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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춘귀
주문춘귀
Author: 경옥

제1화

Author: 경옥
한겨울의 깊은 밤, 휘몰아치는 폭설 소리가 귀가를 스쳤고, 휘장이 바람에 날려 탁탁거리는 소리를 냈다.

계연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얼어붙은 손가락으로 휘날리는 휘장을 걷어내고 짙은 눈이 덮인 먼 곳을 바라보았다. 멀리서 다가오는 말발굽 소리가 눈보라 속에 섞여 선명하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똑똑히 들었다.

뒤에서는 가냘픈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수, 옥현 오라버니가 우릴 데리러 올까요?”

계연수는 휘장을 걷고 대답 없이 피곤한 듯 눈을 감았다.

그녀는 사옥현이 올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아무리 심한 눈보라라도 그는 올 것이었다.

오늘 그녀는 원래 이명유와 함께 온천 별장에 가고 싶지 않았지만 사옥현이 명유가 감기에 걸렸으니 사촌 형수로서 그녀도 명유를 돌봐야 한다고 해서 간 것이었다.

그는 차가운 말투로 말을 하더니 당연한 듯 모든 것을 준비했다.

다만 돌아올 때, 큰 눈이 길을 막았고 바퀴가 갈라져 마차가 도중에 갇힌 것이었다.

마부가 말을 타고 돌아가서 소식을 전한 지 거의 두 시진이 지났으니 이제 곧 올 것이었다.

멀리서 전해오는 말발굽 소리는 눈보라 치는 밤에 북소리처럼 울려 퍼졌고, 가까워질수록 더욱 초조해졌다.

마침내 말소리가 울리더니 마차 밖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명유야.”

곧이어 휘장이 젖히더니 길고 큰 손이 들어왔다.

계연수는 그 손을 내려다보며 분명 자신을 위해 온 것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이명유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물었다.

“옥현 오라버니, 왜 이제야 오신 겁니까?”

이명유는 부드러운 손을 사옥현의 손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너무 두려웠던 탓인지, 나비처럼 그의 품에 달려들어 흐느꼈다. 가늘게 흐느끼는 소리는 눈이 내리는 밤에 길고 따뜻한 봄 풍경처럼 사람들을 빠져들게 했다.

계연수는 묵묵히 이명유의 등에 놓인 길쭉한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그 손은 잠깐 멈칫하더니 다시 품에 안긴 사람을 꼭 껴안았다.

곧이어 두툼한 여우털 옷이 가녀리고 수려한 어깨에 걸쳐졌다.

계연수는 시선을 돌려 휘장을 바라보았다.

휘장은 눈바람에 펄럭였고 눈보라가 들어와 그녀의 뺨을 때렸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추위를 느낄 수 없었다.

그녀는 꽁꽁 얼어붙은 손가락을 소매로 깊숙이 집어넣었다.

이명유는 사옥현의 품에서 한참 동안 울다가 남자의 부드러운 위로 속에서 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그녀는 남자에게 안겨 마차에서 나갔다.

계연수는 밖에서 이명유가 흐느끼며 말하는 걸 들었다.

“형수도 마차 안에 있어요.”

남자의 대답은 눈보라 속에 묻혀 계연수는 듣지 못했지만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는 몸에 걸친 망토를 꽉 조이고, 마차 안의 바람에 흔들리는 등이 부서진 그림자를 드리우는 것을 바라보았다.

곧 휘장이 다시 열렸고, 고귀하고 차가운 얼굴이 그녀 앞에 나타나 오늘 밤의 첫마디를 했다.

“당신들을 데리러 오던 마차가 도중에 눈에 막혀 앞으로 갈 수가 없어서 먼저 말을 타고 온 거야. 명유가 원래 추위를 많이 타는 데다 이번 일로 크게 놀란 것 같아. 마차에 한 명 밖에 태울 수 없으니 명유 먼저 데려갈게. 조금만 더 기다리면 마차가 금방 올 거야.”

계연수는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아무것도 묻지 않고 대답했다.

“네.”

