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웃지 마! 나 진지하게 말하는 거야.”박시온은 볼을 불룩하게 부풀리며 억울하다는 듯 항의했다. 소예지는 웃음을 참느라 입술을 손으로 가린 채 잠시 숨을 죽였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달래듯 말했다.“알았어, 안 웃을게. 너무 긴장하지 말고 그냥 자연스럽게 대응하면 돼.”“너희 집 이모님도 같이 오면 좋겠다. 결혼식 당일에 하슬이 좀 돌봐주시게.”박시온의 제안에 소예지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좋아. 그럼 아주머니도 같이 모시고 갈게.”다음 날 정오, 고이한은 고객을 만나기 위해 벨모아 호텔을 찾았다. 호텔 로비에 발을 들이는 순간, 그의 시선은 입구 쪽에서 커다란 웨딩 안내 입간판을 들고 들어오는 직원들에게로 자연스럽게 향했다.입간판에는 신부의 웨딩 사진이 큼지막하게 인쇄돼 있었고 고이한은 사진을 확인하는 순간 눈을 가늘게 뜨며 이름을 다시 한번 살폈다.역시나 소예지와 가장 가까운 친구, 박시온이었다.그는 몸을 돌려 호텔 매니저에게 물었다.“이 커플, 결혼식은 언제입니까?”“모레입니다.”정중한 대답에 고이한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뒤, 조용히 엘리베이터 홀로 걸음을 옮겼다.결혼식 전날, 소예지는 딸 고하슬과 함께 드레스 맞추러 갔다.“엄마, 나 예뻐요?”고하슬은 분홍색 원피스 치맛자락을 살랑살랑 흔들며 빙글빙글 돌았다. 소예지는 그 사랑스러운 모습에 눈을 빛내며 웃었다.“정말 예뻐. 우리 딸, 공주님 같아.”소예지 역시 내일 있을 결혼식에 맞춰 자신의 드레스를 미리 준비해 두었지만 박시온이 부탁했던 들러리 역할은 정중히 거절했다. 이혼한 자신의 입장을 고려한 선택이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중한 친구의 결혼식인 만큼 누구보다 아름다운 모습으로 참석하고 싶다는 마음만큼은 숨기지 않았다.결혼식 날이 밝아오고 벨모아 호텔 3층에 자리한 대형 웨딩홀은 온통 꽃으로 장식돼, 마치 동화 속 한 장면처럼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연한 보랏빛을 중심으로 한 고급스러운 색감이 공간 전체를 감싸며 홀 안의 분위기를 한층 더 우아하게 물들이
소예지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말끔히 사라졌다. 그녀는 고개를 살짝 돌려 시선을 다른 곳으로 피했고 그 모습을 본 윤하준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방금 소예지 씨랑 너희 주주 문제를 어떻게 깔끔하게 정리했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어.”고이한의 시선이 조용히 소예지의 정교한 옆얼굴에 머물렀다. 그의 눈빛에는 쉽게 읽히지 않는, 어딘가 서늘한 기운이 담겨 있었다.“확실히... 인상 깊더군.”세 사람 사이에 짧지만 묘한 침묵이 흘렀다. 말은 오가지 않았지만 각자의 생각이 엇갈리며 공기만 무겁게 가라앉았다.그때 학교 정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고이한이 소예지를 향해 말했다.“내가 하슬이 데리고 올게.”그는 두어 걸음 옮기다 뒤를 돌아 윤하준에게 가볍게 눈짓했다.“같이 갈래?”윤하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겼고 두 남자는 나란히 학교 안으로 들어가 아이를 데리러 갔다.잠시 후, 고이한이 고하슬의 작은 손을 꼭 잡은 채 교문 밖으로 나왔다.“엄마!”고하슬은 소예지를 향해 달려와 다리에 꼭 안기더니 고개를 들어 올려 귀엽게 물었다.“오늘 저녁에 아빠랑 같이 밥 먹으면 안 돼요?”소예지는 살며시 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말했다.“아주머니가 우리 저녁 다 준비해 두셨단다.”“그럼 아빠를 우리 집으로 초대하면 안 돼요?”고하슬은 포기하지 않은 채 애타게 바라보며 다시 물었다. 소예지는 잠시 웃음을 띠었다가 고개를 저었다.“아빠는 바빠. 아까도 회사 가서 회의해야 한다고 했거든.”“정말요?”고하슬은 고개를 들어 아빠를 바라봤다. 고이한은 딸의 눈을 마주 보았지만 동시에 소예지에게서 날아오는 날 선 시선을 느꼈다.고이한은 아무렇지 않은 척 딸에게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래. 아빠는 급한 일이 있어서 회사에 가야 해. 다음에 꼭 같이 저녁 먹자.”“알았어요...”고하슬은 아쉬운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이내 금세 표정을 바꾸었다.“그런데 지금은 아직 이르잖아요! 아빠랑 집까지 같이 산책할래요!”그러고는 가방을
