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log in“네, 알겠어요.”소예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교수님도 몸 좀 챙기세요. 무리하지 마시고요.”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여전히 과학 연구에 매진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그녀의 가슴 한편에는 저절로 깊은 존경심이 일었다.편정우는 그녀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연구하는 사람은 너무 많은 걸 고민하지 마. 넌 신약 테스트 마무리나 잘해놔.”소예지는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요즘의 그녀는 활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예민했고 고이한의 존재는 그림자처럼 그녀의 뒤를 따라다니며 마음을 짓눌렀다.그날 저녁, 소예지는 딸아이를 데리고 근처 광장으로 나갔다.작은 아이가 폴짝폴짝 뛰며 환하게 웃는 모습을 바라보는 순간 지금까지 그녀가 쏟아온 노력과 버텨낸 시간들, 그 모든 게 결국 이 아이를 위한 것이었음을 다시금 깨달았다.그리고 그것이야말로 그녀가 멈추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이유였다.그때, 가방 안에서 은은한 진동과 함께 불빛이 깜빡였다.소예지는 손을 뻗어 휴대폰을 꺼내 메시지를 확인했다. 발신자는 임성국의 개인 번호였다.[현욱이는 무사해요. 대신 안부를 전해달라고 해서요.]짧은 문장을 한참 바라보던 그녀는 조용히 숨을 내쉬었고 이내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그가 무사하다는 것 그 사실 하나면 충분했다.주말이 지나고 소예지는 다시 실험실로 복귀해 회의 참석을 위해 연구동으로 향했다.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그녀의 시야에 들어온 건 박스를 안고 있는 안채린과 이야기 중이던 서지나였다.서지나는 아쉬운 눈빛으로 말했다.“채린 선배, 이제 막 복귀했는데 또 MD로 가는 거예요? 너무 아쉬워요.”안채린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소예지를 발견하고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어쩔 수 없지. MD에서 새 프로젝트 한다고 날 다시 부르더라. 시간 되면 또 보자.”“혹시 MD에서 새로 시작하는 뇌-컴퓨터 인터페이스 프로젝트 말하는 거예요? 와... 채린 선배, 정말 대단해요!”사실 안채린이 MD의 핵심 프로젝트에 투입되는 건 전혀 놀랄 일이 아니었다.
안영수는 그제야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역시 내 딸이야.” 저녁이 되자 식탁 위에는 푸짐한 음식이 차려졌고 온 가족이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웃으며 식사하고 있을 때, 심유빈의 휴대전화가 울렸다.그녀는 화면을 확인하곤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아빠, 전화 좀 받고 올게요.”안영수는 기대에 찬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설마 그 사윗감한테서 온 전화인가?’심유빈은 마당으로 나가 전화를 받았다. 발신자는 다름 아닌 하종호였다.“여보세요, 하종호 씨? 무슨 일 있어요?”“방금 들은 얘긴데요. 고 대표가 고신 제약 IPO를 미루기로 했답니다.”다이아몬드 반지를 이리저리 살피던 심유빈의 손끝이 순간 멈췄다.“정말이에요? 왜...”“고 대표 말로는 일부 데이터에 대해 재감사가 필요하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상장 일정이 아마 2년 정도 미뤄질 수도 있대요.”하종호의 목소리에는 당황스러움이 살짝 묻어 있었다. 며칠 전, 이와 관련된 이야기를 심유빈과 나눈 적이 있었기에 그녀가 관심을 가졌던 터라 단순히 참고삼아 알려주려 전화를 걸어온 것이었다.“알려줘서 고마워요.”심유빈은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시내에 새로 생긴 레스토랑 있는데 유빈 씨가 좋아할 스타일이에요. 시간 괜찮을 때 같이 가죠.”“좋아요. 나중에 꼭 같이 가요. 오늘은 가족이랑 밥 먹기로 해서 먼저 끊을게요.”“네. 얼른 가서 밥 먹어요.”전화를 끊은 심유빈은 거실로 돌아왔고 곧바로 방금 들은 소식을 아버지에게 전했다.“뭐라고?”안영수의 얼굴에 걸려 있던 웃음이 순식간에 굳었다.“누가 그런 말을 해?”“하종호 씨요. 정보는 꽤 확실해 보여요.”안영수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졌다.“갑자기 왜 상장을 미루는 거야? 난 벌써 5% 지분 확보할 준비 다 끝냈는데... 하아.”그는 답답한 듯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얼굴을 찌푸렸다.투자금도 모두 마련해 둔 상태였다. 그런데 고이한이 이런 시점에 상장을 미룬다니 이해할 수가 없었다.‘지