남자의 얼굴은 어둡고 흔들리는 등불 아래에서 미세한 변화가 생겼다. 그는 계연수의 평온한 얼굴을 바라보더니 그녀가 몸을 움츠리는 모습을 보며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계연수를 바라보며 한마디 설명했다.

“올 때 여우털 옷을 한 벌밖에 가져올 수 없었어. 넌 형수니까 명유에게 양보해.”

계연수는 그와 혼인을 하던 날부터 이런 말을 수도 없이 들었고, 그와 혼인을 하면 당연히 억울함을 당해야 하는 것 같았다.

예전 같으면 그녀는 이미 그에게 도대체 누가 당신 부인인지 따졌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사옥현은 더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보았다.

그는 한 마디도 해명하지 않고, 그녀가 억지 부리는 미치광이라도 된 것처럼 얼음 같은 눈빛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계연수는 따지는 것도 이미 지쳐버렸고, 따진다고 해도 그녀를 데리고 가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사옥현의 마음속에서 자신은 결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어서 가십시오. 명유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녀가 말을 마치자 사옥현은 미간을 찌푸리며 복잡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계연수는 할 말이 없어 눈을 감았다.

사옥현은 입술을 오므리고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계연수를 한 번 본 후, 휘장을 내렸다.

마차 밖에서는 곧 말발굽 소리가 났고, 소리는 점점 눈보라 속으로 사라졌다.

이때 옆에서 시녀 용춘의 걱정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나으리께서 부인을 혼자 여기에 두고 가다니, 정말 걱정이 안 되는 것일까요?”

계연수는 천천히 몸을 용춘의 어깨에 기대어 발 옆의 드문드문 불빛만 남아 있는 숯불을 바라보았다.

냉기를 한 모금 뱉은 후, 그녀는 뜻밖에도 이런 쓸쓸함이 싫지가 않았다.

그녀는 조용히 눈을 감고 말했다.

“용춘아, 나 좀 잘게.”

눈을 감는 순간, 그녀는 3년 전의 자신을 보았다.

그 해 초가을, 그녀는 사 씨 저택 앞에서 사옥현이 나타날 때까지 오랫동안 기다렸었다.

그녀는 두 사람의 혼서를 손에 꽉 쥐고 사 씨 저택으로 달려가 긴장한 마음을 억누르고 일부러 침착한 척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저는 계씨 집안의 딸입니다. 제가 여기에 온 이유는 혼약이 아직 유효한지 물어보려고 왔습니다.”

당시 그녀는 이미 성인이 되었고, 평생 가장 용감한 행동을 했다.

그녀는 긴장해서 손이 땀에 흠뻑 젖었고, 무슨 결과를 얻을 수 있을지 몰랐다.

그때 그녀의 아버지는 이미 감옥에 갇혔고, 계부는 수색당했으며, 예전에 방문객이 많던 계부는 엎친데 덮친 격이 되었다.

그녀와 어머니는 연루되지 않아 이미 몰락한 외주부에게 얹혀살고 있어서, 사옥현이 이 혼약을 깨려고 해도 아무도 그를 비난하지 않을 것이었다.

왜냐하면 지금은 예전과 같지 않고 인지상정이란 게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었다.

계연수도 그때 사옥현이 거절하면 그 자리에서 혼서를 찢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땐 사옥현이 경성에서 이미 약간의 명성을 얻었고, 젊은 나이에 벼슬을 따내 이름을 떨쳤다. 게다가 외모까지 준수했기 때문에 경성의 수많은 명문 여인들이 그와 혼인을 하고 싶어 했다.

그는 더 좋은 인연을 만날 수 있었다.

그녀는 심지어 그가 혼인을 거부하면 혼서를 찢어버리고 혼약을 없었던 일로 여기려고 했다.

하지만 사옥현은 입을 열어 승낙했다.

계연수는 그때 사옥현이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잊어버렸다. 다만 그의 목소리만 기억하고 있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그의 목소리는 약간 차가운 늦가을에 그녀에게 온기를 안겨주었다.

