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ZER LOGIN저녁, 소예지가 방을 정리하다 뒤를 돌아보니 어느새 고하슬이 보이지 않았다.아래층으로 내려가 보니 양희순도 주방을 정리하고 있었다.“하슬이 못 봤어요?”“아까 하슬이랑 젤리 둘 다 고 선생님 댁으로 갔어요.”양희순은 자연스럽게 대답하다가 입을 살짝 가리며 말을 고쳤다.“아, 그래요.”소예지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두 집을 이어놓은 문을 열고 고이한의 집으로 들어가자 아니나 다를까 2층에서 딸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소예지의 집이 따뜻하고 아늑한 분위기라면 고이한의 집은 전체적으로 넓고 썰렁했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지만 어딘가 차갑고 남자 혼자 사는 집다운 분위기가 짙었다.젤리는 소예지의 기척을 알아차렸는지 놀이방에서 곧장 뛰어나왔다.계단 앞까지 달려온 녀석은 반갑다는 듯 낑낑거리며 소예지를 맞았다. 마치 함께 놀아달라고 조르는 것 같았다.소예지는 젤리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준 뒤 놀이방으로 향했다.고하슬은 블록을 조립하고 있었고 고이한은 옆에서 도와주고 있었다. 따뜻한 조명 아래 나란히 앉아 있는 부녀의 모습이 무척 다정해 보였다.고이한은 어두운색의 편안한 옷을 입고 있었다. 희끗해진 머리카락은 조명 아래서 유난히 눈에 띄었다. 고개를 살짝 기울인 채 딸이 하는 말을 진지하게 들으며 필요한 레고 조각을 하나씩 찾아주고 있었다.소예지는 문 앞에 멈춰 서서 한동안 그 모습을 조용히 바라봤다. 잔잔하던 마음에 작은 돌멩이 하나가 떨어진 듯 파문이 일었다.불과 1년 전까지만 해도 고이한은 짙고 검은 머리에 자신감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제 겨우 서른인 나이에 머리가 희끗하게 세어버렸다. 혼자 감당해 온 무게가 말없이 드러나는 것만 같았다.소예지는 자신도 모르게 마음 한구석이 시큰해졌다. 심유빈과의 관계를 완전히 정리한 뒤, 고이한은 한없이 자신을 낮추면서까지 다시 자신과 딸의 곁으로 돌아오려 하고 있었다.어쩌면 자신이 그에게 너무 매정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엄마!”고하슬이 소예지를 발견하고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응.”오후 6시쯤 고수경의 차가 도착했다.고하슬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잔디밭을 신나게 뛰어다녔다. 젤리는 어린 주인의 목소리를 듣자 집 안에서 쏜살같이 뛰쳐나와 고하슬에게 달려갔다.“젤리!”고하슬이 반갑게 외쳤다.소예지와 고이한도 거실에서 나왔다. 정원에서 아이와 강아지가 반갑게 어울리는 모습을 보자 두 사람 모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아빠, 엄마!”고하슬은 두 사람에게 달려오더니 소예지의 품에 와락 안겼다.“나 새집 너무 좋아요.”소예지가 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이제부터 우리 여기서 사는 거야.”“응! 아빠랑도 같이 여기서 살 거예요.”고하슬은 꼭 짚어 강조했다. 예전에 아빠와 엄마가 늘 곁에 있던 때가 떠오른 듯 얼굴에는 행복이 가득했다.딸의 기쁨과 애정이 고스란히 담긴 말에 고이한의 마음도 뭉클해졌다. 고이한은 딸과 눈높이를 맞추려고 몸을 낮췄다.“그래. 아빠도 여기서 같이 살 거야. 이제 아빠가 매일 학교도 데려다주고 끝나면 데리러 갈게. 우리 하슬이랑 엄마도 잘 지켜주고.”고하슬의 눈이 반짝였다.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던 아이가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좋아요! 아빠, 내일 이안 만나게 해준다고 했죠?”“그럼. 내일 이안이랑 윤하준 아저씨 만나서 같이 소풍 갈 거야.”고이한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와! 드디어 이안 만난다!”고하슬은 신이 나서 제자리에서 폴짝폴짝 뛰었다.그때 고수경이 다가와 소예지에게 인사했다.“예지 언니.”고하슬이 고개를 돌려 고수경을 바라봤다.“고모, 내일 우리 하준 삼촌이랑 같이 소풍 가는데 고모도 갈래요?”고수경의 미소가 잠깐 굳었다. 이내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고개를 저었다.“고모는 못 갈 것 같아. 할 일이 좀 있거든.”“알겠어요.”고하슬은 더 묻지 않았다. 하지만 고이한과 소예지는 고수경이 가지 않으려는 진짜 이유를 알고 있었다.고수경도 조금 민망했는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오빠, 그럼 나 먼저 갈게.”“저녁 먹고 가지 그래요?”딸을 여기까지 데려다준
