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회의는 계속 진행되었고 고이한은 정신을 가다듬은 채 준비 프로젝트 보고를 듣고 있었지만 간간이 억눌린 기침 소리가 새어 나왔다.소예지는 고개를 숙인 채 회의 내용을 차분하게 기록하고 있었다.그때 고이한이 문득 입을 열었다.“소예지 씨, 안전성 테스트 계획에 대해 어떤 제안이 있습니까?”갑작스러운 질문에도 소예지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며 침착하게 대답했다.“회사는 3단계 방어 시스템을 도입할 수 있습니다. 구체적인 계획은 보고서 15페이지에 정리되어 있습니다.”고이한은 눈썹을 살짝 찌푸린 채 보고서의 15페이지를 넘겼다.그 이후로는 별다른 돌발 상황 없이 회의가 마무리되었고 참석자들은 하나둘씩 자리를 떠나기 시작했다. 주현우는 고이한의 상태가 신경 쓰이는 듯 다가와 말을 건넸다.“대표님, 감기 걸리신 것 같네요?”“네. 비를 조금 맞았더니...”고이한이 짧게 대답하자, 주현우가 다시 물었다.“병원은 가보셨어요?”“이따가 가려고 합니다.”주현우는 잠시 말문이 막힌 듯 멈칫했다.‘이 사람, 감기에 걸리고도 회의까지 참석하고 아직 병원도 안 갔다고? 진짜 일벌레는 따로 없네...’잠시 고민하던 그는 조심스럽게 소예지에게 말을 꺼냈다.“소예지 씨, 잠깐 시간 괜찮으시면 대표님 병원에 좀 데려다주실 수 있을까요?”소예지는 펜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단호하게 말했다.“바빠서요.”그녀는 그 이유에 대해 더 이상의 설명을 덧붙이지 않았다.순간 회의실의 공기가 미묘하게 굳어졌다. 주현우는 당황한 듯 헛기침을 한 번 했다.“아, 그렇군요! 그럼 제가 모셔다드리겠습니다.”고이한의 얼굴에는 노골적인 불쾌함이 스쳤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신경 쓰지 마세요. 제가 직접 갈 겁니다.”말을 마친 그는 그대로 회의실을 나섰다. 주현우 역시 뒤따라 나서려 했지만 그때 소예지가 그를 불러 세웠다.“부대표님, 앞으로 업무 외의 사적인 일로는 부탁하지 말아 주세요.”차분하지만 분명한 말투였다. 소예지는 말을 마치자마자
“하슬아, 아빠가 빨리 옷 갈아입을 수 있게 집에 보내드리자.”소예지는 딸에게 그렇게 말했다. 딸의 효심을 도와주는 셈이기도 했고 동시에 고이한을 자연스럽게 떠나보낼 수 있는 이유이기도 했다.“아빠, 빨리 할머니 집에 가서 샤워하고 옷 갈아입어요! 감기 걸리면 안 되잖아요.”고하슬의 말에 고이한은 고개를 끄덕이며 딸의 작은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알았어. 아빠 먼저 갈게.”고이한이 떠난 뒤, 소예지는 딸에게 따뜻한 물을 한 모금 먹이고 혹시 비에 젖은 곳은 없는지 살피며 상태를 꼼꼼히 확인했다.저녁이 되자 그녀는 직접 국수 두 그릇을 삶아 두 모녀가 함께 식사를 했다. 그 순간만큼은 세상의 모든 걱정이 사라진 듯, 조용하고 편안한 시간이 흘러갔다.이튿날 아침, 출근길에 나선 소예지의 차량 뒤로 경호차 한 대가 조용히 따라붙었다. 임재석의 지시 앞으로 한 달간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경호팀이 동행하기로 한 것이다.소예지는 딸을 학교에 데려다준 뒤 MD 회의 소식을 받았다. 지난 한 주 동안 뇌-컴퓨터 프로젝트 준비가 거의 마무리되었고 이제 계획이 본격적으로 가동될 예정이라는 보고였다.그녀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그 일주일 동안, 많은 사람들이 소예지가 어디에 있었는지 궁금해했다. 이서연 역시 호기심을 감추지 못하고 물었다.“여행 다녀온 거야?”“아니. 친구가 다쳐서 일주일 동안 돌봐주느라.”“와, 소중한 친구인가 봐.”소예지는 웃기만 할 뿐,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그때 이서연이 커피를 건네며 말했다.“자, 네 거.”두 사람은 커피를 들고 나란히 회의실로 향했다. 업무 이야기를 나누며 걸어가던 중, 마침 회의실 문이 열리며 안채린이 모습을 드러냈다.그녀는 소예지 옆에 바짝 붙어 있는 이서연을 보자 노골적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한때는 자신을 졸졸 따라다니던 아이였는데 요즘은 완전히 소예지 편이 된 듯 보였다.회의실 안의 분위기는 꽤 엄숙했고 최근 해외 출장 준비로 바빴던 강준석도 회의에 참석해 있었다. 그는 소예지를 바라보며
