 급히 물었다.

“그럼... 아빠랑 엄마는 언제 이혼해?”

아린은 아이의 눈을 바라보며 의미심장하게 물었다.

“이안이는 정말로 아빠랑 엄마가 이혼하길 바라는 거야?”

이안은 잠시 망설이더니 곧바로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그래... 애는 솔직해서 좋아. 이렇게만 가면 되는 거야.’

아린은 은근히 웃으며 속삭였다.

“이안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모가 알려줄게. 대신... 아빠한테는 고모가 알려줬다고 말하면 안 돼. 알았지?”

이안은 그 말에 마치 선물이라도 받은 듯 들뜬 표정을 지으며 신나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당장이라도 튀어 오를 듯한 기세였다.

아린은 주변을 슬쩍 둘러봤다.

‘여긴 사람도 많고... 귀도 많아.’

“우리 다른 데로 가자. 고모가 이안이 좋아하는 아이스크림 사줄게. 거기 가서 고모가 몰래 알려줄게.”

예진은 평소 이안의 건강을 생각해서 차가운 음식을 거의 먹지 못하게 했다.

그래서 아이스크림이라는 말이 나오자, 이안의 얼굴에는 감출 수 없는 기쁨이 가득 번졌다.

...

예진은 약속 시간보다 30분이나 일찍 도착했다.

자신은 기다릴망정, 변호사를 기다리게 하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도착했는데, 이미 누군가 먼저 나와 자리에 앉아 있었다.

남자는 연한 아이보리색 트레이닝 셋업을 입은 채, 다리를 꼬고 소파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손에는 패션 잡지를 들고, 무심한 눈빛으로 대충 페이지를 넘기고 있었다.

예진이 다가가자, 그제야 남자의 얼굴이 제대로 보였다.

정돈된 헤어스타일, 뚜렷한 이목구비, 살짝 올라간 입꼬리.

오른쪽 이마 근처에는 흉터 하나가 살짝 보였다.

전체적으로는 깔끔한 인상이었지만, 그 속에 어딘가 예리하지만 자유분방한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이 얼굴... 서민혁이 맞긴 맞네. 근데 이런 사람이 변호사라고?’

믿기 어려운 외모였다. 너무 젊고, 너무 가볍게 느껴졌다.

예진이 조심스레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고예진입니다.”

민혁은 그녀가 내민 손을 보며 잠시 웃음을 지었다.

악수할 생각이 없는 듯, 손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시선으로만 천천히 위에서부터 아래로 예진을 훑었다.

‘뭐지, 이 사람 시선... 좀 불편한데.’

예진은 속으로 약간 불쾌했다.

민혁이 나지막하게 대답했다.

“전... 고예진 씨를 알아요.”

예진은 순간 살짝 머쓱해져 손을 천천히 거두고는, 민혁 맞은편 자리에 조심스레 앉았다.

“보아하니... 은주가 변호사님께 저에 대해 먼저 이야기했나 보군요.”

민혁은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은주 통해서는 아니에요.”

“그럼... 누굴 통한 거죠?”

민혁은 여유롭게 커피 한 모금을 들이켰다.

“우리 학교 법대에 전설이 둘 있다는 얘기... 들어봤죠?”

예진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웃었다.

“처음 듣는데요. 궁금하네요.”

‘법대 전설? 무슨 드라마 같은 소리야...’

민혁은 테이블에 팔꿈치를 살짝 얹고, 무심한 듯 이야기했다.

“전설의 시작은 진대영 교수의 최고 수제자였죠. 졸업도 하기 전에 법원에서 스카우트 제안이 들어왔지만, 그걸 뿌리치고 직접 사무실을 차렸데요. 그 사람, 지금까지 수임한 사건 중에서, 패소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예진은 속으로 헛웃음을 삼켰다.

‘맞아, 그 시절 학교에 유명한 선배 있었지.’

‘성격 차갑고 거리감 있는 사람이라고 했는데...’

‘오늘 보니까 자기 자랑 한번 아주 화끈하네.’