“부모의 명령이니 혼약은 당연히 지켜질 것이다. 조만간 어머니를 모셔와 혼인 날짜를 상의하도록 하지.”

그때 계연수는 평생 자신을 사랑해 줄 좋은 사람을 만났다고 생각했다.

그녀를 위해 기꺼이 도움을 준 사람이니, 분명 아버지와 어머니처럼 사이좋게 잘 지낼 것이라고 생각했다.

계연수는 자신에게 또다시 가정이 생긴 것 같았다.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그가 자신과 혼인을 하겠다고 한 이유는 명성 때문이었고, 그의 마음속에는 이미 사랑하는 여인이 있었다.

새하얀 겨울날, 그녀는 마치 꿈에서 깨어난 듯 멍하니 돌아서 실망스러운 눈과 마주쳤다.

“잘 보거라. 이게 바로 네가 선택한 부군이다.”

또 한 차례 살을 에는 듯한 찬바람이 두꺼운 휘장을 뚫고 들어와 꿈속의 사람을 깨웠다.

계연수는 눈을 번쩍 뜨고 이미 다 타버린 숯불을 바라보며 더 이상 얼어붙은 손으로 헤집을 힘이 없었다.

그녀는 열네 살이 되던 해에 감옥에 가서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아버지가 여전히 다정하게 그녀의 손을 잡고 했던 말이 생각났다.

“연수야, 울지 말거라. 이 세상에는 절대적인 옳고 그름이 없고, 절대적인 좋고 나쁨도 없단다. 그러니 관청의 부침도 오르락내리락하는 법이지. 영원히 이길 수 없듯이, 진 사람도 다시 살아날 희망이 있는 거란다. 과거를 잊고 앞으로 나아가거라.”

계연수는 휘장 밖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문득 깨달았다. 추운 겨울 속에서 영원히 멈춘 인연을 끝내야만 아버지가 말씀하신 대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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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문춘귀   제355화

    떠날 즈음엔 이미 한낮이 훌쩍 지나 있었다.고씨 노부인은 계연수와 고씨가 절에 들러 기도를 올린다 하자 더 붙잡지 않았다.오후가 되자 잠시 하늘이 개었다. 모녀는 먼저 집에 들렀다가 그 뒤 법화시로 향했다.마차 안에서 계연수가 용춘에게 물었다.“그림은 전해 두었느냐?”용춘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걱정 마세요. 옆집 문간에 맡겨 두었습니다. 심 대인께서 돌아오시면 바로 전해 드리겠다고 했습니다.”계연수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고 더는 묻지 않았다.오늘 법화시는 한산한 편이었다.이들이 기도를 드리러 온 까닭은 단 하나, 앞길이 순탄하길, 이후의 삶이 무사하길 바라는 마음 때문이었다.계연수의 아버지는 평소 신불을 믿지 않았고 그녀 또한 크게 의지하는 편은 아니었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달랐다.불상 앞에 무릎을 꿇고 세 번 머리를 조아렸다. 내일 길이 막힘없이 이어지기를, 지난번처럼 뜻밖의 변고가 없기를, 도적이나 유랑 무리 없이 무사히 휘안현에 닿기를, 그곳에 가서도 지나치게 험난하지 않기를.기도를 마친 뒤에는 어머니와 함께 법사를 찾아가 관음부와 오뢰부를 하나씩 받아 몸에 지녔다. 고씨는 더 정성을 들이고 싶다며 절에서 저녁 공양까지 하고 가자고 했다.계연수는 어머니가 이런 것에 마음을 두는 걸 알았기에 순순히 따랐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식사를 할 때까지만 해도 가느다란 비였는데 공양을 마치고 나오자 하늘이 갑자기 어두워지며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한 것이다.이런 날씨로는 더는 길을 나설 수 없었다.결국 절에 하룻밤 묵고 이튿날 새벽 날이 밝으면 떠나기로 했다.*그 무렵, 심서준은 형부에서 막 나오는 길이었다.형부 대청 앞에 서자, 형부상서와 대리시경이 나란히 따라섰다.군호(軍戶)들의 횡령 사건이었다. 주부 동지와 결탁해 뇌물을 주고받았고 위진무사까지 얽혔다. 심지어 위지휘사도 연루되어 서로 책임을 미루며 물고 늘어졌다.금의군이 관련된 자들을 모두 압송해 경성으로 들여왔고 심문은 거의 끝나 있었다. 마지막 형량을