고하슬은 태어날 때부터 유난히 예민하고 손이 많이 가는 아기였다. 다른 사람의 품은 아예 거부했고 오직 소예지의 품에 안겼을 때만 울음을 멈췄다. 그 시기 소예지는 잠도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극도의 불안 속에서 하루하루를 버텨야 했다.비록 가사도우미와 산후 도우미가 있었지만 소예지는 고하슬을 남에게 맡기는 걸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다른 이의 품에 안기기만 하면 고하슬은 곧장 울음을 터뜨리며 작은 몸을 버둥거렸고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를 때까지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심지어 아이의 아버지인 고이한이 안으려 해도 소예지는 선뜻 허락하지 못했다.그 시절의 그녀는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지나치게 팽팽하게 날이 서 있었다.창밖에서 다시 빗소리가 들려왔다. 유리창을 두드리는 규칙적인 소리에 소예지의 기억은 어느새 과거 속으로 천천히 가라앉았다.그렇게 멍하니 앉아 있던 그녀 앞에서 갑자기 문이 열리면서 그 틈으로 젤리가 커다란 눈을 반짝이며 들어왔다. 젤리는 다가오자마자 그녀의 무릎에 입을 슬며시 비볐고 마치 주인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린 듯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소예지는 생각을 거두고 조용히 젤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자라날수록 사람 말을 더 잘 알아듣는 것처럼 보이는 젤리는 요즘엔 일곱이나 여덟 살 아이만큼이나 영리하다는 말을 듣고 있었다.소예지는 아버지의 노트를 조심스레 정리해 두고 부엌으로 내려가 물을 마시러 갔다.그리고 십 분쯤 지났을까, 초인종이 울렸다.오늘 밤은 양희순이 딸을 보러 간다며 휴가를 낸 상태였고 집에는 소예지 혼자였다. 그녀는 우산을 챙겨 들고 조심스럽게 현관으로 향했다.인터폰 화면에 비친 모습은 고하슬을 품에 안은 고이한이었다.현관문을 열자 검은색 니트 차림의 고이한이 비에 젖은 채 서 있었다. 고하슬의 머리 위에는 그의 코트가 덮여 있었고 그 틈으로 딸이 해맑은 얼굴을 내밀며 웃고 있었다.“엄마, 나 봐봐요. 멋지죠!”소예지는 말없이 우산을 내밀었다.“내려와.”“엄마, 아빠도 우리 집에 잠깐 들어오
소예지의 차가 먼저 멀어져 갔다.반면 고이한의 차는 좌회전을 기다려야 했기에 그는 그저 그녀의 뒷모습을 조용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 순간, 자신도 모르게 그의 손이 운전대를 꽉 움켜쥐었다.카페 한켠.소예지는 박시온과 마주 앉아 근황을 나누다 자연스럽게 자신의 교통사고 이야기를 꺼냈고 그 말을 들은 박시온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만큼 놀랐다.“뭐라고? 차에 치일 뻔했다고?”소예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담담하게 말했다.“윤하준 씨가 나를 밀치고 대신 차에 부딪혔어. 그래서 일주일 동안 내가 계속 병원에 들렀던 거야.”“윤하준 씨, 크게 다친 거야?”박시온의 얼굴에 걱정이 스쳤다.“팔에 골절이 있었어. 그래도 이미 퇴원했고 지금은 집에서 요양 중이야.”“그럼 너, 윤하준 씨한테 또 한 번 큰 빚을 진 거네? 지난번까지 합치면 두 번인데 이거 어떻게 갚으려고 그래?”박시온은 잠시 진지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장난기 섞인 웃음을 터뜨렸다.“고전 드라마처럼 목숨을 구했으니 너 자신으로 갚아야 하는 거 아냐?”“그런 소리 하지 마.”소예지는 커피를 휘젓던 손을 멈추고 진지한 눈빛으로 말했다.“윤하준 씨는 나한테 정말 소중한 친구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야.”박시온은 턱을 괴고 그녀를 바라보다가 의미심장하게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근데 윤하준 씨가 너한테 갖는 감정은 단순한 친구 이상이잖아.”소예지는 깊게 숨을 들이마신 뒤, 천천히 말을 이었다.“나는 그에게 고마움과 우정 이상의 감정은 없어. 게다가 남녀 사이의 그런 감정이 나한테 가장 서툰 영역이기도 하고.”“그래서 앞으로는 어쩔 건데? 계속 이렇게 어정쩡한 관계로 남을 수는 없잖아.”잠시 고민하던 소예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생각해 봤어. 윤하준 씨가 완전히 회복되면 정식으로 감사를 전할 거야. 그리고... 조금씩 거리를 둘 생각이야.”“아쉽다...”박시온은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윤하준 씨 진짜 괜찮은 사람이잖아. 따뜻하고 자상하고...”“박시온.”소
