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궁은 네가 진아와 대혼을 이루길 바란다. 본궁이 추 장군을 위해 마련하는 부인은 당연히 외모와 지혜를 겸비하고 한결같이 추 장군의 곁을 지키며 도와줄 현명한 여인일 것이다.”추월녀가 입을 열기도 전에 서비는 말을 이어갔다.“물론, 네가 진아와 다시 화합하기를 원치 않는다면 추 장군의 상대는 거만하고 제멋대로일 수 있겠구나. 그때는 어쩌면 추 장군의 비밀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릴지도 모른다. 게다가 너희 국공부는 지금은 평온하지만 새로 들어가는 장군 부인이 한 번 소동을 일으키면 국공 대인조차 감당하기 힘들 수도 있을 것 같구나. 월녀야, 난 그냥 가능성을 말하는 것뿐이지 다른 뜻은 없다.”서비는 매우 자상하고 부드럽게 웃었다.“월녀야, 우리 여인들이 바라는 건 뭘까? 결국 강력한 힘을 가진 서방이지 않겠냐? 나를 위해 부귀영화를 가져다주고 한평생 호화로운 삶을 줄 수 있는 서방 아니겠냐? 진아가 지금 가끔 길을 잘못 들긴 했지만 사실 우리 모두 알잖니? 진아는 그냥 잠시 마음이 흔들린 것뿐이다.”서비는 계속 설득했다.“진아가 예전에는 너를 얼마나 좋아했는지도 네가 알 거라고 생각한다. 지금 그 산골 계집에게 마음을 준 것도 그저 새로움에 끌린 것뿐이니 곧 싫증 날 것이다.”추월녀는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서비는 이어서 말했다.“월녀 넌 똑똑하니 잘 알고 있을 거다. 황실 사내와 결혼하면 평생 다른 여인과 서방을 나눠 가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서비는 추월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추월녀는 말이 없었지만 서비는 어린 소녀가 마음속으로 얼마나 극도로 거부하는지 알았다.“솔직히 말해 본궁도 젊었을 때 한 사람만을 평생 바라보겠다는 생각을 해봤단다. 허나 그런 건 결국 우리 여인들 마음속 바람일 뿐이더구나. 친왕조차 그러하니 폐하의 후궁은 어떻겠느냐? 월녀야, 너는 네 서방이 평생 평범하게 살면서 너만 바라보길 원하느냐? 아니면 수많은 사람 위에 군림하면서 백성들의 존경을 받길 바라느냐? 어린 소녀의 마음은 소녀 시절에 묻어두는 게
“서비마마를 뵙겠습니다.”추월녀는 뒤돌아 서비에게 몸을 숙여 인사를 올렸다. 얼굴에는 얕은 미소를 짓고 있었고 표정은 덤덤하고 여유로우며 빈틈이 없었다.서비는 웃으며 말했다.“지금 속으로 내가 얼마나 밉겠냐? 그런데 어찌 아직도 내 앞에서 체면을 차리는 것이냐?”그날 서비가 황제 앞에서 추월녀를 공개적으로 뺨 맞게 만들었던 일을 추월녀는 늘 마음속에 품고 있었다.추월녀를 향한 서비의 눈빛에는 분노와 원한이 섞여 있었다.허나 추월녀는 서비를 바라보면서도 얼굴에 어떤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다.잠시 후 서비는 갑자기 웃었다.“어린 계집이 본궁보다 더 침착하구나. 과연 진아가 예전부터 너에게 의지했던 이유가 있었구나.”“과찬이십니다. 마마께서 무슨 가르침을 주시려 하시는지요?”추월녀는 태연하게 물었다.“원래는 너한테 한 번 굴욕을 주려 했다. 허나 본궁은 너라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지만 네 재능은 정말 마음에 드는구나.”서비는 춘하궁 쪽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따라오거라, 본궁이 할 말이 있다.”추월녀는 옆에 있던 궁녀를 힐끗 보며 말했다.“내 시녀에게 잠시 기다리라고 전해라. 난 천하궁으로 가서 서비마마께 안부를 물어야 하느니라.”“예.”궁녀는 몸을 숙이고 돌아섰다.춘하궁 편전 안에는 금세 서비와 추월녀, 그리고 서비를 시중드는 서 상궁만 남았다.서비는 차를 음미하며 정교하게 다듬은 눈으로 추월녀를 스윽 바라보고는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모두가 본궁의 장소에 네가 온 것을 알게 된다면 본궁은 너에게 해를 끼치지 못할 거라는 거지?”추월녀는 일 처리가 신중하고 한 걸음 한 걸음이 조심스러운 것이 정말 대단한 여인이었다.서비는 추월녀에 대한 애증의 감정이 뒤섞였다.추월녀의 빈틈없는 태도가 싫었으나 재능만큼은 너무나도 마음에 들었다.만약 이런 여인이 자기 아들 곁에 있는다면 앞으로 유봉진이 큰 인물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추월녀는 얕은 미소만 지으며 온화하고 예의 바르면서도 우아하고 당당하게 앉아 있었다.서비가 한숨을 내
