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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춘귀
주문춘귀
Author: 경옥

제1화

Author: 경옥
한겨울의 깊은 밤, 휘몰아치는 폭설 소리가 귀가를 스쳤고, 휘장이 바람에 날려 탁탁거리는 소리를 냈다.

계연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얼어붙은 손가락으로 휘날리는 휘장을 걷어내고 짙은 눈이 덮인 먼 곳을 바라보았다. 멀리서 다가오는 말발굽 소리가 눈보라 속에 섞여 선명하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똑똑히 들었다.

뒤에서는 가냘픈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수, 옥현 오라버니가 우릴 데리러 올까요?”

계연수는 휘장을 걷고 대답 없이 피곤한 듯 눈을 감았다.

그녀는 사옥현이 올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아무리 심한 눈보라라도 그는 올 것이었다.

오늘 그녀는 원래 이명유와 함께 온천 별장에 가고 싶지 않았지만 사옥현이 명유가 감기에 걸렸으니 사촌 형수로서 그녀도 명유를 돌봐야 한다고 해서 간 것이었다.

그는 차가운 말투로 말을 하더니 당연한 듯 모든 것을 준비했다.

다만 돌아올 때, 큰 눈이 길을 막았고 바퀴가 갈라져 마차가 도중에 갇힌 것이었다.

마부가 말을 타고 돌아가서 소식을 전한 지 거의 두 시진이 지났으니 이제 곧 올 것이었다.

멀리서 전해오는 말발굽 소리는 눈보라 치는 밤에 북소리처럼 울려 퍼졌고, 가까워질수록 더욱 초조해졌다.

마침내 말소리가 울리더니 마차 밖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명유야.”

곧이어 휘장이 젖히더니 길고 큰 손이 들어왔다.

계연수는 그 손을 내려다보며 분명 자신을 위해 온 것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이명유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물었다.

“옥현 오라버니, 왜 이제야 오신 겁니까?”

이명유는 부드러운 손을 사옥현의 손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너무 두려웠던 탓인지, 나비처럼 그의 품에 달려들어 흐느꼈다. 가늘게 흐느끼는 소리는 눈이 내리는 밤에 길고 따뜻한 봄 풍경처럼 사람들을 빠져들게 했다.

계연수는 묵묵히 이명유의 등에 놓인 길쭉한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그 손은 잠깐 멈칫하더니 다시 품에 안긴 사람을 꼭 껴안았다.

곧이어 두툼한 여우털 옷이 가녀리고 수려한 어깨에 걸쳐졌다.

계연수는 시선을 돌려 휘장을 바라보았다.

휘장은 눈바람에 펄럭였고 눈보라가 들어와 그녀의 뺨을 때렸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추위를 느낄 수 없었다.

그녀는 꽁꽁 얼어붙은 손가락을 소매로 깊숙이 집어넣었다.

이명유는 사옥현의 품에서 한참 동안 울다가 남자의 부드러운 위로 속에서 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그녀는 남자에게 안겨 마차에서 나갔다.

계연수는 밖에서 이명유가 흐느끼며 말하는 걸 들었다.

“형수도 마차 안에 있어요.”

남자의 대답은 눈보라 속에 묻혀 계연수는 듣지 못했지만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는 몸에 걸친 망토를 꽉 조이고, 마차 안의 바람에 흔들리는 등이 부서진 그림자를 드리우는 것을 바라보았다.

곧 휘장이 다시 열렸고, 고귀하고 차가운 얼굴이 그녀 앞에 나타나 오늘 밤의 첫마디를 했다.

“당신들을 데리러 오던 마차가 도중에 눈에 막혀 앞으로 갈 수가 없어서 먼저 말을 타고 온 거야. 명유가 원래 추위를 많이 타는 데다 이번 일로 크게 놀란 것 같아. 마차에 한 명 밖에 태울 수 없으니 명유 먼저 데려갈게. 조금만 더 기다리면 마차가 금방 올 거야.”

계연수는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아무것도 묻지 않고 대답했다.

“네.”