“걱정하지 마요.”윤하준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그 운전자는 제가 따로 사람을 붙여서 계속 지켜보게 할 거예요. 무슨 이상이라도 생기면 바로 예지 씨한테 얘기할게요.”그는 조심스럽게 말을 덧붙였다.“그리고 당분간은 임 이사에게 말해서 경호원과 같이 이동해요. 그게 좋겠어요.”“네. 임 이사에게 얘기할게요.”소예지도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별일 없으면 다행이지만 세상일은 늘 ‘만에 하나’가 문제였다. 예방할 수 있다면 그게 최선이었다.그렇게 시간이 흘러 여섯째 날, 소예지는 날마다 병원으로 출근하듯 윤하준을 돌봤고 일곱째 되는 날 아침 윤하준은 퇴원을 앞두고 있었다.병실 문을 열고 들어간 소예지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건, 함께 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는 고이한과 하종호의 모습이었다. 세 사람은 무언가를 조용히 나누고 있었지만 그녀가 들어서자마자 대화는 자연스럽게 끊겼고 시선이 일제히 소예지에게 쏠렸다.고이한은 조용히 그녀의 실루엣을 바라보면서 눈빛이 어딘가 더 어두워졌다. 하종호가 먼저 말을 걸었다.“소예지 씨, 좋은 아침.”“네, 좋은 아침이에요.”소예지는 짧게 인사한 뒤 자연스럽게 걸어 들어가 아침 식사가 담긴 도시락통을 윤하준의 침대 옆에 내려두었다.“우리 하 대표가 퇴원하는 날이라 다 같이 와봤어요.”하종호의 말에 소예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윤하준을 향해 말했다.“짐은 제가 챙겨줄게요.”윤하준은 그녀를 보며 잔잔하게 웃었다.“며칠 동안 고생 많았어요.”“당연한 걸요.”소예지는 태연하게 대답하며 그의 사물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개인 물건 중에는 비서들이 가져다준 것들도 있었고 소예지는 그런 것들까지 하나하나 정돈해 가며 소파 위에 깔끔하게 정리해 넣었다. 그 모습은 누가 봐도 ‘집에서 남편 퇴원 챙기는 아내’처럼 보였다.그 장면을 지켜보던 하종호는 미묘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슬쩍 고이한을 바라봤다. 겉보기엔 무표정하게 앉아 있는 고이한이었지만 그의 눈빛은 평소보다 훨씬 더 어두웠고, 그 안에는 차가운 먹빛이
고이한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가 희미하게 뿌연 바깥 풍경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표정에서는 아무 감정도 읽히지 않았지만 그 고요함이 오히려 더 많은 말을 품고 있는 듯했다.“이한아.”윤하준이 낮게 불렀다.“아직도 소예지 씨를 생각하는 마음이 남아 있다면 이제는 놓아줘. 자기 인생을 살아갈 수 있게.”고이한은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후,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붙잡고 있는 게 아니야...”그 말끝이 채 식기도 전에 그는 천천히 몸을 돌려 윤하준을 바라보았다. 눈빛은 복잡했고 그 안에는 여러 감정이 얽히고설켜 있었다.“진심이야?”“그래.”윤하준은 주저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이십 년 넘게 형제처럼 지내온 사이였다. 서로의 속마음쯤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잠시 시선을 맞췄고 마침내 고이한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좋아. 소예지의 모든 선택을 존중할게.”그는 의자 등받이에 걸어 두었던 롱코트를 팔에 걸치고 병실을 나설 채비를 했다.“몸 잘 추슬러. 며칠 뒤 다시 올게.”문 쪽으로 걸음을 옮기던 그는 손잡이에 손을 올린 채 잠시 멈춰 섰다.“하지만 이 일은 내 아이 엄마의 안전이 걸린 문제야. 그 운전자는 내가 따로 사람을 보내 조사할 거야.”윤하준은 그 말에 미묘하게 놀란 눈빛을 보였지만 대답할 틈도 없이 고이한은 병실 문을 열고 나가 버렸다.그가 떠난 뒤, 윤하준은 잠시 미간을 좁힌 채 창밖을 바라보았다. 말로는 그녀의 선택을 존중한다고 했지만 고이한이 여전히 소예지의 인생 깊숙한 곳에 발을 들이고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같은 시각, 소예지는 집으로 돌아와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딸을 데리러 나갈 때까지는 아직 한 시간 정도 여유가 있었고 집 안은 고요했다.그때 거실 쪽에서 갑자기 그르렁대는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양희순은 창밖을 슬쩍 내다보다가 비가 오는 와중에도 유난히 반가워하며 낑낑거리는 젤리의 반응에 고개를 갸웃했다. 젤리가 이렇게까지 반기는 사람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