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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춘귀
주문춘귀
Autor: 경옥

제1화

Autor: 경옥
한겨울의 깊은 밤, 휘몰아치는 폭설 소리가 귀가를 스쳤고, 휘장이 바람에 날려 탁탁거리는 소리를 냈다.

계연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얼어붙은 손가락으로 휘날리는 휘장을 걷어내고 짙은 눈이 덮인 먼 곳을 바라보았다. 멀리서 다가오는 말발굽 소리가 눈보라 속에 섞여 선명하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똑똑히 들었다.

뒤에서는 가냘픈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수, 옥현 오라버니가 우릴 데리러 올까요?”

계연수는 휘장을 걷고 대답 없이 피곤한 듯 눈을 감았다.

그녀는 사옥현이 올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아무리 심한 눈보라라도 그는 올 것이었다.

오늘 그녀는 원래 이명유와 함께 온천 별장에 가고 싶지 않았지만 사옥현이 명유가 감기에 걸렸으니 사촌 형수로서 그녀도 명유를 돌봐야 한다고 해서 간 것이었다.

그는 차가운 말투로 말을 하더니 당연한 듯 모든 것을 준비했다.

다만 돌아올 때, 큰 눈이 길을 막았고 바퀴가 갈라져 마차가 도중에 갇힌 것이었다.

마부가 말을 타고 돌아가서 소식을 전한 지 거의 두 시진이 지났으니 이제 곧 올 것이었다.

멀리서 전해오는 말발굽 소리는 눈보라 치는 밤에 북소리처럼 울려 퍼졌고, 가까워질수록 더욱 초조해졌다.

마침내 말소리가 울리더니 마차 밖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명유야.”

곧이어 휘장이 젖히더니 길고 큰 손이 들어왔다.

계연수는 그 손을 내려다보며 분명 자신을 위해 온 것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이명유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물었다.

“옥현 오라버니, 왜 이제야 오신 겁니까?”

이명유는 부드러운 손을 사옥현의 손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너무 두려웠던 탓인지, 나비처럼 그의 품에 달려들어 흐느꼈다. 가늘게 흐느끼는 소리는 눈이 내리는 밤에 길고 따뜻한 봄 풍경처럼 사람들을 빠져들게 했다.

계연수는 묵묵히 이명유의 등에 놓인 길쭉한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그 손은 잠깐 멈칫하더니 다시 품에 안긴 사람을 꼭 껴안았다.

곧이어 두툼한 여우털 옷이 가녀리고 수려한 어깨에 걸쳐졌다.

계연수는 시선을 돌려 휘장을 바라보았다.

휘장은 눈바람에 펄럭였고 눈보라가 들어와 그녀의 뺨을 때렸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추위를 느낄 수 없었다.

그녀는 꽁꽁 얼어붙은 손가락을 소매로 깊숙이 집어넣었다.

이명유는 사옥현의 품에서 한참 동안 울다가 남자의 부드러운 위로 속에서 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그녀는 남자에게 안겨 마차에서 나갔다.

계연수는 밖에서 이명유가 흐느끼며 말하는 걸 들었다.

“형수도 마차 안에 있어요.”

남자의 대답은 눈보라 속에 묻혀 계연수는 듣지 못했지만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는 몸에 걸친 망토를 꽉 조이고, 마차 안의 바람에 흔들리는 등이 부서진 그림자를 드리우는 것을 바라보았다.

곧 휘장이 다시 열렸고, 고귀하고 차가운 얼굴이 그녀 앞에 나타나 오늘 밤의 첫마디를 했다.

“당신들을 데리러 오던 마차가 도중에 눈에 막혀 앞으로 갈 수가 없어서 먼저 말을 타고 온 거야. 명유가 원래 추위를 많이 타는 데다 이번 일로 크게 놀란 것 같아. 마차에 한 명 밖에 태울 수 없으니 명유 먼저 데려갈게. 조금만 더 기다리면 마차가 금방 올 거야.”

계연수는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아무것도 묻지 않고 대답했다.

“네.”