불이 켜지자 고이한의 시선이 너무도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눈빛에는 아직 가라앉지 않은 감정과 아쉬움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고이한이 다시 손을 뻗으려 하자 소예지가 곧바로 손등을 쳐냈다.“적당히 해.”그 말을 남기고 돌아서서 다시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고이한은 입술을 꾹 다문 채 웃었다. 눈빛에는 따뜻한 기색이 가득했다. 더는 장난치지 않고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나 소예지를 도왔다.“전기 기사 불러서 배선 한번 점검해 줄 수 있어?”소예지가 고개를 들어 묻자 고이한이 끄덕였다.“응. 내일 바로 사람 불러서 확인해 볼게.”소예지도 오늘 하루 종일 짐을 정리하느라 지쳐 있었다. 아직 책 두 상자가 남아 있었지만 더 할 힘이 없었다.“오늘은 그만 가자. 나머지는 내일 와서 정리하고.”두 사람 모두 간단히 뭔가를 먹긴 했지만, 고이한이 다시 제안했다.“시내 가서 뭐 좀 먹고 들어갈까?”소예지는 거절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시내에 있는 식당은 식사 시간이 지난 뒤라 손님이 많지 않았다. 잔잔한 블루스 음악이 흐르고 있어 편안하게 긴장을 풀기 좋은 분위기였고 느긋한 분위기 때문인지 밤공기마저 한층 부드럽게 느껴졌다.저녁을 먹은 뒤 고이한은 소예지를 집까지 데려다줬다.고하슬은 오늘 밤도 고씨 본가에서 자기로 했다. 내일 마지막 짐만 옮기면 이사는 모두 끝날 예정이었다. 지금 살고 있는 집은 당분간 비워둘 생각이었고 팔 계획은 없었다.다음 날 아침, 양희순이 마지막 남은 짐까지 모두 포장했다. 김경환은 이삿짐을 옮길 사람 몇 명을 데리고 와 짐을 새집으로 옮겨줬고 양희순도 함께 가서 정리를 시작했다.오후가 되어서야 새집 정리가 어느 정도 마무리됐다. 소예지는 양희순과 함께 근처 마트에 가서 필요한 생필품을 사고 주변 환경도 둘러봤다. 고이한 쪽도 이사가 모두 끝나 김경환이 짐 정리를 도와주고 있었다.오후 5시쯤, 소예지와 양희순이 장을 봐온 물건을 막 정리했을 때 차고 쪽에서 자동차 엔진 소리가 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고이한이 현관으로
나지막한 부름이 어둠 속에 울렸다.소예지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커다란 손이 얼굴을 감쌌고 곧바로 고이한의 입술이 세게 내려앉았다. 뜨거운 입술이 조심스럽게 맞닿자 애써 감정을 억누르면서도 간절히 갈망하는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졌다.소예지는 가쁜 숨을 내쉬며 본능적으로 고이한을 밀어내려 했다. 하지만 뒤통수를 감싼 손에 힘이 들어가며 물러날 틈조차 주지 않았다.빛 한 점 없는 고요한 서재 안은 숨이 막힐 만큼 뜨겁고 묘한 긴장감으로 가득 찼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니 다른 감각은 오히려 더 선명해졌다.고이한이 연구소의 실제 투자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부터 이미 머릿속이 어지러웠던 소예지는 쉴 새 없이 이어지는 입맞춤에 제대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고이한의 입맞춤은 거칠고 다급했다. 단단한 팔과 가슴에 빈틈없이 갇힌 채 뜨거운 감각이 온몸으로 번지자 소예지는 몸이 저릿해져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그러다 문득 너무 제멋대로라는 생각이 들었다.“읏... 놔...”잠시 정신을 차린 소예지는 고이한의 가슴에 두 손을 대고 힘껏 밀어냈다.고이한은 곧바로 소예지를 놓고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발에 무언가 걸렸는지 곧이어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쿵!무언가까지 함께 부딪치는 소리가 칠흑 같은 서재 안에 유난히 크게 울렸다.소예지는 덜컥 겁이 났다. 고이한의 뒤에는 테이블이 있었다.‘혹시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친 거 아니야? 기절한 건가?’“윽...”어둠 속에서 고이한이 고통을 참는 듯한 소리를 냈다.소예지는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급히 손을 뻗어 더듬었다.“고이한, 어디 있어? 괜찮아?”바닥을 한참 더듬던 손끝에 마침내 따뜻한 옷감이 닿았다. 곧 단단한 몸이 느껴졌다.소예지는 서둘러 고이한의 팔을 따라 손을 움직였다. 어깨와 목을 지나 얼굴까지 확인한 뒤 다시 뒤통수로 손을 옮겼다. 날카로운 테이블 모서리에 부딪치지만 않았기를 바랐다.“고이한, 말 좀 해봐.”소예지가 다급하게 재촉했다.그때 따뜻한 손이 갑자기 소예지의 손목을 붙잡았다
