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 connecter어느새 날이 완전히 어두워졌다. 잔디밭 곳곳에서는 반딧불이가 작은 빛을 깜빡이며 날아다녔고 그 모습을 발견한 고하슬이 신이 나서 외쳤다.“엄마, 보여요! 엄청 많아요!”딸이 좋아하는 모습을 본 소예지도 웃었다.“그럼 우리도 가보자.”직원의 안내를 받아 일행은 오솔길을 따라 잔디밭 안으로 들어갔다. 고하슬이 고이한의 손을 잡아끌었다.“아빠, 나 잡는 거 도와줘요.”“그래.”고이한은 딸과 함께 반딧불이를 잡기 시작했고 소예지와 고수경도 각자 유리병을 하나씩 들었다. 오늘 밤은 유리병 안에서 반짝이는 반딧불이를 마음껏 구경하고 내일 아침이 되면 다시 자연으로 돌려보내기로 했다.30분 가까이 반딧불이를 잡다 보니 어느새 유리병마다 제법 많은 빛이 담겼다. 숙소로 돌아가는 동안에도 고하슬은 유리병을 품에 꼭 안은 채 연신 싱글벙글 웃었다.밤이 되자 고하슬은 침대 곁에 놓아둔 유리병에서 반짝이는 불빛을 한참 구경하다 행복한 얼굴로 잠들었다.하지만 소예지는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낮에 잤던 낮잠 때문인지 눈이 말똥말똥했고 저녁 내내 돌아다닌 데다 물도 제대로 마시지 않아서인지 목까지 말라왔다. 결국 소예지는 물을 마시러 아래층으로 내려갔다.거실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별생각 없이 물을 가지러 가던 소예지는 소파에 앉아 있는 사람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어두운 조명 아래 고이한이 잠옷 차림으로 앉아 와인을 마시고 있었다. 고이한도 아직 잠들지 못한 모양이었다.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고이한이 부드럽게 웃으며 물었다.“당신도 아직 안 잤어?”“물 마시러 내려왔어.”소예지가 정수기 쪽으로 향하자 고이한도 자리에서 일어났다.얇고 편안한 잠옷을 입은 소예지는 살짝 흐트러진 긴 머리를 등 뒤로 늘어뜨리고 있었다. 은은한 조명 아래 가느다란 허리와 하얀 피부가 더욱 도드라져 평소보다 한층 부드러운 분위기를 풍겼다.정수기 앞에 도착하자 뒤에서 인기척이 가까워졌다. 소예지가 고개를 돌리니 어느새 다가온 고이한과 눈이 마주쳤고 깊은 눈동자 속에는 쉽게
소예지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얼굴이 확 달아오르자 황급히 고이한의 옷을 붙잡고 있던 손을 놓고 품에서 물러나려 했다.하지만 고이한은 바로 팔을 풀지 않았다. 소예지가 제대로 균형을 잡고 선 것을 확인한 뒤에야 천천히 놓아줬다.“조심해. 여기 잔디밭에 움푹 파인 곳이 있네.”고이한은 낮은 목소리로 당부하며 붉어진 소예지의 얼굴을 바라봤다.“많이 놀랐어?”소예지는 몇 걸음 떨어졌지만 심장은 여전히 빠르게 뛰고 있었다.“괜찮아... 고마워.”마음도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하지만 옆에 선 고이한이 남몰래 기분 좋은 미소를 짓고 있는 건 보지 못했다. 방금 전의 짧은 포옹이 못내 아쉬운 눈치였다.“조금만 더 걷자.”고이한은 이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응.”소예지도 산책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는 않았다. 