“그 수제자... 번호사님 본인이세요?”

민혁은 뻔뻔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그리고 두 번째 전설은...”

남자의 시선이 장난스레 예진을 향했다.

“진대영 교수님이 저 다음으로 아끼던 제자예요. 유학 갈 기회까지 잡아놓고, 사랑에 눈이 멀어서 다 포기했죠. 요리 배우고, 살림하고... 결국엔 남자 하나 믿고 집 안에 들어앉아 가정주부가 됐어요.

예진의 눈매가 살짝 흔들렸다.

‘이 사람, 지금 내 얘기 하는 거지?’

민혁은 대놓고 이름을 말하진 않았지만, 그 말끝의 미묘한 여운이 예진을 아주 불편하게 했다.

예진은 들고 있던 커피잔을 살짝 움켜쥐었다.

그리고 작은 떨림이 손끝을 타고 전해졌다.

‘누구 얘긴지, 내가 제일 잘 알지...’

예진의 기억 속 장면은 아직도 선명했다.

그날, 유학 갈 기회를 포기하겠다고 말했을 때, 진대영 교수의 안타까운 눈빛.

진대영 교수는 여러 차례 예진에게 되물었다.

“정말... 남자 하나 때문에 다 놓아버릴 거야? 그 사랑이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믿는 거야?”

그때의 예진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네, 전... 그 사람을 믿어요.”

그 대답에 부끄러움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예진의 선택은 뼈아픈 실수였다.

자신도 그 믿음의 끝이... 이렇게 초라할 줄은 몰랐다.

민혁은 예진의 굳은 표정을 슬쩍 살피더니, 조용히 테이블 위에 있던 디저트 접시를 그녀 앞으로 밀었다.

“이런 얘기를 꺼낸 건요, 고예진 씨한테 말해주고 싶어서예요. 사람은 언제든 길을 다시 정할 수 있어요.”

“진짜 무서운 건, 막다른 골목에 들어섰으면서도 계속 그 길이 맞다고 착각하는 겁니다.”

예진은 커피잔을 조용히 내려놓고, 깊게 숨을 들이쉬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민혁은 이어서 말했다.

“은주한테 얘기 들었어요. 고예진 씨 상황, 제가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릴게요. 지금 상태로는... 아이 양육권 주장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예진은 시선을 들어 민혁을 조용히 바라봤다.

그 눈빛은 담담했지만 단단했다.

“그 부분은 오해세요. 저, 아이 양육권 가질 생각... 처음부터 없었어요.”

민혁은 뜻밖이라는 듯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그럼... 왜 이혼 소송을 하려는 거예요? 아이도 안 데려갈 거면, 협의 이혼이 훨씬 수월할 텐데...”

예진은 똑바로 그를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부씨 집안 사람들은 제가 가장 잘 알아요. 협의이혼이면, 재산분할이나 위자료 한 푼도 안 줄 거예요.”

“그래서 소송을 하는 거예요. 제가 받아야 할 몫, 단 한 푼도 안 빼앗기려고요.”

그 말에 민혁의 표정이 잠시 정지되었다.

곧이어 입꼬리가 서서히 올라가며, 눈빛에 묘한 흥미가 번졌다.

길고 날렵한 손가락이 남자의 턱선을 따라 천천히 움직였다.

잠시 침묵이 흘렀고, 민혁은 손을 내밀었다.

“좋아요. 우리, 잘해봅시다.”

예진은 이번엔 주저하지 않고 그의 손을 잡았다.

식사가 시작됐고, 두 사람은 본격적으로 사건의 세부 상황을 하나씩 풀어나갔다.

그런데 그 순간, 레스토랑 문이 벌컥 열리고, 도순희가 들어섰다.

그녀는 쇼핑에 지친 몸을 이끌고 잠시 쉬려던 참이었다.

하지만 문을 열자마자 눈에 들어온 광경은, 상상조차 못 한 장면이었다.

예진이 한 남자와 마주 앉아, 웃으며 식사하고 있었다.

