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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춘귀
주문춘귀
Author: 경옥

제1화

Author: 경옥
한겨울의 깊은 밤, 휘몰아치는 폭설 소리가 귀가를 스쳤고, 휘장이 바람에 날려 탁탁거리는 소리를 냈다.

계연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얼어붙은 손가락으로 휘날리는 휘장을 걷어내고 짙은 눈이 덮인 먼 곳을 바라보았다. 멀리서 다가오는 말발굽 소리가 눈보라 속에 섞여 선명하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똑똑히 들었다.

뒤에서는 가냘픈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수, 옥현 오라버니가 우릴 데리러 올까요?”

계연수는 휘장을 걷고 대답 없이 피곤한 듯 눈을 감았다.

그녀는 사옥현이 올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아무리 심한 눈보라라도 그는 올 것이었다.

오늘 그녀는 원래 이명유와 함께 온천 별장에 가고 싶지 않았지만 사옥현이 명유가 감기에 걸렸으니 사촌 형수로서 그녀도 명유를 돌봐야 한다고 해서 간 것이었다.

그는 차가운 말투로 말을 하더니 당연한 듯 모든 것을 준비했다.

다만 돌아올 때, 큰 눈이 길을 막았고 바퀴가 갈라져 마차가 도중에 갇힌 것이었다.

마부가 말을 타고 돌아가서 소식을 전한 지 거의 두 시진이 지났으니 이제 곧 올 것이었다.

멀리서 전해오는 말발굽 소리는 눈보라 치는 밤에 북소리처럼 울려 퍼졌고, 가까워질수록 더욱 초조해졌다.

마침내 말소리가 울리더니 마차 밖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명유야.”

곧이어 휘장이 젖히더니 길고 큰 손이 들어왔다.

계연수는 그 손을 내려다보며 분명 자신을 위해 온 것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이명유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물었다.

“옥현 오라버니, 왜 이제야 오신 겁니까?”

이명유는 부드러운 손을 사옥현의 손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너무 두려웠던 탓인지, 나비처럼 그의 품에 달려들어 흐느꼈다. 가늘게 흐느끼는 소리는 눈이 내리는 밤에 길고 따뜻한 봄 풍경처럼 사람들을 빠져들게 했다.

계연수는 묵묵히 이명유의 등에 놓인 길쭉한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그 손은 잠깐 멈칫하더니 다시 품에 안긴 사람을 꼭 껴안았다.

곧이어 두툼한 여우털 옷이 가녀리고 수려한 어깨에 걸쳐졌다.

계연수는 시선을 돌려 휘장을 바라보았다.

휘장은 눈바람에 펄럭였고 눈보라가 들어와 그녀의 뺨을 때렸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추위를 느낄 수 없었다.

그녀는 꽁꽁 얼어붙은 손가락을 소매로 깊숙이 집어넣었다.

이명유는 사옥현의 품에서 한참 동안 울다가 남자의 부드러운 위로 속에서 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그녀는 남자에게 안겨 마차에서 나갔다.

계연수는 밖에서 이명유가 흐느끼며 말하는 걸 들었다.

“형수도 마차 안에 있어요.”

남자의 대답은 눈보라 속에 묻혀 계연수는 듣지 못했지만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는 몸에 걸친 망토를 꽉 조이고, 마차 안의 바람에 흔들리는 등이 부서진 그림자를 드리우는 것을 바라보았다.

곧 휘장이 다시 열렸고, 고귀하고 차가운 얼굴이 그녀 앞에 나타나 오늘 밤의 첫마디를 했다.

“당신들을 데리러 오던 마차가 도중에 눈에 막혀 앞으로 갈 수가 없어서 먼저 말을 타고 온 거야. 명유가 원래 추위를 많이 타는 데다 이번 일로 크게 놀란 것 같아. 마차에 한 명 밖에 태울 수 없으니 명유 먼저 데려갈게. 조금만 더 기다리면 마차가 금방 올 거야.”

계연수는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아무것도 묻지 않고 대답했다.

“네.”

남자의 얼굴은 어둡고 흔들리는 등불 아래에서 미세한 변화가 생겼다. 그는 계연수의 평온한 얼굴을 바라보더니 그녀가 몸을 움츠리는 모습을 보며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계연수를 바라보며 한마디 설명했다.