남자의 얼굴은 어둡고 흔들리는 등불 아래에서 미세한 변화가 생겼다. 그는 계연수의 평온한 얼굴을 바라보더니 그녀가 몸을 움츠리는 모습을 보며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계연수를 바라보며 한마디 설명했다.

“올 때 여우털 옷을 한 벌밖에 가져올 수 없었어. 넌 형수니까 명유에게 양보해.”

계연수는 그와 혼인을 하던 날부터 이런 말을 수도 없이 들었고, 그와 혼인을 하면 당연히 억울함을 당해야 하는 것 같았다.

예전 같으면 그녀는 이미 그에게 도대체 누가 당신 부인인지 따졌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사옥현은 더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보았다.

그는 한 마디도 해명하지 않고, 그녀가 억지 부리는 미치광이라도 된 것처럼 얼음 같은 눈빛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계연수는 따지는 것도 이미 지쳐버렸고, 따진다고 해도 그녀를 데리고 가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사옥현의 마음속에서 자신은 결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어서 가십시오. 명유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녀가 말을 마치자 사옥현은 미간을 찌푸리며 복잡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계연수는 할 말이 없어 눈을 감았다.

사옥현은 입술을 오므리고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계연수를 한 번 본 후, 휘장을 내렸다.

마차 밖에서는 곧 말발굽 소리가 났고, 소리는 점점 눈보라 속으로 사라졌다.

이때 옆에서 시녀 용춘의 걱정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나으리께서 부인을 혼자 여기에 두고 가다니, 정말 걱정이 안 되는 것일까요?”

계연수는 천천히 몸을 용춘의 어깨에 기대어 발 옆의 드문드문 불빛만 남아 있는 숯불을 바라보았다.

냉기를 한 모금 뱉은 후, 그녀는 뜻밖에도 이런 쓸쓸함이 싫지가 않았다.

그녀는 조용히 눈을 감고 말했다.

“용춘아, 나 좀 잘게.”

눈을 감는 순간, 그녀는 3년 전의 자신을 보았다.

그 해 초가을, 그녀는 사 씨 저택 앞에서 사옥현이 나타날 때까지 오랫동안 기다렸었다.

그녀는 두 사람의 혼서를 손에 꽉 쥐고 사 씨 저택으로 달려가 긴장한 마음을 억누르고 일부러 침착한 척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저는 계씨 집안의 딸입니다. 제가 여기에 온 이유는 혼약이 아직 유효한지 물어보려고 왔습니다.”

당시 그녀는 이미 성인이 되었고, 평생 가장 용감한 행동을 했다.

그녀는 긴장해서 손이 땀에 흠뻑 젖었고, 무슨 결과를 얻을 수 있을지 몰랐다.

그때 그녀의 아버지는 이미 감옥에 갇혔고, 계부는 수색당했으며, 예전에 방문객이 많던 계부는 엎친데 덮친 격이 되었다.

그녀와 어머니는 연루되지 않아 이미 몰락한 외주부에게 얹혀살고 있어서, 사옥현이 이 혼약을 깨려고 해도 아무도 그를 비난하지 않을 것이었다.

왜냐하면 지금은 예전과 같지 않고 인지상정이란 게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었다.

계연수도 그때 사옥현이 거절하면 그 자리에서 혼서를 찢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땐 사옥현이 경성에서 이미 약간의 명성을 얻었고, 젊은 나이에 벼슬을 따내 이름을 떨쳤다. 게다가 외모까지 준수했기 때문에 경성의 수많은 명문 여인들이 그와 혼인을 하고 싶어 했다.

그는 더 좋은 인연을 만날 수 있었다.

그녀는 심지어 그가 혼인을 거부하면 혼서를 찢어버리고 혼약을 없었던 일로 여기려고 했다.

하지만 사옥현은 입을 열어 승낙했다.

계연수는 그때 사옥현이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잊어버렸다. 다만 그의 목소리만 기억하고 있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그의 목소리는 약간 차가운 늦가을에 그녀에게 온기를 안겨주었다.

“부모의 명령이니 혼약은 당연히 지켜질 것이다. 조만간 어머니를 모셔와 혼인 날짜를 상의하도록 하지.”