거의 떼를 쓰다시피 하면서도 한없이 자신을 낮추는 말에 소예지는 고이한을 흘겨봤다.“누가 당신을 때리고 욕해? 내가 무슨 악처도 아니고.”고이한의 입가에 웃음이 더욱 짙어졌다.“그럼 평생 당신 옆에서 부려 먹어. 서재 정리도 하고 무거운 짐도 옮기고 젤리 산책도 시키고 하슬이도 데리러 가고. 또... 당신이 원하는 건 뭐든 해줄 테니까.”마지막 말에는 묘하게 다른 뜻까지 담겨 있었다. 성인이라면 알아들을 수밖에 없는 의미였다.소예지는 또 한 번 고이한을 노려봤다.“밥이나 먹어.”“알겠어. 밥 먹을게.”고이한은 순순히 젓가락을 들면서도 먼저 소예지에게 반찬을 집어줬다.“밥 먹고 오후에는 새집 가서 같이 정리하자. 오늘 밤은 하슬이 엄마한테 맡기고.”“응.”소예지가 고개를 끄덕였다.점심을 먹은 뒤 소예지는 집으로 돌아가 남은 짐을 정리했다.오후 4시가 되자 김경환과 직원 몇 명이 찾아와 짐을 차에 실어줬고 소예지도 그들과 함께 새집으로 향했다.도착한 뒤에도 김경환 일행은 짐을 옮기며 정리를 도왔다. 소예지도 쉴 새 없이 물건을 정리하다 보니 어느새 저녁 7시가 되어 있었다.소예지는 직원들에게 먼저 저녁을 먹으러 가라고 한 뒤 혼자 남아 책장을 계속 정리했다. 고이한에게도 자기 집으로 돌아가 짐을 정리하라고 보냈다.한동안 움직이다 지친 소예지는 소파에 앉아 잠시 쉬었다. 그때 휴대폰에 뉴스 알림 하나가 떴다.무심코 화면을 훑던 소예지는 낯익은 이름을 발견하고 그대로 시선이 멈췄다. 교포 출신의 자산가 진기태가 투자 실패로 파산 위기에 놓였다는 경제계 주요 뉴스였다.소예지는 순간 숨이 막혔다. 진기태는 자신의 연구소에 거액을 투자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갑자기 파산 위기에 놓였다니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소예지는 곧바로 기사를 눌렀다. 자세한 내용을 확인하기도 전에 발소리가 들리더니 고이한이 안으로 들어왔다.소예지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진기태 대표님 기사 봤어?”고이한이 고개를 끄덕였다.“응. 봤어.”“정말
이런 힘쓰는 일은 역시 남자가 한 명 있으면 훨씬 수월했다. 소예지도 더는 사양하지 않았다.“그럼 부탁할게.”고이한의 가슴이 살짝 두근거렸다. 별것 아닌 한마디였지만 자신에게 무언가를 부탁하는 소예지의 모습이 고이한에게는 오히려 선물처럼 느껴졌다.사실 이런 일쯤은 사람을 불러 시켜도 됐다. 하지만 고이한은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직접 해주고 싶었다.고이한은 셔츠 소매 단추를 풀어 걷어 올렸다. 탄탄한 팔뚝이 드러나며 단단한 근육이 선명하게 잡혔다.소예지는 옆에 서서 고이한이 본체와 모니터를 각각 완충재로 꼼꼼하게 감싼 뒤 전용 상자에 조심스럽게 넣는 모습을 지켜봤다. 한동안 말없이 바라보고 있자 마음 한구석이 조금씩 무너져 내리는 듯했다.소예지는 아래층으로 내려가 생수 한 병을 가져왔다. 다시 올라왔을 때 고이한은 이미 상자 포장까지 끝낸 뒤였다. 소예지가 건네는 물을 본 고이한은 입가에 미소를 띠며 받아 들었다.뚜껑을 열고 고개를 젖혀 물을 마시자 목울대가 움직일 때마다 위아래로 선명하게 오르내렸다. 평소의 차분한 모습과 달리 어딘가 거칠고 자유로운 분위기가 느껴졌다.소예지는 슬쩍 시선을 돌리고 자신도 생수병을 열어 물을 마셨다.“고생했어.”“별로.”고이한은 소예지를 바라보며 말했다.“당신을 위해 뭐라도 해줄 수 있는 게 나한테는 좋은 일이야.”너무도 직설적인 말에 소예지는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랐다. 다행히 고이한도 대답을 기대하지 않은 듯 곧 화제를 바꿨다.“오후 4시에 김 비서가 사람 보내서 짐 옮겨줄 거야.”“응.”소예지가 문득 물었다.“당신 짐은?”“다 정리해 놨어. 언제든 옮기면 돼. 원래 짐이 별로 없어서.”점심때가 되자 양희순은 오늘 이삿짐을 싸느라 장을 보지 못했다며 미안해했다. 덕분에 고이한에게는 자연스럽게 소예지에게 외식을 제안할 명분이 생겼다.소예지는 양희순에게도 함께 가자고 했지만 양희순은 집에서 간단히 국수나 끓여 먹겠다며 사양했다. 결국 소예지는 고이한과 함께 단지 맞은편에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