다만 그 뒤로는 괜히 또 고이한에게 신세 지는 일이 없도록 발밑을 꼼꼼히 살피며 걸었다.두 사람은 조금 더 걸어 전망이 탁 트인 곳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팔각정이 하나 세워져 있었고 멀리 보이는 산봉우리 사이로 아침 안개가 자욱하게 피어올라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을 만들어냈다.소예지도 몇 초 동안 넋을 놓고 바라봤다.이윽고 정자 안에 놓인 의자에 앉자 고이한도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긴 몸을 느긋하게 기대고 두 다리를 편 채 앉아 있는 모습이 무척 여유로워 보였고 바람에 흐트러진 머리카락 아래로 선명한 이목구비가 드러나 평소보다 한층 자유분방한 분위기가 느껴졌다.소예지는 자연스럽게 고이한에게 시선이 갔다. 그도 웃으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계속되는 시선이 부담스러워진 소예지가 얼굴을 돌리며 물었다.“왜 자꾸 쳐다봐?”“예뻐서.”고이한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소예지는 괜히 심기가 불편해져 툭 내뱉었다.“예뻐도 이제 당신이랑은 상관없잖아.”고이한이 웃음을 터뜨렸다. 상체를 살짝 앞으로 기울인 채 뜨거운 눈빛으로 소예지를 바라봤다.“왜 상관없어? 다시 당신과 가까워지려고 노력하고 있는데.”소예지는 고이한
소예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고이한이 손을 잡도록 내버려뒀다. 분위기가 좋아서인지 굳이 이 순간의 평온함을 깨고 싶지 않았다.맞잡은 손을 타고 고이한의 체온이 전해졌다. 뜨겁다 싶을 만큼 따뜻한 온기였다. 시간마저 멈춘 듯 고요했다.그렇게 2분쯤 지났을 때, 소예지가 손가락을 살짝 움직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 하슬이 씻겨야 해.”그제야 고이한이 천천히 손을 놓았다. 하지만 아쉬움이 남은 듯 손끝으로 소예지의 매끈한 손등을 가볍게 쓸고 지나가며 낮게 웃었다.“그래.”두 사람은 앞뒤로 거실에 돌아왔다. 고하슬도 시간이 늦었다는 걸 아는지 더 놀겠다고 조르지 않고 고이한에게 손을 흔들었다.“아빠, 그럼 나 엄마랑 올라갈게요!”“그래, 올라가.”고이한은 다정한 미소로 딸을 바라봤다. 자신은 거실에 조금 더 머물 생각이었다.소예지는 고하슬을 씻겨준 뒤 자신도 샤워를 하고 나왔다. 침대로 돌아와 보니 고하슬은 어느새 혼자 잠들어 있었고 소예지도 그 옆에 누워 딸을 품에 안은 채 함께 잠들었다.다음 날 아침, 소예지는 고하슬에게 편한 옷을 입혀줬다.긴 바지에 자외선을 막아줄 긴소매 상의를 입히고 머리를 앙증맞게 하나로 묶어주자 고하슬은 할머니를 찾겠다며 거실을 나섰다.소예지는 정원에 서서 딸이 가는 모습을 지켜봤다. 고수경이 밖으로 나와 고하슬을 맞아주는 것까지 확인한 뒤에야 거실로 돌아왔다.아침 식사는 숙소로 가져다주기로 되어 있었다. 소예지가 위층으로 올라가려는데 마침 2층 객실 문이 열리며 고이한이 나왔다.회색 운동복 차림에 머리도 아직 조금 헝클어져 있어 평소와는 달리 편안하고 활동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하슬이는 할머니한테 갔어.”소예지는 그렇게 말하고 지나가려 했다.고이한이 그녀를 불러 세웠다.“산책할래?”사실 방으로 돌아가 봐야 휴대폰을 확인하고 메일 몇 통을 처리하는 정도였다. 급한 일도 아니었다. 이런 산속에서 여유롭게 걸어볼 기회도 흔치 않았기에 소예지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잠깐만 기다려.”고이