  • 주문춘귀   제354화

    상 위에는 향로와 불수 한 개가 놓여 있었고, 고준안이 가져왔으나 거의 손대지 않은 감말이 과자 한 접시도 그대로였다.향로에서 흰 연기가 가늘게 피어올랐다. 단정한 방 안에서 계연수는 옆에 놓인 난초 무늬 비단 장침에 손끝을 얹은 채 어머니와 내일 떠날 일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외할머니께는 굳이 미리 알리지 않고 휘안현에 도착한 뒤에야 전하자고 마음을 정했다.사금희를 마주친 일을 떠올리면 더 머물 이유도 없었다. 이곳의 인연과 얽힘을 하루라도 빨리 끊어내는 편이 나았다.말을 마친 뒤, 계연수는 어머니의 얼굴을 조심스레 올려다보았다. 아무 말 없이 떠나려는 까닭은 또 하나 있었다. 고준안에게 자신이 함께 휘안현으로 가길 바라지 않는다는 뜻을 분명히 전하고 싶어서였다.고씨는 딸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그 눈빛은 화리서를 건네며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하던 그날과 같았다. 이미 스스로의 길을 정해 놓았다는 듯, 고요하고도 단단한 기색.고씨는 알고 있었다. 계연수가 진심으로 고준안을 끌어들이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을, 짐이 되고 싶지 않은 마음이라는 것을.이제 딸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할 만큼 자라있었다. 어머니로서 자신이 할 일은 더는 딸의 발목을 붙잡지 않는 것이었다.다만 마음 한구석이 저릿했다. 아직 나이도 많지 않은 아이라 원래라면 평탄한 귀부인의 삶을 살았어야 마땅하거늘, 병약한 어머니를 데리고 낯선 땅으로 떠나야 한다니.고씨는 더이상 고준안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이미 딸은 선택을 끝냈으니 그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모녀는 이튿날 떠나기로 의논했다. 사씨 집안 사람들이 언제 다시 들이닥칠지 모르는 이상 서둘러야 했다.계연수는 이제 사씨와 어떤 식으로도 얽히고 싶지 않았다. 고씨 역시 동의했다. 화리한 이상 더는 왕래도, 인연도 필요 없었다.다만 고씨는 떠나기 전, 고씨 노부인을 한 번 더 뵙고 싶어 했다. 떠난다는 말은 하지 않더라도 말이다.계연수는 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려 출발을 하루 미루기로 했다.*밤이