소예지는 차창을 단단히 닫은 채 시동을 걸고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 그 순간, 로비 쪽에서 안채린이 가방을 든 채 걸어오더니 곧바로 심유빈의 페라리 스포츠카 조수석 문을 열고 올라탔다.“방금 소예지를 마주쳤는데 많이 변한 것 같더라.”심유빈이 시동을 걸며 담담하게 말했다.“확실히 달라졌지. 회사에선 자존심 세고 거만하기 짝이 없어. 꼭 MD가 자기 없으면 당장 무너질 것처럼 굴잖아.”안채린은 길게 늘어뜨린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소예지를 향한 불만과 반감을 거의 쏟아내듯 말했다.“설마 걔한테 기죽은 건 아니지?”심유빈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안채린은 비웃듯 콧방귀를 뀌었다.“내가 그렇게 쉽게 꺾일 사람이야? 몇 년만 버티면 나도 박사 학위 딸 수 있어. 그때 되면 어디든 갈 수 있지.”“괜히 다른 데 눈 돌리지 말고 MD에 있어. 기회만 생기면 내가 다 챙겨줄 테니까.”심유빈은 단호하게 말했다.한때 안채린은 심유빈을 조금 얕보던 시절도 있었지만 이 순간만큼은 진심으로 자매 같은 유대를 느꼈다.“고마워.”안채린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며 이내 스스로를 다독이듯 말을 이었다.“소예지가 아무리 잘났다고 해도 결국은 그냥 월급쟁이잖아. 나중에 언니가 고씨 가문에 시집가면 그 여자 위에 있는 사모님이 되는 거고. 소예지가 죽어라 일해서 번 돈도 결국엔 다 언니 아이 몫이 되겠지.”그 말에 심유빈은 입꼬리를 살짝 올려 웃었을 뿐, 별다른 대꾸는 하지 않았다.그 침묵 덕분에 안채린의 마음은 오히려 한결 시원해졌다.‘소예지가 그렇게 밤낮없이 연구에 매달려 봤자 뭐 하나 손에 쥔 게 있어?’상이라도 받고 언론의 주목을 받는다고 해도 수십조 자산을 거느린 고씨 가문의 문턱은 그녀와 아무 상관도 없다. 결국 모든 결실은 심유빈의 아이에게 돌아갈 테고 소예지는 그저 바쁘기만 한 인생을 살 뿐이다.그 사실이 안채린에게는 말로 다할 수 없는 통쾌함으로 다가왔다. 소예지가 아무리 잘난 인생을 살아도 고이한에게 시집가는 심유빈의 삶을 이길 수는
“난 뇌-컴퓨터 인터페이스 프로젝트에 찬성하네. 지금 시점에서 가장 미래지향적인 사업이라고 보네.”주주들 가운데 한 노년의 이사가 갑자기 열정을 담아 말했다. 그 한마디를 시작으로, 다른 주주들의 눈빛에도 서서히 동조의 기색이 번져 갔고 이내 하나둘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고이한은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좋습니다. 그럼 오늘 회의는 이걸로 마무리하겠습니다.”회의가 끝난 뒤, 소예지는 조용히 서류를 정리하며 자리를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고이한이 다가와 책상에 한 손을 짚고 그녀를 바라보며 시선을 고정시켰다.“계획안, 고마워.”소예지는 고개조차 들지 않았다. 대답할 마음도 없었다. 이번 계획안이 주주들을 만족시킨 것은 분명했고 그 덕분에 향후 투자 역시 별다른 장애 없이 이어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예지의 마음 한편은 어딘가 편치 않았다.“점심, 같이 할래?”고이한이 뜻밖의 제안을 던졌다. 소예지는 그제야 고개를 들고 차갑고 담백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시간 없어.”하지만 고이한은 조금도 놀라지 않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다음에 같이 하지.”소예지는 더는 대꾸하지 않은 채 빠르게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그녀가 사라진 뒤, 회의실을 나서는 주주들의 표정은 회의 시작 전과는 사뭇 달라져 있었다. 냉담하고 무거웠던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었고 모두 한결 여유로운 발걸음으로 MD 본사의 복도를 걸으며 만족스러운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그때, 안채린이 그들과 마주쳤다. 그녀는 미소 띤 얼굴로 한쪽에 비켜 서서 주주들이 지나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소예지 박사, 정말 대단하긴 하군요. 우리가 괜히 얕봤던 것 같습니다.”“처음엔 오해가 있었지만 이제는 확신이 섭니다. 소 박사가 있다면 이 프로젝트, 충분히 성공할 수 있겠어요.”“나이도 어린데 벌써 박사라더니 괜히 그런 명성이 붙은 게 아니었군요.”주주들의 칭찬이 이어질수록, 안채린의 웃음기는 서서히 사라졌다. 그녀는 점점 굳