“올 때 여우털 옷을 한 벌밖에 가져올 수 없었어. 넌 형수니까 명유에게 양보해.”

계연수는 그와 혼인을 하던 날부터 이런 말을 수도 없이 들었고, 그와 혼인을 하면 당연히 억울함을 당해야 하는 것 같았다.

예전 같으면 그녀는 이미 그에게 도대체 누가 당신 부인인지 따졌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사옥현은 더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보았다.

그는 한 마디도 해명하지 않고, 그녀가 억지 부리는 미치광이라도 된 것처럼 얼음 같은 눈빛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계연수는 따지는 것도 이미 지쳐버렸고, 따진다고 해도 그녀를 데리고 가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사옥현의 마음속에서 자신은 결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어서 가십시오. 명유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녀가 말을 마치자 사옥현은 미간을 찌푸리며 복잡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계연수는 할 말이 없어 눈을 감았다.

사옥현은 입술을 오므리고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계연수를 한 번 본 후, 휘장을 내렸다.

마차 밖에서는 곧 말발굽 소리가 났고, 소리는 점점 눈보라 속으로 사라졌다.

이때 옆에서 시녀 용춘의 걱정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나으리께서 부인을 혼자 여기에 두고 가다니, 정말 걱정이 안 되는 것일까요?”

계연수는 천천히 몸을 용춘의 어깨에 기대어 발 옆의 드문드문 불빛만 남아 있는 숯불을 바라보았다.

냉기를 한 모금 뱉은 후, 그녀는 뜻밖에도 이런 쓸쓸함이 싫지가 않았다.

그녀는 조용히 눈을 감고 말했다.

“용춘아, 나 좀 잘게.”

눈을 감는 순간, 그녀는 3년 전의 자신을 보았다.

그 해 초가을, 그녀는 사 씨 저택 앞에서 사옥현이 나타날 때까지 오랫동안 기다렸었다.

그녀는 두 사람의 혼서를 손에 꽉 쥐고 사 씨 저택으로 달려가 긴장한 마음을 억누르고 일부러 침착한 척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저는 계씨 집안의 딸입니다. 제가 여기에 온 이유는 혼약이 아직 유효한지 물어보려고 왔습니다.”

당시 그녀는 이미 성인이 되었고, 평생 가장 용감한 행동을 했다.

그녀는 긴장해서 손이 땀에 흠뻑 젖었고, 무슨 결과를 얻을 수 있을지 몰랐다.

그때 그녀의 아버지는 이미 감옥에 갇혔고, 계부는 수색당했으며, 예전에 방문객이 많던 계부는 엎친데 덮친 격이 되었다.

그녀와 어머니는 연루되지 않아 이미 몰락한 외주부에게 얹혀살고 있어서, 사옥현이 이 혼약을 깨려고 해도 아무도 그를 비난하지 않을 것이었다.

왜냐하면 지금은 예전과 같지 않고 인지상정이란 게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었다.

계연수도 그때 사옥현이 거절하면 그 자리에서 혼서를 찢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땐 사옥현이 경성에서 이미 약간의 명성을 얻었고, 젊은 나이에 벼슬을 따내 이름을 떨쳤다. 게다가 외모까지 준수했기 때문에 경성의 수많은 명문 여인들이 그와 혼인을 하고 싶어 했다.

그는 더 좋은 인연을 만날 수 있었다.

그녀는 심지어 그가 혼인을 거부하면 혼서를 찢어버리고 혼약을 없었던 일로 여기려고 했다.

하지만 사옥현은 입을 열어 승낙했다.

계연수는 그때 사옥현이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잊어버렸다. 다만 그의 목소리만 기억하고 있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그의 목소리는 약간 차가운 늦가을에 그녀에게 온기를 안겨주었다.

“부모의 명령이니 혼약은 당연히 지켜질 것이다. 조만간 어머니를 모셔와 혼인 날짜를 상의하도록 하지.”

그때 계연수는 평생 자신을 사랑해 줄 좋은 사람을 만났다고 생각했다.