  • 주문춘귀   제353화

    바깥채는 어둑했고 대문 아래 걸린 등롱 불빛은 안쪽까지 닿지 못했다.심서준은 온몸이 어둠 속에 잠긴 채 서 있었다. 계연수는 그의 얼굴을 또렷이 볼 수 없었지만 묘하게도 그가 기분이 좋지 않다는 기색은 느낄 수 있었다.그의 시선은 지금 자신을 향하고 있으리라.계연수는 잠시 멈칫하다가 다시 우산을 펴고 유리 등롱을 들고 그 앞으로 다가갔다.비는 실처럼 가늘게 흩어졌고 등롱의 불빛은 빗줄기에 잘게 부서졌다. 젖은 청석 바닥 위로 차가운 빛이 잔물결처럼 번졌지만 그의 표정은 여전히 선명히 보이지 않았다.두 걸음쯤 거리를 둔 채 그녀가 물었다.“심 대인, 이제 돌아가시려는 겁니까?”심서준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잠시 뒤, 검은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으며 물었다.“그 자는 당신 사촌입니까?”“네. 둘째 오라버니예요.”심서준이 한 걸음 더 다가서자 등롱의 부드러운 빛이 그녀의 얼굴 위로 내려앉았다. 주변에는 젖은 공기와 빗소리가 감돌았다.비에 젖은 은은한 향이 스쳤다. 우산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 속에서 그의 시선이 천천히 내려왔다. 눈빛은 어둡고도 알 수 없는 기색을 띠고 있었다.“너무 가까이 서 있던데.”그 한마디에 계연수가 미묘하게 굳자 심서준이 덧붙였다.“앞으로 밤에는 남자를 집에 들이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그제야 그녀는 그의 뜻을 짐작했다. 밤에 고준안과 함께 식사를 한 것이 경솔해 보였던 걸까, 아니면 소문이 돌까 염려한 것일까.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의 말이 아주 틀린 것도 아니었다. 화리한 사실은 이미 알 사람은 다 알 것이다. 고씨 집을 떠나 따로 살고 있는 지금, 밤에 사촌이라 해도 남자가 드나든다면 누군가의 입에 오르내릴 수도 있었다.계연수는 고개를 끄덕였다.“앞으로는 조심하겠습니다.”그녀의 눈빛은 진지했다.조금 전까지 고준안과 단둘이 서 있던 모습을 보고 긴장했던 심서준의 마음이 그녀의 한마디에 서서히 풀어졌다. 늘 차갑던 그의 눈매도 조금씩 부드러워졌다.가느다란 비바람에 그녀의 단정한 머리칼이 살짝 젖어 붉게

  • 주문춘귀   제352화

    심서준이 돌아서려는 순간, 계연수는 문득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밤늦게까지 와서 어머니의 약을 걱정해 주었는데 정작 자신은 그가 머물기 불편하다고 느끼게 만든 것만 같았다. 그 생각이 스치자 죄스러움이 밀려왔다.그녀는 무의식중에 손을 뻗어 그의 소매를 붙잡았다.“심 대인…”심서준의 걸음이 멈췄다.그의 시선이 조용히, 그녀가 붙든 소매 끝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아무 말 없이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계연수의 목소리는 밤빛 속에서 더욱 가늘게 흩어졌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얼른 손을 놓았다.“심 대인께서 괜찮으시다면요.”심서준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나지막하고 부드러운 음성이 가슴을 조여왔다. 방금 전, 그녀가 소매를 잡아당기던 그 짧은 순간, 심장이 또 한 번 급하게 뛰어오른 것을 그는 분명히 느꼈다.*식탁의 공기는 유난히 어색했다.작은 네모난 상에 네 사람이 한 자리씩 마주 앉았다. 올려진 반찬은 고작 세 가지. 숨조차 크게 쉴 수 없을 듯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오직 심서준의 얼굴만이 태연했다. 곁에 서 있던 문하조차 발끝이 오그라드는 듯한 표정이었다.계연수는 젓가락을 쥔 채, 흘끗 심서준을 바라보았다. 그가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이 자리가 어딘가 어울리지 않는 듯했다.어려서부터 귀한 집안에서 자라난 탓일까. 그의 몸에는 자연스레 배어 있는 품위가 있었다. 소박한 반찬 몇 가지와는 확연히 다른 세계의 사람처럼 보였다.고씨 또한 심서준을 자주 본 적은 없었다. 두세 번 마주친 것이 전부였고 그것도 이미 오래전 일이었다. 세월이 흐르니 이제 사람도, 세상도 달라져 있었다.그녀는 어딘가 긴장한 얼굴로, 음식이 입에 맞는지 몇 번이나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부족할까 싶어 부엌에 다시 음식을 내오라 할 기세였다.손님이긴 하나 심서준은 마치 이 집의 주인처럼 태연하게 앉아 있었다.“맛이 좋습니다.”그 한마디에 상에 둘러앉은 이들은 모두 저도 모르게 숨을 돌렸다.고준안은 간간이 심서준을 힐끗 바라보았다. 이런