그때 계연수는 평생 자신을 사랑해 줄 좋은 사람을 만났다고 생각했다.

그녀를 위해 기꺼이 도움을 준 사람이니, 분명 아버지와 어머니처럼 사이좋게 잘 지낼 것이라고 생각했다.

계연수는 자신에게 또다시 가정이 생긴 것 같았다.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그가 자신과 혼인을 하겠다고 한 이유는 명성 때문이었고, 그의 마음속에는 이미 사랑하는 여인이 있었다.

새하얀 겨울날, 그녀는 마치 꿈에서 깨어난 듯 멍하니 돌아서 실망스러운 눈과 마주쳤다.

“잘 보거라. 이게 바로 네가 선택한 부군이다.”

또 한 차례 살을 에는 듯한 찬바람이 두꺼운 휘장을 뚫고 들어와 꿈속의 사람을 깨웠다.

계연수는 눈을 번쩍 뜨고 이미 다 타버린 숯불을 바라보며 더 이상 얼어붙은 손으로 헤집을 힘이 없었다.

그녀는 열네 살이 되던 해에 감옥에 가서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아버지가 여전히 다정하게 그녀의 손을 잡고 했던 말이 생각났다.

“연수야, 울지 말거라. 이 세상에는 절대적인 옳고 그름이 없고, 절대적인 좋고 나쁨도 없단다. 그러니 관청의 부침도 오르락내리락하는 법이지. 영원히 이길 수 없듯이, 진 사람도 다시 살아날 희망이 있는 거란다. 과거를 잊고 앞으로 나아가거라.”

계연수는 휘장 밖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문득 깨달았다. 추운 겨울 속에서 영원히 멈춘 인연을 끝내야만 아버지가 말씀하신 대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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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문춘귀   제733화

    계연수는 그의 말을 듣는 내내 속이 울렁거렸다. 더는 오 관사의 얼굴조차 보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곁에 서 있던 방 어멈을 향해 말했다.“사람 몇 명 데리고 오 관사의 방을 샅샅이 뒤져 보거라. 그동안 얼마나 빼돌렸는지 전부 확인해.”그 말에 오 관사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파랗게 질렸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계연수를 바라보았다.늘 온화하고 부드럽기만 하던 둘째 부인이 정말 일을 끝까지 밀어붙일 줄은 생각도 못 했던 것이다.수색 결과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주방 하인들을 관리하는 이등 관사의 방에서 무려 삼천 냥에 가까운 은자가 쏟아져 나왔다.그의 한 달 녹봉이 고작 한 냥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얼마나 오랫동안 돈을 빼돌리고 아랫사람들을 쥐어짰는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았다.계연수는 오 관사를 한 번 바라본 뒤 몸을 일으켰다.그리고 곧장 심씨 노부인의 처소로 향했다.동시에 사람을 보내 백씨 역시 심씨 노부인 앞으로 오게 했다.이 일은 그녀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하지만 누구도 트집 잡을 수 없도록 처리해야 했다.오 관사는 본래 백씨가 직접 발탁해 키운 사람이었다. 그런 만큼 심씨 노부인 앞에서 백씨의 의견을 먼저 묻는 것은 집안의 화목을 생각해도 충분히 명분이 있는 일이었다.백씨는 방 안에 들어서자마자 무릎 꿇고 있는 오 관사를 발견했다.그 순간 얼굴빛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오 관사는 그녀가 주방에 심어 둔 가장 중요한 패였다.눈치도 빠르고 머리도 영민했으며, 맡은 일도 빈틈없이 처리했다.한때는 백씨가 주방을 장악하는 데 가장 큰 힘이 되어 준 사람이었다.물론 백씨 역시 그가 저지른 일들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아랫사람들에게 아무 이익도 주지 않으면서 충성을 바라기는 어려운 법이었다. 그래서 적당히 눈감아 주었다. 게다가 오 관사는 욕심은 많았지만 윗사람에게 챙겨 바칠 줄도 아는 사람이었다. 주방 관리를 넘긴 뒤에도 그는 알아서 찾아와 충성을 맹세했을 정도였다.계연수는 서두르지 않고 지금까지의 일을 하나씩 차근차근 설명했다