남자의 얼굴은 어둡고 흔들리는 등불 아래에서 미세한 변화가 생겼다. 그는 계연수의 평온한 얼굴을 바라보더니 그녀가 몸을 움츠리는 모습을 보며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계연수를 바라보며 한마디 설명했다.

“올 때 여우털 옷을 한 벌밖에 가져올 수 없었어. 넌 형수니까 명유에게 양보해.”

계연수는 그와 혼인을 하던 날부터 이런 말을 수도 없이 들었고, 그와 혼인을 하면 당연히 억울함을 당해야 하는 것 같았다.

예전 같으면 그녀는 이미 그에게 도대체 누가 당신 부인인지 따졌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사옥현은 더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보았다.

그는 한 마디도 해명하지 않고, 그녀가 억지 부리는 미치광이라도 된 것처럼 얼음 같은 눈빛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계연수는 따지는 것도 이미 지쳐버렸고, 따진다고 해도 그녀를 데리고 가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사옥현의 마음속에서 자신은 결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어서 가십시오. 명유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녀가 말을 마치자 사옥현은 미간을 찌푸리며 복잡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계연수는 할 말이 없어 눈을 감았다.

사옥현은 입술을 오므리고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계연수를 한 번 본 후, 휘장을 내렸다.

마차 밖에서는 곧 말발굽 소리가 났고, 소리는 점점 눈보라 속으로 사라졌다.

이때 옆에서 시녀 용춘의 걱정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나으리께서 부인을 혼자 여기에 두고 가다니, 정말 걱정이 안 되는 것일까요?”

계연수는 천천히 몸을 용춘의 어깨에 기대어 발 옆의 드문드문 불빛만 남아 있는 숯불을 바라보았다.

냉기를 한 모금 뱉은 후, 그녀는 뜻밖에도 이런 쓸쓸함이 싫지가 않았다.

그녀는 조용히 눈을 감고 말했다.

“용춘아, 나 좀 잘게.”

눈을 감는 순간, 그녀는 3년 전의 자신을 보았다.

그 해 초가을, 그녀는 사 씨 저택 앞에서 사옥현이 나타날 때까지 오랫동안 기다렸었다.

그녀는 두 사람의 혼서를 손에 꽉 쥐고 사 씨 저택으로 달려가 긴장한 마음을 억누르고 일부러 침착한 척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저는 계씨 집안의 딸입니다. 제가 여기에 온 이유는 혼약이 아직 유효한지 물어보려고 왔습니다.”

당시 그녀는 이미 성인이 되었고, 평생 가장 용감한 행동을 했다.

그녀는 긴장해서 손이 땀에 흠뻑 젖었고, 무슨 결과를 얻을 수 있을지 몰랐다.

그때 그녀의 아버지는 이미 감옥에 갇혔고, 계부는 수색당했으며, 예전에 방문객이 많던 계부는 엎친데 덮친 격이 되었다.

그녀와 어머니는 연루되지 않아 이미 몰락한 외주부에게 얹혀살고 있어서, 사옥현이 이 혼약을 깨려고 해도 아무도 그를 비난하지 않을 것이었다.

왜냐하면 지금은 예전과 같지 않고 인지상정이란 게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었다.

계연수도 그때 사옥현이 거절하면 그 자리에서 혼서를 찢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땐 사옥현이 경성에서 이미 약간의 명성을 얻었고, 젊은 나이에 벼슬을 따내 이름을 떨쳤다. 게다가 외모까지 준수했기 때문에 경성의 수많은 명문 여인들이 그와 혼인을 하고 싶어 했다.

그는 더 좋은 인연을 만날 수 있었다.

그녀는 심지어 그가 혼인을 거부하면 혼서를 찢어버리고 혼약을 없었던 일로 여기려고 했다.

하지만 사옥현은 입을 열어 승낙했다.

계연수는 그때 사옥현이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잊어버렸다. 다만 그의 목소리만 기억하고 있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그의 목소리는 약간 차가운 늦가을에 그녀에게 온기를 안겨주었다.