비록 추월녀의 말은 매우 잔인했지만 지금 상황에서 추소하 역시 계속 솔직하게만 있을 수는 없었다.그들의 국공부는 지금 비바람 속에 흔들리고 있었고 조금만 잘못되어도 전부 몰락할 처지였다.추소하 역시 금세 침묵에 빠졌고 얼굴빛은 매우 어두웠다.서비 이 교활한 여인이 후궁에서 쓰는 수법을 그대로 자신에게 들이밀 줄은 상상도 못 했다.“월녀야, 난 혼인할 수 없다. 난 혼인하면...”추소하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무술대회에서 추월녀의 배치 덕분에 국공부는 훌륭하게 승리를 거두었으며 외부에서 추소하에 대한 의심 섞인 시선도 한순간에 많이 줄었다.허나 지금 만약 혼인한다면 몸의 비밀이 즉시 드러날 것이었다.그때가 되면 서비는 반드시 이 일을 크게 부풀릴 것이고 결국 서비의 목표는 그들의 십만 추가군을 손에 넣는 것이었다.“오라버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방법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요즘은 밖에 나가고 싶지 않다면 남강의 상황을 연구하고 있으십시오.”추월녀가 미소 지으며 달랬다.언제든 추소하는 여동생의 미소를 보면 마음이 묘하게 차분해졌다.추월녀는 보기에는 매우 연약했지만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그녀는 신경안정제와도 같았다.다만 일부 사람들은 그 점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할 뿐이었다.“정말 내가 군을 이끌고 남강으로 갔으면 하는 것이냐?”“남강 전쟁은 최근 몇 년 다시 긴박해졌습니다. 반동군은 외조부가 나이가 많아 더 이상 남강을 지킬 수 없음을 보고 움직이려 하고 있습니다. 남강은 분명히 오라버니가 필요하지만 아직은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으니 충분히 휴양해야 합니다.”추월녀는 계속 달랬다.“혼인 문제는 제가 방법을 찾아볼 테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청휘각에서 나오는 순간 자운선이 참지 못하고 말했다.“아씨, 이 일은 이미 일정에 올랐으니 아마 곧 진행될 겁니다. 아씨께서 큰 도련님께서 추가군을 이끌고 남강에 가게 하려 하신다면 폐하께서는 그 전에 반드시 큰 도련님의 혼사를 결정하실 겁니다.”자운선은 손가락을 꼬며 걱정스러운
“진왕 대군은 어리석은 것이 아니라 지금 여인에게 사로잡혀 판단력이 흐려진 것이다. 이제 정신을 차리면 아마 많은 것을 똑똑히 볼 수 있을 것이다.”하지만 이런 일들은 이제 추월녀와는 큰 상관이 없었다.“난 조부를 뵈러 가야겠구나. 운선아, 나중에 대군 나리를 좀 보살피거라. 약 복용 잊지 말아야 한다.”“아씨.”추월녀가 궁궐 문을 나서려는 순간 자운선이 뒤에서 불렀다.“아씨, 아니면... 먼저 큰 도련님을 뵈러 가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그렇게 추월녀는 추소하의 청휘각으로 향했다.자운선이 추월녀를 이곳에 보내려 한 이유는 오늘 아침 일찍 태후가 초상화들을 보내라고 명했기 때문이었다.추월녀가 도착했을 때 추소하는 책상 앞에 앉아 초상화 더미를 멍하니 보고 있었으나 시선은 그림 위에 머무른 적이 없었다.“오늘 새벽, 소 상궁이 직접 그림을 가져왔습니다.”자운선이 옆에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추소하는 추월녀를 바라보며 표정이 다소 어색했다.“월녀야, 태후마마께서... 내가 마음에 드는 여인을 골라 조속히 혼인하길 바라시는구나.”“무술대회에서 폐하께서 막 오라버니의 혼인 문제를 태후마마께 신경 쓰시길 바라신다고 말씀하셨는데 오늘 아침 바로 초상화를 보내신 겁니까? 참 빠르십니다. 마치 이미 다 계획되어 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추월녀는 다가가 초상화 속의 여인들을 하나하나 꼼꼼히 살펴보았다.모두 높은 신분의 집안 여식들이었고 몇몇은 명문가 출신으로 볼만했으나 국공부의 장남과 결혼하기엔 신분이 다소 부족했다.추소하와 추월녀는 신분 문제에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지만 황실에서는 혼인을 내릴 때는 신분을 매우 중시했다.그럼에도 이 여인들을 골라 보냈다는 건 추소하를 그저 대충 속이려 보내진 듯 보였다.“어제 결정을 내리고 오늘 준비라니, 태후마마의 뜻 같지 않습니다.”추월녀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태후는 오랫동안 후궁에만 있으면서 후궁 내 다툼에는 대체로 한쪽 눈을 감고 다른 쪽 눈까지 다 감아주었다.그런 태후가 미리 이런 준비를 할