둘 사이에 흐르는 분위기는 결코 가벼운 사이 같아 보이지 않았다.

‘아까 아린이가 했던 말...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는데... 이것 봐, 역시!’

도순희의 얼굴에 분노가 불쑥 치솟았다.

한걸음에 테이블로 다가간 그녀는, 손바닥으로 식탁을 세게 내리쳤다.

큰 소리에 주변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고예진! 이 뻔뻔한 X이! 내 아들 몰래 딴 남자를 만나고 다녀?! 창피한 줄 알아라, 이X아!”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atest chapter

  • 전남편도, 아들도 내 발밑에 매달렸다   제375화

    영호가 대답하기도 전에 은주가 먼저 끼어들었다.“사귄 지 좀 됐어요. 감정은 시간이 중요한 게 아니라니까요. 저희 둘, 잘 지내고 있어요.”서중국은 또다시 말을 가로막히자 결국 젓가락을 탁 내려놓았다.“너 이게 무슨 버릇이냐? 내가 지금 영호 군이랑 얘기하고 있는데, 왜 네가 다 대답하는 거야?”“저...!” 은주가 뭔가 말하려는 순간, 영호가 은주의 손을 살짝 쥐며 나직하게 말했다.“괜찮아요, 은주 씨. 저랑 회장님이 조금 이야기해도 돼요.”은주는 풀이 죽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숟가락만 만지작거렸다.“알았어...”서중국은 생전 처음 보는 장면에 잠시 놀랐다. 늘 제멋대로인 딸이 이렇게 얌전히 물러서다니.‘이 녀석, 은주를 제법 잘 다루네.’‘아무도 길들이지 못한 아이를 이렇게 잠잠하게 만들다니.’영호는 그제야 서중국을 향해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회장님, 은주 씨와 만난 지는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저희는 장기적으로 함께할 계획을 조금씩 세우고 있습니다.”서중국은 그 대답에 고개를 끄덕였다.서씨 가문의 위상은 물론 높았지만, 그는 딸이 무조건 ‘수준이 맞는 집안’하고만 결혼해야 한다는 조건을 내세우진 않았다.‘은주가 행복하다면, 사람 됨됨이만 확실하면 그걸로 족하지.’그는 다시 물었다.“그래, 영호 군. 자네 집은 H시에 있나? 부모님은 무슨 일을 하시나?”그 말에 영호의 손바닥에 땀이 맺혔다.“저, 그게...”처음으로 맞닥뜨린 은주의 아버지 앞에서 가볍게 대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괜히 잘못 말했다가 안 좋은 인상만 남을까 두려움이 몰려왔다.‘이럴 때 어떻게 대답해야 하지?’영호가 머뭇거리던 순간, 은주가 다시 고개를 들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아버지 옆으로 옮겨 앉았다.“아빠, 왜 이렇게 질문이 많아요? 남자친구는 제가 만나는 거잖아요. 저희가 천천히 알아가고 있는데, 아빠까지 부담 주면 힘들죠.”은주의 눈빛은 단단했다.‘이건 내 일이고, 내 선택이야. 영호 씨를 위축시키게 할 순 없어.’