소예지가 차에 올라탔을 때는 어느덧 오후 네 시 반을 훌쩍 넘긴 뒤였다. 슬슬 딸을 데리러 갈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때 휴대폰에서 메시지 알림이 울려 퍼졌고, 소예지는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화면을 확인했다. 하지만 그녀가 기대하던 소식은 아니었다.소예지는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임현욱에게서는 여전히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 그러나 그의 직업을 떠올리자 지금 같은 시기엔 국내로 연락을 취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는 사실도 자연스레 떠올랐고 그 사실이 이해되면서도 마음 한편이 묘하게 허전해졌다.한편, 안씨 가문 저택.오늘은 드물게 가족이 모두 집에 모이는 날이었다.회사 상장 이후, 안영수는 눈에 띄게 더 바빠졌다.회사 일과 접대가 하루를 가득 채우다 보니 집에서 얼굴 보기도 쉽지 않을 정도였다.장인화 역시 그런 남편에게 불만이 없지는 않았지만 회사가 이만큼 큰 성과를 내고 있는 상황에서 마냥 타박하기도 어려웠다.그저 이 모든 재산은 언젠가 딸에게 돌아갈 몫이니 결국엔 다 자식들 것 아니겠느냐는 생각이 들었다.안채린은 소파에 앉아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었고 잠시 후 심유빈이 거실로 들어와 그녀 맞은편에 앉았다.“소예지, 아직 안 나갔어?”심유빈의 질문에 안채린은 고개를 저었다.“아직이야. 걔가 맡고 있는 신약 테스트가 끝나지 않았거든.”“설마 마음이 바뀐 건 아니겠지?”요즘 들어 소예지와 마주칠 일이 거의 없었던 심유빈은 그녀의 속내를 전혀 가늠할 수 없었다.같은 실험실에서 일하고 있는 안채린이라면 조금 더 잘 알 거라 생각한 것이다.안채린은 잠시 생각하다가 문득 떠오른 듯 심유빈을 바라보며 말했다.“언니, 나 MD의 뇌-컴퓨터 인터페이스 프로젝트에 들어가고 싶어. 형부한테 이야기 좀 해줄 수 있어?”이 집에서 ‘형부’라는 호칭은 이미 자연스럽게 쓰이고 있었다.고이한이 심유빈의 미래 남편이라는 사실은 사실상 모두가 받아들이고 있는 현실이었다.안채린 역시 처음엔 어색했지만 이제는 아무렇지 않게 그렇게 부르고 있었다.그 부탁에 심
게다가 이 바닥은 믿음보다 술수가 먼저인 곳이었다.상대가 내미는 호의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다가는 어느새 발목을 잡히기 십상이었다.“그 안에 어떤 의도도 없어.”고이한은 여전히 평정심을 잃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냥 앞으로 하슬에게 남겨줄 안정적인 미래를 마련해주고 싶을 뿐이야.”하지만 소예지의 눈빛은 싸늘했다.이 남자의 사고방식은 이미 예전부터 똑같았다. 한 번 무너진 신뢰를 되돌리는 데는 수백 배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그는 끝내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그 차가운 반응은 고이한의 눈에도 분명하게 들어왔다. 이 정도의 투자 조건이라면 누구라도 혹할 만했지만 소예지의 얼굴에는 어떤 동요도 스치지 않았다.“소예지, 감정은 감정이고 사업은 사업이야.”고이한은 차분히 말을 이었다.“이번 제안은 당신이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 할 일이야. 길어도 석 달 안에 회사는 상장될 거니까.”그는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걸어갔다.문 앞에서 잠시 멈춰 서서, 덧붙였다.“나랑 직접 얽히기 싫다면 임 이사에게 일임해도 상관없어.”그 순간까지 이를 악문 채 버티고 있던 소예지가 냉랭하게 입을 열었다.“필요 없어.”그녀의 목소리는 단호했다.“당신 같은 사람의 ‘호의’엔 관심 없어.”문손잡이를 잡고 있던 고이한의 손이 미세하게 멈췄다.가슴이 한 번 들썩이는 듯했지만 그는 곧 낮게 대답했다.“좋을 대로 해.”문이 열리고, 그가 나서자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던 임재석이 깜짝 놀라 두 걸음 물러섰다.고이한의 얼굴을 보는 순간, 소예지가 어떤 결정을 내렸는지 단번에 감이 왔다.“고 대표님, 이번 투자 건은 정말 저희도...”임재석은 다급히 따라붙었지만 고이한은 고개조차 돌리지 않은 채 곧장 자리를 떠났다.그 뒷모습이 복도 끝으로 사라지는 걸 바라보며 임재석은 속으로 절망했다.‘끝났구나. 이 10% 지분은 날아갔네.’잠시 후, 회의실 문이 다시 열렸다.소예지가 걸어 나오자, 임재석의 안색이 급히 변했다.“대표님... 설마, 거절하