그녀를 위해 기꺼이 도움을 준 사람이니, 분명 아버지와 어머니처럼 사이좋게 잘 지낼 것이라고 생각했다.

계연수는 자신에게 또다시 가정이 생긴 것 같았다.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그가 자신과 혼인을 하겠다고 한 이유는 명성 때문이었고, 그의 마음속에는 이미 사랑하는 여인이 있었다.

새하얀 겨울날, 그녀는 마치 꿈에서 깨어난 듯 멍하니 돌아서 실망스러운 눈과 마주쳤다.

“잘 보거라. 이게 바로 네가 선택한 부군이다.”

또 한 차례 살을 에는 듯한 찬바람이 두꺼운 휘장을 뚫고 들어와 꿈속의 사람을 깨웠다.

계연수는 눈을 번쩍 뜨고 이미 다 타버린 숯불을 바라보며 더 이상 얼어붙은 손으로 헤집을 힘이 없었다.

그녀는 열네 살이 되던 해에 감옥에 가서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아버지가 여전히 다정하게 그녀의 손을 잡고 했던 말이 생각났다.

“연수야, 울지 말거라. 이 세상에는 절대적인 옳고 그름이 없고, 절대적인 좋고 나쁨도 없단다. 그러니 관청의 부침도 오르락내리락하는 법이지. 영원히 이길 수 없듯이, 진 사람도 다시 살아날 희망이 있는 거란다. 과거를 잊고 앞으로 나아가거라.”

계연수는 휘장 밖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문득 깨달았다. 추운 겨울 속에서 영원히 멈춘 인연을 끝내야만 아버지가 말씀하신 대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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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문춘귀   제548화

    심서준이 계연수에게 발라준 것은 궁에서 쓰는 생기부용고였다. 흉터를 빠르게 가라앉히는 약이었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시간이 필요했다.손가락에는 모래에 긁힌 자잘한 상처들은 여전히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그는 고개를 숙인 채 묵묵히 바라보다가, 입술을 더욱 굳게 다물었다. 그의 마음 한편에는 지워지지 않는 미안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감정이 그를 더욱 팽팽하게 조여왔다.수많은 계산과 노력을 들여 겨우 맞이한 사람이었다.혼인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았는데, 그런 고통을 겪게 만들었다는 사실이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심서준은 말없이 그녀의 손가락을 어루만지다가, 다시 약을 가져와 조용히 상처 위에 발라주었다.계연수는 그의 손길을 바라보다가, 방금 전 용춘이 이미 약을 발라주었다는 말을 꺼내려 했다.하지만 고개를 떨군 그의 얼굴, 차갑게 가라앉은 눈빛과 어둠이 깃든 표정이 말문을 막아버렸다.그녀는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상처는 많지 않았다. 주로 무릎과 팔에 집중되어 있었다.심서준은 그녀의 다리를 들어 자신의 무릎 위에 올려놓고, 길고 단정한 손으로 천천히 치마 끝을 걷어 올렸다.계연수는 그 손을 가만히 바라보았다.촛불 아래에서 반짝이는 그 손은, 마치 무엇이든 해낼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그 손으로 날 선 상소문을 써내릴 수도 있었고, 화리서를 건네주기도 했으며, 기쁨을 안겨주기도 했다.그리고 지금은 이렇게 조심스럽게 그녀의 상처에 약을 바르고 있었다.차갑고 단단한 기운이 깃든 손이었지만 어느 순간에는 분명 따뜻함을 품고 있었다.이제 그녀는 이런 접촉에 더 이상 낯설어하지 않았다.마치 평범한 부부처럼, 서로 마음이 통해 맺어진 인연인 것처럼 느껴졌다.이익과 계산이 아닌, 그저 서로를 향한 마음으로 이어진 관계처럼.그때 문득 생각이 스쳤다.심서준은 어쩌면 좋은 부군이 될지도 모른다고. 다만 그의 얼굴에는 좀처럼 부드러운 기색이 드러나지 않아 그 속을 읽기는 여전히 어려웠다.무릎의 상처가 가장 깊었다. 딱지가 앉은 자국을 묵