“부모의 명령이니 혼약은 당연히 지켜질 것이다. 조만간 어머니를 모셔와 혼인 날짜를 상의하도록 하지.”

그때 계연수는 평생 자신을 사랑해 줄 좋은 사람을 만났다고 생각했다.

그녀를 위해 기꺼이 도움을 준 사람이니, 분명 아버지와 어머니처럼 사이좋게 잘 지낼 것이라고 생각했다.

계연수는 자신에게 또다시 가정이 생긴 것 같았다.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그가 자신과 혼인을 하겠다고 한 이유는 명성 때문이었고, 그의 마음속에는 이미 사랑하는 여인이 있었다.

새하얀 겨울날, 그녀는 마치 꿈에서 깨어난 듯 멍하니 돌아서 실망스러운 눈과 마주쳤다.

“잘 보거라. 이게 바로 네가 선택한 부군이다.”

또 한 차례 살을 에는 듯한 찬바람이 두꺼운 휘장을 뚫고 들어와 꿈속의 사람을 깨웠다.

계연수는 눈을 번쩍 뜨고 이미 다 타버린 숯불을 바라보며 더 이상 얼어붙은 손으로 헤집을 힘이 없었다.

그녀는 열네 살이 되던 해에 감옥에 가서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아버지가 여전히 다정하게 그녀의 손을 잡고 했던 말이 생각났다.

“연수야, 울지 말거라. 이 세상에는 절대적인 옳고 그름이 없고, 절대적인 좋고 나쁨도 없단다. 그러니 관청의 부침도 오르락내리락하는 법이지. 영원히 이길 수 없듯이, 진 사람도 다시 살아날 희망이 있는 거란다. 과거를 잊고 앞으로 나아가거라.”

계연수는 휘장 밖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문득 깨달았다. 추운 겨울 속에서 영원히 멈춘 인연을 끝내야만 아버지가 말씀하신 대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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Último capítulo

  • 주문춘귀   제360화

    계연수의 지난 반생은 담장 안에 갇힌 나날이었다.늘 조심했고 순응했으며 고요했다. 그러나 진심은 얻지 못했고 손에 쥔 것도 없었다. 그래서 이번만큼은 자유로운 삶을 살아보고 싶었다.심서준을 향한 마음은 분명했다. 그와 함께 있으면 편안했고 신뢰가 있었으며 의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남녀 간의 사랑이냐 묻는다면, 그건 또 아니었다.잠시 망설이던 계연수는 낮게 물었다.“가문을 떠나서라도 저는 화리한 몸입니다. 심가에서 허락하겠습니까?”그녀의 망설이는 눈빛을 본 순간, 심서준은 이미 알았다. 그녀의 마음 깊은 곳은 아직 그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지금은 자신이 억지로 붙잡고 있는 셈이었다. 그러나 억지로라도 붙잡고 싶었다. 설령 그녀가 끝내 떠나려 한다면 다른 방법을 써서라도 남게 할 생각이었다.평생 단 한 번. 이 한 번만은 이기적으로 굴겠다고 마음먹었다. 그 대가가 그녀의 원망일지라도.심서준은 고개를 숙였다. 소매 끝에서 빗물이 한 방울씩 떨어지고 있었다.목소리가 낮게 갈라졌다.“그런 건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저는 당신의 답만 필요합니다.”계연수는 그를 바라보았다.몸을 약간 숙인 채 앉아 있는 그의 모습. 젖은 옷이 몸에 밀착되어 있었고 단정하던 머리칼도 몇 가닥 흘러내려 있었다. 빛과 그림자가 스치는 얼굴은 어딘가 연약해 보이면서도 여전히 고귀했다.이런 심서준은 처음이었다.늘 엄정하고 단정했던 사내였고 차갑고 빈틈없이 완벽했던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자신의 앞에서 가문의 앞날을 말하며 근심과 계산을 털어놓고 곁에 믿을 수 있는 여인은 오직 그녀뿐이라 말하며 도움을 청하고 있었다.계연수의 입술이 달싹였다.거절해서는 안 된다는 걸 알았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공허와 서운함이 꿈틀거렸다. 그것이 그와 혼인하는 것에 대한 막막함 때문인지, 아니면 이미 세워 둔 자신의 미래를 접어야 한다는 아쉬움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그저 두 감정이 뒤엉켜 가슴을 채울 뿐이었다.방 안에는 침묵만이 흘렀다.맑은