  • 주문춘귀   제732화

    계연수는 오 관사를 한 번 훑어본 뒤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사흘 전, 주방의 어린 하녀 하나가 찻쟁반을 깨뜨렸지. 그 일은 어떻게 처리했느냐?”오 관사는 순간 눈을 크게 떴다. 고작 그런 사소한 일까지 계연수가 알고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그렇다면 다른 일들은 또 얼마나 알고 있는 것일까.순간,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러내렸고 몸까지 움찔 떨렸다.원래 그런 자잘한 실수쯤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돈만 건네면 적당히 덮어 주었고, 눈치 있게 더 많이 바치는 사람은 자연히 감싸 주었다.그는 다급히 둘러대며 말했다.“소인이 곤장을 치게 했습니다.”계연수의 입가에 차가운 비웃음이 스쳤다.그 웃음에 오 관사의 심장은 더욱 조여 들었다.곧이어 계연수의 싸늘한 목소리가 떨어졌다.“아랫사람이 잘못을 저질렀다면 크고 작은 일을 막론하고 먼저 나에게 보고해야 한다. 처분은 내가 내리는 것이고.”그녀는 눈길을 내리깔며 말을 이었다.“너는 주방에서 오래 일한 사람인데 그것조차 잊었느냐.”잠시 뜸을 들인 뒤 덧붙였다.“아니면 관사 노릇을 더는 감당할 수 없는 것이냐?”오 관사의 등이 크게 들썩였다. 그는 황급히 머리를 조아렸다.“소인... 소인이 잠시 판단을 그르쳤습니다. 부인의 심기를 어지럽힐까 염려하여... 부디 이번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계연수는 냉랭한 눈빛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용서?”그 한마디에 오 관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오늘 묵은쌀과 햅쌀을 바꿔치기한 일은 보고했느냐? 그저께 주방에서 음식을 훔쳐 먹은 일은? 그리고 이틀 전, 불을 담당하던 취영을 배식 담당으로 바꿔 준 일은?”계연수의 시선이 서늘하게 내려앉았다.“그 아이가 얼마를 건넸느냐?”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오 관사 앞에 내던졌다.쨍그랑.깨지는 소리와 함께 차가운 음성이 방 안을 가득 메웠다.“누가 너에게 그런 배짱을 줬지?”오 관사는 온몸이 굳어 버렸다.계연수는 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

  • 주문춘귀   제731화

    심씨 노부인의 말을 들은 계연수는 순간 몸이 굳었다.그녀는 심씨 노부인의 얼굴을 가만히 살폈다. 농담으로 꺼낸 말은 아닌 듯했다. 저 표정이라면, 정말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계연수는 더 말을 보태 봐야 소용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싫다고 말한들 심씨 노부인의 뜻이 바뀔 리 없었다.심씨 노부인의 처소를 나선 뒤, 최씨가 어느새 곁으로 다가와 나란히 걸었다.최씨는 어제 본 연극이 재미있지 않았냐며, 다음에도 함께 보러 가자고 권했다.계연수는 속으로 난처한 웃음을 삼켰다.어제 공연 한 번 보러 갔다가 심서준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았던가. 또 나갔다가는 정말 얼굴빛이 솥바닥처럼 새까맣게 변할지도 몰랐다.게다가 최근 들어 두 사람 사이에 사소한 신경전도 몇 번 있었기에, 굳이 일을 더 만들고 싶지 않았다.“나중에 기회가 되면. 요즘은 주방 일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따로 시간을 내기가 어렵구나.”최씨는 아쉬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사실 그녀는 계연수와 몇 번 더 함께 외출하고 싶었다. 심정민에게도 오숙부가 오숙모를 어떻게 대하는지 직접 보여 주고 싶었던 것이다. 조정에서 보이는 냉정한 모습만 따라 하지 말고, 부인을 아끼고 챙기는 모습도 좀 배웠으면 했다.어젯밤, 그녀는 처음으로 부군의 품에 안겨 보았다.그 순간, 메말랐던 마음에 다시 온기가 스며드는 것 같았다.후원 생활이 답답하고 시어머니가 까다롭다고 해도, 부군이 제 편을 들어 주고 조금만 더 마음 써 준다면 충분히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다만 심정민의 어젯밤 행동은 어디까지나 심서준을 따라 한 것에 불과했다.만약 조금만 더 배운다면...하지만 최씨는 더 이상 권할 수는 없었다.대신 시간이 나면 꼭 자신의 처소에 들르라며 거듭 당부했다. 자신에게는 회임에 도움이 되는 비방도 있다고 덧붙였다.계연수는 회임 이야기만 나오면 괜히 도망치고 싶은 심정이 되곤 했다.아직은 아무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다.그저 때가 되면 오겠거니 생각할 뿐, 조급한 마음이 전혀