  • 전남편도, 아들도 내 발밑에 매달렸다   제374화

    혹시나 영호가 심리적으로 부담을 느낄까 걱정이 된 민혁이 먼저 나서서 분위기를 정리했다.서중국을 모시고 공항을 빠져나와 곧장 차에 오른 뒤, 일행은 예약해 둔 레스토랑으로 향했다.식당에 도착하자, 마침 주문한 음식들이 차례대로 테이블에 차려졌다.영호는 은주 옆에 앉았지만, 표정에서 긴장감이 고스란히 드러났다.다행히 은주가 그의 손을 꼭 잡아 주며 안정감을 주었고, 그제야 영호는 조금 숨을 돌릴 수 있었다.민혁은 좋은 레드와인 한 병을 주문했다.예진은 자연스레 ‘비서’ 역할을 떠맡듯 먼저 일어나 와인을 서빙하려 했다.그러나 민혁이 먼저 잔을 들더니, 예진의 손에서 병을 빼앗듯 받고는 직접 와인을 디캔팅하기 시작했다.예진은 할 수 없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서중국은 그 모습을 지켜보며 미묘하게 미간을 좁혔다.‘이놈, 언제부터 이런 걸 챙길 줄 알았지?’‘게다가 은주 친구 앞에서까지 저러는 걸 보니...’‘혹시 둘 사이에 뭔가 있는 건 아니겠지?’그런 생각이 스치자, 서중국의 표정은 더더욱 굳어졌다.어색해진 공기를 눈치 챈 재하가 서둘러 입을 열었다.“삼촌, 정말 오래간만에 뵙네요. 일만 너무 바쁘시지 말고, 가끔은 H시에 내려오셔서 우리랑 시간도 좀 보내세요. 젊은 사람들하고 어울리면 삼촌도 덩달아 젊어지실 텐데요.”그제야 서중국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내 나이에 젊어지기는. 괜히 젊은 흉내 내다간 노인네가 철없다는 소리나 듣지.”선아가 바로 받아쳤다.“삼촌, 그런 말씀 마세요. 지금도 충분히 젊어 보이시는데요.”서중국은 고개를 끄덕이며 웃음을 지었다.민혁이 잔을 채우자 모두 함께 가볍게 건배를 나누고, 본격적으로 식사가 시작됐다.은주는 혹시 영호가 어색해할까 봐 음식이 나올 때마다 그의 접시에 계속 챙겨 주었다.금세 접시 위가 작은 산처럼 쌓이자, 영호가 은주의 손을 잡으며 나직이 말했다.“은주 씨, 이제 그만. 이거 다 못 먹어요. 음식 남기면 아깝잖아요.”은주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여전히 손은 멈추지 않았다.한편

  • 전남편도, 아들도 내 발밑에 매달렸다   제373화

    “예진 씨는 지금 제 생활비서니까, 작은아버지를 모시는 자리에 같이 가는 게 자연스럽죠.”“게다가 은주 절친이잖아요. 은주가 작은아버지한테 예진 씨 얘기를 자주 했으니까, 한 번쯤 뵙는 게 나쁘지 않을 겁니다.”꽤 억지스러운 이유였다.하지만 민혁이 그렇게 말해 버리니, 예진도 굳이 거절할 수 없었다.‘모두 다 가는데 나 혼자 빠지면 더 이상하지...’결국 다음 날 저녁, 모두 함께 공항으로 향했다.잠시 기다리자, 은주와 민혁을 꼭 닮은 듯한 남자가 도착장을 나섰다. 날카로운 눈매와 단정한 수트 차림에서, 풍기는 아우라가 남달랐다.그 뒤에는 비서가 얌전히 캐리어를 끌고 따르고 있었다.은주는 비록 아버지가 두려웠지만, 어쨌든 친부였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에 본능적으로 반가움이 북받쳐, 두 팔을 벌리고 달려가려 했다.서중국 역시 활짝 웃으며 두 팔을 벌리는 듯 보였다.그러나 막상 은주 앞에 이르자, 슬쩍 몸을 비키면서 은주를 흘려보냈다.순간 은주는 멍하니 굳었다.뒤돌아보니, 이미 서중국의 품은 민혁이 차지하고 있었다.은주의 얼굴이 단번에 굳어졌다.“하... 역시 나는 ‘사은품’이지.”서중국은 민혁의 등을 두어 번 힘주어 두드리며, 만족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훑어봤다.“이놈, 한층 더 우람해졌구나.”민혁은 쑥스러운 듯 웃으며 대답했다.“작은아버지 말씀대로 매일 운동했습니다. 게을리할 수 없죠.”“녀석, 입만 살아서는.” 서중국은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그제야 은주가 다시 달려와 서중국 앞을 막아섰다.“아빠! 저 아직 친딸 맞아요? 이렇게 오랜만에 만나면서, 인사 한마디도 없이 그냥 지나가요?”서중국의 시선이 드디어 은주에게로 향했다.“어휴, 내가 딸이 하나 있긴 했지? 집에 안 들어온 지가 얼마나 됐는지, 얼굴도 까먹을 뻔했다.”“저, 저기 아빠!”은주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억울함이 치밀었지만, 한편으론 마음이 불편해지면서 괜히 주눅이 들었다.그때 재하와 선아가 서둘러 앞으로 나왔다.“중국 삼촌, 이렇게까지 직접