  • 주문춘귀   제359화

    심서준은 고개를 약간 숙인 채 말을 이었지만 흐릿한 촛불 아래에서도 그의 시선은 줄곧 계연수에게 머물러 있었다.그녀의 얼굴에 번지는 충격과 혼란을 그는 똑똑히 보고 있었다. 그녀는 떠나고 싶어 했다. 다른 곳으로 가 속박 없는 삶을 살고 싶어 했다.그러나 그는 그녀를 붙잡고 싶었다. 심가의 깊은 저택 안에, 자신의 세계 안에 오래도록 그녀를 가두고 싶었다. 그것이 그녀가 바라던 자유로운 삶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한 번은 놓아주려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럴 수 없었다.훗날 그녀 곁에 다른 남자가 설지도 모른다는 생각, 다시 혼인할지도 모른다는 상상, 심지어 그 사촌, 고준안과 함께 떠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 그 생각만으로도 숨이 막혔다.그녀가 언젠가 다른 이의 여인이 될지도 모른다는 상상 앞에서 그는 끝내 손을 놓지 못했다. 그래서 이번만은 이기적이고 싶었다.비에 흠뻑 젖은 모습으로 그녀 앞에 선 것도 어쩌면 의도된 것이었다. 이 초라하고도 애처로운 형색이 그녀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흔들어 주기를 바라면서.그의 목소리가 낮게 갈라졌다.몸을 조금 앞으로 기울이며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폐하께서 제게 혼인을 내리려 하십니다. 태후의 친정 쪽 여인입니다.”계연수는 잠시 멍해졌다가 조심스레 물었다.“심 대인께서 그 혼인을 원치 않으시는 겁니까?”심서준은 담담히 시선을 내렸다.“그 혼인은 심가에 씌우는 족쇄입니다.”잠시 말을 골랐다.“지금의 심가는 겉으로는 번성해 보이지만 실은 기름을 끼얹은 불꽃과도 같습니다. 폐하의 하사는 태후와 심가에 은혜를 보이는 듯하면서 동시에 두 외척을 공평히 아끼는 듯한 모양을 세우는 일이지요. 허나 또 한편으로는, 태후의 눈을 제 곁에 두는 일이기도 합니다. 심가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에 황실의 눈이 더해지는 셈이지요.”그의 음성은 낮았지만 또렷했다.“외척의 권세는 제왕의 마음에 늘 가시와 같은 존재입니다. 이미 폐하께서는 심가를 경계하고 있습니다. 언젠가 심가를 제어하려

  • 주문춘귀   제358화

    법화시의 객방은 소박하기 이를 데 없었다.작은방 하나에 변변한 가구도 없었다. 놓인 의자마저 심서준의 큰 체구를 감당하기엔 버거워 그가 앉자 삐걱 소리가 났다.문간에서 시작된 물자국이 방 안으로 길게 번졌다. 검은 옷자락에서는 여전히 빗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계연수는 급히 마른 수건을 가져와 그에게 내밀었다.“제가 밖에 나가 옷을 한 벌 구해 오겠습니다.”말을 마치고 막 그를 지나치려는 순간, 손목이 단단히 붙들렸다.심서준의 손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 서늘함에 계연수는 본능처럼 몸을 떨었다. 놀란 얼굴로 돌아보자 그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그 눈동자에는 쉽게 읽히지 않는, 그러나 분명한 감정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잠시 뒤, 그는 손을 놓았다.“먼저 이야기부터 하겠습니다.”계연수는 그의 기색을 헤아릴 수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슨 뜻으로 이 밤에 여기까지 온 것인지 짐작조차 어려웠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순순히 그의 말에 따르게 되었다.그래도 한 번 더 물었다.“그래도… 옷이 다 젖으셨습니다.”심서준은 시선을 내렸다. 촛불이 얼굴 절반을 비추었다. 온몸이 비에 젖어 있음에도 그는 여전히 단정하고 냉정한 심 대인의 모습 그대로였다.“걱정 마십시오. 괜찮습니다.”잠시 멈췄다가 다시 그녀를 바라보았다.“할 말이 있습니다.”계연수는 어리둥절했다. 무엇이기에 이 폭우를 뚫고 온 것일까. 그러나 그의 깊고 또렷한 눈을 마주하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말씀하십시오.”그녀는 그의 옆 의자에 앉았다. 고개를 숙인 채, 그의 검은 장화 아래로 번지는 물웅덩이를 바라보았다. 무릎 위에 얹은 손가락이 괜히 소매 끝을 움켜쥐었다.그때, 은은한 술 냄새가 스쳤다.…술을 마셨나?마음이 어지러웠다. 그래서일까, 심서준이 처음 꺼낸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그녀는 무심코 되물은 뒤에야 고개를 들었다.“무슨 말씀을…”혹시 잘못 들은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얼굴에 어색한 기색이 번졌다.그러나 그의 시

