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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Author: 주광
도순희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벌컥 화부터 냈다.

[화가 나? 고예진이 뭔데 우리 윤제한테 화를 내? 그것이 지금까지 윤제가 먹여 살린 거 모르나 본데? 고작 새장 속에 앉아 자기 자리나 유지하던 것이 내 아들에게 감히 화를 내?]

아린은 일부러 난처한 척 목소리를 낮췄다.

“이모... 제가 이안이를 데리러 갔다가, 혹시 예진 씨가 알면... 기분 상할까 봐 걱정돼요.”

도순희는 더 흥분한 목소리로 받아쳤다.

[그냥 네가 데리러 가. 이안이가 너 엄청나게 따르잖아. 고예진? 감히 너한테 뭐라고 하기만 해봐라. 내가 가만있나 봐!]

“그럼... 그렇게 할게요.”

전화를 끊자마자, 아린의 얼굴에는 숨기지 못한 미소가 번졌다.

‘이것 봐, 결국 이렇게 되는 거야.’

그제야 그녀는 차를 몰아 유치원으로 향했다.

...

아린이 도착했을 때, 이안은 보건실 침대에 앉아 있었다.

아이의 창백한 얼굴, 미간은 잔뜩 찌푸려져 있었고, 손으로 무릎을 꽉 잡고 있었다.

아린이 문을 열고 들어서자, 이안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눈빛이 환하게 밝아진 아이는 벌떡 일어나 아린에게로 달려왔다.

“고모! 드디어 왔어! 이안이 아파...”

아린은 일부러 걱정스러운 얼굴로 아이를 껴안았다.

“괜찮아, 이안아. 고모가 병원에 데려가 줄게. 이젠 안 아플 거야.”

다행히 상처는 심각하지 않았다.

병원에서 간단하게 치료받고 나자, 이안의 얼굴도 금세 좋아졌다.

모든 게 끝난 뒤, 아린은 아이의 손을 잡고 병원 문을 나섰다.

그때, 이안이 고개를 들어 아린을 바라보았다.

“고모, 나 다음에 또 이런 일 있으면... 고모한테 바로 전화해도 돼?”

아린은 멈춰 서서 아이 눈높이에 맞춰 몸을 낮췄다.

“이안아, 네가 고모한테 바로 전화하면... 엄마가 속상해할 수도 있어.”

역시나... ‘엄마’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이안의 표정이 다시 어두워졌다.

“속상하든 말든 무슨 상관이야... 엄마는... 엄마 자격 없어! 오늘 내가 전화해서 데리러 와달라고 했더니, 이제는 내 엄마 아니래. 앞으로 찾지도 말라고 했어!”

아린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가, 곧장 얼굴에서 감정을 지웠다.

그 미소는 이안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순식간이었다.

“정말... 엄마가 그렇게 말했어?”

이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진짜야. 나 원래도 엄마 싫었는데... 오늘처럼 그러면 진짜 보기 싫어. 고모, 고모가 진짜 내 엄마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해?”

아린은 조심스럽게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이안아, 고모도 정말 이안이 엄마가 되고 싶어. 근데 그건 말이지... 아빠랑 엄마가 이혼해야만 고모가 아빠랑 결혼할 수 있어. 그래야만 고모가 이안이 새엄마가 될 수 있는 거야.”

그 말을 들은 이안은 깜짝 놀라 급히 물었다.

“그럼... 아빠랑 엄마는 언제 이혼해?”

아린은 아이의 눈을 바라보며 의미심장하게 물었다.

“이안이는 정말로 아빠랑 엄마가 이혼하길 바라는 거야?”

이안은 잠시 망설이더니 곧바로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그래... 애는 솔직해서 좋아. 이렇게만 가면 되는 거야.’

아린은 은근히 웃으며 속삭였다.

“이안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모가 알려줄게. 대신... 아빠한테는 고모가 알려줬다고 말하면 안 돼. 알았지?”