방 안이 조용해지자 소예지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시 몸을 숙여 남은 옷을 정리한 뒤 옷장에 하나씩 걸어 넣었다.정원에서는 고하슬이 고수경과 잔디밭에서 비눗방울을 불며 놀고 있었다. 고이한도 공 하나를 들고 다가갔다. 넓게 펼쳐진 잔디밭은 어른들이 아이와 함께 뛰어놀기에 딱 좋았다.딸의 웃음소리를 들은 소예지는 발코니로 나가 난간에 기대 아래를 내려다봤다. 고이한은 딸과 즐겁게 공을 차며 놀고 있었다. 다정하게 어울리는 부녀의 모습이 보기 좋았다.별장 2층에서 바람을 쐬며 경치를 구경하던 최현숙과 진가영도 아래층의 부녀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저녁은 리조트 내 식당에서 먹었다. 창밖에는 물이 흐르는 정원이 꾸며져 있었고 음식도 정갈하고 맛있었다. 식사 내내 분위기도 편안하고 화기애애했다.저녁을 먹은 뒤 가족들은 산책을 하며 별장으로 돌아갔다. 달빛 아래 펼쳐진 리조트는 낮과는 또 다른 고즈넉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곳곳에 등불이 켜져 있었고 풀벌레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걷던 고하슬이 갑자기 잔디밭에서 작게 반짝이는 반딧불이를 발견하고 신이 나 달려갔다.“아빠, 여기 진짜 반딧불이 있어요!”하지만 잔디밭 위를 날아다니는 건 한두 마리뿐이었고 그마저도 금세 자취를 감췄다. 고하슬이 아쉬운 얼굴로 코를 훌쩍였다.“어디 갔지?”고이한은 딸 앞에 쪼그려 앉아 머리를 쓰다듬었다.“반딧불이는 여기 오래 머물지 않아. 내일 저녁에 리조트 뒤쪽 풀밭으로 가자. 거기 가면 훨씬 많아.”“오늘 밤에 가면 안 돼요?”“오늘은 너무 늦었잖아. 다들 피곤하니까 푹 자고 내일 가는 건 어때?”고이한이 다정하게 달래자 고하슬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그렇게 해요.”별장 앞에 도착하자 최현숙이 당부했다.“다들 일찍 쉬어. 내일 또 놀러 다녀야지.”“오빠, 예지 언니. 잘 자요.”고수경은 손을 흔들며 어머니와 할머니를 모시고 별장 안으로 들어갔다.소예지와 고이한은 고하슬과 함께 100미터쯤 떨어진 다른 별장으로 향했다.별장에 돌아왔지만 고하슬은
고이한은 그제야 볼을 빵빵하게 부풀린 딸을 바라보며 다정하게 웃었다.“듣고 있어.”식사를 마친 뒤 고이한은 소예지의 차를 운전해 두 사람을 집까지 데려다줬다. 그날 밤에는 고수경에게 전화가 왔다. 벌써 여행 준비를 시작한 모양이었다.소예지도 가기로 한 곳을 따로 찾아봤다. 깊은 산속에 자리 잡은 고급 휴양 시설로 주로 부유층이 휴가나 휴식을 위해 찾는 곳이었다.자연환경도 잘 보존되어 있었고 차로는 약 200킬로미터 거리였다.일정은 금세 정해졌다. 금요일 오후에 출발해 월요일 오전에 돌아오기로 했고 소예지도 그에 맞춰 일을 정리해 두었다.금요일 오후, 일행이 탄 차량 여섯 대가 조용히 도심을 빠져나와 외곽 산길로 향했다. 가는 내내 고하슬은 신이 난 새처럼 창가에 붙어 바깥 풍경을 구경했고 궁금한 것도 어찌나 많은지 쉴 새 없이 질문을 쏟아냈다.