  • 주문춘귀   제547화

    “그분은 재주가 뛰어나고, 품행도 단정해요. 그야말로 가장 곧고 바른 공자죠.”백씨의 시선이 조용히 심소연의 얼굴로 향했다.딸의 얼굴에는 이제 막 사랑을 알기 시작한 소녀 특유의 설렘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어느새 열넷이 된 나이. 이제는 혼사를 생각해야 할 때였다.하지만 후택에서의 남녀 정이라는 건, 본디 붙잡을 수 없는 것과도 같은 법이다.백씨는 담담한 목소리로, 딸의 그 막연한 동경을 조용히 깨뜨렸다.“소연아, 어머니 말 잘 들어라. 이 세상 남자는 다 거기서 거기다. 겉모습이 번듯할수록, 속은 더 믿기 어려운 법이지.”심소연은 고개를 들어 어머니를 바라보았다.아름답고 단정한 얼굴, 그리고 수년간 아버지와 늘 서로를 존중하며 지내온 모습. 그녀의 눈에 비친 부모는 언제나 사이좋은 부부였다.그런데 어째서 어머니는 이런 말을 하는 걸까.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한편, 계연수는 잠에서 깨어나자 용춘이 가져다준 거울을 받아 들었다.그제야 눈가가 살짝 부어 있다는 걸 알았다. 아침 내내 심서준이 유난히 그녀의 눈을 바라보던 이유를 그제야 깨달았다.몸은 아직 여기저기 쑤셨다.약을 먹고 나서, 그녀는 침상에 엎드린 채 용춘에게 약을 발라 달라고 했다.예전에는 흠 하나 없던 피부였는데, 지금은 팔꿈치와 무릎 곳곳에 멍이 들고, 손가락에는 잔 상처가 남아 있었다.옥처럼 고왔던 손이 어느새 미세한 금이 간 듯 흉이 져 있었다.용춘은 조심스럽게 손을 움직였다. 혹시라도 더 아프게 할까 봐, 손길 하나하나에 힘을 아꼈다.하지만 계연수는 이미 그런 공포와 고통을 겪고 난 뒤였다.이 정도의 통증쯤은 이제 별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이렇게 돌아올 수 있었다는 사실이 더 감사하게 느껴졌다.그녀의 시선이 문득 창가로 향했다.창틀 위에 놓인 금작약 화분이 봄바람 속에서 한창 곱게 피어 있었다.아마 궁에서 나올 때 미리 함께 보내졌던 것이리라.탐스럽게 피어난 꽃을 바라보자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졌다. 모든 게 이대로만 괜찮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 주문춘귀   제546화

    예전부터 심씨 노부인의 얼굴빛은 썩 좋지 않았다.도대체 계연수가 얼마나 귀한 몸이기에 아프다며 사람 하나 들여다보지도 못하게 한단 말인가. 그녀는 그저 계연수가 못마땅하기만 했다.거기에 백씨의 말까지 듣고 나니, 마음속에서 알 수 없는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결국 떠오른 건 단 두 글자였다.요물.예전의 심서준은 온통 공무에만 매달려 있었고, 집안일에는 좀처럼 마음을 두지 않았다.그랬던 그가 이제는 부인을 맞이하고 나서, 마음을 죄다 그쪽에 쏟아붓고 있었다.사람 하나 들여다보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는다니, 마치 이 집안에 누가 그의 부인을 해칠 사람이라도 있는 듯 굴지 않는가.부부 사이가 화목한 걸 싫어하는 건 아니었다. 다만, 심서준이 저렇게까지 부인을 아끼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정작 어미인 자신은 그만큼의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는 것 같아 속이 쓰릴 뿐이었다.그런 속내는 드러내지 않은 채, 그녀는 백씨를 향해 물었다.“들으니 너도 몸이 좀 안 좋다던데, 좀 나아졌느냐?”백씨는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노부인께서 염려해주신 덕에, 조금은 나아졌습니다.”심씨 노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여기 있지 말고, 너도 돌아가 쉬어라.”*백씨는 노부인의 처소에서 나오자마자, 일부러 내던 기침도 곧 멈추었다.방금 전 노부인의 표정 속에 담긴 생각이 무엇인지, 그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사람들은 집안이 화목해야 만사가 잘 풀린다 하지만 사람 마음에 사사로운 생각 하나쯤 없는 이가 어디 있겠는가.다섯째 도련님, 심서준은 예전에는 집안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누구에게도 마음을 주지 않았다. 심지어 심씨 노부인에게조차 크게 살갑게 굴지 않았던 사람이었다.그런 그가 이제는 새로 맞이한 부인에게 저토록 마음을 쏟고 있으니 노부인의 속이 편할 리가 없었다.백씨는 손톱을 만지작거리며 느릿하게 걸음을 옮겼다.노부인이 설마 친아들을 탓하겠는가.결국 화살은 계연수에게 향할 수밖에 없었다. 미색으로 집안을 어지럽히는 여자라는 식으로 말이다.백씨는