이안은 그 말에 마치 선물이라도 받은 듯 들뜬 표정을 지으며 신나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당장이라도 튀어 오를 듯한 기세였다.

아린은 주변을 슬쩍 둘러봤다.

‘여긴 사람도 많고... 귀도 많아.’

“우리 다른 데로 가자. 고모가 이안이 좋아하는 아이스크림 사줄게. 거기 가서 고모가 몰래 알려줄게.”

예진은 평소 이안의 건강을 생각해서 차가운 음식을 거의 먹지 못하게 했다.

그래서 아이스크림이라는 말이 나오자, 이안의 얼굴에는 감출 수 없는 기쁨이 가득 번졌다.

...

예진은 약속 시간보다 30분이나 일찍 도착했다.

자신은 기다릴망정, 변호사를 기다리게 하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도착했는데, 이미 누군가 먼저 나와 자리에 앉아 있었다.

남자는 연한 아이보리색 트레이닝 셋업을 입은 채, 다리를 꼬고 소파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손에는 패션 잡지를 들고, 무심한 눈빛으로 대충 페이지를 넘기고 있었다.

예진이 다가가자, 그제야 남자의 얼굴이 제대로 보였다.

정돈된 헤어스타일, 뚜렷한 이목구비, 살짝 올라간 입꼬리.

오른쪽 이마 근처에는 흉터 하나가 살짝 보였다.

전체적으로는 깔끔한 인상이었지만, 그 속에 어딘가 예리하지만 자유분방한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이 얼굴... 서민혁이 맞긴 맞네. 근데 이런 사람이 변호사라고?’

믿기 어려운 외모였다. 너무 젊고, 너무 가볍게 느껴졌다.

예진이 조심스레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고예진입니다.”

민혁은 그녀가 내민 손을 보며 잠시 웃음을 지었다.

악수할 생각이 없는 듯, 손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시선으로만 천천히 위에서부터 아래로 예진을 훑었다.

‘뭐지, 이 사람 시선... 좀 불편한데.’

예진은 속으로 약간 불쾌했다.

민혁이 나지막하게 대답했다.

“전... 고예진 씨를 알아요.”

예진은 순간 살짝 머쓱해져 손을 천천히 거두고는, 민혁 맞은편 자리에 조심스레 앉았다.

“보아하니... 은주가 변호사님께 저에 대해 먼저 이야기했나 보군요.”

민혁은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은주 통해서는 아니에요.”

“그럼... 누굴 통한 거죠?”

민혁은 여유롭게 커피 한 모금을 들이켰다.

“우리 학교 법대에 전설이 둘 있다는 얘기... 들어봤죠?”

예진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웃었다.

“처음 듣는데요. 궁금하네요.”

‘법대 전설? 무슨 드라마 같은 소리야...’

민혁은 테이블에 팔꿈치를 살짝 얹고, 무심한 듯 이야기했다.

“전설의 시작은 진대영 교수의 최고 수제자였죠. 졸업도 하기 전에 법원에서 스카우트 제안이 들어왔지만, 그걸 뿌리치고 직접 사무실을 차렸데요. 그 사람, 지금까지 수임한 사건 중에서, 패소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예진은 속으로 헛웃음을 삼켰다.

‘맞아, 그 시절 학교에 유명한 선배 있었지.’

‘성격 차갑고 거리감 있는 사람이라고 했는데...’

‘오늘 보니까 자기 자랑 한번 아주 화끈하네.’

“그 수제자... 번호사님 본인이세요?”

민혁은 뻔뻔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그리고 두 번째 전설은...”

남자의 시선이 장난스레 예진을 향했다.

“진대영 교수님이 저 다음으로 아끼던 제자예요. 유학 갈 기회까지 잡아놓고, 사랑에 눈이 멀어서 다 포기했죠. 요리 배우고, 살림하고... 결국엔 남자 하나 믿고 집 안에 들어앉아 가정주부가 됐어요.

예진의 눈매가 살짝 흔들렸다.

‘이 사람, 지금 내 얘기 하는 거지?’