  • 주문춘귀   제730화

    심정민은 최씨의 말을 듣고 잠시 멍해졌다. 막상 반박하려 해도 쉽게 말이 나오지 않았다.사실 조금 전 보았던 장면은 심정민에게도 적잖은 충격이었다.도찰원에서의 오숙부는 누구나 인정하는 철면염라였고, 인정이라곤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는 사건을 꿰뚫어 보는 눈을 지녔고, 아무리 교묘한 수를 써도 그 앞에서는 숨길 수 없었다.심정민은 줄곧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냉정을 유지하는 사람, 모두에게 존경과 두려움을 동시에 받는 사람.그런데 그는 오숙부가 직접 여인을 안아 드는 모습을 보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조정에서 풍운을 뒤흔드는 사람이 바로 오숙부였다.후택의 일은 기껏해야 여인들 사이의 자질구레한 집안사일 뿐인데, 그런 일에까지 마음을 쓰다니.심정민은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갑자기 최씨를 번쩍 안아 들고는 저택으로 걸어갔다.최씨는 작게 비명을 질렀다.심정민이 갑자기 이런 행동을 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그녀는 얼떨결에 그의 목을 끌어안았고, 가슴은 사정없이 쿵쾅거렸다.*한편, 계연수는 심서준에게 안긴 채 침상으로 옮겨졌다.망토 아래 감춰진 몸은 이미 흐트러져 있었고, 희고 고운 피부는 등불 아래 은은한 빛을 머금고 있었다.당시 여인들은 대부분 가슴을 단단히 동여매었다.풍만한 체형일수록 더 심했고, 어린 시절부터 그렇게 하는 이도 적지 않았다.하지만 계연수는 답답한 것이 싫어 한 번도 그렇게 한 적이 없었다. 허리는 가늘었지만 풍성해야 할 곳은 충분히 풍성했다.심서준의 시선이 자연스레 그곳에 머물렀다.소년 시절에도 그는 무심한 척하면서 자꾸만 시선을 빼앗기곤 했다.그때는 처음 사랑을 알게 되던 시절이었다.빠져들면서도 스스로를 못마땅해했고, 마음을 억누르려 했다.지금에 와서야 깨달았다. 그때 조금만 자존심을 내려놓고 방법을 썼더라면, 계연수는 진작 자신의 사람이 되었을 것이라고. 그러면 사옥현이 끼어들 틈도 없었을 것이다.심서준은 계연수를 품에 안은