  • 주문춘귀   제351화

    상 위에 막 차려진 음식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고 있었지만 계연수는 아직 한 젓가락도 들지 못했다.그때 용춘이 들어와 낮은 목소리로 심서준이 왔다고 전했다.계연수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이 시간에 심서준이 올 줄은 전혀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심 대인께서 무슨 일로?”용춘은 고개를 저으며 의미심장하게 눈을 찡긋했다.“아직 문밖에서 기다리고 계세요.”문밖에서… 기다린다고?계연수는 잠시 그 모습을 상상해 보려 했으나 잘 그려지지 않았다. 그가 자신을 찾으러 온 것이 분명하다 여겨 어머니와 고준안에게 먼저 식사하시라 말하고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대문 앞에 이르자 처마 아래 서 있는 심서준이 눈에 들어왔다.검은 옷을 입은 채 길게 뻗은 몸매로 조용히 서 있었다. 차분하면서도 서늘한 기품이 감돌았고 단정한 얼굴에는 깊은 정적이 내려앉아 있었다. 늘 사람을 압도하던 눈빛이 지금은 곧장 그녀를 향해 있었다.그는 빗줄기와 어우러져 한 폭의 냉담한 그림 같았다. 현색 옷자락이 밤빛과 겹치자 오히려 더 고귀해 보였다.계연수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빗소리에 묻혀 목소리가 한층 가늘어졌다.“심 대인께서… 저를 찾으신 건가요?”심서준은 그녀의 뒤편 멀찍이 서 있는 고준안을 한 번 흘끗 보았다. 그는 다가오지 않은 채,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었다.심서준은 다시 계연수의 얼굴로 시선을 옮겼다.언제부턴가 그녀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사라졌고 늘 그 앞에서 보이던 조심스러움이 다시 스며 있었다.그는 두 손을 등 뒤로 모은 채, 그녀의 어깨에 맺힌 가는 물기를 바라보았다. 손에는 우산이 들려 있었지만 빗물이 스며들었는지 옷깃과 머리칼 끝에 습기가 서려 있었다. 계연수가 물기 어린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심서준은 최대한 부드러운 어조로 낮게 물었다.“아침에 보낸 과자는 드셨습니까?”계연수는 잠시 놀랐다.이걸 묻기 위해 온 것일까?“네, 다 먹었습니다.”심서준은 다시 물었다.“어제 드린 약은 예전 것과 비교해 보면 어떻습니까? 효과가 있다면 더 보내드

  • 주문춘귀   제350화

    계연수는 그 일을 떠올렸다. 어릴 적 그녀는 유난히 먹을 것을 밝히는 아이였다. 많이 먹으면 항상 배를 잡고 앓아누웠기에 어머니는 밤에 더 먹지 못하게 하셨다. 그래서 배가 고프면 몰래 밖으로 나갔다.그날도 밤에 먹었던 얼음피 녹두떡이 생각나 부엌을 뒤지러 갔다가 하필이면 고준안에게 들키고 말았다.그 기억에 계연수는 저도 모르게 웃었다.“다 먹고 나니 온 집안이 우리를 찾느라 난리였죠. 오라버니께서는 큰 외숙부께 맞기까지 하셨잖아요.”고준안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아버지도 얼마나 놀라셨는지. 손바닥 스무 대를 맞았지. 손이 퉁퉁 부었었다. 그래도 덕분에 다음 날 새벽 글씨 연습은 면했지.”그가 그 일로 슬쩍 게으름을 피웠다는 사실에 계연수는 뜻밖이라는 듯 눈을 크게 뜨고 이내 입을 가리며 웃었다.웃음 끝이 한결 가벼워졌고 마음의 무게도 조금은 옅어졌다.고준안은 그녀의 웃는 얼굴을 바라보았다. 여섯, 일곱 살 무렵의 계연수는 아직 여물지 않은 눈 덩이처럼 동그랗고 통통한 아이였다.지금의 그녀는 달랐다. 어느새 많은 이들의 시선을 받는 여인이 되었다.사가에서 마음을 바꾼 것인지 오늘 오전에 찾아왔다. 그리고 심가의 그 인물까지.앞으로 또 누가 있을까?고준안은 입술을 가만히 다물었다. 차라리 하루라도 빨리 계연수와 이곳을 떠나고 싶었다.그가 바라던 공명 또한 결국 그녀를 위한 것이었다. 그녀가 없다면 공명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담 하나를 사이에 둔 맞은편 누각 위에서 심서준은 어두운 눈빛으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계연수가 고준안과 웃으며 이야기하는 모습. 두 사람이 나란히 서서 옷자락이 거의 스칠 듯 가까이 선 모습.고준안은 이곳을 드나드는 데 아무 거리낌이 없고 계연수 또한 그의 방문을 전혀 낯설어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자연스럽고 편안했으며 가벼웠다.반면 그는 언제나 다른 사람들의 눈을 통해서만 계연수를 볼 수 있었다.그 두 사람의 그림자가 점점 시야에서 멀어졌다. 먹빛 비가 무겁게 내리며 세상을 젖게 만들었고 빗물은