고이한은 그런 딸의 질문에 하나하나 귀찮은 기색 없이 대답해 줬다.소예지는 할머니와 같은 차를 탔다. 두 사람은 이야기를 나누며 창밖 풍경을 감상했고 최현숙도 오랜만의 나들이가 무척 즐거운 눈치였다.약 200킬로미터를 달려 세 시간 만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산길로 들어서자 공기부터 확연히 달라졌다. 눈길이 닿는 곳마다 울창한 나무가 빼곡했고 산 전체가 짙은 녹음으로 뒤덮여 있었다.휴양지는 한옥의 멋을 살린 전통 정원 형태로 꾸며져 주변 자연과도 자연스럽게 어우러졌고 고풍스러우면서도 웅장한 분위기가 옛 대갓집을 떠올리게 했다.관리인은 미리 나와 기다리고 있다가 일행을 반갑게 맞으며 독채 두 동으로 안내했다.“정말 예쁘구나. 건물도 고풍스럽고 아주 멋져.”평소 고풍스러운 물건을 좋아하는 최현숙은 이번 여행지가 무척 마음에 든 눈치였다.숙소를 나누려 하자 고하슬이 기다렸다는 듯 큰 소리로 말했다.“나는 아빠, 엄마랑 같은 집에서 잘래요!”고수경은 조카가 그 말을 해주기만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바로 받아쳤다.“그래, 그럼 나는 할머니랑 엄마 모시고 옆에서 잘게. 이렇게 정하면 되겠네!”소예지도 별
이서연은 차분한 표정의 소예지를 바라보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둘은 동갑이었지만 소예지는 그동안 너무 많은 일을 겪어왔다.학창 시절 소예지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그때는 맑고 예뻤고 세상 풍파 한 번 겪어보지 않은 사람처럼 순수했다.그런 사람이 누군가를 사랑했다면 분명 누구보다 뜨겁고 한결같이 사랑했을 텐데 결국 이혼까지 겪으며 마음에 깊은 상처가 남고 말았다.그래서일까, 지금의 소예지는 결혼을 바라보는 시선부터가 예전과 달랐다.감정에 휩쓸리기보다 이성적으로 현실적인 부분까지 하나하나 따져보려 했고 그렇게 예전보다 단단해진 모습을 볼 때마다 이서연은 마음 한구석이 아렸다.고이한이 정말 소예지를 사랑한다면 혼인신고를 했는지 안 했는지가 그렇게까지 중요한 일일까 싶었다.어차피 소예지의 삶은 단순했다. 일과 딸이 전부였고 누구와도 애매하게 얽히지 않았으며 누군가에게 기대어 살지도 않았다.무엇보다 소예지는 결혼 여부로 자기 가치를 증명해야 할 사람이 아니었고 설령 다시 결혼하지 않는다 해도 혼자서 충분히 잘 살아갈 사람이었다.두 사람은 업무 이야기를 조금 더 나누다 헤어졌고 소예지는 자리로 돌아와 다시 자료를 정리하기 시작했다.그때 고이한에게서 메시지가 왔다.[하슬이 데리고 사무실에 왔어. 당신도 올래? 저녁 같이 먹자.]소예지가 답장을 보냈다.[응. 다섯 시 반쯤 갈게.][그래, 기다릴게.]저녁에는 셋이 고이한의 회사 근처 한식당에서 함께 밥을 먹으며 곧 있을 고하슬의 개학 이야기를 나눴다.고하슬은 학교 갈 생각에 잔뜩 들떠 있었다.“엄마, 아빠가 학교 가기 전에 반딧불이 보러 데려가 준대요. 엄마도 우리랑 같이 가요!”오후에 아빠와 나눈 이야기가 생각났는지 고하슬이 불쑥 말을 꺼내자 소예지가 놀란 눈으로 고이한을 바라봤다.고이한도 고개를 들어 소예지와 눈을 맞추더니 부드럽게 웃었다.“하슬이가 반딧불이 다시 잡아보고 싶다고 하도 졸라서 생태공원에 한번 데려가려고.”소예지가 딸을 바라보며 말했다.“가고 싶으면 얼른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