  • 주문춘귀   제545화

    심서준은 목욕을 마치고 나왔다. 형옥에 배어 있던 피비린내를 씻어낸 채, 천천히 내실로 걸음을 옮겼다.기척을 들은 용춘은 이미 눈치 있게 물러나 있었다.그는 침상 곁에 앉아 몸을 굽히고 계연수를 바라보았다. 반쯤 얼굴을 이불에 묻고 있는 모습을 보자, 손을 뻗어 살며시 이불을 걷어냈다. 손끝에 닿는 그녀의 뺨은 따뜻했다.사실 그의 가슴 깊은 곳에는 여전히 가라앉지 않은 울분이 남아 있었다.고준안이 벌인 일이었고 그는 끝내 계연수를 지켜내지 못했다. 그런데 이 와중에 심정우가 자신보다 먼저 그녀를 찾아냈다는 사실까지 떠오르자 그는 조용히 무너져내렸다.늘 모든 일을 손안에 쥐고 있던 자신이, 처음으로 모든 걸 완전히 지켜내지 못했다는 감각이 그를 조용히 짓누르고 있었다.그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닿았다가, 손끝으로 머리칼을 쓸어내리며 낮게 물었다.“잘 것이냐?”계연수는 가까이 다가온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문득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아무것도… 안 물어보십니까?”심서준의 검은 눈이 잠시 멈칫했다.“뭘 물어보길 바라는 것이냐?”계연수는 시선을 떨군 채 말이 없었다.정작 자신도 무엇을 바라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마음 한구석 어딘가에 남아 있는 불안. 혹시라도 그가 자신이 산적에게 납치되었던 일을 마음에 두고 있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심서준은 그녀의 속내를 단번에 꿰뚫어보듯, 더 생각할 틈도 주지 않고 말을 끊었다.“이번 일은 네 잘못이 아니다. 내가 조정에서 적을 너무 많이 만들어서 그래. 나와 혼인한 게… 네게는 괜한 고생을 안겨준 셈이지.”그 말에 계연수는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았다.가슴 깊은 곳이 살짝 건드려진 듯 흔들렸지만, 그녀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저는… 그렇게 생각해본 적 없어요.”심서준의 눈빛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그는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어깨를 움켜쥐고, 조용히 끌어안았다.*다음 날 아침, 계연수가 눈을 떴을 때 심서준은 이미 옷을 갖춰 입고 돌아오고 있었다.아직 잠기운이 남은 눈으로 그를