  • 주문춘귀   제75화

    계연수는 지금 당장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심서준이 그녀를 부른 이유가 설마 그 한마디를 묻기 위함이었을까?심서준의 시선이 슬쩍 그녀에게 머물렀다. 반쯤 걷힌 얇은 베일이 분홍빛 옷자락에 어리고 귀 옆의 녹빛 귀고리가 흔들리며 은근히 빛났다. 그녀에게서 풍겨 나오는 관능적인 온기가 점점 짙어졌고 그 사이로 갓 지은 부원자의 달콤한 향까지 섞여 들어왔다. 그의 목울대가 작게 움직였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감각이 다시금 치밀어 올랐다. 심서준은 고개를 떨구고 차갑게 가라앉은 시선을 그녀의 매끈한 치마 자락 아래 가

  • 주문춘귀   제74화

    그 대인이 누구인지 계연수가 모를 리는 없었다. 다만 이유를 알 수 없이 마음이 자꾸만 들떠서 심서준이 자신을 불러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괜히 여러 생각이 스쳤다.그녀는 안내를 따라 마차 앞으로 갔다. 굳게 내려진 휘장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어릴 적 그를 처음 마주했을 때처럼 가슴이 조여 왔다. 마차 밖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괜히 빨라졌다.계연수는 잠시 망설였다. 마차에 오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문하가 이미 휘장을 걷어 올리며 부드럽게 웃었다.“아가씨, 들어가시지요.”피할 수 없음을 알기에 계연수는 결국 마음을

  • 주문춘귀   제90화

    사실 그녀는 이미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마지막 남은 이성으로 심서준의 거처를 향해 걸어갔다. 심서준의 뜰은 심부 전체에서도 가장 고요한 곳이었다. 그는 늘 적막한 것을 좋아했기에, 다른 뜰의 하인들조차 별다른 일 없이는 그 근처로 다가가지 못하게 했다. 무엇보다도 그녀의 마음 깊은 곳에는 심서준에 대한 신뢰가 있었다.그는 고결한 인물이었다. 차갑고 냉담해 보일지언정, 비열한 짓을 저지를 사람은 아니었다. 그가 그녀를 외면한다 해도 해치지 않을 거라는 걸 그녀 또한 잘 알고 있었다. 적어도 심서준의 곁이라

  • 주문춘귀   제78화

    사옥현은 한 걸음 뒤로 휘청하며 물러서고는 그대로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계연수는 그가 밖에 남아 있는지, 이미 떠났는지 더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는 하던 일을 이어가며 하인에게 목욕할 물을 데우라 지시했다.이제는 그의 기분을 헤아리며 그가 무엇을 바라는지 되짚는 일조차 하지 않기로 했다. 이 모든 일은 본디 그녀의 잘못이 아니었기에, 사가의 모든 사람에게 맞추기 위해 그녀 스스로를 바꿀 필요도 없었다.다음 날 아침에도, 사옥현은 여전히 뜰 문 앞에 서 있었다. 피할 길이 없던 계연수는 결국 그의 앞을 지나갈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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