  • 주문춘귀   제729화

    예전의 그는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 생각했다. 계연수는 마땅히 자신을 사모해야 한다고. 그리고 그녀가 사랑할 수 있는 사람 역시 자신뿐이어야 한다고.설령 그녀가 자신을 두려워한다 해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자신보다 더 나은 사내는 만나지 못할 테니까.하지만 훗날에야 그는 깨달았다. 세상에는 수많은 사내가 있었고, 계연수에게는 자신 말고 다른 이를 선택할 권리도 있었다.그는 우습게도 그녀 앞에서 냉담한 척했고, 무심한 척했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속에는 이미 다른 사람이 자리하고 있었다.그때의 그는 그녀를 원망했다. 마음에 둔 사람이 있으면서 왜 자꾸만 자신의 곁으로 다가온 걸까? 그렇게 자신을 두려워하면서도 왜 자꾸 가까이하려는 걸까?계연수는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그로 하여금 스스로를 의심하게 만들었고, 심지어 열등감마저 품게 만들었다.그녀가 물에 빠진 뒤로 그는 수도 없이 그런 감정에 빠져들었다. 마치 진흙탕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살아남으려 몸부림치는 사람처럼.그리고 누구보다 선명하게 알고 있었다. 언젠가는 자신이 먼저 고개를 숙이게 되리라는 것을. 그리고 늘 계연수 앞에서만큼은 자존심을 놓지 않던 자신도, 언젠가는 더 이상 오만할 수 없게 되리라는 것을.어쩌면 그날이 오면 계연수의 눈에도 자신은 별다를 것 없는 사람이 될지 몰랐다.그녀를 사랑하는 평범한 사내이자 다른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존재.한때 그녀를 두려움에 떨게 했던 사람 역시 이미 그녀에게 완전히 빠져 버렸으니까.심서준은 눈을 감은 채 고개를 숙여 계연수의 입술에 살며시 입을 맞췄다. 그리고 가장 다정한 힘으로 그녀를 품 안에 단단히 끌어안았다. 마치 자신의 뜨거운 체온으로 그녀를 녹여 내기라도 하려는 듯.계연수 역시 그런 심서준의 다정함을 느낄 수 있었다.그에게서 이런 부드러움을 마주하는 일은 흔치 않았다.그녀는 조심스럽게 그를 받아들였다.이토록 부드럽고 다정한 온기는 사실 오래전부터 마음속 깊은 곳에서 바라던 것이기도 했다.그녀는 지금껏 누군가에게 애틋하게 보듬어지

  • 주문춘귀   제728화

    심서준이 그런 태도를 보이자 계연수 역시 한결 마음이 누그러졌다.그녀는 살며시 심서준의 어깨에 기대며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그럼 다음에 또 저한테 무섭게 구시면 어떻게 할 겁니까?”심서준은 손바닥으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되물었다.“네가 말해 보거라. 어떻게 하면 되겠느냐?”하지만 계연수는 막상 답을 떠올릴 수가 없었다.그녀가 심서준을 어찌할 수 있단 말인가. 심가는 그의 것이었고, 자신이 누리는 모든 것 역시 그의 것이었다.게다가 심서준의 마음은 늘 헤아리기 어렵지 않았던가.무엇이 그를 고개 숙이게 만들 수 있겠는가.그래서 그녀는 늘 이렇게 한발 물러서고 부드럽게 달래는 방법으로 그의 태도를 누그러뜨릴 뿐이었다.애초에 심서준에게 무언가를 해 보겠다는 생각도 한 적이 없었다.그녀는 그저 심서준과 잘 지내며 평생을 함께 살아가고 싶었다.계연수는 조용히 말했다.“생각해 보고 나중에 말씀드릴게요.”심서준은 눈을 내리깔았다.그는 계연수가 이런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었다.심서준은 그녀를 어깨에서 떼어 내어 자신과 마주 보게 했다.어스름한 마차 안에서 심서준은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아름다운 얼굴이었다.혼인한 뒤로 계연수는 언제나 무심한 듯 담담했다. 늘 평온했고, 세상사에 크게 연연하지 않는 사람처럼 보였다.그런데 지금은 달랐다. 그 얼굴 위에 아주 옅은 근심이 내려앉아 있었다.그 모습은 마치 소리 없이 내리는 비 같았다. 빗줄기는 너무 가늘어 몸을 적시지 못하지만 분명 비는 내리고 있었다. 아련하고 흐릿한 산안개가 사람을 감싸듯, 희미한 슬픔이 그녀를 둘러싸고 있었다.심서준은 계연수가 이런 감정을 드러내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가느다란 눈썹 아래 드리운 슬픔은 뚜렷하지 않았지만 이상하게도 사람의 마음을 흔들었다.그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가까이 기울였다.손끝으로 그녀의 턱을 들어 올리고 아래로 향한 눈길을 바라보았다.짙고 검은 눈동자와 살짝 올라간 눈꼬리. 눈 아래로 부서진 빛이 어른거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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