  • 전남편도, 아들도 내 발밑에 매달렸다   제372화

    은주는 결국 전화기를 민혁에게 내밀었다. 눈빛에는 절박한 기색이 가득했다.민혁이 두어 번 가볍게 기침을 하고 나서 수화기를 받았다.“작은아버지, 제가 은주랑 같이 모시러 가겠습니다.”민혁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서중국의 말투가 한결 부드러워졌다.[민혁이구나! 내일 시간 괜찮아? 아이고, 다행이다. 네 일이 바쁜 거 알기에 괜히 신경 쓸까 싶어 일부러 말도 안 꺼냈는데... 너는 참 다르구나. 네 철없는 여동생이랑은...]은주는 차마 반박하지 못한 채, 억울한 마음을 삭이며 허리에 손을 얹고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내가 얼마나 잘 버는지 알기나 할까? 프랜차이즈 술집 사장인데!’‘1년에 버는 돈도 꽤 된다구!’그런 은주의 표정을 본 민혁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작은아버지, 은주도 요즘 많이 달라졌습니다. 내일 보시면 아마 깜짝 놀라실 거예요.”짧은 대화가 오가고 나서야 통화는 끝났다.그러자 은주가 바로 폭발했다.“이건 불공평해! 저 사람은 내 아빠가 아니라 완전히 오빠 아빠잖아!”사실 서중국은 어릴 때부터 유독 민혁을 아꼈다. 그 정도가 친딸인 은주마저 질투할 정도였다.민혁이 처음 집에 왔을 때, 불안해서 밤새 잠도 못 자고 뒤척였던 때가 있었다.그때 서중국은 끝까지 곁을 지키며 달래 주고, 아이처럼 품에 안아 재웠다.그런 대접은 은주조차 받아본 적이 없었다.민혁은 씩 웃으며 은주의 머리를 툭 쓰다듬었다.“어쩌겠어. 술집 사장님 같은 직업은 작은아버지 눈엔 탐탁지 않아 보이니까.”그 모습을 지켜보던 재하가 영호에게 슬쩍 물었다.“공항 마중 나가는데, 같이 갈래?”요즘 영호와 은주의 관계는 눈에 띄게 가까워졌다. 누가 봐도 알콩달콩한 연인 사이였다.하지만 은주의 아버지를 직접 뵌다는 문제 앞에서는 영호도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영호는 은주를 바라보며 말을 아꼈다.“저는... 은주 씨 생각에 따를게요.”은주는 한 번도 깊이 고민해 본 적 없는 문제라 잠시 머뭇거렸다. 부모님께 남자친구를 소개하는 건 결코 가벼운 일이