자운선은 한동안 멍하니 있었다.자운선은 대마왕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으나 추월녀가 대마왕과 혼인한다고 하니 자기 귀를 의심했다.자운선은 한참 골똘히 생각해 보았다.대마왕 유상무는 얼굴에 가면을 쓰고 있어 좀 무섭긴 해도 사실 추월녀에게 그렇게 나쁘게 대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무술대회 날에도 유상무는 정말 추월녀를 도왔으며 그건 자운선이 직접 눈으로 본 일이었다.허나...“아씨, 대마왕은 역시 너무 복잡한 사내로 아씨와 잘 어울리는 사람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사실 자운선은 황실이 너무 복잡하다고 말하고 싶었고 가능하다면 앞으로는 황실 사내에 대해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었다.더구나 진왕에게 벌어진 일로도 알 수 있듯 황실이나 황자 같은 지위의 사내와 혼인하면 앞으로 왕부 안에는 반드시 다른 여인이 있기 마련이다.그때가 되면 한 사내를 두고 여러 여인과 나눠야 하기에 그런 일을 추월녀는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아씨는 어릴 때부터 진왕 대군께 은근한 마음을 품으셨기에 많은 일들을 미처 깊이 생각하지 못하셨습니다.”자운선은 자신의 말이 듣기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건 사실이었다.이번에 추월녀는 마음이 상했으니 이제 일을 제대로 볼 필요가 있었다.“진왕 대군이든 대마왕이든 앞으로 궁 안에는 왕비 한 명만 두지 않을 겁니다. 아씨, 이런 사내들은 이제 고려하지 마십시오.”자운선은 추월녀가 뭐라고 할지 기대했지만 그녀는 단지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자운선은 너무 시원시원하게 대답하는 모습에 조금 놀라면서 추월녀가 정말 자신의 말을 받아들인 게 맞을까 싶었다.추월녀는 당황하는 자운선의 표정을 보고 오히려 웃으며 안심시켰다.“한 번 상처를 입고 나니 자연스럽게 알겠더구나. 황족과 귀족 사내는 앞으로 절대 고려하지 않을 것이다.”“그럼 동주 황자님은...”“어젯밤 대군 나리께서 반죽음으로 만들어 주셨으니 당분간은 날 괴롭히러 오지 않을 것이다.”아직도 선우혁의 마음은 알 수 없지만 괴롭히러 오지 않는다면 그만이다.선우혁이 무슨 생각을
“뭐라고 하셨습니까?”추월녀는 깜짝 놀라 거의 기절할 뻔했다.정녕 이런 말을 함부로 해도 되는 걸까?“대군 나리, 신중히 말씀하시지요. 이런 말이 밖으로 퍼지면 제가 또 욕을 듣게 됩니다.”“그래서 나는 오직 너에게만 말했을 뿐 다른 사람에게는 말하지 않았다.”유상무는 다시 눈을 감고 눈동자 속 모든 것을 숨겼다.“그러니 정말 억울하구나, 월녀야.”“대군 나리, 제발 더 이상 장난치지 마십시오!”추월녀는 유상무와 혼인하겠다고 말한 적이 전혀 없었던 추월녀는 안색이 어두워졌다.어릴 때부터 추월녀의 마음속에는 이미 유봉진이 있었고 유상무와는 단 한 번도 제대로 지낸 적이 없다.유상무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눈을 감은 채 마치 잠을 청하려고 결심한 듯 추월녀가 상처를 다루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다.단지 상처가 아플 때면 짙은 먹물처럼 진한 검은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추월녀가 조심스럽게 상처를 감싸고 약을 바르는 중에 유상무는 이미 잠든 듯 보였다.추월녀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대군 나리, 상처 처리가 끝났습니다. 얼른 돌아가십시오.”유상무가 아무 대답 없자 추월녀는 화를 참으며 또 불렀다.“대군 나리...”“잠에서 깨면 바로 가마.”“하지만 제 침실에서 잠들 순 없습니다!”“이미 자고 있지 않느냐?”추월녀는 눈앞의 남자가 정말 떠날 생각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유상무가 갈 생각이 없다면 추월녀가 가면 된다.추월녀가 약상자를 정리하고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 뒤에서 남자의 허스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너 정말 약조했었다. 나중에 나와 혼인하겠다고 말이다.”추월녀는 발걸음을 멈추고 미간을 찌푸리며 화가 치밀었다.“대군 나리, 제발...”허나 뒤돌아보니 창문은 열려 있고 유상무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유상무와와 함께 시월도도 자취를 감췄고 추월녀는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꼈다.대마왕 유상무는 평소 장난스럽게 말하지만 방금 그 말은 조금 억울한 감정이 섞여 있어 장난처럼 들리지 않았다.혹시 추월녀가 정말 유상무와 무언가 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