소예지가 차에 막 올라탄 순간, 전화벨이 울렸다.“여보세요, 임 이사님.”“대표님, 아직 안 가셨죠?”전화기 너머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지금 막 건물 앞에 도착했어요.”“다행이네요. 죄송하지만 잠깐만 다시 올라와 주실 수 있을까요? 투자 건과 관련해서 급히 상의드릴 게 있습니다.”마침 오후 일정에 여유가 있었고 특별히 서두를 일도 없었다. 소예지는 잠시 망설이다 곧바로 대답했다.“네, 지금 올라갈게요.”“8층 소회의실입니다.”임재석이 덧붙였다.소예지는 다시 대로를 돌아 로비 안으로 들어섰다. 무심코 2층 난간 쪽을 올려다봤지만 윤하준과 하종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엘리베이터에 오르며 그녀는 임재석이 자신을 다시 부른 이유를 곱씹었다. 투자 관련 업무는 원래부터 임재석의 주도 아래 진행되고 있었다. 호텔 사업 외에도 그녀는 다섯 개의 계열 회사를 보유하고 있었고 안정적인 투자만으로도 운영 자금이 충분히 여유로운 상태였다.8층에 도착하자 임재석의 비서가 바쁘게 다가왔다.“대표님, 오셨군요. 이쪽입니다.”소예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회의실로 향했다.비서가 문을 열어주는 순간, 안에 앉아 있는 한 남자의 실루엣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와 동시에 소예지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고 눈빛에는 차가운 기색이 어렸다.‘저 사람이 왜 여기에 있는 거지?’임재석은 그녀를 보자 반가운 얼굴로 다가왔다.“대표님, 와주셔서 감사합니다.”그러나 소예지의 시선은 곧장 다른 한 사람에게 꽂혀 있었다. 임재석 역시 알고 있었다. 그녀가 이 남자를 얼마나 싫어하는지.임재석은 잠시 당황한 듯 표정이 굳었지만 곧 손짓으로 자리를 권했다.“일단 앉으시죠. 잠깐만 시간을 내주시면 설명드리겠습니다.”소예지의 냉랭한 기색은 맞은편 소파에 앉아 있는 고이한에게도 분명히 전달됐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여유로운 태도로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이야기해 보세요.”소예지가 먼저 운을 뗐다.임재석은 한껏 고조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대표님도
만약 편정우의 실험실에 투자한 곳이 정말 그런 회사라면 충분히 이해가 갔다.뇌–기계 인터페이스 기술은 단지 의학 분야에만 머무는 연구가 아니었다. 향후 우주항공이나 고위 기술 산업 전반으로 확장될 수 있는 잠재력이 큰 프로젝트였다.“윤하준 씨, 혹시 그 회사가 고 대표랑 연관 있는 건 아니겠죠?”소예지는 빙 돌리지 않고 곧장 물었다. 그녀는 고이한이 운영하는 계열사들의 세부적인 사업 포지션까지 모두 알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윤하준은 한참을 생각한 끝에 고개를 저었다.“내가 아는 한, 노바스페이스와 고 대표는 직접적인 관계는 없어요. 고 대표 쪽은 최근 몇 년간 의료 기술이나 AI 분야에만 집중해 왔고요. 왜요, 혹시 고 대표가 편 교수 쪽에 다시 손을 뻗을까 봐 걱정돼서 그래요?”“고 대표가 운영하는 MD도 뇌과학 관련 분야에 관심이 있어요. 예전에 편 교수에게 직접 접촉한 적도 있었고요.”“그래요?”윤하준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그럼, 편 교수님은 그 제안을 긍정적으로 보신 것 같아요?”소예지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윤하준의 눈빛이 점점 진지해졌다. 사실 몇 년 전부터 고이한의 사업 확장은 상당히 거칠고 빠르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최근에는 어디에 있는지조차 알기 힘들 만큼 바쁘게 움직였고 정치권 인사들과의 접촉이 잦아 수도권을 오간다는 소문도 있었다.비록 세 사람은 어릴 적부터 형제처럼 지내온 사이였지만 요즘 들어서는 그의 사업이나 정치적 행보에 대해 서로 입을 여는 일이 거의 없었다.“편 교수님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연구의 독립성과 순수성이에요.”소예지는 차분하지만 단단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투자 배경이 복잡하게 얽혀 있으면 연구 자체가 흔들릴 수 있어요. 고 대표는 교수님이 원하는 투자자가 아니에요.”그 말에는 분명한 신념이 담겨 있었다.윤하준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그건 맞는 말이에요. 하지만...”잠시 말을 고르던 그는 결국 덧붙였다.“정식 계약 전에 전문가에게 투자사의 배경 조사는 꼭 받아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