  • 주문춘귀   제357화

    법화시의 객방 안, 계연수는 얇은 홑옷 차림으로 침상 머리에 기대앉아 책을 펼치고 있었다. 절에서 인연을 맺어 받아 읽은 ‘법화현의’였다.두어 쪽 넘겼을 뿐, 글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마음이 묘하게 가라앉지 않아 억지로라도 스스로를 다잡으려는 것이었다.내일이면 길을 떠난다. 앞날은 알 수 없고 한 번도 발을 디딘 적 없는 땅으로 향한다.어머니 앞에서는 담담한 얼굴로 모든 것을 준비해 두었다 말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앞으로의 삶은 오롯이 제 힘으로 헤쳐가야 한다. 미지의 길은 두려움이기도 했으니 말이다.촛불이 가늘게 흔들렸다.계연수는 한 장을 더 넘겼으나 밤은 이미 깊어 있었다. 사방이 고요한 가운데 창밖의 폭우 소리만이 쉼 없이 들려왔다.빗소리가 창호지를 두드렸다. 이상하게도 그 소리가 오히려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어주었다.책을 덮어 머리맡에 내려놓고 막 눕기 위해 몸을 옮기려는 순간, 문가에 어렴풋한 그림자가 비쳤다. 길고 선명한 형체였다. 흔들리는 촛불 속에서 실체가 있는 듯 없는 듯 아른거렸다.계연수의 심장이 단번에 조여들었다. 절이라 하여 도둑이 들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다.그녀는 방 안을 재빨리 훑어보았다. 손에 잡힐 만한 물건을 찾으며 막 문밖의 사람에게 누구냐 묻으려던 찰나, 그 그림자가 움직였다.빗소리를 가르며 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전해졌다.“저입니다.”익숙한 음성이었다. 서늘하고도 낮은, 심서준의 목소리.그 순간, 계연수의 긴장이 스르르 풀렸다.몸이 살짝 휘청일 만큼, 단단히 조여 있던 마음이 풀어져 내렸다.왜 이 시간에, 이런 비 속에 와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문밖에 선 사람이 심서준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다른 걱정은 사라졌다.그녀는 흰 홑옷 차림이었다. 심서준 앞에서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은 마음에 그녀는 낮게 대답하며 잠시 기다려 달라 하고 급히 옷을 챙겨 입었다.긴 머리는 정갈하게 빗을 겨를이 없었다. 방 안에 거울도 없었으니 그저 흰 비녀 하나로 느슨하게 틀어 올린 뒤, 서둘러 문