민혁은 대놓고 이름을 말하진 않았지만, 그 말끝의 미묘한 여운이 예진을 아주 불편하게 했다.

예진은 들고 있던 커피잔을 살짝 움켜쥐었다.

그리고 작은 떨림이 손끝을 타고 전해졌다.

‘누구 얘긴지, 내가 제일 잘 알지...’

예진의 기억 속 장면은 아직도 선명했다.

그날, 유학 갈 기회를 포기하겠다고 말했을 때, 진대영 교수의 안타까운 눈빛.

진대영 교수는 여러 차례 예진에게 되물었다.

“정말... 남자 하나 때문에 다 놓아버릴 거야? 그 사랑이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믿는 거야?”

그때의 예진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네, 전... 그 사람을 믿어요.”

그 대답에 부끄러움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예진의 선택은 뼈아픈 실수였다.

자신도 그 믿음의 끝이... 이렇게 초라할 줄은 몰랐다.

민혁은 예진의 굳은 표정을 슬쩍 살피더니, 조용히 테이블 위에 있던 디저트 접시를 그녀 앞으로 밀었다.

“이런 얘기를 꺼낸 건요, 고예진 씨한테 말해주고 싶어서예요. 사람은 언제든 길을 다시 정할 수 있어요.”

“진짜 무서운 건, 막다른 골목에 들어섰으면서도 계속 그 길이 맞다고 착각하는 겁니다.”

예진은 커피잔을 조용히 내려놓고, 깊게 숨을 들이쉬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민혁은 이어서 말했다.

“은주한테 얘기 들었어요. 고예진 씨 상황, 제가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릴게요. 지금 상태로는... 아이 양육권 주장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예진은 시선을 들어 민혁을 조용히 바라봤다.

그 눈빛은 담담했지만 단단했다.

“그 부분은 오해세요. 저, 아이 양육권 가질 생각... 처음부터 없었어요.”

민혁은 뜻밖이라는 듯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그럼... 왜 이혼 소송을 하려는 거예요? 아이도 안 데려갈 거면, 협의 이혼이 훨씬 수월할 텐데...”

예진은 똑바로 그를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부씨 집안 사람들은 제가 가장 잘 알아요. 협의이혼이면, 재산분할이나 위자료 한 푼도 안 줄 거예요.”

“그래서 소송을 하는 거예요. 제가 받아야 할 몫, 단 한 푼도 안 빼앗기려고요.”

그 말에 민혁의 표정이 잠시 정지되었다.

곧이어 입꼬리가 서서히 올라가며, 눈빛에 묘한 흥미가 번졌다.

길고 날렵한 손가락이 남자의 턱선을 따라 천천히 움직였다.

잠시 침묵이 흘렀고, 민혁은 손을 내밀었다.

“좋아요. 우리, 잘해봅시다.”

예진은 이번엔 주저하지 않고 그의 손을 잡았다.

식사가 시작됐고, 두 사람은 본격적으로 사건의 세부 상황을 하나씩 풀어나갔다.

그런데 그 순간, 레스토랑 문이 벌컥 열리고, 도순희가 들어섰다.

그녀는 쇼핑에 지친 몸을 이끌고 잠시 쉬려던 참이었다.

하지만 문을 열자마자 눈에 들어온 광경은, 상상조차 못 한 장면이었다.

예진이 한 남자와 마주 앉아, 웃으며 식사하고 있었다.

둘 사이에 흐르는 분위기는 결코 가벼운 사이 같아 보이지 않았다.

‘아까 아린이가 했던 말...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는데... 이것 봐, 역시!’

도순희의 얼굴에 분노가 불쑥 치솟았다.

한걸음에 테이블로 다가간 그녀는, 손바닥으로 식탁을 세게 내리쳤다.

큰 소리에 주변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고예진! 이 뻔뻔한 X이! 내 아들 몰래 딴 남자를 만나고 다녀?! 창피한 줄 알아라, 이X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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