  • 주문춘귀   제544화

    문안은 후작이 아직 화가 풀렸는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지금 보기에, 아마도 아직 풀리지 않은 듯했다.돌아갈 때는 이미 한밤중이었다. 심서준은 행랑에 우두커니 선 채, 어두운 마당을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의 날카로운 이목구비는 그 어떤 숨김없이 굳어 있었다. 그의 그림자는 마치 유령처럼 어두운 밤 속에 어른거렸다.계연수는 악몽에 의해 잠에서 깨어났다. 눈을 떴을 때, 침상의 장막 속은 깜깜했다. 본능적으로 옆을 만져보았으나 옆은 텅 비어있어 차갑기만 했다. 갑자기 마음 속에 홀로 남겨진 듯한 두려움이 밀려오자 그녀는 얼른 일어나 두꺼운 장막 힘껏 걷어냈다. 어둠 속에서 촛불이 희미하게 방안을 비추었다. 그녀는 자신의 빠르게 뛰는 심장 소리만을 들을 수 있었다.그녀는 다시 한 번 방 안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뒤쪽의 병풍을 바라보며 두 번 불렀다.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마음이 더욱 초조해진 그녀는 급하게 밖으로 나가다 병풍 옆에 놓인 화분을 넘어뜨리고 말았다. 화분이 떨어지며 나는 시끄러운 소리가 고요한 정적을 깨뜨렸다.그때, 방 안으로 들어가던 심서준이 마침 그 장면을 목격했다. 계연수는 어지럽게 흩어진 물건들 사이에 멍하니 서 있었다. 심서준은 계연수의 맨발에 잠시 눈을 멈추고는 두 걸음 앞으로 다가가 그녀를 안아올려 침상으로 데려갔다.그의 가슴은 아직 밤의 서늘함을 품고 있었고, 계연수는 그 차가운 가슴에 얼굴을 대며, 다시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그가 입은 흰색 옷깃에 묻은 피를 봤다. 가벼운 피 냄새가 그녀의 코끝을 스치자 잠시 풀어졌던 마음에 다시 긴장감이 몰려와 그의 소매를 꼭 쥐었다. 그녀는 얼굴을 그에게 더 가까이 묻으며 조용히 물었다. “어디 가셨습니까? 제가 일어나서 사람을 부르려고 했는데 시녀가 없었어요.”심서준은 그녀를 침상에 눕히며, 여전히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 “시녀는 내가 돌아오자마자 내보냈다.”그러고는 부드럽게 그녀의 등을 두드렸다. “왜 깨어났느냐?”계연수는 여전히 그에게 꼭 붙어

  • 주문춘귀   제543화

    진강은 급히 고개를 들어 심서준의 차가운 눈길을 마주쳤다. 그의 눈빛은 수라처럼 차갑고 무자비하게 빛났다. 진강은 한때, 죽음이라도 각오하면 적어도 부인과 어머니에게 재산을 남길 수 있을 거라 여겼지만, 그 생각은 심서준의 차가운 눈빛 앞에서 완전히 무너져버렸다.그는 재빨리 용서를 구하며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그가 그날 도박장에서 돈을 잃었을 때, 주변엔 더 이상 그에게 은전을 빌려줄 사람이 없었다. 그때 갑자기 누군가가 나타나 이렇게 말했다. “돈 벌고 싶지 않느냐? 그냥 심서준의 마차가 궁에서 나간 뒤, 한 군데 가서 소식을 전하기만 하면 200냥을 줄 것이다.” 그 순간, 진강은 얼떨떨해져 아무 생각 없이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쉽게 돈을 얻을 수 있다니, 한 번도 보지 못한 큰 돈을 눈앞에 두고, 그는 그저 흥분해 그 사람의 얼굴도 제대로 보지 않았다.그는 당연히 그 일이 드러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일이 하루 만에 발각된 것을 보고 그는 그 충격을 견디지 못했다.심서준은 진강이 무릎을 꿇고 눈물로 용서를 빌며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불쾌감이 떠올랐다. 그는 천천히 일어나 손을 뒤로 하고 창문으로 걸어갔다.그의 뒤에서, 진강이 고백한 사람에 대해 수하가 계속 물어보는 소리가 들렸다. 심서준은 더 이상 자신이 나설 필요가 없다고 느껴 조용히 그 말을 듣고 있었다.도박장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고, 그 사람은 의도적으로 신분을 숨기고 있었다. 진강은 그 사람의 얼굴조차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다. 아마 그 사람은 이미 수도를 떠났을 것이다. 이 연결고리는 쉽게 찾을 수 없는 것이었다.계연수가 궁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알게 된 사람은 심서준의 집안 사람이 아니면 궁 안의 사람이었을 것이다.심서준의 집안 사람은 아니었으므로, 결국 궁 안 사람이라는 결론에 다다랐다.계연수가 궁에 들어간 그 며칠 동안, 많은 사람들이 궁에 출입했다. 계연수는 후궁에 머물고 있었고, 그녀를 만날 수 있었던 사람들은 그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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