  • 주문춘귀   제356화

    진안평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 몇 마디라도 더 해 보려 했으나 심서준은 이미 마차에 올라타 있었다. 더 말 섞을 뜻이 없다는 것이 분명했다.마차 안에 앉은 심서준의 관복은 빗물에 젖어 서늘한 기운이 배어 있었다. 그는 미간을 살짝 좁히며 몸을 숙였다.앞에 놓인 작은 탁자 위의 등불이 그 차갑고도 고결한 얼굴을 비추었다. 길게 뻗은 눈썹 사이에는 늘 그렇듯 거리를 두는 기색이 서려 있었다.손을 잠시 불에 쬔 뒤, 옆에 놓인 권책을 집어 펼쳤다. 눈길도 들지 않은 채 낮게 내뱉었다.“말하거라.”서늘하고 담담한 음성에, 밖에서 전할 말을 기다리던 문하가 흠칫 놀라 서둘러 휘장을 걷고 들어왔다.허리를 숙인 채 급히 입을 열었다.“계 아가씨께서 이것을 보내셨습니다. 나으리께 전하라 하셨습니다.”문하는 긴 상자를 두 손으로 받쳐 내밀었다.심서준의 손끝이 잠시 멈췄다. 시선을 들어 상자를 보더니 조용히 받아 열었다.뚜껑을 여는 순간, 은은한 향이 스쳤다. 계연수의 몸에 배어 있던 그 향이었다.그는 고개를 숙여 두루마리를 펼쳤다.화폭이 드러나는 순간, 눈길이 잠시 멎었다.섬세한 공필(工筆). 궁중 화원이라 해도 쉽사리 흉내 내지 못할 솜씨였다.그의 시선은 곧 상자 위에 얹힌 편지로 옮겨졌다. 그림을 다시 말아 넣고 종이를 펼쳤다.글은 짧았다. 몇 줄 읽지 않아 마지막의 ‘진중’이라는 두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등불이 흔들렸다.그의 손끝이 서서히 힘을 주자 종이가 구겨졌다.심서준은 고개를 들어 문하를 바라보며 물었다.“그녀는 지금 어디에 있느냐?”문하는 그 엄숙한 눈빛에 움찔했다.“아가씨께서 오전에는 고씨 댁에 들르셨고 오후에는 어머님과 법화시로 가셨습니다. 비가 많이 내려 오늘은 절에 묵으신다 합니다.”심서준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그는 휘장을 젖히고 밖을 내다보았다. 어둠 속에서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요란한 빗소리 속에서 그는 한동안 말없이 밤을 응시했다.계연수가 떠난다.지금 자신의 마음이 무엇을 향하고 있는지 그는 또렷이

  • 주문춘귀   제355화

    떠날 즈음엔 이미 한낮이 훌쩍 지나 있었다.고씨 노부인은 계연수와 고씨가 절에 들러 기도를 올린다 하자 더 붙잡지 않았다.오후가 되자 잠시 하늘이 개었다. 모녀는 먼저 집에 들렀다가 그 뒤 법화시로 향했다.마차 안에서 계연수가 용춘에게 물었다.“그림은 전해 두었느냐?”용춘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걱정 마세요. 옆집 문간에 맡겨 두었습니다. 심 대인께서 돌아오시면 바로 전해 드리겠다고 했습니다.”계연수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고 더는 묻지 않았다.오늘 법화시는 한산한 편이었다.이들이 기도를 드리러 온 까닭은 단 하나, 앞길이 순탄하길, 이후의 삶이 무사하길 바라는 마음 때문이었다.계연수의 아버지는 평소 신불을 믿지 않았고 그녀 또한 크게 의지하는 편은 아니었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달랐다.불상 앞에 무릎을 꿇고 세 번 머리를 조아렸다. 내일 길이 막힘없이 이어지기를, 지난번처럼 뜻밖의 변고가 없기를, 도적이나 유랑 무리 없이 무사히 휘안현에 닿기를, 그곳에 가서도 지나치게 험난하지 않기를.기도를 마친 뒤에는 어머니와 함께 법사를 찾아가 관음부와 오뢰부를 하나씩 받아 몸에 지녔다. 고씨는 더 정성을 들이고 싶다며 절에서 저녁 공양까지 하고 가자고 했다.계연수는 어머니가 이런 것에 마음을 두는 걸 알았기에 순순히 따랐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식사를 할 때까지만 해도 가느다란 비였는데 공양을 마치고 나오자 하늘이 갑자기 어두워지며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한 것이다.이런 날씨로는 더는 길을 나설 수 없었다.결국 절에 하룻밤 묵고 이튿날 새벽 날이 밝으면 떠나기로 했다.*그 무렵, 심서준은 형부에서 막 나오는 길이었다.형부 대청 앞에 서자, 형부상서와 대리시경이 나란히 따라섰다.군호(軍戶)들의 횡령 사건이었다. 주부 동지와 결탁해 뇌물을 주고받았고 위진무사까지 얽혔다. 심지어 위지휘사도 연루되어 서로 책임을 미루며 물고 늘어졌다.금의군이 관련된 자들을 모두 압송해 경성으로 들여왔고 심문은 거의 끝나 있었다. 마지막 형량을