  • 전남편도, 아들도 내 발밑에 매달렸다   제371화

    영호가 옆에 앉으면서 말했다.“사실 저도 예진 씨랑 민혁 형님은 꽤 잘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재하도 고개를 끄덕였다.“맞아. 예진 씨가 민혁을 밀어내지도 않고 오히려 편하게 지내잖아. 그게 기회지 뭐.”평소에 보면 민혁은 결단력 있고 추진력 강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감정 문제만 나오면, 정작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머뭇거리기 일쑤였다.민혁은 두 사람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지금의 예진은 예전보다 훨씬 빛이 나.’‘이미 주성민 같은 경쟁자도 나타났고...’‘앞으로 또 다른 사람들이 하나둘씩 나타날 수도 있어. 그러다 내가 뒤처지면...’‘그땐 후회해도 소용없을 거야.’‘시간을 더 끌 게 아니라, 이제는 행동에 옮겨야 해.’민혁이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예진과 은주가 들러리 드레스를 입고 모습을 드러냈다.은주의 드레스는 다소 화려하고 섹시한 느낌이었다. 짧은 기장이 긴 다리를 드러내고, 마치 오르골 속 인형처럼 정교해 보였다.반면 예진의 드레스는 단아한 분위기가 강조된 하이웨이스트 롱드레스였다. 날씬하고 고운 실루엣이 한층 돋보였다.은주는 곧장 영호의 팔에 팔짱을 끼며 나섰고, 두 사람은 누가 봐도 한 쌍처럼 잘 어울렸다.재하와 선아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예진에게 향했다.“예진 씨, 몸매 진짜 좋네요. 이 드레스가 딱이에요.”“우리 아내가 제일 예뻐서 다행이에요. 안 그랬으면 들러리들한테 주인공 자리 뺏길 뻔했네요.”예진은 모두와 함께 웃으며 분위기를 맞췄다.그때 민혁도 다가가 입을 열었다.“예진 씨, 오늘 정말 예쁘네요.”‘여자들은 다 이런 말에 마음이 움직인다잖아.’‘예진을 빨리 내 여자친구로 만들고 싶다면...’‘나도 내 마음을 솔직하게 예진이에게 보여줘야 해.’민혁이 진심을 담아 칭찬하자, 예진은 순간적으로 멈칫하며 어쩔 줄 몰라 했다.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한 마디를 내뱉었다.“감사합니다.”막 분위기가 무르익어, 모두가 민혁이 다음 말을 이어가길 기대하던 그 순간.갑자기 은주의 핸드폰 벨소리가 울

  • 전남편도, 아들도 내 발밑에 매달렸다   제370화

    서로의 턱시도는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지만, 예진의 시선은 단번에 민혁에게로 향했다.민혁이 매고 있는 넥타이는 다름 아닌, 예전에 자신이 선물했던 바로 그 넥타이였다.‘아직도... 그걸 하고 다니네.’재하는 들어서자마자 과장된 표정으로 선아를 한껏 칭찬했다.그리고 곧장 아내 곁으로 달려가 든든한 애정을 드러냈다.은주는 치맛자락을 살짝 들어 올린 채 영호 앞으로 뛰어갔다.영호의 칭찬을 듣는 순간, 은주는 작은 요정처럼 방방 뛰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민혁의 시선은 드레스를 입은 예진에게 고정됐다.한순간, 그는 마치 눈앞의 여인을 처음 보는 듯 멍하니 서 있었다.한참이 지나서야 정신을 차렸지만, 예진은 그런 시선을 받고 있자니 조금 어색했다.“은주가... 그냥 와서 한 번 입어보자고 해서요. 기념으로 사진이나 찍자고...”예진은 괜히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쑥스러운 듯 중얼거렸다.민혁이 가장 먼저 다가와 그녀를 천천히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진지하게 말했다.“정말... 예쁘네요.”여자는 누구나 칭찬을 들으면 마음이 흔들리기 마련이다.예진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나... 왜 이렇게 두근거리지...’두 사람 사이의 미묘한 공기를 느낀 선아가 먼저 말을 꺼냈다.“이렇게 예쁜 웨딩드레스인데, 결혼식 날 하루만 입는 건 너무 아깝지 않아?”재하는 선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었다.“네가 원하면, 매일 입어도 돼.”선아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그럼 차라리 이참에 두 사람도 들러리 드레스 말고 그냥 웨딩드레스를 입는 게 어때요?”재하의 표정이 순간 굳어졌다.아내의 장난이 귀엽긴 했지만, 그래도 이건 두 사람의 결혼식이었다.신부 외에 들러리까지 드레스를 입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그는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당황스러웠다.예진이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재하 씨와 선아 씨의 결혼은 중요한 자리인데, 저희가 어떻게 주인공인 척하겠어요. 그냥 재미로 입어본 거예요.”은주도 고개를 끄덕이며 거들었다.“맞아요. 웨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