주연우는 겉으로는 태연한 얼굴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속은 이미 들끓고 있었다. 자신 역시 엄연히 고신 그룹의 부총재임에도 불구하고 소예지가 이 많은 주주들 앞에서 저토록 매정하게 면박을 주다니 체면이 서지 않았다.고이한 역시 마음 한편이 살짝 불편했지만 이내 감정을 눌러 담은 채 담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계속 진행해 주시죠.”소예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차분하게 발표를 이어갔다. 곧 화면을 넘기자 시장 분석 보고서가 스크린 위에 떠올랐다.“이 자료는 민간 의료 분야에서의 향후 수익 예측치입니다. 그리고 만약 이 기술이 군사나 항공우주 산업으로까지 확대된다면 그 가치는 현재의 예측 범위를 훨씬 넘어설 것입니다.”회의실 안에서는 이내 조용한 술렁임이 일기 시작했다. 주주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작은 목소리로 의견을 나누었고 고개를 끄덕이는 이들의 수 또한 눈에 띄게 늘어났다. 분명 소예지의 3년 계획안은 그들 마음속에 신뢰라는 씨앗을 조금씩 틔우고 있었다.그 광경을 지켜보던 주연우의 속은 바짝 타들어 갔다. 당황스러움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지만 책상 아래에서 움켜쥔 손끝에는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다.그때, 한 중년 주주가 손을 들고 질문했다.“소 박사님, 그렇다면 이 프로젝트의 성공 확률은 얼마나 됩니까?”소예지는 그 질문에도 조금의 흔들림 없이 대답했다.“현재로서는 여기까지가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범위입니다. 다만 지금 제시된 자료와 실험 결과를 토대로 판단해 주시면 좋겠습니다.”그녀의 신중하면서도 현명한 대답에 주주들은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회의실 분위기는 점점 더 진지해졌고 겉으로는 침착한 듯 보였지만 많은 이들이 이미 이 프로젝트가 그려낼 미래의 가능성에 눈을 뜨고 있었다.소예지가 서류를 정리하며 자리를 정돈하려는 찰나, 고이한이 그녀를 향해 입을 열었다.“잠깐만요. 아직 가지 말고 자리에 앉아 계세요.”그는 두 손을 테이블 위에 짚은 채, 낮고 단호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방금 소 박사의 3년 계획안을 여러분
“회의실 가는 길이야.”이서연이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거긴 주주총회가 열리는 곳인데 네가 왜 거길 들어가?”안채린이 반사적으로 그녀를 붙잡았다.“조금 있으면 소예지가 발표할 거거든. 난 그거 도와주러 들어가는 거야.”그러고는 능청스럽게 고개를 기울이며 되물었다.“너 혹시 몰랐어? 이번에 주주들이 전부 여기까지 온 이유가 소예지 발표 들으려고 온 거라는 거?”사실 이 이야기는 이서연 역시 방금 전에야 들은 것이었지만 안채린을 기죽이기에는 충분했다.과연 안채린의 얼굴은 순식간에 사색으로 변했다.“뭐라고? 고신 그룹 전 주주가... 소예지 때문에 온 거라고?”“맞아. 원래는 본사에서 회의 열 예정이었는데 고 대표님이 일부러 여기로 불러들였대.”말을 마친 이서연은 더 이상 안채린의 반응을 볼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발걸음을 재촉해 회의실 쪽으로 향했다.안채린은 그 자리에 얼어붙은 사람처럼 멍하니 서 있었다. 복잡하게 뒤엉킨 감정이 얼굴 위로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그 시각, 회의실 문 앞에서는 주연우가 통화를 마치고 전화를 끊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 흰 정장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소예지가 자료를 들고 그의 앞을 지나쳤다.주연우는 그녀를 발견하자 곧장 걸음을 멈추고 미소를 지으며 다가섰다.“소 박사님, 이번 발표를 직접 맡으실 줄은 몰랐네요.”소예지는 차분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되물었다.“문제 있습니까?”“아뇨. 다만...”주연우의 눈빛이 미묘하게 가라앉았다.“그날 제가 보낸 사진은 보셨죠? 들리는 말로는 그날 밤 심유빈 씨가 고 대표님 곁에서 밤새 함께 있었다고 하더군요.”소예지는 짧은 미소를 지으며 담담하게 말을 바로잡았다.“고이한은 제 전 남편일 뿐이에요. 현재는 아무 관계도 없습니다.”주연우는 어색하게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괜한 말을 꺼낸 것 같군요. 어서 들어가세요.”그가 손짓으로 문을 열어주자 소예지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회의실 안으로 들어섰다.그 순간, 안에 있던 모든 주주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녀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