  • 주문춘귀   제133화

    용춘은 괜히 은자가 아까워 작게 속삭였다.“부인, 좀 아껴 써야 하지 않나요?”용춘은 화리 후의 삶은 지금보다 훨씬 더 어려워질 텐데 은자를 좀 더 모아두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계연수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나름 모아둔 게 좀 있으니 걱정하지 말렴.”그렇게 옷감 점포를 지나다가 둘은 사씨 저택의 둘째 부인과 며느리를 마주치게 되었다.마침 용춘은 점주를 시켜 구매한 옷감을 고씨 가문에 보내려 하고 있었다.이 점포의 옷감은 모두 값어치가 상당했으니, 경성에서도 손에 꼽히는 점포라 할 수 있었다.둘째 부인은 면사포

  • 주문춘귀   제137화

    사옥현이 떠난 후, 방안에 남은 계연수는 바닥에 쏟아진 조각난 자기 조각들을 내려다보았다.사옥현과의 3년은 지금 발아래 보이는 난장판과 다르지 않았다.밖에서 사옥현은 청렴하고 공정한 대리시의 관원이고 어린 나이에 능력을 인정받은 귀공자였다. 하지만 안채에서 그는 집안일을 상관하지 않고 지금처럼 모든 잡다한 일을 그녀에게 떠넘겼다.그는 언제든 귀찮으면 떠날 수 있고 그녀의 입장은 생각해 준 적 없었다.밖에서 들어온 용춘이 계연수의 발아래에 흩어진 파편들을 보고 다급히 다가왔다.계연수는 용춘을 달래준 후에 물었다.“물건들은

  • 주문춘귀   제130화

    그 순간 그녀는 도망치고 싶었다.계연수는 애써 감정을 추스르고 최대한 평온한 표정을 지었다.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미안함을 담아 말했다.“제게는 이것 말고는 가진 게 없습니다.”심서준은 조용히 그녀의 시선을 마주했다. 초승달처럼 가는 눈썹에 살짝 눈을 내리깔 은 모습은 마치 조용히 호수에 스민 달빛을 떠오르게 했다.밝은 햇살이 창문에 스며들어 그녀의 희고 고운 자태를 감쌌다. 심서준은 두 사람 사이에 놓인 책상이 넘어설 수 없는 담벼락처럼 느껴졌다.자꾸만 꿈속에서 그녀를 그리는 자신이 혐오스러웠다.그는 얼마든지 그녀에게

  • 주문춘귀   제134화

    처음 사씨 저택에 시집올 때, 고씨 노부인은 아무런 혼수도 마련할 수 없는 손녀가 시댁에서 잘 대접받기를 바라서 사씨 가문에서 보낸 예물을 모두 돌려보냈다. 그러니 계연수가 사씨 가문에서 받은 것은 없었다.저택에 돌아왔을 때는 붉은 노을이 하늘을 물들이고 있었다.뒤뜰의 각 처소들은 분주하게 움직이며 마당을 꾸미고 먼지를 쓸고 설명절에 쓸 물건들을 준비하느라 바쁘게 보내고 있었다.계연수는 마치 이 모든 것들이 자신과는 상관없다는 듯이 담담한 표정으로 그들을 스치고 지나갔다.그녀는 지난해 연말에 이들과 함께 분주하게 움직이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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